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대문 창건 역사
돈화문 敦化門
창경궁의 정문이다
보물 제383호. 1412년(태종 12)에 창건되었고,
1451년(문종 1)과 1506년(연산군 12)에 개조하여
더 크게 만들라는 왕명이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처음에는 지금보다 작은
규모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는 별궁이었던 창덕궁이 점차 정궁의
구실을 하게 되면서 정문을 보다 위엄있게 만들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1) 다시 지었고, 1721년(경종 1)
동쪽 아래·위층 부연을 수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숭례문 崇禮門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함.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4가에 위치한 조선 초기 한양의 성문.
국보 제1호. 1396년(태조 5) 창건되어 1448년(세종 30) 개축했다.
조선왕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뒤,
정궁인 경복궁의 방향에 의해 남문인 숭례문이 정문이 되었다.
풍수지리에 의해 편액도 다른 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쓰여졌다.
이는 서울 남쪽에 있는 조산(祖山)인 관악산이 북쪽의 조산인 북한산보다
높고 산의 모양도 불꽃이 일렁이는 듯하여 관악산의 화기를 맞불로서
꺾기 위한 것이며, 오행에서 남쪽을 가리키는 예(禮)를 숭상한다는
의미를 담아 숭례문이라 이름했다. 1934년 일본이 '남대문'으로
문화재 지정을 했으나 1996년에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숭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인 이 문은
화강석의 무지개문을 중앙에 둔 거대한 석축 위에 세워져 있으며,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상하층 모두가 겹처마로 되어 있고
사래 끝에 토수(吐首)를 달았다.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두(龍頭)를
두고, 양성한 용마루에는 취두(鷲頭)를 두었다. 2층인 이 문의 구조는
위층의 4모서리 기둥이 아래층까지 내려와 견고하게 결구되었으며,
위층 중앙에는 4개의 고주를 두었다. 다포계 형식의 공포를 얹은
이 문의 위층은 외삼출목, 아래층은 외이출목으로 구성되어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다포계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초기 건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
또 1962년 해체복원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은
당시의 건축생산체계와 장인조직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현존하는 성문 중 규모가 가장 크며 조선 초기 다포계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인정문 仁政門
인정전 仁政殿 들어가는 문이다
창덕궁 인정문(昌德宮 仁政門)
창덕궁 인정문(昌德宮仁政門)은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에 이르는 출입문이다.
인정문(仁政門)은 태종 5년(1405년) 창덕궁(昌德宮)의 창건 때
다른 전각들과 함께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본래의 건물이 불타 없어지자 광해군 즉위년에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세웠는데,
영조 20년 10월 인접한 승정원(承政院)에 불이 나면서 연소되어
좌·우 행각과 함께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인 1745년 3월에 복구되었다.
그 후 순조 3년 12월에 선정전 서쪽 행각에서 화재가 나 인정전 등이 소실되어
이듬해 12월에 재건될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1910년대에 일제에 의해 주위 행랑과 함께 왜식을 가미하며
일부 변형되었었으나 1988년 현재와 같이 원상을 회복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장대석 기단 위에
주좌가 둥근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상부에는 안초공이 있다.
정면 기단에는 건물 기단과 같은 너비의 계단을 두고,
계단 중앙에 어칸 너비로 소맷돌을 놓아 세 부분으로 구획하였다.
사방에 평주를 돌리고, 가운데 기둥 열 중앙에 두 개의 고주를 세웠다.
가운데 기둥열 세 칸에 각각 두 짝의 판문을 달았는데,
어칸의 문이 그 좌우의 문보다 높게 처리되었다.
공포는 내3출목·외2출목으로 3제공이 중첩되었고,
도리받침 부재는 구름모양으로 깎았다.
내부는 2제공까지는 첨차 끝이 직각으로 절단되고,
그 위는 둥글둥글한 운궁이 되어 도리와 보를 받치고 있다.
고주 위로 대들보를 얹고 그 위에 종보를 둔 5량가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서까래와 가구를 노출시켰으며 문 위에는 홍살문이 있다.
서울 종로구 와룡동의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은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3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위치 : 창덕궁의 정전(正殿)이다. 임금이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던곳이다.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의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 곳을 이용했다.
또한 왕세자나 세자빈을 정했을 때나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에도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창건 : 인정전은 1405(태종 5)년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었는데
1428(태종 18)년에 인정전이 좁다고 해서 다시 짓게 하였으며,
그 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9(광해군 원)년에 중건했다.
1803(순조 3)년에 화재로 불에 타서 이듬해인 1804(순조 4)년에 재건하였고,
1857(철종 8)년에는 낡아서 다시 고쳐 지었다.
뜻 : 인정(仁政)’은 ‘어진 정치’라는 뜻이다.
인정은 바로 맹자가 강조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진선문 進善門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2ㅡ71번지 소재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에 들어가기전의 가운데 있는문으로 1996년에 복원한것이다
진선문앞에는 억울한일을 당한 백성이 왕에게 직접 호소 할때 치게하든 북
신문고가 있었다 신문고는 태종때 부터 있었으나 연산군때 페지되였다.
흥인지문(興仁之門)
조선시대 서울을 둘러쌌던 성곽의 문이다.
동대문(東大門)이라고도 한다. 1396년(태조 5년)에 처음 지어졌다.
1453년(단종1년)과 1869년 (고종 6년)에 고쳐지었다.
창덕궁 숙장문 肅章門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2ㅡ71번지 소재
숙장문은 진선문 맞은편 위치에 있다 숙장문을 통과하면 내전으로 들어갈수있다
숙장문앞은 국문鞫問을 하든 장소로 사용되였다
정조9년1785년3월 정조는 이곳에서 수차례 친국을 행하였다
역모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달내내 열린 국문 鞫問은
관련자가 사형되거나 유배당하면 일단락 되였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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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문 숙정문 肅靖門
38년만에 모습드러낸 북대문
서울에 북대문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북대문은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으로는 서울시 삼청동 산2-1에 위치하고 있다.
정식현판은 숙정문肅靖門으로 조선태조때 건립되었다.
북대문은 청와대 외각경비구역으로 보안상이유로 38년간이나
일반인출입이 통제된곳이다. 문화재청에서는 금년5월부터
제한된인원이나마 일반인 출입을 허용하고 있다.
북대문인 숙정문은 당초 지어질 때인 1396년 태종 5년엔
나머지 대문과 함께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1413년 한 풍수학자께서 음기가 심한 지역에 지어져
지맥을 손상시킨다고 상소를 올렸다고 합니다.
부녀자들의 음난한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는 상소였다죠.
결국 폐쇄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했다고 합니다.
숙정문은 오행 중 물을 상징하는 음에 해당하는 문이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 오면 기우제를 위해 열었다가,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합니다.
요즘은 활짝 열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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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獨立門
서대문이라고도 불린다
독립문 설립 목적
1896년(건양 1) 미국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발의로 국왕의 동의를 얻어 뜻있는
많은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광범위한 호응을 받아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여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하였다.
독립문이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는 조선 말기의
석조문. 높이 14.28m, 너비 11.48m. 사적 제32호.
지정면적 2,715.8㎡. 갑오경장 이후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려고 중국사신을 영접하던 사대외교의 표상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운 문으로서,
자주민권과 자강운동의 한 기념물이다.
1896년(건양 1) 미국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발의로 국왕의 동의를 얻어 뜻있는
많은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광범위한 호응을
받아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여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하였다.
이 문의 건축양식은 서재필의 구상에 의하여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하였으나, 미적 배려가 부족하고 석재의
조적수법도 재래성벽의 수법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서재필의 자서전에 의하면 설계는 독일공사관의 스위스 기사가 하고,
우리나라 목수가 시공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경성부사 京城府史≫에는
러시아인 사바린에 의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확실하지 않다.
구조는 화강석 쌓기로서 중앙에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내부 왼쪽에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다.
홍예문의 이맛돌에는 이화문장(李花紋章)이 새겨져 있고,
그 위의 앞뒤 현판석에는 각기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좌우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 앞에는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는 영은문 주초 2개가 서 있다.
이 문은 1917년 수리공사를 한 적이 있고, 1928년에는
기초가 내려앉을 위험이 있어 조선총독부에서
공사비 4000원을 들여 경성부에 위탁하여 크게 수리한 바 있다.
그 당시 벽체 안쪽에 새로운 재료인 철근콘크리트를 보강하였다.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이전이 불가피하게 되어
그 자리에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 7.13.
서울특별시장’이라고 새겨진 기념동판(가로·세로 각 70㎝)을
묻고 원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이전공사는 1980년 1월에 끝났다.
광범문(光範門)
위치와 연혁 : 인정전 동문이다.
동쪽으로 임금의 경호 업무를 맡은 선전관청(宣傳官廳), 승정원, 내시들의 집무실인
내반원(內班院)과 통한다.
뜻 : ‘광범(光範)’은 ‘규범을 빛낸다’는 의미이다.
제작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숭범문(崇範門)위치와 연혁 : 인정전 서문이다. 서쪽으로 예문관, 내의원과 통한다.
뜻 : ‘숭범(崇範)’은 ‘규범을 높인다’는 의미이다.
제작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
향실(香室)
위치와 연혁 : 인정전 서쪽 행각의 북쪽에 위치한 향청은 의례에
쓰이는 축문과 향을 관리하던 직소이다. 교서관
소속으로 책임직은 충의(忠義)인데, 직급이 높지는 않지만
공신의 자손이 임명되었다. 향관은 참하문관(參下文官)이 맡았고,
이틀에 한 번 숙직하였다.
명종의 신임을 돈독히 받은 상진(尙震,1493~1564년) 5)과
영·정조 때의 문신 박세채(朴世采, 1631~1695년) 6)가
이 곳을 거쳐 정승에까지 오른 일이 유명하다.<원전 3>
뜻 : ‘향실(香室)’은 ‘향을 보관하는 방’이란 의미이다.
제작 : 정도준이 글씨를 쓰고 오옥진이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