황산과 홍춘6 - 옛 마을 홍춘을 구경하고는 리시엔을 거쳐 다시 황산으로 되돌아오다.
10월 22일 황산풍경구 탕커우 黄山风景区 汤口 환청중씬 换乘中心 터미널에서 오전 10시에
리시엔 黟县(이현) 행 버스를 타고는 리시엔에 도착해 마을 버스 로 갈아타고 30분
만에 홍춘(宏村 굉촌) 마을에 내려 오른쪽으로 150미터쯤 걸어가니 연못과 마을이 나옵니다.
연꽃이 핀 연못 난후(南湖 남호)를 홍예교 다리로 건너가 南湖書院(남호서원) 을 보고
골목길을 빠져나가서는 둥글게 생긴 연못 원형 연못 月沼(월소) 에 도착해
옛 집들을 기웃거리며 구경하고는 솟을대문인 “汪氏宗祠(왕씨종사)” 를 구경합니다.
홍춘(宏村 굉촌)은 안휘성의 명나라 시대 전통 마을로 연못 月沼 (월소) 와 乐敍堂 (악서당) 사당
등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니 집들은 고풍스러운데 주윤발과 장쯔이
가 주연한 영화 와호장용 의촬영지 홍예교 다리가 있고 석양 무렵에는 더욱 아름답다고 합니다.
문방사우 의 고향으로 붓글씨 종이 화선지는 안휘성 선주의 것을 최고로 치고 묵도 안휘의 묵을
상품으로 알아주며 죽간에 글시 새긴 것이 기념이 된다고 하는데, 열두시에 가까운지라
정문으로 나가 대형 주차장으로 가서는 거기 버스 매표소에 황산 가는 버스를 물어 보는데....
황산 탕커우 汤口 행 버스는 없고 황산시 (툰시 屯溪 둔계) 와 황산 고속기차역 으로 가는 버스
가 있으니 거기서 다른 버스로 환승하라는데..... 황산시 툰시(둔계) 에서 탕커우 까지
1시간 20분 걸리니 그러기에는 비용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드는지라 리시엔 으로 가기로 합니다.
다시 정문으로 해서 호수로 들어가면서 좀 전에 샀던 표를 내보이고 줄달음쳐서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 후문 으로 나가 150미터를 더 달려서 신시가 도로변 에
도착하니 시내 버스 는 언제 올지도 모르고 택시도 보이지 않는 것이 난감하네요?
여기서 리시엔까지 버스로 30분이 걸리는데 황산행은 13시 30분 버스가 막차이니
12시 50분 에는 버스를 타야하는데 벌써 5분이나 더 지난 12시 55분 이라
이제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달려오는 삼륜차 가 있어 세워서는 올라타는데.....
그 와중에도 마눌은 40원 요금이 비싸다며 흥정을 하려고 하네요? 시내버스는 3원
이니 둘이면 6원인데 거기에 비해 40원은 너무 심한것 아니냐는.... 아니
막차 버스를 놓치면 황산시(툰시) 로 가서 다시 1시간 20분 버스 를 새로 타야하는데?
그럼 시간과 돈이 몇배 로 들어가는 것인데도 울 마눌은 당장 눈앞에 몇원만 보이는
것이라? 하지만 마눌의 "체면과 심기" 를 거스를수가 없으니...... 30원에
흥정을 하니 할아버지는 손님이 없었던 것인지 다행히도 승낙을 하고는 달립니다.
우리가 13시 30분 황산행 버스를 타야한다며 빨리 달리기를 부탁하니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데 시내버스가 오던 그 복잡한 도심 시가지로 들어가지 않고 외곽 을
달리는데....... 거리는 더 먼 것 같아도 차가 막히지 않으니 13시 20분에 도착합니다.
30원 요금을 내면서 마눌 몰래 팁이라며 5원을 더 쥐어주고는 터미널로 달려들어가서는
상점 아줌마에게 매표소 를 물으니 대뜸 어디 가느냐고 행선지 부터 되묻습니다.
그래서 황산 이라고 말하니 밖으로 나가 버스를 바로 타라는데 아마도 장거리만
버스표 를 팔고 단거리는 버스 기사 에게 직접 돈을 내는 시스템인
모양이라 생각하고는 13시 25분에 버스에 오르니 마눌이 반색을 하며 하는 말이...
저 운전수 아저씨 좀 전에 우리가 황산에서 타고왔던 버스 기사 라네요?
그럼 11시 10분에 도착하여 대기하다가 13시 30분 차를 모는건데 나는 긴가민가인데....
여자들은 이런점에서는 눈썰미 가 남자들 보다는 열배는 나은 것이라?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 달리다가 다시 어느 낯익은 마을에 서는데 보니 우리가
올때 15분간이나 정차했던 바로 그 전통 마을 시디 西递(서제) 이네요?
중국의 전통적 향촌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 마을로 봉건 시대에 번영했던
무역 경제를 기반으로 형성된 정착지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시디춘 西递村 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니 북쪽과 동쪽에서 흘러든 물줄기가 마을의
남쪽에 있는 회원교에서 만나며 경애당, 추모당 및 자사패루 등 공공건물이 있습니다.
이 건물들은 목골 구조에 벽돌 벽으로 지어져 있고 우아한 장식이 조각되어 있으며...
건물은 세개의 물줄기 를 따라 세워졋으니 전변계, 후변계, 금계라 불린다고 합니다.
“당(堂)” 이라는 이름이 붙은 웅장한 건물에는 광장이 딸려 있으며 외벽에는 보안상의
이유로 작게 만든 창문은 화강암에 조각된 꽃과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유명한 관광지인지 여행자들이 보이는데 단체로 자전거를 타는 학생도 여러명 보입니다.
그런데 유채꽃과 국화꽃 사이로 산자락에 보이는 저것은 아무래도 목화 같아 보이네요?
목화는 우리 어머니 말씀중에 왜정 당시 놋쇠로 만든 밥그릇이나 숟가락도 걷어가고
쌀이나 목화 공출 독촉이 얼마나 심하던지 마을사람들은 독에 넣어 땅에 파묻었다고 합니다.
일본 순사를 따라 다니는 조선인 밀정들 이 염탐해 쌀독을 파내고 또 밤에 불도 켜지않고
몰래 목화 씨앗을 빼낼라치면 저 조선인 밀정들이 왜놈 순사를 안내해 들이닥쳐
목화씨 발라내던 조선 여인들의 "손톱까지 뽑아버리는" 악질적인 짓도 서슴치 않았다네요?
1945년 8.15 해방이 되니 저 친일파 밀정 들은 지은죄가 있으니 살기위해 도망쳤는데 조선
에 진주한 미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력해 장준하, 김준엽등을 훈련시켰던
중국주둔 미군이 아니라 사전준비가 전혀 안된 조선정세에 어두운 태평양 주둔군 부대라....
미국은 당장 한국을 독립시켜줄 생각이 없었던지라 신탁통치를 하기로 하고는 중국 주둔군은 김구등
임시정부와 관계가 있으니 껄꺼러운지라 인정하지 않기 위해 주둔군은 전혀 관련없는 태평양
미군으로 바꾼 것인데... 당장 조선의 치안유지가 급선무가 되니 미군정 은 저들을 불러 순경
과 간부로 채용해서 방범과 치안을 맡겼고 이승만 정부 에서도 경찰서장등 출세 가도 를 달립니다.
국회에 반민특위 가 설치되어 친일 경찰서장 둘을 잡아들이자 저들은 백주대낮에 총을들고 반민특위
를 무력으로 해산시키니 친일파 청산은 무산 되고 저들은 영화를 누리는데.... 친일 경찰들이
떼를지어 법률기관을 습격했는데도 이승만 대통령은 조치를 취하지 않았지요? 물론 당시는
좌익과 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했으니 공산화될 위험 방지 에 자기 충성 세력을 보호할 생각이었습니다.
임종국씨의 연구에 따르면 이승만 정권 수립후에... 친일경찰 이 총감 1명중
1명, 관구장 8명중 5명, 도경 국장 10명중 8명, 총경 30명중 25명,
경감 139명중 104명에 경사 969명중 806명을 저들이 차지하였다고 합니다.
목화 는 아는바와 같이 고려말에 문익점 이 중국 원나라에서 붓통에 숨겨 들여온걸
재래면 이라고 하는데, 섬유가 짧아 방직원료로는 부적합합니다.
반면에 미국에서 개량된 육지면 은 섬유가 가늘고 길며 강하고 질겨 광택이 있습니다.
육지면은 1904년 목포 일본영사 와카마쓰 우사부로 가 고하도에서 시험재배한 것이 효시니,
고하도 는 1904년 국내 최초로 육지면이 재배된 발상지라는 의미와 함께 목포항 에
목화량이 급증해 목포시가 일제 시대 3대항 6대 도시로 명성을 떨치게 된 원인이 되었지요!
또 목포 고하도 는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 이 명량해전후 107일간 주둔하면서 일본군을
쫓아내기 위해 함선을 건조하고 병사를 훈련시켜 노량해전을 준비한 전략요충지인데
407년 후에는 일본인 후손 이 들어와 국내 최초로 육지면을 시험 재배한 “양날의 칼” 이라?
1597년 정유재란시 원균이 칠천량에서 패전하자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에 임명되어 9월 16일
명량 에서 13척으로 왜선 330척중 130여척을 맞아 31척을 격파하는 대승 을 거둡니다.
하지만 왜군은 300척의 전함이 남은지라 장군은 우수영에 들러지도 못하고 물러 나는데....
당일 멀리 신안군 당사도로 후퇴해 9월 21일에는 군산 고군산군도의 선유도 까지 물러납니다.
왜군은 명량해전 바로 다음날 다시 쳐들어와 우수영을 점령하고 진도, 목포를 거쳐
영광 까지 북상해 살육과 약탈, 방화를 저지른후 수많은 조선인들을 포로 로 붙잡아 갑니다.
*** 본문과 지도 날짜는 음력이며 왜군은 히데요시 명으로 10월 2일까지 남해안 왜성으로 철수함 ***
일본에 주자학을 전하게 되는 “간양록 (看羊錄)” 의 저자 강항(姜沆) 은 식솔 60명이 2척의
배에 나누어 탔다가 명량해전 승전 7일후 인 1597년 9월 23일 영광 에서 붙잡혔는데
무안항에 수백척 왜선 이 보이고 순천에 끌려가는 조선인 포로가 천명을 넘었다고 적었지요?
1592년 임진왜란은 조선을 점령할 생각이라 민간인 학살이 비교적 적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은
"하삼도 할양" 이 목적이라 울산에서 순천까지 해안에 28개 왜성 을 쌓고는 봄이면 출격해
충청, 전라, 경상도를 초토화시하 약탈과 살륙을 저지른 후 늦가을에는 남해안에 물러나 지킵니다.
해서 정유재란은 조선인들을 보이는대로 죽이고 코를 베어가니 교토 코무덤 이고 이후에는
포로로 끌고가니 그 수가 10만 에 달하는데 대부분 정유재란때 일어난 참상이지요.
이순신 장군이 후퇴한 전라도 해안은 지옥 으로 변했으니 참혹함은 말로 표현할수가 없네요?
왜군이 스스로 물러간 것을 확인한 이순신 장군은 10월 3일 군산 선유도 를 출발 법성포에서
앞 바다를 살핀다음 다시 우수영으로 돌아온 날은 후퇴한지 24일째인 10월 9일 이니...
난중일기 에 보면 수군영인 우수영성 안팎에 그 많던 백성들이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네요?
우수영 성에는 사람 사는 집도 없어 "인적이 끊어진지라 참담하기 이를데 없다" 고 적었는데
장군께서는 다음날 진을 신안군 안편도로 옮겨 머물다가 10월 29일 목포 고하도 에
들어가서 새로 집을 짓고는 1598년 2월 17일 강진 고금도 로 옮길때 까지 머무셨던 것이라!
목포 영사 와카마쓰 는 1903년 1년간 목포 고하도 기후조건 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맑음 264일, 구름 60일, 비 36일, 눈 6일로 육지면의 파종 부터
수확까지 기간인 5월∼10월까지 목포 지방의 정오 평균 기온이 21.7℃ 로 조사되었습니다.
면화 성장기인 7월은 27.8℃, 8월은 30.6℃, 9월은 29.4℃ 로 최적의 조건 을 갖춘 것으로
드러나자 와카마쓰는 기후· 토질 등 생육환경 면에서 고하도 가 목화 재배의 적지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일본 농무성으로 부터 미국종 면 종자 13종을 교부받아 목포에 살던
266세대 1045명의 일본인 중에 야마자키 도사부로 에게 위탁해 시험 재배에 성공하게 됩니다.
또 솥에다 바닷물을 부어넣고 장작으로 불을 때서 끓여만드는 조선 재래의 소금인 자염
(煮鹽) 이 너무 비싼걸 보고 와카마쓰 도사부로 는 고하도 등 목포 인근에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 만든 천일염 을 대량으로 보급하니..... 목포는 “삼백
(목화, 소금, 쌀) 의 도시” 가되었습니다만 문익점은 알아도 와카마쓰 는 모르네요?
첫댓글 선생님 덕분에 한국현대사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건강하십시오.
우리나라가 2월말까지만
중국인 입국제재를 한다니
그럼 중국도 한국인 입국에 대한
대부분의 제재를 풀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