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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목 |
사회복지개론 |
성명 |
김수영 |
학번 |
11741105 |
강순명(1898.3.24-1959.3.12) 목사
1920년대 한국 교회의 가장 독창적이고 전위적인 전도단이었던 ‘독신전도단’을 창설한 강순명(姜順明)은 1898년 3월 24일 광주 방림동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모태신앙으로 출생한 그의 어린 시절 경험은 가난에서 출발했다. 아홉 살 때 부친이 별세한 후 어머니와 형(강태성, 후에 광주중앙교회 장로)과 함께 ‘살 길을 찾으러’ 목포로 갔으나 고생만하고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그는 남장로회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숭일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 보통과를 졸업했는데 그 해 '믿음 좋은’ 어머니마저 별세하였다. 이 때부터 긴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 형이 차려준 이발소를 운영하였으나 돈 벌 생각은 없었다. 주먹 싸움도 종종 벌였는데 ‘박치기 명수’로 이름을 날린 것도 이 때 일이다.
그러다 1918년 10월, 광주 최초 교인으로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 장로였던 최흥종의 딸(최숙이)과 결혼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그 때 장인은 평양신학교 재학 중이었는데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광주 만세시위를 준비하였고, 직접 서울에 올라가 남대문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1년 6개월 옥고를 치르고 내려왔다. 장인은 1921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 북문안교회 초대 당회장 목사로 부임하여 이후 광주가 낳은 ‘성인’(聖人) 목회자로 이름을 남겼다. 강순명이 이런 장인에게 신앙적 지도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1) 회심과 전도 소명
강순명은 1921년 3월 이발소를 처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正則)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23년 9월 유명한 도쿄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으로 인한 두려움도 컸지만 지진 직후 조선인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는 일본 자경단의 만행이 더욱 두려웠다. 그 때 학살당한 조선인들이 5천 명이 넘었다. 그도 우에노공원으로 피신하였다가 절대 절명의 위기 순간에 몰려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하나님, 내게 사흘만 더 살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나의 모든 죄를 청산하고 죽겠습니다. 주 예수님, 사흘만! 사흘만!”
살육의 광풍이 몰아치는 공원에서 강순명은 난생 처음 뜨겁고도 깊은 기도를 드렸다.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백하는 기도가 터져 나왔다. 긴 기도 후 평안이 찾아왔다.
“나의 일생은 온전히 주님을 위해 살리라.”
강순명이 중생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강순명은 우에노공원 회심 체험 1년 후인 1924년 7월 귀국했다. 그 무렵 기독교청년회(YMCA) 운동가 에비슨(Douglas W. Avison)이 광주에 내려와 농촌사업에 착수하였는데 그는 에비슨의 서기가 되어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며 농촌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정열적으로 일에 매달렸다. 이 때 비로소 그는 농촌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일제의 농지 수탈정책으로 농촌의 경제 위기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의 경제 불황으로 선교비가 줄어드는 바람에 농촌 사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러나 경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영혼의 구원 문제였다. 강순명의 기도 시간이 늘어났고 이 무렵부터 그의 기행(?)이 시작되었다.
“강순명은 혼자 텅 빈 교회당에 들어가 밤을 새웠고 눈물의 열도(熱禱)로 제단을 적시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거리에서 거지를 보면 몇 푼 되지 않는 돈이지만 털어주었고 헐벗은 이를 만나면 단벌옷을 아끼지 않았다. 고아를 보면 업어왔고 병자를 보면 목을 안고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그는 가끔 길을 가다가 멈춰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고 눈물을 흘리며 한숨과 함께 ‘주님!’을 부르짖기도 하였다. 때로는 폐병환자를 찾아가 위로해 주며 외로운 그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해 주기도 했다. 나환자를 만나면 손을 내밀어 잡아주고 등을 두들겨 주었다. 그는 마침내 뜻을 정하고 집을 나섰다.”1)<1) 윤남하, 《믿음으로 살다 간 강순명 목사 소전》, 호남문화사, 1983, 74-75쪽.>
그는 유명하다는 명사들을 찾아 나섰다. 가르침을 얻기 위함이었다. 윤치호, 백낙준, 김활란, 노정일, 신흥우, 현동완, 김창제, 조만식 등 유명하다는 인사들은 모두 만났고 무교회주의자 김교신과 금강산 ‘은둔 수도자’ 김성실도 만났다. 그런데 1928년 여름 금강산에 들어가 기도하던 중 전주 서문교회 배은희 목사를 만났다. 삼일운동 때 옥고를 치른바 있는 배은희 목사 역시 농촌 현실 문제와 민족주의, 사회주의 사상 문제로 고민하다가 신경쇠약증세를 보여 요양차 금강산에 들어와 강순명을 만났다. 자살을 시도한 배은희의 목숨을 구한 것을 계기로 둘은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둘은 신앙으로 농촌을 살리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찾았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독신전도단이다.
(2) 독신전도단 운동
금강산 기도를 마치고 돌아온 배은희 목사와 강순명은 동지들을 구했다. 전주서문교회 장로 신현창, 유상백, 김병수와 강봉의, 박노수, 김종흡 등이 지지하고 나섰다. 이들은 1928년 7월 다음과 같은 독신전도단 강령을 발표하며 단원을 모집하였다.
“1) 인류는 다 유물(唯物)의 길을 밟는다. 우리는 신국운동(神國運動)을 기(期)함
2) 시대는 예수 재림의 불원(不遠)을 고한다. 우리는 복음선전(福音宣傳)을 촉진함
3) 경제는 교역(敎役)의 현제(現制)를 위협한다. 우리는 가족책임(家族責任)을 초월 함.”2)<《기독신보》, 1928.8.1.>
독신전도단은 누가복음 14장 26절,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씀과 마태복음 9장 12절,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삼았다. 복음 전도를 위해 철저히 자신을 바치는 헌신을 목적하였다.
강순명은 일본 유학 시절 알게 된 일본의 빈민 전도자 가가와(賀川豊彦)의 저서, 《가난한 자의 눈물》,《농민운동의 실제》,《노동운동사》,《한 알의 밀》등을 읽으면서 터득한 기독교 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 정신을 농촌 현장에서 실천하려 노력하였다. 즉 초대교회와 같은 기독교 신앙 공동체를 농촌에서 구현하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 정신으로 자신(개인)을 희생하여 농촌(사회)을 살리는 일에 헌신할 전도자들이 필요했다.
독신전도단원은 적어도 3년간 가정생활(성생활 포함)을 피하고 독신으로 농촌에 들어가 주간과 야간에 부녀자들과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일이면 전도자로 설교하고, 마을 단위로 농촌 협동조합과 소비조합을 조직하여 농촌 경제를 구조적으로 개선하며, 기초 상비약을 준비하여 환자 치료까지 할 수 있어야 했다. 독신전도단에 지원한 남녀 청년 10여 명은 익산 옛뚝이부락에 있는 훈련원에 들어가 사관학교식으로 6개월 훈련을 받은 후 전북 익산, 전남 광산 등지로 파송받아 농촌 사업과 복음 전도에 헌신하였다. 강순명 자신도 제주도 모슬포교회로 가 독신전도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독신전도단원들의 열심과 헌신의 결과는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이들은 보수도 받지 않고 어려운 농촌으로 들어가 몸을 사리지 않고 헌신했다. 그러나 전도단의 성공은 다른 곳에서 탄압과 시기를 불러왔다. 농촌운동이 민족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을 두려워 한 일제 경찰당국이 노골적으로 독신전도단 활동을 방해하였고 독신전도단에 대한 교인과 지역 주민들의 호평에 위기감을 느낀 기성 교회 목사들의 비난도 점증했다. 1931년 접어들어 독신전도단원들이 제일 많이 활동하고 있던 전북노회에서 독신전도단을 ‘이단’으로 정죄하려는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배은희 목사는 이단 시비의 원인이 되는 ‘독신’이라는 단어를 빼고 ‘복음전도단’이란 명칭으로 내용을 바꾸어 계속하려 하였으나 강순명은 ‘독신’을 고집하였다. 결국 둘은 갈라섰다. 그러나 복음전도단도, 독신전도단도 오래 가지 못했다.
(3) 호남 영맥의 한 줄기
독신전도단 해산과 함께 모슬포교회를 사임하고 다시 광주로 돌아온 강순명은 다시 에비슨과 함께 1932년 광주농업실수학교를 설립하고 농촌사업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에 몰두했다. 훗날 ‘해남의 성자’로 불리게 되는 이준묵 목사와 ‘맨발의 성자’로 불리게 되는 동광원 창설자 이현필이 이 때 실업학교 학생으로 들어왔다. 강순명은 이 무렵 오랜 독수도 끝에 성경 말씀에 통달하여 금욕과 청빈, 무욕의 도를 실천하고 있던 ‘도암의 성자’ 이세종과 교류하기 시작하였고 역시 이세종과 같은 수준의 금욕적이고 청빈한 수도생활을 실천하고 있는 장인 최흥종 목사와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이세종-최흥종-강순명-이현필-이준묵으로 이어지는 ‘호남 영맥(靈脈)’이 형성된 것이다.
이미 도쿄에서 귀국한 1924년 이후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을 실천해 온 강순명은 청빈의 삶으로 일관했다. 처음부터 그에겐 집이 없었다. 사업을 해서 어느 정도 여유를 갖게 된 형이 보다 못해 17평짜리 집을 한 채 지어주어 그의 가족 여섯 식구가 비로소 자기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무렵 광주에 들어온 성결교회가 예배당 신축을 위해 이성봉 전도사를 데려다 부흥회를 하였는데 강순명이 그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그 집을 건축 헌금으로 바쳐 그의 가족은 다시 셋방으로 나앉게 되었다. 이런 식이었다. 그 무렵 광주에는 불신자들까지 “예수를 믿으려면 강순명처럼 믿어라.”는 말이 돌았다.
강순명은 처음엔 ‘평신도 전도인’으로 끝내려 하였지만 에비슨의 권고로 목회자가 되기로 하고 1934년 감리교 계통인 서울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평양 장로회신학교로 옮기면서 그 곳에서 1년 밖에 공부하지 못했지만 진보적 신학자 정경옥 교수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다. 졸업반 때 평양 신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되어 결국 그는 통신과로 한 학기 수업을 마친 후 졸업장을 받고 1938년 11월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남평교회, 전북 금암교회, 용강 온천교회 등지에서 목회했으나 시국 상황 때문에 한 곳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결국 1942년 11월 목사직을 사임한 후 서울로 올라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숨어 예배드리는 교인들의 신앙을 지도하면서 해방을 기다렸다.
(4) 연경원 설립
해방 직후 강순명 목사는 대대적인 구령운동이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전도자 양성에 착수하였다. 북아현동(후에 원효로로 이전)에 적산 한 채를 얻어 ‘연경원’(硏經院)이란 간판을 걸고 주로 북에서 피난 온 학생들을 합숙시키며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성경을 가르쳤다. 일종의 신학교였다. 학교 운영은 독신전도단과 농업실수학교 방식으로 혹독했다.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교수였던 윤필성 목사를 비롯하여 복음교회 윤치병 목사, 장로교회 오종덕 목사, 음악가 이남철, 조선신학원 학생 차남진 등을 교수진으로 하였는데 처음 시작할 때는 20명이던 학생이 2년 만에 120명으로 늘었다. 그러다보니 연경원 출신들의 목사 안수 문제가 불거졌다. 결국 이 문제로 강순명 목사는 그 때까지 소속해 있던 장로교 군산노회로부터 “사사로이 안수하여 교계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제명당하였다. 강순명 목사는 담담하게 군산노회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이후 강순명 목사는 동석기 목사의 권유를 받고 그리스도의 교회로 소속을 옮겨 원효로교회, 부산교회, 광주교회를 담임하였고 1952년 광주 천혜경로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1955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신촌 언덕에 토굴을 파고 ‘연경신도원’(硏經神道院)을 만들고 기도생활을 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광주로 내려가 요양하던 중 1959년 3월 12일 별세하였다.
평생 가난과 함께 하며 가난을 통해 그리스도 진리를 터득하고 실천했던 전도자, 그러했기에 소유와 명예, 교리나 신조, 제도와 교권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독신’ 전도자였다.
강순명 목사는 광주군 효천면 방림리(현 광주직할시 서구 방림동)에서 자라 광주 숭일 보통과를 졸업하였고, 최숙이 사모와 1918년 3월에 결혼하였다.
광주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정치중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던 중인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에 엄청난 지진이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를 강타하는 것을 보고 회개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1928년 여름, 섬기던 배은희 목사가 몸이 쇠약하여 금강산으로 휴양을 떠날 때에 동행하였다. 금강산 구룡폭포에 이르러 배은희 목사가 말하기를, 눈에 떠오르는 것은 교회의 싸움과 사회의 혼란, 농민들의 참상과 민족의 절망뿐이니 자신이 살아 있다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며, "강군, 나는 여기 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야 하겠오. 강군이 산을 나서면 또 다시 예수님이 옳으니 잘못이니 하는 싸움을 계속하게 되겠지." 하면서 폭포 속으로 몸을 날려 물속에 뛰어들었다. 이에 강순명은 옷 입은 채로 물에 뛰어들어 배은회 목사를 구출해 낸 일도 있었다.
1930년 독신전도단을 창단하여 1931년 5월 29일 제주도 모슬포교회에 부임하여 전도하다가 1933년 광주농업실습학교를 만들었고, 1934년 3월에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35년 4월 평양신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1938년 9월 20일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하였지만, 강순명은 그 해 11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후 강순명은 군산노회 금암교회에 부임하였다가 1942년 전도여행 중에 4개월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1945년 10월에 연경원을 설립하였고, 1946년에는 남정국연학교에서 김구 선생이 자축연회를 베풀었다. 그러나 1948년 10월에 동석기 목사와 성락소 목사를 만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환원 후 원효로 2가 원효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다가 6.25가 터지자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삼각산으로 피난하였다가 9.28수복 후 10월경에 상경하여 수라장이 된 교회를 정리하고 예배를 드렸다. 1-2주가 지나면서 교인들이 모여들었고, 10월 27일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11-12월의 워낙 추운 날씨 탓에 꼼짝도 못하고 크리스마스를 지내려고 떡을 하기 위해 찹쌀을 담가 놓았는데, 정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고 떡쌀로 찰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어 12월 24일 영등포역에 나와 이틀 저녁을 기다리다가 뚜껑 없는 곡간 차를 얻어 타고 천신만고 끝에 이리역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3일간 쉬고 형님 집으로 가서 그 해를 넘기고 1951년 1월 7일 부산 그리스도의 교회 교단 총무로부터 목회 할 곳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으로 내려가 장성만 목사 집에서 모이던 대교리 그리스도의 교회를 맡아 시무하다가 용두산 언덕으로 예배처를 옮기는 일을 했다.
1952년 5월에는 고향인 광주로 이사하였다. 광주에서 걸인과 노인 그리고 고아들을 집에 데려다 돌본 사람이 30명이었고, 사동다리를 지나다 움막에서 중풍에 걸린 여인을 발견하여 병을 치료해주다 장례까지 치르다 보니 광주 학동 그리스도의 교회가 120명 수용능력의 양로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55년 5월에 연경신도원(硏經神道院)을 신촌토굴에서 개설하였으나 과로로 쓰러져 1959년 3월 12일 소천하였다. 현재는 그의 가족이 양로원을 운영하고 있다.
강순명 목사의 유명한 설교는 "기도만능"(막 9:14-29)이고, 장기는 엄지손가락에 막대기 붙이기, 원숭이 놀이, 자전거 뒤로 타기, 시조에 미친 창평노인 흉내내기, 이발기술, 박치기, 겨드랑 밑에서 총소리 내기, 임기웅변의 재주, 코끝에 막대기 세우고 그 끝에 독아지 올려놓기, 땅 짚고 재주넘기, 수영 등이다. 그가 즐겨 부르던 찬송은 "나의 갈길 다 가도록"과 "주안에 있는 나에게"였다.
Ⅱ. ‘근대시기의 광주(사회경제의 변화와 사회운동) 역사에서 강순명’
1. 社會經濟의 變化와 社會運動
(1) 小作爭議와 農民運動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함께 진행된 농지의 수탈은 곡창지대인 전남지방에서 그 극에 달했는데, 그것은 조선시기에 왕실을 비롯한 봉건관료와 지주층의 수탈을 계승하여 이루어졌다. 특히 영산강유역에는 왕실의 궁방전이 많았기 때문에, 그것을 승계한 일본의 동양척식회사는 나주 . 남평 . 영암 . 함평을 중심으로 100정보 이상의 규모에 달하는 농장을 설립하고서는, 닥치는 대로 토지를 매수하여 높은 소작료와 고리대업을 통해 농민을 착취했다.
그리하여 1910년 2월 영산포에 동척출장소가 설치되어 궁삼면(宮三面 ; 엄비의 궁방전으로 본래는 지죽 . 욱곡 . 상곡의 3개면이었는데,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산포 . 왕곡 . 세지 . 봉황 . 다시면으로 분할 편입됨)의 토지를 헐값으로 매입한 다음 고율의 소작료를 부과하자, 농민들은 토지회수투쟁을 전개했다. 처절한 투쟁의 결과 1700정보 중에서 750여 정보를 농민에게 연부로 양도했는데, 그것은 농민들에 대한 감금과 협박을 통한 반강제적인 조치였다. 또한 무안군 하의도에서도 세도가 홍씨가 일본인(右近)에게 토지를 팔아버린 후 토지회수투쟁이 전개되었는데, 많은 농민들이 체포되고 투옥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1910년대 광주지역 농민의 투쟁은, 왕실이나 봉건관료로부터 토지를 넘겨 받아 그것을 토대로 농민을 수탈하고 토지를 빼앗아가는 일제침략자에 대한 피눈물나는 투쟁으로 계속되었다.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이란 명목으로 소유권을 장악하게 되자, 자신들의 농토로 생각하고 대대로 경작하던 토지들이 동양척식회사나 일본인 그리고 친일지주에게 넘어가, 고율의 소작료를 내게 되고 더욱이 그 소작권마저 불안해졌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의 투쟁은 소유권을 찾으려는 몸부림이었으나, 일제의 무력과 가진 자의 교활함으로 인해 처절한 상처만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식민지통치하에서 힘없는 농민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고율의 소작료를 수탈당하면서, 차츰 힘을 합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여 단체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21년에는 3개에 지나지 않았던 농민단체가 1931년에는 1,759개로 늘었으며, 그 중 가장 활발했던 것이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지방이었다. 그리하여 농민단체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 표출시킬 수 있었고, 계속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으니 그 두드러진 투쟁양상이 바로 소작쟁의였다. 광주지역의 농민과 노동자들은 1924년에 전북인들과 더불어 전라노농연맹회를 결성하고, 이어서 경상 . 충청지역과 합하여 남선노농동맹을 결성했는데, 집행위원 49명 중 위원장 서정희를 비롯한 20여명이 광주 . 전남인으로 구성되어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농민들의 생존권투쟁이자 민족운동인 소작쟁의는 1920년에 전국의 15건 중 광주를 비롯한 전남지역에서 5건이나 발생했고, 1924년에는 전국의 164건 중 59건, 그리고 다음해는 전국의 204건 중 105건이 광주 . 전남에서 일어나, 이 지방의 농민들이 얼마나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지방의 농민들은 1.6%에 불과한 지주들이 전농경지의 50%를 점유하고 80%의 농민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단결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1921년에 있었던 광주 극락면 치평리의 소작료거부투쟁, 1922년 12월에 있었던 순천군 서면의 소작농민 궐기에서 농민들은 철통같은 단결을 과시하여 지주들의 횡포를 저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각 지방의 소작농들은 그들의 단결과 권익을 보장하기 위한 단체를 구성하기 시작했는데, 1922년 전반기에 광산의 삼도면 소작인조합을 필두로 영광의 진명소작인 조합이 결성되었다. 그 후 강진의 군동면 소작인공제회, 고흥군의 고흥 소작인상조회가 조직되는 등 모두 90여개의 단체가 출현했다. 광주의 15개면 전체의 조직을 비롯해, 광양의 9개면, 순천의 14개면, 영광의 8개면, 여수의 6개면, 구례의 6개면, 무안의 4개면 및 담양·화순의 2개 조직, 그리고 강진 . 고흥 . 곡성 . 나주 . 목포 . 보성 . 완도 . 장성 각 1개소의 조직을 갖추었다. 이렇게 농민단체들이 결성되어 소작쟁의를 주도했는데, 당시의 일본인 회사와 일본인 지주 그리고 친일 지주들은 수확량의 7∼80%까지를 농민들로부터 수탈해 갔다. 그리고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소작농민들에게는 소작권을 박탈하여 생존을 위협했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비롯하여 전남의 농민들은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여 많은 사람이 희생을 치렀지만, 그 결과 소작료는 50%로 인하되었고 소작권은 보호되었으며 지세 및 공과금은 지주가 부담하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농민운동은 또 한차례의 발전적 변화를 보여 주었다. 종래의 노농혼성단체가 노동단체와 농민단체로 분화되고, 각종 소작인단체가 농민조합으로 개편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1925년 11월 19일 조선노농총동맹이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의 조직을 각기 분리하기로 결의한 데서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1925년 12월 6일 광양 노농연합회가 노농 양단체로 분립할 것을 결정하였고, 1926년 5월에는 전라농민연맹이 창립될 예정이었으며, 1926년 전반기까지 면단위의 노농혼성단체와 군단위의 노농혼성연합체가 연이어 분립을 실행했다. 1926년 9월에 작성된 "남선4도 농민단체조사"에 따르면, 당시 전남에는 83개의 농민단체에 11,938명의 회원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다른 지역의 경우, 전북에 11개 그리고 경남과 경북에 각각 29개와 10개의 농민단체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로써 전남지역이 얼마큼 농민운동의 선진지역이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1927년 9월에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이 분리 창립되었는데, 조선농민총동맹의 지도부에는 전남의 농민단체 대표들이 다수 선출되었다. 20인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서태석(무안) . 신준희(완도) . 조경서(화순) . 김익두(순천) . 김철환(영광) . 김용기(광주) . 한길상(광주) 등 7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남의 농민들은 단결만이 살 길이라 생각하여 각양각색의 단체를 만들어서, 일제의 토지회사와 일본인 지주 그리고 친일 지주들의 착취와 탄압을 막아 보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막강한 무력과 통치권을 배경으로 소작인들을 분열시키고 압박하는 데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강화됨에 따라 농민들의 활동은 여의치 못했다.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자행한 이후로는, 더욱이 합법적인 사회운동의 영역이 급속히 축소되어 갔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일제의 농민조합 활동에 대한 탄압과 해산 강요 및 새로운 조직의 창립 금지 등으로, 1931년 말부터 1932년 중반 사이에 전국의 모든 합법적 농민조합의 조직이 와해되었다. 그리하여 농민조합은 점차 지하로 잠입하여 비합법적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전남에서는 화순 농민연합과 영암 농민조합 등의 창립이 금지되었는데, 영암에서는 즉각 지하에 비합법적 농민조합을 결성하려는 활동으로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대에는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활성화되게 되었다.
혁명적 농민조합은 소작조건의 개선과 일제의 경제적 수탈정책 반대(부역, 조세, 공과금거부) 그리고 부채나 이자의 감면 등과 같은 농민의 경제적 요구는 물론이거니와, 일제타도 . 토지혁명 . 언론 . 출판 . 집회 . 결사의 자유 . 제국주의 전쟁 반대 등 정치적 요구를 함께 내걸고서 농민들을 의식화했다. 이러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함남에서 가장 극성했고, 그 다음이 전남이었다. 전남의 경우, 영산강 유역의 영암 . 나주 . 담양 . 장성 . 무안 등지와 강진 . 보성 . 완도 . 장흥 . 진도 . 해남 . 구례 . 광양 . 순천 . 여수 . 제주 등 16개 지방에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일어나, 전체 22개 행정구역 가운데 73%에 육박하고 있었다.
영암의 농민운동 지도자들은 1930년부터 전국적 범위의 당재건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영암 출신인 최기동은 최헌원 . 곽명수 등과 같이 1930년 5월 해방운동 영암중심부를 결성하였다. 그런 다음 농민조합을 통해 농민을 교양 . 지도하면서 농촌의 청소년과 여성을 농민조합 청년부 . 부인부 . 소년부로 조직한다는 방침 아래, 각 면의 농민조합을 조직하려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농조 창설이 일제의 금지로 무산된 데다가 중앙에서 활약하던 최기동이 검거됨으로써,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 1931년 7 . 8월경부터 혁명적 농민조합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1932년 4월에는 모든 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조직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6월에는 농민의 집단시위가 전개되어, 104명이 검거되고 그 중 67명이 공판에 회부되었다.
한편 김영재는 김재동·정시환 등과 함께 전남농민조합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전남 일원을 3개 지역으로 분할한 가운데 각기 지역을 분담하여 혁명적 농조운동을 활성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때 김재동은 광주 . 나주 . 담양 . 무안 . 영광 . 장성 . 함평을 담당했고, 김영재는 보성 . 강진 . 영암 . 장흥 . 해남 . 화순을 담당했으며, 정시환은 곡성 . 구례 . 광양 . 고흥 . 여수 . 순천 등지를 분담했다. 이와 같이 활발한 농민운동과 사회운동을 전개한 전남의 농민운동계는, 자연히 일제 치안 담당자의 집중적인 견제와 감시 아래 놓이게 되었다. 1934년초 1부 9군에서 무려 550여명이 검거되었던 이른바 전남사회운동협의회사건(해남 . 완도 지역의 혁명적 농조운동사건)은 그 좋은 예이었다. 검거 직후 일제의 고등경찰은 이른바 "농촌적화방지책"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가혹한 고문과 짜맞추기 수사를 자행하였다. 하지만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300여명은 무혐의로 풀려나고 200여명이 검사국에 송치되었는데, 그 가운데 겨우 50여명만이 공판에 회부되어 1936년말에 형이 확정되었다.
광주지역에서 일어난 일련의 농민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한 사람은 서정희(徐廷禧)였다. 그는 이 지방 농민운동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 농민운동의 지도자로 농민운동을 비롯한 각종 민족운동에서 많은 역할을 수행했다. 서정희는 한말의병을 후원하여 1년간 복역한 바 있었으며, 1919년 광주의 3.1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2년형을 언도받았다. 출옥한 후 그는 다시 광주노동공제회 . 전라노농연맹 . 조선노농총동맹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1924년에 대구에서 개최된 남선노농동맹에서는 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2) 勞動爭議와 勞動運動
광주 . 전남지역은 농업중심의 지역으로서, 민족자본이나 일제의 자본이 공업에 치중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도 다른 지방에 비교하여 적었다. 일제시대 전기간을 통해서 200만이 넘는 전남의 인구 중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4만명을 넘지 못했으며, 공장수는 전국의 6.9% 그리고 노동자수는 전국의 14.4%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공장의 종류도 쌀이나 면화의 가공과 관계가 있는 정미업이나 방직업 및 제사업이 그 주종을 이루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열악한 조건에서도 광주지역 노동자의 단결은 매우 굳건하였다. 이 지방에 노동자 단체가 출현한 것은, 1920년대 전반기에 노동공제회 . 노동친목회 . 노동단 . 노동대회 . 노동조합 등 다양한 명칭을 가진 노동조합들이 점차 조직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이 지방의 노동자 단체는 목포와 광주를 중심으로 153개에 달하였다. 이러한 노동자 단체의 출현은 당시 농민운동의 활발한 전개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생존권을 지키고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려는 의도를 지니는 것이었다.
처음 농민과 노동자 단체는 분리되지 않은 채 노농단체로 출발하였다. 1924년 3월 광주에서 전라노농연맹회가 설립된 뒤, 이어서 전라 . 충청 . 경상도의 남선노농동맹이 결성되었고, 4월 18일에는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조선노농총동맹은 1925년 11월에 다시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으로 분리되었다.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분리된 뒤 농민운동은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지방의 농민들이 주도하였으나, 노동운동은 그렇지를 못하였다. 그렇지만 노동문제는 소작인문제와 별개의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로, 똑같이 일제침략자나 가진 자들에게서 탄압받고 수탈당하는 처지여서,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이 지방에서는 실제로 소작인이나 농업노동자들을 노동운동의 조직 대상으로 삼은 적도 있었다. 이 당시 노동조합의 활동 내용은, 대부분 노동임금의 제정과 노동시간의 결정 혹은 조합원의 경조사에 대한 상호부조 등을 중심으로 하였다.
광주지역의 노동단체는, 목포 20개, 광주 17개, 순천 16개, 광양 10개, 담양 9개, 장성 8개, 보성 . 완도 . 나주 및 여수 각각 7개, 해남 . 함평 및 영광 각각 6개, 화순 . 광산 각각 4개, 구례 . 제주 . 고흥 및 무안 각각 3 개, 곡성 . 장흥 및 강진 각각 2개 그리고 영암 1개소 등으로, 모두 153개였다. 이들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지역 노동단체 153개 중에서 조직 시기를 알 수 있는 경우는 111개인데, 이 중에서 무려 82개 단체가 1924년부터 1926년 사이에 조직되었으며, 1923년부터 1927년까지는 99개 단체가 조직되어 전체의 90%에 육박하고 있다. 연도별로 이들 조직단체의 수를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 전남지방 노동단체의 조직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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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1920 1921 1922 1923 1924 1925 1926 1927 1928 1929 1930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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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수 2 1 1 11 25 32 25 6 3 4 1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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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20년대 중반부터는 지역별로 노동단체 연합회가 발족하기 시작했다. 전남도 연맹체는 1926년 2월 24일 광주에서 도내 15개 노동단체가 참가하여 발기대회를 개최하면서 태동하였다. 이 발기대회에서 전남도 연맹체의 준비위원으로 유혁과 이종대가 선출되었는데, 이들은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창립준비를 서둘렀다. 그 후 이 연맹체는 다시 농민총동맹과 통합하였다. 각 지역의 노동조합 연맹체 결성 상황은 다음과 같다.
노동 단체들은 결성대회나 정기총회 그리고 임시총회 등을 통하여 단체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8시간 노동제 . 실업자 보호 . 파업권 확립 . 조선인과 일본인의 봉급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언론·출판·집회 결사의 자유 획득, 부당 검속에 대한 국고배상,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 수립, 인신매매제도 철폐, 조혼 및 강제혼인 철폐, 각 학교의 조선어 사용, 조선역사 교육 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당시의 노동운동이 단순한 노동자의 권익 옹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중 . 반봉건 . 반식민정책까지 쟁취하려는 민주주의 운동이자 민족주의 운동임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노동단체들은 조직을 바탕으로 상황에 따라 쟁의를 전개하였는데, 그것은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요 일제 침략자나 일본인 기업가를 상대로 벌이는 독립투쟁이며 인간존중의 투쟁이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일제 식민당국의 정책 변화에 따라 감소되거나 지하로 잠복되기도 했다. 1920년대 전반기에 미미하였던 파업의 발생이 중반기에 이르면 증대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증가 추세는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는 1933년까지 지속되었다.
농업중심지인 이 지방에는 산업시설이 빈약하여 노동자수가 다른 지방에 비하여 적은 편이었기 때문에, 노동쟁의도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였다. 1921년부터 1935년까지의 노동쟁의 통계를 보면, 전국의 1,712건에 비하여 전남은 86건으로 5.0%를 차지하고 있고, 쟁의에 참가하고 있는 노동자의 수도 전국의 146,154명에 비하여 8,016명으로 5.5%에 그치고 있다.
광주 . 전남지방의 대표적인 노동쟁의로는, 1925년 12월의 목포 자유노동조합 파업과 이듬해 1월의 제유공 파업 및 같은 해 7월 150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하였던 송정리 운수노조원 파업 그리고 12월 담양 정미노동조합 300여명의 동맹파업과 그에 동조한 수차(手車) 조합원 80여명의 동정파업 등을 들 수가 있다. 이밖에도 명백한 조직적 개입은 없었지만, 1924년 9월의 목포 목산인쇄 파업, 1926년 10월의 목포 대정인쇄 파업, 1932년 10월의 목포부청(시청) 위생인부 파업 등이 유명하다. 이 가운데 목포 대정인쇄 파업에서는 민족차별의 철폐가 주장되기도 하였다. 그밖에 광주에도 종업원 711명인 도시제사와 종업원 358명인 종방제사 그리고 종업원 215명인 양림제사 등이 있었는데, 이들 공장 종업원의 대부분이 미성년 여공이었으며, 근로시간도 12시간에서 13시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드러나지 않은 노동쟁의도 빈번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전남지방의 노동쟁의 중 가장 치열했던 것은, 목포의 제유노동자 파업이었다. 이 파업투쟁은, 1929년의 원산 총파업과 1930년의 신흥 탄광노동자 파업 및 평양 고무노동자 파업과 함께, 일제시기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강인했던 노동투쟁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1926년 1월 목포 제유공들은 자유노동조합 파업의 승리에 고무되어, 노동조합 임시총회에서 동맹파업의 단행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인격적 대우 . 임금 인상 . 노동시간 단축 등의 4개조 요구조건을 내걸고, 조사 . 선전 . 구호 등의 부서로 나누어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회사에서는 신입 직공을 모집함으로써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려 했으나, 파업단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그에 저항하였다. 이들은 공장 습격을 감행하고, 면화기를 떼어버리며, 유리창을 파괴하고, 기계를 부수어 작업을 못하게 하는 동시에, 신입 직공 5 . 6명을 구타하여 중상을 입혔다. 일본인 공장주와 일제경찰의 무력과 무자비한 탄압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에는 한계가 있었음에도, 이 파업은 4개월여에 걸쳐 지속됨으로써 노동자들의 가열찬 투쟁의지를 널리 과시하였다.
(3) 社會運動
일제 식민통치의 질곡과 수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광주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사회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광주청년회와 광주기독교청년회의 청년운동이 그 현저한 사례이었다. 광주청년회는 3·1운동을 이끌었던 지도급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1920년 6월 5일의 발기총회를 거쳐 12일에 창립되었다.
1920년 12월에 결성되었던 조선청년연합보다 6개월이나 앞선 일이었다. 광주청년회는 최선진 . 최원택 . 김세현 . 김형옥 . 정인준 등이 거액을 기부하여 자금을 조성하고 활동을 전개했는데, 1920년에는 여자야학을 시작했고, 1921년에는 노동연맹과 함께 노동야학을 개설했으며, 1922년 4월에는 청년학원을 운영하여 청소년들의 실력배양을 위해 노력했다. 광주청년회는 1923년부터 신사상을 접한 신우회(新友會) 구성원들을 대거 받아들여 체질을 개선하였다. 그리하여 최한영 . 강석봉 . 지용수 등을 새로 집행위원으로 선출하였으며, 농민단체의 전국회장을 맡았던 서정희가 그 책임을 맡았다. 그 후 1925년부터는 지용수 . 김재명 . 강해석 . 조준기 등이 청년회를 주도하여 신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의 지원 뿐 아니라 학생들의 지도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한편 송정청년회는 김인영과 배현식 및 변상구의 주도로 1921년 8월 27일에 설립되어 강연회를 갖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광주기독교청년회는 1920년 7월경에 창립되었다. 중앙교회 . 금정교회 . 양림교회 . 향사리교회의 2천여명이 그에 참여하였는데, 광주 3·1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단체를 이끌었다. 광주 YMCA는 시가지를 중심으로 한 선교와 계몽운동에 치중하다가, 1925년 중반 이래 농촌부를 설치하고 시내와 가까운 촌락에서 농촌 교화와 문맹 퇴치 및 산업 장려에 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청년단체의 혁신과 변화에 대응하여 활동방향을 선회하고 간부진도 개편했는데, 1925년 4월에 최병준 . 최영균 . 김기석 . 주태선 . 김용환 . 문찬규 . 김태오 . 신도인 . 이수현 . 장호조 . 최남립 . 최흥종 등을 새 이사로 선임하였다. 1926년에는 김철 . 강태성 . 성은억 . 강순명 . 이윤호 등도 광주기독교청년회에 합류하여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기독청년회 활동 뿐만 아니라 광주청년회 및 노동단체 그리고 농민단체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광주의 사회운동을 지도하였으며, 1927년의 신간회(新幹會) 활동시에도 그 중심인물들이 되었다.
한편 남성과 함께 여성들도 조직화되기 시작하여, 1921년 6월에는 김필례 등의 활동으로 광주부인회가 결성되었다. 이 무렵 조선여자교육회 순회강연단 및 동경여자유학생 강연단이 광주를 찾아, 참석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여성교육의 필요성과 여자의 자각을 역설하였다. 또한 1922년 5월에는 다시 부인대강연회를 개최하여 성황을 이루었는데, 연사들은 모두 신구여성의 각성과 남성사회의 반성을 촉구했다. 이후 부인회의 활동이 침체되자, 신진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1923년 11월 23일에 광주여자청년회를 조직했다. 광주여자청년회는 50명의 회원을 확보하여 여러 부서를 두고 활동하였다. 이어서 광주여자기독청년회가 창립되었는데, 이 회는 1925년 6월 15일 제 2회 정기총회를 열고 종래의 회장제 대신 이사제로 조직을 개편했다.
당시 광주의 여러 사회단체는 서로 제휴하여 실력을 배양하는 한편, 전남지방의 여러 단체들과도 연합하였다. 그리하여 1927년 11월에는 이들 모든 단체들이 모여 광주청년동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광주청년동맹은 민족단일당 혹은 민족협동전선의 신간회운동과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 광주는 물론 전남지방의 사회운동을 이끌어 갔다.
일제 식민통치시기 민족단일당의 성격을 지녔던 신간회는, 당시 350여개가 넘던 사회단체를 하나로 묶어 출범한 것이었다. 단결된 힘으로 효과적인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과 함께 출발함으로써, 파벌주의에 지친 민족지도자들의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신간회는 투항주의적 성향을 띤 민족주의 계열을 배제한 채, 모든 민족주의자와 사회·공산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창립된 것이었다. 1927년 2월에 창립된 신간회는 의장에 신석우, 회장에 이상재를 추대하고, 조병옥 . 안재홍 . 홍명희 . 허헌 등을 간부로 선임하여, 전국적으로 3만명의 회원과 149개 지방의 지회가 조직되어 합법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신간회는 그 강령으로, 한국인 착취기관의 철폐 . 한국인에 대한 특수취제법의 폐지 . 교육 차별의 금지 . 한국어 교육의 실시 . 과학사상 연구의 자유 등을 주장했다. 신간회가 창립된 후 전국의 청년 . 사상 . 노동 . 농민 단체 등으로부터 지지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사회단체의 해체와 파벌 박멸을 통한 전선의 통일 등이 구체화되었다. 또한 신간회의 자매기관으로 여성단체인 근우회(槿友會)가 조직되어 민족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러한 전국적인 추세에 발맞추어 전남지방에서도 신간회에 적극 참여하여 많은 지회가 설립되었는데, 함북의 83.3%와 경남의 81% 및 경북의 75%에 이어 60.9%로 네 번째의 높은 설립 비율을 보이고 있었다. 신간회 전남지회는 광주·목포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중앙본부와의 마찰로 1929년 2월의 중앙회 결정을 인정하지 않고 위원장 불신임안을 제출한 적도 있다. 그러나 지도층과는 달리 일반인들의 신간회에 대한 지지와 열성은 대단했으며, 특히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확산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국민의 기대가 컸다. 전남의 신간회 대표는 정수태(광주지회장) . 장병준 . 김영준(모두 목포지회장) 등이었다. (李相寔)
Ⅲ.‘사회복지 역사에서의 강순명’
한국전쟁의 와중 전라도 광주에서 강순명(1898~1959·왼쪽 사 진) 목사가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의 구걸을 지켜보고 있었다. 골목 첫 집에선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나왔던 사내가 걸인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문을 쾅 닫고 돌아서 버렸다. 두번째 집 도, 세번째 집도 마찬가지였다. 다리를 힘들게 끌며 골목을 다 다녀도 보리쌀 한줌도 얻지 못한 할머니가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본 강 목사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자기 집에 데려갔다. 하루하 루 죽으로 연명하며, 방 두 칸에 대식구가 겨우 살아가는 비좁 은 집에 식구 하나가 늘었다. 광주천 다리 밑을 지나다가도 거 적때기를 둘러쓰고 죽어가던 할머니를 두고 돌아설 수 없던 강목사는 또 다른 할머니를 업고 와 집 안방에 누였다. 그렇게 집에 데려온 사람이 무려 30여명. 강 목사가 전쟁 중 데려온 걸인 할머니 때문에 강 목사 가족들은 방안에 들어가 앉을 수도 없어 한뎃잠을 자야할 지경이었다. 그것이 천혜경로원의 시작이었다. 1952년 7월이었다.
광주시 동구 학동 천혜경로원에 들어가 70여명의 할머니들을 보니 자식도 없고 가진 재산도 없어 양로원에 들어와 살아가는 노인들은 불쌍하다는 편견이 여지없이 무너진다. 정갈한 외모에 밝은 미소들이 경로원 전체를 빛으로 감싸는 듯하다. ‘오늘이 바로 할머니의 마지막날이라고 여기고 여한이 남지 않게 모시려 한다’는 강은수(65) 원장은 강 목사의 아들이다.
강순명은 원래 모태신앙이었으나 아홉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열세살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청년기를 방황으로 보냈다. 그러면서 광주의 뒷골목에서 이름을 떨치던 ‘박치기 명수’였다. 형 태성의 눈물 어린 호소로 순명은 마침내 교회를 나가고, 이발 기술을 배워 이발소를 차려 새 출발을 했다. ‘돌아온 탕아’였다. 그는 그해 수피아여고를 나온 재원 최숙이와 결혼했다. ‘광주의 대부’ 오방 최흥종 목사의 장녀였다. 대인은 대인의 싹을 알아본 것일까. 당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의사의 청혼을 거절하고, 부모도 없이 뒷골목이나 누비던 이발사를 사위로 맞으려 하자 집안 식구들은 모두 기가 막혀 했지만 최흥종 목사는 보물을 얻은 듯 만족해했다.
▲ 아버지 강순명목사의 뜻을 이어 ‘오늘이 할머니의 마지막날이라고 생각하고 모시고 싶다’는 강은수 원장이 천혜양로원 할머니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 조연현)
강순명은 이듬해 만학도가 되어 일본에 유학해 중학교 에 입학했다. 살림은 아내가 일본 유학생들의 밥을 해주 어 근근이 이어갔다. 일본에서 2년째. 도쿄대지진이 일 어났다. 이틀 만에 도쿄 인구 300만명 가운데 16만여명 이 죽고, 10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해 민심이 극도로 흉 흉해지자 일제는 분노의 화살을 ‘조선인’에게로 돌렸다. ‘조센징들이 혼란한 틈에 도둑질을 하고,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일인들은 미친개처럼 조 선인을 찾아 닥치는 대로 칼로 베고 찔러 죽였다. 도쿄 에서 그렇게 학살당한 조선인이 무려 5천명이 넘었다. 우에노공원으로 피신한 순명은 눈물을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지은 죄를 조금도 씻지 못했습니다. 제가 죄를 청산하도록 사흘만 시간을 주십시오!”
눈물의 기도였다. 폭포수 같은 눈물이 그치자 말할 수 없는 평화가 밀려왔다. 그는 그 때 여생을 온전히 주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회심 1년 뒤 귀국한 순명은 기독교청년회(YMCA)에서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전주 서문교회 배은희 목사와 함께 독신전도단을 만들어 일제의 수탈로 피폐해진 농촌으로 파고들었다. 독신전도단은 청년들이 3년간 시간을 내 홀로 농촌에 들어가 헌신하며 주간엔 일하고, 저녁이면 부녀자와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일이면 교회에 봉사하는 삶으로 농촌에서 초대교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나섰다. 독신전도단은 농촌 협동조합과 소비조합을 조직해 농촌경제를 구조적으로 개선하는가 하면, 늘 기초 상비약을 준비해 환자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그때 독신전도단으로 그를 따라나섰던 이들이 ‘맨발의 성자’ 이현필과 ‘해남의 등대’ 이준묵 목사 등이다. 순명은 그때부터 병에 걸려 가족으로부터 버림 받은 폐병환자와 나환자를 업어다가 돌보았다. 그는 언제나 말보다는 삶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증명했다. 첫부인이 결혼 17년 만에 6남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뒤, 평양여자신학생 장신애는 처녀의 몸으로 고아원에 들어간 셈 치고 순명의 삶에 동참했다. 바로 강은수 원장의 어머니다.
강순명 목사는 해방 뒤 서울에서 연경원을 만들어 기독교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직접 골목길을 누비며 남의 아궁이를 고쳐주고 쌀을 얻어와 청년들을 먹여살렸다. 그러나 그가 거둬주었던 한 집사가 소유권 등기를 해놓지 않은 것을 알고 연경원을 자신의 소유로 해버렸다. 주위에선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며 이를 갈았으나, 그는 “주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한다”며 두말없이 한강 다리 밑으로 떠났다. 그는 그런 고난을 당하면서도 누구에게서나 그만의 장점을 발견해내 칭송하곤 했다. 그리고 “남을 성자로 보는 자가 바로 성자이며, 남을 마귀로 보는 자가 바로 마귀"라고 했다.
Ⅳ. ‘목사 강순명’
초기 기독교는 조선이 신분사회에서 온갖 핍박받고 소외당하던 노약자, 여성, 중인,서자등 약자들에게 희망의 빛이었다.
그것은 봉건의 땅을 깨운 정신적인 일대 개벽이었다. 이런 놀라운 개벽이 가능하였던 이유는 예수의 참모습을 단지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 왔던 작은 예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을 살았던 인물 중에 강순명 목사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강순명 목사는 한국 기독교가 개인의 영혼 구제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 사회구제를 외치면서 독신 전도단과 광주농업실습학교 등을 통하여 농촌복지운동을 펼친 선구자이다. 광복 후에는 청소년과 청년 교육에 힘썼으며, 광주에서 최초로 노인복지시설인 천혜경로원을 설립한 사회복지실천가이기도 하다.
또한 예수의 삶을 마음 깊이 담아 신앙고백을 하고 십자가의 사랑을 몸소 실천해나가는 삶을 사는 영성가로서 이세종-최흥종-강순명-이현필-이준묵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적인 ‘호남 영맥’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강순명 목사는 1898년 3월 24일 광주군 효천면 방림리 303번지(지금 남구 양림동아파트자리)에서 모태신앙을 갖고 출생하였다. 강순명이 아홉 살 되던 해 아버지 강광률이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마저 14세 때 세상을 떠나, 아홉 살이나 차이가 나는 형(강태섭)과 함께 아득한 세상을 헤쳐가게 된다. 다행히 두 형제간의 우애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학교(숭일학교)는 어머님이 학교에 가서 몇 번 사정을 하여 겨우 졸업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박치기 명수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깡패가 되고 싸움꾼이 되어 있었지만 형의 따뜻하고 자상한 배려와 주위의 관심으로 차츰 예수님의 삶을 본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1) 강순명 목사의 결혼
1918년 3월 어느 날 아침 양림동에 있는 오웬기념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날은 광주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수피아 여학교 고등과 제 1회 고등과 졸업식 날이었다. 졸업생은 단 3사람 이봉순, 최숙이, 김명순이었다. 이날 구경하는 사람들은 저렇게 고등학문을 배운 처자들이 도대체 누구에게 시집갈 것인가 하고 상상해보기도 하였다. 졸업생 중에 최숙이는 그 당시 한국인 목사로 광주 출신으로는 처음이었던 최흥종 목사의 큰 따님이었다.
최흥종 목사는 가족들에게 짝이 될 사람은 ‘강태성(친형)집사의 동생 강순명으로 정했다’고 하였다. 강순명은 집안 볼 것 없고 학력 없고 거기에다 불량자로 소문난 사람이어서 가족 모두 반대를 하였지만 최흥종 목사는 요지부동이었다. “강군이 지금은 보잘 것 없고 부족하나 교회에 잘 다니고 있고 특별히 그들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다. 그리고 내 눈에 틀림없이 장래성이 있는 사람이니 딴 소리 마라.” 못을 박았다. 이때 강순명의 직업은 형이 차려준 자그마한 이발소 하고 있었으나 경영이 제대로 되지 않아 고생하던 때였다.
그 후 몇 달을 지나 양림동 오웬기념각에서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최숙이 여사와의 결혼은 지금으로 비추어보나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도 굉장히 파격적이었다.
그 후 최숙이는 믿음의 동반자로서 17년간을 온갖 고난과 역경을 참고 견디어 가며 5녀1남을 두고 1935년 7월 지병으로 숨진다. 그 후 강순명은 아이들 여섯을 데리고 평양신학교에 재학 중, 주위의 주선으로 황해도 은률에서 올라와 평양성경학교에 다니는 장신애(후에 광주시 학동의 천혜경로원을 맡는다)와 1938년 7월에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2) 독신전도단
친구들과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로 동경에 유학하여 정칙중학교를 졸업하였으나 1923년 동경대지진의 참화와 생활고의 어려움으로 1924년 조선에 돌아와 선교봉사활동을 하다 어비슨을 만나 함께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하면서 농촌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된 후 ‘독신전도단(1929년 창단~1932년 해산)’을 만들어 농촌현장에 뛰어 들어 선교활동과 함께 농촌경제의 구조적 개선과 농민들의 생활향상을 꾀했다. 그리고 광주 YMCA에서 어비슨과 함께 설립한 광주농업실습학교 내에 제2의 독신전도단을 재건하여 선진농업기술을 가르치고 농촌지도자를 양성하였다. 이 학교의 출신들이 바로 ‘해남의 성자’ 이준묵, 맨발의 성자 이현필(기존의 기독교교단과는 다른 독특한 수도공동체를 형성하여 현재의 귀일원(현 봉선동)으로 발전시켰다), 신학교수 차남진(현 호신대의 차종순 총장의 삼촌) 등이다.
독신전도단 시절 강순명목사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익산 옛뚝이 부락에서 식솔만 10여명이 되어 극도의 불편과 궁핍하게 생활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주인이 폐병이 걸렸다고 만경강가에 내다버린 머슴을 업고 와 안방 아랫목에 눕히고 다 죽어가는 병자 곁에서 정성껏 시중을 해주지만 며칠이 지나 숨져 고이 장사를 지내준 적이 있었다.
또 한 번은 독신전도단이 해산된 후 광주중앙교회에서 교회신축을 위한 부흥회에서 어렵사리 생긴 집을 헌금을 해버린 것이다. 여섯 식구가 당장 발 뻗을 곳도 없어 지내고 있어 안타깝게 여겨, 형이 되는 강태성 장로가 산수동에 지어준 대지 50평에 건평 17평의 집이었다.
(3) 서울 연경원 시절
광복 후에는 주로 북에서 내려온 청년들을 대상으로 숙식을 제공하고 가르치는 연경원을 서울 용산에 설립하였다. 서류를 작성하지 않은 기화로 부동산을 빼앗기고 연경원이 해체 된 후에는 ‘공명학교’를 세웠다.
“그 교회(용산)에 다닐 때 보니 강목사님이 불쌍한 노인들이나 몸이 불편 하신 분들을 자꾸 모셔와, 보통 목사님하고는 틀려 본인은 그렇게 하는 일은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얼굴 찌뿌린 적이 한 번도 없으셨고 늘 즐거운 표정이셨어.
그리고 수중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전혀 걱정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전부 예수님께서 마련해 주실 터이니. 맨발이나 속옷만 입고 오실 때도 있었다. 신발이나 옷을 어디에 두었냐고 여쭈어 보면 신발이 맞지 않아서 옷이 맞지 않아서 다른 사람 주었다고 핑계를 대기도 하였다고 한다.”
“늘 굶주리고 헐벗게 사는 거지들을 한번 배불리 먹여보고자 하는 소원이었다. 그래서 이사람 저 사람에게서 기부를 받고, 김구 선생님을 찾아가 격려의 연설까지도 부탁하여 남산공원에서 ‘거지잔치’를 벌이기도 하였다.”
연경원 출신들의 목사 안수 문제로 강순명 목사는 그 때까지 소속해 있던 장로교 군산노회로부터 제명당하였다.
이후 그리스도의 교회로 소속을 옮겨 원효로교회, 부산교회, 광주교회를 담임하였고 1952년 광주 학동에 천혜경로원을 설립하였다. 1955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신촌 언덕에 토굴을 파고 ‘연경신도원’을 만들고 기도생활을 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광주로 내려가 요양하던 중 1959년 3월 12일 사망하였다.
강순명이 1959년 세상을 떠나므로 실질적인 그가 천혜경로원을 운영한 기간은 매우 짧았지만, 그의 삶을 부인 장신애(1905~1995)와 차남 강은수(현재 원장)이 잘 이어져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천혜경로원이 모범적으로 운영하고 있음은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신앙인에게나 복지실천가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Ⅴ. 맺음말
* 강순명 - ‘거룩한 가난’ 과 영성에의 길
독신전도단은 전라도에서 토착화된 기독교의 한국적 영성수련의 맥을 이어가려는 강순명과 식민지 사회 현실의 모순을 깊이 인식하고 고민하던 기독교 사회주의자 배은희 목사의 구상으로 설립된 노동선교단체였다. 하지만 장로교 총회는 그들 자신의 기득권에 대한 도전과 체제유지적인 권위적 상징 전통을 갖는 기존교회에 대한 관례를 깨뜨리는 위험요소로 보고 해체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기독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식민지의 척박한 현실 속에서 복음 선교를 시도한 주체적인 노력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강순명은 길을 가다 헐벗은 사람을 만나면 자기가 입고 있던 양복저고리를 벗어주었고, 불쌍한 고아들을 찾아 그들을 얼싸안고 울며 밤을 지새웠고, 궁색한 생활임에도 주위의 버림받은 고아나 폐결핵 환자, 노인네들을 업고 와 잃었던 내 식구처럼 한집안 살림을 하였다. 이처럼 그로 하여금 성자적인 ‘거룩한 가난’의 삶을 선택하고 살게 하는 기독교적 영성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와 노동을 통해 깊이 체화하고 거기서 얻는 경험과 확신을 따르려는 청빈과 순결, 그리고 봉사를 통해 드러내려는 그리스도의 뒤따름에 있다.
[ 참고문헌 및 인터넷사이트 ]
http://www.kchmuseum.org, 이덕주 교수
blog.paran.com / mokpojsk 쉴만한 물가
blog.naver.com / rubrub82
cafe.naver.com / dongdi / 495
'울림‘ - 우리가 몰랐던 이 땅의 예수들. 조현지음
제보: 강은수(천혜경로원 원장)
이애실(방림동 주민)
참고: 윤남하, 강순명목사소전, 호남문화사, 1983.
박보람, 강순명의 사회복지활동에 관한 연구,
광주대학교 석사논문. 2012.
한겨레신문, 2007.2.20
이덕주, ‘청빈과 헌신의 독신전도단 운동가 강순명’
조연현 /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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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걸,「일제하 전남 완도 해남지역의 농민조합운동 연구-'전남운 동협의회'의 활동을 중심으로-」(『역사교육』49, 1991)
이균영,「전남지역 신간회 지회의 설립과 활동」(『전라남도지』8, 1993)
김경일,「1920-30년대 전남지방의 노동운동」(『전라남도지』8, 1993)
이애숙,「전남지방의 농민운동」(『전라남도지』8,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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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자료를 많이 모았습니다..
향후에도 좀더 많은 자료를 모아서
완성도를 높여주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