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정토학연구 5집
淨土信行 方法論
강 동 균 *
• 목 차 •
Ⅰ. 佛敎의 궁극적인 목표
Ⅱ. 淨土信行의 사상적 근거
Ⅲ. 淸淨佛國土로서의 極樂
Ⅳ. 本願의 의미
․영문초록
Ⅰ. 佛敎의 궁극적인 목표
佛敎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는 成佛이다. 성불이란 중생이 스스로 주체적으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중생에게 부처가 될 가능성이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중생 자신이 스스로 ‘佛性的 存在이다’라는 것을 自覺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오랜 시간과 難行, 苦行을 수반한 菩薩行의 실천이 요구되는 것이다. 華嚴經의 「十地品」에서는 중생이 성불하는 과정을 ‘三祇百大劫’이라고 하는 오랜 기간을 수행하여 十信․十住․十行․十廻向․十地․等覺․妙覺이라고 하는 52단계를 거쳐서 비로소 부처가 된다고 하였다. 그것을 주석한 것이 龍樹(Nāgārjuna, A.D. 150-250경)의 十住毘婆沙論이다. 십주비바사론이 화엄경 「십지품」의 해석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내용은 「십지품」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난행․고행을 주석한 것이다. 그 귀경게인 서품에서 造論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6일체의 부처와
無上의 大道와
모든 菩薩衆가운데
堅心으로 十住에 주하는 자와
聲聞과 辟支佛과
我와 我所 없는 자에게 敬禮한다.
이제 十地의 義를 해석함에
부처의 所說에 隨順하고자 한다.
처음에 여섯 구절은 불법승 삼보에 귀의할 것을 서술한 귀경게이며, 뒤에 두 구절은 「십지경」 해석의 태도를 밝힌 것이다. 거기에서 이 논은 무슨 목적으로 십지의 의를 해석하려 하는가에 대해서 열 세 가지 문답으로 밝히고 있다. 먼저 무슨 인연으로 십지의 의를 설하는가의 물음에 대해서 “무시 이래로 미혹의 대해를 왕래해서 피안에 이를 수 없는 범부를 제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답하고 있다. 두 번째 물음은 “만약 사람은 보살 십지의 수행을 하지 않으면 미혹의 대해를 건널 수 없는가”라고 묻는다. 여기에 대해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이승을 수행하는 사람도 대해를 건널 수 있지만 대승으로서 건너고자 한 자는 반드시 십지를 수행해야 한다”고 답하고 있다.
용수는 無上道를 위해서 발심하는 자가 보살이라고 설한다. 무상도란 일체의 제법을 如實知見하고 통달해서, 지혜를 완성한 불도를 향한 사람이 보살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만, 발심하기만 해서 보살이라고 할 수 없다. 반드시 무상도를 이룬 사람을 보살이라고 한다. 그런데 보살에는 堅心의 보살과 軟心의 보살이 있다. 연심의 보살은 지옥․아귀․축생이 받는 苦를 보고 두려운 마음을 일으켜, 무엇 때문에 오랫동안 미혹의 세계에서 고뇌를 받을 수 있는가 라고 해서, 보살도를 버리고 二乘의 수행에 의해서 속히 苦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견심의 보살은 이들 苦를 보고 대비의 마음을 일으켜 내가 멸도를 얻는다면 마땅히 이들을 제도해야 하리라. 대비의 마음으로써 勤行精進하면 오래지 않아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願을 일으킨다고 해서 견심의 보살을 찬탄하고 있다. 용수가 설하고자 하는 참의 보살이란 실로 이처럼 고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을 보고는 대비의 마음을 일으키고 그들을 度脫하게 하고자 하는 견심의 보살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모든 보살은 正定聚에 이르게 된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정정취에 이르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대로 성불로 이어지는 길이다.
Ⅱ. 淨土信行의 사상적 근거
1. 信方便의 易行道
十住毘婆沙論 「易行品」에서 勤行精進해서 不退轉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다. 불도를 실천하는 보살행은 결국 正定聚 不退轉에 이르는 것이며, 정정취 불퇴전을 얻으면 이제 佛果를 이룰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은 너무나 험하고 먼 길이다. 그 길을 갈 수 없는 凡夫衆生들이 佛果를 이룰 수 있는 길은 완전히 닫힌 것이 되고 만다. 거기서 용수는 보살도에는 앞에서 말한 ‘難行’의 길과 信方便의 稱名行에 의해서 재빨리 불퇴전에 이르고자 하는 ‘易行’의 두 가지 불도가 제시하였으며, 曇鸞(476-542)은 이 설에 의해서 淨土論註의 서두에서, 모든 불교를 難行道, 易行道로 구분하고 정토교를 易行道라고 判釋하였다. 道綽(562-645)은 難行易行 二道의 敎判을 바탕으로 「聖道門」・「淨土門」의 二門判을 세웠다.
용수는 십주비바사론을 짓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慈悲로서 중생을 饒益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른 인연으로써 이론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용수는 명리를 구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지금 六道에서 苦를 받고 있는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대비심으로 이 논을 만든다고 하는 뜻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利根深智의 사람은 부처님의 경전을 보는 것만으로 第一義에 통달할 수 있지만 그러한 사람을 위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도 바로 이해되지 아니하고, 독송할 수도 없는 鈍根懈慢의 사람들에 대해서 해설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둔근해만의 사람들을 십지의 보살도로 이끄는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서 용수 자신은 諦, 捨, 滅, 慧의 네 가지 공덕을 얻어 자리이타를 원만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용수가 십주비바사론을 만드는 것은 곧 보살도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불퇴전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범부를 위해서 설해진 것이 「이행품」이다. 「이행품」은 먼저 다음과 같은 물음에 의해서 시작된다.
물어 가로되, 이 阿惟越致(불퇴전)의 보살의 初事는 앞에 말하는 것 같다. 아유월치에 이르는 자는 모든 난행을 실천하고, 오래 견디고, 얻을 수 있다 하드라도, 혹은 성문․벽지불지에 떨어질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되면 大衰患이다. 助道法 가운데 설하는 것과 같다.
만약 성문지 및 벽지불지에 떨어지는 것은
이것을 보살의 죽음이라고 이름한다.
일체의 利를 상실한다.
만약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이와 같은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는데,
만약 二乘地에 떨어지면
곧 大怖畏가 된다.
지옥 가운데 떨어지더라도
필경코 부처의 이를 수 있지만,
만약 이승지에 떨어지면
필경코 불도를 얻을 수 없다.
난행을 실천해서 아유월치지를 목표하는 보살이라 하더라도 그 가운데에는 二乘에 떨어지는 자도 있다. 이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두려운 것이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은 부처에 이를 수 있지만 二乘에 떨어진 자는 그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 실로 보살의 죽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을 설하고 있다. 난행․고행에는 이승으로 떨어져서 성불을 단념하지 않으면 안될 위험성이 있다. 여기에서 제시된 것이 信方便인 것이다. 신방편으로 易行이면서 재빨리 아유월치에 이르는 길이 제시된 것이다. 이 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 게송과 같다.
만약 사람이 재빨리
불퇴전지에 이르고자 한다면
응당히 공경심으로써
執持해서 名號를 칭해야 한다.
만약 사람이 일심으로 그 명호를 칭하면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을 얻는다.
여기에 나와있는 명호란 현재 시방불의 명호를 가리킨다고 설명되어 있지만, 다음과 같은 문답에 의해서 현재 시방불 뿐 아니라 다른 제불보살의 명호를 칭함으로써 불퇴전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이 十佛의 명호를 듣고 執持해서 마음에 두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서지 않음을 얻을 수 있는가? 다시 다른 부처, 다른 보살의 이름이 있어 아유월치에 이르는 것을 얻을 수 있는가? 답해 가로되, 아미타 등의 부처 및 제대보살이 있다. 이름을 칭해서 일심으로 염하면 또한 불퇴전을 얻는다.
그 뒤로 무량수불, 세자재왕불 등 백 칠 불의 이름을 들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백 칠 불의 佛名은 무량수경에 등장하는 과거불과 일치하고 있다. 이것은 용수가 무량수경에 의지한 바가 큰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처럼 「이행품」에서, 난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던 불퇴전의 보살행이, 信을 방편으로 함으로 인해서 易行道가 제시되었다. 信方便의 내용은 稱名, 禮拜, 憶念 등이 설해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信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십주비바사론에서 설해지는 염불이란 어떤 것일까? 이행도의 구체적 실천이 信을 내용으로 하는 염불이라고 제시되었는데, 그것을 「염불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물어 가로되, 단지 선근 복덕의 힘으로 제불을 친견할 수 있는가? 다시 다른 법이 있는가? 답해 가로되, 부처, 발타바를 위하여 설하는 바의 깊은 삼매가 있다. 이 삼매의 보배를 얻으면 능히 제불을 친견할 수 있다.
발타바를 위한 깊은 삼매라고 하는 것은, 반주삼매경에서 말하고 있는 삼매를 가리키며, 용수는 반주삼매를 얻으면 見佛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용수는 단지 구체적인 모습을 가진 견불을 염불이라고 고집하지는 않는다. 부처의 외형이 아니라, 내면에 갖추어진 공덕을 염하는 것을 의미할 때가 많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色身에 染著하지 아니하고
法身에도 또한 집착하지 마라.
일체법을 잘 알면
永寂함이 허공과 같다.
이런 보살이 上勢力을 얻으며 색신․법신으로 깊이 부처에 탐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空法을 信樂하는 까닭이다.
이처럼 십주비바사론에서 설해지는 염불은 궁극에 있어서는 색신에도 법신에도 염착해서는 안된다. 공법을 신요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실상을 염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空法을 信樂하는 것’(adhimukti)은 보살이 불퇴전을 얻는 과정에서, ‘일체법은 不二다’라고 信解함으로써 설법을 분별하지 않으며, 공법을 신해함으로써 凡夫所得의 菩提를 얻지 아니하고, 菩薩無相의 법을 신해함으로써 부처를 相으로 보지 않는다.
신요도 신해와 함께 산스크리트로는 adhimukti이며, 점점으로 정진해서 난행을 걷는 보살도, 염불의 이행에 의해서 불퇴를 얻고자 하는 보살도 모두가 공법을 신요하는 것이 주안점이 되어 있다. 따라서 난행도 이행도 신요공법의 경지를 얻어야만 같은 아유월치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신요, 신해공법이란 어떤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地相品」에서는 다음과 같은 해설이 있다.
청정(prasāda)이란 모든 번뇌의 더러움을 여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신해를 이름지어서 청정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堅固의 信을 이름지어서 청정이라고 한다.
마음의 淸淨, 信解, 堅固信은 동의어로 이해되어지고 있으며, 신해는 마음의 청정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마음의 청정은 단지 번뇌의 汚濁을 여의는 것뿐이 아니라, 我執, 我所執의 분별심도 여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信樂空法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신을 방편으로 하는 이행이 신명을 아끼지 않고, 주야정진해서 매진하는 것과 같은 난행의 보살과 똑같은 대승보살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2. 他力思想의 展開
불교에서 맨 처음으로 自力과 他力으로 불교의 敎判을 주장한 사람은 北魏 曇鸞이다.
담란은 본래 인도대승불교를 대표하는 대논사인 용수나 제바의 논서를 연찬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구마라집, 승조의 학풍을 이어받아 그 영향을 많이 입은 사람이다. 용수가 십주비바사론에서 제시했던 이행관을 전개시켜 새로운 이행관을 세워서 自力과 他力이라고 하는 새로운 학설을 창설했으며 다시 이 이행관에 바탕을 둔 반야중관사상의 입장을 가지는 無生而生의 왕생관에 대해서 見生而無生의 왕생관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토교의 독자성을 개발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당시 민간에서 행해졌던 주술도 수용했고, 일반 민중도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많이 구사함으로써 널리 민중으로 하여금 정토교 신앙에 도입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불교도 사이에서는 석존은 이미 입멸되어 이 세상에 계시지 아니하고, 미륵은 아직 이 세상에 출현하지 아니하고, 현재 나를 이끌어주는 부처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이른바 無佛時代라고 하는 비통한 의식이 지배적이었다. 이것은 지상의 불타에 대신하는 救濟佛의 登場을 요청하고 있던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이 때, 피안에 계시면서 시간, 공간의 범주에 구속되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근본원망으로써 오로지 구제에만 모든 것을 드러낸 아미타불을 등장시켜 신앙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신앙을 문을 연 것은 담란의 커다란 업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담란은 세친의 정토론에 주석을 써서, 정토론주라고 하였다. 정토는 담란에 의해서 오탁의 세상, 무불의 시대라고 느껴진 현실세계, 오탁에 가득찬 차안에 대한 피안으로써의 청정세계이며 무불의 차안에 대한 아미타라고 하는 부처가 계시는 세계로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二乘地에 전락하는 것을 꺼리는 보살이 간절히 바라고 있는 불퇴전을 정토에 주인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해서 쉽게 성취 실현할 수 있는 장으로써, 실로 기꺼이 맞아들일 수 있는 欣求의 세계이며 원생의 대상이었다. 담란은 정토론주 상, 하 2권 양 쪽에 모두 정토의 二報, 三嚴, 功德成就相의 하나하나에 주석을 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 특히 상권에서 정토건립의 근본 뜻을 此岸과의 관계를 교묘히 맺으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부처가 본래 이 장엄청정공덕을 일으키는 까닭은, 三界를 봄에 이것은 虛僞의 상이요, 輪轉의 상이요, 無窮의 상으로써 尺蠖(자벌레)가 순환하는 것처럼, 누에가 自縛하는 것처럼, 오호 중생이여, 이 삼계에 구속되어 顚倒不淨이구나. 중생을 불허위의 곳, 불윤전의 곳, 불무궁의 곳에 두어서 필경 안락대청정의 처소를 얻게 하고자 한다. 그런 까닭에 이 청정장엄공덕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정토는 미망의 세계에 아무런 관련도 없고 다만 초연하게 고고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적극적으로 미망의 세계에서 惑과 業과 苦를 거듭하는 자에 대해서 구제작용을 갖는 세계이며, 미망한 자로 하여금 안락대청정의 세계에 안주하게 하고자 하는 뜻으로 건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국토의 삼종장엄성취는 본래 사십팔원 등의 청정원심이 장엄하는 바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 정토에 “범부인이 煩惱成就하고 있다 하더라도 또한 이 정토에 생할 수 있다. 삼계의 계업이 필경코 따르지 않는다. 즉 번뇌를 끊지 아니하고 열반을 얻는다”고 제시된 것처럼 願生者가 번뇌를 끊지 않은 채로 정토에 왕생하면 다시 불퇴전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다만 信佛의 인연으로 정토에 생하고자 원하면 불의 원력에 乘해서 곧 저 청정토에 왕생할 수가 있다. 불력주지해서 大乘正定聚에 든다. 정정이란 곧 阿毘跋致를 말한다”고 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아미타불의 제18원과 제11원의 이원을 증상연으로 하는 것으로 실연되어 다시 제22원에 의해서 이미 작불할 수 있음을 설하고 있다. 담란은 이처럼 48원 가운데에서 특히 三願을 중요시하고 타력을 增上緣으로 하는 이행도를 개현해 지계, 선정, 신통의 자력과 준엄하게 구별하고 있다.
담란은 스스로의 실천과제인 아비발치의 체득에 대해서 정토론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삼가 생각건대 용수보살의 십주비바사에 가로되, 보살이 아비발치를 구함에 이종의 길이 있다. 하나는 난행도요 하나는 이행도이다. 난행도란 五濁의 世, 無佛의 時에 있어서 아비발치를 구하는 것을 난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육로의 보행은 곧 괴로움과 같다. 이행도란 다만 信佛의 인연으로 정토에 생하고자 원하면 부처의 원력에 乘해서 곧 저 청정토에 왕생함을 얻는 것, 불력주지해서 곧 대승정정취에 드는 것, 정정이란 곳 아비발치를 말한다. 예를 들면 수로의 승선은 곧 즐거운 것과 같다.
Ⅲ. 淸淨佛國土로서의 極樂
淨土로 往生한다는 것은 佛子의 최종 목표이다. 그래서 우리가 준비하고 알아야 하는 것이 첫째 정토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둘째로 알아야 하는 것이 그 정토에 어떻게 왕생하느냐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제시되어질 때에 왕생 정토의 구조가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極樂이 청정한 세계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아이템이다. 그리고 그 극락의 구성 요건들도 청정해야 한다. 그래서 無量壽經에서 世自在王佛이 法藏비구에게 ‘諸佛如來淨土之行’을 들어내 보였던 것이다.
無量壽經에 ‘諸佛如來淨土之行’이라고 하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법장 비구가 世自在王佛에게 “원컨대 세존이시여, 널리 중생을 위하여 제불여래의 정토의 행을 부연하여 주소서”라고 간청하고 있는 장면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토가 제불여래의 정토의 행이니까 아미타불의 극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제불이 淨佛國土를 건립할 때의 행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정토의 행은 국토를 청정케 하는 행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여기에 대해서 극락을 정토라고 하는 경우에는 청정한 불국토라고 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같은 정토라 하더라도 양자의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법장보살이 보리심을 일으켜 제불의 정토건립을 본받아서 스스로도 정불국토의 행을 하려고 결의하였으며, 세자재왕불에게 제불이 어떤 정불국토의 행을 했는지 그것을 가르쳐 달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아미타불의 극락이라고 하는 사상은 꽤 오랜 성립으로 보여진다. 특히 阿彌陀經에서는 오로지 극락이 설해지고 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청정한 행은 전혀 설해져 있지 않다. 하지만 觀無量壽經에서는 ‘淸淨業處觀’이 설해지고 있고 청정한 觀想에 바탕을 두고서 극락이 상정되어지고 있다.
극락이라고 하는 것만으로 그것이 청정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법장보살의 경우에는 극락건립의 원심이 청정했기 때문에 그 결과 성취된 극락도 청정하며 정토이다라고 하는 것이 중국에서 담란이 극락은 정토라고 주장하는 유력한 근거가 되어지고 있다.
48원등의 청정원심이 장엄하는 까닭이다. 因淨인 까닭에 果淨이다.
정토론에서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극락이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불교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극락을 건립하고자 하는 법장의 願心이 청정했다는 것과 그 원심은 정불국토의 행을 모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법장보살의 극락건립의 행이 불교적이 되며 청정이 되는 것이다.
구마라집의 역경 가운데에서 정토라고 하는 말이 있는 유명한 경전은 첫 번째, 유마경이다. 이 경전의 「불국품」에는 장자의 아들 보적이 “오직 원컨대 제보살의 정토의 행을 설할 것을”이라고 원한 데 대해서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直心은 보살의 정토이다. 深心은 보살의 정토이다. 菩提心은 보살의 정토이다.
이렇게 보살의 정토 17종을 가리키고, 마지막으로
만약 보살이 정토를 얻고자 한다면 실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 그 마음이 청정함에 따라 곧 불국토도 청정하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은 유명한 말이며 불교계에 정토란 말을 일약 유명한 것으로 하였다. 그 뒤에 중국불교에게 특히 정토교사상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담란은 정토론주를 지었으며 거기서 미타정토의 교리를 주장하고, 그 뒤를 도작이 이어서 안락집을 지었고 미타정토의 교리를 거듭 천명했지만, 그것으로 불교계의 정토신앙이 미타정토 하나뿐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수에서부터 당에 걸쳐서 길장의 관무량수경의소, 도작의 안락집, 가재의 정토론, 원효의 무량수경종요, 유심안락도, 경흥의 무량수경연의술문찬, 회감의 석정도군의론 등이 속속 저술되어 미타정토를 칭양했으며, 엄청난 힘으로 사람들에게 수용되었다. 그렇지만 그 뒤에도 미타, 미륵, 관음, 약사 등의 정토신앙은 혼효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무량수경에서는 법장보살의 원행이 청정했다고 설했지만 극락 그 자체의 청정성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이 점을 분명히 나타낸 것이 세친의 정토론이다. 정토론에서는 극락을 안락국이라고 보고 있다.
世尊我一心 歸命盡十方 無碍光如來 願生安樂國
세친은 극락세계를 안락세계, 안락국토라고 표현했지만 정토라고 한 경우도 있었다.
정토의 과보는 二種의 譏嫌의 過를 여읜다.
정토론의 주제는 五念門을 닦아 안락국에 왕생하는 것이지만, 오념문이란 禮拜․讚嘆․作願․觀察․廻向의 五門이다. 그 중심은 네 번째 관찰문이며, 이것은 안락국을 17종의 器世間淸淨과 12종의 衆生世間淸淨으로 관하는 것이다. 양자를 합쳐서 29종의 장엄공덕을 관찰하는 것이다. 17종의 기세간청정이란 안락국의 국토에 공덕의 청정성을 말한다. 다음으로 12종의 중생세간청정이란 안락국의 중생, 즉 아미타불과 보살들의 공덕의 청정성을 말한다. 이와 같이 29종장엄은 안락국이 국토와 불보살이 모두 청정한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며 극락이 청정세계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량수경이 법장보살의 원행이라고 하는 因의 청정을 설함에 대해서 정토론에서는 한 걸음 나아가 극락이라고 하는 果가 청정함을 명백히 하고 있다. 여기에 무량수경보다 일보 진보된 입장이 보여진다.
정토론에서는 이 국토와 불과 보살의 삼종의 공덕성취는 법장보살의 원심이 장엄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 이유는 一法句 즉, 진여의 等類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법장보살의 원심의 정화의 힘에 의해서 성취한 것이니까 청정구라고도 한다. 이 청정에 2종이 있으며 그것은 17종의 기세간청정과 12종의 중생세간청정이라고 한다.
정토론 중 신불의 인연으로 정토에 왕생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극락이 정토인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토교의 교리를 조직하기 위해서 극락이 정토인 것을 증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담란은 論註에서 세친의 예배․찬탄․작원․관찰․회향의 오념문을 설명한 다음에 “이 다섯 가지의 업이 화합하면, 즉 왕생정토의 법문에 수순하여 자재의 업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왕생정토의 법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정토왕생의 교리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며 論註를 통해서 정토교가 성립하였음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여기에도 정토라고 하면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담란의 주체적 이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당시의 불교계가 모두 이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비구 승흔의 499년 비문에도 미륵의 석상 일부를 만들고 서방무량수불국에 왕생하고자 원한다라고 되어 있으며 여기서는 무량수불국이라고 되어지고 있다. 교리로서는 당시 담란에 의해서 서방정토의 법문이 성립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아미타경에는 극락의 장엄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이 있지만 본원에 대해서는 전혀 설해져있지 않다. 그리고 왕생의 방법에 대해서도 작은 선근의 복덕 인연으로서는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아미타불의 명호를 執持하여 一日 내지 七日 一心不亂하면 임종에 즈음하여 아미타불이 성중과 함께 來迎한다고 설하는 정도이다. 아미타불의 불국에 왕생하는 방법으로서는 무량수경에서 설하는 방법 외에 반주삼매에 의한 방법이 주목된다. 반주삼매는 제불을 관상하는 삼매이기 때문에 반드시 아미타불에 한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용은 오로지 아미타불을 관상하여 극락에 왕생할 것을 설하고 있다. 극락왕생의 방법에 관해서 반주삼매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보살이 저마다이 국토에서 아미타불을 들어 자주자주 염한다. 이 염을 하는 까닭에 아미타불을 친견한다. 부처를 친견하고 나서 따라가 물음을 일으킨다. 실로 어떤 법을 가지면 아미타불국에 생할 수 있는가 라고. 이 때 아미타불이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와서 내 나라에 왕생하고자 한다면 언제나 나를 자주자주 염하고, 언제나 염을 지켜서 휴식하지 말아라. 이와 같이 하면 와서 내 나라에 왕생할 수 있다.
이것은 반주삼매에 의해서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그 아미타불로부터 아미타불국에 왕생하는 방법을 가르침 받고 있는 것이지만 그 방법이란 불을 염하고 그 염을 망실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는 삼매를 닦고 물어서 극락에 왕생할 것이 나타내지고 있다.
관무량수경은 삼매에 있어서 관불의 체험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그 삼매는 ‘淸淨業處觀’이다. 업처의 교리는 팔리불교에서 설해지는 것이며 청정도론에서는 40업처를 설하고 있다. 그 가운데 10遍處가 있다. 이 10편처란 두루 지수화풍과 청황적백과 및 공과 식과의 이무변처를 관하는 것이다. 일체처에 두루 관찰하여 간극이 없음으로 편처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청편처의 경우는 청의 관상을 확대하여 세계 전체가 청으로 채워진다고 관상하는 것이다. 일체의 것이 모두 청색으로 되어서 간극이 없다. 그런 관상이 편처이다. 여기에서 청색을 보는 것은 실물을 보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확대해서 세계전체가 청색으로 채워졌다고 관하는 관상은 실관이 아니라 假觀이다.
不淨의 업처관 가운데에 骨鎖觀이 있다. 이것은 勝解力에 의해서 자기의 몸 안에 있는 골쇄를 사유하여 이 골쇄를 두 개로 불리고 네 개로 불리고 마지막에는 전 세계가 골쇄로 충만한다고 관상한다. 골쇄관에는 初習業, 已熟修, 超作意의 삼 단계가 있지만 자기가 관하는 골쇄를 승해의 힘에 의해서 증강하거나, 혹은 역으로 그것을 감소시켜서 자유로이 할 수 있다면 초작의의 단계라고 한다.
골쇄관은 부정의 업처관이지만 무량수경의 청정업처는 청정한 대상을 관하는 승해의 작의에 기초한 관법이다. 극락의 관법은 실지로 극락의 모습을 보고 관상하는 것이 아니다. 극락을 실제로 볼 수는 없다. 이 관법의 소재가 되는 것은 해나 달, 물과 나무, 금, 은, 보석 등이다. 이것을 소재로 해서 승해의 힘에 의해 청정한 극락의 상을 작의하여 안전에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즉 승해 작의에 기초한 가관이 업처에 기초한 관법이다. 이것은 마음의 구상력에 근거를 둔 대상의 영출이다. 이것은 가관이기 때문에 관법의 수속이 중요하다. 수속을 잘못하면 거기에 작이된 대상은 극락의 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업처관의 특색은 승해 작의에 의해서 자유로이 대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일체세계가 청색으로 충만해 있다고 작의할 수도 있지만 그 다음 순간에 약간의 청을 남기고 나머지를 다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극락의 모습을 자유자재로 관상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업처관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면 제 9관에 아미타불의 신상을 관하는 것을 설하고 있지만 미간의 백호는 오른쪽으로 회전하고 있으며 오수미산 같고, 佛眼은 청정해서 사대해수와 같고 청백분명하다고 설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거대한 불타를 관상할 수 있는 것도 가관인 업처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관무량수경은 극락의 依報와 正報를 관상하는 것이기 때문에 觀佛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불을 관하는 관상도 포함되어지고 있다. 그 점에서 관불의 방법은 다르다 하더라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반주삼매와 합치하는 점이 있다. 불교에는 관불의 방법에 대해서는 업처관이나 반주삼매 외에도 行法이 보인다. 예를 들면 도행반야경의 「常啼보살품」에는 상제보살이 일심으로 반야바라밀을 찾아 사유방편하고 있을 때 갑자기 공중에서 소리가 들려 홀연히 여래의 형상이 그 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상제보살은 이 여래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반야바라밀을 구하여 東方 중향성으로 향하는데 이 견불의 삼매를 견일체제불삼매라고 부르고 있다. 이 반야경에서 설하는 견일체제불삼매도 관불삼매의 일종이다.
아미타경에서는 극락의 청정성은 설해져 있지 않다. 아미타불의 청정에 대해서도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에 아미타불의 전생을 말하게 되었다. 아미타불의 전생을 말하는 것은 아미타불의 보살행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살행은 청정인 것이다. 보살행의 내용은 육바라밀의 실천이었고 그것은 정불국토의 행이다. 법장보살은 세자재왕불의 가르침에 따라 불국토의 장엄을 섭취했다. 거기서는 법장보살의 불국토건립의 행이 있었다. 그것은 제불여래정토지행, 불소설엄정국토, 섭취장엄불국청정지행, 제불묘토청정지행 등의 표현이 있다. 사십팔원을 설한 다음에 그는 그와 같은 불국토의 청정과 불국토의 위세와 불국토의 광대함을 달성했다고 말하여 극락이 청정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아미타불의 광명에 대하여서 말하는 곳에서도 아미타불의 별명에 청정광불이 있으며 광명이 청정한 것을 제시하고 있다. 또 그 부처의 광명은 無垢하다고 한다.
네 번째 단계는 극락세계가 청정한 불국토임을 명료하게 하고 있는 것은 관무량수경이다. 이 경이 청정업처관에 의해서 극락을 관상하는 경인 것은 이미 말했다. 위제희부인은 시방제불의 淨妙國土를 보고서, 그것은 모두 청정하며 광명이 있지만 특히 극락세계에 왕생하고자 원했다. 그리고 불타는 미래세의 중생이 번뇌의 해침을 받는 자를 위해서 청정업을 설한다고 말하면서 이 경을 설하고 있다. 그리고 서방극락세계는 청정국토라고 말하고 있다. 그 樂은 極妙樂事이며 그것을 봄으로 인해서 환희를 일으키고 무생법인을 얻는다고 한다. 이와 같이 관무량수경에서는 극락의 樂이 정신적인 것으로 변형되어지고 있다. 관무량수경은 극락의 청정성에 대한 자각에 입각해서 설해져 있다. 이것이 다섯 번째 단계이다. 여섯 번째 단계는 세친의 청토론이다. 그 앞에 십주비바사론의 「이행품」이나 대지도론을 더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들 모두가 다 아미타불국토의 청정성을 설하고 있다. 세친의 정토론이 극락의 의보, 정보의 청정성을 증명하려고 하는 논임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오념문 가운데의 第四 관찰문에 있어서 극락을 3종으로 관찰한다. 극락의 불국토의 공덕장엄을 17종으로 관찰하였으며 아미타불의 공덕장엄성취를 8종으로 관찰하였고 보살의 공덕장엄성취를 4종으로 관찰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그 청정성을 관찰하는 것이다. 여기에 분명히 아미타불이나 여러 보살뿐이 아니라 극락이라고 하는 국토도 청정한 것임이 주장되어지고 있다.
제7단계는 담란의 정토론주이다. 이 논에서는 이미 말한 것처럼 안락정토라고 하는 말로써 극락과 정토가 동일시되어지고 있다. 이 점에서 정토론보다 한 걸음 나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용수의 「이행품」에서 말하고 있는 난행도와 이행도의 비유를 들어서 이행도는 신불의 인연으로서 정토에 왕생하고자 원하여 불의 원력에 승해서 그 청정토에 왕생하는 것이라고 하는 교리를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정토의 법문이라고 부르기에 걸맞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에 바탕을 둔 성불이 가능한 것임을 나타내는 교리이기도 하다.
Ⅳ. 本願의 의미
본원이란 불보살이 과거에 일으킨 서원이라는 뜻이지만 정토삼부경의 하나 무량수경 권상의 제22원에 타방불토로부터 아미타불의 정토에 내생한 모든 보살중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본원이 있어 자재로이 교화하는 바 중생을 위한 까닭에 弘誓의 갑옷을 입고 덕본을 쌓아 일체를 도탈케 하고 제불의 나라에 놀아 보살의 행을 닦고 시방의 제불여래를 공양하여 항상 무량의 중생을 개화하고 무상정진의 길을 세우고자 하는 자를 제외한다.
이것은 보살은 각각 본원을 가지고 있어서 중생을 교화하고 해탈하게 하고자 하는 자들이다. 그 때문에 홍서의 갑옷을 입고 여러 가지 공덕을 쌓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중생구제를 위하여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살은 이와 같은 중생구제의 원을 일으키고 제불국토에 놀아 보살의 행을 닦고 다시 시방세계의 제불여래를 공양하고 많은 중생을 교화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무상정진의 길을 찾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승보살의 본원사상의 일반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보살의 總願이라고 하는 것이다.
보살의 총원은 그 전형적인 것으로 사홍서원이 알려져 있다.
衆生無邊誓願道 煩惱無盡誓願斷 法門無量誓願學 佛道無上誓願成
이 네 가지가 보살이 실천수행해야 할 서원이다. 이 사홍서원은 여러 종파에서 약간씩의 변형이 있지만 기본형은 같다. 그것은 度斷知證이다.
도단지증은 처음에 일체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이타적인 원이 있으며 다음으로 번뇌를 끊고 법문을 배우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리적인 원이 된다. 자리적인 원보다도 이타적인 원이 먼저 말해진다고 하는 것은 대승보살의 원의 특색이며 그것은 지혜보다도 자비가 먼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원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자비의 정신이 근본이 되어 있다. 그런 자비를 완수하기 위해서 번뇌를 끊고 법문을 배우고 불도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거기에 지혜의 작용이 있다. 따라서 원이 일어나는 배후에 자비의 정신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불교의 기본 정신을 생각하는 입장에서도 중요한 일이다.
무량수경 권상에서는 다음과 같이 超世의 원을 세우고 있다.
내 초세의 원을 세운다. 반드시 무상도에 이르기 위하여 이 원이 만족하지 않는다면 서원코 정각을 이루지 않으리.
무상도에 이르지 않겠다고 하는 서원은 숭고한 것이다. 이러한 보살의 서원은 상구보리라고 일반화되어 向上門이라든가 往相이라고 말해진다. 여기에 대해서 보살의 교화의 작용은 하화중생이라고 말하여지며 向下門이라던가 還相이라고 말해진다. 전자가 지혜문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비문이다. 전자가 自利라고 한다면 후자는 利他이다. 이것을 입문과 출문이라고 하는 것처럼 入出二門이라고 할 때도 있다. 이 두 개의 면을 동시에 갖는 것이 보살로서는 소중한 것이며 이러한 자각이 이른바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사상이 되었다. 인간의 자각에 이런 사상이 명확히 확립되었고 그것이 인간의 삶의 방식으로 나타났던 것은 印度思想史上 획기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원사상이란 석존에 의해서 자각된 지혜와 자비의 두 가지 정신 가운데 특히 자비의 측면이 아미타불의 본원이라고 하는 형식을 취해 표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지혜와 자비가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하는 형태로 이른바 보살도를 형성했지만 정토교에서는 법장보살의 서원과 그 성취라고 하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법장보살은 그런 의미로 보살도실천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본원은 믿고 받아들이기에 용이한 것은 아니었다. 무량수경에서도 그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이 경을 듣고 신요하고 수지하는 일은 난중에 난이다. 이 난을 넘는 것은 없다.
또 아미타경에서도 “사리불이여, 마땅히 알라. 네 오탁악세에서 이 어려운 일을 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일체세간을 위하여 이 難信의 법을 설한다. 이것을 甚難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미 정토교 경전이 성립할 때에 이 본원이나 정토왕생의 가르침은 난신의 법이라고 말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아미타경의 「육방단」에서도 다음과 같이 육방의 제불이 말하고 있다.
그대들 중생들이여 마땅히 이 칭찬불가사의공덕 일체제불소호염경을 믿어야만 한다.
정토교에서 信이 얼마나 중시되어졌는가를 잘 알게 됨과 함께 본원과 그에 따라 사람들이 구제된다라고 하는 정토교의 가르침 그 자체가 얼마나 믿기 어려웠던가 하는 것이 그 종교사상 성립당초로부터 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아미타불의 본원은 중생구제를 위한 것이며 석존이 자각된 지혜와 자비 가운데에서 자비의 정신이 발전한 것이라고 생각되어지지만 현세이익을 위해서 신에게 기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왕생을 목적으로 염불하는 것도 참된 종교심은 아니다. 진정한 종교는 자기의 변환 생명의 혁신을 구하는 것이다. 중생구제의 원은 방대하지만 사람들에게 신심과 염불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신심에도 여러 단계가 있어서 참된 종교의 信과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다. 현세이익을 얻기 위한 신앙이나 기원은 오늘날에도 일반적이지만 돌아보면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원이나 신앙인 경우가 많다. 염불마저도 단지 자기의 극락왕생을 위한 것이 되어서 이기적인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 경우도 있다. 진정한 종교는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의 변환, 생명혁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미타불의 정토건립에 관해서 무량수경 권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때에 세자재왕불께서 법장비구에게 고해 가로되 그대가 수행하는 바의 장엄불토는 그대 스스로 마땅히 알 수 있다. 법장비구, 부처에게 가로되 이 뜻 너무 깊고 깊어서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오직 원컨대 세존이시여 널리 저를 위해서 제불여래의 정토의 행을 부연하소서. 저는 이것을 듣고 마땅히 말씀하신대로 수행해서 소원을 성만하겠습니다.
세자재왕불은 법장비구를 향해서 “그대가 수행함으로써 이루고자 바라고 있는 정토에 대해서는 그 구상도 장엄도 그대가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거기서 법장비구는 “부처님이시여, 지금 하신 말씀은 넓고 깊은 의미가 있어서 저에게는 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불이 각각 제불의 세계를 이룸에 있어서 어떤 행을 했는가 상세히 설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설법을 듣고 설법대로 수행하고 제가 바라는 바를 성취시키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세자재왕불은 널리 210억에 이르는 많은 불세계를 안전에 나타나게 하여 법장비구에게 보인다. 그리고 불세계의 하나하나에 대해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선악, 장엄의 우열, 그 외의 점에 대해서도 비교 검토하여 법장비구의 요구에 의해서 상세히 설명을 하셨다. 법장비구는 각각의 세계의 청정한 장엄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직접 볼 수가 있어서 이 이상 없는 높은 원을 일으켰다. 이때의 법장비구의 마음은 적정했으며, 집착하는 마음이 없고, 일체세간에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것이었으며, 법장비구는 정토로서 있어야 할 장엄과 청정한 행에 대해서 五劫이라고 하는 오랜 기간 思惟하였다. 그리고 사십팔원을 세웠고 극락정토가 이루어졌다.
주제어 - 淨土, 本願, 信, 往生, 他力, 信樂, 信方便, 稱名, 易行道,
念佛
ABSTRACT
The Method of Practice in Pure Land Faith
Kang, Dong-kyun
Chairman of the Korean Society of Pure Land Buddhism
Dept. Philosophy, Donga Univ.
Buddhists understand that Sakyamuni Buddha, who entered parinirvana in the past, does not exist in the world, that Maitreya is not yet present, thus the Buddha who should lead people is not existent here. It means 'the age without Buddha,' and a bitter consciousness has been prevalent. It may mean that it requires the appearance of the saving Buddha who can replace the Buddha in the world. Regarding this, it is Damran's significant contribution that puts Amita Buddha in front who only concerns about saving people by his original wish so that the border of faith disappears and opens a new gate of faith.
In the Pure Land text, it says "Although lay people is in defilements, they can be born in the pure land; the karma of the three worlds does not follow; thus, without eliminating the defilements, one can attain nirvana." Likewise, the reason that the wisher can be born in a pure land while having defilements, and again attains non-retrogressive strength is that "If one wishes to be born in a pure land by believing the Buddha, he can do that depending the power of the Buddha. With the Buddha's power he enters the right practice of Mahayana. The right practice means reaching out the other land ." It makes the 18th and 11th vow of Amita Buddha realize an increasing karma, and by the 22th vow, one can already become a buddha. As above, Damran puts an emphasis on the three vows among those of 48, and develops a transferred practice which makes the other's power an increasing one; he definitely distinguishes it from one's own power of keeping the precepts, meditation, and extraordinary abilities.
It is a final goal for the buddhists to be born in a pure land. In order to do that, one first of all should know what a pure land is; secondly, how to be born there. When these are explained in a logical and reasonable way, the structure of the Pure Land faith may be expounded.
The original vow of Amita Buddha is to save sentient beings, which is to develop the spirit of compassion among Sakyamuni Buddha's wisdom and compassion. However, it is not a true faith to chant for the purpose of being born in a pure land, not to mention praying for one's present wishes. A genuine religion is to seek one's change, the revolution of life. The vow to save people is vast, yet it requires the faithful mind and chanting. The faithful mind has also a variety of steps and seems different with a true belief. The faith and wish to acquire present benefit is commonplace today, and in many cases it is for selfish purpose. Even chanting sometimes exposes a self-centered desires to be born in a pure land only focusing on oneself. A true religions should make one's mind transformed and revolutio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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