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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우순경 사건
경주마(윤상철/구로) 추천 0 조회 101 18.07.06 00:42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우순경 사건
대한민국 최악의 대량 살상범 우순경 사건입니다...


한국 역사상 희대의 살인마로 전직 경찰관이다. 무려 62명을 연달아 살해한, 연쇄살인과는 다른 연속살인,대량살인마. 통칭 rampage killer들 중에서도 살인수로 어마어마한 급이다. 통칭 우순경, 그가 저지른 사건을 우순경 사건이라고도 한다.

부산시 동구 초량동 245의 8번지에서 경찰관의 네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난 우범곤은 어린 시절은 별다른 말썽 없이 평범하게 보냈다. 경찰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장차 경찰관이 되어 아버지처럼 권총을 차고 일하겠다고 뽐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학교 진학 후부터 내성적이던 성격이 두드러지고 학업에도 흥미를 잃어 무단결석이 3년 동안 28일이나 되었으며 고교 시절에는 졸업 당시 65명 중 63등으로 열등생이 되고 말았다. 고교 재학 시절에는 분을 이기지 못해 유리창을 깨고 그 파편으로 배를 긋는 등의 자해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특히 고교 3학년때 아버지가 진급을 앞두고 대장암으로 병사하면서 가세가 기울자 우범곤은 성격 자체가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하였으며, 해병대에서 특등사수로 뽑일 정도로 사격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제대 후 경찰관이 되었으며 초임지는 부산시 남부경찰서 감만3파출소였다. 이후 서울특별시 101경비단에 선발되어 청와대 경호에 근무하였으나 중도에 전출당하여 경상남도 의령군의 궁류 지서로 좌천되었다. 부산에서 근무할 당시부터 피의자들을 함부로 다루거나 윽박지르는 등 포악한 성격을 드러냈다고 하며, 당시 동료 순경에 따르면 평소 유순하다가도 술만 마시면 성격이 난폭해져 꼭 무슨 사고를 낼 사람 같았다고 한다. 청와대 경호에서 제외된 것도 성격이 거칠어 근무 부적격자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었으며, 전출된 후에도 술만 마시면 행패가 심해 미친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잔혹성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류지서로 전근 온 뒤 2월부터 하숙을 하던 우범곤은 이웃집에 살던 전양과 사귀게 되었고 3월 초부터 전양의 집에서 동거 생활을 한다. 동거에 들어가기 전에 전양의 부모는 결혼한 뒤 함께 살라며 만류했지만 우범곤이 결혼 비용이 없다며 가을에 식을 올리기로 하고 당장 혼인신고부터 하겠다고 고집했다. 가뜩이나 집안이 가난해 늘 열등 의식에 젖어있던 우범곤은 식도 올리기 전에 여자 집에 얹혀살게 되면서 자신의 무능함에 심각한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82년 4월 26일, 그날 우범곤은 저녁시간 근무를 위해 낮 12시경에 집으로 들어와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잤다. 그가 잠든 와중에 동거녀가 그의 몸에 붙은 파리를 잡기 위해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쳤고, 그 둘은 이를 계기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화를 미처 식히지 못한 채, 우범곤은 오후 4시경 지서로 간 뒤, 저녁 7시 반경에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만취한 상태에서 코피가 날 정도로 동거녀를 주먹으로 폭행했고 같은 집에서 살고 있던 동거녀의 친척언니가 뛰어 들어와 말리자 친척언니의 뺨마저 닥치는 대로 때리며 난폭하게 굴었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동네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사건의 전말을 들은 동네사람들이 동거녀를 두둔하자, 우범곤은 다시 집을 나갔다.

지서로 향해 지서에 배속된 육군 방위병들과 소주를 퍼마시던 우범곤은 동거녀의 남동생이 와서 경찰이면 다냐고 소리를 질러대자 폭발, 카빈총을 장전했고 만류하는 방위병들을 총을 쏴 내쫓은 다음에 예비군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M1 카빈 2자루, 실탄 180발, 수류탄 7개 등을 탈취했다...

21시 40분 지서를 나온 우범곤은 마침 앞을 지나던 26세 대구에서 표구사를 하는 남자에게 총을 쏜 것을 시작으로 면 토곡리 재래시장으로 달려가 총을 난사하여 장을 보러온 마을주민 3명을 살해했다.

21시 45분 - 마을의 통신을 차단하기 위해 궁류우체국으로 가서 교환원 여성 2명과 숙직 중이던 집배원 1명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교환원이 숨지기 직전, 마을 이장 집의 행정전화와 의령우체국 간의 코드를 연결했던 덕분에 주민에 의해 신고(22:34)가 가능했다.

22시 그는 곧 압곡리 매실부락으로 가서 10여 분간 총기를 마구 난사하였고, 주민 6명을 살해했다.

22시 10분 그는 운계리 시장으로 달려가 주민 7명을 살해했다.

22시 50분 그는 상갓집에 난입하여 “비상이 걸렸다”고 말하고는 문상객들과 어울려 10여 분간 함께 술을 마신 뒤 갑자기 총을 난사하였다. 12명을 살해하였다. 이후 그는 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총을 난사하여, 이곳에서만 무려 23명을 살해했다.

다음 날인 27일 5시 35분 그는 평촌리 마을에 다시 나타나 한 민가에 침입했다. 그는 일가족 5명을 깨운 뒤 갖고 있던 수류탄 2발을 한꺼번에 터뜨렸고, 그 자리에서 우범곤 본인을 포함해 4명이 폭사했다.

근무지를 무단이탈해 온천접대 후 술을 마시고 돌아오던 궁류지서장 허창순 경사 일행은 길에서 주민 신고를 받지만 무시하고 궁류지서로 들어온다. 그곳에서 우범곤이 무기를 탈취해 총격을 벌이고 있다는 보고를 듣자 총격 현장에 자기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며 도피했다. 한편 의령서에서 신고를 받고 경무과장 신현기와 보안과장 김영석 전투경찰 30명이 24:00경 도착했으나 우범곤의 소재를 파악하기는커녕 피격을 두려워하여 마을 초입 다리 밑 등 곳곳에 숨어 있었다. 후에 경찰은 이를 매복이었다고 변명했으나 여론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되었다. 주민 살상이 진행 중인데 경찰은 현장에 진입하지 않고 웅크려 있었던 것이며 더구나 매복을 다리 밑에서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당시 관할 책임자인 의령서장 최재윤 경정(82년 당시 57세)은 다음날 부산에서 서장회의가 있다는 핑계로 하루 일찍 부산으로 이동하여 근무지를 보고없이 무단이탈한 상태였다. 보고를 받고 복귀하여 범행 지역에 이르는 다리에 도착한 것은 익일 01:20시나 되어서였다. 현장에 도착한 의령서장은 경찰들을 규합하여 범인수색에 나서기는커녕, 곳곳의 사상자를 목격하고 두려움에 빠져 곧바로 궁류지서로 도망쳤다.

지서에 도착한 의령서장은 우범곤이 많은 실탄을 가져갔다는 보고를 받자 더욱 두려움에 빠져 지서 안에만 틀어박혔다. 게다가 지서에서 마을 스피커로 경보를 발하거나 사이렌을 울리거나 또는 예비군을 동원하거나 혹은 의령서 휘하 인근 지서에 경찰 지원을 지시하거나 하지도 않고 단지 내무부에 상황보고만 하였을 뿐 아무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이는 지서에 대기하고 있던 경무과장과 보안과장도 마찬가지로서, 만약 이들이 22:34에 처음 신고를 접수한 즉시 경보 방송을 발령하였다면 희생자의 절반을 구했을 수도 있었다.

02:00에는 주민 2명이 목숨을 걸고 산을 넘어와 출동을 재촉하였으나 서장은 날이 어둡다며 이것도 거부하였다. 새벽 4시가 다 되어서야 마산·진주시의 기동대가 궁류에 도착하였으나 결국 사건은 우범곤의 자폭으로 종료되었으니 경찰력의 개입이나 저지 없이 속수무책으로 끝까지 주민 살상이 진행된 것이었다. 

이 사건은 경찰관이 마을 주민을 묻지마 살인 수준으로 대량학살한 엄청난 사건인데도 사건발생 이틀 뒤인 4월 28일에야 중앙 일간지에 보도되었는데, 이는 당시 언론기본법상 지방에 주재기자를 두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제도는 1987년 언론기본법 폐지로 사라졌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무려 62명의 주민들이 사망했고, 33명의 부상자도 발생했다. 6명의 희생자는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다가 총상이 악화되어서 사망했다. 우범곤의 약혼녀 전양도 우범곤이 쏜 총에 의해 복부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천만다행으로 살아났다.

그가 의령군 일대의 네 개 마을을 거의 쓸다시피하여 살인을 저지르다보니, 시골사회 규모를 감안하면 심대한 피해를 남겼다. 조상대대로 친척 일족가 모여 사는 산골마을의 특성상 일가족이 사망하거나, 혼자 목숨을 부지한 채 나머지 가족은 변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우체국에서 숙직하다 참변을 당한 집배원의 경우, 그의 부인마저 집에서 우범곤에게 살해 당하는 바람에 슬하의 세 남매는 하루 아침에 고아가 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가장 처음으로 살해 당한 청년과 우체국에서 살해 당한 교환원 아가씨는 미혼으로 사망한 것이 비통하게 여겨져 유족들끼리 합의하에 영혼 결혼식을 올려 주기도 했다. 범행이 일어났던 의령 지방에는 아직까지도 4월 26 - 27일 즈음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고 한다.

이날은 반상회를 하느라 마을 주민들이 곳곳에 모여 있었고 밤늦게까지 불을 켠 집이 많았다. 또 기강 해이로 경찰의 근무지 무단이탈이 만연했는데, 궁류지서의 다른 경찰관 3명도 반상회에 참석하려고 근무지를 무단이탈한 상태였으며, 지서장 역시 마을 유지의 온천 접대를 받으러 지서를 무단이탈한 상태였다. 지서는 다른 근무자 없이 텅 비어 있는 상태였으며 이에 우범곤은 무기고에서 다량의 화기를 용이하게 탈취할 수 있었다.

우범곤의 직업이 경찰이었으며 사건 당시에도 근무복을 착용하고 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 때문에 주민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우범곤을 맞이했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더구나 당시는 무장공비가 심심치 않게 출몰하던 시대였으므로 주민들은 총소리를 무장공비가 나온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국민을 지켜야 할 경찰이 전대미문의 흉악범죄를 저질렀다는 충격성과, 사건 진행 당시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들의 비열함과 무능함에 피해가 커졌다는 점 때문에 전국적으로 여론이 폭발하여 전두환 정부는 내각 사퇴 압력에 직면했다. 한편 정부합동조사반은 이 사건이 상부에 보고도 늦고 출동도 늦은 데다 진압마저 미온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의령서장인 최재윤을 구속하고 관계자 수명을 직위 해제시켰다. 내무부 장관이던 서정화가 인책사임하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그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국회 내무위에선 야당 의원들은 이 사건이 단순한 치안문제가 아니라 보고 체계와 무기 관리 등 당국의 치안정책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내각 총사퇴까지 요구했다.

여담으로 당시 의령경찰서장 최재윤에 대한 대법원 공판에서 재판관이었던 대법관 중 한 명이 바로 이회창이었다.

테러와는 무관한 단순 범죄이자 경찰의 흑역사라서 미디어화는 잘 되어 있지 않다.

유명 역술가 차길진은 어떻게 맨 정신인 사람이 파리 한 마리 때문에 사람을 수십 명이나 죽일 수 있느냐며 이것은 의령에서 죽은 빨치산 56명의 원혼 때문이라는 주장을 했다. 당연히 과학적 증거 따윈 없으니 흔한 미스터리 떡밥 같은 흥미로운 소리로만 흘려듣도록 하자.흥미롭지도 않다 단, 차길진의 부친이 6.25 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에 참가한 故 차일혁 총경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빨치산 운운 발언의 근원이 어디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법도 하다. 

한국 영화가 우순경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실제 사건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으며, 순수했던 경찰이 시골의 작은 사회에 점차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막판에 총기난사하는 것만 같다. 대체 왜 포스터에 충격 실화라면서 과대광고를 했는지 의문일 따름. 오히려 영화는 살인자에게 그 나름대로의 정당성이 있고, 피해자들에게도 모종의 책임이 있는 것으로 묘사했으니 이 영화를 실화라고 하는 것은 실제 피해자들에 대한 모독이다. 참고로 흥행 기록은 관객 1천 명이 전부이다. 다만 개그맨의 정극 데뷔작으로서 전혀 우스운 모습이 아닌 연기가 돋보였고 원로 배우의 마지막 출연작으로의 가치가 있다.

웹툰 에피소드가 이 사건을 직접 다루고 있다. 문제는 작가가 픽션임을 강조하면서 이 사건을 거대한 정치적인 음모로 보일 수 있는 뉘앙스가 있었다. 이 사건의 생존자였던 아이가 방송국 PD가 되어 이 사건을 다시 취재하면서 당시 우범곤은 술에 취하지 않았다거나 사실은 범인은 여러 명의 사격 전문가들이었다거나 이 사건 이후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내무부 장관이 되어서 대선가도에 들어서게 되어 최종적으로는 높으신 분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거나, 이 사건으로 전투경찰이 생겼다거나 방송은 권력이 장악한다거나 하는 가설을 내세워 이야기를 끌고 나가고 있다. 오죽했으면 우범곤 사건을 5공화국 사주로 돌리는 만화 그릴 수 있으면 5.18도 북한의 사주로 일어난 거라는 만화 그려도 되는 거냐고 항의도 있었고 자신도 지역드립으로 마음고생이 심하다고 한다.

이야기 자체는 어린시절의 트라우마와 아동학대를 경험한 주인공급의 PD가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사회부조리에 눈을 뜨고 언론 자유 사수에 앞장선다는 내용인데, 거창하게 풀었던 이야기에 비해 주제의식은 좋지만 끝이 미약하였고 굳이 의문 사건도 아닌데 지나치게 음모론적으로 풀고 나갔다는 지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민감한 소재인 만큼 그런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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