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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안원에체포되었던 순간
@@ 정확히 10년전 홍제동 성당 이 세계역사상 최초로 중국땅에 래지오를 전파하고
중국역사상 최초로 레지오 쁘레시디움을 창설한 사실을 아시나요?@@
1) 중국땅에 첫 발걸음
지금도 바티칸에서 중국의 천주교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10년전만해도 중국은 국가에서
종교의 자유라는 언어자체는 인정한다지만 실제적으로는 사슬이 퍼렇게 통제하고 있었다.
내가 서강대학 출신 기업인(사장단) 3000여명의모임인 *서강기업인회*회장직을
맡고있던시절 한중수교도 되기전에 협찬으로 학생/대학원생/신부님(후에 총장이 되심)/
수녀님/교직원/교수/졸업생/기업인등 43 명이 안전기획부의 허가를 받아 1990년에
홍콩을 거쳐 백두산에 *남북 통일을 위한 백두산상 미사*를 드리러 갔다.
영새를 50년전에 받았지만 이때에는 장로교신자였던 부인을 따라 영락교회에 다니던때였다.
류장선신부님깨서 저에게 부인에게 양해를 받으면 고백성사를 주겠으니 함께 미사에 참여
하자는 권유로 국제전화걸었더니 한수더떠 자기도 성당에 나오갰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것이 중국에의 첫 발걸음 이었다.
2) 중국에 한국어미사를 위햐 묵주/주일미사책을 10년간 수도없이 전달하다.
이후 회사의 무역업무로 계속 북경/산동성/료녕성/흑룡강성/광동성/상해등지를
출장다니면서 묵주를 한번에 30여개씩 숨겨가지고 다니면서 신자들에게 주었다.
그러던중 무순성당에 150 여명의 한국민족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뒤로는 시간날때마다 그곳을 들렀고 신자중 시립병원 부원장이었던 김일정(예비자)을
만나게 되어 그의 대부가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1년후 12월 24일 영하23도의 혹한에
홍제동 본당이 아닌 무순성당을 방문하여 영세식에 참여하고 성탄전야를 덜덜 떨면서
80여명의 동포들과 밤새워가며 축제를 하였다.
각자 준비한 도시락과 사이다, 밀떡빵, 술등과 나의 찬조금으로 준비한 음식등을
긴 탁자위에 놓고 수시로 먹으면서 자매님들의 아리랑 등의 노래자랑과 부채춤도
함께 추었다. 워커힐쇼도 지루하다던 그당시 나로서는 순박하다못해 동정의 박수를
계속 보내면서 수없이 눈물을 흘리던중 쩅 ! 하느님의 현존을 접했다. 처음이었다.
이때 보좌 전영부 요셉 (중국인)신부님깨서 자신이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중국말을 모르는 노인동포들을 위해 한국어미사를 드리기로 역속했고 나는 미사경본과
매달 매일미사책 40 권과 한국어 성가책/성경 등을 10년간 부족하지 않도록 보내주었다.
중국은 종교를 타인에게 권유하거나 타국의 지원을 받거나하는 선교활동은 엄격히 법으로
금하고 있는까다로움때문에 우편으로 보낸 책을 수도없이 압수당했고 매월 전화로
학인해야만 했다. 동포를 위한 한국어미사는 매주일 11시에 배정받았다.
요셉신부님은 친한국으로 급변하여 후에 한국에 18개월간 유학오셔서 서강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주임신부로 귀임하였다. 나는 무순성당에 레지오를 발족시키겠다고
요청하여 법을 무시하고 허락을 받았다. 이후로 순탄치못한 선교활동이 시작된다.
3) 공항에서 연행당하면서 무순성당에 레지오 Pr.을 창설하다. ( 2001 년)
**지금부터는 2001년당시 선교일지를 그대로 옮깁니다 ***
중국 선교기행문
"11월에 중국선교여행을 성공시키면 내 손가락에 장을지지겠어요 " 본당에서
나와 제일 뜻이통한다는 한영창요셉형제가 나에게 몇번이나 던진말이다.
드디어 거사의날이 왔다. 2001년 11월 10일.11명의 선교단이 왕복 운임만
걷었고 한요셉과 내가 여비는 풍족히 준비했다.출발날까지 성공여부는 알수
없었고 모두에게 자신감을 주기위해 중국측에는 모두 준비되었으니 걱정말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나는 걱정투성이였다. 종교생활 40년(그당시)중 가장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였던 현장에 본당 래지오단원 10명을 데리고 가면서 이들의
안전을 어떻게 보장할수 있단말인가? "주님 살려주세요"숨가삐 기도드렸다.
시퍼렇게 눈을 부릅뜬 중국의 공안당국 **
중국은 법적으로 *타인에게 종교를 권장하는것은 위법
* 국가에 허가받지 않은기도문은 기도금지
*외국의 도움이나 외국인 전교금지
이런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죽기살기로 BOX 10여개에
* 레지오교본/성모님상/성서/ 가톨릭서적등 300여권
*레지오에 필요한 촛대를 비롯한 묵주/물품등
심양가는 비행기에 가득싣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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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1월 10일
새벽 6시에 본당에서 성체조배를 마친후 11명은 오전 7시 성당에서 제공해준 유치원버스에 타고 인천공항에가서
10시 10분 출발하는 항공기에 허겁지겁 탔다. 비행기에 타고나서부터 나는 중국공항을 빠져나갈 걱정을
하고 있는데 나 말고는 모두 첫 중국여행이라 마음이 들떠있었다. 집걱정 식구들 식사걱정도 들려왔다.
모두 초딩 소풍가는기분인데 나의 머리는 중국에 가까워갈수록 걱정투성이었다.
"성모님 당신의 군대를 만들기위해 가고있는 저의 머리속에 헝클어져있는 실오라기를 풀어주소서"
운좋게 창가에 앉은 자매님은 "어마! 중국에는 2층집도 별로없네" 꼭 소풍가는 초딩같은 소리도 들려왔다.
이제 때가 왔구나 하고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10여개의 BOX 는 나혼자만 큰 밀것이 밀고가고 10명은 짐없이
그냥 나가기로 했다. 이말을 들은 교우들은 이제서야 무언가 불안한 낌새를 느꼈다.
공항에서 10명은 빈몸으로 나갔고 나는 짐과함께 공안원에 취조실로 끌려갔다.
취조실에서 모든상자는 활짝 열려졌고 한참후에 통역관이 불려왔다.
나는 통역관이 우리 동포임을 깨닫고 "만약 내가 진술하는 말중에 불리한말을 하거든 선생님께서 유리한말로
바꾸어 전달해달라고 눈치안채게 부탁하였다. 3시간정도의 취조는 입술이 바짝 바짝 마르게 하였다.
밖으로 나간 형제자매님들이 끌려 들어올까봐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나 혼자만 끌려다녔다.
긴장속에 취조를 마치고 높은사람 앞으로 끌려갔고 나는 시종일관 중국법규를 몰랐고 한국에서는
나의 행위가 위법이 아니라는 주장만 했다. 이말이 통했는지 결론이 내려졌다.
"모르고 한것 같으니 이번한번 용서를 해주겠으나 모든 책과 성모님상은 소각하겠다"고 사인하라고
했다. 나는 30분이상 애걸하여 귀국시 다시 반송하도록 결정을 보았다. "성모님,화상입으실뻔 했어요"
겨우 풀려나 밖으로 나왔더니 나를본 임빈희자매님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안아주었고 같은 레지오
Pr.단원이었던 우종각/정도현/이홍균 형제도 눈이 붉어졌다. 나의 대자이며 무순성당 동포인 김일정도
큰차를빌려 마중나와 있었다. 심양의 신학교와 대성당을 방문한후 모든 일정을 생략하고 무순성당에
도착하자 전요셉신부님이 그시간까지 점심식사를 같이하려고 기다리고 계셨다.
전신부님은 서강대학에서 배운 유창한 한국말로 우리를 반겨주셨고 성당을 가로지르는 30m 길이의
붉은색 프랜카드에 "서울 홍제동성당의 신자분들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 " 라고 붙어 있었다.
우리는 우선 성당사제관 옆방 4개를 배정받았다. 이방들은 건립후 처음으로 손님을 맞는다고
벽에 페인트칠을 하여놓아서 머리가 아팠다.
저녁겸 점심은 수녀원 (수녀님만 80명 기거) 에서 수녀님들이 준비한 음식으로 했다. 중국술과
한국에서 사온 소주팩 한박스로 즐겁게 마신후 임빈희/나도대 자매님의 창은 동포들의 눈시울을
적셔 주었다. 동포들은 장고를 두들겼고 수녀원유사이래로 가장 시끄러웠다고 했다.
밤 11시가 되어 정도현과 나는 페인트냄새를 피해 택시를 잡아타고 김일정 대자 집(무순시립병원
부원장 관사)로 가서 새벽 2시까지 환담을 나누다가 잠들었다.
11월 11일 (주일 )
무순성당의 총 신자 12,500 명중 우리 동포신자는 150 명 정도였는데 이들을 위해 매주 11시에
조선족미사를 별도로 드린다. 이날은 중국역사상 최초로 금지된 레지오를 창립하고 첫 주회를
하는 날이다. 오전 9시부터 10:30분까지 76명(조선족과 일부 중국인)이 참석하였다.
우선 4 간부 선출부터했고 나의 대자 김일정 바오로가 초대 단장이 되었다. Pr.이름은 홍제동 본당
꾸리아의 이름 "교회의 어머니"라고 지었다.
진행은 우선 강창업이 단장대행으로 하였다. 단원 들이 몰래 숨겨온 성모님상과 교본/수첩등을
이용하여 진행했고 눈물을 머금으면서 목매인 소리로 역사적 행사를 끝냈다. 레지오 성금으로
각자 10달러와 별도로 100달러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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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촬영후 11시에 미사가 시작 되었고 미사진행중 갑자기 강론은 나보고 하라고 했다.
무릎꿇는 절을한루 신부님 안수축복을 받은후 강론대에 오르니 눈물뿐 아니라 콧물까지 나왔다.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대로 동포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성모님께서 무순성당의 성수를 중국
전지역으로 흘려보내시어 13억 인구가 천주교인이 되게 해주십사고 기도합시다 "라고 외칠때에는
신자들이 기립박수를 쳐 주었다.
미사가 끝난후 동포신자들과 수녀원에서 또 식사를 같이 하였다.
내일 일찍 압록강 (단동성당)으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저녁식사는 신부님께서 일행을 샤부샤부
집으로 초대 하셨다. 환담과 만찬후 성당돌아와서 삼종기도후 잤다.
11월 12일
아침식사후 조선족 수녀원장님께서 수녀원의 봉고차를 손수 운전하시면서 새벽 5시에 일행을
태우고 2시간달려 심양역에서 석별의 인사를 나누고 단동행 7시 기차를 탔다.
이곳저곳 초록색 복장에 붉은줄이 쳐진 공안원들때문에 다시 긴장되기 시작했다.
기차가 한시간쯤 달리자 정도현요셉이 "배고파! "하고 외쳤다. 아침도 걸렸기에 ***
기차내에는 식사할곳도 것도 없었다. 오직 맛없는 커피와 컵라면만 팔았다.
배는 고팠지만 머리속에는 무순성당의 환희로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컵라면 한개로 때운후 4시간만에 북한과 압록강에 붙어있는 단동역에 도착했다.
단동역사를 나오자 중국인 세명이 우리를 같이가자고 끌어서 우리는 삐끼라고 생각하여 피했는데
동행했던 김일정이 대화하더니 무순성당의 전신부님이 단동성당에 연락해서 나온 평복의
단동주임신부님/총회장/여신자 대표 세사람 이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북한이 접해있어
조심해야 한다며 떠날때까지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만장일치로 북조선식당에 들어가서 "진달래"
술로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불고기와 랭면으로 허기를 달래고나서 압록강을 유람한후 6.25 전쟁때 폭파된
철교밑을 거쳐 신의주땅 20여메터 근처까지 가 보았다.
배안에서 임빈희와 중국 관광객이 함께 트위스트를 추어 일행의 긴장을 퓰어주었다.
뱃노리후 신부님의 안내로 단동성당에 가서 오후3시 미사에 참여했으나 말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였다.
미사후 사제관에 들렸는데 입국시 압류되었던 성물과 책을 심양교구장(공무원) 주교님이 손써서 모두
찾아왔다는 전화가 무순신부님으로부터 왔고 일행은 만세를 불렀다. 당일치기라 일행은
야간 침대차에올랐다. 김일정씨가 외국인은 기차요금이 비싼데 그냥 중국인표를
샀으니 승차후에는 한국말을 하지말래서 나는 아래층 침대에 올랐다.
밤에 추워서 난방을 한답시고 우리칸에 붙은 화독에 무연탄을 때어 냄새가 고약했다.
11시간동안 시달리다가 새벽 5시에 대련역에 도착했다.
11월 13일
대련역에 도착한 잏행은 밤새 추위에 시달린데다 잠도 제대로 못자서 얼굴은 부어있었고 세수도 못한
상태라 목욕탕에 간답시고 삐끼에 끌려 알수없는 건물에 넘겨졌고 문이 잠긴상태로 시달렸다.
자기들이 시키는대로 밀수품을 인천공항까지 운반만 해주면 5만원씩 주겠다고 하면서 위협을
가해왔다. 임빈희의 능숙한 말솜씨로 아침한그릇씩 사먹고 겨우 소굴에서 빠져나왔다.
대련시내를 휘돌면서 간단한 쇼핑도 한후 야간 여객선에 올라 배바닥에 뒹굴면서 다음날 아침에야
인천 항구에 도착했다.
그 후
우리는 귀국후 성서 80권을 레지오 단원들에게 보냈고 (통관이 어려워 돈으로 해결했음) 무순성당 사무실에
조선족 동포들을 위해 책장몇개 준비하여 도서관을 만들었다.
3개월이 지난후 레지오 단원 선서를 위해 대표로 강창업 빅토리노를 무순에 파견하여 현지 전신부님 입회하에
각단원에게 선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눈물나는 선교활동은
가톨릭 교회의 권위적 교구 관활권 싸움으로 손을 떼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일거일동을 이홍근 주임신부님과 연희동본당에서 주관하는 꼬미시움에
보고했고 꼬미시움단장은 일일이 서울 세나투스에 보고해서 앞으로 수백만원의 활동비도
돕겠다는 약속까지 받았다. 장기적 선교를 위해 무순에 주재원을 보내겠다는 약속도 했다.
잘하면 중국전역에 수만명의 레지오 단원 모집도 가능시 되었다.
꼬미시움단장께서 홍제본당에 나를 찾아와서 우리본당 3명의 꾸리아단장 입회하에 한 약속
이었다. 돈이 필요하다기 보다는 규정상 보고했을 뿐이었다.
이것은 세나투스도 놀랐고 꼬미시움 창단후 가장 성공적 거사라며 사진도 가져갔다.
그러나 2개월이 지난다음 나에게 날라온 통지는 나의몸에 수갑을 채웠다.
서울세나투스가 인천세나투스와 교구장님간 회의끝에
@@ 중국을 관장하는 교구관활권은 인천교구에 있으므로 우리 교구에선 손을 떼라!
공식적 지원도 못하니 한달에 레지오 월간지 3권은 보조 하겠단다. @@
이통지를 받은 홍제본당 남성꾸리아 단장이었던 정문기 토마형제도 가톨릭신자라면
상부의 명령엔 절대복종해야 한다면서 나에게 씁쓸한 얼굴로 미안해 했다.
그뒤로 나는 교회에선 뒷자리에 숨어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도 마음속에선 재판이라도
하고프다.
주님, 호적을 올릴 꾸리아를 못찾아 해체된 무순성당의 #교회의 어머니 Pr.#
성모님의 군단을 기억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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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목동님이 뉘신지 통! 감이 안오내요 같은 본당 형제님일거라는 생각에는 가슴이 뿌듯합니다 홍제본당의 파이가 실로 대단하다는 대에 대하여 자부심이 생김니다
크는 나무님, 저는 주님의 말단중의 끝의 종이었습니다. 요즘은 큰 죄인입니다.
옛날에 문득 한번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새삼 읽어 보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앞으로! 앞으로! 화이팅!
글을 쓰는도중 회사일로 바쁘고 당구도치고 딴일 다하다보니
완성이 늦어지네요. 또 일본출장 있어 다녀와서 완결할께요.
완결 "꼭"보겠습니다.
지루하지않고,처음부터 흥미가 찐하게 느껴져,완결"꼭 "보고난후 신앙심이 강해지길 원합니다.
삶에 시달려 글을 도중에 지워버릴까 하는생각도 있었지만
*하늘에 별들이*님과 나눔님의 권유로 서툰 완결을 했습니다.
그당시의 기록사진이 200여장 있지만 디카가 없던시절의 사진이라 나눔님의
도움이 필요하고 한국 가톨릭 역사에 보존하고 싶네요.
중국에서 레지오 선서하였던 사람들중의 일부는 현재까지도 연락과 친지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레지오 Pr. 은 없어지는것이 아니라 "교회의 어머니"는 잠시 쉴뿐입니다.
인천교구가 되살리기를 기도드릴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