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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5월9일 화요일 [(백)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수도회] 사랑의 인식 속에 주님을 따르는 생명의 순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11,19-26
† 복음 요한 10,22-30
◈ 오늘의 묵상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답답해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기대하던 힘과
권력의 메시아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유다인들의
이 공격적인 질문 속에는 불신과 증오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신들의
편견과 고정 관념에 가두어 두려는 편협함이 엿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죄인을 용서하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지만,
오만한 유다인들은 그 표징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 복음 저자는 이러한 유다인들의 완고한 마음을 빗대 “때는
겨울이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어떤 말을 해도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
자신의 기준으로만 사람들을 판단하고, 아량과 융통성이 없는 사람을
빗대 “마음이 얼음장처럼 차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싶지 않았던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어떠한 표징들도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계시의 빛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얼음장
같은 편견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겨울”이라는 표현 속에
예수님께서 장차 어떤 운명을 맞게 되실 것인지도 예표되고 있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이들은, 바르나바처럼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세상에서 하느님의 지혜를 찾고,
거짓과 오류에 맞서며, 자비와 사랑을 실천할 때 얻어지는 이름입니다.
물어봅시다. 나는 과연 진짜 그리스도인일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지금을 즐길 수 있는 커다란 힘
2017년 가해 5월9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
<그들은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1,19-26
복음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2-30
처음으로 해외에 나갔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저의 첫 여행은 신부가
된 후에 가족들과 함께 떠난 태국여행이었지요. 난생 처음 여권을 만든
뒤에 비행기를 떠나 태국 공항에 내렸을 때, 높은 습도로 인해 숨을
쉬기가 힘들 지경이었고 더불어 지금까지 맡아보지 못한 이상한 냄새가
나서 참기가 어려웠습니다. 여기에 익숙한 한국말이 아닌 전혀
알아보지 못할 글씨가 보이고, 사람들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 역시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낯선 말과 환경으로 인해 저는 갑자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다보니 일행 곁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신기한 것이
있어서 혼자 가서 자세히 보고 싶어도 혹시라도 일행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 싶어서 꾹 참고 일행만을 쫓아다녔습니다. 이렇게 첫 날을
보내고 나니, 조금 익숙해집니다. 짧은 영어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가 있었고, 사람들은 친절하게 대해주었습니다. 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곧바로 가이드를 부르면 다 해결해주었습니다.
전혀 다른 환경과 문화의 차이로 인해 처음에는 낯설고 긴장도
되었지만,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때 가이드가 이야기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지냈던 환경과 다르다고 해서 긴장하고 어려워하지
마십시오. 단지 익숙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냥 즐기시면
됩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는 주의해야 합니다. 여권은 항상 잘
간직하십시오. 여권을 잃어버리면 골치가 아파집니다.”
이 말이 지금을 살고 있는 인생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낯설고
어려운 삶이 나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냥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서
걱정만 하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지요.
단지 지금 내가 익숙하지 않을 뿐이라고 인정하면서 그냥 즐기면
어떨까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해외여행에서 여권을 잘 간직해야 하는
것처럼, 주님과 함께 하는 신앙이라는 여권을 내 마음 안에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과의 연결이 끊어져서는 안 됨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이 영원한
생명을 통해서만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연결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아닐까요?
여권을 잃어버린다고 다시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사관에 가서 다시 발급받으면 되니까요. 하지만 여권을 재발급
받기까지 오랜 시간과 복잡한 과정을 겪어야 하기 때문에 여행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을 잃어버린다고
해서 살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만큼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으며,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이 세상에서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지금을 즐길 수 있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누군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를 바르게 판단할 수 없다(틱닛한).
가족들과의 첫 해외여행.
주님이 먼저입니다.
성녀이신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 대한 잘 알려진 일화가 있습니다.
데레사 수녀님을 따르는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은 죽어 가는 이들과
환자들을 씻기고 보살피고 빨래하는 일 같은 육체노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데, 하루에 여러 차례 있는 기도 시간 때문에 일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시간을 조금만 더 줄어들면 어려운 사람들을
더 많이 도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수녀님들께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을 찾아가 청을 드렸습니다.
“수녀님, 기도 시간을 좀 줄여 주세요. 그 시간이면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그러세요? 그럼 기도 시간을 두 배로 늘리세요.”
우리는 종종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일이 기도보다 더 우위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고 보람 있는 일이라 해도, 주님을 아래에 놓게 된다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기도
시간을 두 배로 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지금 내 자신을 다시금 되돌아 보았으면 합니다. 무엇이 먼저였을까요?
주님이었을까요? 아니면 세상일일까요? 만약 세상일이 먼저였다면
분명히 기도를 두 배로 늘려야 합니다. 그만큼 주님이 먼저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성녀 마더데레사 수녀님.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사랑의 인식 속에 주님을 따르는 생명의 순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5월9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요한 10,22-30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사랑의 인식 속에 주님을 따르는 생명의 순례
때는 겨울, 유다인들의 삶의 뿌리를 회상케 해주는 성전 봉헌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10,22).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며 돌로 쳐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이런 긴박하고
싸늘한 상황에서도,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주랑을 거니십니다(10,23).
매서운 겨울 동풍을 막아주는 성전 주랑은 인간의 살의(殺意)를
무력하게 하는 주님의 팔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인간의 죽음의 손길을 아랑곳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는, 유유히 악과
불의의 한복판을 걷고 계십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속이 타서,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10,24) 하고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사실 그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생명의 빵’이며,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음’을
말씀하였으나 믿지 않았습니다(10,26).
그뿐 아니라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표징을 보여주셨음에도 믿지 않습니다(10,25-26).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보여주는
행적도, 모두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예수님을 부인하여 죽이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속한 양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은 물론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일말의 사랑도 없었던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고,
알아보지 못했기에 그분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르기는커녕
거부하고 죽이려 든 것이지요.
한편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을 믿고 사랑했기에,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을 따릅니다(10,27). 그 결과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고, 주님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10,28).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이시기에, 그분을 사랑하고 따르는 이들은 그 어떤
위험이나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아버지의 보호를 아래 있게 됩니다
(10,29-30). 이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 나타난 유다인의 태도와 제자들의 태도는 이미 우리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왜 우리는 남을 미워하고, 탐욕을 부리며, 불의를
저지르고 거짓말을 하고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꼴을 못 볼까요? 그럴 때
유다인들과 같은 심보와 불신이 꿈틀거리기 때문이겠지요. 왜 교만하게
처신할까요? 하느님을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은 채 자신을 중심에 두는
유다인의 습성에 끌려가기 때문이겠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을 받아들여 그분 안에
머물 때, 온갖 위험과 고통,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내 영혼이 어둡고 고통스러워도, 세상 불의가
극성을 부려도, 그 모든 것에도 꿈쩍 않으시는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의
품으로 달려가야겠습니다. 그 안에서 주님 친히 지펴주시는 사랑의
모닥불에, 생각과 마음을 녹여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 그분과
동화되어야겠지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바로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한 겨울
찬바람이 부는 솔로몬 주랑과 같습니다. 내 마음과 처지도 그럴 때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공동체도, 이 사회도 하느님을 망각하고
사랑이 식어버린 동굴 속에서 죽음을 향해가는 순간의 연속일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사랑으로 그분을 따라 영원한
생명의 순례를 떠나는 행복한 우리였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사는 게 녹록치 않을 때
2017년 가해 5월9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요한 10,22-30)
사는 게 녹록치 않을 때
동료 신부님과 산책 나갔다가 가게 앞에 세워놓은 입간판에 완전
매료되어 막걸리를 한 잔 하게 되었습니다. ‘삶이 애잔해질 때...속
훑어주는 ○○홍어’ “사는 게 녹록치 않을 때가 있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그럴 땐 속 훑어주는 잘 삭힌 홍어 한 점과 탁주 한
사발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겉으로는 꽤나 화려하고 요란스러운 대한민국입니다. 그러나 내부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처참하리만치 암담한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좌절과 낙담 속에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서민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시절 우리 국민들에게 가장 좋은
치료제는 누군가로부터의 위로와 격려, 관심과 지지입니다.
숱한 암초 앞에 서 있는 대한민국호의 선장이 가려질 순간이 드디어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분은 소박하고 마음이
따뜻한 분이면 좋겠습니다. 선한 미소와 넉넉한 웃음의 소유자였으면
좋겠습니다. 다정한 위로와 자상한 격려의 전문가였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입사 면접에 고배를 마시고 낙담해하고 있는 청년들을 따뜻이 안아주며
힘내라고 말해주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사는 게 너무 막막해
주름이 한층 깊어가는 어르신들과 둘러앉아 스스럼없이 막걸리 한잔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직장생활에다 육아에다 삶이
너무 힘겨운 젊은 부모들을 내 자식처럼 여기고 배려하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암울하고 힘겨웠던 군부독재 시절, 철권통치 앞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맞서 청춘을 불살라본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투옥되어 인생의 가장 밑바닥 체험을 해 본 사람, 그래서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의 고통스런 심정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 가고 기댈 언덕 하나 없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사심 없이 봉사해본 경험이 있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있는 사람 앞에 비굴하지 않고, 없는 사람 무시하지 않으며,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막말이나 폭언하지 않고, 저속하고
쌍스러운 표현 쓰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가까운 사람들, 특히
부모 자식들과 친지들, 또한 장인장모님도 지극정성으로 배려하고
정성껏 봉양하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떤 유다인들에게 있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목숨 걸고 준수해왔던 안식일 규정이며 정결예식을 보란 듯이
파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혹시라도 이분이 정말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일말의 걱정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예수님께 던진 것입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복음 10장 24절)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오래도록 제 마음 속에 메아리쳤습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복음 10장 25절)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이름으로 행하신 모든 사랑의 기적들,
수많은 치유활동들, 극적인 구마행위들, 엄청난 사랑의 기적들이 모두
그분이 메시아성을 명명백백하게 확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많은 일들을 직접 자신들의 눈으로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에 찬 시선을 거두지 않았던 유다인들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리 역시 영적 눈이 어두워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자, 더 나아가서 그분과 한 마음 한 몸이신 분,
하느님 그분 자체라는 진리를 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양들을 아시는 목자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5월9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양들을 아시는 목자
복음: 요한 10,22-30: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성전 봉헌 축제가 있었다고 한다. 예루살렘 성전 봉헌을 기념하는
축제를 말하는데 마카베오가 안티오쿠스에 의해 황폐해졌는데 그
군대를 쳐 이겼고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이 날을 기렸다. 이 축제가 시작되면 모든 사람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던 것이다. 이 축제는 온 백성이 참여하는 대규모 축제였다.
유다인들은 그분을 둘러싸고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요?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24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관해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말보다 행동으로 드러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을 자극하여 빌미를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이나 행적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물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26절)라고 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27절) 우리가 참으로 양떼라면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분의 양이라면 그분의 말씀을 기꺼이 듣고 따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알아듣는다.’는 말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따른다는 뜻이다.
하느님을 듣는 사람은 그분께서 아시는 이들이다. 이렇게 아시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며, 말씀의 인도를 받아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라 불린다.
(마태 5,9 참조)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그들도 그분을
따라간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28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생명을 주심으로써 당신이
생명이심을 보여 주신다. 바로 당신 자신이 가지고 계신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한 6,54)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그분의 몸에 참여할 때,
그분은 당신 자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도록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 이 생명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요한 10,9)라고 하셨으며, 이 좋은 풀밭은 ‘영원한 생명’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29절) 아버지께서는
양들을 아드님께 주셨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또한 아드님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신 분임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신
분으로 낳으심과 동시에 아들은 당신과 동등한 분으로 나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위대하신’ 것이다. 이것이 아무도 양들을 그분의
손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이유이다. 여기서
‘손’은 권능을 의미하며 아버지와 아들의 권능은 하나이다. 같은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은 바로
가장 영예로운 차원, 즉 하느님으로서 하나라는 말씀이다. 이 하나라는
표현은 숫자가 아니다. 이것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둘이 하나인 상태이다.
‘나와 아버지는’ 두 위격이기 때문에 ‘~이다’라는 동사는 우리라는 복수
일인칭을 사용하셨다. 여기서 하나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의견과
사랑과 호의에서 일치하듯이, 의견의 일치, 판단의 동일성, 사랑 깊은
관계 자체를 나타낸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셨기에, 그분은
아들이시다.
우리도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사랑이라는 관계는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러한 모습이 삼위일체의 모습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전혀
다른 분이시지만 사랑이라는 관계, 완전한 사랑 안에 하나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르지만 사랑의 관계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
그리스도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참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삶을 노력하자.
- 수원 교구 상하 성 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부활 제4주간 화요일
2017년 가해 5월9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 요한 10,22-30
오늘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입니다. 사전투표를 하신 분들도 있지만,
아직 투표하지 않으신 분들은 투표하시면 좋겠습니다. 모든 후보들은
국민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국민의 선택을
받은 후보는 겸손한 마음으로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펼치면 좋겠습니다.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한 후보 역시 겸허하게 결과를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선택된 후보에게는 축하를, 선택되지 못한 후보에게는
위로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선거의 과정에서 많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상대방 후보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하는 것을 봅니다. ‘아니면 말고’라는 식으로 무책임한 말로
상대방에게 흠집을 내는 것도 봅니다.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색깔론으로 매도하는 것도 봅니다. 현명한 유권자들은 그런 말에
현혹되지 않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해 준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평화롭고, 서로 아껴 주며,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고난 중에도 절망하지 않았고, 세상의 가치에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존중의 말이었고, 칭찬의 말이었고, 닮고 싶은 이름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삶으로 보여준 자랑스러운 이름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소문난 맛집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재료가 신선하고,
음식이 맛이 있고, 가격은 착하고, 직원들이 친절하고, 경치가 좋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더라도 기꺼이 시간을 내기
마련입니다. 이웃들에게 소개하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늘 새롭게 묵상하고
있는지, 하느님의 말씀을 삶으로 드러내고 있는지,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누고 있는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여전히 ‘그리스도인’을 사랑과
존경을 가득 담아서 부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3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첫째는 병자들을 고쳐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병자입니까?
하느님을 믿었으면서도 세상의 욕심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들이 병자입니다. 육신은 건강해도 우리는 모두 조금씩 영적으로
병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째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는 보면서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하느님과 함께하면 영적인 치유가 일어납니다.
사도들은 바로 그런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둘째는 마귀들을 쫓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머리에 뿔이 달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를 풀고 하얀 소복을
입고 길에 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
중에도 마귀의 유혹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귀는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들의 신앙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돈 마귀 때문에 성당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 마귀
때문에 친구를 배반하고, 양심을 속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 마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만의
마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가족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교만함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커다란 마귀의 유혹입니다.
세 번째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은 내가 기뻐야 전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고, 세상의 명예로 얻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파수꾼이 되어서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등대가 되어 험한
풍랑 속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나침판이 되어서 지친 이들에게,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하나였듯이, 우리들도 주님과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사랑하면 하나가 된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5월9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요한 10,22-30)
사랑하면 하나가 된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께서 ‘너는 언제까지 내 속을
태울 작정이냐?’하고 유다인을 향해 하셔야 할 말씀이었습니다.
말썽쟁이 자녀를 둔 어버이 마음입니다. 여러 표징을 보여주면서 이미
다 말하였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있는
것처럼 교묘히 말하는 그들을 모를 리 없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이 말씀은 입으로 이런 소리 저런 소리 하지 말고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먼저 믿어라. 그리고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행하면 행할수록 진실을 깊이 알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내가 마음을 닫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들리지 않는
것뿐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들려서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신 말씀은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어떤 것에 대한 자기의 지식, 기대나
생각, 바람, 선입견이 그를 귀먹고 눈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먼저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것을 내 안에 담아주지 않는 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 놓은
아들의 순명에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 놓은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루카22,42). 물론 아버지는 아들이 순명을 하든 그렇지 않든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 사랑을 알게 되면 자녀 또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나가 됩니다.
내 뜻을 이루려다 보면 무리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리고 거짓 포장과
술수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속을 태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하느님과 하나가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내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을 가슴에
모셔드려야 할 때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고 동산을 거니시는 하느님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때 주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누가 일러
주더냐?"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탄의
말을 따랐구나!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흔들림 없이 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 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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