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바다가 있고 이야기가 있는 그곳, 경북 포항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
고양인터넷신문 기사 입력일 : 2022-06-15
【고양인터넷신문】경북 포항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은 멋진 바다풍경과 함께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 공원은 우리나라 삼국유사 1권에 수록된 연오랑세오녀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만든 일종의 테마공원이다.
이곳은 일본식 정원과 신라정원을 만들어 두어 산책하며 걷기 좋은 곳이다. 입구에는 설화를 스토리텔링 해 둔 이야기 벽이 있어 흥미를 가지고 이야기 속으로 걸어들어 갈 수 있다.
연오랑세오녀 이야기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소개되어 있는 설화이다. 신라시대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일본에 도착하게 된 연오랑과 세오녀는 일본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 그들이 떠난 이곳에는 해와 달이 뜨지 않게 되었고, 신라의 왕이 사신을 보내 돌아와 줄 것을 부탁했으나 하늘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대신 세오녀가 짠 비단을 내밀었고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제사를 지내고 나니 해와 달이 다시 돌아왔다는 전설이 전한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귀비고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은 일본에서 세오녀가 보내 온 비단을 보관하던 창고였다. 귀비고 건물을 왼쪽을 끼고 돌면, 우측으로 쌍거북 바위가 나온다. 이 거북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해초를 캐던 연오를 바닷가에 나타난 거북바위가 일본으로 데려갔고, 이를 일본인들은 비범하게 생각해서 왕으로 추대했다. 이후, 남편을 그리워하는 세오녀를 또 다른 거북바위가 일본으로 데려다 주었다고 한다. 이 바위 두 개를 합쳐 쌍거북바위를 만들었다고 한다.
(에디터 : 장정인, 사진 : 이상욱/김윤탁)
◆연오랑 세오녀
박정희의 고향은 경북 구미이고, 박태준의 고향은 경남 양산이다. 박태준은 남조선 경비 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에 박정희를 처음 만났다. 당시 박정희 대위는 생도대 중대장으로 탄도학을 강의하는 교관이었고, 박태준은 생도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스승과 제자, 혹은 지휘관과 참모로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두 사람의 만남이 우리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한일 국교정상화의 대가로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은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박태준은 영일만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포항제철을 세운다. 제철기술을 이전해 주기로 약속한 미국이 이를 어기자 그는 천신만고 끝에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제철산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은 세계적인 철강 생산국이 되었지만, 1960년대 상황에서 제철 산업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제철기술은 다시 조선업, 자동차업 등에 영향을 주어 한국 경제의 빛이 되었다. 제철기술이 한국 경제발전의 견인차가 된 것이다.
신라 건국 초기 박혁거세 부족 집단은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한 유목 집단으로 보인다. 육상 이동 집단이었으니 기동성은 좋았으나 바다 진출에 폐쇄적인 경향을 보인다. 또한 주변국가인 백제나 가야에 비교하면 제철기술이 낙후한 집단이었다. 바다 진출에 폐쇄적이고 제철기술이 낙후한 것이 초기 신라의 최고 약점이었다. 낙후한 제철기술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기에 신라의 여러 부족은 생존과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제철기술을 둘러싸고 경쟁이 치열했다. 신라는 초기에 박씨와 김씨, 석씨 부족의 연합체로 출발하지만, 경주 주변 6부 촌장들도 사병(私兵)을 가진 강력한 정치세력이었다. 권력이 분산되어 있으니 각 세력은 입지를 넓히기 위해 항상 각축하였고, 독자적인 왕위세습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제2대 남해왕은 일본 오키제도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는 석탈해가 기질이 드세고 지략도 우수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왕위를 아들 유리왕에게 계승하려 했다. 그래서 왕위 계승권을 이의 수효가 많은 자로 한다. 이사금(尼斯今·잇금·임금)이란 왕호는 이의 수효가 많은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지략가 석탈해는 우여곡절 끝에 3대 유리왕 이후 4대 왕이 된다. 하지만 그는 아무래도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던가 보다. 출신 성분이 입지를 좁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왕위가 다시 박씨에게 옮아가자 석씨 부족의 제철을 담당하는 연오랑 집단도 더 이상 신라에 머물 수 없게 되어 일본으로 집단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연오랑이 이주한 곳은 일본의 시마네현 이즈모 지역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 세오녀 설화는 한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태양설화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4년이니 서기 157년이다. 연오가 해초를 따다 바위에 실려 일본에 가서 왕이 되었다. 세오는 남편을 찾다가 연오가 벗어둔 신발을 발견하고 바위에 오른다. 세오 역시 바위를 타고 일본에 가서 귀비가 된다. 연오, 세오가 일본으로 가버리자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일관을 불러 점을 치니 연오, 세오가 일본에 가버려서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고 말했다. 왕이 연오, 세오에게 신라 땅으로 돌아오라 요청하자, 세오는 사신에게 명주로 짠 비단을 주며 하늘에 제사 지내라 하였다. 세오 말대로 제사를 지내자 해와 달이 다시 빛나게 되었다. 제사 후 보내온 비단을 창고(貴妃庫)에 보관하도록 했고,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한다. 도기야는 현재 포항시 동해면 도구리 해병부대 안쪽에 있는 일월지(日月池) 주변이다. 주변의 오천(烏川)이나 광명리(光明里) 등이 이 설화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고, 포항에서는 지금도 매년 일월지에서 일월신제(日月神祭)를 지낸다.
연오랑 세오녀는 제철기술 집단의 지도자라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제철기술 집단은 강한 무기와 농기구를 제작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제철기술자가 신라를 떠난 것은 해와 달이 빛을 잃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에는 까마귀 오(烏)자가 들어 있는데, 이것이 이들을 제철기술자라 추측하는 단서가 된다. 까마귀는 태양을 상징하는 새다.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태양신은 항상 금오(金烏) 아니면 삼족오(三足烏)다. 금 까마귀와 세 발 달린 까마귀는 태양을 상징하고, 제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검은 옷을 착용했다. 영어의 대장장이(blacksmith)도 역시 검은 옷을 입은 사나이다. 연오랑에서 연(延)은 늘인다는 뜻이니 야철(冶鐵)하여 두드려 펴는 단조작업(鍛造作業)을 의미한다. 세오녀의 세(細)는 가늘다는 뜻이니 세오녀 집단은 연오랑 집단보다 더욱 뛰어난 제철기술 집단, 즉 가늘게 단조하는 정밀 단조기술을 가진 집단을 의미한다. 단조작업은 불과 물 사이를 왕복하며 열간단조(熱間鍛造·불, 태양)와 냉간단조(冷間鍛造·물, 달)를 하는 작업이니, 연오랑 세오녀가 일본으로 훌쩍 떠나버리자 신라의 일월이 빛을 잃은 것이다.
한반도의 고대 국가 성립시기인 서력기원 전후부터 신라와 가야는 일본과 왕래가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국 김수로왕의 아들 선견 왕자와 묘견 공주가 일본 구주 지역에 고대국가 야마다국(邪馬臺國)을 세우고, 70~80년 동안 친가야 세력으로 존속하였다. 연오랑 집단과 세오녀 집단은 이주하여 이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4대왕 석탈해는 울릉도 동남쪽 작은 섬나라 용성국 출신인데, 그곳은 지금의 오키제도라 추측된다. 석탈해는 기질이 드세고 지략에 능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유리왕 이후 4대왕에 오른다. 신라에 귀화하자 남해왕의 사위가 된 것이나 여러 정황을 살펴보면 석탈해와 그 집단은 우수한 제철기술을 보유했음에 틀림없다.
신라 건국 초기에는 박씨 세력이 강해 4대 석탈해왕 다음인 5대 파사왕부터 다시 박씨가 왕위에 오른다. 월성 지역의 석씨 부족 소속으로 제철기술을 제공한 연오랑 집단은 정치적인 망명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바다 건너 일본 시마네현 이즈모 지역으로 집단 이주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지닌 새로운 제철기술을 이용하여 야요이 시대 일본 소국의 왕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나 영일 지역에 거주하던 세오녀 제철 집단 또한 정치적으로 몰락하자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세력이 강대한 세오녀 집단은 가야의 묘견공주가 구주지역에 세운 야마다국으로 가서 실력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삼국지 위지 왜국전에 등장하는 야마다국의 여왕 히미코가 신녀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고, 서기 173년 야마다국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며 히미코가 바로 세오녀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세오녀가 일본에서 귀비, 혹은 왕으로 추대된 뒤 신라왕의 요청이 있었기에 화친을 위해 사신과 비단(製鐵技術)을 보냈다. 세오녀가 파견한 사신은 아마도 제철기술자일 것이다. 세오녀가 다시 신라에 보내온 제철기술은 가야 지역의 우수한 제철기술이 가미된 더욱 발전된 신기술이었을 것이다. 신라왕은 다시 찾은 제철기술에 감사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니, 그곳이 해를 맞이하는 영일(迎日)이다.
박정희에게 제철소 건립을 지시 받은 박태준이 부지 선정에서 가장 먼저 고려한 곳은 고향 양산에 인접한 울산지역이라 한다. 조사 결과 울산지역은 지질구조상 제철소 건립에 부적당하여 포항 영일만을 최종 선정했다고 한다. 1964년 당시 그가 포항제철을 영일만에 건립할 때 연오랑 세오녀 설화를 참고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이미 1800여년 전부터 제철과 관련이 있는 땅이었다니, 생각해보니 참 기묘한 인연이다. 이 땅 영일에서 경제건설의 주춧돌을 세운 우리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기적을 만들며 세계무대에 등장했다.
호랑이 꼬리, 호미곶면 대보리에서 시작한 오늘 걷기 길은 대동배리, 발산리, 입암리를 거쳐 도구 해수욕장을 통과한다. 포항제철 공단지역을 통과하면 형산교를 넘을 것이고, 사람 냄새 나는 죽도시장을 지나면 북부해수욕장을 지나게 될 것이다. 철강 단지의 매캐한 냄새는 참기로 한다.
김영현(金泳顯)
1958년 안동 출생/ 85년 영남대 영문학과 졸업/ 92년 동대학원 영문학과 수료/ 2008~2011년 능인중 교장/現 능인중 근무
해파랑길 16코스 도중의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