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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디모데전서 4:1-16
오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선한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내면적인 싸움을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사는데 바쁘다보면 남은 가르치는데 정작 자신의 신앙 성장에는 소홀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선한 일꾼이 되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신앙 성장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들의 신앙을 돕기는커녕 자신하나도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신앙성장에 전심전력하여 성숙함을 이루어서 선한 일꾼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통하여 선한 일꾼이 되는 비결을 잘 배워서 성숙한 일군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거짓 교훈을 분별해야 합니다.(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신 것은 어떤 사람들이 믿음을 떠나는 일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믿음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예수님의 은혜를 입고, 그 구원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일생동안 이 은혜로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이 왜 믿음을 떠나게 되는 것일까요. 1절 말씀을 자세히 보면, 미혹하는 영 - ‘deceiving spirit’과 사단의 무리인 귀신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혹을 받다보면, 나중에는 양심에 화인, 즉 불화살을 맞은 사람과 같이 되어 버립니다.(2) 이렇게 되면 영적 감각마저 잃어버리고, 진리를 대적하는 거짓말까지 태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또한 자연스럽게 위선에 빠지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사단의 미혹에 빠지게 될까요. 이는 바로 우리 마음에 있는 욕심 때문입니다. 사기꾼들도 사람들의 욕심과 탐욕을 자극해서 뭔가 좋은 것을 줄 것처럼 환상을 심어줍니다. 그리고 탐욕에 사로잡히는 것을 틈타서 살짝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런 수법의 대가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최초로 미혹할 때도 이 열매를 먹기만 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탐욕을 사람의 마음에 먼저 심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은 미혹의 영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떠나 죄악의 길로 빠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결코 옛날의 이야기나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우리 마음에 탐욕을 심지 못하도록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사단의 미혹의 영에서 우리를 지켜주시도록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 최재영이란 사람과 김건희여사, 공산주의 달콤한 거짓
그러면 이런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자들이 주장한 것이 무엇입니까? 3절을 보면 혼인을 금하고 음식도 제한을 두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은 결혼을 금하고 결혼에 매여 자신의 삶을 잃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3절과 4절을 보면 음식과 혼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합니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모두가 거룩하여졌습니다. 누구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감사함으로 먹고 마시면서 즐거워하고 또 여기서 힘을 얻어 열심히 주님을 위해 살면 됩니다. 우리성도님들은 무엇이든지 맛있게 잘 드시기를 축원합니다. 많이 먹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길 축원합니다.
둘째, 경건해지도록 자기를 단련시켜야 합니다.(6-11)
6절부터 11절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경건해져서 그리스도의 좋은 일군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고 해서 주님의 좋은 일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실제적인 주의 일군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힘써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말씀을 가르치기에 힘써야 합니다.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여기서 이것이란 앞서 나온 음식과 혼인에 대한 올바른 교훈과 같은, 각종 성경적 교훈들을 말합니다. 또한 깨우친다는 것은 영어로는‘point’로서 지적해주고, 방향을 잡아주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공부를 통해서 삶의 올바른 방향들을 잡도록 가르쳐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시대를 살피고, 어린 자녀들의 내면의 문제를 살펴서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세워주는 것이 바로 부모가 해야 할 일입니다. 디모데뿐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먼저 부단히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이 실제 생활에 잘 적용될 수 있도록 성도들에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리더가 깊이 말씀을 연구하고 그것으로 성도들을 가르치면, 성도들이 실제적으로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는 우리도 성장하게 됩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6절 하반절 말씀을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우리가 자녀들을 가르치다보면 내가 은혜를 받고 내가 그 말씀으로 양육을 받게 되어 그리스도의 좋은 일군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 잘 가르치고자 하면 나 자신이 성장을 하게 된다는 것일까요? 왜 오히려 가르치는 사람이 양육을 받을까요? 이 안에는 놀라운 진리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 성도들에게 말씀과 좋은 교훈을 주기 위해서 말씀을 연구하고 파게 됩니다.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려고 기도하고 준비할 때 이상하게 나의 내면은 말씀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엉뚱하게도 준비하는 자신이 먼저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의 은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가르치게 되자 그 속에 또 다른 은혜의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씀을 가르칠 때 그 은혜가 2배, 3배 감동이 되어서 몰려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입니다. 또한 말씀을 가르치다보니, 그 말씀 속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감동으로 전해진 한마디 말씀은 배우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감동된 말씀은 배우는 사람들에게 삶의 힘이 되고, 은혜가 되고, 그들 각자의 인생문제의 해답을 얻습니다. 또한, 말씀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말씀을 가르치고, 함께 밥을 먹으며 교제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가 변할 뿐 아니라 가르치는 우리 자신도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생이 변합니다. 그래서 말씀공부는 위대합니다. 말씀의 은혜의 강물이 흐르면, 삭막했던 땅이 생명력이 충만한 울창한 숲으로 변합니다. 이로인해 전하는 우리또한 말씀으로 말미암아 함께 풍요로워 진다는 사실은 큰 축복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면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이나 이 풍요로움 속에서 놀라운 성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경건해 지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성경읽기가 자연스럽게 됩니까? 아무리 시간이 많이 남아도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정보를 찾지 시간을 내어 성경을 찾아서 읽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번 성경을 읽는 것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결심하고 규칙적인 말씀 묵상에 힘쓸 때 우리 내면은 말씀으로 변화되어 경건과 거룩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작은 시간들을 모아서 성경읽기에 힘쓰므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기를 축원합니다.
2) 허황되고 허탄한 것을 버려야 합니다. 7절 말씀을 보면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좋은 것, 최고의 것(best)을 얻으려면 그보다 덜 중요한 것(better)을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건을 얻기 위해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것은 바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입니다. ‘망령되다’는 것은 godless로서 비신앙적인 것을 말합니다. 또한 ‘허탄한 신화’는 당시에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 아이들에게 말해주는 허황된 이야기를 말합니다. 세상에는 허황된 이야기가 많습니다. 10.28 휴거된다느니, 그런데 아직도 이런 사람의 말을 들으며 열광적으로 ‘아멘’하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들의 특징은 신비롭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또한 지나치게 허황된 TV 연속극에 그것 때문에 어느 틈에 경건생활이 뒤로 밀려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삶이 허탄해지고 내면에 신앙의 결실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허탄한 이야기를 피해야 하겠습니다. 디모데도 영적인 지도자로서 잘 분별하여, 이런 영적으로 무가치하고 결실이 없는 허풍스러운 것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허탄한 일을 버리고 오히려 경건에 힘써야 합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연단하라.’ 이것은 영어로 train입니다. 즉, 연단, 연습, 훈련으로 번역이 됩니다. 경건은 godly로서 죄를 멀리하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경건한 척하는 껍데기 삶을 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내면이 변화되는 경건의 삶은 적극 강조하셨습니다.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도록 연단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말씀중심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내면이 연단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연단이라는 말을 사용할까요. 왜 훈련이라는 말을 해야 할까요. 이는 아담의 범죄 이후 우리의 내면이 근본적으로 죄악되고 세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꾸준하게 자기 자신을 훈련시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이런 경건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루하루의 삶을 통하여 끊임없이 이루어져 도달하는 것입니다.
3) 경건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배우고 기도해야 합니다. 경건에 이르게 되는 훈련에는 무엇보다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말씀묵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의 도리를 알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성경읽기가 자연스럽게 됩니까? 아무리 시간이 많이 남아도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정보를 찾지 시간을 내어 혼자 성경을 찾아서 읽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묵상에 힘쓸 때 우리 내면은 말씀으로 변화되어 경건과 거룩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작은 시간들을 모아서 성경을 배우고 묵상에 힘쓰므로, 경건에 이르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삶은 확실히 경건해집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게 합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분명한 문제의식이 있어도 기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릎만 꿇으면 자연스럽게 기도가 될 것 같지만 무릎이 꿇어지지 않습니다. 기도하려고 눈만 감으면 자꾸 해야 할 일이 생각이 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기도를 하지 않으면, 저녁에 자기 전에 반드시 사건이 생깁니다. 꼭 잘 될 것 같았던 일들도 잘 안됩니다. 그래서 아침에 기도를 하지 않으면, 그날은 하루를 잃어버리게 되는 날입니다. 바쁜 중에서 짧은 기도를 수시로 해야합니다. 누구에게 전화를 할 때나 성경공부를 인도해야 할 때도 수시로 짧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기도를 하면 하루를 승리합니다. 우리가 이를 깨닫고 기도 훈련을 해야하겠습니다. 기도를 못하는데 어떻게 능력을 구하고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는 내가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기도가 우리의 경건에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기도를 통해 경건에 이르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외에도 우리의 직장이나 가정도 경건에 이르는 좋은 훈련장입니다. 어떤 분들은 기도와 말씀과 같은 것만 경건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직장이나 가정 등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은 가정문제 자녀문제를 통하여 우리의 경건을 만드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경건의 연습들을 구체적으로 힘쓸 때, 우리의 육체의 본성은 줄어들고 내면에 강력한 영성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경건이 자연스럽게 됩니다. 이때, 영적인 분별력이 생기고, 가족도 교회도 섬길 힘을 덧입게 됩니다. 전도도 힘써 감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통하여 내면이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이러한 경건은 범사에 유익합니다. 8절을 보면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물론 육체의 연단도 약간의 유익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몸짱을 만들기 위해서 Physical Training 즉 PT를 많은 돈을 들여서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움 몸매와 건강을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경건해지면 범사에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자유케 됩니다. 작은 문제에 매여 따지고 죽고 싶곤 하였는데 이제 그렇지 않습니다.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우리가 감사하고 감동하면 우리 몸속에서는 엔돌핀보다 무려 4000배의 항암작용을 하는 다이돌핀이라는 물질이 생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은 우리의 얼굴을 환하게 해줍니다. 생각이 맑아져서 헛생각에 빠져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경건해지면 공부도 열심히 하게 되어 장학금도 타게 됩니다. 또한 경건은 내생에도 약속이 있습니다. 내생은 영생을 포함한, 장차 올 하늘나라에서의 모든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9절에는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하도다.” 이 경건해져서 범사에 유익함이 많아지고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셋째, 성경을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해야 합니다.(13) 12절을 보면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당시 디모데는 젊은 나이에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연소함이란 군대 갈 나이입니다. 장로들이나 나이든 교인들에 비해서는 디모데는 연소했습니다. 연소하게 되면 영적 지도자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말에 무게가 실리지 않고 권위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영적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권위가 있어야 하는데 권위가 서지 않는다면 이는 큰 문제입니다. 나이든 사람들은 디모데의 리더쉽을 잘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디모데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이가 뭐 대수냐' 하며 목사의 권위를 내세워야 합니까? 진정한 권위는 나이나 직분에서 나오지도 않습니다. 영적 권위는 본이 되는데서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본이 되라고 합니다. 먼저 말이 본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 없는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않으며,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행실이 따라가야 합니다. 말과 행실이 다르다면 위선자입니다. 실제 생활에서 말씀대로 살고자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하였습니다. 지도자는 허물을 들추어내기보다 사랑으로 품고 용납할 때 성령의 그릇을 이룰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이 있어서 어떠한 난관도 도전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정절, 즉 깨끗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지도자는 영육간에 깨끗해야 합니다. 물질욕, 명예욕, 정욕에 있어서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러한 실제적인 생활에서 본이 될 때 자연히 영적인 권위가 서게 됩니다. 한마디 말에도 무게가 실리고 영적인 질서가 생기게 됩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이러한 내적 권위만이 진정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가르칩니다. 당시에는 인쇄소나 개인용 성경이 없고 단지 양이나 염소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려면 한사람이 강단에 서서 큰소리로 성경을 읽어야 했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이러한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은 다음에는 말씀 속에 담긴 진리를 잘 해석하여야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말씀대로 살도록 권면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말씀을 가르치고 권하는 일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은 말씀에 전념해야 합니다.
넷째,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합니다 (14-16)
15절을 보면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이 모든 일이란 거짓을 분별하는 일, 경건에 이르도록 연습하는 일, 본이 되어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가르킵니다. 사람들은 지도자의 말을 배우기보다 그 삶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가 성장하지 않을 때 그 모임도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실력이나 지력이나 영력에 있어서 성숙함을 보여야 합니다. 성숙함이란 어떤 장애를 넘어 전진하고 성장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좋은 일꾼들은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성숙함을 이루지 못했다는 핑계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성숙함을 나타내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합니다. 자기 속회뿐 아니라 교회 및 믿지 않는 자들에게까지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자면 속사람이 완전히 변해야 합니다. 이미지가 바뀌어야 합니다. 연약한 사람은 강해져야 하고 율법적이고 까칠한 사람은 은혜롭고 포용적이 되어야 하고 말이 거친 분들은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복잡한 사람은 단순해져야 합니다. 어떤 분은 열정이 있어서 외적인 일을 성실하게 잘합니다. 이런 분은 내적인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성숙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떤 분은 마음이 좋아서 어떤 사람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반면에 싫은 소리를 못하기 때문에 어린 성도들을 말씀으로 돕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분은 복음의 능력을 덧입기까지 성숙해야 합니다. 막내로 자라 자기중심적인 면이 있는 분들은 희생적인 목자로 이미지가 변해야 합니다. 복음의 종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성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농구를 하거나 영어 공부를 할 때도 어제보다는 오늘이, 작년보다는 올해가 나아져야 합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먼저 자신이 괴롭습니다. 또한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부담을 주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장할 때 자신에게도 기쁨이 있고 은혜를 끼치게 됩니다.
그러나 성숙함을 이루는 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무엇이든 대충 대충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전문가가 되려면 그 분야에서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농구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하루에도 수천 번 슈팅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남모르는 투쟁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배우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훈련 제목을 깊이 영접함으로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성숙함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경건의 연습과 본이 되어 가르치고 권하는 전념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성숙함을 나타내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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