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삼성산 산행기]
어깨동무들아, 청산가자!
寬潭 양승근
2006. 7. 23. 06:50. 휴대폰 닐리리야 소리와 함께 오른쪽 두개골이 바늘로 콕
콕 쑤신다. 오호, 통재라! 조선시대 홀로 된 어느 양반가의 부인이 소일거리로
쓰던 바늘이 부러지자 슬픈 심회를 그렸다던 '弔針文'의 한 구절이 문득 떠오른
것은 무슨 연유일까. 콧속의 염증과 더불어 온 전두엽의 고통으로 여러 날 약을
복용했던 필자에게 하필 오늘 같은 날 편두통이 찾아올 게 뭐란 말인가. 오늘
등산하게 될 관악산 산행기를 쓰라는 몇몇 어깨동무들의 부탁으로 인한 중압감
때문인가? 하지만 산행기나 여행기를 한두 번 써본 것도 아닌 터가 아니지 않은
가.
편두통을 핑계로 이미 참석을 약속한 '어깨동무산악회'의 첫 산행을 취소할
수는 없는 노릇, 냉장고 문짝 상단의 상비약 <타이레놀> 두 알을 꺼내 빈속에
약 먹자니 그렇고, 탄수화물 섭취 후 먹자니 자칫 약속 시간에 늦어질 것 같은
조바심에 에라 모르겠다, 우유 한 컵 마신 후 생수로 두통 약을 냉큼 삼킨다. 원
래 약이란 우유와 함께 복용하게 되면 흡수가 잘 안 된다지만 빈속인 필자에겐
차라리 그 편이 낫겠다 싶어 주저하지 않은 것이다.
이후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선 것이 07:20. 승용차와 대중교통을 번갈아 타며
약속 장소인 서울대 입구 관악매표소(광장시계탑)에 도착하니 08:53. 한데 아는
얼굴이 한 명도 안 보인다. 참석인원이 40여 명 가까이 될 것이란 이야기를 들
은 바 있어 그래도 몇 명쯤은 일찍 온 사람이 있으려니 했으나 눈에 띄는 사람
이 없다. 아무리 찾아 둘러보아도 보이는 사람이라곤 낯모르는 무수한 등산객들
뿐,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의 식사시간보다 훨씬 이르기는 하지만 조금이나마
요기를 하고 타이레놀을 먹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 편두통은 가라앉지 않
고, 며칠 전만 해도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던 탓인지 뿌우연 하늘 그늘
속의 태양이 엉뚱하게도 개기일식 때의 모습이 연상된다. 편두통 탓일까. 그러
나 그것은 산행하기에 딱 알맞게 안성맞춤일 터, 드러난 피부 그을릴 리 없겠고
따라서 피부노화 부추길 일없이 덥지도 않게 산행할 수 있어 좋을 것 같다.
잠시 시계탑 곁의 벤치에 앉아 있다가 視界 밖 어딘가에 누군가 와 있을 것
같은 착각(여기에도 머피의 법칙이 적용될까?) 아닌 착각에 보다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고 있는 관악산공원 입구 쪽을 향해 걷는다. 등산객들 모두 비슷비슷한
등산복을 입고 있어 대체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어려울 것 같다. 아무래도 일찍
나온 사람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박혀 있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에 다시 시계탑
아래쪽으로 몇 발자국 옮기는데 누군가 부른다. 엊그제 산악회 안 살림을 맡고
있는 허은희 동창의 어머님께서 영면하시어 문상 가던 밤에 만났던 조영옥 동창
이다(은희 어머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 반갑다. 필자는 미처 발견 못했
는데 먼저 발견해 준 친구여서 반갑고, 쪼까 엉큼하게 생각해서 머스마가 아닌
가스나여서 반갑고, 이제 약속의 만남 시간(09:30)까지 이야기 상대가 생겨서 반
갑다. 한데 웬걸 필자보다 13분이나 먼저 와서 김밥 한 줄 요기까지 마쳤다며
한 줄 내놓는다. 햐! 빈속에 약만 먹고 온 걸 눈치챘단 모양인가. 옛날 같이 시
집살이가 고되어 눈치 9단이 된 것은 아닐 터인데 암튼 그 눈치 9단 덕에 약에
취해 헐떡거리고 있을 필자의 위장이 보상(?)을 받는다. 친구야, 그 김밥 참으로
맛있게 잘 먹었다. 잊지 않을게...
한참을 더 기다려도 시계탑 아래로는 아는 얼굴이 나타나지 않는다. 분명 안
내문에는 '광장 시계탑'으로 되어 있는데 만남 시간이 넘어 가는데도 오호, 애재
라! 조침문이 또 생각날 정도로 친구들은 발끝은 고사하고 머리끝도 보이지 않
는다. 할 수 없이 영옥이 친구와 김밥 먹은 벤치에서 함께 일어나 광장 입구 쪽
을 까치발서는 심정으로 살핀다. 낮 익은 얼굴이 보인다. 회장인 허칠회 친구다.
한데 이게 웬걸, 입구에 서서 들어서는 친구들을 시계탑 쪽이 아닌 주차장 뒤쪽
나무 밑으로 우회전을 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회장보다 먼저 온 것을 탓해야
할 것인가, 바보처럼 연인간의 옛날 식 만남을 고집했던 것을 탓해야 할 것인가.
하지만 친구들아, 그래도 쓸쓸하지는 않았단다. 옛날 식 만남이 얼마나 정서적
마음의 안정을 주었는지 아니? 애인 관계는 아니었더라도 적어도 필자는 머스
마였고 영옥이는 가스나였느니라. 만남의 내용은 알아서들 상상 혀라. 고것은
너희들 몫이여...
나무 밑에는 10여 명이 훨씬 넘는 친구들이 오랜만의 회포를 푸느라 여념들
없다. 아마도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것 같다. 친구들이 속속 도착하는 가운
데 집행부가 바쁘다. 임원진의 마음 졸임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일부의 몇몇 때문이다. 자그마치 10:40이나 되어서야 산행할 인원이 확정
된다. 회장 허칠회와 대장 민동욱을 비롯해 조영옥, 차윤상, 최윤상, 허길순, 홍
기광, 유완성, 유정근, 이병철, 이용석, 송영자, 이기수, 이종구, 이혜순, 김기선,
김덕수, 김석태, 김영훈, 김진백, 박성두, 박수양, 서명순, 송수자, 송연섭(男), 송
연섭(女)과 필자, 이렇게 27명. 애초에 귀동냥했던 40여 명에 가까울 것이라는 인
원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사정상 산행은 하지 못하고 산행 후 식사 자리에 동참할
친구가 또 여럿이란다. 그래도 27명이면 대단한 대가족 산행 식구다. 많은 등산객들
속에서 통제가 쉽지 않을 것이란 예상이 든다. 분명 여러 명 함께 하다보면 뒤
처지는 사람과 앞서 가는 사람과의 사이가 너무 벌어져 갈래 길에서 자칫 인원
이 나뉘는 불상사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는 혹시 빨리 가거나 길
을 잘못 들어섰더라도 삼성산(455m) 삼막사에서 만나기로 사전 약속을 한다.
허!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
기5악 중 하나인 관악산을 종주하여 안양 쪽으로 하산할 것이라 하여 미리 등산
지도를 살펴보며 제법 멋진 산행이 되겠구나, 했는데 한 수 아래이며 지난 5월
에 등산한 바 있는 삼막사를 찍고 내려가자는 임원진의 결정에 약간의 맥이 빠
지는 것 같다.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고 등산 전용 단장까지 키에 맞춰 조절하는
것은 물론 여차 하면 응급 조치까지 감행할 사혈 침까지 가지고 온 터인데... 하
지만 임원진의 마음을 아는 필자로서 어찌 안내문대로 관악산을 오르자고 할 것
인가.
(사진1:관악산공원입구)-- 사진을 클릭하면 큰 사진으로 볼 수 있음
드디어 큰 사찰의 一柱門처럼 지어진 관악산공원 입구로 들어선다. 자
연을 상대로 도발적 건축 양식을 띤 중국의 사찰 건물과 달리 자연의 흐름에 부
드럽게 융합하면서 산새의 능선과 정상을 향해 따라 올라가는 듯한 한국의 古사
찰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한 입구다. 입구가 일주문의 형상을 빌어온 것
은 일단 들어서면서 마음부터 가다듬으라는 뜻이 아닌가 싶다. 등산객들로 하여
금 산에서의 만용은 곧 부상으로 이어지니 항상 조심하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
리는 아니지 않을까. 예전에 징수하던 공원 입장료는 없었다.
(사진2)
3분 여 포장도로를 걸어 우리 어깨동무들은 <경로구역> 방향 이정표를 따라
들어선다. 나이 지긋한 등산객에게 특별 우대가 있는 부드러운 코스라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경로 등산객에게 무조건 도움을 주어야 하는 난코스라도 있는
것일까. 꼭 그렇지 않고 단순하게 삼성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면 방향으로 볼
때 국기봉이나 삼성산, 또는 삼막사라는 이정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
각도 해 보았으나 아무려면 임원진이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무작정 들어서지는 않
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덕분에 전혀 올라보지 않은 코스를 처녀 등산
하게 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가슴속에서 살그머니 고개를 치켜든
다. 앞 뒤 사람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담소를 나누며 걷다보니 제법 등산하는 맛
이 난다. 흙 길을 만나도 대개가 물 빠짐이 좋은 마사토였고 단단한 바위 길인가
싶은데 오랜 세월 다져진 마사토 바위(?) 등산로가 수시로 나타난다. 숲은 대체로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적송에 비해 인장강도가 절반밖에
안 되는 리기다 소나무가 가장 많아 소나무 숲 특유의 오묘하고 깊은 맛은 덜했다.
또한 마사토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길이어서 그런지 등산객이 하도 많아 그런지
오르막 코스 내내 소나무가 뿌리를 드러내어 반들반들한 등걸을 이루고 있다. 겨
울 되면 소나무의 발치가 얼마나 시려울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면서도 그 얽히고
설킴은 필자를 간단없이 감탄하게 한다. 마치 인생살이가 저토록 얽히고 설키는
가운데 모든 관계가 이루어져 세월과 더불어 한 세대로 끝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져 나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등산로 입구에서 흙을 담은 작은 봉
투를 십시일반 등산객에게 나누어주어 드러난 나무 뿌리 덮어주기 운동이라도 벌
였으면 어떨까 생각도 해 본다.
(사진3) (사진4) (사진5) (사진6:똥방치를 신나게
흔드는 홍기광)
드러난 뿌리를 넘고 비켜가며 오르다보니 이제야 삼막사 이정표가 나타난다.
한데 삼막사 표지 앞에 상처로 인해 야릇한 생김새가 되어버린 나무가 뭔가를
암시하는 듯하다. 자연스레 지난 5월 첫 일요일에 올랐던 때의 느낌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날은 바로 전날 중부지방에 때아니게 100mm 이상 비가 내린 이튿
날이기도 했다. 삼막사 오른쪽 켠에 나 있는 계단을 밟아 10여분쯤 오르다보면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 놓는 칠성각(칠보전)과 함께 그 앞의 두 바위. 경기도
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어 있는 남거시기바위(1.5m)와 여거시기바위(1.1m)는
서로 마주보고 있으면서 무슨 꿈을 꿀까. 칠성각 안으로 들어가 마애존불의 주
례로 조촐하나마 시집장가라도 가고 싶은 것일까. 게다가 칠성각의 주인인 마애
존불은 또 자연적으로 생겨난 인간의 두 거시기를 닮은 바위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임산부가 거시기를 만지면 순조로운 출산을 하게 되고, 가
문의 번영과 무병장수를 빌면 효험을 볼 수 있다하여 초파일과 칠석날 마애존불
이 아닌 거시기에게 치성을 드리는 사람이 많다 하는데, 우리 어깨동무들도 성
폭력(?)이라도 행사(?)하여 산악회의 발전을 위해 빌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앞
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친구들에게 넌지시 말을 꺼내어 보았다. 그러나 역시 우
리는 순수한 어깨동무 친구들이라 그런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하여 머
쓱해진 채 입을 다물 수밖에.
1차 휴식(11:25)에 친구들은 각자 가지고 온 음료수를 꺼내 목들을 축인다. 필
자는 가져온 매실 원액을 따라 생수와 희석해 나누어 마신다. 그리고 출발하여
2차 휴식(11:50)까지 마치고 잠시 다시 걷기 시작하자 쌍생수 약수터 나온다.
(사진7:쌍생수 약수터) (사진8)
물이 제법 많은 양이 나왔지만 어깨동무들은 조금 전 휴식하며 목을 축인 탓
인지 그냥 스친다. 이곳이 'K24 제1야영장'인가 본데 이정표가 엉망이다. 게다가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겨놓은 듯 서 있다. 이정표의 위치가 그렇듯 누군가
코스 표시도 새롭게 해놓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어깨동무들은 그 이정표에
는 나와 있지도 않은 쪽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거북바위9)
저만치 오솔길을 벗어난 곳 바위 밑에서 도란도란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등
산객 모습이 보였다. 거대한 거북이한테 고시레를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
았다면 아무래도 거북이가 심술궂은 짓(?)을 하지 않을까 하는 쓰잘 데 없는 상
상을 덤으로 하며 걷다보니 널찍한 바위가 하늘을 온전히 맞이하고 있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K39 운동장바위'라는 입간판이 서 있었으나 필자가 가지고 있
는 등산지도에는 그 위치쯤에 '너럭바위'라 붉은 글씨로 씌어있다. 7,8부 능선을
끼도 돌아온 국기봉(446m) 봉우리도 보인다.
(사진10:운동장바위에서 본 삼성산) (사진11:애인(?)한테 통화하는 회장)
마침 누군가에게 열심히 통화를 하고 있는 어깨동무 회장의 모습을 슬그머니
디카에 담고 우리의 목표지점이라 볼 수 있는 멀찌감치 보이는 삼성산 전경도
담았다. 사실 삼성산 최정상은 우리 민간인들은 밟아 볼 수 없다. 군부대의 통신
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민간인 접근 불가였기 때문이다.
한참을 걸어 포장된 길로 들어섰다. 군부대와 삼막사로 인해 생겨났을 터였
다. 포장된 길을 걸으면서부터는 잡상인들도 제법 많이 보였다. 오래 전 와 보았
을 때의 잡상인들과 달리 주변을 비교적 잘 정리하며 장사를 하는 것 같아 그때
처럼 눈살은 찌푸려지지 않았다. 대신 과천유원지 쪽에서 관악산을 오를 때가
떠올랐다. 깨끗한 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계곡 물에 넋을 주며 올랐었는데 이게
어인 일이던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계곡 물이 썩은 물이 되어 심한 악취를 풍
기는 게 아닌가. 까닭은 금새 밝혀졌다. 연주암에서 마구 흘려보낸 생활오수가
무려 계곡 길이의 절반 정도를 오염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정화시설도 없이 곧
바로 버려지다보니 밥풀 찌꺼기까지 포함된 오수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
다. 덕분(?)에 동행했던 초등학교 5학년 필자의 아들에게 생각지도 않던 환경오
염, 생태파괴 교육도 했었다. 그 아들이 지금 06학번 대학생이니 꽤 오래 전 이
야기인 셈이니 지금은 그때와 많이 다를 것이다. 이 삼막사 잡상인의 무질서함
을 본 것도 아마 그 즈음 이쪽 저쪽일 것이다.
(사진12:마애부도, 얼굴을 옆으로 (사진13:마애부도 안내문)
뉘어서 보길..오른쪽이 아래쪽.)
삼막사가 가까워가자 먼저 마애부도가 마중을 나와 있다. 원래 스님이 열반
한 후 사리나 유골을 모시던 묘탑이라는데 다른 사찰에서 흔히 보던 사리탑하고
는 좀 색다르다. 오랜 세월을 이야기하듯 희미한 음각 문양의 가슴 부위가 사각
형으로 움푹 패여 있다. 사리나 유골이 있던 자리인 것 같다. 한데 이곳에 지나
는 등산객들이 돌을 던져 넣어보는 몰지각한 행위를 하나보다. 하지만 앞서간
우리 어깨동무들은 감히 그러지 않았으리라. 필자 역시 그런 행위는 안내문을
읽어보기 전까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사진14:반월암 입구) (사진15: 삼막사, 뒤쪽으로 대웅전이 있다.)
삼막사 조금 못 미치는 곳에 반월암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색다르게 되어 있
다. 마치 도미노 게임을 하려고 세워놓은 것처럼 기증자의 이름들을 새겨 넣은
비석(?)들이 층층이 서 있다. 맨 앞의 것을 넘어뜨리면 줄줄이 넘어져 반월암까
지 넘어지지나 않을까 걱정 아닌 걱정도 해본다.
우리는 삼막사 오른쪽 켠 나무 밑 벤치로 가 김밥으로 간단한 요기를 했다.
이 시각이 13:00, 출출할 시각이다. 항상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酒가 빠지지 않
듯 차윤상 친구의 등짐에서는 증류된 백포도주가 나왔고, 송수자 친구의 배낭에
서는 이게 웬걸, 아녀자가 얼굴 붉히면 요강을 뚫고 사내가 취하면 요강을 꿰찬
다는 복분자주가 나왔다. 그것도 집에서 직접 담근 것이란다. 모처럼 걸쭉한 농
담이 오고가고 어깨동무들은 각자의 꿍꿍이 뒷생각들을 하며 웃었다. 밀밭에만
가도 취하는 필자도 담근 이의 손맛을 보기 위해 복분자주도 맛을 보고 그냥 포
도주가 아닌 증류된 포도주는 어떤 맛인가 차윤상 친구의 근력을 뺀 증류된 백
포도주 맛도 보았다. 내노라하는 기업체에서 나온 것보다 맛이 나은 듯한 복분
자주야 워낙 조금 마셔 요강을 꿰차기는 그른 것 같고, 증류된 백포도주는 어이
쿠, 이게 웬걸! 술이 혀끝에 닿은 게 아니라 벌이 와서 쏘고 사라지는 것 같다.
흔히 독주하면 중국의 빼갈(원래 百干(60도)의 중국어 발음이 바이깔인 것이 와
전되어 '빼갈'이 됨) 생각나는데 그것을 뺨 칠 것 같지 않나 싶다. 낑낑거리며
걸머메고 온 차윤상 친구의 왈, 알코올도수가 50도라고 했던가.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술을 탐하려는 사람은 없다.
한데 이기수 친구가 도중 거꾸로 하산 했다는 소식이다. 하다못해 러닝머신이
라도 해서 담부터는 끝까지 함께 완주할 수 있었으면 싶다.
(사진16:김밥을 먹으며)
허기를 해결한 어깨동무들은 기념사진 촬영을 했다. 차윤상 친구가 맡았다.
사진을 촬영하면서 우리들은 많이 웃었다. 전체 사진 먼저 찍고 반별로 찍기
시작하면서 웃음이 터졌다. 1반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고 2반이 몇 명, 3반이 몇
명, 한데 3반 친구들은 아뿔싸! 모두 상처(?)들 했는지 홀아비들이다. 2,3반 어
깨동무들 반성해야 할 것 같다. 처음 참석한 필자가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으쨌거나 나는 1반이거든! 특히 3반 치마들은 곱빼기로 반성하고... 으째 그리
서방들을 홀아비 만드냐? 궁상맞게.....ㅋㅋㅋㅋㅋㅋ......
차치하고, 예까지 와서 삼성산에 대한 소개를 간단하나마 하지 않으면 의미
가 없을 것 같아 잠깐 짚고 넘기로 한다. 삼성산은 앞에서 열거했던 경기 5악의
하나인 관악산과 발치를 맞대고 있는 산으로 원효, 의상, 윤필의 세 고승이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암자를 짓고 수도하던 곳인 삼막사와 더불어 망월암, 상월
암, 염불암, 성주암, 안양사, 삼성사 등, 여러 사찰이 있는 산으로 산명도 위의
세 고승을 정화시킨 산이라 하여 <三聖山>이라 칭해졌다는 설과, 극락세계의
교주(敎主)인 아미타불과 그 왼쪽에 관세음보살, 오른쪽에 대세지 보살을 일컬
어 삼성(三聖)이라 부른 데서 기인했다는 설도 있는 산이다. 또한 왕건이 금주,
과주 등의 고을을 정벌하기 위하여 이곳을 지나다가 능정이란 스님을 만나 안양
사를 짓는 바람에 오늘날의 안양시 명칭이 탄생되게 되었다 하는 유서 깊은 산
이기도 하다. 앞서 소개했던 칠성각과 남,여근석 이야기도 사람들로 하여금 솔
깃하게 하여 삼성산 오르는 재미를 쏠쏠하게 하기도 한다.
그 자리를 벗어난 것이 13:30, 긴 시간이었던 같은데 30분밖에 되지 않았다.
이름하여 길고도 짧은 시간이었나 보다.
우리는 삼막사 앞을 지나 곧바로 염불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망월암을 거
쳐 관악산 발치인 소공원을 찍고 서울대 수목원으로 인해 안양유원지로 가는 길
이 통제되는 바람에 새로 생긴 코스 같이 된 곳, 산 넘고 넘어 계곡 건너건너 수
목원교 쪽으로 하산했더라면 산행하는 맛이 더 나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
만 어찌 하랴. 그것은 필자 혼자만의 생각인 걸.
(사진17:염불암) (사진18:염불전)
14:04, 염불암이 가까워지자 스피커에서 나는 염불소리가 들린다. 염불소리보
다 풍경소리가 더 목가적이고 정서적이어서 필자에게는 솔직히 사찰 하면 그 소
리가 먼저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스쳐 지나온 반월암과 삼막사에서는 그나마
들리지 않던 소리여서 그래도 잔잔한 염불소리가 듣기에 좋다. 작년, 설악산 신
흥사에 들렸을 때 경내가 아닌 소공원 전체에서 쩌렁쩌렁 울리던 염불소리는 말
그대로 소음이었다. 하긴 사찰에 염불소리가 없으면 고목이면서도 다람쥐 한 가
족 품지 못하는 고목 아닌 고목에 불과할 것일진대 염불암에 염불소리가 없으면
염불암일 수 없을 것 같다. 필자는 염불전에 앉아 염불을 외는 스님의 뒷모습이
라도 볼까 싶어 설핏 기웃거려 본다. 가만히 가부좌하고 앉아 명상하고 있는 노
스님 한 분과 여신도 한 사람이 열심히 배를 하고 있을 뿐이다. 99% 짐작은 했
지만 1%의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인데, 기대가 사실이 아닌 짐작이 사실이 되
고 보니 조금은 실망스럽기도 하다. 녹음된 염불소리. 현대문명의 이기 덕분에
스님들도 편하게 수도생활을 하고 있나보다.
염불암에서부터는 내려가는 길이 포장도로다. 조금 내려오다 보니 완전무장
을 했던 필자의 무릎에 약간의 무리가 따르는 것이 느껴진다. 이때다 싶어 뒷걸
음으로 걷기 시작한다. 경북 청량산에 갔을 때도 약 1km 정도의 포장된 길을
뒷걸음으로 내려와 본 경험이 있는 터다. 뒤로 걸으니 다리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고 무릎의 무리도 어느 정도 해소되는 것 같다.
(사진19) (사진20:발이 이뻐서... 이만큼 이쁜 발 있으먼
나와봐. 얼굴 빼고 찍어 줄게)
좀더 내려와 계곡 물에 발을 담그니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으로 상쾌
하다. 깨끗한 물에 발을 담그는 게 좀 미안하긴 하다. 하지만 열 받은 발을 식혀
온몸의 피로를 풀고 특히 발에 생기는 물집도 예방하는 게 지혜로운 산행법 아
니겠는가. 물집 자체가 열로 인해 생기기 때문인 것이다. 장마 기간이어서 그런
지 물의 양도 많은 데다 시원하기까지 하고 발이 시리다는 생각까지 든다. 동심
의 세계로 한순간 들어가는 듯한 표정들이다. 먼저 내려갈 채비를 마친 어깨동
무의 산악대장이 한 술 더 떠서 다리 아래쪽에서 발을 담그고 있던 친구들에게
호박돌을 던져 물을 튀긴다. 초딩 시절 고무줄 놀이하던 여자친구들의 고무줄을
둘둘 말아 끊고 달아나던 짓궂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그 시절 여자친구들도 그
랬을까, 물방울을 맞은 친구들은 되레 즐거워한다. 필자도 호박돌을 찾아 멀리
대전에서 올라온 김영훈 친구를 향해 공범자가 되어본다.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본다는 것, 참으로 다른 어느 모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어깨동무산악회에서만이
느껴볼 수 있는 값진 가치 아니겠는가.
잠시 시름을 잊고(14:32) 동심으로 돌아갔다가 10여분쯤 내려오다 보니 계곡
물 한가운데에 테이블을 내다놓고 음식을 파는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문득 관악
산 연주암 아래의 오염된 물이 또 떠올라 눈살을 찌푸린다. 손님들이 아무리 잘
이용한다 해도 음식물 찌꺼기가 계곡 물에 버려지게 될 것 아닌가. 지난 5월에
와 보았을 때도 그랬듯이 이번에는 더욱더 많은 아이들이 아래쪽에서 미역감듯
하며 물놀이하고 있을 터인데... 상인들의 몰지각과 그에 동참한 등산객들이 안
타깝다. 역시나 아래쪽에서는 마치 수영장을 방불케 하는 물놀이가 성황을 이루
고 있다. 되레 정식 수영장에는 한산하다. 또다시 떠오르는 어린 시절 한 토막.
고향 마을 중방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흐르내. 비가와야 제대로 물다운 물이
흐르는 별로 크지 않는 냇가지만 우리 아이들은 비만 왔다 하면 모두 나와 고기
를 잡고 물놀이를 했었다. 한데 그 내도 지금은 세월을 이기지 못했는지 내(川)
의 지위를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음을 벌써 여러 해 전에 두 눈으로 확
인하며 안타까워했었다. 그 곱던 잔모래는 다 어디 가고 위쪽에서부터 기인했을
축산 폐수로 온통 시궁창 냄새를 풍겼고 또 그런 곳에서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잡풀들이 무성해 있었다. 차라리 보지 않음만도 못한 고향의 기억 속 때가 되었
다. 제발 이곳만은 필자의 고향 흐르내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안양유원지 초입 <남씨네 가마솥 순두부>. 그곳에는 마음으로만 함께 산행
을 한 심재철, 이재성, 김준화, 백순현 친구와 어머님 상을 당해 부득이 참석 못
한 어깨동무 산악회의 안 살림꾼 허은희 친구 대신 임시 총무를 하고 있는 이승
휘 친구가 먼저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여 전체 인원은 거꾸로 하산한
친구를 합쳐 총 32명이 되었다.
(사진21,22,23:식사장면, 자동설정이 돌아간 줄 모르고 찍어서 사진이 요상하게 나
왔다 ㅠ.ㅠ 찍사 잘못 둔 니들 죄도 있응게 이해들 혀라.)
두부전골로 식사를 하면서 왁자지껄 드디어 제대로 된 이야기꽃이 피기 시작
했다. 2,3반 친구들은 알란가 모르지만 5,6학년 시절 1반 남자아이들에게만 내려
졌던 '거시기 만지기' 벌칙이 필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끼리 단연 화제다. 지금
같았으면 당장 인터넷상에 유포됨은 물론 담당 선생님은 교단에 서 있을 수도
없었겠지만 그때 그 시절만 해도 순수에 순수를 더한 나머지 그것이 용인되었
고, 필자 역시 그런 벌칙을 여러 차례 받았던 기억이 새롭고 생생하다. 어쩌면
우리들은 그때 그 벌칙을 받으며 그 자체를 즐겼었는지 모른다. 여자 애들은 그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들을 했는지 궁금하지만 말이다. 대체 왜 그와 같은 벌칙
이 주어졌었는지, 몇 해 전 선생님(김자교자인자 선생님)을 뵈었을 때 여쭈어
본 적이 있다. 그때 필자는 이런 말씀을 들었다. 옛끼놈, 벨걸 다 기억하고 있구
나! 그런데 승휘 친구도 선생님을 찾아 뵙고 같은 질문을 여쭈어 보았었나 보았
다. 고 어린 녀석들, 숙제를 해 오지 않는다고 혼을 내기는 내야 하는데, 그렇다
고 어디 때릴 데도 없는 꼬맹이들이라 많은 친구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면 다음
부터는 잘 해 오겠지, 하고 그리 했노라. 승휘 친구의 기억이다.
이재성 친구는, 생각지도 않게 많이들 문상해 주어 당황스러우면서도 고마웠
다고 하더라는 은희의 말을 차분하게 전한다. 은희 친구는 지금 참으로 힘들 것이다.
비록 오랜 기간 병상에 계셨었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머님을 보내드려야 하는 자식
으로서는 호천망극,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일 것이다. 친구들아! 돌아가신 은희
어머님 명복 빌어드리고, 어머님 앞에 죄인 된 은희에게 힘내라고 모두들 성원
보내자. 원래 오늘이 발인인데 휴일이어서 내일이 발인 일이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정작 식사시간보다 이야기 한 시간이 더 길
어 17:06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이야기 구조가 끝나지
않은 모양, 헤어지기가 아쉬운 나머지 새도 모르게(밤이었다면 쥐도 모르게) 일
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이후 노래방으로 몰려갔다. 필자 역시 새도 모르게 자
리를 떴어야 할 입장이었지만 노래방에서의 찍사를 부탁하는 고향에서 달려온
우리 14회의 일꾼 이재성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노래방 찍사로 취직(?)
을 했다. 모두들 카수 뺨치는 노래 실력들, 내 노래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지
만 필자 역시 대한민국 사람 아니던가. 시속 100km 이상 달리는 관광버스 속에
서 안전 벨트를 매고 앉아 있어도 위급 상황에서는 안전할 수 없는 법인데 저
죽을지도 모르고 속칭 관광버스 춤까지 추어대는 민족성을 가진 흥의 민족, 대
한 민국 사람이 아니던가 말이다. 하여 필자도 찍사 접고 오래간만에 몇 곡 불
렀음을 밝힌다. 그리고 노래 부는 사람 모두 사진을 찍기는 찍었는데 여기에 보
이지 않은 사람은 찍사 탓하지 말고 백댄서(?)를 잘못 고용(?)한 탓을 하시라.
자칫 어깨동무 친구들 어깨동무 한번 했다고 이쪽 저쪽 홀아비, 과부 만들면 누
가 책임지겠는가. 필자는 일부다처제공화국에 살지 않는 관계로 능력 있어도 책
임질 수 없기 때문임을 이해해 주길... 친구들아!
(사진24) (사진25) (사진26) (사진27:풍선춤)
(사진28) (사진29) (사진30) (사진31)
(사진32) (사진33) (사진34) (사진35)
딱 1시간 동안, 흥에 빠지고, 이재성, 허칠회 친구의 풍선춤에 빠지고, 가락에
빠지고, 부적절한 멋들어진 춤에 빠지고, 그리고 관광버스춤에까지 빠지고......
하다보니 긴 산행으로 인해 생긴 하루의 피로가 개거시기에 낀 보리 알 빠지듯
개운해진다. 하여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 달 산행을 기약하며 약 4시간여
에 걸친 제4회 산행과 뒤풀이까지를 모두 접어 메고 왔던 배낭에 넣었다.
영원한 어깨동무 친구들, 반가웠고, 고마웠고... 즐거웠다. 친구들아, 다음 만
날 때까지 좋은 날들로만 이루어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