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드라마에서 배우는 경영 팁
추노·선덕여왕… '미드' 뺨치는 '한국 드라마'의 경쟁력
1. 전략적 민첩성…현장 상황에 따라 대본 바꾸면서 1주 2편 제작… 퀄리티까지 유지
2. 소비자와 소통…방송중 시청자 반응 적극 반영 주인공보다 인기있는 캐릭터도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에 새삼 요구되는 덕목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국 드라마 같은 전략적 민첩성이다. LG경제연구원 이진상 연구위원은 "한국 기업은 더 이상 벤치마킹할 대상을 잃은 데다 전략적 감수성이 약해 애플처럼 판을 바꾸는 혁신에 늦었다"고 말했다.
#1 김수현 극본 SBS 주말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촬영지는 제주도다. 푸른 바다와 감귤 농장이 등장하는 전원풍(風)의 드라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제작과정은 전쟁에 가깝다. 최대 80부작으로 기획됐지만 첫 방영 당시 사전 제작된 분량은 8회에 불과했다. 여기에 대본이 수정·지연되거나 기상 상황에 따라 촬영이 늦어지는 경우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촬영을 마친 필름이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해 최종 편집까지 끝나는 시각이 방송 시작 불과 몇 시간 전일 때도 있다고 한다.
#2 몇 해 전 대만에서 TV 드라마를 촬영했던 탤런트 박은혜씨는 대만 현지 제작진으로부터 "한국 드라마 제작진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찍고 편집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사전 제작률이 높은 대만과 달리 한국 드라마는 방송 1~2개월 전에야 촬영을 시작하고, 그 주에 찍어서 그 주에 방송을 내보내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현재 16~20부작 드라마를 기준으로 방송 시작 전에 제작되는 분량은 4~6회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하루살이' 같은 한국 드라마 제작 방식은 한국인의 전형적인 일 처리 방식을 잘 대변해 준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런 기동성과 임기응변이야말로 한국 드라마의 경쟁력이라는 주장도 있다. '봄의 왈츠'(2006), '눈의 여왕'(2006) 등의 글로벌 마케팅을 담당했고, 현재'인생은 아름다워'를 외주 제작하고 있는 박인택 삼화네트웍스 부사장은 "졸속 제작이라고 비판받았던 순발력이야말로 일본이나 중국과 비교했을 때 한국 드라마가 가진 중요한 장점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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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때 졸속으로 비판받던 한국 드라마가 잇달아 성공작을 내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 성공 키워드는‘민첩성’과‘소비자와의 호흡’이다. MBC 드라마‘선덕여왕’에서 미실 역을 맡은 고현정. /MBC 제공
그는 "많은 사람이 '사전 제작이 한국 드라마의 살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전 제작만이 능사가 아니다"며 "작품에 따라 사전 제작도 필요하지만 오히려 시청자의 반응을 살펴가면서 일주일에 두 편을 촬영·편집하면서도 퀄리티(quality·질)를 유지하는 기동성이야말로 한국 드라마가 살려야 할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외국에선 따라잡지 못하는 순발력
한국 드라마의 제작 방식은 일본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사전 제작 중심인 일본의 경우 실제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기획 등 선(先)제작단계(pre-production)를 치밀하게 준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처럼 촬영 테이프를 급히 공수해 오고 마감 직전까지 편집하는 일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만약 중간에 연출자가 대본을 바꾸려 할 경우 연출자·작가가 협의체를 통해 합의해야 하기 때문에 수정이 어렵다.
반면 한국에서는 연출자의 한마디에 마치 스포츠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내용을 수정한다. 연출자의 현장 판단을 따르는 것이다.
서로 다른 제작 방식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드라마는 내용 면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박인택 부사장은 "일본 드라마에 세트장 촬영이 많은 이유는 돌발 변수 없이 사전 계획대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반면 한국 드라마는 임기응변에 강해 산이나 바닷가 같은 현장 촬영 장면을 많이 넣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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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 드라마‘아이리스’의 이병헌·김태희. /KBS 제공
이런 기동성이 있기에 한국 드라마는 방송 도중에 시청자의 반응을 작품에 적극 반영할 수도 있다. 지난해 최고 인기 드라마 중 하나로 꼽히는 '선덕여왕'(2009)의 경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선덕여왕으로 성장하는 덕만(이요원)의 캐릭터가 중심이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주인공인 덕만보다 오히려 미실(고현정)이라는 캐릭터에 환호했다. 덕만보다 미실 팬 카페가 더 생기고 미실의 말을 이용한 다양한 버전의 UCC(자체 제작 콘텐츠)도 나왔다. 이에 따라 대본도 미실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는 쪽으로 바뀌었다. 선덕여왕의 작가인 박상연씨는 한 인터뷰에서 "시청자들은 8개월간 미실과 함께 살고 느꼈다"며 "미실의 역할이 점점 거대해지는 과정은 (한국) 드라마 시스템만이 가지는 특징"이라고 말했다.
박 부사장은 "쪽 대본(대본이 늦어져 촬영 현장에서 부분 부분 나눠주는 대본)이나 밤샘 촬영 등의 관행은 고쳐야 하고 일정 부분은 사전 제작도 해야겠지만, 유연한 현장 대처, 시청자와의 교감 등을 가능하게 해주는 한국 드라마 제작 방식의 장점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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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드라마‘추노’에서 대길 역을 맡은 장혁. /KBS 제공
한국은 2000년대 중반부터 사전 제작을 확대하려 했지만, 실패한 사례도 적지 않다. 100% 사전 제작 시스템을 도입했던 '내 인생의 스페셜'(2006)과 '비천무'(2008), '2009 외인구단'(2009), '친구, 우리들의 전설'(2009) 등은 한자릿수의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중국 현지 촬영과 한중 합작으로 주목받았던 '비천무'는 준비 기간이 너무 길어져 그 사이에 눈이 높아진 시청자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사전 제작 방식으로 드라마를 만들었던 한 프로덕션 관계자는 "1~2회 대본과 대여섯 페이지짜리 시놉시스(줄거리)만 들고 작품을 시작하는 것보다 미리 치밀하게 기획해 사전 제작하면 디테일이나 CG(컴퓨터그래픽)에서 작품의 질을 확실히 높일 수 있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결과물이 항상 완벽한 것이 아니므로 방송이 시작된 뒤 '고쳤으면' 하고 후회하는 경우도 많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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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민첩성을 가진 한국 드라마
한국 드라마의 제작 방식의 장점만을 본다면 경영학에서 말하는 '전략적 민첩성(strategic agility)'을 발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럽의 경영 석학 이브 도즈(Doz) 인시아드(INSEAD) 교수는 Weekly BIZ와의 인터뷰에서 전략적 민첩성을 '항해'에 빗대 설명했다. "폭풍우가 치는 바다를 건널 때 무작정 처음 항로로만 가다가는 파도에 휩쓸려 난파할 가능성이 큽니다. 바람과 파도의 흐름을 읽으며 수시로 방향을 바꿔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죠."
그런데 현재 국내 드라마 시장의 상황이 이런 '폭풍우 치는 바다'다. 국내에서 제작되는 드라마 편수는 케이블을 포함해 90여 편 정도로 5년 전보다 약 10여 편 늘어났다. 그만큼 시청자의 눈길을 잡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졌다는 의미다. 여기에 지난해 1226편이 수입된 해외 드라마와도 경쟁해야 한다. 순발력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지금의 한국 드라마 제작 방식만을 금과옥조라고 볼 수도 없다. 제주도에서 드라마를 찍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시간에 쫓겨 막 촬영과 편집이 끝난 테이프를 비행기로 실어 나르는데 악천후로 비행기가 결항하면 방송이 중단되는 돌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일부 드라마의 경우 촬영 도중 주인공이 다치는 바람에 방송이 중단되는 파행을 겪기도 했다. 비판론자들은 "임기응변이란 결국 한국 드라마 산업의 영세성을 말해주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 김영덕 수석연구원은 "대중의 관심이 빠르게 움직이는 상황에서는 한국과 같은 준(準)동시제작 형태가 강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드라마 '추노'처럼 사전 제작 비율을 늘려 작품의 질을 높이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식 드라마의 치밀한 준비와 한국 드라마의 전략적 민첩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 장기로 보면 양수겸장(兩手兼將) 해야 한다는 것이다.
■CEO들이 한국 드라마 PD들에게 배울 점은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에 새삼 요구되는 덕목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국 드라마 같은 전략적 민첩성이다. LG경제연구원 이진상 연구위원은 "2000년대 이전 한국 기업들은 세계 1등 기업을 따라가는 데 최고의 전략적 민첩성을 보여줬다"며 "전략적 감수성은 좀 떨어져도 자원의 신속한 배치와 일사분란한 조직의 힘을 바탕으로 선발 기업들의 움직임을 모방하여 빠르게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 연구위원은 "이제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오른 한국 기업은 더 이상 벤치마킹할 대상을 잃은데다 전략적 감수성이 약해 애플처럼 판을 바꾸는 혁신에 늦었다"고 말했다. 다시 전략적 민첩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CEO들이 사일로(silo·곡식과 목초를 쌓아두는 굴뚝 모양의 창고)에서 나와 고객이나 직원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