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BERIN........
분노는 오만
슬픔은 연민
6
나는 사실 용족에 대해 아는 것은 얼마 없었다. 뭐, 우리들 묘인족의 멀고
먼 옛날 그들의 피가 연관되어 있다는 말은 듣기는 했었지만 그거야 내 피
에게나 물어볼 일이고 내 자신은 조금도 모른다. 정상이라는 궤도를 벗어
나 열심히 절대 무적 미치광이라는 칭호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마법사들만
아니었다면 여전히 몰랐을 것이다.
덕분에 용족을 봤으니 이거 감사해야 하나? 킬트라는 미친놈이 알 속에서
동면하고 있는 새끼를 강제로 끌어내지 않았다면 나는 용족이란 걸 보지도
못했을 테니까.
내 눈 앞에 있는 것은 초록빛과 은빛이 기묘하게 어우러진 몸이었다. 마
치 에메랄드와 은을 적당히 섞어 세공한 것처럼 오묘한 빛깔. 하지만 크기
는 내 기대와 달리 작았다.
".............설마하니 정말 고양이만할 줄이야."
화석이 되어 있던 알이 그저 애들이 차고 노는 돼지 오줌보만하길래 크지
는 않겠거니 하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정말로 저 유명하신 용족께옵서
괭이 만한 크기일 줄이야. 물론 새끼니까 그렇다치지만 용족의 새끼가 이
렇게 작다면 전에 본 그 화석만한 크기가 되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나
야 하는 걸까?
나는 유리 상자 안에 든 초록색의 도마뱀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뱀
대가리처럼 길죽한 머리통이 아니라 괭이처럼 짧은 머리를 하고 있는 녀석
은 반짝이는 비늘과 네 개의 다리, 그리고 한 개의 길죽한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눈알이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셀러로니란 이 놈의 유령과 똑같을 게다. 그나저나 내가 본 그 유령놈은
그래도 꽤나 컸는데 이 몸뚱이는 너무나 작다. 대체 얼마나 용족이 유능하
고 대단하길래 유령까지도 그렇게 성장을 하냐? 경악할 만 하다.
나는 유리 상자를 깨부수고 늘어져 있는 조금 묵은 도마뱀을 들어 올려
옆구리에 끼었다. 얼마나 차가운지 꼭 얼음덩이를 안은 기분이었다.
"그럼 가자."
너무나 싱겁게도 녀석을 주워들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사방이 미심쩍었다.
물론 이 안이 꽤나 깊숙한 곳이라는 것은 나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고,
도마뱀새끼가 있던 상자 바로 아래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는 것을 보아
내가 이 놈의 새끼를 집어 가는 것을 마법사들이 모를 리가 없겠다고 생각
은 했다. 어디까지나 생각만.
뭐 놈들이 안다고 해서 내가 어쩌랴? 새삼스레 몸을 사릴 것도 없는 게고
그렇다고 해서 이걸 그대로 두고 갈 나도 아니다. 그래서 태연히 석실에
달린 문을 밀고 그저 걸어 나왔다.
얼마나 걸었을까. 다가오는 어떤 기척과 기척들이 분명 있기는 했지만 내
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심지어는 내 발치 아래를 슬쩍 지나가면서도 모른
척 차가운 숨결을 내뿜는다. 하지만 놈들은 내 주변을 빙빙 돌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것들, 틀림없이 이 곳을 지키거나 혹은
지키려 하는 것들일 텐데 내게 직접적으로 손을 대지는 않는다.
훗, 그렇다고 내가 감동해 그냥 지나칠 줄 알았더냐? 그거야말로 나의 자
비심을 과신한 듯하구먼!
나는 손톱을 그대로 뽑아 내 바로 옆으로 비린내를 풍기며 스쳐 지나가는
녀석을 후려갈겼다. 키이익 이라는 조금 거슬리는 소리가 났지만 일단 접
어 두었다. 그리고 바로 내 앞에서 얼쩡거리는 녀석을 질끈 밟아 주었다.
케엑 하는 소리가 났지만 내려다보지는 않았다. 허기야 내려다 볼 필요도
없지만.
석실로 연결된 통로는 토굴과는 전연 달랐다. 그 토굴이 조악하게 그저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날 정도의 통로였다고 한다면 이쪽은 확실히 폼 나게
망토라도 휘날리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넓직했다. 비록 횃불 하나 걸려
있진 않았지만 오히려 방향을 잡기는 이 쪽이 더 쉬웠다. 뭐, 쉬울 수밖에
없나? 일직선으로 연결된 길이니 말이야.
한참 걷다 말고 나는 문득 이 용족의 어린애를 어떻게 할까 고심했다. 엘
리야로 돌아가서 이 놈과 그 금강석에 갇혀 있는 셀러로니유령놈을 한 데
합치면 좋긴 하겠지만 그럼 세상에 용족 하나가 떠억 하니 등장하게 되는
건가? 엘리야가 전 대륙적인 유적이 되고자 한다면야 그것도 나쁘진 않겠
지.
<용족 부활의 열쇠를 쥔 항구 도시 엘리야! 전설의 용족의 발치 아래 사
라지다!> 조금 문제가 있으려나. 어쨌든 영육분리라고 하는 흑마법 특유의
극단적인 짓거리를 킬트가 한 이상 좀 덜 떨어진 용족 셀러로니가 자신의
몸에 이런 장난질을 한 인간을 살려 둘 리가 없겠지. 그럼 어떻게 되는 걸
까?
잠시 동안 나는 머리를 싸맸지만 별 방법이 없어서 생각하길 관두었다. 어
차피 해결 안 되는 거 고민해봐야 머리만 아프다. 일단 여길 빠져나가고
보자. 아니지, 내 애들을 찾고나 보자.
내가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상대가 날 찾으려고 할 것이니 일단은 느
긋하게 걷기나 할까. 그나저나 대체 고왕국 귀족놈들이 얼마나 지독하면
이런 무덤 같은 곳에서 땅굴까지 파며 살았던 것일까. 공기는 탁하고 곰팡
이와 너저분한 악취가 진동한다. 물론 지금 걷고 있는 이 통로는 아까 그
곳보다는 훨씬 더 나았지만.
"꾸엑!"
아, 똥 밟았다.
차가운 용족의 육체는 단단하고 매끄러워서 돌덩이 하나를 안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이 돌덩이를 그냥 주머니 안에 넣어 볼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반쯤 죽어 있는 걸 이 안에 넣었다가는 그냥
골로 갈 수 있다. 나로서도 용족이 그냥 가버리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니
일단 몸과 마음을 합하게 한 뒤에 겨뤄봐야지. 유령 놈이 자기 본체를 찾
고도 영 멍청하면 두들겨서라도 좀 용족 답게 만드는 거야. 그래서 놈을
키워서 한 번 겨루어 본다. 아! 멋지다. 용족과 싸울 수 있다니!
피가 부글부글 끓는 듯했다. 생각해보면 이거야말로 불가능한 일 아닐까?
전설의 용족과 마주하고 겨룰 수 있다니. 물론 이 놈의 능력을 보아 하건
대 재수 없으면 그냥 밟혀 죽는 일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용족과 싸
운다는 그런 놀라운 짓거리를 내 평생에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멋
진 일이다.
나는 이 퍼렇고 차가운 새끼를 귀한 보물 끌어 안 듯 보듬으며 애정의 눈
길로 바라보았다. 귀여운 것, 이게 곧 크게 자라서 나와 같이 놀아 준다 그
거지? 그거야말로 멋진 일. 나는 발걸음도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아아,
멋지다. 멋져! 묘인족 사상 용족과 싸운 놈은 나 밖에 없을 거야!
어둠 속을 얼마나 달렸을까. 물론 밟히는 똥들과 스쳐가는 날파리들은 내
버려두고 나는 너무나 간단히 통로를 지나 마침내 웬 길다란 계단을 발견
했다. 계단은 일직선으로 주욱 허공을 향해 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돌로
만든 게 아니라 무슨 끈 같은 것으로 연결된 계단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어둠 속에서 유일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은 그 계단의 끝이었다. 분명 밖
으로 나가는 통로인 것 같았다. 나는 용족의 사랑스런 새끼를 소중히 끌어
안고 계단으로 올라섰다. 한 번 올라설 때마다 출렁거리는 걸 보아하니 이
걸 만든 놈은 지나다니는 분의 고충은 절대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그래도
대체 뭘로 만들었는지 꽤나 낡았는데도 어디 하나 끊어진 곳이 없었다. 나
는 적당히 발로 몇 번 굴러 보고서는 출렁이는 이 따위 물건을 멀리 하기
위하여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출렁출렁 질릴 정도로 출렁이는
덕분에 나는 말 그대로 멀미를 할 뻔했지만 멀미를 하기 전에 계단의 입구
에 도착했다. 아, 위험했어. 설마하니 이렇게 흔들릴 줄이야.
눈이 부셔서 눈을 반쯤 감고 앞으로 나서자 모처럼 깨끗한 공기가 느껴졌
다. 내가 들어 선 곳은 전에 와 봤던 곳이었다. 넓직한 광장에 줄줄이 늘어
선 유리인지 수정인지 알 수 없는 관들과 관들. 그리고 늘어진 시신들. 이
봐, 이거 치우지도 않았냐? 시체 썩혀서 뭐 좋은 꼴을 보려고 여기다 그냥
굴리냐?
그나저나 여지껏 얼마나 굴러다녔는데 이제 겨우 여기냐? 그렇다면 그 토
굴이란 곳은 정말 꽤나 깊은 곳에 있었던 모양이군. 나는 굴러다니는 시체
를 모른 척하고 줄줄이 늘어서 있는 수정관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
다. 전에도 보긴 했지만 정말로 이 수정관에는 묘인족은 없었다. 수인족과,
사인족, 조인족, 엘프, 인간, 드워프 등 가지가지가 있기는 했지만 그거야
내 알 바가 아니고 말이다. 사인족의 시체를 보자 조금은 묘한 감흥이 일
었다. 사인족을 가장 많이 죽인 것은 확실히 나다. 땅의 엘프 때도 그랬고,
에메스의 영지에서도 그랬으며, 여기서도 그랬고, 어딘지 알 수 없었던 그
숲 속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사인족의 왕, 헬레아스의 비통함은 나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놈은 인간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 여자
아헬 역시.
나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 곳에도 내 애들이 없다면 룬
드바르라도 가 보면 될 일이다. 죽었다면 시체라도 거두고 아니라면 빼 내
와야지. 설마하니 이 용족의 새끼처럼 내내 피를 빨리며 산 것도 죽은 것
도 아닌 상태로 늘어져 있다면 다시 합쳐 주던가 혹은 죽여주던가 해야 했
다.
죽을 놈은 죽여주는 것. 그것이 올바른 것이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너무도 귀에 익은 목소리가 터져나와서 나는 흠칫했다.
막 통로로 빠져나가려는 순간 희끄무레한 것이 바닥에 어른거렸다. 너무
놀라서 나는 그 희끄무레한 것을 인정사정 없이 후려쳤지만 놀랍게도 그대
로 내 주먹은 통과해 버리고 말았다.
"뭐야?"
"접니다."
그 희끄무레한 것은 하늘하늘 마치 아지랑이 일어나듯 이글거리며 점점 커
졌다. 그러더니 인간의 크기가 되더니 내 쪽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쿠베린님."
허깨비 일그러지듯 잔뜩 구겨놓은 형상이긴 했지만 그 뻔뻔한 얼굴은 분명
히 분홍주둥이 마베릭이었다!
"반갑지 않으십니까?"
"너, 유령이냐?"
"유령으로 보이십니까? 뭐,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건 결국은 일
루전이라고 하는 아주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마법 중 한 가지지요. 즉, 자신
의 환영을 멀리까지 내 보내는 원격 일루전입니다만."
"설명 안 해도 돼."
나는 용새끼를 안은 채 녀석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
랬더니 녀석은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면서 내 뒤를 따라온다.
"그냥 그렇게 가시면 어떡합니까?"
"그럼 허깨비를 상대로 가위질이라도 해 주랴?"
"섭섭하군요, 그래도 제가 죽어서 슬펐던 것 아닙니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설마 설마했더니 이 자식 정말 살아나다니.
"참, 너야 말로 내 앞에서 몇 번이나 죽었냐? 적어도 세 번은 내 손아래
서 죽은 거 같은데."
"이번은 정말 위험했습니다."
녀석은 쓴 웃음을 머금더니 나를 초롱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본래 녀
석이 나보다 작긴 했지만 지금은 하체가 없는 상태로 그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중이라 그럭저럭 눈 높이가 맞았다.
"누님이 제게 심장을 주셨죠. 당신이 박살낸 그 심장 말고요."
"참, 재주들도 좋다."
나는 상대 않고 그저 걷기만 했다. 마베릭은 내 뒤를 졸졸 따라 오면서 물
었다.
"정말 제가 살아 돌아 온 게 기쁘지 않으세요?"
"기쁜 게 다 얼어 죽겠다. 너라면 장례식 치르고 관에 못질까지 한 원수
놈이 밤중에 벌떡 일어나 침대 위로 기어올라오면 기쁘겠냐?"
녀석은 잠시 오묘한 얼굴을 하더니 반문했다.
"제가 언제 침대 위로 올라갔다고 그러세요? 여기엔 침대도 없는데. 게다
가 쿠베린님은 관에 못질 따윈 하지 않잖아요?"
"넌 비유라는 두 글자도 모르는 것 같구나."
"쿠베린님은 농담이라는 두 글자도 모르시네요."
녀석의 말을 등 뒤로 흘려들으며 나는 모른 척했다. 녀석은 옆에서 혼자
낄낄대더니 매달리듯 내 어깨에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안 웃기나요?"
"너라면 웃겠냐?"
"네."
녀석의 말을 그대로 씹고 걷기만 했다. 이 광장에서 빠져 나가는 길을 찾
아야 할텐데 도대체 사방으로 뚫려 있으니 어느 게 통로인지 알 수가 있
나?
내가 이리저리 걷고 있는 것을 보며 마베릭이 다시 말을 걸었다.
"그 어린 용족을 어디로 가져가시는 거죠?"
"엘리야로."
"왜요?"
"깨워 보려고."
"왜요?"
"싸워 보려고."
"왜요?"
"그러고 싶어서."
내 말에 녀석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더니 내 옆으로 다가와서 품안에 안
긴 용족새끼를 내려다보았다.
"이 꼬맹이가 당신의 아이들보다도 소중해요?"
"아니, 그건 또 다른 문제지."
내 말에 녀석은 조금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조금은 차가운 미소를 머
금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집착하지 않는 것은 알아요. 당신은 언제나 그랬다고 하더군요. 아니지,
집착하지 않으니까 그 긴 세월을 잘도 지내온 거겠지요."
그래 니 맘대로 생각해라. 여전히 나는 그 말을 씹었다. 그러나 뒤이어서
터지는 말에는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엘리야에 용족의 영혼을 봉인한 금강석이 있었죠?"
내가 돌아보자 마베릭은 피식 웃었다. 잔인하고 어딘가 묘하게 슬퍼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 걸 거기다 두면 어떻게 해요? 안 그래요? 묘인족의 임금님?"
"무슨 의미야?"
불길한 냄새가 저 밑바닥부터 치밀어 올랐다. 녀석은 모호한 웃음을 지은
채 킬킬거렸다.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악령처럼 보였다.
"묘인족으로는 인질이 되지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아껴 왔던 인간들은 어
때요?"
나는 주저하지 않고 녀석을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파앗 하고 무력하게 손
톱이 허공을 찢었다.
"흥분하지 마세요. 해치진 않았다구요."
녀석은 여전히 킬킬거렸다. 내가 흥분하자 더더욱 재미있는지 어깨까지 들
썩이고 있었다.
"내 뒤를 따라 오시겠어요? 그리고 우리 거래를 해요."
"무슨 거래?"
차가운 불안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불안은 차가운 뱀처럼 내 목줄기를
억눌렀다.
"당신이 30 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엘리야에서 보낸 이유 말이에요. 그
이유를 없애기 싫으시다면 나를 따라 오세요."
KUBERIN........
분노는 오만
슬픔은 연민
7
이유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살아 있는 자가 살아 있는 자에게
가진 미련이라는 것은 또 어떤 것일까.
나는 마침내 녀석의 뒤를 따라 목적지 비슷한 곳에 도착했다.
어둠에 묻힌 기둥들이 열 지어 늘어선 그 곳은 어쩐지 왕궁처럼 보였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등잔불 때문에 잘은 알 수 없었지만 바닥은 네모 반듯
한 벽돌로 메워져 있고 벽은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아까 있었던 그
토굴이나 음침했던 그 지하 신전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게다가 묘하게 온
기가 피어 오르는 것이 분명 사람들이 살고 있는 기색이 완연했다. 나는
공기 속에서 약간의 곰팡이 냄새를 느꼈지만 그래도 주변이 꽤나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황색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은 이 고
왕국에서는 단 하나 뿐이다. 바로 왕궁이었다.
이 넘어진 엉덩이 같은 야산은 결국 지하도를 통해 고왕국의 왕궁과 연결
되어 있었다. 왕궁에 그처럼 쉽게 반란을 일으킨 천민들이 들어갈 수 있었
던 이유도 그것이었나 보다.
내가 고개를 돌려 텅 빈 주황색의 석주들을 돌아보자 마베릭은 천천히 설
명해 주었다.
"궁금하시다면 이야기 해 드리지요. 우리들은 이곳 고왕국의 천민들과 접
촉한 지 얼마 안 돼서 이 길을 알아냈습니다."
"그래?"
"물론 직접적으로 우리가 군사를 이끌고 나타난 것은 아시다시피 얼마 전
의 일입니다만, 천민들은 꽤나 많이 쌓여 있었을 겁니다."
그는 뭔가 숙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인간이면서 인간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가축 이하의 대접을 받아온 사람
들이 어떤 마음이었을까 상상해 보신 적 있습니까?"
"글세."
"당신이 지나온 그 지하신전, 그리고 그 신전을 주변으로 거미줄처럼 얽힌
토굴들은 그들이 수십 년, 수백년 간 뚫어 온 것입니다. 그들이 믿고 있던
유일한 구원의 신, 암흑대신 구스차야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는 뭔가 감동스럽다는 듯이 나를 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변변한 도구도 없었을 겁니다. 어떤 자가 말하길 처음에는 손으로 팠다고
하더군요. 지하에 매몰되었던 자들이 달아나 곡괭이를 훔치고 조그마한 주
머니칼을 훔치고, 그리고 부지깽이만도 못한 작대기로 바위를 뚫고 돌을 꿰
뚫었던 겁니다."
"그래?"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이곳까지 왔습니다. 우리들은 그저 그들에게 군
사들을 보내준 것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이 고왕국을 무너뜨린 것은 그들
이지요."
"물론, 그들은 너희들에게 지도와 좌표를 알려주었겠지."
그는 생긋 웃었다. 정말 가증스러울 정도로 상큼한 미소였다.
"교육받지 못한 자들이라 좌표를 알아내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지요.
하지만 그것도 잠깐, 우리 마법사 몇을 이곳에 보내는 것으로 간단히 일은
해결되었습니다."
"그래."
내가 여전히 시큰둥하자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항구의 한 여자를 위해 삼십여년을 허비한 당신이, 수백년간 수 많은 사
람들이 인내와 각고의 세월을 보낸 이 길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
한다는 겁니까?"
"그래."
나는 여전히 가볍게 대꾸했다.
"나는, 그 한 여자가 수 백, 수천의 모르는 녀석들보다 소중해."
"하! 이해할 수가 없어요!"
마베릭은 화가 난다는 듯 나를 향해 외쳤다.
"뭘 모른다는 거야? 네 놈은 나보다 더 하잖아? 너는 너의 고통을 위해
수 백, 수천을 이끌고 전쟁을 일으켰고, 카나리안을 향한 질투로 사방을 다
귀찮게 하고 있잖아?"
그 말에 마베릭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단지 내 자신의 고통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다고요?"
"아니냐?"
그 말에 그는 소리 높여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
은 양 웃어대던 녀석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말이 안 되는 군요. 이 전쟁은 대륙을 통일하기 위한 거룩한 전쟁입니다.
인간의 전쟁이고, 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나의 주군이신 룬드바르 대제이
십니다."
"대공이 그 새 대제가 되었냐? 어쨌든 녀석도 너와 그 미친 계집애라는
돌아버린 마법사집단이 아니었다면 전쟁씩이나 일으켰겠냐? 그저 자기 집
안 다스리는 대공정도로 족했겠지."
"미친 계집애가 아니라 카산드라 누님입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단 둘 뿐
인 결정체."
"결정체든 합성체든 킬트놈이 만들어 낸 이상한 물건임에는 별 차이가 없
어."
녀석은 갑자기 이글거리는 눈으로 날 쏘아보았다.
"아헬을 어떻게 했습니까?"
"아? 죽였다."
"아끼지 않았습니까? 그 더러운 합성체를?"
집요하고 치열한 눈초리. 놈은 아무래도 구렁이 댓 마리는 잡아먹은 듯했
다. 이 음험한 질투의 화신을 보면서 나는 잠시 동안 이 녀석이 혹시 헬레
아스를 남몰래 사모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더럽긴, 너보다 백 배는 나은 훌륭한 여인이더군."
"마, 말도 안 돼! 그 천한 것이 어째서!"
마베릭은 부르르 떨었다. 녀석은 견딜 수 없다는 듯 갑자기 이리저리 날
뛰며 고함을 질러댔다. 텅 빈 왕궁에서 이 녀석의 고함소리는 인적 없는
기둥과 바닥에 부딪쳐 쨍쨍 울려댔다.
안 그래도 제법 어두운 곳에서 악을 질러대며 몸부림하는 그 몰골은 아무
리 잘 봐 주어도 저주받은 악령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거 정말 꼬리
에 불이라도 붙었나? 왜 이리 날뛰는 거야? 나는 녀석을 잡아채서 사정없
이 두들겨 패고 싶었지만 환영인지라 어차피 실체는 없다.
"가만 못 있어? 정신 없이 굴지마!"
"어째서 나와 누님은 이상한 물건이고 그 따위 것이 훌륭한 여인인 겁니까?"
"그래."
"어째서? 능력도, 외모도 모든 것이 우리가 나은데 어째서!"
"내 맘이야."
나는 너무나 뻔한 것을 묻는 녀석을 향해 뻔한 대답을 해 주었다.
녀석은 허탈한 얼굴로 날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나와는 상종할 수 없다는 듯한 자세였기에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일
단 접어 두었다. 이 녀석이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게 오늘이 처음도 아니
지 않은가.
"잠시 잊었군요, 당신이 어떤 분인지."
"그래, 잊지 마. 앞으로는."
내가 유쾌하게 대꾸해주자 녀석은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 표정으로 날 바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떠들며 걷는 동안 우리들, 아니 나와 녀석의 환영은 어떤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또 계단이야? 또 지하야? 이거 정말 미치겠네. 토굴을 지나
이젠 지하실로 들어가라고? 정말 인간들의 생각은 이렇게도 뻔하단 말인가?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곳이라면 전부다 지하냐? 머리 좀 굴려서 나무 위나
절벽 위, 뭐 그런 곳은 안 되는 거야?
제법 깊은 계단을 바라보며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녀석이 시큰둥하게 말했
다.
"이 쪽이예요."
"뭔가 고약한 냄새가 나는군."
"뭐어, 어쩔 수 없죠. 여기는 왕궁의 오물처리장이라고나 할까요?"
"오물 처리장?"
녀석은 음험하게 웃었다.
"여기는 본궁(本宮)이 아니에요. 외궁(外宮)에 해당하죠. 이 외궁의 지하에
뭐가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별로."
내가 멀뚱히 대꾸했어도 녀석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했다. 여전히
잘도 떠든다.
"이 지하에는 왕궁에서 일하는 천민들이 살았어요. 아니, 천민들이 사육되
었지요. 그들은 이 안에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고 갇힌 채 죽어가기도
하고, 죄수의 목을 베거나 고문도 했지요."
"그걸 전부 천민들이 하냐? 병사들이 하는 거 아냐?"
"천만예요. 잊으셨나요? 그랑프라임은 고왕국, 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왕국입니다. 그 왕국의 기반을 흔들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죄인은 죄인
이고 천민은 노예지요. 병사들은 병사들일 뿐이고. 보통 병사들이 하는 일
은 그저 왕족이나 귀족들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면 충분했어요. 그러니까
더러운 일은 다 천민들이 하는 거지요."
"노예가 전부 천민인가?"
"그런 셈이에요. 우리들은 노예라 말하지만 이쪽에서는 천민이라 말하지요."
녀석은 뭔가 굉장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
만 보면 나도 엘프들이 말하는 <가련한 어린 마법사의 비극적인 러브스토
리>에 손을 들어 줄 정도였다. 하지만 이 분홍주둥이가 뿜어내는 그 음험
한 질투와 음침한 악의는 가련하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폐쇄되었으니 다른 것은 볼 수도 생각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사회. 그
게 그랑프라임이예요. 그저 퇴폐적인 도락과 현상 유지에나 급급한 그저
그렇고 그런 제도와 관습으로 얽혀진 나라. 절대적으로 왕족, 귀족, 평민,
천민으로 굳어진 신분제도의 사회지요. 평민들은 천민들에 대해 무심하고
귀족과 왕족들은 그들을 쥐어짜지요. 의외로 평민의 수는 천민의 수 보다
많지 않아요."
나는 대꾸도 해 주지 않았다. 어차피 알아서 떠들 걸 내가 굳이 맞장구까
지 쳐 줄 필요는 없을 게다. 나는 그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풍기는
그 끔찍한 냄새를 맡으며 걸었다.
"누구냐!"
오랜만에 인간을 다 보는 군.
갑자기 튀어나온 시커먼 옷을 입은 남자는 나에게 창을 들이댔다. 하지만
꽤나 어설퍼서 아무래도 병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누구냐?"
"너야 말로 누구냐? 나야 볼일이 있다만."
내가 태연하게 말을 받았더니 녀석은 잠시 우물거리며 나를 관찰했다. 옷
입은 꼴을 보니 분명히 그 천민집단 중 한명인 모양이었다. 녀석은 어설픈
자세로 창을 쥔 채 경비병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뒤로 몇 몇의 사
내들이 뛰어 왔지만 나를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귀족은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해서 동지도 아닌 거 같고. 그럼 룬드바
르 군의 한 사람인가?"
창날을 들이댔던 사내가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나는 손을 저어 주었다.
"룬드바르 군은 당연히 아니지. 나는 그런 녀석하고는 별로 큰 상관은 없어."
"뭐?"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흰 것이 뭉클 하고 솟아 나왔다.
"우, 우아아아악!"
비명소리와 함께 일제히 사내들이 뒤로 물러섰다. 툭 하고 튀어 나온 마베
릭은 녀석들을 향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지하 감옥으로 이 분을 안내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누, 누구냐!"
"유령이얏!"
녀석들은 꽤나 두려워했다. 나는 그 소란을 이기지 못해서 결국은 조용히
손을 뻗었다. 퍽퍽 소리와 함께 녀석들이 나자빠지는 것을 보던 마베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을 괜히 시간을 낭비했군요."
"그런가. 지하감옥에 누가 갇혀 있는데?"
"당신의 소중한 사람이요."
나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고 들어왔던 방향으로 걷기 시작
했다. 놀란 마베릭이 소리쳤다.
"뭡니까? 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웃기지마. 건방진 녀석아."
나는 내려 왔던 계단을 도로 오르면서 타일러 주었다.
"감히 네가 이 쿠베린님께 갇혀 있는 그 누군가를 보라고 손수 지하감옥
까지 찾아가라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뭐라구요?"
"내 앞으로 데려와. 나는 뭘 좀 먹고 있을 테니."
"쿠, 쿠, 쿠베린님!"
마베릭은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면서 내 뒤를 쫓아 왔다.
"지금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지금 내게 누가 잡혀 있는 지 몰라서 이러
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모르겠는데. 그리고 위협을 하려면 상대를 잘 알고 해야지 않겠냐?"
나는 녀석을 싹 무시하고 곧장 빛을 향해 걸었다.
마침내 미로처럼 굽이진 복도를 지나 몇 개의 계단을 올랐다. 물론 오르는
도중 몇몇의 사내를 만나기도 했고 몇 몇의 병사를 만나기도 했지만 그건
물론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아니고 말고.
이 내가 설마하니 구질하게 몇 몇 인간들을 만나 주먹질을 조금 했다는
것을 일일이 떠들고 다닐 수야 있겠는가? 그저 나 정도 되는 위대한 분께
서는 마수라든가, 조인족이라든가, 혹은 용족 쯤 되는 것들과 드잡이 질을
해야 <아, 싸움좀 했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창을 어설프게 든 급
조된 천민 의용대라든가, 맨날 보던 룬드바르의 병사들 정도는 언급할 필
요조차 없는 것이다.
어쨌든 내가 그렇게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고 뭔 정원 같은 것을 지
나 점점 병사들과 기사들이 많아지는 지점에 도착할 무렵, 어느 새인가 마
베릭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내 말을 듣고 녀석이 인질을 데리러 갔겠지.
나는 룰루랄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음식냄새를 찾아 움직였다. 지금은 이
미 새벽을 지나 아침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잠도 자지 못했구만.
온 몸은 피투성이에 너저분한 냄새로 가득했다.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주방
을 찾아 움직이는 동안에도 몇 몇을 만났지만 역시 그것들을 만져 주는 데
인색하지는 않았다.
"누, 누구냐!"
"배 고파."
나는 거대한 주방에서 주걱을 쥐고 있던 덩치 큰 남자를 향해 미소를 지
어 보였다. 남자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멍하니 날 바라보더니 곧이어 비명
처럼 큰 소리를 질러댔다.
"침입자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음식을 먹었고 사내는 나자
빠졌을 뿐이었다. 그 사내의 뒤를 이어 시종으로 보이는 자 역시 눈두덩이
가 밤탱이가 된 채로 뒤집어 졌으며 칼을 들고 덤비던 용감무쌍한 어린 주
방하인 역시 엉덩이를 걷어 채인 채 밖으로 나뒹굴었다. 나는 그들이 만들
고 있던 호화 찬란한 식사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몬드 조각이 보석처럼 빛나는 꿀빵과 시나몬 향이 물씬 흐르는 질척한
시나몬롤과, 사과소스를 얹은 새끼 돼지 구이와, 허브의 잎사귀를 매단 앙
증맞은 훈제 햄. 거기에 향기로운 포도주까지. 실로 가벼운 아침식사로는
과한 내용물이었다.
그것들을 만들어낸 대지의 여신에게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나는 입안 가득
히 여신의 은총을 맛보았다. 밖에서 떠들어대는 병사들의 고함과 솥에서
지글지글 끓고 있는 매혹적인 색깔의 선지 스튜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행
복했다. 소박하기도 하지. 이 정도로 행복해 하다니. 이 얼마나 풍부한 감
수성인가.
스튜를 한 접시 들고 나는 매끄럽게 주방에서 빠져 나왔다. 물론, 중간에
병사들이 잡기 위해 달려들었다는 그런 말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나
도 좋은 식사를 했다는 이 상쾌한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으니까.
어쨌든 스튜를 홀짝이며 걷다보니 어느 새인가 나는 완전히 포위된 채로
이 위대하신 쿠베린님까지도 이름을 외우고 만 놀라운 사나이 하인리히 룬
드바르 대공, 아니 요즘 대제라 불리게 된 작자 앞에 서 있었다.
"맙소사. 또 당신인가?"
그는 진저리가 난다는 듯 나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나는 손에 든 스튜를 완전히 다 마시고 빈 그릇을 옆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는 기사에게 내밀었다. 기사는 내가 그릇을 내민 이유를 전혀 알 수 없
다는 듯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내가 재촉하자 무의식 중에 받아 들었
다.
"나중에 주방에 돌려줘."
그 말을 듣자 그제서야 그는 시뻘게진 얼굴로 나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물론 휘두르려고만 했다.
"기다려. 너희들의 상대는 아니다. 사인족 부대!"
룬드바르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들어 보였고 그 명령에 따라 갑자기 나를
둘러싼 인간 병사들이 뒤로 물러서고 털이 북실북실한 노랑털 부대가 앞으
로 나섰다. 녀석들은 검을 든 채로 나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그들이 나타
나자 인간부대는 일제히 뒤로 물러서서 방관하는 태도를 취했다. 아마도
이 가짜 사인족 부대의 지휘를 맡은 것은 마법사였던 모양이다.
"헤이자르!"
이상한 소리를 내지르면서 검은 로브를 걸친 녀석이 펄쩍 뛰어 나타나더
니 갑자기 내게 홱 시커먼 무언가를 뿌렸다. 물론 나는 그런 것을 받을 정
도로 궁색하지 않았기에 나 역시 펄쩍 뛰어 피해 주었다. 그랬더니 녀석은
그게 더 화가 나는 지 다시한번 소리를 질러대며 무언가를 뿌려대기 시작
했다.
"으악!"
아리따운 나의 두 발이 얼마나 민첩했던지 그 시커먼 것은 나를 지나쳐
내 뒤에 서 있던 가짜 사인족 중 한 명에게 맞았다.
"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었다. 녀석은 시커먼 액체에 휩싸인 채로 부들부들 떨면서
그대로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우둑우둑 소리를 내며 찌그러지는 그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결코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 시커먼 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이로서 맞으면 안 된다는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위대한 분께서 방정맞게 펄쩍펄쩍 뛰기만 해서는 안 되는 일. 나
는 이상한 것을 흩뿌리는 녀석의 정면을 향해 그대로 뛰어 올랐다.
손톱이 튀어나오며 호선을 그렸다. 그저 공격을 받았다고 캑캑 하고 괴상
한 소리를 내질러대는 가짜 사인족따위 나는 알지 못한다. 변신도 못 한
채 인간의 도구를 휘둘러대는 사인족을 나는 알지 못한다. 물론, 인간의 지
휘를 받는 사인족이란 있을 수도 없었다. 그것들은 내 상대도 아니고 내가
상대해 줄 가치조차도 없는 것들이다. 나는 독액을 던지는 사내의 어깨에
올라탄 채로 그대로 그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손톱을 선사해 주었다. 퍼
억 하고 선혈이 튀어 또 다른 얼룩을 만들어 냈다. 주변에 있는 것들이 전
부 다 병사들이라서인지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녀석을 쪼갠 뒤
주저하지 않고 도약했다.
사인족이라. 사인족이라.
감히 이것들을 사인족 부대라 불렀겠다? 변신도 못하고, 그 심장 속에 싸
움의 묘미를 즐기는 그 뜨거움도 가지지 못한 허수아비들을 사인족 부대라
불렀겠다?
너희들이 정말로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주겠다. 자, 와라!
엉거주춤 서 있는 녀석의 가슴을 뚫고 바로 뒤에 있는 녀석까지 한 번에
쓰러뜨렸다. 발톱을 세워 일렬로 서 있는 녀석들의 목줄기를 한꺼번에 훑
었다. 피가 솟고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런 것들을 상대로 변신할 필요
도 없다. 변신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모독이 된다. 할퀴고
베고, 찌르고, 자르고, 뚫고, 쓰러뜨린다. 목줄기를 잡아 그대로 잡아 뜯기
도 하고 몸통을 반으로 갈라 버리기도 한다. 손등으로 맞은 녀석의 턱이
으스러지며 바닥으로 몇 메테르나 튕겨 올랐다. 어떤 녀석들은 칼을 들이
대기도 전에 내 손에 죽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석궁을 들어 화살을 매단다.
쇠로 만든 철시가 시커멓게 빛을 발하며 내게로 뿜어졌다. 십 수 개가 제
법 까맣게 몰려들었지만 나 역시 그냥 있지만은 않는다. 몇 개는 피하고,
몇 개는 발톱으로 쳐서 되돌려 주고, 몇 개는 손으로 잡아 채 되돌려 주었
다. 자신들이 쏜 화살에 자신들이 꿰뚫려 나자빠지는 사태가 벌어지자 남
은 몇몇이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나는 빙긋 웃으면서 녀석들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자, 와 봐. 이리 와서
이 걸 보라구! 너희들의 앞에 서 있는 게 누구지? 그 어떤 존재인가?
내 뛰는 심장의 노래를 들어라. 내달리는 맥박의 노래를 들어봐라. 살육으
로 환희에 떠는 이 나를 보아라.
내 앞에 서 있던 가짜 노랑털들은 모두 뒤로 물러섰다.
오줌을 지리고 공포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는 놈들도 있었다. 어떤 놈들은
주저앉았고 어떤 놈들은 엉덩이를 내뺀 채 엉금거리며 기어 도망가기도 했
다. 어떤 놈들은 발라당 나자빠진 채 큰 대자로 드러누워 버리기도 했다.
이 우스운 몰골을 보면서 나는 시퍼렇게 질린 얼굴을 한 룬드바르 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봐, 전에는
더한 모습을 보기도 했잖아? 그런데 새삼스레 왜 그래? 부들부들 떠는 그
를 위해 병사들과 기사들이 몇 겹의 호위망을 짜며 달려들었다. 몇 겹, 그
래, 몇 겹이더라.
나는 여전히 웃으며 그대로 달려들었다. 룬드바르의 앞을 막아서는 병사
들의 얼굴을 찢고, 칼을 든채 울부짖는 기사들의 목줄기를 손톱으로 훑으
며 피로 막는 자들을 피로 덮었다.
"폐하를 보호하라!"
"폐하를 보호하라!"
무슨 배짱으로 룬드바르 놈을 내게서 보호해보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룬
드바르 놈 자신이 이렇게 멍청해서야 그럴 수도 없을 게다.
룬드바르 녀석은 나름대로 대항해 보겠다는 것인지 검을 들고 나를 향해
찔러 왔다. 나는 그 무례한 쇠붙이를 댕강 부러뜨려 주었다. 녀석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그 순간, 나는 이 친애하는 하인리히 룬드바르 녀석의 목줄기
를 잡아 채 그대로 어깨에 멨다.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정신 없이 울려퍼
졌지만 모두 다 알 바가 아니다. 그저 나는 웃으며 병사들과 기사들을 짓
밟을 뿐이다.
이걸 원한 게 아니었던가? 친애하는 하인리히 룬드바르 개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