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로당 당수 박헌영을 미제의 간첩으로 처형하는 것으로서 남 출신들은 수난이었다. 남 출신이란 성분은 곧 출세의 걸림돌이었다. 오죽했으면 남 출신 부모를 둔 성혜림은 신분개선을 위해 김정일 댁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을까.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수기 <등나무 집>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남 출신으로서 중앙당 간부로 출세한다는 것은 개천에서 용 난다고 해야 할까. 그 한 분이 작은아버지뻘 되는 분이었다. 정작 작은아버지는 우리 아버지가 남한에서의 경력이 더 대단하다고 했다. 자신은 민청위원장 정도였다면 우리 아버지는 당비서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아버지는 출세를 못했다. 남조선 방송을 듣다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고향이 너무 그리웠고 또 떠나온 고향이 과연 어떻게 되가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1960년대만 해도 북한은 <만경대>란 라디오를 생산했다. 진공관식이었는데 주파수조절기(가변축전기)는 물론 납땜을 해야 했다. 이것을 가만히 떼고 때마다 남조선 방송을 들었는데 꼬리가 길어지자 뒷집의 신고로 들키고 만 것이다.
1967년경이었는데 정치보위원이 집에 닥쳤을 때 열 살인 나도 곁에 있었다. 아버지는 보위부에 끌려갔고 집안은 초상맞은 분위기였다. 반동놈을 넘어 간첩에 해당한 행위이기에 모든 것이 끝난 집안인 것이다. 수용소로 끌려갈지 산골로 추방될지 전전긍긍하는 속에 기적같이 한 달 만에 아버지가 돌아왔다. 중앙당에 있는 작은아버지의 덕분이었다.
작은아버지는 간첩으로 몰릴 행위를 한 형님을 구원하기 위해 당시 중앙당 문서과 책임자였던 임춘추(김일성계 항일투사로서 유일하게 대학나온 인테리)를 찾아갔다. 간첩이냐 아니냐는 중앙당에 보관된 경력서를 찾아내는 것 이상 대책은 없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주효했다.
전라북도 익산군으로 표기된 문서보관함을 뽑아보니 형님의 활동경력이 자세히 나와있었고 그 당시 함께 했던 동지들도 수소문하여 보증인으로 세웠다. 이런 것은 중앙당 간부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남조선 방송을 듣다가 들킨 곳은 황북도 서흥군이었다. 이런 곳에 계속 있어서는 주목받아 안되기에 작은아버지가 잘 아는 노길환이란 평남도 은산군당 조직비서 앞으로 형님을 조동시켜 보냈다. 노길환의 형은 <통일혁명당사건>의 김종태, 최영도 등과 함께했던 주요 인물이다.
노길환 군당 조직비서의 보호 속에 있던 아버지는 그후 그가 중앙당 간부로 소환되어 가자 찬밥신세가 된다. 라디오 건은 사라지지 않았고 집요하게 감시당했다. 내가 남포대학연구소에 가 있는 기간인 1980년에 집에서 큰 사건이 터졌다. 지하활동가였던 아버지의 감각과 판단으로 감시자로 있던 아래집 주인을 잡아낸 것이다.
감시해도 좋은데 이렇게 알려지게 하면 당의 군중노선에 위반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그럴 듯한 논리로 중앙당에 신소한 것이다. 사건이 커져 중앙당 신소과 한창남 과장이 직접 현지에 나와 미봉책을 세울 정도였다. 어설픈 감시자는 타 곳으로 보내고 이를 지시한 자들을 질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복수도 만만치 않아 아버지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간첩>이란 시달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중앙당 간부였던 동생보다 화려했던 남한 경력자이고 공산대학 수석졸업생이었던 아버지의 출세는 고작 남원군당 비서 임명장이다.(중앙당 동생은 전라북도 도당비서). 왜 고작이었나면 통일 후라는 추상적인 직책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