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하루법문(2024년6월6일(음)5월1일(목)
신심명 08
歸根得旨(귀근득지) 隨照失宗(수조실종)
須臾返照(수유반조) 勝却前空(승각전공)
前空轉變(전공전변) 皆有妄見(개유망견)
不用求眞(불용구진) 唯須息見(유수식견)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하안거 결제한지 보름 만에 맞이하는 초하루 법회입니다. 오늘은 우리들의 정진에 필요한 바른 안목[正見]을 여는데 도움이 되는 신심명 구절에 대해 법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들으셔서 법에 대한 바른 안목으로 경계에 끌려가지 않고 정진을 이어가는 힘을 키우셨으면 좋겠습니다.
歸根得旨(귀근득지)
隨照失宗(수조실종)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라가면 종취를 잃는다.
분별심을 여의고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는다, 본래 부처로 깨어난다,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분별망상이나 생각을 따라가면 근본을 놓칠 수밖에 없으니 본래부처가 부처 노릇을 못하고 중생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간다고 했지만 돌아갈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고 오는 시간도 없을 뿐만 아니라 공간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본래 구족되어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본래 없는 마음이 어디로 돌아가느냐 이말입니다. 본래 없는 마음인데 없는 마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 마음을 바로 쓰는 길이 곧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바로 공을 깨닫는 길입니다.
근본에서 보면 육상원융(六相圓融)이기 때문입니다. 육상(六相)은 총(總), 별(別), 동(同), 이(異), 성(成), 괴(壞) 여섯 가지를 말합니다. ‘모두’와 ‘따로’가 있고 ‘같음’과 ‘다름’이 있고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있다는 걸 말합니다.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 스님의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에 보면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법당 한 채를 지으려면 기둥과 대들보, 서까래, 기와 등 모든 재료가 모여 이루어진다. 그 재료가 개별적으로 볼 때는 기둥이요, 대들보라고 하지만 각자 인연이 되어 법당이라는 한 채의 집이 세워지면 그냥 법당일 뿐입니다. 인연에 의해서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거죠. 진불선원 법당도 공한 것이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총(總)으로 볼 때는 기둥도 아니요, 대들보도 아닌 그냥 법당입니다. 그러나 기둥 하나만 없어도 법당은 허물어져 법당이라는 총이 없어지게 됩니다. 결국 기둥 하나에 대들보도 들어 있고 기와도 들어 있고 서까래도 들어 있고 법당 전체가 들어 있다는 것을 ‘일중일체(一中一切) 다중일(多中一)’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 가운데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다는 뜻입니다. 육상원융이라는 세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기둥, 대들보, 지붕은 모두 별(別)이면서 총(總)이고 총이면서 별입니다. 법당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체 우주 자연의 존재원리가 다 그렇습니다. 무진연기(無盡緣起)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총과 별이 하나요, 동과 이가 하나요, 성과 괴가 하나입니다. 물론 하나라는 것도 이름뿐인 하나입니다. 본질은 공입니다. 왜냐하면 공에는 육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가칠종 가운데 법안종을 창시하신 법안 스님의 얘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법안 문익(885~958) 선사가 제자인 영명 도잠 스님이 참방하자 물었습니다.
“그 동안 무슨 경을 읽었는가?”
“화엄경을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육상이 화엄경 어느 품에 있는가?”
“그것은 십지품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세간과 출세간의 법은 모두가 육상을 갖추고 있으므로 육상은 모든 것에 해당됩니다.”
“그러면 공 역시 육상을 지니는가?”
그러자 영명 도잠 스님이 당황하여 머뭇거리자 스승이 다시 자비를 베풉니다.
“자네가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면 나는 양구(良久) 했을 것이다.”
이렇게 알려주는데도 제자는 알아듣지 못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스승님, 상이 없는 공에 육상이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공이지.” 이렇게 스승이 자비롭게 말로 풀어주니 바로 깨달았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해인사 인곡 스님이 견성 후 법문 하러 올라간 법상에서 30분 정도 앉아만 있다 내려가니 용성 스님이 “법문 참 잘했다.”고 하셨습니다.
분별하는 것이 발달되어 있는 우리는 분별해야 이해되고 알아듣잖아요. 그런데 법의 세계는 분별하면 틀립니다. 이해해도 틀리고 안다 해도 모른다 해도 다 틀립니다.
인천 용화사 송담 스님께서는 주장자(杖子)를 들고서 신도님들과 눈을 한 분 한 분 다 마주치고는 법문을 시작하시기도 했습니다. 이게 법을 설하는 거예요. 주장자를 볼 줄 아는 거기에서 법을 깨달으라는 겁니다. 주장자를 보고 깨달으라는 겁니다.
다만, 이런 방법으로는 깨닫기 어려우니 말로 법을 설하는 겁니다. 우리는 보는 데 익숙하기때문에 그냥 법을 깨닫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견문각지(見聞覺知)를 통해서 많이 깨닫는다고 합니다. 계곡물 소리를 듣고 깨닫고 종소리를 듣고 깨닫고 맞으면서 아픈 느낌에 깨닫는 등 작용이 일어나는 찰나에 깨어나게 되는 경우입니다.
근본이 무엇일까요? (손가락을 세우며) 이것입니다. 나뭇잎이 흔들리고,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손을 흔들고, (탁자를 두드리며) 이렇게 두드리는 소리, 이들 하나하나가 모두 근본입니다. 이 근본은 의식으로 비추어 보거나 그렇지 않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못하거나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근본은 본래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분별하고 규정하면 오히려 근본을 잃어버립니다. 이것(탁자를 두드리며)이 확인되는 순간, ‘이거다, 저거다’라는 분별이 사라지고, 다만 하나가 됩니다. 이처럼 근본으로 돌아가면 생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의심과 무언가를 찾는 욕구가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우리가 생각에 의지하여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기 때문에 생각으로 이해하는 습관에 지배받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가 익숙해지고 명징해지면 명징해질수록 지금까지 익숙했던 생각의 힘이 점차 약해져갑니다. 그래서 오래오래 공부하시면서 늘 깨어있는 삶을 가꾸어 가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도 공부할 때 주의하셔야 하는 부분이 ‘말뜻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화두들 때 ‘마삼근(麻三斤)’의 말뜻을 따라가면 절대 안됩니다. 마, 삼, 근에 바로 깨어나야 합니다.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하든 ‘무(無)’라고 하든 생각으로 헤아리면 안됩니다.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꽉 차 있으면 법을 모르는 동자의 손짓에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공부는 상대에게 있는게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 귀에 들어오지 않으면 공부가 하나도 안됩니다. 발전이 없다는 걸 잘 아셔야 합니다.
“도가 뭡니까?”
“하늘이 푸릅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러분들도 말 따라 가면 안됩니다. 이 자리에서 깨어나야 하는 것이지 말 따라가서 하늘 쳐다보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강물이 흘러갑니다.”에 강물을 쳐다보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보고 있고 듣고 있는 이 자리는 한시도 여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딴데 가서 구할 것도 없고 여기 지금 본래부처는 우주삼라만상 천지에 가득 차 있는데 어디에서 따로 구할게 있느냐는 말입니다. 내 마음이나 여러분들 마음이 두 마음이 아닌데 이 육체를 나라고 보면 따로 분리가 되잖아요. 내 마음이나 여러분의 마음은 모두 이 마음속에서 다 일어나는 하나의 파도와 같은 거에요. 파도가 그대로 물입니다. 이 몸뚱아리 그대로 마음이고 부처니까 여러분들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같은 마음이지 다른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법을 깨달은 사람은 이심전심으로 법을 전해 주고받는다고 하는 거예요. 법이 따로 있어서 법을 전해주는게 아닌 것입니다. 법은 이렇게 삼라만상에 꽉 차 있는 거에요. 내가 법을 알았기 때문에 ‘저 사람도 이걸 알았구나’ 하면 내 마음과 저 사람 마음이 통하니 이심전심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해를 하면 안다는 견해가 생기기 때문에 바른 방법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해라도 되어야 나중에 견해가 열려 몰록 한 순간에 깨어날 수 있는 밑바탕은 될 수 있습니다.
須臾返照(수유반조) 勝却前空(승각전공)
잠깐이라도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는 뜻입니다.
잠깐이라도 돌이켜 비춰본다는 것은 공과 공 아님을 둘로 보지 않는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공과 불공이 다르지 않아 앞의 공함보다 뛰어나다는 의미입니다.
이름이 생기고 모양이 생기면 우리는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에 도를 놓치게 됩니다. 도와 이름과 모양이 본래 하나인 줄 알고 보면 이름 있는 그대로가 전부 도(道)이고 꽃 이대로가 도(道)이고 선풍기가 그대로 도(道)가 됩니다. 이름, 상, 분별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분별 이전 자리에 대한 안목이 열리지가 않는 겁니다.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스러운 가르침은 모두 둘로 분열된 세계가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경우 선악과를 따먹고 죄의식을 가졌다고 했는데, 선악과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둘로 분별하는 마음을 가졌다 이말이지요. 구원을 받으면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을 하죠? 분리된 세계에서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죄인이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로 간다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이 둘로 나뉘어 있다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노자는 이름 있음과 이름 없음이 하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힌두교의 기본철학은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입니다. 불교는 둘로 분열된 분별심을 둘 없는 본래심으로 회복시키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성도 후 불교가 인도전역으로 퍼져나가자 힌두교는 쇠퇴하였는데 불교의 불이중도사상을 벤치마킹 해서 불이일원론을 주장하게 됩니다. 인도의 유명한 명상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도 불이중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세계, 진리의 세계는 하나로 돌아가는 거에요. 분리된 데에서 분리를 여의고 하나로 돌아가는 것을 모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보통은 둘에서 하나로 가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면 선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하여 둘에서 하나로 가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고 둘 없는 진실을 바로 가리킵니다.
진리에서는 잠깐과 영원을 둘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잠깐이라고 하면 아주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영원이라고 하면 긴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라는 실체가 있다면 그렇게 볼 수 있겠지만 시간은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생각놀음에 속고 있습니다. 짧다 길다고 하는 그 생각마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유반조’란 생각의 속임수에서 벗어남을 말합니다.
그러니 전공(前空)보다 뛰어남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앞의 공이라 함은 목전공(目前空)을 말함인데 눈앞에 모든 것이 공하다 아니다 하는 분별이 남아 있는 공입니다. 내 자신이 공하다면 전공이니 후공(後空)이니 말할 사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있고 공이 있다는 것은 이미 양변에 떨어졌습니다. 상대성에 속은 것입니다. 그래서 잠깐이라도 돌이켜 비추어 보는 일이 자성을 바로 깨치는 일이라는 사실을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前空轉變(전공전변) 皆有妄見(개유망견)
앞의 공함이 전변함은(공을 앞세워 이리저리 바뀌어 감은)
모두 허망한 견해 때문이다.
오온개공 또는 색즉시공이라고 하듯이 보통 공이라는 용어가 세계의 진실을 나타내는 것처럼 이해됩니다. 그러나 공이라는 말을 ‘비어 있다’라는 뜻으로 이해하여 ‘비어 있지 않은 것’과 분별한다면, 공 역시 둘로 분별된 개념일 뿐입니다. 공과 색을 분별하여 이해한다면 헛된 견해입니다. 공이니 색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 분별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방편입니다. 색에 치우칠까봐 색은 공과 다르지 않다고 하고, 공에 치우칠까봐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고 하고, 색과 공이 따로 있다고 오해할까봐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두는 분별의 병을 치료하는 약 처방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공이 진실로 있고 색이 진실로 있다고 착각한다면, 이것은 당사자의 허망한 견해일 뿐입니다. 공과 색은 분별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가짜 이름일 뿐입니다. 이름이 공이고 이름이 색일 뿐, 색과 공은 독립적인 실체 즉 자성(自性)이 없습니다. 색과 공은 우리의 분별에 의하여 만들어진 연기법입니다. 색은 공에 의하여 색이 되고, 공은 색에 의하여 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름만 색과 공으로 나뉠 뿐, 색과 공은 따로 있는 그 무엇은 아닙니다.
분별을 벗어나는 약을 먹고자 한다면, 색이나 공에 대해서 어떤 분별도 하지 마십시오. 있다고도 하지 말고, 없다고도 하지 말고, 같다고도 하지 말고 다르다고도 하지 마십시오. 색이라고도 하지 말고, 공이라고도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무엇일까요? 이것(손을 들어 올리며)입니다.
법문을 할 때 여러분들이 이해가 될 경우 하나의 견해가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잘못하면 법상에 묶이는 꼴이 됩니다. 공이니 색이니 이야기하는 것은 분별을 치료하는 약으로서 어쩔 수 없이 처방을 내린 것이니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구한다는 것은 ‘나’와 ‘구할 대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라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 어떤 분별도 하시면 안됩니다. 전부 병입니다.
不用求眞(불용구진) 唯須息見(유수식견)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허망한 견해만 쉴지니라.
누구든지 진여본성을 깨치려 하기보단 허망한 견해만 쉬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쉬지를 못합니다. 쉬어야지 하는 것도 애쓰는 것이 됩니다. 생각이 멈춰진 그 자리 텅 비어 있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인 본래 우리 마음자리에 깨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쉬어지지 않을때 본래 자리를 헤아리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냥 있을 뿐이면 됩니다.
경봉스님께서는 촛불이 일렁이는 것을 보고 깨닫고는 다음과 같이 오도송을 남기셨습니다.
我是訪吾物物頭 目前卽現主人樓
呵呵逢着無疑惑 優鉢花光法界流
내가 나를 세상 모든 것에서 찾았는데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보이네
허허, 이제 만나게 되어서 의혹이 없으니 우담발화 빛이 온 세상에 흐르네
공부도 정진도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도는 구할 것도 닦을 것도 없다지만 도인이 많이 배출되어 선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당송시대의 수행풍토는 상당법문, 독참, 청익, 좌선, 조찬 법문, 만찬 법문 등 공부를 치열하게 하는 시대였습니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빛나듯 태양을 따로 찾으려 하지 말고 망상의 구름만 걷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파도를 없애려고 하지 말고 바람만 잠재우면 파도는 저절로 없어지듯이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쉬고 생각에 쫓아가지 말고 생각을 쉬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것을 생각에 쫓아가지 마라는 것인지 크게 궁금해하며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부처님과 같은 자성청정한 진여본성을 다 갖추고 있어서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여자성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망견이 앞을 가려서이니, 망견만 쉬어버리면 진여자성을 달리 구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참됨을 구한다는 것은 참됨을 모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참됨은 연기공성이요, 중도라 참됨이 따로 없기 때문에 그 이름을 참됨이라고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눈[目]을 찾아 나섰다고 합시다. 눈으로 눈을 볼 수가 없어서 눈이 없다고 눈을 찾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와서 거울 앞에 섰습니다. 자기 얼굴에 눈이 그냥 있었습니다. 본래 잃어버린 일이 없었으니 뒤늦게나마 착각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참됨이 아니라 이름하여 참됨이라 한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도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구하는 마음 즉, 욕망이 앞서면 참됨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부질없이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내 안에 완벽하게 갖추어진 그 세계,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임제 스님은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게 되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게 되고 도를 구하면 도를 잃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도 말을 따라가면 부처도 구하지 말아야 하고 조사도 구하지 말아야 하고 도 역시 구할 게 없다는 말로 잘못 듣게 됩니다.
이것은 생각의 세계를 벗어나 부처니 조사니 도라는 말의 흔적까지도 초월해서 양변을 떠난 중도연기를 바로 깨달아야한다고 고구정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됨을 구하려고 마음을 일으킬게 아니라 오직 일어나는 모든 망령된 견해만 쉬라고 합니다.
공부를 잘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