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박모씨입니다.
금요일날 학교에서 홍진님께서 이 커뮤니티의 폐쇄에 대해 다시 여쭤보시고 는 제가 그렇다고 하니
너무나 안타까워하시더군요...
그 모습을 보는 제 마음도 찢어졌고 슬펐습니다.
저는 1993년에 데뷔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제 인생은 투쟁의 인생이었습 니다.
1994년엔 신인작가로 작품검열에 대해서 저명한 편집장과 싸우다가 대놓고 '매장' 협박을 들었습니다.
저는 너무 무서웠지만 계속 싸웠고 5년 정도 뒤에 어느날 마주친 편집장으 로부터
지난일에 대해서 사과를 들었습니다.
1995년부터는 YWCA와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대략 5년정도에 걸쳐 그들과
어떨때는 글로, 어떨때는 만화로, 또 어떨때는 직접 만나 싸워왔습니다.
1999년 키노에서 잡지와 저는 그들로부터 직접적인 '협박'을 받기도 했습니 다.
1998년엔 윙크에서 되돌려받은 원고 한장이 칼질로 걸레가 되어있는것을 발 견했습니다.
저는 편집부로 달려가 툰의 연재를 안하겠다고 싸웠고
제판소과 원래부터 원고위에 칼질을 해왔었다는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시는 그런 출판사와 인쇄작업에 제 원고를 보내지 않기로 했고
800 만원을 빌려서 컴을 사서 컴작업으로 전향해버렸습니다.
1996년부터 청보법에 대항해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글로, 만화로, 혹은 시위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물론 인터넷에서도 싸웠습니다.
1997년엔 시카프에서 아카와 함께 피켓시위를 하기로 하고 또 시카프 보이 콧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 피켓팅은 반년정도 준비되었습니다만 당일날 저와 제 화실식구들과 제 팬들과
시카프행사장에 가보니 아카는 우리를 배신했고 피켓팅에는 불참했고 행사장 안에서 행사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카 부스의 설치물을 발로 차면서 회장에게 '자유보다 이딴게 중요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당시 아카회장은 '그러지 마라'라고 말했지만 변명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팀은 우리끼리 시카프앞에서 피켓시위를 했고 경비들에게 구타를 당했 습니다.
그리고 작가들의 '서명운동'에 5일간 내내 동참했습니다.
작가들은 1997년 시카프에서 시위를 한적이 없습니다. 시위는 저 혼자 제 식구들과 했습니다.
작가들이 한일은 서명운동과 사인회였습니다.
그당시 서명운동이 시위처럼 보인 이유는 저희들이 피켓팅하느라 만들어간 피켓과 센드위치를
행사기간 내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블랙리본'은 1996년부터 제가 쓰기 시작해서 1997년 공식적으로
청소년보호법반대를 의미하는 상징으로 사용했습니다.
저는 저를 미워하는 작가들이 동참을 거절하는것을 우려했고
'내가 뭐뭐했 다'고 주장하는것도 무가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황미나선생님을 뵙고 블랙리본의 기원과 모양, 상징의 가치를 설명 드리고
이름을 빌려달라고 청했습니다. 선생님은 허락하셨고
저는 작가들과 출판사를 돌아다니면서 블 랙리본달기 운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1997년 겨울부터 블랙리본은 출판사가 은근슬쩍 빼내기 시작했고 작가들도 묵인했습니다.
저는 혼자 2002년 초까지 블랙리본달기를 계속했습니다.
1996년 컴퓨터잡지인 '게임메거진'에는 '유니텔 만화사랑' 이름으로 글이 기재되었습니다.
그 글에는 우리나라 학생들의 이지매현상이 만화에서 비롯 되었으며
만화에 의해 학교폭력이 미화되어 있다는 글이 실렸습니다.
저는 통신과 만화매니아단체가 만화계에 미칠 긍정적인 결과를 계속 믿고
주장해왔으므로 큰 충격을 받았지만 만화사랑의 글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십중팔구 게임매거진의 사기거나 한 필자가 멋대로 만화사랑의 이름을
도용했다고 믿고 잡지에 항의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유니텔 만화사랑의 운영진 6명이 저를 찾아왔고
저는 처음에 '당신 들 단체가 도용되었으니 다음호에 반대의견을 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만화사랑의 운영진들은 그 글이 자신들의 주장을 담고 있으며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고 저와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이때부터 유니텔은 6명 운영자들과 그들을 따르던 자들은 저의 안티운동을
은밀히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1996년부터 '무일푼 만화교실'등을 통해 증가하고 있는 대여점에 대해 우려를 표현하기 시작한 저는
1998년 초, 본격적으로 키노의 지면을 통해 반대여점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하이텔 애니메이트나 만창동은 게시판을 통해
저의 글에 대해서 폭발 적인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제가 너무 믿은나머지 제 만화캐릭터 이름으로도 쓴 사람같은 만창동의 권력자들은
대여점을 옹호하거나 옹호를 묵인했습니다.
저는 그 주장들을 정리해서 다시 반론을 펼쳤습니다.
당시 만화스토리작가 지망생이었던 '안티김'은 제 글을 읽고 대여점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고
제 주장을 공감했습니다.
그는 한국 최고의 반대여점 운동가가 되었고
'대여권'등 수많은 가능성과 문제들에 대해서 밝혀냈습니다.
그분이 법학도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저는 안티김이 제 팬클 회원이었고 제 글을 읽고 반대여점 운도을 시작했다 는것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2000년엔 하이홈에 제 공식홈을 만들고 거기서 청보법과 대여점 반대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공격과 비아냥, 심지어 인신공격이 이따랐습니다.
그러나 그 게시판에서 저와 토론과 이야기를 나누던 죽돌이들이 있었고
그들은 당시 저의 글버릇인 '스벌'에 대항해서 '스뎅'이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스뎅 패밀리'라고 불렀죠.
이들 4명은 자신들이 만화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스스로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음카페에다 '자유의 검은리본 스뎅'이라는 카페를 만들었고
이를 줄여 '자검댕'이라고 불렀습니다.
자검댕은 한국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만화시민운동 단체였고
저는 이 단체가 제 팬들인 게시판죽돌이 4인에서 시작되었다는것을
너무나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유니텔 만사등을 축으로 한 제 안티들에 의해 자검댕의 운영이
피해를 입는것도 싫었고 자검댕이 자주성과 순수함이 오해받는것도 싫어서
일부러 자검댕에서는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2001년 어느날은 제 게시판에서 한 신인작가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두고보자라는 곳에서 자신이 [평론가라며 왜 반대여점 운동을 하지 않나]
라고 했더니 [대여점이 왜 문제인데]라고 해서 싸움이 났다'며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가서 하루밤동안 싸움을 벌렸습니다.
어느새 싸움을 일으켰던 작가는 뒤로 빠져있었고 '마음의 응원'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두고보자는 친대여점 운동의 주축이고 그곳의 멤버들은 다수가
1998년 대여점을 옹호하면서 저를 비난했던 하이텔 동아리의 운영진과
핵심멤버들이었습니다.
원래부터 저와 반대여점 운동 자체를 싫어한 그들은 그뒤부터
저에대한 각종 공격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2002년엔 두고보자의 하림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저는 '아직도 대여점을 찬성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대신 비아냥과 비웃음을 섞어 '당신은 아직도 반대하는가'라고 되물었습니다.
2001년 저는 코믹스투데이에 '필링'이라는 성인만화를 연재했고
이 만화는 놀라운 인기를 얻었습니다.
저는 이 기이한 인기를 얻는 작품을 연재하는 코투가 너무 좋았고 그래서
'인터넷 연재는 싫다'는 김현정씨를 몇달간 설득해서 'T.R.Y코투연재'라는 허락을 받아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코투는 두가지 이유로 T.R.Y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는 이걸 연재하면 필링을 쉬어야 한다는 조건이 싫었고
두번째는 당시 코투사장이 '대여점용 단행본'에 눈을 떴다는 점이었습니다.
T.R.Y는 한권으로 기획되었는데 대여점에 깔려면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한권은 안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시공사로 가져갔습니다.
그래도 저는 코투가 좋았습니다.
코투는 2001년 3월부터 원고료를 잘 안주었는데 그때문에 저는 필링의
일본취재를 카드빚으로 갔다가 반년동안 갚아나가야 했습니다.
그래도 '힘들면 늦줄수도 있죠'라고 편집부에 말했죠. 게다가 저는
인기연재물 작가라 달라고 하면 우선적으로 원고료가 지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젊작모 게시판'에 한 코투연재 신인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그 글은 '너무나 배고프다, 연재를 하는데 원고료가 미지급되어 빚만
커지고 있고 지금 전화와 전기조차 끓겨 연재하기 힘든 상태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동료작가들의 소위 '마음의 응원을 보낸다, 힘내라'라는 글에 저는 격분해 서
'동료가 배고프다, 응원만 할거냐 아니면 단체로 항의할꺼냐'라고 물었고
10인이상의 코투작가가 모이면 보이콧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코투에 대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모임 전날 코투편집부의 '성인웹진 팀장'은 그 신인작가에게 전화를 걸 어
모임에 나가지 말라고 했고 거부하자 연재를 짤라버렸습니다.
(우리는 더더욱 격분했고 팀장은 그뒤로 눈치빠르게 코투를 떠나
지금은 '중앙일보'의 계열회사에서 만화팀의 편집장을 하고 있습니다.)
코투싸움은 격렬하게 진행되었는데 18명의 최초 참여작가들은
출판사가 어떤 금액을 지급하더라도 1달단 보이콧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출판사가 50만원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하자 2명을 남기고
전부 연재를 하겠다고 배신을 해버렸습니다.
(2명은 저와 모임에 나갔다가 짤린 신인 한명입니다)
그러나 코투는 50만원을 지급하지 않았고 작가들은 슬그머니 다시 돌아왔죠 .
코투의 원고료 미지급으로 최소 2명의 작가가 절필을 해야했고 그 한명은
한국 최고의 작가 중 한명인 '이정애' 선생님이었습니다.
코투싸움이 나자 몇달간 원고료를 미루던 서울문화사나 시공사는 갑자기
원고료를 모두 정산하고 제날짜에 지급하기 시작습니다.
그러나 코투참여작가들 다수가 연재를 다시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나면서 싸움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코투싸움에서 게시판 글에서 작가들을 옹호한 글의 반은 제가 끌고온
사람들이었는데 제 홈 게시판이나 자검댕 등에 동참을 호소했지만 거의 참여해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 어시들에게 피씨방 비용을 대주고 글을 쓰게 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모두 떠나고 남은 소수가 힘겹게 싸움을 지속하고 있던
2002년 1월 만화계에서는 우만연 소속 작가들과 그 후배 작가들,
전세대 만협 원로 작가들 사이에서 만협선거를 놓고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만협 게시판은 우만연 작가들의 후배인 A작가와 만협원로작가들을
지원하는 안중규, 오세호선생님 사이에 입에 담기 힘든 설전이 벌어졌습니 다.
젊작모의 운영진은 친우만연이었고 만화계의 내면에 별 관심없는 젊은
작가들은 원로작가들은 모르지만 우만연계열은 알기 때문에 역시 친우만연이었습니다.
저는 A작가 작품의 표지를 공짜로 그려줄 정도로 A와 그의 작품을 사랑했고
안중규선생님과 신문수 선생님과도 깊은 친분이 있어서
매우 곤란한 처지라 생각에 잠겼지만 우만연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안선생님에 대한 애정과 사건이 붕괴직전의 힘겨운 상황에 있는
코투사건에 끼칠 영향이 두려워 크게 고민하고 있었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선거전날 몸이 아팠고 잘됬다싶어서 불참했습니다.
선거는 원로작가의 승리로 끝났고 저는 안중규선생님에게 A등
친우만연 작가들과 사이좋게 지내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젊작모에서는 선거패배를 놓고 마녀사냥을 시작했고
선거에 빠진 저를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비난의 핵심은 선거불참이 아니었 고
한 여성작가는 '코투일로 너무 게시판을 시끄럽게 해서 망했다.
넌 맨날 운동작가인척 하더니 선거도 빠지냐. 나대지 마라'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A 등 계열작가들은 같은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A는 안중규 선생님과 새 만협등과 사이좋게 지내고 선거가 끝났으니
앞으로의 만화계 일에 힘을 합쳐달라는 제 부탁과 안중규 선생님에게 보낸
제 부탁을 묵살했습니다.
젤 황당했던건 한 신인작가였는데 저보고 '만화사랑하는척 하더니 아무것도 안하네'라는 말을 했습니다.
모임 몇번 나가고 투표 한번 하고 글 몇개 써보곤 만화사랑을 실천한
대운동가인척 하는 그자 앞에서 참으로 어이없음과 실망을 느꼈습니다.
저는 코투일로 게시판을 시끄럽게 한것과 선거불참을 사과하고 젊작모에서 탈퇴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코투작가 7명이었고 최후로 7인은 검찰에
코투사장을 고소했습니다.
저는 젊작모를 탈퇴했고 인생의 히트작을 걸고 싸운 일이 배신과 무관심으 로
실패하고 동료로부터 '나대지 말라'라는 말을 들은것에 심각한
회의를 느꼈습니다.
그것은 지난 인생 자체에 대한 회의였고 무력감이었고 실망이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서울문화사는 몇번의 싸움과 결정적으로 '툰'으로 인해 갈 수 없는곳이 되었습니다.
툰은 하고싶은 모든시도와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면 어차피
서울문화사에서 연재를 더이상 못할거라는걸 알고 한 작업이었습니다.
5권의 절규에는 8년간 사랑했던 출판사에서 떠나게 된다는 상실감도 담겨있습니다.
새로 간 삼양출판사는 너무나 좋은 출판사로 새 안식처였지만
연재 5개월만에 잡지가 망해버렸습니다.
대원은 '수리수리 맛소금'을 연재하고 있었지만 '엑스2코믹스'의
불법적 스캔서비스에 항의하고 90억의 투자비용을 오리지널 창작으로
돌리기 위해 작가들을 선동하고 혼자 싸웠다가 짤려버렸습니다.
시공사를 빼곤 저는 인기도 없는데 싸우기만 하고 선동하기만 하는데다가
작품으로 사고치는 똘아이작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코투싸움으로 시공사에서도 저는 거부 1순위가 되었습니다.
시공사 편집부는 전진석 작가에게 '이작가 들어오면 안되는거 아닌가'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시공사의 주역이 저와 너무나 친했던 편집부였다는것을 감안하면
코투사건이 얼마나 출판사가 싫어하는 사건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공사에서 '김현정'은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고
저는 현정씨 덕분에 연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0년간의 경력과 그간 싸운 경험을 토대로 저는 제 입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싸워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왜 제가 출판사에 찍히고 안티독자들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고
인기연재작을 날려먹고 원고료 혼자 잘주던 출판사 내손으로 망하게 하고
동료들로부터 시끄럽고 짜증나고 미운놈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가지는 알 수 있었습니다.
2002년 초, 저는 제가 더이상 싸울 힘도 용기도, 희망도 남아있지 않고
심지어 더이상은 작가생활이 위험하다는것을 분명히 느꼈습니다.
저는 더이상 싸우지 않기로 했고 홈의 게시판을 폐쇄했고
료코동을 만들고 이곳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저는 '[마음으로 응원]하는 작가'가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다른 활동은 다 정지했고 료코동에서 계속 상쳐만 햛아댔습니다.
그리고 그림만 그렸습니다.
2002년 1년동안 일터지면 마음의 응원을 날리니 몸도 마음도 가뿐하고
안싸우고 그림만 그리니까 코투의 싸움과 원고료 미지급등으로 생긴
빚도 다 갚고 더 큰 화실로 이사도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좋고 안락한 삶도 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매일밤 후회와 고통, 죽어가는 만화에 대한 절망감, 이를 돕지 못하는
쓰레기같은 자신에 대한 자책을 씹어대야 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즐거울려고 노력했습니다. 잊어버리려고 했죠.
게임기도 사모으고 인터넷 쇼핑몰도 다니면서 평생 처음으로 만화와
관련 없는일에 돈과 시간을 써보았습니다.
료코동은 좋은곳입니다.
저와 제 팬들은 여기서 처음으로 투쟁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상쳐가 많이 나았고 잊어버리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저는 슬그머니 자검댕을 들락거리고 만화계 일을 고민하고 싸우려고 하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싸움을 멈춘 2002년에도 컨텐츠진흥위원회의 만화진흥대책에 대한
자문도 하고 시카프에서는 자검댕, 료코동, 화실식구들과 피켓팅과 전단지 살포도 했습니다.
2002년 시카프에서는 또다시 중요한 한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10년간 순정만화로 인정받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여성작가들의 상당수는 저를 싫어했고 제가 끼는걸 원치 않았으며
심지어 소문을 퍼트리기도 했습니다.
젊작모에서 시끄럽다고 조용하라고 했던 그 여성작가와 그를 옹호한
여성작가들의 글에서도 그건 분명히 느껴지지만 저는 순정만화를 사랑합니 다.
그러나 시카프에서 저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백인들 사이의 흑인이거나 그 반대에 불과합니다.
여만협 운영진은 저를 받아주었지만 제가 정식회원이 되는것에 반대했고
회원들이 저는 운영진으로 선출해도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저를 가족처럼 생각해준 여성작가들은 분명 있었지만
그 외에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저는 여만협을 이해하고 결코 미워하지 않지만 솔직히 서운합니다.
그리고 2002년 시카프에서 '난 여만협을 떠나야 한다'라는 생각을 굳였습니다.
T.R.Y가 끝나는 날 저는 한국의 4대 출판사 잡지 중에서 갈곳이 없습니다.
중앙의 새 잡지 편집장은 코투출신으로 제가 원수지간이죠.
최초의 반대여점 운동가이니 대여점용 단행본을 그릴 리도 없습니다.
제가 젊작모를 나가게 한 계기가 되면서도 친분을 지키고 시간당 2800원을 받으면서도
기쁘게 다녔던 안중규선생님의 동아학교도 이제는 다니지 못합니다.
결정적으로는 명지대에 출강하기로 하면서 선생님께서 저를 미워하시게 되었고
한 제자에게 '박무직을 짤라버릴거다'라는 말을 하셨던 것입니다.
시간강사가 어디서 출강하든 자유이고 저는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지만
그냥 사과드리고 마음에 안드셨으니 안다니겠다고 했습니다.
10년간 만화가로서 제가 한 일은 무엇일까요...
수많은 적을 만들고 많은 출판사에서 찍히고 인기작품 꺽어버리고
시카프에서 두들겨맞으면서 제가 한 일은 무엇일까요..
그러면서 왜 저는 다시 싸우려 하는걸까요..
그래서 저는 더이상 싸우지 않으려합니다. 연재가 끝나면
만화관련 모든 인터넷 활동을 접고 자검댕과 여만협에도 탈퇴할 것입니다.
저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을것이며 팬들과 만나지 않을것이며
제 작품을 볼 일도 (제가 원한건 아니지만) 별로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먹고살꺼나구요? 딴일 할꺼냐구요?
저도 모릅니다.
중요한건 제가 만화가로서 절필할려는 생각이 없으며 그러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만화활동을 접는것이며 정확히는 인터넷활동과 만화관련 단체의
활동과 참여의 중단입니다.
운이 좋으면 제 작품을 보실 기회는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이곳 료코동은 제가 1년동안 상쳐를 어느정도 치료하는 보금자리로
저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곳입니다.
그러나 여기 회원은 순수 료코회원 뿐 아니라 만화가지망생도, 작가도,
제 팬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싸움과 희생, 전투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순수하게 료코동만 남겨둘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저는 마음이 아플때면 여러분들이 밉기도 합니다.
'난 싸웠는데 너희들은 왜 방관했어, 왜 안도와줬어, 왜 안싸웠어.
난 만화가로서 거의 모든걸 잃었는데 너희들은 뭘 버려주었어, 내가 왜
너희들을 위해 싸웠을까'라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약한 인간이고 성격나쁜 저는 그 생각을 추하게도 버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추구해갈 앞으로의 인생은 아주 순수한 만화가입니다.
코투사건으로 바쁠때 한 작가를 만났는데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더군요.
어떤 만화관련 기사도 안읽고 모임에도 안나가고 화실과 출판사 외에는
그 어떤 만화와 관련된 일도 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너무 부럽기도 하고 밉기도 했었죠.
저는 그렇게 되는게 목표입니다.
지금은 일본에서 활동하시고 계십니다
훨씬 대우받고 사시는것 같더라구요
취재하고싶어하면 헬리콥터까지 대주고 여행보내주고
디비디랑 피겨까지 돈을 대준다던데 일본은...............
첫댓글 시팔 ㅋㅋㅋㅋㅋ
오,, 제가 엽혹진에다 쓴걸 퍼오셨넹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혹지니스튼가요..?ㅋㅋ 저두..
근데..요즘은 인터넷이나 다른 매체로 만화책팔수 있는데가 많지않나요?ㅋㅋ
상위 1%가 되면 됩니다.. 나라 바꿀 생각을 하는건 너무 큰 욕심 같구요. 걍 제가 바뀌면 됩니다.
에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