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29)
베드로 사도는 이스라엘 갈릴래아 호수에 인접한 벳사이다 출신으로,
본디 이름은 시몬이다.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어부 생활을 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베드로(반석)로 바꾸시고,
그를 사도단의 으뜸으로 세우셨다.
복음서에 소개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소박하고 단순하다.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여 칭찬받기도 하고,
예수님의 수난을 반대하다가 심한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
로마교구의 첫 주교며 첫 교황이기도 한 베드로 사도는
67년 무렵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열두 제자와는 달리, 비교적 늦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본디 그리스도교를 열성적으로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서 회심하여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이 사는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웠으며,
그곳 공동체들에 보낸 많은 서간이 오늘날 『성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67년 무렵 로마에서 참수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닌 하느님 아버지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복음)
어느 한 사제는 자신의 저서에서
‘오늘날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의 대화’라는 내용으로 재구성하여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리스도인: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훌륭하고 옳은 대답이다.
그러나 너는 불행하구나. 너는 그것을 사람에게서 배웠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그것을 계시해 주시지는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인: 정말 그렇습니다, 주님. 누군가가 미리 대답을 다 해 주는 바람에
하느님께서 미처 말씀해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 답을 알려 주어서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신앙의 어려움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알려 준 답을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제도와 카리스마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두 분 다 사도라 불리고, 또 축일도 같은 날이지만,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하셨습니다.
한 분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른 한 분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 사도가 교회의 제도를 상징한다면,
자유로운 성령의 역동을 드러낸 바오로 사도는
교회의 카리스마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지요.
교계제도는 어느 모로 딱딱하지만
견고하고 안정적인 틀을 마련해서 교회를 하나로 모아들입니다.
그리고 카리스마는 예측하기 힘들지만,
교회의 확장을 지향하며 창조적이고 생명력이 넘칩니다.
만일 이 둘을 축구 경기에 비교한다면,
제도는 경기장 규격이나 규칙과 같은 역할,
그리고 카리스마는 그 안에서 펼쳐지는 창조적인 플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때 어느 한쪽을 소홀히해서는 최고의 축구 경기가 될 수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도 이 둘의 조화가 중요합니다.
보수와 진보, 안정된 신학과 상상력, 도그마와 각자의 신앙 감각(sensus fidei) 등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서 교회 지체들인 우리부터
건강한 균형 감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양 날개로 날아가는 새처럼, 우리 교회가 주님께로 가는 이 길을
건강하고 힘차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 4,8)
사도들은
천국에 마련된
의로움의 화관을 위하여
홀로
묵묵히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갔다네.
빈손과 맨발로
가난한 길을 걸어가던
그들이 걸치고 있었던 것은
오직
뼈아픈 인내와
올곧은 용기와
속 깊은 사랑이었네.
-김혜선 아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