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유명한 가수의 변론을 맡았던 적이 있다. 어느 날 그는 한편의 시가 담긴 편지를 내게 보내왔다. 감옥 안에서 철창을 통해 똑똑 떨어지는 비를 보면서 쓴 시라고 했다. 그 시로 노래를 만들었으면 어떻겠느냐고 내게 물었다. 그는 타고난 노래하는 시인이었다. 어려서부터 시에 호기심이 생겼던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다니던 열 두 살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방과 후 선생님이 나를 남게 하더니 교실앞에 있던 교사의 책상 서랍에서 대학노트를 한권 꺼내 펼쳐 보여 주었다. 하얀 종이 위에 펜에 잉크를 찍어 또박또박 쓴 시가 가득했다. 내가 시를 처음으로 본 순간이었다. 그는 교사이며 시인이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어린 나는 선생님이 교장과는 또 다른 차원의 훌륭한 사람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선생님은 내게 시를 가르치고 싶어했지만 세상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다. 중학교부터 시작하는 치열한 입시경쟁을 위해 경주마같이 목숨 걸고 달려야 하던 시절이기 때문이었다. 대학시절 학교 앞 허름한 음식점에 이런 시가 걸려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라’ 푸시킨의 시 한토막은 메마른 여름날 갈라 터진 논바닥 같던 내 마음에 떨어지는 촉촉한 물방울이었다. 육십대 중반 무렵 한동안 시에 관심을 쏟았었다. 어떻게 언어라는 물감을 사용해서 그렇게 보석같은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을까하고 감탄한 시들이 많았다. 한 이년 정도 아침이면 배낭 속에 노트북을 넣고 이 도서관 저 도서관을 돌아다녔다. 마치 낚시터로 가는 기분이었다. 강태공들이 강가에 낚시를 드리우고 비늘이 반짝이는 물고기를 잡아 어망에 넣듯이 좋은 시들을 낚아 그중에서 청보석 같은 싱싱한 말들을 골라 노트북 어망 속에 담기도 했다. 시인 류시화씨의 수필을 통해 배운 게 있다. 싱그러운 음악을 들으면서 아름다운 문장을 베껴 쓰거나 읽어보라고 했다. 퀘렌시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궤렌시아는 자기만의 안식 그런 비슷한 개념인 것 같았다. 따라해 보니까 괜찮은 것 같았다. 이년동안 도서관의 구석 서가에서 많은 시인들을 만난 것도 즐거움이었다. 조선팔도를 방랑하면서 이천 편의 시와 금오신화등 몇 몇의 소설을 남긴 김시습이 존경스러웠다. 자유인의 모습이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조선의 허균을 만났다. 그는 시대를 뛰어넘은 조선 최고의 로맨티스트이고 정신의 혁명가였다. 방랑시인 김삿갓도 보았다. 그 많은 임금들과 영의정 판서들은 다 망각됐어도 자유인 김삿갓은 영원히 살아있는 것 같았다. 도서관의 서가에서 나는 노동시인 박노해씨도 만났다. 그의 시를 보면서 사회가 그에게 붙인 딱지가 허위임을 알았다. 그는 땀 흘린 노동으로 감사의 밥을 먹자고 하고 있었다. 과거를 팔아 현재를 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세계를 흐르며 삶의 마지막까지 시를 쓰고 싶은 것 같았다. 활의 걱정이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예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남이 다 사주고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하나님이 빽이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이냐고 그는 노래했다. 시인은 세월의 가지에 걸린 자신의 시로 영원을 사는 것 같다. 솔로몬은 성경 속에서 자신이 쓴 천편의 시로 끝없이 존재한다. 이백이나 두보도 시로 변해 지금도 중국에 살아있다. 김시습도 허균도 허난설헌도 그 존재성을 잃지 않고 있다. 한 가지 사실도 보는 사람의 철학이나 가치관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진정한 시인이란 세상을 눈 속의 눈으로 귓속의 귀로 마음속의 마음으로 보는 사람인 것 같다. 나는 시를 쓸 능력이 없다. 비참한 현실을 파스텔화 같은 아름다움으로 변용시킬 정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그들같이 과즙이 뚝뚝 떨어져 나오는 물기가 없다. 그러나 남들이 쓴 청보석같은 시들을 보고 즐길 수는 있다는 생각이다. 소리에도 귀명창이라는 게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