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고충을 해소하기위해 여러모로 고민하고 수고하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답변을 토대로 문화재 문제로 간과되어 온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회복해줄 수있는 방안을 혜안을 갖고서 제시하여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1967.12.26. 67다591 ] 대법원 판례는,,
대학의 실험실에서 진리와 가치를 탐구하기 위하여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 학문의 자유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그 실험결과가 잘못되었는데도 이를 사회에 알려서 선의의 제3자를 해친다면,
이는 학문의 범위를 넘은 것으로 허용될 수 없다.
라고 합니다.....
모쪼록 학문과 양심에 비추어 거짓이 없는 답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귀하의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 감사드립니다.
먼저 저희 국립문화재연구소로 민원이 이첩되는 과정 등에서 시간이 지연된 관계로 답변을 늦게 드리게 된 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 1. 지난 십여년간 풍납토성을 왕성으로 단정하고 돌이키기 어려운 입장에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그것도 책임지는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소장님이 아닌 분께서 소견을 보내주셔서 한편으로는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결과 및 민원답변에 대하여 여러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 질문을 드리오니 1 ~ 20 까지의 질문에 자세히 설명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풍납토성은 확인된 유구(토성, 주거지 등)의 밀집도나 축조기법, 위상, 그리고 출토유물들이 다른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가치가 확인되고 있어 백제 초기 왕성으로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 2.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멸실되었다는 풍납토성의 서성벽은 그 이전 고지도에서 조차 발견되고 있지 않는 등의 문제가 있고, 단지 제방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있으며, 주거지등의 유구는 기와를 얹을 수조차 없는 구조의 움집 유사한 형태인 것은 잘 알고 계시는 사안일 것입니다...
그리고 출토유물들로 보자면 백제의 지방이라는 곳에서는 금동향로, 금동관모, 금동신등이 발견되는데 비하여
풍납토성에서는 대부분이 조악한 토기류들만이 발견되어, 이렇게 말씀드리기에 곤란함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 가치가 확연히 떨어진다고 보여집니다....
양각이 아니라 음각으로 조차 제대로 그어지지 못한 대부토기를 통해 왕궁으로 단정되어졌는데, 그 토기를 통해 왕궁으로 단정지어질 수 있는 것이며, 과연 왕궁에 쓰여지는 토기였을까요??
장래 있을 발굴을 기대해보아도 왕궁터가 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설령 지금보다 귀한 유물이 나온다 하여도 그것은 단지 그 유물의 매장적 측면에서 가치가 있는 것일뿐,
왕궁이 아닌 곳이 발굴될 유물로 인하여 왕궁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3. 또한 학계를 언급하셨는데, 과거와 달리 풍납토성이 왕궁이라 하시던 분들이 손을 빼고 계신다고들 합니다...
풍납토성이 왕성이 아니다라는 기사의 반론기사를 맡기었더니 회피하셨다는 예기도 있고,
풍납토성왕성론의 대표적인 학자 역시 나는 풍납토성이 왕성이라는 말은 한적이 없고 기자가 그렇게 썼을 뿐이라는 말하였다고 합니다.....
책임질 수 있는 언사를 하도록 어느 분이 인정하고 계시는지 이제는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실명이 명기되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2007년도에 개최된 바 있는 “풍납토성 국제학술대회”에서도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이라는데 이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 4. 그것은 오히려 이견이 없는 분들만을 모셔서 그런 것이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학술대회라면 이견을 가진 사람이 함께 하여야만 무엇이 문제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5. 또한 일본 후쇼샤 교과서는 풍납토성을 대방군이라 기술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설명을 바랍니다......
일본인 학자가 반나절 다녀가면서 왕성일지도 모르겠다, 을축년 대홍수로 서성벽이 사라졌다고 기행문을 쓴 것만으로 풍납토성왕성설이 등장한 것인지요??
그러면 그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왜 풍납토성을 발굴하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이유는 풍납토성에서 백제 중앙지역 유물들과 함께 백제 지방산, 가야산, 중국산 유물들이 다량으로 확인되고 있어
>>> 6. 백제와 가야산 유물들의 제작 시기는 언제인지요?? 중국산 유물보다 제작시기가 한참 늦어지는 것은 아닌지요??
중국산 유물들의 제작시기는 잘해봐야 5세기 무렵이고, 백제산이라 생각되는 유물과 함께 출토되었다면 시기는 더 늦춰지는 것 아닌지요? 그렇다면 한성백제 시대보다 한참 뒤늦어지는 것은 아닌지를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풍납토성이 문물교류 및 정치 중심지로 인식되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토성의 축조기법이 중국 왕성들과 유사성을 보이면서 비교대상이 되는데도 있습니다.
>>> 7. 한강으로 인해 문물교류의 중심지로는 생각할 수 있겠으나 정치 중심지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고위 정치인들이 잠자다 익사할지도 모르는 그런 곳에 왕궁을 짓거나 주거를 정하였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천 의림지의 제방도 풍납토성과 같은 축조 기법이라 하던데 그렇다면 그것도 왕성인지요??
8. 오히려 발굴유물이 죄다 중국제이고, 토성의 축조기법도 중국기법이며, 중국의 왕성이 강변에 위치한 것이 있다는 점으로 왕궁이라면 되려 일본이 주장하는 대방군에 더욱 가까워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왕궁이 강가에 위치한다 하더라도 풍납토성처럼 바로 침수당할 환경에 위치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일례로 현존치 않는 풍납토성 서성벽이 을축년 대홍수로 사라졌다고 주장하시는 것만 봐도 바로 한강물에 잠길 위치라는 문제가 있다는 것 아닌지요??
어떠한 역사서에도 민가가 홍수로 떠내려 갔다는 기록은 있어도 백제왕궁이 홍수로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은 잘 아시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9. 문화재라는 관점적 차원을 떠나 보면, 주장하시는 대로 대부분의 것이 중국제, 중국기법이 맞다면 우리가 과연 이것을 갖고서 자랑스러워 해야 할지 역시 의문입니다......
이러한 주장들로 우리 백제, 해상왕국으로 자랑스러웠던 백제가 마치 중국의 속국 중 하나였을까 하는 느낌은 안드시는 건지 되려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또한 우리나라보다 문화적 우월성을 주창하는 일본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할 수가 있을련지요???
이번에 언론을 통해 보도된 발굴현장은 유실된 서성벽 바로 안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 10. 분명히 지난번 민원제기시에는 서성벽의 유실은 '추정'된다고 답하였는데, 이제는 유실된 것으로 '단정'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현대판 콘크리트 기법으로 지어진 그정도의 성벽이라면 존재하는 성벽처럼 무너지지 않고 그냥 잠겼다가 다시 드러난다고 생각되는데,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번 장마때 십여미터도 안되는 토사가 을축년 당시의 강우량과 비슷할뿐 아니라 한강 상류에 위치한 댐등에서 저장된 물을 방류함으로 인해 유속이 더 빨랐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잠겼다가 다시 드러났습니다....
십여미터도 아니고 무려 일킬로 미터 이상을 받쳐주고 현대판 콘크리트기법인 판축기법으로 만들어진 서성벽이 어떤 이유로 현존하는 성벽들과 달리 사라져 버렸는지를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11.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전에 작성된 고지도에서 조차 이미 서성벽이 없엇던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 주시려는지요.....
기존에 서성벽이 잔존하는 것으로 확인하였다는 발표는 천호동으로부터 풍납동 중심부 일대까지 내려오는 풍납토성과 동일한 기법으로 만들어졌을 제방의 일부를 확인한 것은 아닌지 판단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지역은 그동안 발굴성과로 볼 때 우리 나라에서 시기가 가장 빠른 도로와 석축수로, 그리고 가장 규모가 큰 건물지 등이 확인된 바 있어 백제 당시 궁궐 주변에 위치해 있던 기간시설물이나 공공시설물 등이 조성된 지역으로 확인되었습니다.
>>> 12. 10년 전 발굴조사에서는 그 도로를 마치 서성벽이 관통하는 듯한 발표를 하였는데, 그렇다면 도로가 끊겨지거나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닌지, 내용이 달라진 것인지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또한 그 도로에서는 나뒹구는 어추가 발견이 되었고 혹자들은 고기잡으러 가는 어도라고 하는데, 우리들의 일반적 상식과 달리 감히 왕이 다니는 길에 과연 그런 물건들이 널려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하겠습니다...
규모가 큰 건물지의 규모는 25평정도로 알고 있고, 타건물지 유구가 백여평이 넘는다고 하더라도 그 구조 역시 주춧돌도 없어 기와를 얹을 수 없는 구조라면 그 건물지의 용도는 기간시설물이나 공공시설물로 볼 수 없고 군사용 토성 안에 주둔하는 군대용 막사와 비슷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또한 한성백제 당시의 주거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반지하식의 움집 혹은 기와집을 짓고 살았었습니다. 주거지가 화재로 폐기된 이후에는 인근에 위치해 있을 궁궐에 조달하기 위한 음식물 등을 보관하던 대단위 창고시설들과 하층민들의 주거지가 조성되어 풍납토성 내 도시공간의 변화양상이 확인되기도 합니다.
>>> 13. 지금 풍납토성 내 백제 왕궁은 반지하식 움집과 주춧돌도 없어 쓰러지기 쉬운 형태임에도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이번 장마에 한강변에 놓인 콘크리트와 강한 철사로 지탱시킨 나무며, 구조물들이 물의 힘을 못이겨 뿌리채 뽑혔는데,
한강물이 범람하여 떠내려가기 쉬운 곳에 주춧돌마저도 없이 기와집을 지었다고 보시는 것인지요??
14. 또한 왕궁에 움집이라면 중국에서 자금성, 만리장성, 진시황릉 등을 보고 온 외국인들에게 움집을 복원하여 관광지로 만들겠다는 의미는 아니겠지요??
이게 아니라면 있지도 않았던 규모의 왕궁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야 겠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한 필요성이 있다면 주민들의 특별한 희생에 대하여 강구되어야 할 조치에 대해서는 고민해보셨는지요??
어중간한 것들로 갯수를 늘리는 것보다도 가능한 것에 대한 집중적 육성과 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까지 조사경과를 볼 때 왕이 살았던 궁궐은 경당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북편에 위치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일대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을 때 보다 명확한 한성백제 초기 도성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 15. 기존에 국립문화재 연구소 내에서 제시한 풍납토성 복원도에 따르면 왕궁은 미래마을 일대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경당지구의 북편에 있는 것으로 말을 바꾸신 것에 대하여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16. 우리나라를 포함하는 동아시아 각국 거의 대부분의 왕성은 격자모양으로 체계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음에도 유독 풍납토성만 어떠한 구조도 갖추지 못한 엉성한 모습이며 움집과 함께 지어진 것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풍납토성복원도는 격자모양으로 현재 발굴결과와는 동떨어지게 그려져있는 것에 대하여도 설명 부탁드립니다.....
17. 국가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주민들이 단순한 추정에 의하여 기본권을 제약내지 박탈 당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 말씀해주십시요.....
또한 국가의 최상위법인 헌법의 수권을 받은 하위법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한 공익과 국가의 최상위 법인 헌법이 직접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이라는 사익을 공존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고민은 왜 없는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면 무엇인지 이에 대한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이러한 조사결과를 국민들에게 알려드리기 위해 관심있는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상시 유적설명회를 개최하여 현장을 공개하고 있으며, 풍납동 영어체험마을에 위치한 저희 전시실에서도 풍납동 197번지일대(구 미래마을부지)에서 출토된 백제유물들을 전시하여 공개하고 있습니다.
>>> 18. 왕실에서 제사지내기 위해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서 매납한 토기들이 갑자기 중국제 토기로 둔갑한 이유는 무엇이며, 동아시아 최고의 목탑지가 갑자기 우물로 바뀌어진 이유는 무엇인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19. 풍납토성내에 조선시대 이후 존재해온 도요지는 어떻게 된 것인지 사라져버린 것인지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기와류는 그 도요지에서 만들었었던 것은 아닌지요??
또한 현재 문화재청에서는 풍납동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 송파구청, 시민단체, 풍납동 대책위원회 등의 의견을 수렴하여 “풍납토성 보존관리 및 활용 기본계획안”을 마련하였고, 서울시에서는 이에 대한 세부 시행계획을 수립 중에 있습니다.
>>> 20. 문화재청은 풍납동주민들의 의견을 수립하여 계획안에 반드시 반영한다고 하였고 그에 따라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가 나왔습니다.....
최소한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고 봅니다.....
더우기 개인이 한 약속이 아니라 국가기관이 먼저 제시한 약속입니다.....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한 계획안이 나올 수 있도록 약속을 반드시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왕궁은 방어를 위해 반드시 성벽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한 성벽은 열린 공간이 없이 둘러싸야만 합니다.
방어를 위해서 반드시 그래야 하고 거의 모든 왕성은 그렇게 둘러싸여지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초기 학계와 발굴 사학자 고고학자들은 풍납토성의 서벽은 존재하지 않았고 있어보이는 것은 제방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 작년 동양대학교 김운회교수님의 글을 보면, 풍납토성은 개로왕 때 쌓은 제방이라고 합니다......
- 존재하는 천호동제방 안쪽에 위치한 것이 풍납토성의 서성벽인데,
보다 한강에 가까우며, 바깥쪽에 놓인 동일한 구조의 천호동 제방은 오히려 현존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이되지 않습니다....
- 한강에 보다 가까이 접한 풍납토성의 서남벽은 잔존하는데, 오히려 멀리 떨어진 서북벽만 유실된다는 것도 설명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 작년 장마는 을축년 대홍수 당시와 유사한 강우량을 보였으며, 상류 댐들이 방류를 해서 유속은 오히려 더 빠른 상황이었습니다....
- 하지만 유실되었다고 보는 서성벽보다 한강벽에 가깝게 쌓아 놓은 불과 십여미터정도의 토사는 잠겼다 다시 그대로 형체를 드러내었습니다....
- 불과 십여미터의 토사도 유실되지 않았는데,
유실되었다는 현대판 코크리트 기법인 판축기법으로 만들어진 풍납토성의 서성벽은 무려 1500여미터 이상을 뒤에서 받쳐주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설명이 어렵습니다.....
- 단순하게 과거에는 지형이 달랐을 것이라는 말들로도 역시,
현존하는 풍납토성의 동, 남, 북성벽에 대해 설명이 불가하고, 있었다면 잔존했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 더우기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는 서성벽은 한강물의 흐름에 맞서지 않고 평행하게 흐르며,
서성벽이 유실될 정도면 한강물에 맞서는 북성벽, 남성벽마저도 유실되어 없어졌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풍납토성에서 현재 발견된 대부분의 집터는 기둥을 지탱해주는 주춧돌도 없이 강변 모래위에 만든 움집의 형태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왕궁, 대궐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아주 취약한 형태입니다....
- 작년 장마에 한강공원에 철사와 콘크리트구조물로 지탱해놓은 나무와 시설물들은 잠겼다 다시 나온 토사와는 달리 뿌리채 뽑히고 넘어졌습니다....
최근까지도 상습침수지로써 언제 익사할지도 모르는 곳에 지어진 이러한 형태의 집들은 기와조차 올리기 힘들며,
이곳에 살았다면 수시로 집이 무너졌을 것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주거형태가 나타나지 못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 지난 10년동안 세계적인 관광지라 하였던 풍납토성을 보기위해 찾아온 외국인 관광객은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외국인관광객은 물론 국내 관광객조차 거의 없다시피 한데,
국내에서만 세계적인 관광지라면서 오판을 유도하여, 문화재와 주민의 공존을 추구하는 풍납동의 방향성에 오히려 차질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부분은 문화재를 폄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빨리 진실이 밝혀지고,
이에 대한 해결책들이 보다 일찍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풍납토성 성벽·해자 인공여부 논란 “연구소 경솔한 발굴” 비난 쏟아져
서울 풍납토성을 발굴조사해온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홍역을 치르고 있다. 지난 12일 한성 백제시대의 거대성벽과 해자유적이 발견된 것으로 발표한 풍납토성 남서쪽 삼표산업 사옥터 유적의 성격을 놓고 학계에서 이례적으로 비판적 견해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발굴된 거대 자갈무더기 층과 윗쪽 둔덕을 인공해자와 성벽시설로 추정했던 연구소쪽 해석에 대해 상당수 고고학자들은 “근거가 미흡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애초 연구소쪽은 언론에 성벽 기초부분과 이와 연결된 인공해자 흔적으로 보이는 자갈층을 발견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설명회 뒤의 추가발굴에서 이런 가설은 일부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자갈층 표면에서 조선시대 자기와 백제토기 조각들이 뒤섞인 채 발견된데다 자갈층 아랫쪽을 갈라본 결과 모래층과 자갈층이 뒤섞인 자연 퇴적층으로 판명됐기 때문이다.
이는 곧 현재 드러난 자갈층 표면이 백제시대 해자바닥이 아니며 성벽시설과도 인공적으로 연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뜻한다.
성벽 기초로 추정한 부분도 흙을 층으로 다져 쌓은 판축 흔적이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인공벽으로 단정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이영훈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 권오영 한신대 교수 등은 성벽이 자연제방이며 성벽 안에서 나왔다는 1∼2세기 백제토기도 성벽보다 오래된 제방 위의 주거지터 유물일 공산이 크다고 주장한다. 연구소쪽은 문화재청에 낸 약식보고서에서 해자와 성벽 기초 추정부분이 자연지형일 수도 있다고 견해를 수정했으나 해석이 경솔했다는 비판은 계속되는 형편이다.
발굴을 담당한 신희권 학예사는 “성벽 기초부 끝자락에 99년 동벽 발굴 때 나온 것처럼 돌을 박은 인공석렬흔적이 나왔고, 성외벽 보강용으로 입힌 듯한 점토층 덩어리도 보여 성벽으로 추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자갈층도 바닥돌 가운데 손으로 깬 할석들이 있어 자연퇴적층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31일 서울·경기 고고학회 모임에서는 성벽의 실제 여부를 놓고 신 학예사와 이영훈 고고부장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연구소쪽은 성벽 실체 확인을 위해 터 동쪽 추가발굴을 계획중이나 이번 논란으로 국가기관의 공신력에 적지않은 상처를 입게됐다. 권오영 한신대 교수는 “해석 논란을 떠나 발굴과정에서 세부준비가 다소 미흡했다. 사전에 지질학자 등 전문가 자문을 듣지않은 것이 아쉽다”고 했다. 누구나 공감할 실증적 단서 확보가 발굴의 금도임을 재확인시켜준 셈이다. 노형석 기자
===============[연구소의 반론]==========================
풍납토성 삼표산업 사옥부지 발굴조사 관련 국립문화재연구소 입장
내용 한겨레신문(4월 3일자 39면)에 게재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풍납토성 발굴조사 관련기사 내용중 일부가 사실과 다르게 보도된 부분이 있어 이를 바로잡고자 하며, 또한 최근 일부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논란이 일고 있는 풍납토성 삼표산업 사옥 신축부지 발굴조사 결과와 관련하여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공식적인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밝힙니다.
한겨레신문(4월 3일자 39면) 기사에는 "자갈층 하부를 갈라본 결과 후대의 조선시대 자기와 백제토기 조각들이 섞여 나와 교란된 퇴적층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명됐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 내용입니다.
지난 3월 12일 개최한 현장설명회 당시 노출된 자갈층(연구소에서는 이를 '부석유구'로 표현한 바 있음) 사이에서 백제시대 토기편과 함께 조선시대 자기편 등의 유물이 함께 출토되어 이를 확인하기 위해 자갈층 하부를 절개해 본 결과 맨 위층의 자갈층을 제외한 그 아래층으로의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1m 이상의 자갈과 모래가 섞인 퇴적층내에서 순수한 백제시대 토기편만이 출토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은 문화재청에 제출한 약보고서와 현장설명회 자료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백제시대에 조성된 혹은 백제시대에 존재했던 추정 해자가 조선시대까지 존속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되는 것이며,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자갈층 형성 시점 이후에 현재와 같은 퇴적 양상이 유지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성벽 기저부의 성격과 관련된 인공성 여부 논란은 현재 어느 입장에서도 명확한 증거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막연히 자연제방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에게 제기하고 싶은 몇 가지 문제를 제시하는 바이며(별첨자료 참조),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성격을 구명하기 위한 풍납토성 서남벽 일대의 학술 발굴조사를 계획하고 있음을 또한 알려드립니다.
다만 이같이 학술적으로 뚜렷한 결론이 도출되지 않은 시점에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이 경솔한 발굴조사라는 등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단정지어 보도하고 국가연구기관의 공신력을 문제삼는 일부 언론의 공정치 못한 보도 행위는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기사를 기대하는 국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심히 우려되는 바이며, 금후부터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술적인 토론과 논의의 장이 펼쳐지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반격]-------------------
문화재연구소 "풍납토성 성벽.해자 유적 확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강과 인접한 풍납토성 서쪽 성벽 일대에서 최근 발굴된 '성벽' 및 자갈층은 성곽이나 해자의 흔적이 아니라 자연제방 및 자연도랑의 흔적이라는 고고학계 일부의 주장에 대해 발굴단인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가 "타당성 없는 억측"이라며 정면대응에 나섰다.
연구소는 충남대 박순발, 한신대 이남규 교수와 이영훈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을 비롯한 일부 학자와 몇몇 언론이 이런 요지의 주장을 펴고 있는 데 대해 연구소측의 당초 발표대로 이 유적들은 인공성벽과 해자의 흔적이 확실하다고 7일 말했다.
연구소는 '풍납토성 삼표산업 사옥부지 발굴조사 관련 국립문화재연구소 입장'이라는 글에서 성벽 바깥쪽으로 폭 20m 이상이 확인된 자갈층의 하부 일부를 절개한 결과 유물로는 백제시대 토기편만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반면 자갈층 상부에서는 백제유물과 조선시대 유물이 혼합돼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자갈층은 백제시대에 존재한 추정 해자가 조선시대까지 존속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되는 것이며,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자갈층 형성 시점 이후에 현재와 같은 퇴적 양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또 자갈층 안쪽에서 확인된 대규모 흙벽이 자연제방이며, 인공성벽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인공성벽이라는 데 아무런 의심이 없는 풍납토성 동쪽 성벽에서 확인된 것과 동일한 모티브의 층위가 서벽에서도 확인됐다"고 지적했다.
연구소는 이와 함께 나아가 자연제방이라고 학계 일부가 주장하는 성벽 기저부 점토층 곳곳에서 목탄편과 기원 전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풍납동식 무문토기편이 출토되고 있다고 덧붙이면서 "만약 이 층이 순수한 자연제방이라고 한다면 이같은 현상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앞서 박순발 교수 등은 문화재연구소가 인공성벽 및 해자 흔적이라고 발표한 내용에 대해 자연제방이나 단순한 강벽퇴적층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성벽'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또한 자연제방 위에 조성한 취락유적일 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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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대응하는 문화재연구소
“우리 해석에 찬동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왜 공신력에 상처를 입었다는 거죠”
초기백제 도읍터로 유력한 서울 풍납토성 서쪽 삼표산업 사옥터 발굴을 맡은 국립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이런 불만을 터뜨렸다. 지난달 발견된 인공연못(해자)과 성벽 추정 유적의 인공축조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학계 반론을 소개한 〈한겨레〉 기사(3일치 39면)를 겨냥한 항변이었다. 연구소 쪽은 한술 더 떠 4일 “일부 언론이 사실과 다른 내용을 단정짓는 불공정 보도를 한다”는 자료도 배포했다.
애초 연구소 쪽은 지난달 12일 현장설명회 보도자료에 ‘처음 대규모 해자 확인’이란 제목을 달았다. 3세기 전의 성벽과 해자를 확인했으며, 해자 바닥시설인 듯한 자갈층(부석유구)도 축조됐다는 내용이었다. 연구소 쪽은 취재진에게 “성벽까지 연결된 인공해자가 확실하며, 성벽 안 발굴토기들은 의식용 도구”라는 설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이후 풍선이 바람 빠지듯 쪼그라들고 있다.
이영훈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 최병현 숭실대 교수 등이 인공성벽의 증거인 흙다짐층이 없다는 견해를 제기했고, 자갈층 아래쪽도 자연퇴적층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결국 연구소는 “성벽 기초부와 자갈층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식으로 약식보고서를 써야 했고, 지난달 31일 서울·경기고고학회에서도 자연제방 가능성을 수긍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학계 비판은 국가기관이 발굴 과정에서 보인 신중하지 못한 대응을 문제삼은 것이다. 성벽과 해자추정 유적이 복잡한 퇴적층인 만큼 지질 전문가와 학계 자문을 구하고,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놔야 했다는 의견들이다. 현장설명회에 갔다는 한 연구자는 “단정적 해석의 위험성을 짚은 지적들인데, 연구소 쪽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했다.
노형석 문화생활부 기자
서울시는 9일 “토성외곽 재건축부지 4곳에 대해 건국대에 약시굴을 의뢰한 결과 토성 서벽 외곽에 있는 삼표산업 부지, 즉 풍납2동 309의 6번지 4~5m 깊이의 땅속에서 두께 2m 가량의 거무스레한 개흙층(뻘층)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또 토성의 동벽 외곽에 있는 동산연립 재건축부지(409의 3번지)에 대한 2차 시굴 결과에서도 6종류의 백제토기편이 발굴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약시굴을 맡은 최무장 건국대 교수는 “재건축부지 4곳 모두에서 별다른 문화유적층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최교수는 “발견된 뻘층은 풍납토성이 축조되기 이전에 홍수 등으로 한강 범람이 이루어짐에 따라 생긴 것”이라면서 해자와는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또 “풍납토성은 주거형태를 위한 것보다는 한강물 범람 방지를 위한 제방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제토기편이 발견된 곳은 교란층이므로 큰 의미가 없다는 게 최교수의 주장이기도 하다.
최교수는 “풍납토성은 왕성이 아니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라면서
“만약 해자가 있었다면 현재 토성 동벽과 강동빌라 사이에 나 있는 10m 도로 정도의 폭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양대 김운회교수님의 최근 글을 보면......
개로왕은 장수왕이 보낸 첩자인 도림(道琳)이라는 승려의 꼬임에 빠져 바둑으로 세월을 탕진하다가, 도림의 강력한 권유로 한강(아리수)의 돌을 가져다가 선왕의 무덤을 새로이 만들고,
성곽을 새로이 수리하고 백성들의 가옥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현재의 금단산[숭산(崇山)]에서 풍납리[사성(蛇城)]에 이르는 긴 제방을 만들어 국가재정을 고갈시키고 민생은 파탄상태에 빠지게 됩니다(이 제방이 오늘날의 풍납토성이라고 합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학자들은 풍납토성의 서북쪽 성벽이 이 때 쓸려 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1917년 다이쇼(大正) 6년에 작성된 풍납토성 일대지도를 보면 서북쪽 성벽이 나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18년 지형도를 통해 보아도 1925년 고지도와 같이 제방의 흔적은 있어도 서북쪽 성벽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1925년 고지도를 보아도,, 풍납토성의 서북벽은 없었습니다......
아울러 1918년 고지도와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
1925년 홍수로 서북벽이 유실되었다는 말은 일본인 학자의 생각을 단순히 옮겨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홍수에 유실되어 안보인다는 암사동 방향 서북벽은 한강에 멀리 있고,,
지금도 잔존하는 잠실방향의 서남벽은 오히려 한강에 무척 가깝게 위치해 있었습니다.......
서벽은 본래 없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홍수로 인한 한강물 범람으로 인해 서벽이 유실되었다면,,
한강에 보다 근접한 잠실방향의 서벽이 먼저 유실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존재한다고 보고 그려진 고지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물길보다 높게 있는 자연제방(둔덕)을 착각하였거나,,
타원형으로 둘러싸인 암사동토성을 보고서 추측하였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1934년 고지도를 보아도,,
a 암사동토성 / b 풍납토성 / c 몽촌토성
b의 풍납토성의 서벽은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히 풍납토성이 왕성이라고 말한 이들은,,
풍납토성의 서쪽 한강변 토성벽이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하였습니다....
지도를 확대해 본 결과....
멸실되었다는 한강변 토성벽과 이어져 있었을 토성벽이 암사동쪽과 잠실쪽으로 남아있는 것이 육안으로 확인될 것입니다....
즉, 대홍수로 완전히 멸실되었다는 토성벽이 벌어진채로 왜 남겨져 있을까요??
그것만 남기고 무려 1.5킬로미터에 달하는 토성벽은 멸실되어 없어지고,,
바깥쪽은 남기고 안쪽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인가요??
1937년 고지도를 보면 1934년에 한강물에 잠긴 서남쪽 토성벽이 그대로 잔존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1925년에 존재하고 1934년에 한강물에 잠겨 사라져 버린 것 같았던 서남쪽 토성벽은,,
1937년 한강물의 수위가 낮아지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즉, 풍납토성의 서벽은 홍수나 한강물로 유실되는 것이 아니라, 잠겼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한강물이 불어나면 잠겨버릴 그 위치이기 때문에 서벽이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일제하의 필지구분을 통해 서북쪽 성벽이 남겨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데,
1934년 지도를 통해 한강물에 잠긴 지역은 필지가 포락(물에 잠겨 개인소유권이 상실됨)되었으므로,
토성벽에 의해 필지가 구분된 것이 아니라,
그 부근 토지는 한강과 홍수에 의해 포락 멸실(소유권상실)이 되었다가 다시 멸실 회복(소유권회복) 되는 식으로 필지가 구분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서북쪽 토성벽이 있었는데 멸실되었다는 주장을 하시려면 이런 것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한강물의 흐름....
토성벽이 강물의 흐름과 직각인 경우와 평행인 경우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홍수로 인하여 멸실될 정도라면,,
한강에 평행하게 놓여진 토성벽보다는 직각으로 놓여진 토성벽의 멸실이 더 심해야 하겠지요....
적어도 풍납토성의 토성벽이 무너질 정도이면, 암사동 토성 역시 어느 정도는 멸실되었어야 겠죠??
판축기법으로 흙을 쪄서 지어, 일명 콘크리트기법으로 정말 견고하다던 풍납토성,,
한강물에 평행하게 지어졌다면 그 토성벽이 왜 전혀 안보일까요?
토성벽은 물의 흐름에 맞서지 않고 평행하게 있으며,
뻘흙을 쪄서 견고하고 수백만톤의 흙이 들어갔다는 토성벽은 1~2미터도 아닌 무려 1.5킬로미터이상을 뒤에서 받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을까요? 본래부터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학설 중에 왕성이 아니라 방제용 토성(제방)이라는 의견이 왜 나왔는지도 이해가 될 듯 합니다.....
여러 고지도를 통해 한강변 쪽으로는 토성벽이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그렇다면 더욱 왕궁으로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왕궁은 평지였기 때문에 방어를 위해 왕궁 전체를 토성으로 둘러 쌓았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풍납동은 한강변 수해지였었습니다....
어느 사서를 보더라도 한성백제기에 민가가 물에 잠겼다는 글은 있지만, 백제왕궁이 피해를 입었다는 글은 없습니다....
1934년 지도를 보면 풍납토성은 바로 한강에 접하고 있어 바라보기만 해도 그 위태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민가는 왕궁보다 한강에 인접하였을 것인 바, 지도를 통해 볼 때 민가는 한강에 잠수될 자리에 있습니다...
만약 민가가 왕궁의 뒤에 위치한다 가정하면, 당연히 왕궁이 먼저 피해를 입었어야 하겠죠.....
이정도로 한강에 가까웠다면, 설령 한강변에 토성벽이 존재했었다고 가정한다 해도 왕궁이 홍수의 피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왕궁은 한강변 풍납토성 내에 위치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지금의 잠실지역은 과거에 풍납동까지 이르는 '잠실도'라는 섬이었습니다....
한강이라는 큰 폭의 강물이 잠실도를 만나 갑자기 강폭이 줄어들게 되니 그 물이 풍납동쪽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물을 막아내기 위해 풍납토성의 일부는 평행하게 일부는 안쪽으로 들어오게 토성이 쌓여지고,
잠실방향 풍납토성의 일부 잔존하는 서남벽은 흘러들어오는 강물을 일차적으로 막아내기 위해 존재한 것 같습니다.....
만약에 그 물로 서벽이 유실되었다면 그 곳의 토성벽이 먼저 없어졌야 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모로 보나 풍납토성의 서벽은 본래부터 없었을 것같은 생각입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풍납토성의 서벽이 무너져 풍납동 위에 쌓인 것 아니냐는 말을 했다는데,
그렇다면 풍납토성 바깥쪽 벌말의 높이와 안쪽 성안말의 높이가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토성만 빼면 안팎의 높이가 똑 같으니 토성벽이 무너져 풍납동에 쌓인 것이라는 말은 좀처럼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풍납토성 이외에 다른 곳의 유적지도 죄다 현재의 땅 밑에 존재하는데,
그럼 전국토가 토성벽이 무너져 유적지가 땅밑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듯이, 말이 안되는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풍납토성이 물을 막아 보호하려는 곳이 바로 '성안말(성 안쪽 마을; 성내동 )'입니다....
풍납토성 안에 있는 마을은 '벌말(벌판이 있는 마을)'입니다.....
다른 왕경들에 비하여 1/10 정도로 작은 풍납토성이 왕성이고, 그만큼 대단했다면,,
단순하게 토성 내부에 벌판이 있었을리가 만무하고(왕경이 한없이 더 작아지므로), 그 명칭도 '벌말'이라고 하기 보다는 더 중요한 그곳이 오히려 '성안말'이 되어야 할 것이며, '성안말'은 오히려 '성밖말'이 되어야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풍납토성 안쪽 '벌말'이 '성안말'이 아닌 것으로 부터도 풍납토성의 한강쪽 토성벽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둘러 쌓은 성이 아닌 것 같은 생각 때문입니다....
여름 장마엔 제방의 역할을 하고, 다른 때에는 벌말을 통해서 벌판에 군사를 훈련시키기 좋은 곳이라는 것을 그 명칭만 봐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배암드리'에 관하여.....
이 마을에 바람드리성, 즉 풍납리토성이 있으므로 '바람드리' 또는 한자음으로 '풍납리(風納里)'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일설에는 이 토성을 사성(蛇城)이라고도 하는데,
사(蛇)는 '배암'으로서 '바람'과 음이 유사하고, 또 '드리'는 납(納)의 뜻이 아니라 평야의 뜻인 '들'로서 고대에는 취락의 성읍(城邑)을 뜻하는 말이며 그 발음은 '들'이외에 '들' '드라' '드레' '다라' '달래' '드르' 등 방음이 많다.
따라서 '바람드리'는 사성(蛇城)을 말하는 '배암드르' 혹은 '배암드리'의 와전이며, 백제시대에는 한자로 사성(蛇城)이라 썼지만 구두(口頭)로 방음을 사용한 것이 '바람드리'로 되어 일제 시대에 '풍납'으로 표기되어진 것이다.
한강공원에서 운동하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풍납동 보다도 오히려 잠실의 바람이 더욱 거세고, 암사동이 더 차갑습니다.....
모두 한강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즉, 바람이 들어와서 풍납이라는 말은 한강변 동네에 있어서 전혀 특징적인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풍납토성 자체 또는 제방과 함께 타원형이 아닌 즉, 둘러싸지 않은 형태로써 뱀의 형상을 한 것을 일컫는 것이거나,
아니면 풍납토성 인근에 뱀이 많았던 것을 통하여 배암드리, 한자로는 사성이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풍납토성은 암사동토성, 몽촌토성과 삼성동토성으로 이어지는 방어라인으로 볼 수 있고, 이 토성들은 아울러 한강물에 의한 침수 피해를 방지하는 제방의 역할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를 통해 볼 때, 한성백제의 왕궁은 이 거대한 라인을 통해 방어하고자 하는 곳에 위치했을 것이지, 풍납토성 내의 조그마한 곳은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풍납동은 한강을 이용한 교역지이며 도요지로써 무수한 토기류가 발견되는데. 이 교역지를 위해 방어라인 중 하나인 풍납토성은 안쪽으로 들어간 모양의 잘라진 육각형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것 같은 생각입니다......
단지 제 생각이 이러할 뿐이고, 나머지는 사학자님들과 고고학자님들께서 밝혀주셔야 할 몫으로 생각됩니다....
풍납토성은 사성(蛇城)으로 군사용토성과 제방의 역할을 하였고, 풍납동은 교역지이며, 도요지라고 생각합니다.....
을축년 대홍수로 한강인도교의 최고수위는 11.66㎜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풍납토성 서벽의 존재여부에 관하여 논란이 많습니다........
마침 장마가 있었고 을축년 대홍수 당시 한강물의 높이가 대략 11m라고 하는데,
얼마전 천호대교에서 바라본 높이는 이보다 높은 13m이상이었습니다.....
많았던 강우량뿐만 아니라 한강상류 여러개 댐에서 방류를 하였기 때문에 유속까지도 높았습니다....
위 사진을 보면 한강에 접하는 곳에 두 개의 흙더미들이 있었으나,
하나는 완전히 잠긴 모습(오른쪽)이고, 다른 하나는 대부분이 잠긴 모습(왼쪽)입니다.....
비가 그치고 시간이 한참 지나자 오른편에 있던 흙더미가 점차 모습을 드러냅니다.....
한참만에 드디어 흙더미가 대부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자갈 위에 덮여진 얇은 층의 흙은 강물에 흘러가거나 자갈들 속 틈새로 들어갔기 때문에
마치 흙더미가 자갈들로 덮힌듯이 보입니다.....
잔해들을 통해 물의 높이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공원 위로 대략 2m 20cm 정도 강물이 올라 왔습니다.....
콘크리트 구조물을 뽑아 내고 나무를 뿌리채 뽑아버린 한강물의 위력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흙더미들에겐 큰 힘을 주지 못했습니다.......
콘크리트 기법이라는 판축기법으로 지어진 풍납토성의 서벽이 한강에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기존의 문화재 정책과 방향, 즉 운용적인 면이 적지 않게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지금 현재도 미래세대에 있어서는 또 다른 문화입니다.....
전 국토가 대부분 문화재를 품고 있고, 더우기 좁은 땅덩어리이기에....
사람을 고려하지 않은 구시대적인 '보존일변도'의 정책은 변화가 필요하고,,
그러한 변화가 정책적 목표로 정해져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 적용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보존과 개발의 병행, 사람과 문화재, 과거와 현대의 공존,,
즉, 현대적 의미에서 문화재는 '활용'이라는 측면을 중요시 합니다....
문화재는 있고 사람은 없는 것이 아니라,
문화재를 사람이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기 때문에,
대책없는 개발의 보류와 문화재의 파괴가 있기 전에,
보존과 개발의 공존과 균형점, 공익과 사익의 조화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문화재가 개발로 인해 심각하게 파괴되어간다'는 말과 함께,,
'문화재로 인해 기본권이 심각한 침해를 받고 있다'는 말이 등장하지 않도록.....
조화와 균형점....
과거와 현대 그리고 미래의 공영을 위해 노력하는 현대적인 관점이 더욱 필요할 때입니다......
여러가지 가치를 조화롭게 함께 살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를 위해 또 다른 중요한 가치를 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향후 마련될 풍납동 마스터플랜에도 이러한 내용들과 함께,
주민들의 설문조사 내용이 반드시 반영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화재지역은 특징적으로 관광자원화 될 수 있는 지역을 특화해서 집중 양성하고,
나머지 지역은 눈부시게 발전시켜 또 다른 관광자원화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어중간하게 양만 늘린다고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비교적 잘 가꾸어진 몽촌토성(올림픽공원)에도 외국인 관광객은 거의 보이지 않고 인근주민들만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문화재로 인해 도시가 발전되지 못하고, 여러가지 경관에 관한 제한을 주면서도,
오히려 관광지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인가 전반적인 계획을 갖추어 문화와 관광의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정말 많은 고민을 해보아야 합니다.....
아시아 주요 국가와 경쟁에서 이길 수 있게 관광지 매력도를 한층 더 높여야 할 것입니다.....
좀 더 다각도로 연구되어 우리나라에도 좋은 문화 관광지가 만들어졌으면 하는게 저의 바램입니다.....
풍납동은 아름다운 보존과 눈부신 개발이 공존하는 색다른 관광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문화재 뿐만 아니라 '개발'도 관광자원의 한 축이라는 것을 반드시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풍납토성의 역사성과 관광지화를 이미 많은 주택과 아파트가 자리잡은 풍납동 내부에서만 찾으려 하지 말고,
풍납동 일부, 토성자체와 세장지 공원, 한강공원, 몽촌토성, 한성백제박물관, 백제고분군, 방이동 습지, 자전거테마공원 등을 연계하여 적극 이용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이주여부 등을 고민할 필요없이, 백제풍의 경관에 어울리는 주민들을 위한 고층건물을 측면에 짓게 해주고,
(이러한 건물의 지하 및 저층에는 전시관, 그 위로는 도서관 등을 포함하는 종합적 주민 복지시설과 동청사, 학교, 또 그 위나 아니면 옆으로 주거 및 사무실 등이 위치하며, 밖으로는 유적공원과 학교시설등이 체계적으로 갖추도록 합니다.....)
나머지 면적은 서울시에 기부채납과 보상을 병행하여 더불어 문화재를 보존하는 방안도 염두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댓글 우리회원이 올린 이글을 고집불통 문화재위원들이 읽어보았으면 합니다. 수고하섰습니다.
주민의 애환을 잘 표현해 주신것, 고맙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치는 영,호남의 주도였습니다. 그래서 충청권의 표를 얻는자는 무조건 당선이 됨니다. 즉 우리도 하나로 합쳐서 움직인다면, 세종시 보다더 많은 관심속에서 쉽게 해결되겠지만 ]. 각개전투하듯 행동하고 민원제기하면, 민원일뿐입니다.
맞습니다 각개전투민원은 앵무세 대답뿐입니다.주민다수의 서명날인 받아 민원넣고 행동으로 권리행사해야 함네다~~~~
다비도프는 비주얼과 함께 의견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고생 많이 하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