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숭배의 형태는 문화권마다 다종다양하다. 유교 문화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되어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형체인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이원적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죽은 조상의 혼과 백을 위하여 묘(廟)와 묘(墓)를 각각 세워 이원적으로 조상을 숭배하도록 하였다. 묘(廟)는 보이지 않는 영혼을 모시고 제사를 행하는 곳이고, 묘(墓)는 시신(屍身)인 백을 땅에 묻어 모시는 곳이다. 특히 유교에서는 묘(廟)에 죽은 조상의 혼을 신주(神主)로 받들어 제례를 올리며 후손들이 정신적 지주로 삼게 한다. 이러한 제례를 행하기 위하여 형성된 유교적 신전건축이 묘건축이다. 묘건축은 예제의 규정에 의하여 위치, 규모, 형식 등의 제한을 받는다.
종묘는 왕과 왕비, 그리고 사후(死後)에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왕실의 묘건축이다. 이 종묘는 사직단과 함께 전통 유교사회에서는 제례를 위한 국가적인 시설로서, 국가나 조정 자체를 의미할 정도로 국가의 존망과 연관되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종묘는 조상의 신주가 모셔진 곳이기 때문에 국가의 중요한 일이 있으면 먼저 종묘에 고한 다음 의논을 하여 시행하였다.
조선 왕조의 개국 공신인 정도전은 그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임금은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를 열면 반드시 종묘를 세운 다음 조상을 받드는 법이다. 이것은 자신의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것이니 후한 도리이다."고 하였는 데, 이와 같이 종묘는 조선왕조의 근간을 확립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제례용 건축으로서 그에 상응하는 독자적인 건축공간을 형성하였다.
도성내 종묘를 배치하는 원칙은 고대 중국의 도성계획제도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주(周) 왕실의 관직 제도와 공업 행정 및 영선(營繕) 제도를 기록한 『주례(周禮)』「동관(冬官) 고공기(考工記)」에는 주나라의 왕성(王城) 제도가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종묘는 도성내 좌측인 동쪽, 사직은 우측인 서쪽에 둔다[左廟右社]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주례에 나오는 종묘 사직의 도성내 배치 원칙에 의하여 조선시대 한양의 종묘는 궁궐인 경복궁에서 보아 동쪽인 지금의 훈정동에 자리잡게 되는데, 태조는 이미 개성에서 왕위에 즉위하면서 종묘를 경영하였다.
1-1. 한양 천도 이전의 종묘
조선왕조와 같이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건국한 왕조가 국가의 기틀을 세우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 건축물과 시설물은 종묘와 궁궐과 성곽이었다. 종묘는 왕실의 조종(祖宗)이 되는 신위를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곳이고, 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백성들에게 보이고 정교(政敎)를 펴는 곳이며,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는 곳으로서, 왕업의 기초는 이 세 가지에서부터 시작된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른 후 당초부터 종묘건설과 전도(奠都) 문제에 큰 관심을 갖는다. 태조는 즉위한지 12일째인 7월 28일 태조의 4대 조상에게 존호를 올려, 고조고(高祖考)는 목왕(穆王), 비(妃) 이씨(李氏)는 효비(孝妃), 증조고(曾祖考)는 익왕(翼王), 비 박씨(朴氏)는 정비(貞妃), 조고(祖考)는 도왕(度王), 비 박씨(朴氏)는 경비(敬妃)라 하였으며, 황고(皇考)는 환왕(桓王), 비 최씨(崔氏)는 의비(懿妃)라 한다. 그리고 즉위한지 26일만인 8월 13일에는 한양에 천도하기로 계획하고 이념(李恬)을 한양에 파견하여 고려 시대의 남경 이궁(離宮)을 수즙(修葺)케 하고, 수리가 끝나는대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발로 천도 계획을 유보한다.
그리하여 태조는 우선 조상의 신위를 모실 종묘를 개성에 짓기 위하여 같은 해 9월 서운관의 관원을 불러 종묘를 지을 땅을 묻는데, 서운관 관원이 “성(城) 안에는 좋은 땅이 없고, 고려 왕조의 종묘가 있던 옛터가 가장 좋습니다.”고 아뢴다. 이에 태조가 “망한 나라의 옛터를 어찌 다시 쓰겠는가.”고 하자, 판중추원사 남은(南誾)이 “그 옛 궁궐을 헐어버리고 그 옛 땅을 파내고 새 종묘를 고쳐 짓는다면 어찌 불가함이 있겠습니까?”고 아뢴다. 이에 왕은 10월에 대묘조성도감(大廟造成都監)을 설치하고,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헐고 그 땅위에 새 종묘를 짓도록 명한다. 태조가 조선 왕조를 건립하고 처음으로 종묘를 짓기 시작한 터는 고려 왕조의 종묘 자리였다.
이 때의 종묘건축 건립 공사는 상당히 진전되었는듯 한데, 태조는 종묘로 가서 종묘를 짓는 역사(役事)를 시찰하기도 하였다. 그 후 태조는 전도 후보지로 계룡산, 무악 등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1394년 8월 최종적으로 한양을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정하고, 이 해 10월 28일 고려의 옛 도읍지를 벗어나 천도를 한다.
1-2. 한양 천도와 종묘의 창건
태조는 천도를 한 후 도평의사사의 건의에 따라 신도읍지 한양에 종묘를 먼저 짓고, 궁실을 다음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벽을 쌓는 순서로 도성 건설을 하게 된다. 이러한 도성건설은 성리학적 원칙에 입각하여 예제에 의한 문물 제도를 반영한 도읍을 건설하여 도성의 격식을 갖추는 작업이었다.
먼저, 태조는 천도한 해 12월 3일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神)에게 제사를 올려 왕도의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고하게 한다. 고유문(告由文) 에는 새로 도읍지를 만드는 이유로 ‘송도의 터는 지기(地氣)가 오래 되어 쇠해 가고, 화산(華山)의 남쪽은 지세(地勢)가 좋고 모든 술법에 맞으니, 이곳에 나가서 새 도읍을 정하라.’고 하였다는 것과 ‘종묘는 선왕의 신령을 봉안하는 곳이요, 궁궐은 신민의 정사를 듣는 곳이니, 모두 안 지을 수 없는 것이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태조는 그 다음날 중추원부사 최원(崔遠)을 종묘를 세우려는 터에 보내서 오방지신(五方祗神)에게 제사지내고서 그 터를 개척하게 하였다. 그후 다음 해인 1395년 9월 29일에 종묘와 새 궁궐이 준공된다. 다음달인 윤9월 13일에는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를 정하게 하여, 다음해 1월 9일 백악산과 오방신(五方神)에게 도성개기제(都城開基祭)를 올리고 도성축성공사를 시작하여 2월 28일 49일간의 대역사를 1차적으로 끝맺는다. 이로서 종묘 건설부터 시작된 태조 당시의 도성건설은 궁궐, 성곽의 준공과 함께 일단 매듭을 짓게 되고, 그 후 태종과 세종 때 도성건설은 더 진행되어 완비된다.
준공된 대묘(大廟), 즉 종묘의 건축 규묘와 형식을 보면, 가장 중요한 정전인 대실(大室)은 7칸인데, 건물, 즉 당(堂)은 내부를 한 공간으로 트이게 하고, 그 속에 신주를 모시는 감실(龕室)은 따로 있게 한 동당이실(同堂異室) 형식이었다. 대실 안에는 석실(石室) 5칸을 만들고. 좌우에는 익랑(翼廊)을 각각 2칸씩 이어 지었으며, 그 외에 별도로 공신당(功臣堂)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 규모의 건물을 지었고, 빙둘러 담장을 쌓았다. 그리고 담장 밖에는 신주(神廚) 7칸, 향관청(享官廳) 5칸, 좌우 행랑(行廊)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齋宮) 5칸을 지었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날을 받아 즉위 4년인 1395년 윤9월 1일 개성으로 부터 조상의 신위를 옮겨 모실 종묘이안도감(宗廟移安都監)을 설치한다. 그리고 같은 달 28일에는 백관이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고 반송정(盤松亭)에 나아가 신주를 봉영(奉迎)하였으며, 판문하부사 권중화(權仲和)에게 명하여 이안제(移安祭)를 행하게 하였다. 그후 태조는 다음달인 10월 5일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가 제례를 행하고, 중외(中外)의 조하(朝賀)를 받고 국정 쇄신의 내용을 담은 교서를 내린다. 이 때 종묘에 봉안한 신위는 태조의 4대조인 목왕(穆王)과 효비(孝妃), 익왕(翼王)과 정비(貞妃), 도왕(度王)과 경비(敬妃), 환왕(桓王)과 의비(懿妃)의 4대 신주이다.
한양천도 이후 조정에서는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태조가 정종에게 왕위를 양위하게 되는 등 정국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 후 정종은 여러 가지 어수선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자 새 도읍지인 한양을 피(避)하여야 한다는 건의를 받고, 즉위 반년만에 한양을 버리고 옛 도읍지인 개성으로 환도하게 된다. 그러나 개성은 형식상 일시 피방(避方)한 곳일 뿐, 도읍지로서 확정된 곳은 아니었다. 도읍지의 근간인 종묘와 사직은 아직 한양에 있었다. 하지만 왕이 친히 한양으로 가서 제향을 하기 힘들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정종은 개성에 새로 종묘를 짓고 제향을 올릴 구상을 하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그만두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 개성에서는 다시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정종은 1400년 11월 왕위를 태종에게 양위한다. 왕위에 즉위한 태종은 적극적으로 한양 재천도 문제를 꺼내어 결국 종묘와 사직이 있는 한양으로 재천도하는 의지를 실현시킨다.
1-3. 한양 재천도와 종묘의 정비
태조 때 한양에 건립된 종묘는 태종, 세종 대에 이르러 건축 형식이 점점 정립되어 정착하게 된다. 한양으로 재천도한 태종은 한양이 조선 왕조의 기반이 되도록 도읍지가 갖추어야 할 많은 시설물과 건축물을 새로 조영하고 정비하는 데, 종묘 건축도 포함된다.
먼저, 태종은 종묘 주변의 지세를 보완케 한다. 현재의 종묘를 보면 남북이 긴 타원형 비슷하게 생긴 지형에 지세를 따라 언덕 자락에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고, 둘레는 얕으막한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형세는 창덕궁의 주산인 북쪽의 응봉에서 남으로 흘러 나온 한가닥 산줄기가 종묘까지 뻗어 내려와서 형성된 것인데, 남쪽의 허(虛)한 부분을 인공으로 가산(假山)을 조성하여 보(補)하게 된다. 가산은 태조 때(1398년) 1차적으로 조성하는 일이 이루어지지만, 1409년 태종이 다시 종묘 남쪽에 가산을 만들고, 또 정문 안쪽으로는 지당(池塘)을 파서 주변지세가 더욱 더 꽉 짜여져서 그 안이 아늑하게 감싸는 기운이 들게 만든다.
다음으로, 현재의 종묘 정전 건물을 보면 신위를 모신 감실(龕室)이 있는 몸채 건물이 있고, 그 양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와 마치 감실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서월랑(東西月廊)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건축 형식은 태종때 만들어져서 지금 보는 종묘 건축의 기본 틀이 된다. 태종은 10년(1410) 4월 1일 "종묘에 제사를 행하는 날에 만일 비와 눈이 오는 날을 당하면 뜰 가운데에 비를 가릴 곳이 없어서 옷을 적시고 용의(容儀)를 잃게 되니, 두렵건대, 정성(精誠)과 공경(恭敬)이 지극하지 못하고 신명(神明)과 사람이 편안하지 못할 것 같다. 마땅히 제후(諸侯)의 제의(祭儀)를 상고"하여 배위(拜位)하는 공간을 마련케 한다. 그리하여 같은 해 5월 의정부(議政府)에 명하여 종묘의 동·서상(東西廂)을 짓는 것의 편부(便否)를 의논케 하여 건립 당시에 없던 것을 지금과 같은 건축 형식으로 짓는다. 이러한 건축 형식, 즉 "동서 이방(東西耳房)에 허청(虛廳)을 짓는 것은 [중국의] 종묘 제도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과 다르게 '조선의 법'이 되도록 새롭게 고안한 종묘 건축 형식이다.
그 다음으로, 태종은 종묘의 담 바깥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공신당을 종묘 담 안 묘정(廟庭) 아래, 즉 동쪽 계단 아래로 옮기고, 또 제기고(祭器庫)와 재생방(宰牲房) 등 부속건물을 지으므로서 종묘는 제례 기능상의 정비를 하게 된다. 또 태종은 향관이 재계하는 처소를 재전(齋殿) 동남쪽 낮은 곳으로 옮기게 하여 건축물 상호간의 위계를 확립한다. 그리고 태종은 조선초 종묘를 건립할 당시 고제(古制)를 상고하여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종묘 건축제도는 전조(前朝) 고려의 태묘 제도(太廟制度)를 참고하도록 하고 또 종묘 건축도 수리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종묘는 태종 때 담장과 하마비가 새로 세워지며 종묘건축의 격식을 갖추게 된다. 태종은 1412년(태종 12년) 11월 예조의 건의로 종묘와 궐문(闕門)을 지나는 자는 모두 하마(下馬)하도록 항식(恒式)을 삼도록 하였다. 이에 1413년 1월 21일 임금의 허가를 받아 종묘 및 궐문 입구에 '대소 관리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大小官吏過此者皆下馬)'라는 푯말(標木)을 세운다. 푯말은 후일(後日) 돌로 만든 석비(石碑)로 바뀌었다. 지금의 종묘 하마비는 1663년(현종 4년) 10월에 세운 것이다.
1-4. 종묘건축제도의 정착과 종묘의 증축
태종 때 정비 된 종묘건축은 세종때에 이르러 종묘건축은 현재 보는 것과 같이 정전 건물과 영녕전 건물이 있는 종묘건축제도로 완비된다.
창건 당시 종묘는 오묘제(五廟制)를 따르기 위한 건축을 세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본래 5묘란 조선왕조의 초대 임금인 태조의 묘와 국왕의 선대 4조의 묘를 합쳐서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봉안해야 할 왕의 신위 수가 늘어남에 따라 감실에 대한 문제는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세종 원년(1419)에 이르러 2대왕인 정종이 승하하고 그의 신위를 종묘에 모실 때가 되자 이미 종묘에 모셔져 있는 태조의 4대조(목왕·익왕·도왕·환왕)와 태조의 신위, 그리고 정종의 신위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 문제가 거론되게 된다. 정종의 신위를 종묘에 새로 모시게 되면 목왕의 신위는 정전에 모실 수 없게 된다. 이때 의논을 거듭하여, "그 신주를 묻어 버린다는 것은 정말 차마할 수 없는 일이며, 또한 간직할 만한 곳도 없다."고 의견을 모으고, 중국 송(宋)나라에서 따로 별묘(別廟)인 사조전(四祖殿)을 세워 사조(四祖)를 모시는 예를 채택하여, 종묘, 즉 지금의 정전 서쪽 바깥에 별묘를 세워 목왕의 신위를 옮겨 모시는 것으로 결정한다. 이것이 영녕전(永寧殿)을 건립하게 된 근거이다. 영녕전의 '영녕(永寧)'은 "조종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별묘인 영녕전은 조묘(爨廟)라고도 한다. 세종 3년(1421) 10월 건립 당시 영녕전의 규모는 태실(太室) 4칸, 양옆 익실(翼室) 각 1칸을 합하여 모두 6칸이었다. 영녕전이 완공되자 그 해 12월 목왕의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고[爨遷], 종묘에는 익왕의 신위를 제1실로 올려 모시고 도왕 이하의 신위도 차례로 위로 옮겨 모시게 된다.
영녕전 건립으로 조선왕조의 종묘건축제도는 종묘와 별묘를 두게되는 제도로 기본적으로 완비를 보게되고 세월이 흘러 봉안해야 할 신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증축을 하게되고 또 신위를 옮겨 모시게 된다. 이러한 제도는 옛 제도에 기반을 두고 자기 것을 확립하여 간 조선왕조의 종묘건축제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정전과 영녕전을 합하여 종묘라고 부르지만, 종묘는 원래 지금의 정전을 말하며, 별묘인 영녕전과 달랐다. 정전이라고 부른 것은 후대에 영녕전과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다.
영녕전과 정전이 서로 다른 점 몇 가지를 들면, 우선 제례에서 보면 영녕전 제례는 정전보다 한단계 낮게 행해졌다. 그리고 건축규모 면에서 정전의 건축 영역이 영녕전 보다 넓다. 또 건축 형식면에서 영녕전은 4대조를 모신 부분만 정전 규모의 크기와 높이이고, 옆 익실은 정전보다 큐모가 작다. 이외에도 영녕전에는 정전에 있는 공신당과 칠사당이 없다. 목조, 도조, 환조, 익조는 추존된 왕이므로 신하가 없는데, 영녕전에 모시게 되는 이후의 왕도 도리상 신하를 데리고 들어 갈 수가 없는 이유가 작용한 것이다.
종묘에 별묘인 영녕전이 세워지고 세월이 흘러 정전에 모셨던 태조의 4대조와 정종(2대)을 영녕전으로 이안하여 모시게 되지만, 정전에는 4대를 넘지 않은 신위들이 기존 감실에 모두 차있게 되어 연산군 때(1496년)에는 성종의 신위를 봉안할 감실의 부족을 직면하게 된다. 그리하여 종묘 정전의 증축 문제가 거론되지만, 결국 문종의 신주를 종묘 익실에 봉안하고, 정종의 신주를 영녕전 익랑인 협실에 봉안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으게 되고 증축 논의는 더이상 거론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종묘 정전의 감실 부족과 종묘제도의 미정착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심각하여졌다.
마침내 명종 대에 이르러 종묘를 증축하게 된다. 이 당시 종묘 정전에는 제1칸에 태조(1대), 제2칸에 태종(3대), 제3칸에 세종(4대), 제4칸에 세조(7대), 제5칸에 덕종(추존), 제6칸에 예종(8대), 제7칸에 성종(9대)의 신위가, 서협실에 문종(5대)의 신위가 모셔져 있었다. 불천지위(不遷之位)로 결정된 태종과 세종의 신위를 제외하면 정전에는 태조를 포함하여 다섯 신위가 모셔져 있는 셈이 된다. 그후 명종 즉위년(1545)에 중종(11대)의 신위를 정전에 봉안하게 되어, 불천지위인 태종과 세종의 신위를 움직일 수 없어 세조 신위를 정전 협실이나 영녕전으로 옮겨 모실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명종으로 이어지는 가계는 세조로 부터 이어지는 가계여서(세조-덕종-성종-중종-명종), 세조를 협실이나 영녕전으로 보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종묘 정전은 그 이듬해에 4칸이 증축되어 그 규모가 모두 11칸으로 된다. 그리하여 서협실에 모셨던 문종의 신위도 모셔오고, 중종의 신위도 모시면서 감실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이는 종묘가 창건된후 약 150년이 지나서 있게 된 첫번째 종묘 증축이다.
1-5. 임진왜란과 종묘의 중건 및 증축
조선 전기에 어느 정도 정착된 종묘는 선조 25년(1592) 4월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크게 수난을 겪게 된다. 종묘에 모셨던 신위는 평양을 향하여 피난길에 오른 왕, 왕자와 함께 행방을 하게 되고, 종묘 건물은 불에 타게 된다. 그후 이듬해가 되어 왜군이 남으로 퇴각하게 되자, 왕은 10월에 환도하여 정능동(貞陵洞)의 옛 월산대군 집(지금의 덕수궁)을 행궁(行宮)으로 삼고,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임시 종묘로 삼는다. 그후 정유재란으로 신주를 다시 옮기는 국가적 체면이 크게 손상되는 일을 겪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국가의 역사와 뿌리를 상징하는 종묘를 중건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계속된다. 선조 36년(1603) 2월부터 종묘 건립에 대한 건의가 본격적으로 있게 되고, 다음해에는 종묘를 건립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선조 37년 10월 10일 관상감(觀象監)이 종묘 중건에 대한 성조운(成造運)을 간택하게 되는데, 갑진·을사·병오·정미년은 불길(不吉)하고, 무신·경술년은 길(吉)하다고 나온다. 이에 따라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되지 못하다가 마침내 선조 41년(1608, 무신년) 1월에 종묘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5개월 후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하게 된다.
이 때 종묘를 중건하면서 중국의 고제(古制)를 따라느냐, 임진왜란 전의 구제(舊制)를 따르느냐를 두고 논의가 있었는데, 결국 구제를 따라 종묘 정전은 11칸 규모로 이루어졌고, 영녕전도 정전 4칸, 좌우 협실 각 3칸, 모두 10칸 규모로 중건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종묘가 중건되자 같은 해 6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는 종묘로 다시 옮겨 모셔지게 되고, 다음달인 7월에는 종묘에 이안제가 거행되었다.
광해군 즉위년에 중건된 종묘는 그 후 몇차례 증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정착하게 된다. 1차는 현종 8년(1667)의 영녕전 좌우 협실 각 1칸 증축, 2차는 영조 2년(1726)의 정전 4칸 증축, 3차는 헌종 2년(1836)의 정전 4칸, 영녕전 협실 4칸 증축이다.
현종 때의 영녕전 증축은 현종 4년 3월 영녕전 서쪽 익실(翼室)의 기둥 하나가 기울어져 있어 그것을 수리하면서 영녕전 수리 도감(永寧殿修理都監)에서 개축하기로 건의하여 결정하면서 이루어진다. 개축 방법을 두고 신하들 사이에 역대 종묘제도가 다시 검토되다가 영녕전 정전은 그대로 4대조만을 모시는 것으로 하고, "좌우의 익실을 철거한 뒤에 본전(本殿)의 제도대로 동서에 각각 3칸씩 덧붙여 모두 10칸을 만들고서, 서쪽을 상(上)으로 하여 사조(四祖) 이하를 차례로 봉안"하는 것으로 하여 구제(舊制)를 바꾸지 않고 거기에 영녕전에서 옮겨온 신위를 모시는 것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이 때의 영녕전 증축공사는 가뭄이 심하고 농사철이 닥치게 되어 공사를 연기하게 되고, 마침내 일관이 길하다고 말한 현종 8년(1667)에 시작하게 된다.
현종 8년 3월에는 영녕전 중건으로 인하여 신위를 임시로 이안할 경덕궁(慶德宮) 수리를 착수하고, 이 해 윤4월 22일에는 영녕전의 신위를 경덕궁으로 옮겨 안치하고 영녕전 건물을 해체한다. 그 후 5월 6일 영녕전 증건 공역을 시작하여 5월 30일 입주(立柱) 상량(上樑)하고 7월 4일 영녕전을 증건하는 역사(役事)가 끝난다. 그후 7월 6일에는 영녕전 각실(各室)의 신주를 경덕궁으로부터 차례로 봉환(奉還)한다. 이 때의 증건 규모는 기존 익실을 헐고 새로 증축한 동서 익실 각 4칸이다. 영녕전은 익실 8칸의 증축으로 정전 4칸과 함께 모두 12칸이 된다. 그리고 이 때 증건을 하면서 좌우 익실 뒤로도 툇칸을 만들고 거기에 감실을 설치하여 정전과 같은 건축형식으로 한 것으로 판단된다.
2차 증축은 영조 때 이루어진 정전 건물의 증축이다. 광해군 때 임진왜란 전의 규모인 11칸으로 중건된 종묘 정전은 약 120년이 지난 영조 때에 이르러 종묘 정전 11칸 중에는 7실에 불천지위로 된 신위가 모셔져 있데 되어 다시 감실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조 2년에 기존 건물은 그냥두고 동쪽으로 4칸을 더 건물을 첨가하는 방법으로 증축을 하여 모두 15칸 규모의 건물로 된다. 처음에는 3칸을 늘려 14칸으로 늘리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몇 차례 논의 끝에 4칸을 증설하기로 결정하여 양수(陽數)인 15칸으로 증축하였다. 공사는 영조 2년 정월 12일 태묘안 11실의 신위를 두 차례에 나누어 경덕궁(慶德宮)에 봉안하고, 다음날 부터 동쪽으로 4칸을 늘려 지었다. 그후 같은 해 4월 3일 태묘(太廟)의 개수(改修)를 마치고 경덕궁(慶德宮)으로부터 11실(室)의 신여(神轝)를 받들어 다시 봉안(奉安)하기를 의절(儀節)과 같이 하였다. 동쪽으로 첨건하여 증축함에 따라 제기고, 동월랑, 신문, 동문 등 기존의 건물들도 모두 함께 동쪽으로 옮겨 지었다.
그후 헌종때 이루어진 3차 증축은 종묘 정전 및 영녕전 건물 모두를 하게 된다. 이 때 이루어진 증축은 종묘의 마지막 증축으로서 그 후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현재 규모의 종묘로 존속하게 된다.
헌종 때의 증축은 헌종 1년(1835) 6월 논의되기 시작하여 같은 해 10월 종묘영녕전증수도감을 설치하여 시행하게 된다. 헌종 2년(1836) 정월 10일 종묘를 증수(增修)하기 위하여 종묘 정전 각 실(室)의 신위를 경희궁의 광명전(光明殿)과 장락전(長樂殿)에, 영녕전의 신위를 위선당(爲善堂), 태녕전(泰寧殿), 자정전(資政殿)에 나누어 봉안하고 공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3월 25일 증건 공역을 마치고 27일에는 신위를 이안한다. 증건 규모는 정전은 4칸을 늘려 지금의 규모인 19칸으로, 영녕전은 동서 협실 각 2칸을 늘려 현재의 규모인 정전 4칸, 동서 협실 각 6칸으로 된다.정전의 증건으로 정전 신문, 동문, 어숙실, 공신당, 수복방, 전사청 등은 영조 때 증건과 마찬가지로 다시 동쪽으로 이건된다. 현종 때의 종묘 증축은 조선 왕조의 멸망과 함께 더 증축이 없게 된다.
年 度
宗廟 正殿(규모)
永寧殿(규모)
비 고
태조 4년(1395)
정전 7칸 좌우협실 각 2칸
창건
세종 3년(1421)
정전 4칸 좌우협실 각 1
창건
명종 원년(1546)
정전 11칸 좌우협실 각 2칸
정전 태실 4칸 첨건(添建)
광해군 즉위년(1608)
정전 11칸 좌우협실 각 2칸
정전 4칸 좌우협실 각 3칸
중건(선조 41년 공사 시작)
현종 8년(1667)
정전 4칸 좌우협실 각 4칸
기존 좌우협실 훼철후 증축 좌우협실에 뒷 툇칸을 늘림
영조 2년(1726)
정전 15칸 좌우협실 각 2칸
정전 동쪽으로 4칸 첨건
헌종 2년(1836)
정전 19칸 좌우협실 각 2칸
정전 4칸 좌우협실 각 6칸
정전은 동쪽으로 4칸 첨건 영녕전은 동서로 각각 2칸 첨건 현재 규모로 됨
2. 종묘 건축의 특성과 건축미
2-1. 종묘의 건물
종묘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제례용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좌우대칭적인 배치를 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지세에 순응하여 어울리게 종묘 제례에 필요한 건축믈들을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건물을 구성하는 축(軸)을 통일되시키지 않고 각 건물별 개별 축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예제의 적용을 받아 종묘가 건립되지만 중국과 배치 내용은 다르다. 이는 예제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고 하기 보다는 정약용의 경세유표에서도 나타나듯이 이해의 과정은 같으나 다만 실행에 있어 차이가 나타난다. 종묘건축제도의 한국적 수용으로 해석해야 할 부분이다.
종묘의 주출입구는 외대문(外大門)인 정문(正門)이다.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삼문형식으로 가구(架構)는 오량가(五梁架), 홑처마, 연등천장을 하였고, 원주(圓柱) 위에 2익공을 구성하였다. 기단은 현재 단벌의 장대석이나, 원래 기단이 높았고, 전면 중앙에 계단이 있었는데, 일제시대 도로조성으로 도로 면이 높아지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정문은 창엽문(蒼葉門)이라고도 한다.
담으로 둘러싸인 넓은 대지의 남쪽 끝에 자리한 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정전에 이르는 주도로가 왼쪽인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나 있고, 오른 쪽으로 난 첫번 째 갈림길을 따라 지당(池塘)을 지나 들어가면 망묘루(望廟樓), 향대청(香大廳), 공민왕 신당(恭慱王神堂)이 있는 곳에 닿는다.
망묘루는 제향(祭享)때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先王)과 종묘 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부쳐진 이름인 데, 건물 중 1칸이 누마루로 되어 있다. 현재는 종묘사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향대청은 종묘에 사용하는 향축폐(香祝幣)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祭享)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설되었다. 공민왕 신당은 망묘루 동쪽에 별당으로 고려 31대왕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 창건시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신당 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한자리에 있는 영정(影幀)과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되어 있다. 신당의 정식 명칭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이다.
이와는 별도로 외대문에서 시작되어 북으로 곧장 나 있는 주도로는 거칠고 널찍한 돌이 높낮이가 다르게, 가운데가 약간 볼록하게 철(凸)자형으로 3조의 길로 되어 있다. 가운데 약간 높은 길은 신향로(神香路)이고, 동측의 것은 어로(御路), 서측의 것은 세자로(世子路)이다. 신향로는 정전 신문을 통해 묘정 월대에 난 신로(神路)에 이어지고, 어로와 세자로는 어숙실(御肅室) 일곽에 닿는다.
어숙실 일곽은 '재계(齋戒)하는 날에는 그 거처(居處)를 생각한다'는 말에 따라, 임금이 목욕하고 재계하며 의복을 정재하여 세자와 헌관과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다. 제향은 임금이 친히 올리는 친행(親行)과 세자나 대신이 임금을 대행하여 올리는 섭행(攝行)이 있다. 어숙실 일곽은 둘레담과 정문, 동협문, 서협문으로 싸여 뜰을 중심으로 북, 동, 서쪽에 건물이 있다. 어숙실은 재궁(齋宮), 어재실(御齋室)로도 부르는데, 태조 4년 정전과 함께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광해군 즉위년(1608)에 중건되어 정전이 증축될 때 마다 이건 되었다.
어숙실 서북측으로 종묘 정전이 위치하는데, 제향 때 제관은 어숙실 서협문을 지나 정전 동문을 통해서 정전 감실에 이르게 되어 있다. 정전 일곽은 네모나게 담장으로 둘러 싸여 있고, 묘정을 중심으로 남쪽 담장 중앙에 신문, 동서쪽에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과 악공과 종사원이 출입하는 서문이 각각 있다.
신문을 들어서면 동서 109m, 남북 69m가 되는 넓은 묘정 월대(月臺)가 펼쳐 있다. 이 공간은 제관들이 제사를 드릴 때 대기하는 공간으로, 헌가가 연주되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묘정 월대는 단(壇)의 일종인데, 지상으로 부터 단을 높여 다른 공간과 성격이 다르게, 천상으로 이어지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궁궐의 정전 앞에 돌로 깔고 단을 올리지 않은 것과 대조가 된다. 묘정 월대의 중앙에는 남북을 잇는 신로(神路)가 신문에서 상월대 아래까지 연결되어 있다. 신로와 접한 동쪽 한 곳에는 전(塼)을 깐 방석 모양의 부갈위판(簿喝位版)을 두었고 동문 밖과 동월랑 남쪽 아래 묘정에는 사각형으로 된 전하판위(殿下版位)와 세자판위(世子版位)가 각각 자리를 달리 하며 위치하고 있다. 묘정 월대는 장대석으로 쌓아 끝을 두르고, 그 상면은 박석(薄石)을 깔았고, 신로는 전(塼)을 깔았으며, 곳곳에 차일(遮日) 고리가 박혀 있다. 현종(顯宗) 8년 간행된 <<宗廟儀軌>>의 종묘전도(宗廟全圖)에는 宗廟內墻周回東西七十步南北八十步 永寧殿內墻周回東西五十六步南北五十二步 外墻周回一千三百三十一步라고 규모를 적고 있다.
상월대 위 기단에는 길이가 101m인 정전 건물이 서 있는데, 정전은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감실 19칸, 그 좌우의 협실 각 3칸, 그리고 협실 양끝에서 남으로 직각으로 赣여 나온 동서 월랑 5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묘정 월대 남쪽 아래에는 동서에 공신당(功臣堂)과 칠사당(七祀堂)이 각각 서 있고, 서북쪽 뒤에는 제향후 축(祝)과 폐(弊)를 불사르는 망료위(望燎位)라고도 하는 감(坎)이 있고, 동문 북으로 수복방(守僕房)이, 담장 밖 서북쪽으로는 전사청(典祀廳)과 제정(祭井)이 있다. 그리고 정전 서남측으로는 악공청(樂工廳)이 있고, 정전 서측 북으로는 영녕전 일곽이 있다.
정전 전면(前面)은 각 칸마다 두짝의 판문(板門)을 달았으며 문하방 좌우에는 신방목이 있고, 신방목 머리에는 삼태극이 조각되어 있다. 문 외부에는 발을 칠 수 있게 되어 있어, 제향 때에 판문을 열고 발을 널어 뜨리고 제의를 행한다. 판문 내부 좌우에는 의장(儀仗)을 벌려 세워 두었는데 용선(龍扇)은 서전행(西前行), 용재(龍蓋)는 서후행(西後行), 봉선(鳳扇)은 동전행(東前行), 봉개(鳳蓋)는 동후행(東後行)에 세우는 것으로 모두 황색을 하고 있다. 후퇴칸에는 감실이 설치되었는데, 감실은 각 주칸이 일실로 구성되고, 이들 사이는 벽이 아닌 발을 늘어뜨려 차단하고 있다. 감실에는 신주가 서측에 왕, 동측에 왕비의 위치로 봉안되어 있고, 감실 전면에는 신탑(神榻)이 있어 제향때 신주를 모셔두는 곳이다.
공신당은 역대 왕의 배향 공신의 83 신위를 모신 곳으로, 종묘 정전이 증축됨에 따라 이와 함께 동쪽으로 이설(移設)되며 증축되어 지금은 16칸의 긴 건물이 되었다. 공신당 전면 중앙부 3칸에는 판문이 설치되어 있고, 나머지 칸에는 벽체를 마감하여, 그 상부에 광창(光窓)을 설치하였다. 나머지 3면은 벽은 전벽돌로 감싸여 있다.
칠사당은 칠사(七祀)인 봄의 사명(司命)과 호(戶), 여름의 조(爬), 가을의 문(門)과 려(崲), 겨울의 행(行)과 중류(中廡) 위패를 북쪽을 윗자리로 하여 건물 내부에 모시고 제사하던 사당인데, 칠사는 사명(司命), 호(戶), 조(爬), 국문(國門), 태려(泰崲), 국행(國行), 중류(中廡)라고도 한다. 칠사당의 건축 연대는 정확히 모르고, 다만 공신당 중건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조영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측면과 후면은 전벽돌로 벽을 쌓았고, 전면 중앙 칸에는 판문을 설치하였다.
수복방은 제사를 담당하는 노비와 관원들이 거처하던 방이었고, 전사청은 종묘제사에 사용하는 제수(祭需)의 진찬 준비를 하던 곳으로, 뜰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로 건물을 ꁁ자형(口字形)으로 배치하였다. 수복방 전면에는 제사에 쓰일 제물을 심사하는 찬막단(饌幕壇)이 있고, 찬막단 동편에는 희생대(犧牲臺)가 있다.
악공청은 종묘제례때 주악(奏樂)하는 악공(樂工)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대기하던 곳이다. 지금은 개수하여 정면 6칸, 측면 2칸을 이루는 기둥만 남아 있을 뿐 본래의 내부 구조는 찾아 볼 수 없다. 기둥은 모를 죽여 8각, 16각 등을 하고 있다.
별묘인 영녕전은 네모나게 담장으로 쌓아 의례를 행할 수 있는 묘정공간을 형성하고, 남쪽 담장에는 신문을, 동쪽과 서쪽 담장에는 각각 동문과 서문을 두어 제례시 통로를 마련하고 있다. 영녕전도 정전과 마찬가지로 묘정 월대에 신로가 나 잇는 구성을 하고 있는데, 다만 종묘 정전에 비하여 규모가 조금 작다. 영녕전 건물은 중앙에 정전 4칸, 좌우에 각각 협실 6칸씩을 두어 모두 16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좌우 협실 양끝에 직각으로 덧붙여서 동월랑과 서월랑 5칸이 있다. 내부 공간 구성과 이용은 종묘 정전과 기본적으로 같다. 영녕전 서남쪽으로는 영녕전 악공청이 있다.
2-2. 종묘건축의 구조와 감실
종묘 정전과 영녕전은 묘당건축(廟堂建築)의 특성에 따라 전면에 툇칸이 나 있고, 나머지 세 면은 벽체로 감싸 내부를 어둠의 공간으로 만들어 신성함을 높이고 있다. 툇칸은 앞쪽으로 벽체가 없이 기둥으로만 구성되어 묘정으로 트여있고, 뒤쪽으로는 벽체에 난 문을 통하여 신위가 모셔진 내부로 출입한다. 문은 각 칸마다 두짝씩 달렸는데, 그 맞춤이 정연하지 않고 한쪽 문짝이 약간 뒤틀려 있다. 혼백이 드나들게 하기 위함인 듯 하다. 전면 툇칸을 개방시킨 것은 제례 절차의 필요성에 따라 취해진 평면형식으로, 제례시 햇빛과 눈비를 가려주기 위함이다. 내부는 전체를 벽체로 칸막이를 하지 않고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으며 각 칸마다 신주를 모신 감실을 두었다. 건물, 즉 당(堂)은 같으나 실(室)은 달리하는 '동당이실제도(同堂異室制度)'이다. 정면으로 난 판문쪽으로는 각 칸마다 좌우에 의장구(儀仗具)를 세워 두었고, 내부 뒤쪽 북벽 툇칸으로는 제상과 감실이 기둥 사이 각 칸마다 배설되어 있다.
종묘 정전 감실은 서측을 상(上)으로 하여[以西爲上] 제1실인 서쪽 첫 번째 칸에 태조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동쪽으로 차례로 태종(3대), 세종(4대), 세조(7대), 성종(9대), 중종(11대), 선조(14대), 인조(16대), 효종(17대), 현종(18대), 숙종(19대), 영조(21대), 정조(22대), 순조(23대), 문조(추존), 헌종(24대), 철종(25대), 고종(26대), 순종(27대)과 각왕의 비(妃)를 합쳐 모두 49위의 신위가 19감실에 모셔져 있다. 영녕전 역시 중앙의 정전과 좌우 협실 모두 서측을 상으로 하여, 정전에는 목왕, 익왕, 도왕, 환왕의 순으로, 서협실에는 정종(2대), 문종(5대), 단종(6대), 덕종(추존), 예종(8대), 인종(12대), 동협실에는 명종(13대), 원종(추존), 경종(20대), 진종(추존), 장조(추존), 영왕(英王)과 각왕의 비를 합쳐 모두 34위의 신위가 16감실에 모셔져 있다. 종묘에는 한때 폐위되었다가 숙종때 복위된 단종의 신위는 영녕전에 모셔져 있는 반면,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정전과 영녕전 모두에서 제외되었다.
'신주를 만드는 것은 신으로 하여금 의지할 곳이 있게 하는 것이다.'고 한다. 신주가 없으면 신이 의지할 곳이 없다. 제사를 지내자면 반드시 신주가 있어야 하고, 신주가 있다면 반드시 사당인 묘(廟)가 있어야 한다. 종묘의 경우, 신주를 모신 신실, 즉 감실 전면 문미(門梶) 상부에는 운궁(雲宮)을 설치하였고, 감실에는 중앙에 신탑(神榻), 그 뒤에 신주장(神主欌), 그 좌·우에 각각 책·보장(冊寶欌)을 배설하였다. 감실이 천상(天上)에 있음을 상징하기 의하여 감실 전면(前面)은 운궁으로 만들었다. 현재 감실 주위에는 사방과 천정으로 황색의 망건장(網巾帳)을 쳤으며, 전면에는 따로 황색의 외면장(外面帳)을 쳐서 마치 생전의 침상과 같이 꾸몄다. 감실 자체가 오행(五行)의 중심이라는 사고에 따라 황색으로 하고 있다. 신주장(神主欌)에는 서측에 왕, 동측에 왕비의 신주를 모셨는데, 신주는 『주례(周禮)』에 따라 밤나무[栗木]로 만들었다. 그리고 왕의 신위에는 흰 색의 주(紬)를 쓰고 왕비의 신위에는 푸른 색의 저(苧)를 썼다. 또 각 신위 독의 좌판(坐板)은 위에 요[褥]를 깔고 요 위에 자리가 있다. 신주장 좌우의 책·보장(冊寶欌)에는 죽책(竹冊), 금책(金冊), 금보(金寶), 옥보(玉寶) 등을 두었다. 각 감실 사이는 벽으로 막지 않고 발을 양면에 늘여 놓아 경계를 삼았다. 문미와 신주장 상부의 개(盖)에는 극도로 엄격하고 단아한 단청(丹靑)을 베풀었다.
2-3. 종묘건축의 특성과 건축미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례를 올린 곳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가장 정제(整齊)되고, 장엄(莊嚴)하고, 신성(神聖)한 건물중 하나이다. 그리고 모실 신위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기존 건물 측면에 이어 증축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 다른 건물들과 구별되는 독특하고 고유한 건축 격식과 공간 형식을 갖게 되었다.
종묘와 같은 제례건축에서 중시되는 것은 첫째는 모셔진 신위를 위한 장소와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고, 둘째는 제례 예법에 맞는 건축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고, 셋째는 제례를 행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머뭄의 공간과 오가는 움직임의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조성된 정전과 영녕전 공간은 극히 정밀(靜謐)하고 엄정(嚴正)하여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 담으로 둘러싸인 넓은 묘정 공간을 들어서면 그러한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종묘건축의 중심인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진 감실까지 제례자가 접근하기 위해서는 외부 - 담 - 정문 - 어로 - 어숙실 - 동문 - 묘정 - 툇칸 - 실내 어둠의 공간 - 감실 등 여러 겹의 통로와 영역을 지나 도달해야 하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서 제관은 제친 걸음으로 걸어도 안되지만 돌아가도 안된다. 이를 반영하듯 어로에는 거친 박석을 깔아 느리게 걷도록 하였는가 하면, 종묘 정문에서 시작되어 어숙실, 그리고 정전, 영녕전까지 이르는 어로는 지름길로 가듯, 곧바로 내닫는 듯, 담과 평행을 이루지 않는 긴장감을 주는 배치를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종묘는 한국건축의 일반적 특성인 비대칭적 대칭 배치를 하고 있다. 건물 배치는 개별적으로 대칭을 벗어난 구성을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칭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예로서, 정전 동·서월랑을 보면, 전체적으로 남북축을 중심으로 대칭적인 배치를 하고 있으나, 그 세부 처리는 그렇지 않다. 동월랑은 틔여져 있으나 서쪽 것은 벽으로 막혀 있어 대칭 속에서 비대칭을 읽게 한다. 뿐만 아니라 종묘는 대칭적인 배치 속에서도 변화를 담고 있다. 정전 신로는 남문인 신문(神門)에서 시작되어 묘정(廟庭)을 이루는 상월대 계단에 가 닿아 있는데, 미묘하게 중심축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대칭인 듯 하나 정확한 대칭이 아니게 처리하여 흐름을 유도하는 배치를 하고 있다. 정(靜)을 통하여 동(動)을 느끼게 하는 배치기법이다. 그리하여 대칭적인 묘정 월대와 기단, 그리고 지붕에 동적인 기운이 감돌게 한다.
뿐만 아니라, 종묘건축에는 의례공간의 위계 질서가 반영되어 있다. 정전과 영녕전 건물의 기단과 처마와 지붕은 위계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고 있다. 정전과 영녕전 신실과 좌·우 협실, 그리고 동·서 월랑 지붕, 처마와 기단 윗면의 높이는 신실, 협실, 월랑의 순으로 낮아져 있고, 기둥 지름과 높이도 마찬가지로 신실, 협실, 월랑으로 가면서 작고 낮게 되어 있다. 특히, 영녕전 후면 담 중앙부는 양 옆 담보다 높게 층단으로 쌓여 있어 영녕전 중앙 부분 지붕이 좌·우 협실보다 높은 것과 서로 호응한다.
또, 묘정 월대는 단(壇)의 일종인데, 장식이 없이 제례를 위해 필요한 공간으로만 설정되어 있으면서 지상으로부터 단을 높여 다른 공간과 성격이 다르게 하여 감실이 있는 천상으로 이어지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궁궐의 정전 뜰에 바닥에 돌을 깔고 단을 배설하지 않은 것과 대조가 된다. 마찬가지로 제관이 출입하는 동월랑 계단에는 무지개처럼 휘어 오른 소맷돌에 구름을 조각하여 그 위의 감실이 구름 위 천상(天上)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고, 감실 전면 문미(門楣) 상부에 설치한 운궁(雲宮) 역시 감실이 천상에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건축외관에서 보면, 묘정에 면하여 반복되며 배열된 기둥은 건축공간적으로 기단과 지붕을 자연스럽게 분리하는 한편, 전면의 월대와 묘정 공간이 남쪽의 신문에서 신실로 단계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계되도록 한다. 이 기둥 열은 지상의 묘정 월대와 하늘의 지붕을 자연스럽게 분리하면서, 처마 아래로 깊게 떨어지는 그림자로 반음영(半陰影)의 공간을 만들어 건물 일곽이 유현한 분위기가 감돌게 한다.
종묘는 제례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화려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종묘의 모든 건축 처리는 극히 단순하고 절제되어 있다. 묘정 월대와 기단 위의 건물은 신로를 표시하는 선, 몇 개의 판위, 그리고 장식이 배제된 건축 구조 등 과감하게 생략된 조형과 단순한 구성을 하여 종묘에 구현해야 할 건축 의도를 철저하게 성취하고 있고, 단청(丹靑)도 극도로 절제되었다. 세종은 종묘 다섯 실(室)의 개(盖)는 다른 예에 따라 화금(畵金)을 하지 말라고 명한 적이 있고, 영조는 종묘에는 모두 무늬가 없는 물품을 쓰는데, 어공 의장(御供儀仗)은 아직 무늬가 있는 것을 쓴다고 하면서 대소(大小)의 예탁(禮卓)·예의(禮衣) 등에 모두 무늬가 없는 명주 종류를 쓰도록 명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이 종묘건축에는 장식을 억제하고 단청도 극도로 절제되었다. 신로, 월대, 기단, 담 등 꼭 있어야 할 것만 있고 그 속에 필요한 공간만 담고 있다. 이러한 구성, 구조, 장식, 색채의 간결함과 단순함은 종묘건축을 상징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그리하여 옆으로 땅 끝까지 길게 펼쳐지는 듯한 묘정 월대는 안정을, 무한하게 반복되는 듯한 기둥의 배열은 연연세세 끊이지 않을 왕위의 영속을, 중력을 거부하며 수평으로 하늘 끝까지 펼쳐지는 듯한 지붕은 무한을 연상케 한다.
신위를 모신 정전과 영녕전 건물이 들어선 담 안에는 나무나 화초를 일체 심지 않은 반면, 그 주변에는 특별히 선택된 나무들만 심었다. 시선이 밖으로 트이지 않게 앞으로는 가산을 만들고, 사방 주변으로는 울창하나 유현한 숲을 조성하여, 묘정에서만 공간이 하늘로 통하게 하여 하늘이 내린 기운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거기에 신기(神祇)가 충만하게 머물도록 하였다. 묘정 월대에 서면 마치 구름 위 하늘에 떠 있는 느낌을 자아내는 것도 여기에 이러한 영적(靈的)인 힘이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종묘건축에서 읽는 단순하고 절제된 건축구성은 종묘건축을 자체 완결적이고 기품 있는 건축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상징적인 의미까지 읽게 해준다. 그것은 마치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여 그 속에 죽은 자와 산 자가 한데 어울려 영적인 교류를 가능케 하는 듯 하다. 그것은 종묘에 신성한 힘이 항상 감돌게 하는 원천이다. 이 모두는 조선왕조가 개국하며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펼친 성리학적 이념과 질서를 종묘건축에 투영시키려고 노력한 결과다. 종묘건축은 미래진행을 전제로 한 미완결의 현재완료형 건축이다.
종묘 일곽은 사적 제125호, 정전은 국보 제227호호, 영녕전은 보물 제821호로 지정되어 있고, 종묘는 1995년 12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정기총회의 정식 의결을 거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