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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소씨 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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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사와 선조님 유사 스크랩 선덕여왕에서 알천공은 누구인가?
소쩍새(소재우) 추천 0 조회 106 09.10.22 18:0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선덕여왕 드라마를 통해본 역사왜곡의 두려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의 알천랑

 

 

통일신라시대 한 세대를 주름잡았던 알천공(閼川公)에 대한 기록은『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三國史記』에는 선덕여왕 5년(A.D 636년) “여름 5월에 두꺼비가 궁궐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는 이야기를 왕이 듣고, 두꺼비의 성난 눈의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므로 나라의 서남쪽 변경에 있는 옥문곡(玉門谷)에 이웃나라 군사가 그 안에 숨어 들어온 것을 알았다. 이에 장군 알천과 필탄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찾아보게 하였으며 마침 백제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하려고 무장한 군사 500명을 이끌고 와서 그 곳에 숨어 있었으므로, 알천이 그들을 쳐서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옥문곡은 7세기 전반에 신라와 백제간의 전투가 잦던 곳으로서,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삼국사기』의 기록을 감안한다면 경북 성주와 경남 합천사이의 어느 지점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옥문(玉門)과 여근(女根)의 뜻이 같은데서 옥문곡을 경주 건천지역에 있는 여근곡과 같은 곳으로 일반인들에게는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한 곳이다.

 

선덕여왕 7년 겨울 10월에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공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놀라고 동요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대장군 알천에게 명하여 그들을 안정시키게 하였으며 “11월에 알천이 고구려 군과 칠중성 밖에서 싸워 이겨,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진덕여왕 시대에 알천공(閼川公), 임종고(林宗公), 술종공(述宗公), 호림공(虎林公),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이 있어 남산 우지암(于知巖)에 모여 나라 일을 의논하는데, 때마침 큰 범 한 마리가 좌석에 뛰어들어 왔다. 여러 공들이 깜짝 놀라서 일어나는데 알천공은 까닥하지 않고 천연스럽게 이야기를 하고 웃으면서 범의 꼬리를 붙잡아 땅에 동댕이쳐서 죽였다.

알천공의 근력이 이 같이 세었으므로 윗자리를 차지하였지만 여러 공들은 유신의 위엄에 복종하였다고 한다.

또 알천공에 대한 기록은 알천은 선덕여왕 5년 5월에 장군이었으며, 다음해 7월에는 대장군이 되었고, 진덕여왕 원년(A.D 647) 2월에는 이찬으로서 상대등이 되어 신라 최고의 실력자이기도 한 인물이었다.

 

열전 김유신(中)에 따르면, 그는 진덕여왕이 죽은 후에 群臣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스스로 나이가 늙고 덕행이 없다고 하여 거절하고 유신과 함께 이찬 춘추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요즘 역사드라마인 선덕여왕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지만, 극중에 등장하는 역사인물에 대해 많은 왜곡들이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며, 그 중 한명이 알천공 이기도하다. 특히 강력한 왕권을 표출하였던 진흥왕을 나약한 왕으로, 선덕여왕과 김유신의 상상 할 수 없는 러브스토리로, 선덕여왕의 없는 쌍둥이 언니를 만든 것, 선덕여왕과 비담과의 관계 등은 역사 왜곡에 가깝게 표현되고 있다.

 

역사드라마가 인기가 있을수록 일반인들에게 역사에 관심을 갖게 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작가의 상상력은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기도 한다. 작가는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력을 근거로 스토리를 구성해야 할 것이며, 시청자는 드라마가 허구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알고 보았으면 한다.

 

신라문화를 알리는 역사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어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한편 신라사를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역사 왜곡의 두려움도 함께 느끼고 있어 잔여 방송 분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상상력이 가미되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김호상 신라문화유산조사단 조사연구실장,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알천(소경)

 

인물구분 : 기타

생몰연도 : 미상 ~ 미상

연호 : 진평왕 건복 579

성 별 : 남

국 적 : 신라

파맥 : 진골정통

약력 : 알천공은 칠성우( 七星友 )중의 한명이었다.

이 칠성우는 알천공, 임종공, 술종공, 염장공, 유신공, 보종공 호림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들은 경주 남산에서 만나 유희를 즐기는가 하면 국가의 중대사에 대하여 고문역활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알천공은 선덕여왕 5년(636)에 장군, 동왕 6년(637) 7월에 대장군이 되었고, 진덕여왕 원년(647) 2월에는 아찬으로서 상대등이 되었다. 그리고 알천은 진덕왕대의 귀족회의에서 수석에 않아 있었다는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그는 진덕여왕이 죽은 후에 군신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스스로 나이가 늙고 덕행이 없다고 하여 거절하고 유신과 함께 이찬 춘추를 맞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고 한다.

 

 “소 씨는 우리나라에 ‘진주 소씨’ 하나 뿐”이며 알천랑은 신라를 건국한 공신인 소벌공의 25대손으로 ‘알천’은 젊은 시절 이름이고 본명은 ‘소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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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천공(閼川公 : 577년 진지왕2년~686년 신문왕6년)은 진주소씨 시조다.

 

 결론부터 말하면 실존인물입니다. 드라마에서는 김유신(金臾信)공과 비슷한 동년배로 말을 뜨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김유신공 보다는 18살이 연상이고 훗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金春秋)공 보다는 27살이 연상입니다. 소경(蘇慶)공과 소알천(蘇閼川)공은 동일인으로 577년 5월 6일에 태어나 686년 10월 12일109세에 작고하였고,  적제(赤帝) 축융(祝融)인 복해(復解)공으로부터 157세손이며, 득성시조 소풍(蘇豊=蘇昆吾)공으로부터 97세손, 후진한을 세운 소백손(蘇伯孫)공의 29세손, 박혁거세를 양육하여 신라를 건국하여 초대왕으로 세운 소벌(蘇伐)공(소벌도리공)의 25세손이 되는 것입니다.

선덕여왕시대와 진덕여왕시대에 대장군과  이찬,  각간 상대등과 화백회의 의장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특히 진덕여왕 승하시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김춘추(태종무열왕)를 왕으로 추대한 분으로 진주소씨(晉州蘇氏)의 시조(始祖)가 됩니다.

이에 태종무열왕은 알천공(경공)이 자신을 왕위에 추대한 공로로 알천공의 24대조인 소벌공을 문열왕(文烈王)으로 추봉하였습니다.

진주소씨 족보인 대동보에 그 증빙문헌이 기록되었고,  알천(閼川)이란 이름은 경(慶)공의 처음 이름입니다.

알천공의 아들인 노흔(老欣)공이 나이가 들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어  걱정이었는데, 알천공의 나이 84세가 되던 해인 661년 알천공의 손자 소복서(蘇福瑞)가 태어나므로 후손이 끊길 뻔했다가 문중의 대를 잇게 되는 경사를 맞으므로써 경사로울 경(慶)자를 써서 소알천(蘇閼川)에서 소경(蘇慶)으로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알천공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진주소씨대동보(족보)에서 발췌하여 아래와 같이 올리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사진은 족보에 기록된 사본과 진주시 상대동 선학산에 있는 알천공 묘소)


 





진주시 상대동 선학산록(仙鶴山麓)에 있는 알천공의 묘

 

 


신라국 각간 상대등(新羅國 角干 上大等) 알천공(閼川公 = 慶公) 유사(遺事)

 

공(公)의 휘(諱)는 경(慶)이요, 초휘(初諱)는 알천(閼川)이고, 진주소씨 시조(晉州蘇氏 始祖) 이다. 공(公)은 단기 2910년(서기 577년) 정유(丁酉) 5월 6일 신라국 제25대 진지왕(眞智王) 2년에 아찬(阿飡) 휘 휴곤(休昆:初諱는 武殷)의 다섯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차남은 조부령(調部令)인 태호(太乎)공이고 삼남은 신라 고승 원광법사(圓光法師)로부터 화랑도와 신라인의 중심사상이 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받고 부친을 따라 백제 침공을 막다가 아막성(阿莫城)에서 친구 추항(?項)과 같이 전사한 내마(奈麻) 귀산(貴山)공이고, 사남은 창부령(倉部令)인 외사부(外斯夫)공이며, 오남은 문우(文于)공이다.

공(公)은 태어나면서 부터 풍채(風采)가 당당하고 영특하여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고 국선(國仙)이 된 후에 더욱 낭도(郎徒)들을 잘 인솔하고 성원을 받았으며 무예와 지식을 닦으면서 성장 후 군사에 편입되어 전장에 나아가 싸우면서 승진하였다.

알천(閼川)공의 청장년 시기는 실로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삼국이 영토 확장을 꾀하여 변방은 항시 전쟁의 연속이었고, 특히 백제 무왕(武王) 재위 41년과 의자왕(義慈王) 재위 20년간은 끊임없이 신라를 괴롭혔고 고구려 또한 변방 침공이 잦았다.

 

신라에서는 알천(閼川)장군, 용춘(龍春)장군, 필탄(弼呑)장군 등 많은 장군들에게 외침(外侵)이 있을 때 마다 군사를 주어 해당 성주(城主)와 더불어 싸우게 하였다. 2969년(서기 636년) 5월 선덕여왕(善德女王) 5년에 백제대군이 독산성(獨山城)을 침공할 때 알천(閼川)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은 백제군을 맞아 크게 승리하였고, 백제군은 우소(于召)장군이 포로가 되는 등 많은 손실을 입고 패퇴(敗退)하였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은 이같이 충성스럽고 치밀하며 합리적이고 과감한 공(公)을 대장군(大將軍)으로 보(補)하고 각 전장을 통솔토록 하였으며, 한편 2971년(서기 638년) 고구려병이 칠중성(七重城:積城)을 침공할 때는 공(公)이 친히 장병을 이끌고 나아가 고구려병을 물리쳤다. 같은 시기에 선덕여왕(善德女王)은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 소리가 요란하자 이를 듣고 백제군이 침공하기 위하여 매복하고 있음을 판단하고 알천(閼川)장군으로 하여금 여근곡(女根谷:五峰山 富山下 溪谷)에 가서 숨어 있는 백제군을 토벌하라고 명하여 공(公)은 이를 섬멸한 후 후속부대까지 패퇴시키고 돌아와 알천장군은 선덕여왕에게 어떻게 그리 자세히 알고 계셨는가? 고 물으니 왕은 여근곡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여 주니 이 대담(對談)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 후 공(公)은 각간(角干)직과 이찬(伊飡) 벼슬에 올라 내정에 적극 참여 하였으며 2980년(서기 647년) 정미(丁未) 2월에는 신라 최고관직(新羅 最高官職)인 상대등(上大等)에 오르고 귀족회의(貴族會議:和白) 의장이 되니 당시 회백회의 임원은 임종공(林宗公), 술천공(述川公), 호림공(虎林公),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이었다.

2987년(서기 654년)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8년)이 승하(昇遐)하자 조정 군신들은 모두 공(公)에게 왕위(王位)에 올라 섭정(攝政)하여 줄 것을 간청(懇請)하였으나 공(公)은 이를 완곡(婉曲)히 물리치고 “신(臣)은 이미 늙었으며 또한 덕행이 일컬을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춘추(春秋)공은 국세(國勢)의 덕망(德望)이 숭중(崇重)하고 제세(濟世)의 영걸(英傑)이다”라고 춘추공을 추천하여 왕위를 권하였으나 사양하다가 알천공(閼川公)의 강력한 권유(勸誘)에 의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곧 후에 삼국(三國)을 통일(統一)한 신라 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그 후 무열왕(武烈王)은 2989년(서기 656년)에 알천공(閼川公)의 국가에 대한 공로(功勞)가 가상(嘉賞)하고 자신(自身)을 왕위에 오르도록 한 감사의 뜻을 모아 공(公)의 24대 조(祖)인 소벌공(蘇伐公)을 문열왕(文烈王)으로 추봉하였다. 이때 공(公)은 연로(年老)하여 관직을 뒤로하고 가족과 더불어 여생을 보낼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공(公)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師今)의 14세손이고 상대등 총지국사장(上大等 摠知國事長) 선(宣)의 딸인 영아부인 박씨(玲阿夫人 朴氏)와 혼인하여 자식 한명을 두었으니 이가 곧 이벌공(諱 利伐, 호는 山史, 改諱:老欣)이고 이벌공은 예부령(禮部令) 경태(京太)의 딸인 이우부인 석씨(利雨夫人 昔氏)와 혼인하였으나 늙도록 후사가 없어 서로가 개탄(慨歎)하고 있을 때 하루는 공(公)의 꿈에 소벌공(蘇伐公)이 나타나 현몽(現夢)하기를 “그대가 도사곡(塗斯谷)으로 이거(移居) 하면 가히 구치자(九?者:九將軍)를 얻으리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아부인 박씨와 자부(子婦) 이우부인 석씨도 이상동몽(異狀同夢)이었으니 이는 필시 조상(祖上)의 계시(啓示)라 생각하고 2991년(서기 658년) 무오(戊午)년 가을 청강(菁江:南江)에 이르러 사방을 살펴보니 꿈의 계시대로 감나무 가지가 아홉 개이고 그 감나무(九?木) 밑 그릇에 새겨진 글자가 “이곳은 구치자가 날 곳이요 후세에 반드시 20여명의 장수와 재상이 나올 땅이다”라는 내용을 보고 공(公)은 그곳에 집을 지어 2993년(서기660년) 3월 3일에 이사하고 이곳을 도사곡(塗斯谷)이라 이름 하였다. 이사 후 손자 복서(福瑞)공을 얻으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집안의 경사를 맞게 되어 공(公)은 휘를 경사경(慶)자로 개휘하였고 공(公)의 독자(獨子) 이벌(利伐)은 노년에 얻은 기쁨으로 역시 휘를 노흔(老欣)으로 개휘하였다.

그 후 노흔공은 차남(次男) 복상(福祥)공과 삼남(三男) 복정(福廷)공 등 삼형제를 두었고 후일 이곳을 도사곡에서 소경의 휘를 따서 소경동(蘇慶洞)이라고 하였다가 다시 벼슬 이름을 따서 상대동(上大洞)으로 바꾸었으니 이곳이 진주시 상대동이다.

그 후 손자인 3세 휘 복서(福瑞)공은 국선(國仙)을 거쳐 청주총관(菁州摠管)이 되고, 4세 휘 억자(億子)공은 한주총관(漢州摠管), 5세 휘 후준(後俊)공은 상주총관(尙州摠管), 6세 휘 검백(劍白)공은 웅주도독(熊州都督)이 되었고, 7세 휘 상영(尙榮)공은 청주도독(菁州都督), 8세 휘 목(穆)공도 청주도독(菁州都督), 9세 휘 은(恩)공은 웅주도독(熊州都督), 10세 휘 송(淞)공은 강주도독(康州都督), 11세 휘 격달(格達)공은 하동태수(河東太守)를 거쳐 고려국(高麗國)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공(公)이 도사곡으로 이사한 후 9대 9장군이 대대로 나왔으니 이는 구시목(九?木)의 은덕으로 기리고 있다. 공(公)은 손자 삼형제(三兄弟)와 더불어 화락(和樂)한 노년을 보내다가 3019년(서기 686년) 10월 12일 조용히 유명(幽明)을 달리 하니 수(壽)는 109세(百九歲)이다.

 

묘지(墓地)는 진주시 상대동 선학산록(仙鶴山麓)에 있고 대각간(大角干) 김인문(金仁問)이 비문(碑文)을 썼으나 보존되지 못하고 유실(遺失)되어 4310년(서기 1977년) 전국 종친회에서 재건비(再建碑)하고 예장석(禮葬石)과 조경(造景)을 하였으며 4322년(서기 1989년) 월훈석(月暈石)등으로 묘소를 개수 조경하였다.

진주소씨는 상계(上系)가 확실하여 시조(始祖) 경(慶)공으로부터 24대조가 신라국(新羅國) 창건(創建)시 초대왕인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양육한 소벌공(蘇伐公)이고, 28대조가 후진한(後辰韓) 주인 백손공(伯孫公:辰公)이며, 그 이상 상상계(上上系)로 96대조가 태하공(太夏公:豊公)에 이르는 상상계원류계도(上上系源流圖)를 가진 오래된 토성(土姓)중의 하나이다.

 

 

************************************************<다음 지식에서. 옹잠 솔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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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10.22 19:53

    첫댓글 맨 아래 옹잠 솔방울은 저의 별호와 닉네임으로 어떤 네티즌이 질문한 지식인 글에 답변한 내용의 글입니다. 위 게시글 중 가운데 알천(소경)으로 소개된 글에서 생몰연대 미상이라 되었기에 577년에 태어나 686년에 서거하신 내용을 여러차례 위키백과와 기타 잘못 기록된 곳에 정정보도를 했음에도 이렇게 정정이 안되네요... 또한 <알천>이란 휘는 젊은시절의 휘가 아니라 84세에 손자 복서공을 얻으시고 그 기쁨으로 <경慶>으로 개휘 한 것인데 젊은 시절의 휘로 오기하고 있는 곳이 있으니 일가님들께서는 올바로 인식하여 주시고 인터넷 상에서오류를 지적하여 제대로 정정될수 있길 기여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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