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예술 2009 년 여름호에 발표된 글을 옮겨 봅니다 시조 작가로서의 체험적인 시조 이론과 함께 창작의 뒷얘기등 자작시에 대한 본인의 이야기를 써 달라는 청탁에 따라 평소에 갖고 있던 시조문학에 대한 나의 견해를 편안하고 솔직하게 기술 했다는 것을 사전에 밝혀둡니다 ---------------------------------------------------------------------------------- |
나의 체험적 시조 이론 /김문억
ㅁ 이런 질문
느닷없이 질문 하나 먼저 던지고 싶다.
그럼 왜 그토록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글에서 자생한 시조문학이 오늘 날 서점에 가도 시조 집을 찾을 수가 없고 교과서에서 모두 자취를 감추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체험적 시조 이론을 청탁 받은 내가 시조 옹호자들에게 던지고 싶은 강한 질문이면서 나의 화두이기도 하다
우연히 시조를 대하고부터 오직 시조 창작만 30 년 쯤 해온 현역 시조 작가가 던지는 가슴 아픈 질문이다
나처럼 시조를 좋아하고 평생을 시조 한가지만 써 왔고 앞으로도 계속 시조를 찬양하고 싶은 사람들은 잠시 동안만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시조 얼굴을 다시 살펴 볼 수 있는 질문이기를 바란다
이미 수 많은 세월 동안 이론적으로 또는 작품의 실증을 통해 밝혀진 시조문학에 대한 역사적 개요나 전통성에 대한 이야기는 새삼 여기서 더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곳곳에서 시조문학의 우월성이나 전통성을 찬양하는 글을 쓰고 있을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시조문학에 대한 찬반이나 당위성에 대한 논조는 자유시가 들어오면서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이어져 왔던 것이다.
지금도 시조 옹호론자는 시조야말로 우리 말에서 자생된 유구한 역사의 전통 문학으로......시작하여 결국은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문학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조작가 인구가 1 천 명이 훨씬 넘는다고 하는데 작가는 그렇게 늘어나고 있는지 모르지만 반대로 독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가정도 아니고 험담도 아니다 협회 세미나에서 띠를 두르고 농성이라도 해야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교과서에 수록 되지 않고 있는 것이 실증되고 있는 현실이며 실지로 수도 서울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대형 서점에서도 시조에 관한 서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나머지 전국에 있는 서점 실태는 얘기해서 무엇하랴.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이 시조를 모른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이 시조를 모르다니 천만의 말씀이다
얼마나 시조 책이 안 팔리면 작가가 시조집을 발간하면서 겉 표지에 시조집이라 하지 않고 그냥 시집이라고 쓰겠는가
ㅁ 그러면 왜 일반 독자들이 시조를 점점 안 읽게 되었는가
그 첫 째 이유를 시조문학이 안고 있는 몸 자체, 디.엔.에이에 있다고 감히 진단하고 싶다
즉 이는 전통문학으로서의 시조 우월성을 내 세우고 있는 반복된 리듬의 가락을 지적하고 싶다. 3.4 3.4 -3.4.3.4.- 3.5.4.3 이라고 하는 기본율에서 나오는 단순한 반복 리듬이 지금 사람들에게는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판단이다. 시조의 참 맛이 종장에서 휘감치는 가락의 반전에 있고 몇 자는 파격을 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어찌했든 시조 작품은 똑 같은 모양의 3 장 6 구 안에 들어 있다. 반복 리듬은 음악성을 갖지만 똑 같은 길이의 반복은 사람을 졸리게 한다. ' 자장자장 자장자장 우리 애기 잘도 잔다 ' 할머니 등에서 아이가 가장 빨리 잠들 수 있는 가락이 우리 말 4.4. 음보의 반복 리듬이다. 이는 작품 내용의 문학성을 따지기 이 전에 시조 의 몸체 정형이라고 하는 틀의 문제다. 그런데 우리는 시조문학이야말로 우리말에서 자생된 유구한 전통 문학이라면서 시조의 단수 만으로도 온세계 온우주를 다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라고 추켜 세웠다. 자유시는 서양에서 나중에 들어왔지만 시조는 자생된 역사를 갖는다고 한다 그래도 독자들은 우리의 외침을 잘 듣지 않는다. 시조를 얘기 하자니 자연히 자유시를 비유 관계로 세워 말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자유시가 서쪽에서 들어왔다고 해서 자유시를 영어나 불어로 쓰지는 않는다. 그 쪽에서도 유구한 역사의 자생된 우리 말로 시를 쓰고 운율이 숨 쉬는 음악이 있다. 지금은 그 운율마저 많이 일탈을 하고 있다면서 제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 한다.
'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
잘 정돈된 시는 모두 우리 가락이다. 읽기에 편하고 무리가 없다
시조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요 땅에서 솟구친것도 아니라면 그 당시에 그럼 시조는 왜 생겨났고 각광을 받았을까
물론 시조의 틀이 갖추어지기 이 전부터 이미 농요나 별곡같은 우리 말의 가락이 있었고 그것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전화轉化되어왔다.
성리학이 도래되는 조선 선비들에게는 갓 쓰고 도포자락 휘젓듯이 엄한 질서의 유교사상 틀 안에서 시조문학은 딱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군말이 필요치 않았고 간결하면서 삽상하고 완고하면서 튼튼해야 했다. . 응축과 생략으로 행간의 깊은 공간에서 뜻이 잘 전달 됐다. 그것이 공부를 많이 한 식자층 계열의 선비 문학 시조의 태생적 디.엔.에이다. 시조는 그렇게 고고하고 자존심 있는 문학이다. 지금 시조처럼 뜻 연결도 되지 않으면서 한 번 더 비틀어대지 않았다. 솔직히 자랑할만한 독특한 전통문학이다. 그리고 오래도록 사랑 받아 왔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아니라는 말은 희망이 있다는 뜻도 된다. 문학 뿐이겠는가. 세상 만물이 변하는 것에 뜻이 있고 진리가 있는 것인데 시조문학만 변하지 않고 어찌 독자만 탓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21 세기 정보화 시대다.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시 문학의 내용은 물론 구성까지 일반적인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한 작품을 접하고 있다. 언어와 언어 끼리의 다양한 충돌은 물론 동화나 시나리로 소설적 요인까지 산문화 되는 경향도 두드러지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화 시대 디지털 시대에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있는 오늘의 문학도들은 새로운 경험 속에서 미래를 추구하고 있다.
예술이나 다른 학문이나 심지어 경제 정치까지 규제 풀기를 경쟁적으로 하는 세상에 오직 시조문학은 규제 풀기를 주저하고 있다.
물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면 안 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럴만한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 오늘의 문학도는 고려시대에 태동하여 같은 모양으로 내려온 가락의 반복 리듬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 반복은 전수에 불과할 뿐 진정한 전통문학이라 하기 어렵다.
ㅁ그 둘 째 이유로 시조작가들이 책임 지어야 할 몫이 있다
시조의 현대성을 이야기 하면서도 막상 내 놓는 작품은 자연을 관조하거나 신변 일기 범주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 만사가 다 시적 대상일진대 독자들의 목마름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요구하고 기다렸지만 시조문학은 단조로운 리듬에다가
작품의 소재나 주제 의식이 너무 빈약했다. 오히려 고시조의 내용이나 멋을 따르지도 못 했다.
특히 지나친 관념과 일기풍으로 인하여 구체적인 소설이 결여되기 대문에 자유시에 비해서 재미가 떨어진다. 時調는 계절 느낌만 쓴 것이 아니고 時代 느낌도 써야 했는데 도무지 시조문학에서 지금껏 누가 당대의 고통을 작품으로 내 놓았는가. 돌이켜 보았을 때 이호우 외 몇 명을 빼고 보면 너무 빈약하다. 오히려 고시조에서는 당대의 흥망성세나 정치적 사회적 병리현상을 깊이 꿰뚫어 보면서 풍자한 시조 작품이 많이 있었다. 그런 시조문학이 오히려 현대로 너머오면서 일제 강점기 이 후 자유당 독재와 군사문화 속에서 백성들이 고통 받던 때 현대 시조는 무엇을 써 왔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특히 80 년대 군사독재 시절에 문인들을 탄압하고 언론의 입을 막던 어둠 속에서 우리 시조는 무엇을 쓰고 있었던가를 생각 해 본다.
필자가 처음 시조를 쓰던 80 년대만 해도 현역 작가들이 몇 명 되지 않는 빤한 숫자였지만 그래도 그 때는 경향 가지에 있는 신문사 마다 신춘문예에 시조 부문이 있었으며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교과서에 시조 작품이 고시조와 같이 현대시조도 수록 되어 있었다. 돌이켜 보면 1960 년대부터 80 년때까지는 시조문학이 많이 융성했고 역량있는 작가도 많이 배출됐다. 그 후부터 서서히 시조 작품이 인쇄 매체에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문예지에서는 뒷 편에 수록되는 푸대접을 받아왔다. 국정 교과서가 검인정으로 바뀌면서 교과서도 다양해지고 선택의 폭도 넓어지고 있을 대 우리 시조는 편가르기 줄세우기로 도끼 날 썩는 줄 모랐던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라고 하는 질문을 지금 우리는 자신에게 던져 보면서 시조 작가가 지어야 할 책임이 있다면 아픈 마음으로 끌어 안고 용기있게 고백해야 한다.
근대에서 현대로 너머 오는 과정의 시조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국시조시인협회가 창립되기까지 불과 몇 명 안 되는 선배들이 알뜰 살뜰하게 시조문학 살림살이를 잘 해 왔던 것으로 드러난다 어찌했든 시조 부흥을 위한 노력과 함께 무엇보다 시조시인들의 끈끈한 인적 인프라가 매우 희망적이었다. 예술을 하는 별난 성격의 개성들이 집합을 한다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도 유별나게 시조시인들만큼은 3 장 6 구 만큼이나 잘 뭉쳐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거기까지였다. 80 년대로 들어 시조 작가 숫자가 늘어 나면서 몇몇 사람에 의해 노골적인 정치 파벌이 벌어지고 문단 새내기들은 뜻도 잘 모르면서 줄서기를 하기 시작 했다. 그러다 보니 뜻 있는 사람이나 작품이나 쓰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뒷전이 됐다. 발전하고 좋아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따뜻한 가슴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시조 작품이 변하기 이전에 단체가 먼저 변해버렸다. 불과 몇 명 안 되는 사람들이 벌리는 시조 문단 삼국지 였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게 큰 재앙으로 지금에 와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늘 말하는 우스개 소리로 슥(3)줄 짜리 시조 쓰면서 뻐기는 사람이 너무 많이 나왔다. 처음부터 시조 쓸 뜻은 별로 없이 상금만 똑 따 먹고 돌아서는 것도 같고 시조를 평생 열심히 쓰는 사람 보다는 시조는 별반 쓰지 않으면서 시조문단 정치를 주도하는 사람도 있다. 협회가 동강 나면서 무슨무슨 단체들이 또 생겨나고 지방은 지방대로 중앙을 외면하게 되었다. 문인이란 이름으로는 이해가 되지않는 파벌 싸움을 보면서 지방에 계신 시조작가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는 간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다. 당면하고 있는 시조문학의 열악한 입장에서 보더라도 중앙에서 활동한다는 일이 그 사람이 훌륭해서가 아니고 우리나라 여건상 풍토상 중앙 무대를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좋게 생각하면 각 지방마다 자유롭게 동인 활동이 활성화 되고 문학회가 융성하면 좋은 작품도 나오고 작가층도 두터울 것같겠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모든 행정이나 문학 단체 문학 활동의 무대등이 중앙으로 집중 되어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다. . 다른 장르에 비교하여 더 뭉치고 친목을 해야 할 입장에 있는 시조문학이 이렇게 가당치도 않은 파벌로 풍비박산이 되고만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시조문학을 초래한 결정적 원이이 된다. 너무 욕심이 앞서는 것같다. 그렇게 해서 어찌했다는 것인가.
역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심사평 속에는 자국의 전통 속에서 얻은 문예성을 높이 평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시조문학은 그런 이유로 세계의 눈을 끌어 들일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부지런히 힘을 합쳐서 영문 번역도 하고 노벨 문학상도 시조 장르에서 받야겠는데 자국의 문인들에게마저 따돌림을 당하면서 엉뚱한 일을 벌리고 있다
시조 한 수로 역사의 흥망성세를 알고 시조 한 수로 왜적과 싸우는 장수의 고독을 느끼면서 이어 내려 온 전통이 우리 당대에서 우리에 의해 위기에 처해있다. 자업자득이다.
뿐만 아니다. 작품을 좀 쓴다고 하는 사람들끼리 차별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작품이 좀 모자라기로서니 같이 어우러지며 격려도 하고 용기도 주고 밥도 먹고 술도 치면 종당에는 시조문학이 튼튼해지고 괄시를 받지 않을 것인데 그런 풍토로 시조는 줄어들고 작가만 늘어가고 있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글 쓰기가 반드시 책상머리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문학 발전에 목적을 둔 집합체는 매우 중요한 창작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좋은 글은 세월과 더불어 역사 속에 남을 뿐이며 전 국민이 시조를 썼다면 시조 천국이 될 뿐이다. 그 때는 진정으로 시조문학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학이 될 것이다
다른 전통 예술에 비해서 지나치게 서자취급 받아왔던 정통 시조문학이 더욱 뭉쳐야 힘이 생기고 무엇을 이룰 수가 있겠는데 이는 정 반대로만 달아나는 격이었다. 어차피 창작 활동은 외롭고 즐거운 중에 혼자서 하는 고독한 작업이다. 파벌을 만들고 줄서기 운동을 해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어찌해야 좋을꼬!!!
오호 통재라!!!
ㅁ 시조문학의 전망
시조는 단 수다
시조의 정수定數는 단수에 있고 단수가 갖는 뜻의 정수精髓도 촌철살인 하는 단수의 맛에 있다. 그래야만 읽고난 훗 맛이 뇌리에 오래 남는다. 감동이다. 일단은 단수를 넘어 연작으로 읽게되면 아무래도 응축하는 힘이 흩어지게 되므로 훗맛의 향기가 떨어지기 쉽다 뿐만 아니라 시조를 읽을 때마다 똑 같은 리듬의 반복을 만난다는 일은 읽는 재미를 떨어뜨린다. 우리가 지금껏 고시조의 명작품은 많이 외고 있지만 현대시조의 명작은 잘 외지 못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시조는 가락이고 창이었다 잔치 집에서 흥이 도도하면 한 수 읖조리고 화답했던 詩歌였다. 단수면 족했다. 더구나 이것이 창으로 불러지던 시절에는 단수도 길고 긴 노래말이었다. 그런가하면 우리의 깊은 정한이나 나라에 대한 충성도 단수 하나면 족했다.
시조문학이 태동하면서 나온 단심가나 하여가를 놓고 보아도 참으로 멋스런 작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다.
동서 고금에 국가적 혁명을 앞두고 상대방의 의중을 타진하기위한 수단으로 시를 써서 보내고 받아 보는 경우가 있었을까
사람이 죽고 사는 일까지 시를 써서 표현하는 나라가 있었을가 싶다.
이 역시 단수 시조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잘 전해지고 있다고 하고 싶다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시조문학이 발전하려면 시조의 본령인 단수 짓기를 육성하고 보급하여 국민 누구나 지을 수 있는 <국민시>로 발전 시켜야 한다. 가끔 심심치 않게 3 행 시 짓기 놀이 하는 것을 보면서 아차! 저것을 시조 짓기 운동으로만 발전 시킨다면 너무 좋겠네!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어차피 시조 단수는 3 행 시다. 그렇게 보급하면 시조문학의 정수인 단수 짓기에서 고시조 같은 좋은 작품이 나올 것이다.
사설시조를 발전 시켜야 한다
뭉쳐있는 시조문학을 풀자면 사설시조라고 하는 보다 더 크고 넉넉한 그릇을 택해야 할 것이다 팔리지 않는 음식을 맛 있다고 우길 것이 아니라 사설시조는 이미 시조 메뉴판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소비자에게 권해서 확대 발전시키기에 무리가 없다 같은 4.4 음보의 반복 리듬이라고 하지만 사설을 엮다 보면 엇박자의 충돌로 효과를 극대화 하는 경우도 있다. 사설의 특성이 갖는 빠른 말 걸음과 풍자 해학이 곁들어지는 무대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읽는 재미도 탁월하다. 평시조가 진양조라면 사설시조는 자진모리 휘모리다. 맥 빠진 날장고 소리 보다는 사물 놀이를 좋아하는 것도 증명 되고 있다. 넌출거리는 음악과 함께 춤사위까지 유발되는 가락의 정수다. 민요로 비유하면 정선 아라리 중에서도 엮음 아라리요 서양 음악과 비유한다면 강열하게 반복되는 리듬으로 엮는 <랩 뮤직>이다. 우리는 이미 조선 시대부터 문학적으로 음악적으로 랩 뮤직이 있었지만 외면당해 왔다.
또한 여러가지 종류의 기계체조 운동 종목에 비유가 된다면 사설시조는 평행봉도 아니요 철봉 뜀틀 암마 경기도 아니요 넓은 마루에서 마음껏 모든 묘기를 종합적으로 보일 수 있는 마루 운동에 속한다. 그만큼 펀하고 넉넉한 형식이다.
요즈음 노동시다 참여시다 하면서 새삼스럽게 시사적인 작품을 논하고 있지만 실은 자유시가 도입되기 이전부터 이미 사설시조가 그 부분을 아주 멋지게 담당하고 있었다. 이 역시 옛 사람들이 즐겼던 사설시조에서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사설시조는 표출하고 싶은 작품의 주제에 따라 그 내용을 담는 구성이 정해질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작품의 길이와 관계되는 일로 이 또한 자유스럽게 놔 두면 오히려 다양한 모양의 사설 시조 작품이 나올 것이다. 짧은 사설도 나올 수 있고 사설의 연작도 나올 수 있고 서사적인 장대한 판소리 사설도 나올 수 있다. 시조문학의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한다. 구태어 사설시조도 길이를 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필요하겠는가. 길고 짧아야 할 이유 역시 작가의 몫이기 때문이다
ㅁ나의 대표작
한해旱害소식
하지가 지나도록 비가 오지 않는구나
조석으로 서슬 퍼런 바람만 불어 올 뿐 밤새워 물꼬를 찾다 보면 텅텅 빈 마을 서편으로 새빨간 하연달이 기운단다
나락은 까불러서 쭉정이를 골라냈고 낫 날은 무디지않게 날 세워 두었지만 조상만대 혼이 묻힌 조선 논배미가 금쩍쩍 갈라져도 소리 한 번 못 지른다
모내기만 끝내면 올 농사도 풍년이라고 목표 달성 재촉하며 큰 소리 땅땅 치지만
하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우리 농군들을 쉴새 없이 몰아치며 들들볶아대지만
번번이
빗나가는 일기 예보가 야속키만 하구나.
- 한해旱害소식-전문
첫 시집 <문틈으로 비친 오후> 첫 장에 올라있는 사설 시조를 약간 중략 했다.
발표한 작품마다 모두 아프고 몸살나는 살붙이라서 딱히 어느 작품을 뽑아서 대표작이라고 하기가 어렵다 그냥 첫 시집 첫 장에 있는 작품 먼저 올려 본다. 오래 묵은 작품이다.
난 처음부터 무작정 시조만 썼다. 시조 쓰기를 시작한 후로는 어느 다른 장르의 글은 쓰지 않았다. 솔직히 말을 하면 ' 문학반에서는 글 잘쓰는 사람이 최고다' ' 모든 문학의 평가는 작가가 죽은 후에 후대에 의해서 평가 되어야 진정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라고 하는 옹고집으로 들어 앉아서 시조만 써 왔다. 지금 생각하면 좀 미련한 짓을 한것 같다. 기왕에 시작한 학문이니 글쟁이의 천민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던 자존심 때문이다.
뒤늦은 나이에 주책맞게 시조문학에 입문을 했다. 굴러 다니는 중앙일보 찢어진 신문 조각에서 우연히 눈길에 들어온 <중앙시조> 공부방이 처음부터 나를 홀랑 빠지게 만들었다. 참말로 재미있고 흥이 났다. 솔직히 시조문학이 그렇게 인기가 없는 줄은 내가 시조에 푹 빠진 뒤에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시조를 포기하기 보다는 오기가 성하기 시작 했다. 시를 오기로 쓰는 일도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시조를 안 읽고 있는 풍토에서 그런 오기는 반사적으로 나를 사로잡았고 흥미를 유발 시켰다. 문제가 있는 장르라면 문제를 안고 도전 해 보자는 심산이었고 즐기면서 들어갔다.
팔십 년대 이전부터 작품 활동을 해 왔다면 살벌한 군사 독재 시절에 이런 작품을 과감하게 쓰지 못 했을지도 모른다
마침 나는 등단과 동시에 군사문화를 맞이하면서 물결치는 역사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고 현실을 외면하면 글쟁이로서의 직무유기라는 강박관념으로 꽉 차 있었다. 붓은 칼보다 강하고 정의로워야 한다는 신념 뿐이었다. 붓을 들고 있는한 참으로 순수했다. 배운대로 행동하는 것 밖에는 달리 요량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꼿꼿한 끝이 휘어질 줄 몰라 얻은 것이 없다. 부딪쳐 온 현실을 거역하지 못하고 노동의 현장에서 체험적으로 쓴 작품이 첫 시집 <문틈으로 비친 오후>였다.
습작기에 너무 빨리 문단의 속성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도 나의 작품 활동에 큰 전기를 만들어 주었고 태생적으로 野姓의 피가 흘렀던지 출세같은 것은 초개처럼 버릴 수가 있었다. 당돌하고 시건방졌지만 정직하고 눈물 많은 감정이 내 흠을 덮어 주었다
시조가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참으로 용감했다는 부끄럼이 앞선다
지금 보면 시조같지 않은 억센 구호들이지만 문단 옹챙이가 뭘 안다고 구둣발 정치의 살벌한 시국을 향해 호랭이 물어갈 소리를 내질렀다. 당시의 시조문학 풍토에서는 패기만만한 도전이었다. 그 뒤로 몇 권의 시집을 더 찍은 적 있지만 그 때같이 조마조마 하면서 희열을 느낀 적은 없다. 출판사에 가기 전에는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며 떨리는 맘을 달랬고 출판이 된 후에도 얼마 동안은 좀 불안했다. 지금도 많은 선배 시인들이 격려해준 답신 편지를 갖고 있다
삼청 교육대를 졸업하고 나온 이적 시인과 농담을 한 일이 있다
어쩌다가 인기도 없는 시조라는 장르에 들어 있기 망정이지 나도 자유시를 썼다면 상청 교육대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말 했다. 이적은 체질이 강하지만 나는 너무 빈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정권을 빼았았던 군인 아저씨들도 시조가 뭔지 몰랐던지 아니면 내 작품을 발견하지 못했나 보다. 그런 면에서는 재수가 좋았던 편이다. 당시에 동환 출판사 사장님은 내 작품집을 흔쾌히 찍어 주면서 격려했다. 내가 마음이 좀 졸아들어서 이러이러한 작품은 빼자고 하면 괜찮다고 하면서 편집을 했다. 그 분도 출판 문제로 한 번 불려갔다 온 사람이었다. 문단 변두리에서 혼자 격었던 일들이다
당시엔 내 눈에 빨강 색 뿐이 안 들어왔기 때문에 그 당시에 찍은 사진을 보면 모든 옷이 빨강 일색이며 첫 시집을 찍을 때도 출판사에서 겉 표지 색상을 골라 달라면서 다양한 색상이 들어있는 책을 펼쳐 보여 주는데 첫 눈에 들어 온 색이 빨강 이었다
지금까지도 빨강 색을 표지로 삼은 책은 여지껏 받아 보지 못했지만 난 과감하게 빨강 색을 선택하고 빨강 책을 만들고야 말았다
그 빨강 색은 팔십 년대 후반까지 따라 다니다가 내 눈에서 사라져갔다 , 아마 내 육신에서 힘이 다 빠져나간 신호였으리라
따라서 작품 역시 그만큼 숙성되지 못하고 풋풋하기만 하여 풋내가 물씬 난다.
<문틈으로 비친 오후>는 나중에 정진명 시인에 의해서 <틈의 시각> 이란 제목으로 계명 대학교 문화제에서 평론부문 장원을 한다. 정원식 교수로부터 이름 없는 시조 작가의 작품을 발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학가에서는 카페 이름으로 붙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 뒤로 <음치가 부른 노래> 가 또 그랬다고 한다. 그런 시집 제호를 택한 이유 역시 시조 독자를 끌어 들이고자 하는 속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감회로 첫 시집 첫 장에 올린 작품 '한해旱害소식' 을 한 번 올려 보았다
처음부터 사설시조를 공부했다
사설이야말로 서민시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사설시조야말로 시조문학이 대중과 어울릴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조를 읽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언제나 내 머리 속에 꽉 들어찬 화두였다. 서점에 가도 자유시집을 샀다
혁명은 피 지배 계급인 기층 민중으로부터 시작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시조는 선비들이나 지배 계급 사회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사설 시조는 엎드려 있는 민중으로부터 부터 올라온 형식이기 때문이다. 내용 또한 그러하다. 시조가 왜 자꾸만 기본 형식에서 파격을 하느냐 하는 질문은 결국 평시조의 3 장 6 구는 답답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증거다. 혹자는 평시조 만으로도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넉넉한 그릇이라고 하지만 이는 무슨 주제든지 담을 수 있다는 말로 해석하고 싶다.
따지고 보면 시인은 광대나 무당이다. 칼 대신 붓쟁이 시인은 모두 무당이다. 무당의 흥과 춤과 노래가 없이 어찌 시를 쓰겠는가. 시조를 한 수 쓰다가 보면 취흥이 도도하여 말言의 꼬리가 춤을 추고 사설이 길어졌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우리 가락의 흥취에서 나온 자연스런 가락의 연장이다
처음 시조에 입문하는 때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내 눈에 투시되는 내시경 속의 모습들이 사설로 엮어 가기가 십상이었고 사설 시조가 요구하는 풍자나 해학 속에 할 말을 다 하고 싶은 것이 내 성격이나 입담에 꼭 맞는 맞춤 옷이었다. 스스로 통쾌하고 만족했다.
처음 습작기 때다. 왜 현대시조 작가가 고시조를 쓰느냐. 왜 시조는 현실 문제를 쓰지 않느냐 하는 나의 질문에 '그것이 앞으로 자네의 과제일세' 라고 말씀하신 서벌 선생님의 대답으로 나의 시조문학은 분명한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미 조선 시대부터 흥이 많았던 우리 민족은 자연스럽게 사설 시조를 생산 했지만 서 쪽에서 들어온 자유시라는 것과 대결 구도를 갖는 바람에 시조를 부흥 시키자면서 그 때부터 평시조도 연작을 쓰자고 했고 사설 시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의 몇몇 안되는 시조 작가 역시 조선시대의 선비적 문학 사상 맥 속에서 시조 창작을 해 왔으며 문예 운동같은 이데올르기 틈 속에서 전통 문학으로서의 시조를 보호하기 위한 안간 힘을 썼던 것같다. 차라리 그 때에 의연하게 그냥 시조를 놔 뒀다면 오히려 민족적으로 억압 받던 수난의 역사 속에서 때 맞춘 사설 시조가 더욱 융성했을 것이며 시조문학은 전체적으로 두터운 독자층 속에서 발전했을 것이다.
들끓는 바다 속에서
사리가 나왔습니다
물도 큰 물은
다비를 하고 나면
물뼈만 남았습니다
죽비 치던 파도 소리
빛이 이르지 못한
쉰내 나고 부패한 곳에
액운을 쫓아 내던
소태같이 쓴 말씀은
포말로 피어 오르던
하얀 물꽃입니다
- 소금- 전문
지금 막 어느 문예지의 청탁을 받고 탈고한 작품이다.
시조 독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조를 쉽게 써야 되겠는데 쉬운 글이 쉬운 뜻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에 또 그것이 문제였다 시를 안 읽는다는 말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며 재미를 앞세우다가는 시가 경망스러울 수 있겠기 때문이다. 두 가지를 다 고려하면서 며칠을 주물럭 거렸다. 이 작품 역시 둘 째 수가 아니더라도 첫 수만 가지고도 확실한 의미 전달을 전할 수 있다는 느낌이다. 평시조가 연작으로 길게 느러질 경우 경음악같은 반복 리듬으로 읽기에 지루할 것이란 것이 나의 체험적 느낌이다.
심지어 시를 쓰는 사람마저 시조문학을 경멸시 하는 발언을 하면 나 자신 인간마저 경멸시 되는 것같아 분통이 터졌다. 어떤 선배 시인이 <망초> 라는 내 작품을 읽어 본 뒤 하는 말이 ' 이 정도면 시조 쓰지말고 시를 써도 되겠네요' 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그 순간에 내 머리 속에서 한주먹에 지옥으로 날려 보냈다.
왜 이런 취급을 받아올까 하는 기분나쁜 의문이 나를 더욱 시조에 매달리게 했다
일단은 진부하지 않은 범위 안에서 읽을 수 있는 시조를 써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더구나 첫 시집 문틈으로 비친 오후가 나가면서 나의 문학세계가 큰 오해를 받고 있었다
김문억 하면 으레 시사적인 참여시로나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또한 못마땅 했다. 오히려 그런 작품이 시조로는 너무 흔치 않았기 때문에 조금은 의도적으로 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끝없이 변하고 싶은 것이 내 창작의 기본 뜻이었다
세상 만물이 다 시적 대상일진대 작품의 모양도 질감도 끝없는 만물상으로 변하고 싶은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연가집도 만들고 노골적인 관능시도 짓고 싶었다.
보통은 은유법을 강조하지만 어느 경우는 지나친 은유로만 꼭꼭 조여 놓기 때문에 자신만 알고 남들은 모르는 시조가 나오기도 한다. 뜻 전달이 쉽지 않아서 시 한 편 감상하고 싶은 사람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경우다. 뜻 전달이 쉽게 된다고 해서 뜻이 깊지 않다는 논리는 없다. 특히 시조는 자연을 관조하고 시절을 풍자하던 민족시다. 아무리 현대시조라고 해서 뜻 전달이 애매모호하거나 난해한 경우는 시조만 삼십 년을 써 온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일반 독자들이 그런 시조를 좋아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도 백수 선생의 '가락과 이미지 중 우선 순위를 꼭 택하라면 가락을 먼저 두겠다' 라고 한 말은 의미가 있다. 풀고 맺고 하면서 직접 고백과 간접 인용이 어우러질 때 감동을 유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느닷없는 혁명이다
혁명군이 몰려오고 있다
뜨거운 포연 속을 밀고 오는 천군만마
조용히 승복하고 있다
어쩌지 못할 이 반전을
눈부신 화관을 쓰고 새 공약을 외치고 있다
긴긴 겨울 통치 속에서 풀려난 잎잎들이
다투어 손을 흔들며 질문들을 하고 있다.
- 봄. 전문-
숫돌에 갈던 날을 급한맘에 옥갈다가
빠진 이빨 날 하나가 허공에 가서 박혀있다
부도난 액댐을 하고 있다
부적으로 붙어 있다.
- 낮달 전문-
위 두 편은 작가들로부터 쓸만하다는 평을 받은 작품이다. 하지만 일반 독자가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을까. 이런 시조를 계속 썼을 경우 일반 독자들이 시조문학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또한 나의 괴로운 화두다.
묻혀있는 우리말을 발굴하는 작업은 좋다 그렇지만 그 작업 역시 작품이 흐르고 있는 전체적인 문맥상 자연스럽게 읽혀져야 할텐데 생경한 언어들을 자주 써서 돋보이게 하려는 작가들이 있는 것같다. 읽으면서 맥이 끊어진다. 무슨 말인지 또 사전을 찾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혀가 꼬부라지면서 잘 안 읽혀진다. 자음 모음 배열이 잘 안 맞기 때문이다. 또는 제목부터 주렁주렁 장식을 다는 작품이 또 있다. 일련 번호에 본 제목 그 아래에 부제목 심한 경우는 광호를 또 친다 무슨 변별력을 갖고자 했는지 모르지만 본문의 내용과 연결하여 연구를 해 봐도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쁜 여자는 악세사리가 없어도 이쁘다. 시각적으로 어지러울 뿐이다. 정작 본문이 말하는 내용에 맞는 제목이 어느 것인지 혼돈스럽다. 전체적인 주제에 맞는 선명한 메시지면 족할 것이다
소설 속에는 시가 있어야 하듯이 시 속에는 선명한 소설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가 따라온다. 그런 이유로 젤 앞머리 초장에 가장 핵심적인 구절을 올려 놓게 된다. 독자를 확 끌고 들어와서 끝까지 모시고 가고 싶은 때문이다.
3 장 6 구라고 하는 평시조의 틀을 벗어나서 나처럼 많은 시험을 하고 방황을 한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실패한 작품이 너무 많다. 만삭 중에 낙태된 작품도 너무 많다. 이는 모두 어떻게 하면 외면당하고 있는 시조문학을 다시 대중 속으로 끌고 들어올 수 있을까 하는 한가지 신념 뿐이었다. 그렇게 지은 시조지만 발표할 기회가 너무 없기 때문에 모아지는대로 시집으로 엮었다. 다만 헤실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죽은 후에 누군가가 봐야 한다 라고 하는 생각 뿐이었다. 그래서 내 작품집 다섯 권에 올라있는 작품중 절반 이상은 미발표? 작이다. 선 보일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노처녀만 우굴거리는 아비의 심정이다
문을 두드릴 적마다 빗장을 지르던 너는
돌아서면 문틈으로 내 모습을 훔치다가
풀리는 옷고름을 황급히 접어 맨 것 난 다 알아
부글거리는 바다가 파도를 몰고 갈 적마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고 물보라를 때리지만
얇은 사絲 젖은 앞섶에서 꽃 한 송이 보았어
슬픈 고백일수록 소리치고 싶었어 나는
부딪치면 활활 타오를 성냥 알갱이 하나
가슴에 숨겨 두고서 시치미 떼는 네 앞에서
- 시치미 떼고 있었어 너는- 전문-
시조의 반복 리듬을 억제하고 읽을 수 있는 시조를 만들기 위한 의도적으로 쓴 연가라고 하겠다
단수로 써도 연애 편지의 깊은 사연을 담을 수도 있겠지만 일반 독자를 겨냥한 연애편지는 이야기가 절절히 살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형식 구조에 신경을 쓴 연애편지다. 제목부터 그렇다.
이런 일화가 있었다
동인 몇몇이 앉아서 시에 관한 담론을 주고 받던 중 당시에 김초혜의 '사랑 굿'이 한창 발표 되던 때였다. 시조문학도 연가 집을 만들어 찍어내야 하다고 성토적인 주장을 했지만 모두 회의적으로 받아들였다. 누가 시조집을 찍어주겠느냐는 것이다. 시도를 해 보지도 안 하고 왜 시조는 안 된다는 선입견을 갖느냐. 재미 없게 쓰니까 안 찍는 것 뿐 읽는 재미가 있으면 왜 안 찍어 주겠느냐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그 후에 몇 편의 연가를 열심히 썼다. 결국은 '박우사'에서 '너 어디있니 지금' 이라는 연가집을 흔쾌히 발간 해 주었다.
연가집은 편집을 한 사람이 내용만 보았지 형식이 시조인줄 몰랐기에 찍었을 것이란 것이 내 짐작이다. 어떻게든 시조 연가집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부끄럼도 모르고 3 장 6 구의 표기 형식에 파격을 가했던 것이다. 읽는 시조를 생각하다가 오기로 시작한 시조 연가집은 찍어냈지만 막상 노랫가락같은 그런 작품이 결코 나의 창작 근간은 아니라는 인식 때문에 바로 접어두었다. 이래저래 갈등이었다.
바람 없는 나무들을 울 안에 심지마라
눈물나고 서러워도 가로수는 길로 갔다
가다가 가지 잘려도 제 영토를 지켰다
-격문檄文- 전문
어제는 닥터 박이 암으로 죽고
오늘은 김변호사가 옥사를 했습니다
이상무
질문 있습니까
누구 질문 없습니까
- 현재現在 중 첫 수-
목 타는 심지 하나가 사막을 질러간다
오아시스 찾아서 창세기 골짜기까지
폭죽을 쏘아 올린다
떨어지는 꽃 잎 꽃 잎.
- 오르가즘2- 전문
시는 언어의 해방이요 자유라고 생각한다. 없는 설음도 만들어서 울고 싶은 때가 있듯이 없는 말도 만들어서 쓸 수 있는 것이 시인의 특권이다. 시적 대상의 넓이도 넓혀야 한다. 선비문학으로 출발한 시조지만 현대문학으로의 다양한 소재 범위를 확대 해야 한다.
어느 경우에 어떤 언어를 자리매김 하느냐에 따라서 작품은 얼마든지 돋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다 써 놓은 후에는 퇴고하는 과정에서 보다 좋은 표현을 추구하겠지만 보통은 예삿말이라도 꼭 필요한 적소에 합당한 말을 정리 정돈 하고 보면 전체적으로 원하는 문장을 얻을 수 있다.
시어詩語는 반드시 고상하고 얌전한 것이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갖지 않는다. 때로는 욕을 해도 통쾌하거나 용서가 되는 경우도 있다. 언어의 변용은 일반적인 상식을 깨뜨리면서 충돌하고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독자를 신선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시조 단수라고 해도 일단 초고를 써 놓은 후에 반복해서 소리내서 읽어 보면 잘 안 읽혀지는 부분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 부분이 바로 율이 맞지 않는 부분이다. 때문에 반드시 소리내서 읽어 보면서 퇴고 작업을 한다. 물론 처음부터 시조를 쓰고 있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가락을 만들어 가겠지만 글자 수에 매이지 않는다. 자유로운 중에 형식이 맞아 들어가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시조 율에 습성이 된 듯도 하다 시조를 거듭해서 쓰다가 보면 어느 정도는 하나의 장을 이루는 노래의 리듬을 타게 된다
소리내서 읽다 보면 율이 잘 너머가는 부분은 형식의 틀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고 잘 안 읽혀지는 부분은 지나치게 모자라거나 넘치는 부분이란 것을 발견하게 된다
평시조에서는 앞 구 보다는 뒷구를 길게 빼 주는 것이 가락이 좋고 같은 구에서도 앞에 두는 말 마디 보다는 뒤에 두는 말 마디가 길면 가락이 나온다
'모름지기 이렇게 한 번/울어본 적 있느냐 '
'발가벗고 부끄럽지 않게/통곡한 적 있느냐'
'맨발로 저리 고꾸라지며/뛰어본 적 있느냐'
-소낙비 전문-
지금 새삼 '소낙비' 작품을 소리내서 읽다 보니 이 작품은 3 장 모두가 2 구 보다는 1 구가 글자 수가 더 많다. 이는 또 평소의 내 작품 쓰기의 기본과는 반대되는 경우의 작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소리내서 읽어 보면 또 한가지 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3 장이 모두 음보상으로는 1 구와 2 구의 길이에 큰 차이가 없다. 울려오는 소리의 파장 길이가 비슷하지 않은가
3 장 모두 앞 구를 천천히 읽을 필요가 없는 가속도가 붙는 발음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아주 자연스런 소리음이다. 이 경우는 가락에 무리가 가지 않는한 이미지를 더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가락의 시조라 해도 주제나 이야기가 빈약하면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 맛이다. 억지스럽게 글자 수를 맞춘다면 모양이야 왜 못 만들겠는가. 쓰고자 하는 흥과 신명이 한정된 안방 보다는 춤출 수 있는 도래방석이 필요하다면 마당으로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한지창에 호롱불이 아니라고 해서 넓은 마당이 어찌 내 집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게 섰거라
게 썼거라 이 놈
거기 서지 못하겠느냐
준마를 몰아 쫓아가며 호통을 치지만
숨 가쁘게 몰아가지만
달아날 길을 터 주고 있다
쫓는 자가 울고 있다
-소낙비 1- 전문
술을 건너뛰고 집으로 오는 늦은 밤에
발그레한 입술 요염한 자태의 하현달이
서녘하늘 깊은 골방에 술 한 상 차려 놓고
무릎에 턱 괴고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네
- 늦은 밤에 네가 - 전문
위 작품 두 편은 시조의 기본 형식에서 많이 어긋나 있다
구태어 이를 두고 모양새에 이름붙여 엇시조니 사설시조니 할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그냥 시조라고 불러주는 것을 원한다
이 경우 시적 발상이 최초에 발생 했을 때 평시조로 간단히 만들수?도 있고 아니면 몇 마디 허사라도 붙여 넣어 조금 더 긴 사설시조 모양으로 지을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쓰고자 하는 것만 썼을 때 더욱 단단한 작품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쓴 것만이 더 독자와 교감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구태어 평시조 단수로 만들기위해 말 줄임을 해야하는가. 어차피 시조는 풍부한 가락의 율律 시라고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