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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야기 ▒ 스크랩 3부: G-12 교회의 영성과 기름부음
여호수아 추천 0 조회 13 09.02.06 21: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3부: G-12 교회의 영성과 기름부음

4, G-12 영성

(2차 제 4강. G-12의 영성)

G-12 영성은 G-12 사역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핵심이라고 볼 수가 있다.

사도행전 2장 42절~47절 말씀.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같이 기도합시다.

- 좋으신 아버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멋진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로 진정 마지막 때 주님께서 원하시는 놀라운 비전과 전략을 알게 해 주시고 우리가 동참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성령이여 우리는 바라고 소원한다. 당신께서 우리를 온전히 주관하여 주시고, 우리를 사용해 주시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각 교회들을 통하여서 새로운 영적 변화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한다. 이 세대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계획이 당신께서 진정으로 원하셨던 교회를 통하여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들의 교회일진대 그들 한 영혼 영혼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요, 군사로 준비되어지게 하시고 흑암 세계에 들어가서 변화시키고 빛을 가져오는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오늘 G-12교회, 주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제자화 된 교회의 영성을 보기 원합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기 원하오니 주님 함께 해 주옵소서. 말씀해 주시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아멘-

모든 성장하는 교회는 자체의 영성을 바탕으로 한다.

모든 성장하는 교회는 자체의 영성을 가지고 있다. 어떠한 시스템도 교회를 성장하게 할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기름부음이 그 교회를 성장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기름부음과 영성이라는 것은 교회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신자라 할지라도 그 교회에 들어오면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교회의 영성 속에 빠져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 분위기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영성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성취하신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몇 가지 영성이 있다.

G-12 교회는 철저한 헌신을 요구한다.

G-12교회는 이러한 영성에 대한 철저한 헌신을 요구한다. 많은 시스템, 많은 세미나, 많은 지식적인 어떤 프로그램보다도 교회 안에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영성이 있는가? 그 영성을 위해서 담임 목사님과 그 교회지도자들과 장로님들과 모든 성도들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여기에 관건이 달려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목적에 따른 헌신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헌신된 마음이 매우 중요하다.

또 G-12교회 안에서는 제자와 스승간의 헌신이 매우 요구된다. 사람과 헌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프로그램, 십일조, 이런 일들을 떠나서 사람에 대한 헌신이 요구된다는 이야기이다. 사람에 대해서 헌신하고, 또 하나님에 대해서 헌신하면 그 다음엔 그 이후의 것은 다 이루어진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문제는 사람에 대한 헌신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에 대한 신뢰, 하나님에 대한 신뢰. 그것이 없기 때문에 헌신이 안 되는 것이다. 또 G-12에서는 스승이 있고 열 두 제자가 있을 때, 제자들 상호간에도 완전한 헌신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팀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한 팀 사역입니까?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팀 사역이다. 영혼을 감화시키기 위한 팀 사역이다. 영혼을 제자화 시키기 위한 팀 사역이다. 그런데 제자간에 서로 헌신하지 아니하면, 혹은 제자와 스승간에 서로 헌신하지 아니하면, 혹은 각 개인이 (지도자이든지, 제자이든지) 하나님께 철저히 헌신하지 않을 경우에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비전에 대한 헌신이 필요하다.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비전이라는 것은 사람을 묶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나쁜 비전가도 있다. 히틀러 같은 사람. 그러나 그는 어쨌든 비전을 가졌기 때문에 그 독일 백성들을 다 묶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비전을 받을 줄 알아야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 줄 알기 때문에 그 비전에 헌신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 비전을 받은 지도자에게까지도 헌신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담임 목사의 역할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서 담임 목사님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필자는 교회는 100% 담임목사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강단을 쥐고 있는 분이 담임 목사이시니까. 강단을 통해서 비전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취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제직회나 당회가 많은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 정말 신중하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여러분의 담임목사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비전을 받은 것이라면. 당신은 담임 목사님을 아니 하나님을 방해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기도해서,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비전이 담임목사에게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정말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비전을 돕는 조립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명의 지도자를 통해서 역사를 이루어 내시기 때문이다. 역사를 통해서 그래 왔다. 성경이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하나님께 필요한 사람은 모세 한 명이었다. 왜? 모세 한 사람이 헌신할 때, 한 사람의 비전에 대한 헌신과 결단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 200만, 300만의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에서, 포로에서 구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한 사람의 헌신 때문에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여러 명의 지도자를 세우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분열이 오기 때문이다.

다윗을 세우셨다. 사무엘을 세우셨다. 하나님은 한 명의 사람을 참으로 귀중히 여기신다. 왜냐하면 한 사람에게 비전을 줄 때, 이 비전은 모든 백성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어느 시대보다도 하나님의 비전이 필요한 시대이다. 그리고 지도자에게 이 비전을 주신다. 그러므로 담임목사의 역할은 매우 크다. 비전의 전달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향하여, 이 도시를 향하여, 내 민족을 향하여, 내 장래의 세대를 향하여 주시는 음성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 그 비전을 받을 때까지 엎드려 기도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비전이 임하면 그 비전을 성취할 수 있는 전략을 달라고 또 하나님께 앞에 기도해야 된다. 전략이 임하면 이제는 인내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그 비전을 성취할 수 있는 팀을 달라고 기도해야 된다. 그리고 목표를 설정해서, 주의 역사를 이룩해야 되는 것이다. 담임목사는 믿음의 전달자이다. 강단 위에 선포하는 한 마디 말씀은 전 성도들의 인생의 코스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 말씀은 믿음으로 완전히 무장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한 말씀 한 말씀 속에 하나님의 믿음이 실려져 있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성도들이 믿음의 용사들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성령의 교량 역할을 해야만 한다.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매순간 민감하게 듣고 그분이 주시는 음성이라면 누구와도 타협하지 아니하고, 어떤 상황과도 타협하지 아니하고 깨끗하게 성령의 음성을 전달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역사는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리고 담임목사는 헌신의 분위기를 잘 유지해야 한다. 전 교회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분위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 분위기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옛날에 헌신했었는데…’라는 말로는 안 된다. 어떤 분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첫 사랑을 회복하자, 첫 사랑을 회복하자” 가 아니다.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첫 사랑을 유지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예배를 통해서 뜨거움을 유지해야 한다. 항상 예배 가운데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지를 매순간 예민하게 파악하고, 만약 예배 가운데 성령의 임재가 느껴지지 아니하고 예배가 형식적으로 드려지고 있다면 담임목사는 정말 금식을 해서라도 예배 분위기를 어떻게 성령의 임재의 분위기로 바꿀 수 있을 것인지를 구하고 주님의 은혜를 얻어야만 한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필자는 교회는 분위기로 인도된다고 하였다. 그 말은 영성을 따라서 인도된다는 말이다. 어떤 영성을 전달하는가, 어떤 영성을 뿌리 내리게 하느냐에 교회의 모든 관건이 달려 있다. 프로그램은 그 다음 문제이다. 영성만 준비되어지면 어떤 프로그램을 해도 다 역사한다. 어떤 프로그램에서도 다 은혜를 받게 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이미 하나의 영적인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꾸 프로그램을 하고 그 안에만 집어넣으려고 하다가 실패한다. 그래서 G-12 영성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한다. 이것은 아주 간단하다. 사도 행전에 잘 나타나 있다.

사도행전 2장 42절~47절까지의 말씀은 G-12 영성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것을 필자는 다섯 개의 파워(5 powers)와 두개의 토탈(2 totals)이라고 표현한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여러분에게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가지 능력들( 5 POWERS)

첫 번째 Power Prayer. 능력 기도

기도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교회 안에는 기도하는 영적인 분위기가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 42절에 보니까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기록했다. 얼마나 기도가 중요한지,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일이었다.

필자가 크게 회개한 일이 있다. 요즘 와서 하나님께서 더 강하게 제게 주시는 말씀이 있다. 행정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저희 교회 안에 너무나 많다.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이 생겨났다.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잘못하면 일에 필자가 이끌려가고, 기도할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기도를 많이 했는데 지금은 기도를 많이 하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제게 주시는 딱 한 가지 영성이 있었다, 너무나 단순하다.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리라고 사도행전에 말하고 있는데 내 아들아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거라”

그 음성을 자꾸 들려 주셨다. 사모에게도 필자가 이야기한다. 우리가 세미나도 인도하고, 실크로드의 비전도 받았고, 우리 교회도 커지고, G-12의 비전을 받아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어지고 성도들도 힘과 열을 다하여 헌금을 하고 교회 건축도 6000명이 들어가는 성전건축을 짓는데, 2500명을 완성하고 이제 지난주부터 6000명 성전 완성을 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는데…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일에 자꾸 쫓겨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기도가 게을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주님은 필자에게 적신호를 주시면서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것이 사도적 사역자의 본분이니라. 얼마나 수많은 일이 있다 할지라도 다 제쳐놓아라. 너의 영성이 떨어지면, 네가 지나치게 육신이 피곤해서 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 때가 오거든 멈추어라. 그리고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을 필자는 계속 듣고 있다. 필자는 그것이 필자에게만 들려주시는 음성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 모든 사역자로 부름 받은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초대교회를 보면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더라고 했다. 예수는 밤을 새워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다고 했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떤 때는 내일의 방향을 몰라서, 혹은 아버지의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해서 밤새 기도하셨을 것이다. 혹은 자신의 영적으로 모든 고갈되어지는, 하루 종일 사역하고 피곤해 진 몸을 다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받기 위해서 기도했을 것이다. 아무튼 주님은 아버지와의 관계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목회자에게 가장 큰 위험성, 평신도들에게도 가장 큰 위험성, 그것은 반복적인 생활,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똑같은 반복적인 생활 속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 들어가서 이제는 주님과의 생명력 있는 교제의 관계를 상실할 때가 매우 많다는 사실을 필자는 발견했다. 너무나 단순한 사실이지만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이다.

피터 와그너 교수께서, 미국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국 목회자를 대상으로 조사해 보았는데, 미국 목회자들이 하루에 평균 기도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10분도 채 안된다. 미국의 목사들의 경우가 그러하다. 한국 목회자는 평균적으로 얼마나 기도하는가?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20여분 기도한다고 필자가 들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기가 막히는 일이다. 얼마나 기도하지 않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나머지 시간은 무엇을 하는가? 필자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목사들의 모습을. 필자도 한때는 인터넷을 서핑해서 다른 목사들이 설교 어떻게 하는지를 찾다 보면 시간이 참으로 빨리 지나갔다. 세 시간, 네 시간, 다섯 시간, 몇 시간이 그냥 훌쩍 지나가 버린다. 그리고 복사(카피)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감은 없었다. 잘 들으세요. 성도들은 영감이 있는지 없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존재들이다. 비록 말이 매끄럽지 못해도, 내용이 정확하지 않아도, 내 속에서 경험한 것만 말하면, 내가 주님 안에서 기도해서 받은 레마의 음성, 나를 기다리는 성도들이 지금 받기를 원하는 음성, 그것을 받고, 그것을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서 전하는 설교와 최고로 유명한 목사님의 가장 훌륭한 설교를 카피해서 하는 설교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믿는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말씀을 주신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말씀이다. 이 순간에 우리는 넘어진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초대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였다. 그들의 말씀에 능력이 있었던 것은 기도 때문이었다. 전혀 기도에 힘썼기 때문에 그들의 전도에도 힘이 있었고, 찬양에도 능력이 있었고 사도들의 가르침이 사도의 가르침일 수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사도적 기름부음이 있었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설교들이 매끄러움과 부드러움과 논리를 따라서 주어지지만, 얼마나 우리의 심령에서 흘러나오는 사도적 기름 부음을 따라 던져지는 말씀이냐는 의문을 필자는 갖고 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전도하고자 할 때, 정말 우리가 얼마나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기도를 통해서 그 영혼을 전도하기를 원했는가. 기도했다면 그 영혼 속에, 기도하는 한 마디 말속에 우리 영혼이 담길 것이다. 우리의 감정이 담길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담길 것이다. 사람은 그것을 느낄 것이고, 간증의 한 마디 속에서도, 별것 아닌 간증 속에서도 그들은 눈물이 흘러내릴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 기도의 능력이다. 기도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전도에도 기도요, 설교 준비에도 기도요, 찬양에도 기도로 준비하며 모든 것을 우리는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또 그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영성이다. 이 한국교회의 영성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비판한다. 한국교회는 소리만 컸지 내용이 없다고. 필자가 대답하였다. "소리 지르지 않으면 영성도 안 나온다. 내용도 안 나온다."고 그랬다. 조용히 논리적으로 한 두 마디 좋은 문장을 정확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별하면서 한마디하고 끝, 그리고 아멘 하더라도 필자는 그것에서 영성을 느낄 수 없다.

그런데 진정한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자 속에는, 뜨거운 심령의 마음에 있는, 심령 속에 있는 영성이 담긴 기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한국교회는 뜨거운 기도를 통해서 부흥한 교회이다. 밤새워 철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교회이다. 초창기 부흥의 시대에는 지금같이 엄청나게 많은 주석 책이 없었다. 인터넷도 없었다. 목사님들의 설교집도 없었고 강해 집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 초창기 신앙의 선조들은 밤낮으로, 눈 위에서 며칠을 금식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영을 따라 말씀을 전파한 분들이었다. 초대교회는 그와 같은 교회였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그와 같은 기도의 영성을 회복해야 될 줄로 믿는다. 세 사람을 위해서, 불신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생활화하고, 운동화 시키고, 그것이 운동화 될 때까지 강단 위에서 외쳐야 한다.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 이야기를,

“우리 삼인의 불신자를 위해 기도합시다.” 아무도 안 듣는 것 같다.

필자는 선포한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계란이 깨질까 바위가 깨질까?” 그렇게 물어본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이 “물론 계란이 깨지지요” 그러면 필자가 대답한다. “백만 번 던지면 바위가 깨져” 무슨 말인지 아는? 그것은 끈기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 정확하면, 밀고 나가라는 것이다. 끝장을 볼 때까지 밀고 나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한다. 역사하게 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확신이 부족하다. 하나님 앞에서 이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분별이 부족하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확신부재 시대이다. 그런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기도가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오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란다.

저희 교회에서는 금식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 목적은 교회의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작년 한 해동안 1월 한달 동안에 전 교인을 하루 금식을 시켰다. 기도 제목을 물론 주었다. 그 다음에 2월 달에는 3일 금식을 전 교인과 함께 하였다. 기도 제목을 주고. 그 다음 3월, 4월 넘어가면서 1주일 금식을 전 교인에게 시켰다. 1주일 이상 금식할 때는 저녁 식사는 먹게 한다. 꼭 먹느냐 안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전 교인이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 병약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전체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그 다음에는 2주일 금식을 시켰다. 그 다음에는 3주 금식을 시켰다. 그 다음에는 30일 금식을 시키고 라마단, 모슬렘들의 30일 금식하는 그 기간동안에 맞춰서 우리도 40일 금식을 하고 라마단 금식 30일 동안 하고 열흘을 더 보태서 우리는 기도를 했다. 금식을 했다. 전 성도들에게. 물론 따라오는 사람만 따라왔다. 그러나 40일 금식을 하고 거의 1/3이상이 따라했다. 필자가 물어보았다. “힘들지 않습니까?” “아니요, 전부 같이 하니까 너무 쉽습니다.” 제 열세 살 난 아들도 40일 금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학교 다니면서 다 따라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육신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금식하지 아니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지 아니하면 우리의 영혼이 점점 세속화되기 때문이다. 작년에 그것을 해 보니까 많은 성도들이 장기 금식은 따라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올해는 두 달에 한번씩 일주일 금식을 하기로 선포를 했다. 그래서 두 달마다 한번 씩 우리는 전 성도들이 같이 일주일 금식을 한다. 저녁식사만 하게 하고 아침 점심을 금식하자, 그리고 우리의 영성을 다시 회복시키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떤 말을 해도, 어떤 프로그램을 적용시켜도 금식보다 우리를 절제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처음부터 초신자라 할지라도 저희 교회는 금식훈련부터 시키기 시작한다. 죽지 않는다. 또 그렇게 힘들지 않다. 같이 하면. 놀라운 사실은 일주일동안 금식하면서 그들이 가졌던 평소에 기도하지 못했던 제목들을 내어놓고 기도함을 통해서 응답 받는 일들이 얼마나 많아지고 얼마나 많은 수많은 간증들이 터져 나오는지 모른다. 왜 금식하지 않겠습니까. 힘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삶의 기름부음이 일어나는데 왜 하지 않겠냐는 말이다. 기도의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필요하다. 해야만 한다. 저희들은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설교할 때 강단 위에 섰는데, 때때로 입이 탁탁 막힐 때가 있다. 악한 영의 공격이 있다. 필자가 지나치게 신비주의적인? 아니다. 분명히 있다. 얼마나 많이 기도하고 말씀을 준비했는데도 악한 영의 공격이 있을 수 있다. 중보 기도자가 필요하다. 우리 교회는 주일에 드리는 예배가 두 시간 내지 두 시간 반을 드리는데 그 시간동안 저희 열 두 제자들은 자기의 제자들을 데리고 돌아가면서 1부 예배, 2부 예배, 3부 예배 때 중보기도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두 시간 반 동안 계속 예배를 위해서만 기도를 하는 것이다. 어둠의 권세들이 틈타지 못하도록,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재 하도록.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여러분, 기도의 능력을 믿으십니까? 기도하면 역사가 틀림없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기도를 안 하기 때문에 주의 신선한 음성이 들려지지 않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주의 뜻을 분변 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확신이 우리 속에 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면 확신이 일어난다. 기도하면 주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어떠한 고난과 환란과 역경이 닥쳐와도 그것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확신을 분명히 받았기 때문이다. 평신도들도, 목회자들도, 누구에게나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여러분의 삶이 기도로 점철되어진다면 여러분의 삶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기도의 결과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를 회복해야 한다. 항상 기도소리가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카자흐스탄 기도 센타라는 것을 만들었다. 한 300명 들어가는 홀을 24시간 기도만 하게 하고 아무 것도 못하게 한다. 항상 개방해 놓는다. 밤중에도 성도들이 달려와서 기도한다. 또 필자의 열 두 제자, 사모의 열 두 제자들이 전부 돌아가면서 금식하면서 기도 실을 지키고 있다. 기도의 불이 끊어지지 않게. 제단의 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에서도 제단의 불이 끊어지지 않도록 제사장은 항상 그것을 돌보았다. 그것은 우리의 역할이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그래서 성도들이 매일 와서 기도하고 24시간 그 기도실을 지키고 있고, 또 매일 오후 5시부터 7시까지는 누구든지 문제 있는 사람은 그 시간에 와서 영혼을 쏟아놓고 기도하라고 했다. 그러니까 매일 오후 5시부터 7시까지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막 소리를 지르면서…. 매일 소리를 지르면서 기도한다. 새벽기도는 물론 하고 있다. 새벽기도를 우리는 아침기도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차가 일찍 안 다니고 자가용들이 많이 없기 때문에 7시부터 8시까지 기도하고 8시에 끝나고 나서 자기 network별로, 혹은 구역별로 성전 안에서 군데군데 모여서 손을 잡고 기도하고 직장으로 바로 가는 것이다. 아침은 굶고 기도한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비전과 사역들이 지속되는 것을 필자는 눈으로 직접 목도하고 있다. 이 많은 기도의 영성을 사실은 필자의 사모에게 큰 은혜를 우리가 얻었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기도를 참 잘한다. 끈기있게 기도를 잘 한다. 같이 독일에서 생활할 때 무척 어려운 시기에 사모는 하루에 다섯 시간, 일곱 시간, 열두 시간씩 기도했고. 엎드려서 기도하면 몇 시간이고 일어서지 않고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까 그 기도를 통해서 그 영성을 준비시켜 주셨고, 선교지에 오자마자 제일 중요한 사역으로 사모가 기도하는 분위기를 계속 만들어 놓았다. 제자들을 선택할 때도 기도하지 않는 제자는 천하에 없는 학력이 있어도, 천하에 없는 좋은 배경이 있어도, 천하에 좋은 말씀을 가지고 있어도 절대로 제자로 삼지 않는다. 기도가 우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저희 교회가 기도의 영성을 준비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가 끊임없이 기도에 전혀 힘쓰는 교회라는 것을 우리가 알았기 때문이고, 또 특별히 우리 한국 민족에게 주신 기도의 영적 DNA를 우리가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기도하시기를 바란다. 이것만이 회복의 길이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감추어진 부분들을 드러내 주시고 알게 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는 알 길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는 시간에 기도하지 않고 염려하고 있다. 눈 감고 기도하지 않고 염려하고 있다. 철저히 바꾸어야 한다. 주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잠잠히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 임재 속에 들어가서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필자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알마타에서 13년째 목회를 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설교 준비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다. 말씀이 오지를 않았다. 정말 발버둥을 쳤다. 그런데 지금은 저희 선교 센타 안에 있는 기도 실에 들어가서 앉으면 솔직히 말해서 10분~15분만에 주일 설교가 그대로 다 나온다. 그만큼 기도실 안에 영성이 준비되어 있다는 말이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 지식에 따라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아닌 줄 믿는다. 우리의 사역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인 줄 믿는다. 우리의 의존하는 가장 본질적인 모습은 기도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기도하면 회복되어진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능력 기도 생활이 필요하다. 이 분위기를 형성해야만 한다. 어떤 것을 하기 전에 먼저 기도의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마 그 운동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아무도 동참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은 어쩌면 목사님과 사모님, 두 분이 시작하게 될지 모르고 혹은 평신도 여러분이 시작한다면 여러분 한 명이, 혹은 두 명이 조그마한 모임으로 시작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계속 기도하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기도운동이 일어난다. 교회 전체가 변화되어진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두 번째로는 Power Word. 능력의 말씀이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 사도들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예수를 직접 본 자들, 예수의 말씀을 직접 경험한 자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받은 자들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폭발적인 능력을 가졌다. 그래서 한번 베드로의 설교에 3.000명이 한 순간에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은 사도들의 가르침 속에, 그들의 설교 속에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다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도의 가르침이 어디서 나왔는가? 역시 기도에서 나왔다고 필자는 확신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사도적 기름부음이 우리의 설교와 우리의 가르침 속에 유지되어 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도 바울이 각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치고 모든 일을 행할 때 그는 아마도 사도적 기름부음으로 말씀을 가르쳤을 것이다. 지식을 따라, 논리를 따라 성경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사도적 가르침을 따라, 사도적 기름부음을 따라서 그 즉시 필요한 하나님의 기초를 놓았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 속의 어떤 지식을 나는 이것의 전문가이니까 이것을 가르치겠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우리가 주님께 민감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말씀은 현장적이어야 한다. 말씀은 직접적이어야 한다. 말씀은 지금 현재 주시는 생명력 있는 말씀이어야 한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은 그 말씀을 주신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제자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필자는 멘토링이라고 말한다. 멘토링 할 수 있는 말씀을 어디에서 얻는가? 사람들이 묻는다. “목사님, 그럼 구역에서 무슨 말씀을 전합니까?” “구역에서는, 보통 셀 모임에서는, 구역장이 인도하는 구역모임, 초신자들이 모이는 그 구역모임에서는 주일설교 말씀의 은혜 받은 말씀을, 감동받은 말씀을 간단하게만 전하십시오. 그 다음에 기도하고 사역하십시오. 이야기를 들어주고 불신자들의 문제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시간을 많이 가지십시오.” “그러면 G-12모임에서는 무엇을 합니까? 그 시간에 무엇을 합니까? 무슨 매뉴얼이 있습니까?” 하고 필자에게 묻는다. 필자는 말한다. “아무런 매뉴얼이 없다. 성령께서 매뉴얼이다. 그분께 기도해야 한다.” 나의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을 직접 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고 그들의 속에 있는 숨어있는 것들이 드러나고 그들이 주님 안에서 변화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Power Word. 능력의 말씀이다. 기독교인은 이 능력 말씀을 회복해야 한다.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단순한 지식 전달이 옳은 것이라고 그냥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로고스의 말씀 가운데서 오늘 직접 주시는 fp마의 음성이 우리게 들려지느냐, 과연 수많은 성경의 말씀 가운데 지금 우리 성도에게 필요한 말씀이 있는가? 있다. 우리는 찾아내야 한다. 금은보화를 찾아내듯이 , 광맥을 찾아내듯이 그 말씀의 맥을 찾아서 성도들의 심령을 깨우쳐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도적 가르침이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면 교회는 시스템이 무엇이든지 성장하게 되어 있다. 혹 한 명의 목회자를 통해서 성장하든지, 셀 교회를 통해서 성장하든지 G-12를 통해서 성장하든지 말씀이 기름부음으로 넘치면 그 교회는 반드시 성장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우선이다. 그 다음에 그 말씀으로 G-12를 통해서 열 두 제자를 그와 같은 영성으로 준비시킨다면 그 교회는 열두 배의 성장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필자의 제자들을 만날 때 한번씩 Encounter 수양회나 혹은 알파코스나 뭔가를 인도할 때 필자가 다 하지 않고 각자 강사들을 맡긴다. “Encounter 수양회 열 강의가 있는데 당신이 첫 강의하시오, 당신이 두 번째 강의하시오.”하고 맡깁니다. 그 대신에 철저히 체크한다. 어떤 때는 시간이 없어 새벽 기도 시간에 모이다. “전부 다 새벽 기도 시간에 모여라. 이번 주는 매일 새벽 기도 시간에 우리는 따로 모인다. 전 성도는 새벽기도 모이고.” 열두 제자를 불러모았다. “다음주에 있는 Encounter 수양회에서 당신이 두 번째 강의를 하게 되어 있는데 지금 한번 해 보시오.” 강의를 한다. 철저히 체크를 한다. "당신의 설교에서 이 점이 문제이다. 논리가 분명하지 않다. 초점이 분명하지 않다. 간증이 너무 명확하지 않다. 간증이 이것이 와야 하는데 다른 것이 왔다. 너무 군더더기가 많다. 당신은 소리는 높은데 심령에서 나오지 않다. 너무 톤만 높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이 되지 않다....” 다양한 멘토링을 다 해 준다. 설교학이 필요 없다. 바로 그 장소가 제자화를 준비하는 장소이다. 어떤 때는 직접 이야기를 한다. “당신은 기도가 안 되어 있으니까 이번에는 하지 마시오”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말할 수가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금식한다. 준비한다. “목사님 이번 한 번만 시켜주십시오. 필자가 다시 한번 해 보겠다.” “다시 한번 해 보시오” 잘하는 사람은 칭찬해 준다. 능력의 말씀을 우리가 세대를 통해 전달하고 제자들을 통해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말씀 자체나,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어떻게 주의 말씀을 광맥을 찾아내듯이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가?, 또 그 말씀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communication 할 수 있는가? 과연 그 말씀은 사람들의 상황에 합당한 것인가? 하는 것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사도행전 5장 42절에 보니까 초대교회는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를 쉬지 않았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다 말씀인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예수가 주 되심을, lordship을 철저하게 전달했다.

필자는 독일에서 신학을 했다. 루터란 교회를 다녔다. 출석을 해 보았다. 아!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거기에서는. 그런 곳에는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시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깨어져있었다. 많은 선한 말씀, 도덕적인 말씀과 사회적 말씀도 있었지만 예수가 우리의 주가 되심을 선포하는 말씀이 없었다. 성령께서 역사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초대교회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선포했다. 초 신자들도 예수가 나의 구주되심을 인하여 감격하게 되었다. 이런 감격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말씀을 통해서.

세 번째 Power는 Power Worship이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47절에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다. 온 백성에게 칭송도 받았다고 했다. 이것 때문에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교회에 더하더라고 했다. 찬양이 넘치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어 있다. 진정한 찬양이 있어야 한다. 형식에 얽매인 찬양이어서는 안 된다. 예배의 순서 때문에 할 수 없이 집어넣은 찬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 비록 순서 속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그 찬양은 진정으로 드려지는, 전 성도들의 영혼을 합쳐서 주 앞에 올려지는 경배가 되어야 한다. 이런 운동이 매우 필요하다. 어떤 찬양도 좋다.

그러나 필자가 알기로 시대마다 하나님의 찬양도 옷을 달리 하고 나타나는 것 같다. 전 세계에 새로운 찬양의 운동이 얼마나 일어나는지 모른다. 나이가 드신 분들은 젊은 세대들의 찬양을 이해할 수가 없다. 젊은 세대는 나이 드신 분들의 찬양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세대에 맞게, 그들의 분위기에 맞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저희 교회는 크게 세 개의 찬양 그룹이 있다. 한 찬양그룹은 큰 성가대를 가지고 있다. 이번 부활절 때 약 200명의 성가대원들이 헨델의 ‘메시야’를 찬양했다. 그러나 또 다른 팀은 17세에서 25세 사이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뜨거운 찬양 그룹이다. 전 세계에 유명한 좋은 찬양들이 너무나 많이 나와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한국에서도 주로 경배와 찬양에서 하는 찬양들과 그 이외에도 새로운 찬양들이 많이 개발되고 있다. 그런데 틴에이필자 그룹, 청소년 그룹으로 내려가니까 청소년들이, 17세부터 25세까지 부르는 청년들의 찬양을 너무 지겹다고 듣지를 않았다. 그 정도로 세대가 빨리 바뀌고 있다. 그들은 시작부터 끝까지, 막 뛰어야 한다. 이유도 모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팔을 흔들고, 발로 차고... 희한한 행동들을 하는데 중요한 사실은 그러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같이 뛰어야지요. 필자도 같이 막 뛰는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 세 그룹을 필자는 따로 훈련을 시키고 있다. 전 세계의 새로운 찬양들. 호주에 힐송(Hillsong) 이 있는데 전 세계를 막 휩쓸고 있다. 아주 고백적인 찬양들이다. 단순한 찬양들이다. 그런데 얼마나 고백적인지 청소년들을 매료시킨다. 얼마나 좋은 찬양들이 많이 나오는지 모른다. 우리는 배워야 한다. 수용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는 갈수록 좁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은 세대일수록 점점 인종과 문화를 넘어서서 하나가 되어지고 있다. 특별히 찬양에 있어서는. 여러분들의 교회에 청소년과 청년들의 사역을 활성화시키기 원하는가? 찬양만 자꾸 새로운 것을 해 보십시오. 모이게 되어 있다.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찬양인도자가 진정한 Worshiper가 되어야 한다. 인도자 자신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라야 한다. 단순히 악보를 연주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테크닉과 함께 음악성과 함께 영성이 함께 있어야 한다. 얼마나 그 찬양 인도자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혼을 던져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는 자인가가 중요한 관건이다. 사단의 타락은 그가 경배함을 통해서 교만해졌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교만을 철저히 체크할 필요가 있다. 사람 앞에 서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성을 관리해 주어야 한다. 전 성도들이 찬양의 임재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면 다른 기도는 스스로 되어지는 것 같다. 기도가 하늘 문을 여는 것이라면 찬양은 하늘을 땅으로 가져오는 것이라고 했다. 성령의 임재를 땅으로 직접 가져와서 우리가 몸으로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찬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찬양을 새롭게 개발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계층을 위한 경배를 우리가 연구할 필요가 있다. 임재를 추구해야 한다. 어떤 찬양의 모습이든지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도록 우리는 추구해야만 한다.

네 번째 G-12의 영성은 Power Evangelism이다. 능력 전도이다.

그들의 전도는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마가복음 16장 19절에 무엇이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그들이 전도하며 나아갈 때 그 따르는 표적으로 함께 하셨다고 했다. 예수는 처음 오셔서 수많은 군중들을 인도하실 때 그들을 말씀으로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주로 기사와 표적으로 인도하셨고 치유로 인도하셨다. 오늘날은 성령의 직접적인 임재를 눈으로 보아야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시대이다. 충격이 없이는 하나님께 오지 않는 시대인 것 같다. 능력 전도가 필요하다. 우리가 단순히 선을 넘어 기도함을 통해서 수많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가 처음 선교지에 들어가서는 필자 한 사람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암 환자도 낫는 많은 치유가 일어났다. 필자가 말씀 드렸던 간질병 환자가 극적으로 치료되자마자 수많은 병자들이 몰려왔다. 종합병원인지 교회인지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병에다 꿀을 담아오기도 하고, 다른 것들을 조그맣게 들고 와서 감사하다며 기도 받기를 원했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걸렸다. 중요한 사실은 단순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시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사하셨고,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병을 치료하여 주신다.” 너무나 단순한 말씀이다. “그리고 기도합시다.”하고 함께 나을 때까지 기도하면 낫는 거죠. 뭐.

필자는 믿음의 은사 하나밖에 없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것으로 밀고 나간 것이다. 여러분에게 어떠한 은사가 주어지든지 그 은사를 최대한 활용하시오. 필자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서 강해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에게 없는 은사를 억지로 자꾸 배우려고 하지 말고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자꾸 사용하면 다른 은사들까지 개발되게 해 주신다.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입니까? 먼저 거기에 충성하십시오. 그것을 최대한 주님을 위해 사용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능력전도가 교회 안에 뿌리 내려야 한다. 그래서 이전에는 모든 성도들이 필자에게 집중했지만 셀 교회로 전향하고 나서 성령께서 필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너의 성도들을 너와 같은 사역자로 만들라”는 음성을 듣고 난 이후에 그들을 훈련시켜서 이제는 구역 안에서 필자를 통해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구역장을 통해서 일어나도록 필자는 힘을 썼다. 단순한 기도하나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불신자를 위해서 단순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역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그 믿음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그런 역사가 일어났다. 구역 안에서 역사가 일어나니까 사람들은 모여들기 시작했다. 집으로 모여들었다. 교회로 모여들었다. 능력전도의 현장이 될 수 있었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필요하다. 성령의 나타나심이 필요한 세대이다. 기사와 표적과 치유들이 우리 평범한, 예수를 구주로 인정하는 자들의 손에 의해서 일어나야만 한다. 또 일어날 수 있다. 그때 세상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이다. 이것이 바로 G-12의 가장 소중한 영성이다.

다섯 번째 G-12의 영성은 Power Cell이다. 소그룹이다.

하나님은 위대한 역사를 그 당시에 집마다 이루어 주셨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니까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떡을 먹었다」고 했다. 성전에 모이고 집으로 모이고.. 그들은 매일 모였다. 그들이 시간이 많아서 그랬습니까? 아니다. 그들에게 자가용이 있었습니까? 아니다. 그런데 그들의 심령을 이끄는 능력이 있었다. 왜? 집으로 모일 때마다 그 셀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세 사람이 함께 한 곳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한 이 말씀이 실제적인 말씀으로, 능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구역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속 집으로 몰려들었다. 불신자들은 집에 들어가서 그 집이 하나의 교회가 되어졌다. 그 안에서 놀라운 제자화의 사역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조그마한 가정모임을 통해서 역사가 일어난 교회이다. 바울의 모든 편지를 살펴보면 ‘누구누구의 집에 있는 교회’ ‘누구누구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노라’ ‘누구누구의 집에 있는 누구에게 이렇게 인사하라’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물론 교회 건물을 가질 수 없는 때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었다. 오늘날도 집집마다 모여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볼 수 있어야만 한다. 필자의 소원은 알마타, 카자흐스탄, 실크로드 전역에 거리마다 하나님의 구역이 세워지는 것이다. 직장마다 사무실마다 하나님의 구역이 세워지는 것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평신도들의 손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사회 속에 아주 편만하게 퍼져나가는 것이 필자의 소원이다. 그것이 주님의 소원이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이것이 G-12의 영성이다.

따라합시다. 능력 말씀, 능력 기도, 능력 경배, 능력 전도, 능력 셀.

그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 해 주실 것이다.

G-12에서는 이 다섯 개의 Power가 능력이 있어야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철저한 Total. 전체적으로 완전히 주님 앞에서의 드려지는 것들이 있어야 한다.

첫 번째 Total Holiness. 완전한 거룩이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지상에 세우시고 매우 근심하셨다. 매우 관심을 가지셨다. 그 교회가 깨끗하기를 원하셨다. 주의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몸체가 되기를 원하셨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 조금만 남기고, 나머지는 주 앞에 다 드렸는데, 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이셨는가?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첫 번째 교회 안에 거룩함을 상실치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성령 앞에 깨끗한 심정으로 섬기는 교회가 되게 하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성령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분명히 죄인 줄 알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용납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역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고도 ‘괜찮다’는 인상을 가진 영적 분위기를 형성해 버리고 맙니다. 어떻게 그 안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겠냐는 것이다. 주의 교회는 거룩함을 회복해야만 한다. 그럴 때만이 주의 성령께서 역사하실 것이다. 주께서 찾아오실 것이다. 다윗이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나에게서 성신을 거두지 마옵소서” 그가 죄를 지었을 때, 그가 거룩함에서 벗어났을 때 첫 번째 느낀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나에게서 떠나 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범죄 할 때, 개인이 범죄 할 때, 여러분이 캄캄한 곳에서 행하는 일 때문에 여러분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시간을 내어 주님을 찾아가라고 시편을 말하고 있다. 주 앞에 나와 통회 자복하고 다시 한번 거룩함을 다시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늘 거룩함을 유지해야만 한다. 타협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성도들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의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로 남아 있어야 한다.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죄를 용납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는 분위기는 있어야 하나 죄인 줄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자를 용서하는 분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철저한 거룩함이 교회 안에는 있어야 한다. Total Holiness.

두 번째는 Total Commitment이다.

예수께서 진정 여러분의 구주가 되시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진정한 주께서 되시는가? 우리는 그분의 종인가? 그분에게 모든 인생이 달려 있는가? 그렇다면 그분에게 철저히 헌신하여야 한다.

10%만 시간을 헌신하지 마시고, 50%만 헌신하지 마시고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 성경의 명령이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준비시킬 때 가장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 복음서에 항상 마지막 부분에 다가와서 계속적으로 하려는 말씀이, 너의 처자와 네 재산과 너의 부모와 모든 것을 부인하지 아니하고는 나를 따를 수 없고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철저한 헌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학교 박사학위가 몇 개가 있는가? 성경지식을 얼마나 가졌는가? 어떤 코스를 마쳤는가? 이런 것이 주님께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주께서 그냥 주실 수 있는 것들이다. 사역의 능력은 주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네가 얼마나 나에게 헌신하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 하나가 돌아가면서 “내 부모님을 장사하고 주님을 따르겠다.” “죽은 자는 죽은 자가 장사하게 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 헌신하라는 것이다. 머뭇거리지 말라는 것이다. 뒤로 돌아서지 말라는 것이다. 타협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일이라고 말하지 말고 오늘 헌신하라고 주님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만약 지도자가 이런 철저한 헌신을 따라서 살아간다면, 아마 그 교회 성도들도 그 분위기를 따라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하고 있다. 철저한 헌신이 필요하다. 필자는 확신한다. 만약 그렇게 되어지면 주님은 우리를 완벽하고 멋있게 사용하시는 통로로 삼으실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헌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거룩함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까지도 자신을 부인할 능력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필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필자의 몸부림이고 우리 모두의 몸부림이 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주님 저는 아직도 부정합니다. 부정한 입술을 가진 자요, 부정한 마음을 가진 자요, 아직 인내가 부족한 자요, 주님 앞에 온전한 헌신이 부족한 자입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소서.” 그리한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우리가 지니도록 합시다. 초대교회의 모습은 보니까 무엇이라고 얘기했습니까?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고..」 바로 헌신의 모습이다. 저희 교회도 헌신의 훈련을 매우 시킨다. 필자가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 교인들은 한달 월급이 100불 수준이다. 그런데 월급을 1년 열두 달 중에 제 때에 받는 사람이 별로 없다. 회사에서 돈이 없다고 안 준다. 안 주면 끝이다. 어떤 회사에서는 3년째 월급을 한번도 못 적이 많다. 그래도 회사를 다니더라구요. 참 사람들이 신기하다고 필자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현장을 살펴보면 참 불쌍해서 계속 도와주고 싶다. 한국에서도 돈 가져오고, 미국에서도 돈 가져와서 도와주는 사역만 자꾸 하고 싶다. 그런데 필자가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아니다. 헌신을 가르쳐라. 사렙다 과부와 같은 사람들을 자꾸만 만들어라. 그래야만 내가 그들에게 채워 넘치게 할 수 있다. 그들로 하여금 헌신케 하라”고 하셨다. 남아메리카의 선교가 초창기에 실패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카톨릭 교회가 가서 계속 구제만 했기 때문이다. 신앙은 심어주지 않고, 그들이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은 훈련시키지 않고 계속 교회가 주고 또 주고 또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부흥한 이유 중에 한 가지는 초대 선교사들이 자기들의 돈을 가지고 와서 교회를 지어준 것이 아니라 우리 한국 성도들이 없는 돈을 가지고 교회를 짓게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헌신을 가르쳤다는 말이다. 헌신해야 한다. 필자는 한국생활을 잘 모른다. 20년 이상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예를 들어 “어느 교회에서 교회 성도들을 이런 G-12세미나에 보낼 때 어떻게 합니까?” “요즘은 7만원 이야기하는데 7만원 내고 가라고 하면 갈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서 교회에서 3만원 보태주고 당신은 4만원 내시오.(혹은 교회에서 5만원 보태주고 당신은 2만원만 내시오)” 그러면 갈까 말까 생각한답니다. 문제가 많다. 문제 많아요. 정말 문제 많다. 솔직한 표현이다. 갈급 해야 하는데 갈급 함이 없다는 것이다. 회복해야 한다. 헌신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저희 교회에서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지역에서, 그 아제르바이잔의 전체 개신교 교회가 통틀어서 15개밖에 되지 않다. 그런데 13교회가 연합을 해서 G-12를 배우겠다는 것이다. 250명이 모이겠다는 것이다.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만 되는 일이다. 필자와 사모의 이름이 정부 대통령에까지 올라갔다. 허락을 받기 위해서. 다행히 허가가 났다. 그런데 거기에서 장소를 빌려줄 수 없기 때문에 수양관에서 하려고 하니까 약 12000불이라는 돈이 필요했다. 12000불이면 한국 돈으로 약 1400만원이 더 된다. 선교지에서는 엄청나게 큰 돈이다. 한달에 100불 받는 우리 성도들이 헌금하면 얼마나 많이 하겠습니까? 그런데 필자가 기도하는데 “하나님 12000불이 필요한데요”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퍼뜩 그런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성도들로 하여금 헌금하게 하라” 그런데 제 마음속에 감동이 일어나기를 한 사람이 1000불씩 하는 사람, 백 만원씩 헌금하는 사람 다섯 사람을 한번 광고해 보자라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래, 많은 헌신을 하는 사람도 있고 작게 헌신하는 사람도 있지만 가진대로 헌신하겠지” 그리고 주일날 아침에 필자가 광고를 했다. “필자가 기도를 하는데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지역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하는데 12000불이 필요한데 성도여러분의 기도와 헌금이 필요하다. 그래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이런 감동을 주시네요. 한 사람이 1000불씩 헌금할 수 있는 사람 다섯 명. 그래서 5000불을 가져올 수 있는 사람 가져와 보세요.” 이런 일이 터키에서도 한 번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1부 때 이야기하고, 2부 때 이야기하고, 3부 때까지 가져오라고 이야기했다. 필자도 고집도 세죠. 주일 날 은행 문도 안 열려 있는데. 그런데 3부 예배가 끝나고 나서 여섯 명이 1000불씩을 들고 왔다. 한 여자 성도께서 남루한 옷을 입고 가져왔다. 그래서 필자가 보기에는 1000불을 헌금하기는커녕 100불도, 10불도 헌금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성도님, 어떻게 가져왔습니까?” 물어보니까 이분이 하는 말이 “필자가 1년 전부터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김삼성 목사 입에서 1000불 이야기가 나오면 이 헌금을 갖다 드려라. 너 모아라” 그러더라는 것이다. 그러고 1000불을 모아 가지고 왔다. 얼마나 감격스럽든지... 얼마나 감사한지... 한명은 이집트에서 온 작은 회사의 비즈니스맨인데 이집트에서 복음을 전한다가 쫓겨났다고 한다. 그래서 카자흐스탄에서 가능성이 있는 가하고(이집트도 모슬렘국가니까) 왔답니다. 처음으로 저희 교회에서 예배를 참석했는데, 2부 예배에 참석했는데 아제르바이잔도 모슬렘 국가인데 거기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고하시는데 1000불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가 하고 싶더랍니다. 그래서 얼른 자기가 일하는 회사에 달려갔다. 돈을 모아보니 1000불이 딱 맞춰지더랍니다. 그래서 3부 예배에 가지고 왔답니다.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이다. 어떤 여성도 한분은 필자에게 막 다가오면서 “목사님, 500불은 안 됩니까? 500불은 안 됩니까?” 그래서 “500불은 아직 성령께서 말씀 안 했다.” 비록 선교지지만 우리는 선교지를 돕는 선교지이다. 참 감사하다. 이미 7년, 8년 전부터 자립을 시작했다. 지 교회를 23개를 개척할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셨다. 지 교회 전부 자체의 힘으로 다 운영하고 있다. 물론 어떤 분들은 교회건축을 위해서 특별헌금을 만불, 이만불, 오만불 보내주시는 분들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저희들이 그들의 지교회를 사 주기도 하지만 대체적인 모든 경비와 전도자들의 월급은 저희 교회에서 다 충당하면서 할 수 있게 되었다. 선교지에서. 너무나 감사하다. 왜? 어떻게 할 수 있었느냐? 헌신이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물질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를 건축할 때, 선교 센타를 건축할 때 약 45만불이라는 돈을 들여서 선교 센타를, 시내 가장 한 복판의 가장 금싸라기 같은 땅 약 3000평 땅이 있는 그곳에, 건물 두 동이 있는 건물을 샀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간증을 하자면 끝이 없다.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였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우리의 힘으로 건축합시다. 헌금합시다. 어떤 사람들은 아파트를 팔기도 했다. 여기에도 아파트 두 채 있는 사람은 한 채 파세요. 천국에 보화를 쌓아 둡시다. 한 채있는 사람은 팔라고 이야기하지 않겠다. 열과 성을 다해 주님 앞에 헌금합시다. 다음 세대에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믿으십니까? 어디에 물질을 투자하시려고 합니까? 계속 쌓아두려고 하십니까? 조금 더 늘리고 나서 하시려고 합니까? 아마도 그러면 이미 늦을 것이다. 주께서 요구하실 때 하셔야 한다. 필자는 그렇게 믿고 있다. 지금까지 거의 300만 불의 돈이 들어갔다. 2500명이 들어가는 성전을 짓는데. 그런데 거기에서 약 1/3은 우리 교인들이 다 헌금한 돈이다. 선교지는 가난한 나라이다. 그런데 어떤 주에는 연속으로 한 봉투에 5000달라, 6000달라 계속 들어오기도 한다. 필자가 광고했다.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만 참 감사한다.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하실 것이다.” 헌신을 가르쳐야 한다. 여러분이 헌신해야 한다. 여러분이 헌신하면 여러분의 자녀들도 헌신하게 될 것이고, 여러분이 헌신하면 여러분의 자녀가 그 축복을 당연히 누리게 될 것이다. 왜 우리가 이 영적 질서를 잘 모를까요. 우리는 이 철저한 Total Commitment 완전한 헌신의 삶을 교회 안에 뿌리내려야 한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다. 카자흐스탄 실크로드는 모슬렘 국가이기 때문에 건물이 없이는 사역을 할 수가 없다. 터어키에 필자가 세 번째 G-12 컨퍼런스를 해 주고 있다. 터어키에서 제일 큰 교회가 G-12 교회로 전환을 했다. 가보니까 다 합쳐서 200명도 되지 않다. 그런데 벌써 전통교회가 되어 있었다.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운지… 헌신이 안 되어 있다. 그들을 헌신시키고 있다. 더 모여서 기도할 수 없답니다. 소리 지르면 경찰이 와서 잡혀가 버립니다. 어떡하겠습니까. 여러분들 헌신하십시오. 실크로드 지역에는 교회의 건물이 필요하다. 여기에 이 엄청난 건물을 지을 돈이면 그곳에 수많은 교회를 건축할 수 있다. 만 오천불, 2만불에 살 수 있는 건물들도 있고, 어떤 5만불, 7만불에 살 수 있는 건물들도 있고, 좀더 큰 데는 10만불, 20만불. 큰 돈이죠. 그런데 한국에서 건축하는 경우에는 너무나 적은 돈인데 그것이 없어서 교회를 유지할 수 없다. 헌신하는 분은 꼭 말씀해 주십시오. 한 지역에도 지금 7만 불짜리, 6만 불짜리 건물이 나와 있는데, 500명이 들어가서 예배드릴 수 있는 장소가 열려져 있는데, 6만 불이면 건물을 살 수가 있는데, 7천만원이면 살 수가 있는데 그 돈이 없어서 살 수 없는 것이다. 성도들은 기다리고 기도하며 금식하고 있고, 그들은 여유가 없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지역들이 너무나 많다. 헌신하십시오. 필자는 부끄럽지 않게 여러분에게 담대하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자손만대에 복을 누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G-12의 영성의 기초가 있다. 두 가지이다. 필자가 사역을 해 오면서 발견한 우리의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첫 번째는 우리가 철저하게 매순간 성령의 현재적인 음성에 민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지금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어떻게 사역하기를 원하시는지,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향을 늘 인식할 수 있는 영적 상태, 열려진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바람과 같이 왔다가 사라지는 분이다. 말씀을 조용하게 소곤거리고 지나가신다. 우리가 그것을 듣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매순간마다 우리에게 들려지는 음성이 있고, 하라고 하시는 요구가 있다. 그분의 책망의 음성도 조용히 지나가기도 한다. 예민하지 않으면 놓쳐버리고 맙니다. 놓쳐버리면 그 다음에 그것을 찾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보다 많은 기도 속에 들어가서 더 큰 임재를 맛보지 않으면 힘들어집니다. 성령의 현재적인 임재이다. 한 사람을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께서 이 사람을 어떻게 보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이 사람을 볼 때 너무 부족하고, 못났고, 불결할 것 같고, 거짓말도 하고 온 갖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주께서 보는 눈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주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주시는 음성을 듣고 전달하면 그 사람은 놀라운 영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격을 인정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내일도 말씀하시고, 어디에 있든지 말씀하시고, 누구와 관계하든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음성에 예민하면 우리는 이 모든 영성을 소유할 수 있다.

두 번째 기초는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이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내가 주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달아야만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가 엄청난 감격으로 와 닿을 수 있다. 필자가 독일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제 아내와 같이 생활을 하는데 많은 갈등이 있었다. ‘나는 전도사인데 왜 이렇게 아내와 갈등이 많은가? 왜 나는 여자 한 명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가?’ 마음속에 굉장한 고통과 갈등, 나 자신에 대한 비참함, 나 자신에 대한 절망. ‘너 그러고 어떻게 먹고 사냐? 너 그러고도 남자냐? 네가 가장이냐?’ 하는 질책과 자책감이 마음속에 들었다. 새벽에 독일에서 일어나서 신학공부를 할 때 숲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 원통해서 막 울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잘못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가 내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 “하나님, 나는 죄인이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설교도 할 수 없고 나는 전도사도 아닙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막 울면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성령께서 필자에게 주시는 음성이 “이제 알았느냐?” 이제 네가 죄인인줄 알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하시고 나서 “이제 죄인인줄 알았느냐?” 그 말씀을 하시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그걸로 전부 다 되었더라구요. 그날 아침에 얼마나 감격해서 울었든지 “주님, 나는 죄인이다. 그러나 감사한다. 주의 십자가의 보혈로 나를 씻어주시고 용서하여 주시니 감사한다. 이제는 주님만을 위해서 살겠다. 더욱더 자신을 부인하겠다.” 자신을 깨닫고 나면 참는 것도 쉬워집니다. 자신을 잘 모르니까 교만해서 날뛰는 것이다. 자기 고집을 이야기하고, 내 판단은 이것이 옳은데, 그른데… 매일 눈을 가지고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려고만 하지 주님의 은혜를 따라 행동하지 않더라는 말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신앙이 너무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내가 죽으니까 주께서 내 심령 속에 하늘의 생명을 주셔서 부활시키는구나. 그런데 내가 살려고 발버둥치고, 살아서 이기려고 하니까 내 속에 주님의 생명이 죽어지는구나.” 이런 사실을 필자는 깨달았다. 주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위대하고 감사한지…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 주의 교회는 위대한 능력을 맛보게 될 것이다.

5, 폭발적인 성장을 위한 기름부음 (창1:28)

주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확신으로 임하게 될 때부터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난다.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의 약속이 기록되어 있지만, 모든 말씀이 나에게 확신으로 임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시기와 때를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확신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한다. 우리가 어느 때 믿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단순한 말씀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말씀이 나에게 직접 들려지는 음성이 될 때이다. 그것이 내 심령 깊숙한 곳에 마치 계시처럼 명확하게 들려지고, 내 마음속에 ‘이것이다’는 확신이 든 순간부터, 불가능이 내 생각에서부터 가능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의 손과 발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불가능의 장벽을 뚫고 어떠한 장애물이 다가와도 물러서지 않는 견인력, 인내. 그런 것들이 우리 속에서 생겨나게 된다. 그 결과 때로 넘어지기도하고 좌절하기도 하지만, 내게 주신 성령의 확신 때문에 삶에, 사역에 열매가 맺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기도하며 성령의 음성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무시한다. ‘적당히 잘 되겠지. 기도하면 되겠지.’ 그 말에 진리가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한다는 것이다. 사실 기도하겠다는 말은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을 받는다는 것이다. 받을 때까지 기도해야하고, 확신으로 받은 것이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 때까지 그 확신을 붙잡고 기도한다. 그것이 이루어질 때 감사함으로 들어가서 주님 앞에 우리 영혼이 진정한 감사를 드릴 때, 우리의 영혼 속에 참된 기쁨이 솟아나고 또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셔서 또 새로운 일을 맡겨주시는 이런 과정이 계속 되어야만 한다. 한번의 성공으로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되어지는 축복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는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중요한 과정이다. 성령과의 깊은 교제, 깊은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사역과 평신도들의 삶에 있어서도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비전을 받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비전 안에 거할 수가 있습니까?> 필자는 다른 비결이 없다고 생각한다. 깊고 지속적인 오랜 기도를 통해 주님 앞에 들어가야 한다.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한다. 그때부터 우리의 삶 가운데 새로운 역사가 일어난다.

하박국의 비전

하박국 2장 1절에 보면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하박국은 세상과 사회와 백성들의 상황과 이 모든 것을 쳐다보면서 ‘도대체 공의의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하는 본질적인 의문에 사로 잡혔다. 조그만 사소한 질문이 아니라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그러면 대부분 “살다보면, 목회하다 보면 그런 어려운 문제들이 생기게 되어 있어. 그런 건 시간이 지나가면 저절로 해결 돼”라고 경솔하게 넘어가지만 하박국 선지자는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들어갔다.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성령의 임재 안에 까지 들어갔다는것이다. 해답을 얻기 위해서. 왜냐하면 그 본질에 대한 해답을 받게 될 때 본질적인 사역을 할 수 있고, 본질적인 사역을 하게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본질에 관심 있는 성도들이 모여들고 진정한 헌신이 그 때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사실 때문에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음성과 대답을 듣기 위해서 기다렸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받게 되면 그 때부터 비전이 탄생하게 된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었을 때 비전이 탄생한다. 대개 질문은 동일하다. 왜냐하면 똑같은 사회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고 똑같은 고난가운데 처하여 있기 때문이며 똑같은 상처 가운데 거하여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질문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것이다’는 해답을 얻지 못하는데 있다. 그러나 해답만 나타나면 비전은 주어집니다. 해답은 우리의 삶에서 비전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비전만 붙들면 추종자가 나타난다. 비전만 명확하면 그 공동체 안에 믿음이 일어난다. 비전 때문에 믿음이 일어나면 교회의 영적 분위기가 변화된다.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거룩한 비전이다. 모든 사람이 볼 때 ‘이것은 합당한 비전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사랑하는 종이다’ 그와 같은 분위기와 느낌, 그리고 동의가 일어난다. 그 때부터 진정한 부흥도,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도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비전을 얻기까지는 깊은 주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하박국 2장 1절의 말씀이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파수하는 곳에 선다는 것은 백성들과 하나님의 중간에 서 있다는 것이다. 백성들의 상황을 돌아보며, 백성들을 공격하는 악한 영의 권세가 무엇이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중보자의 자리에 서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사모했다는 것이다.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라는 것은 간절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기도하다 중단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부족하고 기대감이 부족해서이다. 내가 거룩한 일에 동참하여, 고난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일을 하고자 하는 열정의 부족이다. 내 속에 있는 동기의 부족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해답을 얻어야겠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선 자로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기다리며 바라보겠다’고 결심하였다. 이것은 발버둥치는 그 심령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보리라」

‘내가 보겠다. 응답 없이는 일어서지 않겠다. 주님 말씀해 주소서.’ 그 이전에 일어서서 움직이는 것은, 목표 없이, 사역을 시작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마치 하루살이 같다. 어떤 한 사람이 좋은 프로그램을 이야기하면, 계속 따라다니다가 하루살이처럼 뱅뱅 돌다가, 힘이 없으면 툭 떨어져서 죽는 그런 삶이 우리의 목회와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 기다릴 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비전이 무엇인지를 알고 난 다음에, 독수리처럼 높이 날아서, 주님의 역사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틀림없이 수많은 추종자가 그 독수리 주위에 몰려들 것이다. 2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드디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목표를 정확히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경솔히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거기에 생명을 바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묵시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의 계시는 스쳐간다. 한 순간에 지나가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민감해야 된다는 것이다. 성령에 민감한 사람은 그 음성을 놓치지 않는다. 음성을 놓치지 아니하면 순종할 수 있다. 음성을 놓치면 육신의 방법대로 행하게 된다. 그 다음에는 아무리 발버둥치고 밤낮으로 뛰고 움직여도 피곤하기만하지 열매가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확신이 있으면, 육신은 아무리 피곤해도 심령은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갈 수 있다. 그 비전 때문에 죽지 않을 수 있다. 피곤해도 살아날 수 있다. 그런데 비전이 없으면 피곤 때문에 죽는다. 비전이 있으면 피곤해도 이겨내고 극복하여 결국은 승리한다. 이것이 비전을 가진 사람의 삶과 비전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의 삶의 차이이다. 3절에 말하기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이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나님의 비전이 임하였다면, 깊은 주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확신했다면, 이제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거북이 걸음이라 할지라도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 성취가 안 보인다 할지라도 나아가라는 것이다. 왜? 당신이 확신했다면, 분명히 당신의 주님의 계시를 보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다. 반드시 여러분들 주위에 추종자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추종자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세 한 명이 가시덤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과 계시를 들었기 때문에, 200만, 300만의 추종자가 그를 따를 수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반대하고 나답과 아비후같은 사람들이 대적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시지 않은 향로에 불을 붙여 하나님께 경배하고,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대적하여 지도력에 대한 도전이 일어나는 등 수많은 어려운 일이 일어났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 하나 때문에 모세는 결국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의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엄청난 장벽과 엄청난 반대가 있다 할지라도 올바른 비전, 분명한 확신, 명확한 방향 설정, 단계별 목표 설정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면 반드시 열매는 맺는다고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가 비전을 받는 일이, 지도자가 방향을 설정하는 일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주님의 음성 듣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러므로 음성듣기 전에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기를 바란다. 필자가 G-12사역을 시작하면서 계시를 받았다. 확신이 임하였는데, 제게 임한 확신 하나 때문에 교회가 놀랍게 부흥하였다. 폭발적인 성장을 하였다. 단순한 것인데도 왜 그렇게 몰랐을까? 우리는 너무 지식적으로 논리적으로 경솔하게 전달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고, 계시를 계시로서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고 계시를 계시로서 깊이 있게 영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심령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감동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머리는 끄덕이는데 마음과 손발이 움직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계시가 계시로서 깊이 임하게 되면 사람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면 감동이 임하고 우리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굳은 몸이 풀리기 시작한다.

1, 창세기 1:28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창세기 1장 28절은 필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엄청난 계시이다. G-12사역을 하는 모든 분들이 받은 좋은 계시 중에 하나라고 믿는다. 필자는 이 말씀을 motto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창세기 1장 27절-28절 말씀

「1:27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1:28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이 안에 비밀이 담겨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김삼성 목사의 간증

필자는 대광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교 합창부에서, 영락교회를 비롯한 서울 시내의 웬만큼 큰 교회는 다 다니면서, 성가대 합창을 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성경공부도 했지만 예수는 믿지 않았다. 수요일마다 예배는 드렸지만 예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인생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법과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데 인생고민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서 자원해서 군대를 갔다. 3년 동안 문제 해결하고 나서 보자.

사람이 부유하게 살든지 가난하게 살든지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살면 너무나 허무하다. 지금 죽는 것과 백년 뒤에 죽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아주 심각했다. 그 해답을 내가 들으리라고 결심하고 그때부터 시작된 고민이 10년간 계속되었다. 대학 3학년 때 군대를 갔다와서 복학하고 다니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을 알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철학 책을 읽었다. 철학 교수한테 편지를 썼더니 해답이라는 것이 묘하게도

<젊었을 때 그런 고민이 있고 그것은 사춘기처럼 다 지나가게 되어 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린다고,. 그렇게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철학 교수께서 교회 집사였는데왜 예수도 소개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내적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사라지지 않았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는데. 해결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같은 방에 있는 모태 신앙을 가진 친구와 고민을 나누었다. 그 친구가 밤낮으로 필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 그 친구 때문에 거듭났다. 성경을 배우기 위해서, 종로서적에 가서 기독교 서적을 다 뒤졌다. ‘성경 공부의 비결’, ‘성경 암송의 비결’. 진정한 신자도 안 된 필자가 성경구절 150 구절을 내 손으로 마분지를 오려서 기록해서 하루에 3 구절씩 암송을 했다. 제 친구가 제안을 해 준대로 했다. 필자에게는 그렇게 미련한 부분이 있다. 영어 단어 암송하듯이 150구절을 암송했다. 하루에 3구절씩. 1주일에 27개. 그 다음주에는 앞에서부터다시 암송하고. 그래도 모르겠더라구요. 같은 방 친구에게 “하나님을알아야 되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금식하러 가자” 일주일동안 금식하러 올라갔다. 그런데 금식을 해도 배만 굶었지 하나님은 나에게 임하지도 않고... 그때 욥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욥기만 세 번을 읽었다. 그런데 그 욥기가 필자에게 참 도움이 되었다. 깊이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인생의 고난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친구가 “사람이 영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열 개가 넘는 설교 테이프를 주어서, 듣는 중에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필자는 성격이 까다로워서 목사님이 설교하는 테이프를 1번부터 들으면서 목사님이 성경 구절을 앞 뒤 문맥과 맞게 이야기를 하는지, 또는 자기 마음대로 인용하는지 확인까지 했다. 상당히 논리적이어야만 이해를 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테이프를 들으니까 며칠 동안 다섯, 여섯 개도 못 들었다. 그런데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들어가는데 사람이 영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말씀을 듣게 되었다. 요한 복음 14장 15장 16장 강해가 나오고, 사도행전 2장 강해가 나오고, 사마리아 여인의 거듭남, 에베소 교인들의 성령체험,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아하, 이것이 열쇠구나. 내가 아직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성령의 임재가 없기 때문에 주의 말씀이 나에게 유효하지 못하구나’라고 깨달았다. 엎드려서 죄를 고백하는데 (성령의 감동 없이 진정한 죄의 고백이 되어집니까.?) 그래도 종이에 다 적어 보았다.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등록금이 필요 없는데도, 부모님을 속여서 등록금 받아낸 것부터 시작해서 다 적었다. 그리고 회개를 시작했다. 회개를 하고 있는데, 같은 방의 친구가 도서실에서 공부하다가 내려와 보니까, 고시 공부는 안하고 매일 고민 만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사태가 심각하니까 나에게 손을 얹고 기도를 해 주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펴 주면서 같이 기도하자고 하였다. 모태 신앙인데 자기도 일주일 전에 거듭났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성령께서 오늘 임하시길 기도하자” 기도하는데 사도 행전 적인 성령께서 제게 임하였다. 펄펄 뛰었다. 서너 시간을 땀 흘리면서 기도했다. 그랬더니 정말 사도행전 2장에 있는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의 불 같이 역사하셨고, 암송한 150구절의 성경 구절들이 화살처럼 마음에 꽉 들어와 박히는데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때 주신 가장 귀한 말씀이 두 구절이 있는데 사도행전 1장 8절과 로마서 10장 15절 말씀이다.

「행01:0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10: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을 필자에게 주시면서 필자가 해야 할 사역이 무엇인가를깨닫게 하셨는 데, 그것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라는 확신을 주셨다. 거듭나는 순간에 바로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밤에 선교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 다음날부터 대학교 체육관에 나가서,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을 붙들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성경이 너무 꿀 송이처럼 달아서 지하철에서 서서도 읽고 걸어가면서도 읽었다. 강의에 참석해야 하는데 강의에 참석할 마음의 감동이 있습니까? 성령의 감동이 임했는데... 강의에 참석한 친구를 다 불러내서 한 명씩 한 명씩 다방에 앉아서 하루 종일 복음 전하는 것이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무엇이 당신의 삶에 가장 보람된 것인지 입에 거품을 물고 전하였다. 그리고 새벽 4시에 일어나, 법대 기숙사의 방마다 손을 얹고 "하나님, 이 사람 거듭나게 해 주세요. 저 사람도 거듭나게 해 주세요.“ 한 사람을 위해서 3일 동안 금식도 했다. 금식을 밥먹듯이 했다. 그런데도 기뻤다. 너무 꿀 송이처럼 달아서 신약성경을 하루에 한번씩 읽었다. 매일. 내일은 시험치는 날인데 오늘밤 12시까지만 성경 읽고 시험 공부해야지. 다른 친구들에게 모범 답안 만들라고 해놓고. 그런데 12시가 지나도 성경이 재미있는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성경이나 읽자’ 그리고 아침에 모범답안 만든 것만 외웠는데 그것이 시험에 나왔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지. 그래서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받았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그런데 그 주신 계시, 하나 때문에, 내가 선교사로 부름 받았다는 계시, 하나 때문에 지금까지 삶의 무수한 어려움, 관계의 어려움, 경제적인 어려움. 무수한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다.

하나님의 계시의 중요성

여러분도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주의 종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연단을 거치게 되어 있는데 그 연단을 이기는 비결은 바로 그것이 계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났던 체험 가운데 주신 음성. 그것 하나가 우리를 지탱하는 충분한 능력이 된다. 그것 하나 때문에 모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거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 하나 때문에 내 인생을 불태우고도 남을 정력이 거기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 하나 때문에 순교할 수 있는 힘도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하나의 계시의 말씀으로도 충분히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음성을 듣는 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수많은 지식의 나열보다도, 살아있는 주님의 예언적 음성을 듣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냐는 것이다. 어쩌면 지속하고 계속하고 반복해서 음성을 듣는다 해도, 단 하나의 음성이 사람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하다고필자는 확신한다. 이런 주님의 음성과 확신을 들으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하나님의 축복

창세기 1장 28절은 그와 같은 말씀 중의 하나이다. 말씀을 읽는 중에 ‘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구나’ 너무 절실히 깨달았다. 조용기 목사님은 “좋으신 하나님”을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 외쳤는데 그렇게 외쳐도 내 마음에 계시로 임하기보다는 ‘좋으신 하나님, 아 좋다’는 마음에 감동이 임할 정도이지 그렇게까지 깊이 임하진 않았다. 그 말씀이 내 말씀으로 임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씀을 읽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첫 번째 하신 일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다. 자기가 창조한 피조물, 그것도 자기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 첫 번째로 하신 일은 축복을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복을 명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축복을 명하셨다. 하나님의 계획은 축복이심을믿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은 위대한 능력이 있다. 우리 속에 암시를 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암시의 능력을 우리에게 준다. 사람은 암시에 따라서, 움직이는 존재이다. 최면술, 능력이 있다. 사탄의 암시이다. 사탄도 우리 속에 먼저 암시를 주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불가능한 생각, 부정적 생각, 혹은 부정한 생각을 우리 속에 암시로 주고 그 암시를 받아들이면그 다음에 손발이 움직이는 것이다. 하나님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 속에 암시를 주신다. 왜 하나님은 말씀이라고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하는가? 말씀 가운데서 우리를 움직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의 위대한 능력은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고 지배한다. 그래서 말씀을 많이 연구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이 우리 속에 계시로 임해야만 진정한 능력이 된다. 그런데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첫 번째 인간에게 명령하신 선포의 말씀이 복을 주신 것이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하신 행동이, 우리 인간과의 관계에서 하신 첫 번째 일이 복을 주신 것이다. 축복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다. 인간이 타락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여러분이 잘못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여러분이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은 변함이 없다. 아담이 타락했고 하와가 타락했다. 범죄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서 내보내졌는가? 아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저주가 임했다. 땀이 흘러야 먹고 살 수 있는 고통의 인간으로 변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은 변하지 않았다. 아담 이후로 더욱 타락해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많은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세상이 죄악 속에 깊이 빠져들었을때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람을 지은 것을 후회하셨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축복의 계획이 변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은 시작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인간을 쓸어버리지만 한 사람을 택하였다. 노아를 택했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은 자라고 하였다. 자기의 의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의의 삶을 살 수 있었다. 택함을 입었다. 그리고 노아를 통해서 그의 가족 전체가 구원을 받았다. 그래도 축복의 계획은 변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 세상 가운데 진정한 영적인 축복과 하나님 안에서의 신령한 모든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노아를 택하셨다. 창세기 9장 1절에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흠향하시고 무지개언약을 통해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노아가 하나님께 제단의 향기를 드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다시 한번 확증하시면서 하신 일은 또 한번 복을 주신 것이다. 「노아에게 복을 주시며 일러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고 또다시 축복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은, 축복의 계획은, 축복의 선포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어떤 인생을 살았든지 어떤 죄악가운데, 유혹 가운데 빠져서 범죄 가운데 있든지 혹은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있든지,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은 변치 않는다는 것이다. 징계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변한다. 징계 자체가 축복이다. 연단도 축복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다만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것이다. 인간의 반응을, 응답을 기다리시는 것이다. 노아 이후에 또다시 인간이 반역하였다. 바벨탑을 쌓은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였다. 하나님은 축복하기를원하시는데, 그 계획이 변치 않는데 또 다시 어려움이 생겼다. 또 한번,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했을까? 이제는 새로운 축복의 계획을 예비하신 것이다. 어떤 축복의 계획인가? 믿음의 축복의 계획이다. 믿음 안에서 복을 받는 하나님의 새로운 법칙이 시작된 것이다. 아브라함 안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

창세기 12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것은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런 축복을 약속하셨다. 2절, 3절에 보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 하나님은 믿는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당시에 아브라함은 큰 민족이 아니었다. 이름 없는 한 가정의 아버지였다.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었다. 우상의 도시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사람을 뽑아내신 것이다. 여러분은 그런 도시에서, 뽑힘을 받은 사람들임을 믿으시기 바란다. 축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 엄청난 민족이 일어날 것이다. 전 그렇게 믿고 있다. 실크로드에 투르크 민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필자를 택하셨다. 이것은 교만이 아니고 아주 좋은 자존심이다. 필자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이 확신이 필자를 사람되게 만드는 것 같다. 아버지처럼 행동하게 만든다. 이 확신 없으면 아버지처럼 행동하지 않고 꼬리처럼 행동할 것이다. 필자에게 그런 확신을 주셨다. 그러니까 내 집처럼, 터키부터 중국 신장성까지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마치 내 집에 온 것 같다. 가는데 마다 기쁘다.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는 약속을 필자는 믿고 있다.

<투르크 민족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모슬렘 민족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이제는 그들을 통해서 아랍민족 에게 까지 들어갑니다. 주시옵소서. 민족의 조상되게 해 주시옵소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출발했지만, 카자흐스탄 알마타의 영적인 아버지였다가, 카자흐스탄의 영적인 아버지가 되고 싶고, 이제는 실크로드의 아버지가 되고 싶다. 어차피 인생을 한 번 살 바에야 크게 주님 앞에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좋은 비전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시되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너를 축복하겠다는 것이다. 너의 생각을 축복하겠다는 것이다. 너의 손발의 대사를 내가 축복하겠다는 것이다. 네가 하는 모든 일을 축복하겠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순종하면. 믿음 안에서 복을 누리는 비결이다. 순종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왜 순종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으니까.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는가? 깊은 임재 속에 안 들어가니까. 자꾸 다람쥐 쳇 바퀴 돌듯이 남들 하는 대로 세상을 따라서 자꾸 반복만 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살이처럼 뱅글뱅글 돌다가 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의 축복을 받으라는 것이다. 음성을 들으라는 것이다.

세 번째 축복을 주셨다.「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이제는 다 알고 있다. 모슬렘도 알고 기독교인도 알고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필자도 알마타에 올 때 김삼성이란 이름을 아무도 몰랐다. 사모만 내 이름을 알았지 우리 아이들도 잘 몰랐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하나님의 아들인줄,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인줄 몰랐다. 그런데 이제는 다 안다. 우리 교인들이 다 알고 알마타가 다 알고 카자흐스탄이 알고, 대통령도 알고, 다 안다. 이 실크로드도 다 안다. 필자가 그렇게 알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신 것이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여러분도 똑같은 일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브라함만 택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믿음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모든 자에게 약속된 동일한 축복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 말입니까? 단순히 여러분을 격려하기 위한 것인가?아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은바 되사 십자가에서 저주가 되셨다고 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저주를 청산하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우리에게 주기 위함이라>고 했다.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믿는 믿음 안에서 저주가 떠나가고 우리에게 임하는 축복이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의축복이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3장 13절, 14절 말씀이다. 성경적이다. 이 축복이 있다는 것이다. 네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높여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이다.

네 번째 복은「너는복의 근원이 될찌라」

여러분을 통해서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 여러분과 관계된 사람이 다 함께 복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한 명만 잘 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축복의 의미이다. 여러분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양식을 먹고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영적으로 먹이고 물질적으로 먹이고. 자꾸 먹이고 자꾸 나누어 주어야 한다. 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퍼주어도 끊임없이 나온다. 왜냐하면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목적이다. 이것이 위대한 믿음의 비밀이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면 이런 축복을 받을 수가 있다. 이런 축복을 꼭 받으시기 바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 28절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내용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28절은 축복의 가장 근원적인 모습이고, 축복 안에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 너희들을 축복하기 위해서 받아야 할 기본적인 기름 부으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 기름 부으심을 내가 주겠다, 축복의 기름 부으심을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어떤 것이 진정한 축복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이것이 축복의 내용이다. 근원적인 축복이다. 끊임없이

정복하라. 끊임없이 다스리라, 끊임없이 팽창하라. 성장하라. 그래서 폭발적 성장은 하나님의 뜻이다. 사업도 번창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도 번창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인간의 욕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팽창하는 것, 이것이 욕심입니까? 예, 거룩한 욕심이다.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야 한다. 어둠의 세상은 밀려 나가고 하나님의 빛의 나라는 확장되어야 한다. 거룩한 욕망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거룩한 비전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비전이다. 예수께서 가졌던 비전이다. 열방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제자가 되게 하라. 모든 민족으로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게 하라.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져야 한다. <하늘에서 주의 뜻이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버지의 계획이 아직 안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왜 사소한. 치욕적인 일에 그렇게 신경을 쓰느냐는 것이다. 십일조를 왜 떼어먹느냐는 것이다. 왜 선교하라면 안 하냐는 것이다. 왜 명목상으로 하느냐는 것이다. 진실로 하라는 것이다. 전도하려면 진실로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라는 것이다. 축복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본문의 말씀의 내용이다. 그런데 우리를 축복하시면서 주신 동사 5개가 있다. 그 동사 5개를 보면 재미있다. 필자는 반복을 좋아한다. 이 말씀을 가지고 몇 십 번을 설교했다. <이것이 계시이다> 라는 깨달음을 갖으면 성도의 심령에 임하여 깨달을 때까지 전하는 습성이 필자에게 있다. 수십 번을 전하고 나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였다.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이 임한 것이다.

동사 5개는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셨다면 이 명령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필자는 믿는다.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번성의 능력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아담 안에서, 하와 안에서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의미이다. 남자에게만 복을 준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복을 주셨다는 것이다. 합쳐야 생육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한마디도 표현하면 하나님은 성장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팽창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폭발적인 성장, 번성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번성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아이를 네 명 낳았다. 열두 명을 낳고 싶었는데, 아직도 기회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나님은 번성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교회가 확장되어지기를 원하신다. 질적으로, 양적으로 계속 번성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사탄의 영역을 침범하여서 빼앗기를 원하신다. 가나안땅에 들어 가라. 들어가서 가나안의 일곱 족속이 살고 있는 그 땅을 다시 쟁취하라. 하나님께로 돌리라는 것이다. 전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승리를 주신 하나님이시다. 그것이 우리의 축복의 내용이다. 믿으시기 바란다. 번성하시기 바란다. G-12교회들은 하나님의 이 번성의 계획들을 철저히 믿고 있다. 번성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축복하실 때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 번성의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여러분의 조상이 아담이라면 아담 안에서 여러분은 이미 번성의 권세를 받은 것이다. 여러분의 조상이 하와라면 그 하와 안에서 모든 여성분들은 이미 번성의 권세를 받은 것이다. 번성할 수 있다. “당신의 교회는 크게 번성할 수 있다.”

여러분의 사업이 팽창함이 하나님의 계획임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사역이 팽창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믿으십니까? 믿으십시오. 믿으면 행복해 집니다. 그 다음부터는혼자 있어도 웃음이 나온다. 우리 교인이 만 명. 십만 명, 이십만 명,...도시가 너무 작아서 다른 도시로 나가고 다른 나라까지 들어간다. 또 만 명, 십만 명,,, 자라난다. 하나님 나라는 확장된다. 사람들이 예수 이름 앞에 굴복한다. 얼마나 신나고 기쁜 일입니까? 계속 번성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교회의 현실을 가만히 보니까 그 당시에 교회가 성장을 안 하고 있었다. 한 3년간을 구역이 300개에서 정체되어 있는 것이다. 셀 교회를 하고 있었는데 3,4년 동안 셀 교회를 통해서 성장했다. 80개, 90개에서 셀이 100개, 150개, 200개, 250개, 300개까지 성장하더니 딱 멈추는 것이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성장 안 하면 문제가 있다. 뭔가 막혀 있는 거다. 뚫어주어야 되는데 어디에서 막혀 있을까?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었다. 그리고 나서 G-12를 시작했다. 믿었다. 성장은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을 보니까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만 믿었지 성도들은 안 믿고 있었다. 전부 다 믿기 전에는 역사는 안 일어난다. 다 믿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운동(movement)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movement를 좋아한다. 바람이시기 때문이다. 물결이거든요. 성령의 물결이라고표현하고, 성령의 바람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을 일으키는 사람이 비전가이다. 그것을 일으키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지도자라는 것이다. 혼자서 움직이면 쓰러집니다. 소진되어서 나중에는 탈진해서 죽고 만다. 그런데 똑똑한 사람은 제자를 만들어 낸다. 그들 속에 movement를 창조해 낸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움직이게 만든다. 그리고 그는 명령한다. 지시하고 방향을 제시한다. 손가락만 가지고 일한다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에서 한번의 지시가, 그들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지시를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작년 1월까지도 역사가 안 일어났다. 그런데 이야기하기를 G-12를 시작하면 약 4년이 지나봐야 폭발적 성장이 일어난다고했다. 필자는 성질이 급해서 4년을 기다릴 수 없었지만 지난 2년간 우리 교회 지도자들에게 G-12가 무엇인지, 왜 그렇게 돌아가야 하는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헌신이 왜 필요한지, 깊은 주님과의 임재가 왜 필요한지, 왜 뜨거운 기도가 필요한지 계속 가르쳤다. 작년 1월 달부터 Encounter Weekend를 시작했다. 매주 100명, 150명 ,200명씩 Encounter를 했다. 전 성도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한 달에 100불 받는 월급쟁이들이 어떻게 20불씩을 내고 Encounter를 갑니까?”라고 힘들어했다. 그래서 가야 되는 이유에 대해서 매주 선포했다. “교회에 돈이 있지만 지원해 주지 않는다. 그런 수동적인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지 마라. 여러분들이 돈을 내고 가야, 여러분이 가치를 부여하지 않느냐. 돈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치유를 위해서 여러분의 심령의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서 물질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아멘” 아멘은 참 잘한다. 그런데 그 아멘을 믿음으로 보이라고 요구하였다. 우리 교회는 헌금이 제법 많이 나온다. 선교지에서 자랑할 만큼 많이 나온다. 그런데 지원해 주지 않는다. “야, 우리 목사님 인색하다” 인색해도 좋다. 나는 여러분의 믿음을 키우는 것이 목적이니까. 여러분이 고기를 낚게 만들어야지내가 매일 고기를 갖다주겠느냐. 자신들의 축복을 위해서 자신들이 축복의 근원이 되라. 병원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기 위해, 신경정신과 의사를 찾고 약을 먹고 엄청난 돈을 투여하면서 왜 20달러 내고 수양회에 가서 하나님 만나고 치유 받지는 못하느냐? 생각을 좀 바꾸라고 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생각이 바뀌었다. 올바른 말은 사람을 바꾼다. 한 주에 100명, 200명씩 들어가서 매주 사람이 바뀌어져서 나오는 것이다. 주일 예배마다 간증이 쏟아진다. <하나님을 만났다. 치유를 받았다. 내 남편이 변했다. 내가 변했다. 가정이 확 바뀌어졌다. 우리는 오랫동안 힘들어서 이혼하기 직전이었는데 Encounter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에게 있던 귀신이 떠나갔다....>

온갖 간증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주 6개월간을 지속했다. 지금은 한 달에 두 번 한다. 매월 첫째 주는 남자 Encounter. 매월 둘째 주는 여자 Encounter. 청년들은 따로 두 달에 한 번씩 청년 Encounter를 한다. 청소년, 중 고등부는 따로 Encounter를 하고. 어린이들은 방학때 Encounter를 한다. 6개월이 지났는데 그래도 셀은 300개로 변하지 않고 요지부동이었다. 300개에서 375개로 조금 늘어났다. 필자는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자연적 성장은 폭발적 성장이 아니다. 자연적 성장으로 만족할 수 없다. 수평이동으로도 필자는 만족할 수 없었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야지 수평이동 되어서는 안 되니까. 그래서 발버둥을 쳤다.

창세기 1장 28절을 계속 전파한다 보니까 깨달음이 왔다. 이게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깨달음이 왔다. 나의 역할은 계시를 전달해서 사람들로 믿게 하고 확신케 하고 움직이게 하는 일인데 자꾸 율법적으로 해라. 해라. 해라만 하니까 깨달음이 안 오고 하려니까 고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를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때로부터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밤낮으로 전달했다. 하나님의 계획은 폭발적 성장이다. 여러분은 가능하다. 여러분 속에 아담에게 주신 축복의 씨앗이 뿌리내려져 있다. 아담에게, 하와에게 이 축복을 명령하셨고, 그 놀라운 번성의 능력을 주셨다면, 여러분 안에도 있다. 여러분이 태어날 때 아담의 씨앗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여러분이 아담의 후손이라면분명히 여러분 속에 축복의 권세가 들어있다. 번성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지난 7월말에 필자의 사모와 함께 대화하는 가운데 성도들이 어렵고 힘들다라는 말을 들었다. 필자의 사모는 영감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다. 필자가 좀 마음이 약해서 주춤주춤했다. 주일날 사모에게 설교하라고 했더니 강단에 올라서서 하는 말이 “왜 성장하지 못하느냐? 왜 생각을 바꾸지 못하느냐? 3개월 안에 전부 다 폭발적 성장을 경험할 것이다.” 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면서 자기 제자들을 부르더니 여자 구역장 들에게 40개, 100개 만드시오. 60개, 144개 3개월 안에 만드십시오. 강하게 지시를 하는 것이었다. 필자도 남자 제자들을 다 불렀다. “부목사님, 3개월 안에 12개 이상 만드십시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습니다. 가르칠 만큼 가르쳤습니다. 방법은 다 알고 있습니다. 들을 만큼 다 들었습니다. 이제는 움직이세요.” 또 다른 분을 불렀다. “몇 개입니까?” “3개입니다.” “12개 만드십시오. 12제자를 만드십시오. 예수의 열두 제자 비전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믿음을 보이세요” 밀고 나갔다. 그랬더니 다음주에 다시 G-12 모임을 모였는데 다들 보니까 아직도 깨닫지 못한 얼굴이다.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것 보면 압니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 있겠습니까? 내 탓인데.. 내가 비전을 주지 못한 것인데,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그 다음에 엄포를 놓았다. “3개월 안에 목표 달성 못하는 사람은 열두 제자에서 제외된다.” 그들은 제 제자가 되는 것이 꿈이거든요. 그래야 실크로드를 누비면서 다닐 수 있으니까. 열두 제자 달성 못하면 제외된다고 했더니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았다. ‘목사께서 농담이 아니구나..’ “부목사님도 예외 없습니다. 열두 제자 만드십시오.” 필자의 부 목사께서 참 신실하시고 굉장히 헌신된 분이신데도 불구하고 필자가 믿음이 없었다. 나이도 좀 드시고, (나이가 들면 사람이 보수적이고 안주적이 된다.) 그래서 봐 줄까 했더니 사모가 “당신은 또 인간적인 생각을 한다”고 그래서 “알았어, 알았어”라고 대답하였다. 3개월이 지났다. 제일 믿어지지 않았던 우리 부목사께서 3개월 만에 0에서 12개를 만들었다. 자기가 흥분이 되었다. “목사님, 진짜로 새 신자를 불러 모아보니까(물론 다 새 신자는 아니다. 기존의 신자 가운데서 빨리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구역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알콜 중독자, 마약경험자, 이제 겨우 예수 만난 사람, 교회는 몇 년 다녔어도 겨우겨우 다니는 사람들이 도대체 될까, 하면서 데려다 했는데 되더라구요” 12개 구역을 만들었다. 3개였던 사람이 3개월 안에 11개, 12개를 만들어 냈다. 인도에서 온 친구는 1개였는데 21개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3개월을 6개월로 미루어 주었다. 처음이니까 조금 봐 주었다. 그랬더니 40개였던 여자 집사는 100개를 만들어 냈다. 처음에는 “너무 한다. 너무해. 알파코스 인도하고 지도자학교, Post-Encounter, Encounter. 정신없이, 하룻밤도 집에서 남편 얼굴 볼 시간도 없는데 거기다가 구역까지 늘리라니 이제는 죽었구나” 그런데 더 신나더라는 것이다. 팀이 형성되더라는 것이다. 교회가 움직임이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한 미혼자매는 60개 였던 구역을 연말에 144개를 만들었다. <목사님, 사모님. 신난다>는 것이었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다. 다음 목표를 선정하라고 했더니 100개 달성했던 그 집사는 400개는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가능하고 신학적인 근본적인 원리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할 수 없다던 사람이 할 수 있다고 변화된 것이다. 작년 7월초에 375개였는데 8월에 리더들을 모아서 선포하고 추진하였을 때 현재 950개로 늘어났다. 이제 3년째인데 폭발적인 성장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지도자 학교가 시작되고 지도자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더 폭발전인 성장이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구체적으로 지도자들이준비되는 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내재된 정복의 능력

네 번째의 동사는 땅을 정복하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내용은 땅을 정복하라는 것이다.

주의 교회는 방어자가 아니라 공격자이다. 새로운 땅을 점령해야 한다. 복음의 미지지역에 들어가야 한다. 팀을 구성해야 한다. 여러분에게 팀이 없으면 힘이 없기 때문에 정복할 수가 없다. 여호수아에게는 열 두 지파 팀이 있었다. 각 지파마다 군사가 있었다. 여호수아가 명령하고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해 주었다. 가서 정복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머무르지 마시오. 기다리지 마시오. 치고 들어가시오. 사회 속에 들어가시오. 각 지역 속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도록 비상한 각오를 가지고 군사를 훈련시키기바란다. 하나님은 비전의 하나님이시다. 비전을 주셔서 끊임없이 정복하게 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그 일을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이라는것을 명심하시기 바란다.

모든 사람에게 내재된 지도의 능력

세 번째는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지도력을 주셨다.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 있는 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이미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나는 위대한 지도자이다.” 그래서 . 누구든지 주 앞에 나오는 자는 잠재적인 지도자이라는 사실을 G-12교회는 믿는다 초신자라 할지라도 잠재적인 지도자이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하실 것을 우리가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내용이다. 번성의 권세, 정복의 권세, 지도의 권세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성경을 성경대로 확고하게 믿기 바란다. 너무나 단순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은 우리의 생애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생명의 레마의 말씀이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끊임없이 선포하시오. 필자가 경험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한번 주신 성경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수십 번을 전파해 보니까 레마가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에는 이 세 가지의 말씀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한 가지 말씀(창 1:27-28)을 수십 번을 전파해 보았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다. 그래서 이 말씀이 필자의 말씀이 되었다. 번성의 권세를 소유하기를 바란다. 정복하기 바란다.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여러분들께서 G-12사역을 통해서 제자화, 비전 있는 목회와 선교사역을 하기 원하시면 지속적으로 말씀을 들어야 한다. G-12를 위해서 발버둥을 치시오. 필자도 이것을 배우기 위해서 엄청난 돈과 시간을 투자했고, 잠자지 못한 날이 엄청나게 많았다. 수많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하나님께 던지면서 조금씩 이해했다. 그러나 조금씩 이해해 나가니까 엄청난 축복이 임하는 것을 보았다. 알파 코스도 마찬가지이다. 컨퍼런스를 참석했더라도 한 번 들어서는 잘 모른다. 그것이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번 이상, 그리고 2년 이상 목숨을 던져서 시간을 바쳐서 발버둥쳐야 조금 깨달아진다. 깨닫고 나서 발버둥을 쳐야 이해가 되고 열매가 나타난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란다. 한국 사람들은 성미가 급해서 당장에 뿌리를 뽑아야 시원한데, 그런 일은 세상에 별로 없다. 그래도 비교적 알파는 확실히 빨리 열매가 맺혀진다. Conference를 참석하면 완벽한 manual이 있기 때문에 그 방법대로 하면 된다. 거기에 별로 첨가할 것이 없다. 그대로 따라하고 발걸음을 내 딛으면 1년 안에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길이 열려진다. 그러나 G-12는 총체적인 사역이기 때문에 그렇게 쉽지 않다. 그래서 정말 헌신하고 좀더 깊이 연구하고, 확고한 방향을 설정해야만 열매가 나타난다.

폭발적 성장을 위해서 오늘날에 필요한 기름부음이 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뜻이 번성과 충만 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즉 창1:27-28을 알라는 것이다.

두 번째 내적 치유의 경험이 필요하다. 사탄이 가정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부부관계가 깨어졌다. 그것 때문에 자녀들은 이미 상처를 안고 자라나기 시작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가 그 속에 앉아있다. 그들을 치유시켜야 한다. 치유 받지 못하면 지도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각 심령들을 치유하는 일을 위해서 생명을 걸어야만 한다. 치유 받은 자는 위대한 지도자로 일어설 수가 있다.

내적 치유를 위한 경험이다.

독일에서 6년 간 생활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좀더 신학 공부를 하기 원하시나 보다 생각했다. 신학공부도 잘했다. 실제로 짧은 시간 안에, 1년만에 독일어 공부를 마치고 1년 6개월만에 고전어(히브리어, 헬라에, 라틴어)를 플라톤 원문을 읽고 독일말로 번역하고, 국가시험을 치는 것까지 다 통과했다. 그것도 좋은 성적으로. 독일에서는 신학을 정식으로 석사과정이나, 박사과정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3개의 어학과정, 고전어 과정을 수료해야 만 한다. 국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서 신학을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독일 사람의 1/3 이상이 눈물을 흘리면서 떠날 수 밖에 없다. 그 정도로 아주 까다로운 시험제도이다. 감사하게도 1년 6개월만에 다 마치게 해 주셨고, 박사과정도 바로 시작하게 해 주셨다. 그랬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이 임했다. 그러니 무엇이 우선 순위이겠는가? 너무 잘 알고 있지만 행동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행동에 옮겼더니, 이혼선포를 당한 것이다. 그래서 또 금식을 했다. 결국 하나님께서 필자의 사모의 마음을 감동시켜주셔서 힘께 네 살 난 딸, 한 살 난 아들을 데리고 바르샤바를 거쳐서 모스크바를 거쳐서 알마티에 들어갔다. 모스크바에 들어가서 보니까 완전히 전쟁이 끝난 상황 같았다. 영하 10도, 20도 되는데 바람까지 부니까 체감온도는 영하 30도 넘어가는 것 같은데 사람들은 빵 한 조각 사기 위해서 줄을 100m이상 서 있었다. 그러다가 끊어지면 불평도 없이 다 흩어집니다. 한 쪽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서 뭐하는 줄이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모른답니다. 무엇인가 파니까 사기 위해서 서있답니다. 추운데. 또 없으면 끊어집니다. 모스크바에 먼저 와 있던 여자 선교사님 한 분이 필자보고 행운이랍니다. 무엇이 행운이냐고 했더니 하루 종일 서서 빵 하나를 샀는데 아주 딱딱하게 굳은 벽돌 만한 빵 한 조각, 버터 조금, 계란 두개. 그렇게 사놓고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정말 운이 좋다는 것이다. 지하철을 탔는데 어느 할머니가 양배추를 하나를 사서 바구니에 들고 탔는데, 지하철 그 칸에 있는 사람들의 눈이 그 양배추에 다 집중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뺏기 위해서 죽일 것 같다. 그런 상황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으니까 기가 막힌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비행기를 타고 알마티에 갔는데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에 텐산 산맥 줄기가 눈에 덮여 있는데 너무 아름다웠다. 그곳은 국제적인 스키장이 있는 곳이다. 우리 집에서 30분 거리에 스키장이 있는 줄 10년 동안 몰랐다. 2년 6개월 전에 알았다.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사모의 마음이 무겁죠. ‘내 손으로 아이들을 묻으러 왔구나’하는 마음이 드는 거죠. 공산주의, 모슬렘국가, 생판 모르는 곳, 이제는 먹을 것도 없는 곳.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성령께서 음성을 주셨다. “내 딸아, 여기가 네 집이다.” 위로를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신 줄 알았고 위로를 받은 후 필자의 사모가 같이 와서 사역을 시작했다. 사역을 시작했지만 워낙 사역이 힘들고 지쳤지만 필자로서는 너무너무 기쁜 일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께서필자를 부르셨다는 그 사실이 너무너무 감격스러웠다. 선교비가 없어도 좋고 아무도 몰라줘도 좋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셨으니까 생명을 다해서 사역을 해야겠다. 그렇게 생명을 다해서 사역을 하니까 또 고충을 당하는 게 필자의 사모이다. 필자하고 대화하길 원하는데 대화할 시간이 없다. 알마티에서 사역하고 러시아 말도 모르고 통역도 시원찮죠. 통역은 한국말을 모르고, 필자는 러시아말을 모르고. 그러니까 서로 배우는 것이다. 북한에서 만들어낸 조선어사전을 매일 들고 사는 것이다. 칭의란 말, 구속이란 말이 없다.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 고생고생 하면서 5년이 지난 후 성령님께서“이제부터는 러시아 말로 설교해라”고 말씀하셨다. 배운 적도 없는데 그냥 시작했다. 성도들이 얼마나 은혜를 받는지 설교하다 막히면 성도들이 좋아서 박수를 치고.. 이게 가족이더라구요. 선교지에 들어갔는데 말도 모르고 어려우니까 더 발버둥을 친 것이다. 그러면서 알마티에서만 사역한 것이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1주일에 한번씩 카라간다라는 도시를 왔다 갔다 하면서 개척교회를했다. 그리고 차를 타고 250km떨어진 비시켓의 수도인데 거기도 205km밖에 안 되지만 가는데 다섯 시간 이상 걸립니다. 거기를 일주일에 한번씩 왔다갔다하고.그러니까 집에 있을 날이 없다. 사모는 말은 모르지요. 아이들은 데리고 있지요. 먹을 것은 없지요. 차도 없지요. 선교비도 제대로 없지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러니 필자에 대한 원망이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필자는 한다면 하는 성격이니까 마음에 상처가 쌓일대로 쌓인 것이다. 대화를 해도 잘 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필자는 사역에 미쳐버렸으니까.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자들은 대화할 상대가 필요하다. 들어주기만 해도 다 되는데 필자가 들어주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는 필자 나름대로 변명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나는 주님을 위해 생명을 걸었는데 당신의 헌신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자기는 죽을 힘을 다해 따라와도 필자가 너무 헌신되어 있으니까 아내를 돌보지 못하고 가정이 서지 못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사역하고 돌아오면 다툼이 벌어지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암흑이 있는 것이다. 마음이 쉬지를 못한다. 평안이 없다. 괴로웠다. 필자의 아내도 괴롭고. 그런 중에 1995년도에 하나님께서 금식을 명령하셨다. 40일 동안 금식을 했다. 한국에 와서 금식하는 동안에 저희 성도들에게 참 감사한 것은 필자가 금식하고 출발하니까 그 다음부터 우리 교인 전체 (당시 1000명이 넘는 교인이)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적어도 하루를 저를 위해 금식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그래프를 다 그렸다. 40일 금식동안에 필자의 부 목사님은 필자를 위해서 30일 금식을 했다. 우리 대교구장들은 필자를 위해서 3주 동안 금식을 했다. 소교구장들은 필자를 위해서 2주간 금식을 했다. 구역장들은 필자를 위해서 1주일을 금식했다. 성도들은 최소한 하루에서 사흘간을 금식했다. 금식 40일. 금식 전 10일, 금식 후 20일. 70일을 저희 교인이 필자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 스텝들도 너무 감사한다. 필자를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해 주는지. 부족한 점 많고 성미도 급하고 하나님 일이라면 순종하고 나간다고 하지만 때로는 마음 상할 때도 있고,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렇게 필자를 사랑했다. 70일 금식을 필자가 몸으로 받았다. 그러니까 40일 금식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너무 쉬웠다. 그렇게 기도를 해 주니까 필자가 비전을 받은 것이다. 필자는 40일 동안 금식해보니까 솔직히 기도가 안 되더라구요. 솔직한 말이다. 그냥 하루 종일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금식하기 전에 너무 지쳐서 “하나님, 석 달만 쉬게 해 주세요. 남들은 3년 사역하고 1년 쉰다는데 나는 지금까지 한번도 쉬지 않았다. (지금까지 13년 동안 한달도 쉬지 못했다.) 우리 교회는 왜 이 모양입니까? 왜 쉬게 안 하십니까?” 하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40일 금식기도를 명하셨다. 40일 동안 쉬었다. 안 먹고 아무 것도 안하고. “하나님, 성경 1독만 하게 해 주세요.” 40일 동안 성경1독만 했다. 꼼꼼하게 성경을 읽어야 되겠다. 그렇게 성경을 읽어나가는데 28일째 요한 복음 11장에 걸려드는데 그 말씀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얼마나 깊이 임하는지, “내가 네게 요구한 것이 무엇이냐? 믿음 하나밖에 없지 않느냐? 그래서 내가 너에게 믿음의 은사를 주지 않았느냐? 믿으라. 나를 철저히 믿고, 어려워도 믿고, 잘 되도 믿고 나만 의지하며 살아라. 믿으면 내 영광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리라” 얼마나 기쁘던지 밤중에 같이 40일 금식하는 사람들을 다 깨웠다. “다 일어나라. 하나님께서 주신 음성을 들어봐라. 믿으면 하나님께서영광을 보여주신다고 했다. 물질이 없어서 선교 못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뭔가 부족해서, 학력이 부족해서, 뭐가 없어서 안 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을 밀어주는 후원교회가 없어서 안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이 부족해서 안 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나가야 한다.” 밤새도록 이야기하고나서 다음날 생각해 봤다. ‘뭘 믿을까? 하나님 무엇을 믿을까요.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내 복음의 말씀으로 카자흐스탄 전체에 있는 민족들, 실크로드에 있는 민족들의 의식을 바꾸어주어라” 그러시면서“네 앞에 한 영혼이 있을지라도 마치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앉아 듣는 것처럼 복음을 전해 주어라” 그런 마음을 주셨다. “알았다.” 그때부터 비전이 시작된 것이다. 얼마나 기뻤던지 28째부터 피곤하지 않다. 너무 기뻐서 빨리 금식이 끝났으면 좋겠는데 이제 금식 중단할까. 비전 받았으니까? 그래도 해야지. 밀고 갔더니 하나님의 일이 끝나지 않았다. 38일째 되니까 손이 흔들리고 기도원에서 하루에 네 번씩 예배를 드리는데 강사가 두 세 개로 보이는 것이다. 30일이 넘어서면서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카자흐스탄에서 사모가 왔다. 옆에 있는데 금식을 하니까 영적 상태가 느껴지는데 마음이 꽉 닫혀 있는 것이다. 굉장히 힘들어 하는게 느껴졌다. ‘이상하다. 왜 그럴까?’ 필자가 그런 쪽으로는 둔한 사람이다. 멀리만 내다보지 가까운 데는 느끼지 못하는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셨다. “네 아내를 바라봐라”는 마음을 주셨다. 보니까 아주 절망할 대로 절망하고, 포기할 대로 포기해서, 이혼은 못하니까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내가 당신을 위해서 아무말하지 않고 내가 죽으면서 섬기겠다. 또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당신과 함께 사역하겠다는 마음이다. 그래서 방으로 내려와서 “여보, 나하고 이야기 좀 해.” 그랬더니 영적인 사랑을 깨닫고 “뭘 이야기하자는 건데요?” “마음을 열어봐. 이야기를 해야 돼. 하나님께서 나에게 깨닫게 해 주셨는데 당신이 지금 마음의 문제가 있대.” “나 아무 문제없어요. 당신이 하라면 하고, 기도하라면 기도하고 사역을 도우라면 돕고 아이들 키우고.. 나 아무 문제없어요.” 기가 탁 막혔다. 분명히 문제 있는 거 아는데. 그래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했더니 사모가 하는 말이 “나 건드리지 말아요. 충분해요. 지금까지 희생할 만큼 했고, 주님 사랑하고 복음 위해서 죽을 각오되어 있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선교사로 부른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이혼하면서까지 내 생을 찾고 싶은 마음도 없고 순종 할테니 나를 건드리지 말아요. 마음을 열라고 하지 말아요” 남자는 여자가 마음 안 여는 것같이 괴로운 것이 없다. 아무리 잘 해도 소용없다. 여자의 마음을 얻는 과정이 중요하다. 너무 괴로웠다. 참 마음이 아팠다. 처음으로 ‘내가 많이 아내에게 잘못했구나.’라는 마음이 들었다. ‘내 옆에 있는 내 아내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남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이게 사역의 본질인가? 이게 똑바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인가?’ 이런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계속 나눴다. 당신도 나를 알지 않느냐. 내 성격적으로도 아마 당신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을 것이고.. 그러나 이것이 다 주께서 나에게 주신 소명감이 마음속에 있어서 해 온 것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여자들은 행동으로 보기를 원한다. 그것을 전에는 해 주지 못한 것이다.38일째 아내가 두개로 보이는데 필자가 무릎을 꿇고 “여보, 나를 용서해야 돼. 또 하나님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나도 그것도 용서해야 돼. 날 진심으로 용서해 줘. 내가 당신에게 남편으로서 해야 할 역할은 하지 못하고 사역자로서의 역할만 하고 살아온 것을 용서해 줘. 당신이 원하는 만큼 내가 할 수 있다고 약속할 수는 없지만 나는 최선을 다 할 거야. 그것만 믿어 줘. 당신과 내가 회복되지 않으면 난 사역할 수 없어. 내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고 함께 거하므로 말미암아 주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지 않고는 난 사역할 수 없어. 그리고 내 자녀들도, 아이들도 우리 모습을 보잖아. 용서해 줘” 빌었다. 그랬더니 필자의 사모가 자기 마음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나는 절대로 내 마음을 열지 않겠다.’ 이런 결심을 오랫동안 해 왔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말을 해도 안 되니까. 포기한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자기의 성령의 감동으로 느껴질 때 울면서 필자의 품에 안겨서 아니라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그러면서 그날 저녁에 하나님께서 엄청난 치유를 주셨다. 그때부터 본질적인 사역이 시작되었다. 사모가 행복하면 교회가 행복하다. 사모가 행복하면 목사님도 행복하다. 우리는 인간이다. 사역만 있으면 살 것 같죠? 아니다. 우리의 심령이 있어야 살아난다. 그 다음부터 우리 부부사이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부부 사이가 회복되니까 여성사역이 일어났다. 필자의 사모가 치유 받지 못했으면 여성사역이 일어나지 않았다. 필자는 여성이라는 사역의 부분은 건드릴 수 없다. 남성의 한계 안에서 여성에게 복음을 전하고 제자화 하는 정도의 사역은 할 수 있어도, 여성의 삶 속에 파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있는 깊은 구석을 touch하는 실증 있는 사역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여성들의 심령가운데 회복이 일어나지 않으면 절대로 여성의 지도자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고 나서 부부사이가회복되고 나니까 첫 번째 가정의 회복이 일어났다. 아이들이 그것을 느끼게 되었다. 행복하다고 했다. 너무 좋고 마음이 평안하다고 했다. 필자가 봐도 아이들이 선교지에 있는 불안감, 집에 와도, 아빠는 정신없이 사역만 하고 엄마는 거기에 불만이 있고 감추지만, 드러내지 않았지만, 느끼는 두려움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 아이들이 엄마가 존중하는 아빠의 사역을 자기들도 존중하게 되었다. 사모가 불평을 하기 시작하고 불편함을 느끼고 사역에 헌신하지 않게 되면 자녀들은 엄마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목사가 되기 싫은 마음이 일어난다. 교회에 대한 관점이 틀려지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상이 찌그러지는 것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부부 사이에 회복이 되고 치유가 되니까,필자 부부만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회복되고 가정이 회복되어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평안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피곤해도 집에 오면 쉴 수 있다. 대화가 되니까, 마주 앉아 차를 마실 감동이 일어난다. 전에는 피곤하니까 빨리 자는 게 중요했다. 그런데 차를 마시고 쉬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아내가 하는 말이 들린다. 전에는 귀가 막혀서 내 것 밖에 몰랐는데, 나에게 순종하는 게 좋은 사모였는데 지금은 좋은 조력자가 되었다. 필자의 부족함을 감당해 준다. 목사들이 변하지 않는 이유가 부부 사이가 단절되어서 그렇다. 사모의 말을 가치 없는 것처럼 듣지를 않는다. 그런데 들어야 한다. 필자가 생각할 때 한국 목회자들의 최고의 맹점은 조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독불장군들이다. 그럴 때,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옆의 사람들은 다 아는데 자기들은 모르고 옳은 줄로 안다. 사모가 이야기하다가 지쳐서, 아니 처음부터 이야기하지않는다. 그것이 좋은 사모라고 가르쳤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사모는 이야기 해 주어야 한다. 사모 만은 조금 야당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당은 야당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변한다. 그 다음엔 본질이 변한다. 교회의 체질이 변한다. 분위기가 변한다. 성도들이 교회가 가정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냥 군사만은 안 된다. 가족적 군사가 되어야 한다. 아주 끈끈하게 뭉쳐진 가족적 군사가 되어야 한다. 그때 생명을 바치고 싶은 감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이다. 그러고 나니까 저희 성도들이 저희 부부를 보기만 해도 은혜를 받는다. 필자의 사모가 강단 위에 서기만 해도 박수가 우레 같이 쏟아진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1부는 남성 예배, 2부는 여성 예배를 드린다. 필자가 1부 예배에 너무 실망해서 2부 예배에 문을 열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일부러 참석하지 않았다. 문을 열었는데 깜짝 놀랐다. 2500명 좌석에 가득 메워졌다. 복도까지 앉고 서고 여자들로 꽉 찼다. 기대감이 얼마나 충만한지 스폰지같이 한 말씀, 한 말씀을 쭉쭉 빨아들이는 것이다. 무슨 말씀을 전했겠습니까? 남편에게 대항하라고 했겠습니까? 아니다. 우리에게 심령이 필요하다. 우리는 용서가 필요하다. 우리는 남편을 품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나라와 도시와 국가를 붙들고 9개월 동안 우리가 아이를 잉태했을 때 그 아이를 돌보듯이 기도 중에 이 나라와 민족을 붙들고 기도해야 한다. 부흥의 열기를 위해서, 부흥을 위해서 간구 해야 된다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을 때 여성들에게 불이 일어났다. 그렇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이다. 교회의 분위기가 확 바뀌어졌다. 만약에 필자의 사모에게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 부부가 진정한 화해와 치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엄청난 하나님의 보화를 놓쳐 버렸을 것이다. 절름발이 교회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만 하는 교회, 그런데 냉랭한 교회. 열심히 헌신된 교회, 그런데 관계는 없는 교회. 관계에 대해서 외치는데 관계는 형성되지 않는 교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국의 어느 공항에서 짐을 찾는다고 기다리는데 어느 목사님 한 분이 도움이 필요하다며 도움을 청했다. 보니까 비행기 안에서 잠깐 본 분인데 짐을 찾고 있었다. 그러면서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아주 선하시고 참 좋아 보였다. 서로 어디서 사역하느냐, 누구이냐 이야기를 하면서 참 좋으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모께서 와서 뭐라고 이야기하니까 “저리가 있어” 필자가 얼마나 쇼크를 받았는지... 필자한테는 그렇게 상냥하고 좋으신 분이 사모에게 한 “저리가 있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이 말 한마디가 본질을 보여주었다. 그 목사님을 비판하자는것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본질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성도들이 다 보고 있는데. 그런데 본질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변하는데 어떻게 변하는가? 성령의 감동으로 변하는데 필자가 알기로는 목사에게 성령은 사모이다. 우리의 귀가 닫혀 있어서 성령의 음성이 안 들린다. 너무 굳어 있다. 사모들은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 자기 남편에 대해서만은. 때로는 잔소리도 많이 한다. 그것은 여자의 본성이다. 그것은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잘 들어보면 중요한 것들이 있다. 흘려 하는 말이지만 남들이 하고 싶은 말을 사모들이 해 준다. 그런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러면 우리의 성품이 변화된다. 치유가 일어나야 한다. 남편이 들어주면 여자는 치유가 일어난다. 그래서 저희는 Encounter Weekend를 통해서 치유가 일어날 수 있도록 교회 분위기를 형성한다.

세 번째로 부부 사역자이다. 두 번째 이야기를 하면서 이미 곁들여 말씀을 드렸다. 부부가 함께 사역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담과 이브를 축복하셨다. 함께 사역해야 한다. 조력자이다. 조력자 없는 지도자는 절름발이이다. 완전하지 않다. 조력자는 어떤 면에서 조력자인가? 일을 돕는 조력자가 아니고 성품을 돕는 조력자이다. 절름발이가 되지 않도록 도와준다. 점검이 이루어진다. 아내를 통해서 점검이 이루어지고 남편을 통해서 점검이 이루어진다. 둘 사이에는 밤낮으로 사역의 이야기를 해도 피곤하지 않다. 부부 사이에 내적 치유가 이루어지고 서로를 용납하고 듣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지면 이제는 그 분위기가 교회 안에 흘러 들어간다. 교회 안의 전 부부들이 그렇게 변화되기 시작한다. 교역자의 부부가 먼저 회복되어지고 관계가 형성되어지면 저절로 흘러 들어간다. 위에서 아래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부부 사역자간에 서로 간에 점검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은 함께 사역하는 길이다. 영성이 계속 향상된다. 서로가 진정한 위로자가 된다. 오늘 아침에도 필자가 굉장히 피곤하지만 사모가 옆에 앉아 손을 꼭 잡고 기도해 주는데, 얼마나 좋은지 피로가 싹 풀려버립니다. 이게 부부라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항상 같이 걸어가기 위해서 사모를 껴 안아주고 손목을 잡아주고.. 얼마나 좋은지. 미국에 처음 같더니 은혜교회에서 김삼성 목사 부부는 매일 손을 잡고 다닌다고 흉을 보더라구요. 그래서 “흉보지 말고 본 받아라.” 그랬다. 진정한 위로자, 참 동역자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필자의 사모는 굉장히 날카로운 사람이다. 필자는 흐리 멍텅한 사람이다. 간이 하나 빠진 사람 같다. 그런데 주님 뜻이라면 순종을 잘 한다. 그러니까 이런 사모가 필요한 것이다. 정확하게 점검을 해줍니다. “여보, 이럴 땐 이렇게 해야 되지 않을까?” 필자는 판단을 잘못한다. 너무 단순해서 사람만 좋으면 다 믿어버린다. 그리고 다 뺏겨 버린다. 실수하고. 그런데 최고의 비서를 필자는 항상 모시고 다닌다. 공산당 서기장 같은 서기장이다. 기가 막힌 조언자이다. 너무나 훌륭하다. 필자가 얼마나 만족한지 모른다. 필자가 자유롭다. 필자가 할 일을 다 처리해 주니까. 부부가 함께 사역하기 시작할 때 자녀의 사역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지게 된다. 얼마나 사역이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인생의 목적이 사역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목사님은 사역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 나가는데 사모는 앉아서 “좋은 대학 들어가서 좋은 직장 얻어야 돼.” 뭔가 초점이 안 맞다. 인생의 목적이 잘못 세워진다. 한 가정 안에서. 문제가 있다. 그러니 어떻게 교회 안에 올바른 비전이 전달되겠는가.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문제가 있다. 부부가 함께 사역할 때 비로소 삶으로서 사역을 하게 된다. 그래서 부부사역자가 필요하다.

네 번째로 거룩과 성결이다.

삶의 실패와 저주는 거룩함의 상실에서 오는 것이다. 틀림없이 죄악이 있기 때문에 사탄이 사역하는 것이다. 쓰레기가 있는 곳에 쥐가 모여든다. 챨스 크래프트가 말하는 치유사역, 축사 사역의 기본적인 이야기를 들어보면 쓰레기가 있는 곳에 쥐새끼가 모여든다는 것이다. 우리 속에 지저분한 죄악이 있을 때, 아주 불순한 동기와 생각이 있을 때 귀신은 사역한다. 악령은 사역한다. 삶을 괴롭힌다. 똑같은 원리이다. 성결함이 필요하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완전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말씀하시느냐? 하나님의 거룩함이 우리 속에 끊임없이 자라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비전도 더 강해진다. 거룩한 그릇 안에, 깨끗한 그릇 안에 있는 하나님의 비전은 더 강해진다. 투명해진다. 모든 사람에게 보여 진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비전이라도불순한 그릇에 담으면 그것이 불순하게 보인다. 그것이 문제이다. 분명히 말은 옳은데 그분의 행동과 동기와 모든 사람들과의 대화와 하는 방법을 보니까 너무 정치적이다. 상당히 정치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순간은 잘 될 수 있고 일은 처리되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불순함 때문에 불순한 사람이 모여든다. 속일 수 없다.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 성결해야 한다. 손해보더라도 성결해야 한다. 바보같이 보이더라도 성결해야 한다. 그러면 주께서 역사하신다. 그것이 폭발적 성장의 근본 원인이다. G-12사역 가운데 지도자가 성결하고 온전하고 주님 앞에 깨끗하면 깨끗하고 성결한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다. 돈을 사랑하지 않고, 명예를 사랑하지 않고, 진실하게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다. 거룩함과 성결함이 꼭 필요하다.

다섯 째로 용서의 삶이 매우 중요하다. 여러분, 내적 치유 사역을 많이 하는가? 해야 한다. 축사사역 많이 하는가? 해야 한다. 그런데 비결을 가르쳐 드릴까요? 최고의 치유의 능력이 어디서 오는지 아는가? 치유를 계속해 보라. 상처 입은 사람의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진리이다. 아무리 치유 사역을 해도 상처는 남아 있다. 흠집은 남아 있다. 기억은 남아 있다.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가? 용서를 가르쳐야 한다. 끊임없는 승리는, 완전한 치유는, 지속적인 치유는 용서를 배운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단순한 치유보다는 용서를 통한 치유를 원하시는 것이다. 인간적인 치유, 방법적 치유, 한번의 간헐적인 치유보다는 용서를 통한 깊은 치유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라는 것을 통해서 인간의 영 육과 혼의 완전한 치유를 겨냥하신 것이다. 용서가 필요하다. 용서를 배워야 한다. 용서만이 완전한 치유를 가능하게 한다. 교회 안에 용서의 비결을 가르쳐야 한다. 용서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해야만 한다.

<나 용서해. 나 용납해. 당신도 변할 수 있어. 나도 그랬어. 용서해야 해.>

필자가 독일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참으로 귀중한 것을 깨닫게 해 주셨다. 정말 본질을 알게 해 주셨다. 입술로 “나는 죄인이다.”라고 회개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일까? 그런데 예수 믿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본질적인 회개가 다가오게 되어 있다. 자기 본성을 깨닫고 나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하는 고백이 나와야 한다. 아내를 무척 사랑하는데 자꾸 다툼이 일어난다. 내가 옳은 것 같고 사모가 틀린 것 같아서 정확히 이야기하면 사모는 ‘내가 몰라서 그렇지. 내가 불교 가정에서 자라서 아무 것도 몰라서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제 말만을 다 듣다가 3년, 4년, 5년, 6년 지나고 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만 잘못한 것 같지 않거든. 나만 잘못한 거 아니잖아. 그러면서 대꾸를 한다. 그러면서 다툼이 자꾸 심각해지는 것이다. 다툼이 심각해지니까 너무 사랑하는 사람도 상처를 받는 것이다. ‘사랑하는데 왜 이렇게 내가 내 아내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나.’ 내 자신에 대한 실망이 일어난다. 절망이 일어난다. ‘내가 이런 사람인데 무슨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독일에서 새벽에 일어나서 매일 숲에 가서 기도를 한다.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날도 울부짖고 기도한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이구나. 나의 본질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고백한 것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원치 않는 것을 원하고 있구나. 오호라 곤고한 자여.' 그 다음 고백은 안 나오고 ‘오호라 곤고한 자여’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 도대체 이런 사람이 무슨 사역을 한단 말인가? 내 자신에게 실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막 울었다. 울면서 “하나님, 나는 죄인이다. 나는 선교사 될 수 없고,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나는 정결치 못한 자이다. 정말 몹쓸 인간이다. 나는 죄인이다.” 처음으로, 진심으로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막 흘러나왔다. 독일 가서 6년째 처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는데 “이제 알았느냐? 내 아들아.” 너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너는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아들을 내가 보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찬양이 되어졌다.그 다음부터 나를 부인해야 되겠다는 기본적인 마음이 생겨났다. 그전에는 내가 다 옳은 줄 알았다. 그때 필자가 마음에 결심을 했다. ‘내 평생에 내가 아무도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으리라’ 내가 죄인인데, 내가 용서받았는데 누구를 정죄할 수 있겠는가. 주께서 “이제 알았느냐?”하시면서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이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였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신학교도 안 갔다. 감사해서 너무 기뻐서 하늘을 날아갈 것같이 기뻤다.나는 선교사가 될 수 있다. 하나님, 이제 선교사가 될 수 있다. 기쁨의 감격이 넘쳤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 은혜로 받은 구원의 감격을 전해야 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마음의 감동이 일어났다. 아무도 정죄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싸우긴 또 싸웠다. 그러나 본질적인 변화가 있으니까 얼마나 필자가 빨리 변하든지... 회복이다. 그런데 회복은 용서를 통해서 온다. 내가 죄인인 것을 깊이 깨닫게 될 때,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복되고 은혜로운지, 이것이 은혜로만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갚을 수 있는, 한 숨에 탕감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속에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용서의 능력을 받으시기 바란다. 이것이 환경 조성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분위기 조성이라는 것이다. 그때 성장이 일어나는 것이지 일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본질이다.

여섯 번째 완전한 헌신이다. 우리의 성도들이 헌신되지 못할 때는 육신적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다. 끊임없이 자기 목적을 위해서 기도한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끝난다. 대학 입시 때만 새벽기도가 메어 터집니다.평상시에는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생각은 있는데 결단이 없다. 헌신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위해서 헌신할까 하는 마음의 결단이 없기 때문에 삶의 목표도 없고 행동도 없다. 헌신으로 이끌어야 한다. 성도들에게 얼마나 본질적 사역이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고, 한 인간이 본질적으로 변할 때 오는 파격적, 폭발적 능력에 대해서 우리는 알게 해야 한다. 간증이 생활화가 되어야 한다. 성도들로 하여금 간증을 통해서 사탄의 결박을 풀게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그래야 성도들이 헌신을 향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달려가게 된다. 성도들을 헌신으로 이끌어야 한다. 필자의 사모 말이 언제까지 기저귀를 채워 줄 것이냐는 것이다. 맞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훈련시켰더니 이제는 주인의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헌신이다. 완전한 헌신으로 인도되어야한다.

일곱 번째로 믿음과 비전이다. 하나님의 사람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삶의 비전이다. 위대한 하나님의 믿음의 사람은 꼭 믿음과 비전 때문에 오는 것이다. 비전 없이는 믿음이 생겨나지 않다. 또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목표를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서 내가 조금 할 수 있는 것으로 주님 앞에 조금 드리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서서 주님 앞에 해보는, 그래서 주님의 능력을 체험해 보는. 헌금도 그렇게 해보고, 사역도 그렇게 해보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 교회가 건축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300만 불이 들어갔다. 어디서 돈이 나왔겠는가? 우리 성도들이 헌금한 돈이 거의 100만불 된다. 한달 월급이 100불 성도란 것을 기억하라. 집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필자가 그랬다. “아파트 두 채 있는 사람은 한 채 파십시오. 하늘에 보화를 쌓으시오.” 어떤 사람이 독일로 이민을 가려고 아파트를 팔았다. 십일조로 2000불을 떼어서 교회에 헌금하였다. 자기 물질을 비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어디 가서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어 있다. 이런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 여러분의 자녀들도 동일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고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을 믿기 바란다. 믿음과 비전이다. 반드시 비전을 소유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이제는 6000명이 들어가는 성전의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는데 골격은 다 세웠는데 돈이 없어서 5년 동안 중단했다.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어디에서 돈을 주시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손으로 해라” ‘하나님, 우리 성도들이 힘을 다해서 이제는 진이 빠질 정도로 헌금을 다 했는데요?’ “해라” 그런데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건축회사에서 와서 하는 말이 이자 안 받고 필요한 부분들은 기본적으로지어줄 테니까 매월 갚으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은행의 융자가 없다. 1년 이자가 30%이다. 건축회사에서 하는 말이 10만 불만 선불로 주면 나머지 부분을 다 지어놓고 매월 갚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몇 년 동안 그렇게 했다. 약 20만 불 정도의 돈을 5년 동안 갚았다. 그랬더니 믿고 해 주었다. 교회를 건축했더니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셔서 우리 건축이 잘 되었다. 10만 불 만들어 드리겠다. 하나님께서 준비했을 것이다. 이제 곧 다음달에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이다. 충분히 자립할 수 있고 충분히 하나님의 역사를 받을 수가 있다. 실크로드를 뒤덮는 재정적인 축복을 우리가 받을 것이다. 터키를 변화시키고 중국을 변화시키고 중앙아시아의 모든 나라들을 변화시키는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다. 이루신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비전 때문에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하는 것이다. 비전을 받으시기 바란다.

여덟 번째는 성령이 주시는 현재적 음성이다. 잠언 1장에 보면 사거리에서 하나님께서 외치고 있다고 했다. 지혜가 부르짖고 있다고 했다. 모든 곳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고 있다. 우리가 놓치고 있다. 깊이 주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야 한다. 주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순종해야 한다. 그래야만 성장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발견한 폭발적 성장을 위한 여덟가지 기본 기름부음이다. 승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축복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6, 기름 부음의 회복

성도의 삶은 기름 부음으로 말미암아 인도 받아야 한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한 개인이 하나님 앞에, 혹은 한 지도자가 하나님 앞에서 기름 부음 속에 사역할 수 만 있다면 그 도시나, 그 교회나, 그 가정이나, 민족의 운명은 상당히 밝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 개인 개인이 얼마나 하나님의 기름부음 안에서 거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여기에 우리의 운명이 달려져 있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하나님은 큰 위기의 때에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사용하시는 것 같다.

열왕기상 18장 20절~46절 말씀.

「18: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께서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께서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18: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

18:23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필자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18: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18: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18:26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18: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18:28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18:29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필자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18: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필자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18: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18: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 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18: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위에 부으라 하고

18: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번 그리하라 하여 세번 그리하니

18:35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18:36 저녁 소제 드릴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께서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18: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께서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18: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18: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께서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께서시로다 하니

18:40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18:41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18:42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 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18:43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 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번까지 다시 가라

18:44 일곱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18: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18: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 갔더라」

하나님은 위기의 때에 움직이신다. 우리 인간이 ‘끝이다. 이제는 할 수 없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절망이다. 전도할 수 없다. 사회는 타락했고 교회도 전통적으로 기울어져서 이제는 더 이상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라는 위기의 때에 하나님은 그때 비로소 일을 시작하실 수 있다. 인간이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내가 나의 지식으로 모든 것을 계획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다. 우리의 힘이 다 소모되어지고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드디어 발을 옮기기 시작하시는 것 같다. 그러므로 위기의 때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어떤 일을 원하시는지우리는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모든 문이 닫혀지고 모든 희망이 사라질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시작한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무수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모든 것이 이제는 하향길에 들어섰다고할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이 되어주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시고, 새로운 엘리야와 같은 사람을 세워주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켜 주신다고 필자는 확신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은 두 나라로 갈라졌다. 큰 배교에 빠졌다. 이스라엘 나라의 왕은 이방여자와 결혼하여서 이방신을 섬기기 시작했다. 이 위기의 때에 하나님은 한 사람, 엘리야를 사용하셨다. 이것이 필자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 하나님에게는 한 사람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헌신된 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한 사람. 하나님의 비전을 깨닫는 한 사람.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한 사람.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서 반드시 일을 성취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사람이 없는 것 같지만, 심지어 엘리야도 그렇게 생각했다. 다 죽고 나만 남았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칠천을 남겨두었다고 이야기하신다.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제는 희망이 다 사라졌고, 교회는 계속 기울어지고 있다. 사람이 없다.’라고 할 때 ‘아니다. 숨겨 논 사람이 있다.’ 그래서 오늘 여기도 몇 백 명의 숨겨 논 사람들이 온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위기의 때에 하나님의 찾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이러한 위기의 때에 아무 사람이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아멘’의 사람을 찾으신다. 위기를 보고, 불가능의 상황을 보고, 할 수 없다고 하는 상황을 눈으로 직접 보고, 피부로 체험하고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말씀하시면 “아-멘”할 수 있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신다는 것이다. 그 아멘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선택하시고하나님께서 비전을 주시고 하나님께서함께 하시면 불가능의 일들이 그 한 사람을 통해서 가능으로 변화되는 것을 필자는 확신한다.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위대한 부흥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어떠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까? 위기의 때에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고 있습니까?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다. 엘리야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필자는 13년 동안 선교사역을 해 오면서 깨달은 단 한 가지 사실이 있는데 하나님은 능력 있는 사람을 찾지 아니하고 학벌 있는 사람을 찾지 아니하고 재력 있는 사람을 찾지 아니하고, 선한 사람을 찾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의 성격은 아직 부족하고 능력은 없으며 경험도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서 살아가기로결단하고 그것을 추구하고 그 마음이 변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진실한 뜻을 따라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 그 사람을 들어서, 정말 보잘것 없는 사람을 크게 사용하시는 것을 필자는 보았다. 필자도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사역의 경험이 없이 선교지에 들어갔다.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설교학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설교의 경험도 없이 들어간 사람이었다. 다만 제 마음 중심속에 “하나님, 한 명이라도 좋으니 저를 위해서 구원하여 주시고 저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심령하나만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은 제가 그 마음 중심을 지키고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한걸음, 한걸음 인도해 주셨는데 잠깐 교만해지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멈추는 것 같았다. 필자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사라질까봐 참 두려운 마음으로 살았다. 혹 내가 잘못하여 하나님의 임재하심을떠나게 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계시가 사라질까하는 것이 제일 두려운 삶의 제목이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사용하기 원하시면 어느 누구도 반대할 수가 없다. 어느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21절에 보니까 왜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는지 엘리야의 심정을 보여주는 귀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다. 21절에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불러 모아 그들에게 가까이 나가서 말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께서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께서면 그를 좇을찌니라” 백성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말은 모두 다 엘리야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모두가 이방을 섬기고 있었고 아무도 여호와를 섬기고자 마음의 결단을 할 수 없는 그때에 엘리야는 비록 나와 함께 하는 자가 없다 할지라도, 비록 나를 이해하는 자가 없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 편에 서서 내 백성들을 하나님 편에 돌리겠다는 마음의 중심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열두 명의 팀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홀로 굳건하게 서서 하나님을 찾았다. 왜 오늘 이 말씀을 전하는가? 여러분 모두는 홀로이다. 무언가 새 사역을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의 결단이 일어난 줄로 안다. 진정한 의미의 사역을 시작해야겠다는 결단이 일어난 줄 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알아야 한다. 모두 다 나를 대적하고 있다. 모두 다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모두다 제자화에 대한 진실한 의미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이때 여러분이 진정으로 주님 앞에 서서 “하나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선교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제자화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음화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부흥이다. 주님, 나는 이일을 위해 헌신하기를 원한다.” 하는 결단이 있느냐는 것이다. 내 백성, 내 교회, 내 민족을 예수 그리스도의 불타는 제자화의 심령으로 끌고자하는마음의 중심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 마음의 중심만 결단되어지고, 내 마음이 정해져 있다면, 머뭇거리지 않는다면, 두 사이에서 왔다갔다하지 않는다면, 내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능히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엘리야와 같이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리고자 하는 마음의 중심이 있는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믿기 바란다.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하심. 예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자 하는 마음의 중심으로 불타 올랐던 사람이었다.

22절-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

24절-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께서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참 하나님께서 누구인지를 알게 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물질의 풍성함, 좋은 자리, 평안한 생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우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살아가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알게 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기뻐하셨다. 마음의 중심이 문제이다. ‘우리의 심령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 여기에 문제가 있다. 물론 여러분의 자식 문제도 있다. 남편 문제도 있다. 직장문제, 장래문제도 있다. 아파트 월부금 문제도 있다. 여러 가지 문제들이 여러분의 삶을 얽어맬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확실히 알고 있는 단순한 믿음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심령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지 않겠냐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리라는 약속의 말씀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유효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이것이 Calling이다. 이것이 주님 앞에서의 헌신이다. 많은 어려움과 곤란이 있고, 온 사람이,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 전체가 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떠났을지라도 엘리야는 그 마음의 중심이 변치 않았다. 또 하나님께서 왜 위기의 때에 엘리야를 선택하셨는가?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놓치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 안에서 비전을 받았다. 그것은 불가능한 비전이었다. 사백 오십명의 바알의 선지자, 거대한 영적전쟁, 엄청난 영적전쟁이 갈멜산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어쩌면 여러분 앞에도 그와 같은 영적전쟁이 있을지 모른다. 두려워 떨겠습니까? 지혜롭게 그만 두겠습니까? 타협하겠습니까? 주님의 뜻이 분명히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엘리야에게는 결단이 있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비전을 받았다. 대적하라. <영적전쟁에 승리하라.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은 심령들을 일으켜 세워라. 예언의 음성을 들으라. 선포하라. 그들을 살려라. 무덤에서 끄집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인도해 내어라. 각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Calling을 다시 알게 해 주고, 주를 위해 헌신하도록이끌어 내어라. 거대한 부흥의 운동을 일으켜라.> 바로 이것이다. 시대마다 위기의 때에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람을 찾으신다.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해서 위대한 부흥을 가져오신다. 그뿐 아니라 엘리야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선지자 학교를 준비했다. 멘토링했다. 엘리사를 준비했다. 수많은 그의 제자들 가운데 그의 후계자를 선출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이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 영적 전쟁에 담대하게 나아가서 맞붙을 수 있는 사람, 친밀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사람을 찾기만 한다면 그를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와 같은 사람을 오늘날 찾고 있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G-12사역이 문제가 아니다. 알파사역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심령이 문제라는 것이다. 심령이 준비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면 하나님은 여러 가지 전략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수 있다. 그 시대에 가장 합당한 전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비전을 주시고 비전을 성취할 수 있는 전략을 주시고, 목표를 설정해 주시고 달성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 모든 일을 위해서 우리는 기름부음을 회복해야만 한다. 민족의 기름 부음을 회복해야 한다. 영적 환경을 새롭게 바꾸어 나가야 한다. 기름부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엘리야는 영적 능력대결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두 송아지를 취하였다. 한 송아지를 취하여서 바알 선지자들에게 말했다. “너희 신을 부르라. 불로 응답하는 자가 참 신, 참 하나님께서시니라.” 그들은 오정이 지나도록, 늦은 시간까지, 아니 온종일 바알의 이름을 불렀다.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묵묵부답이었다. 그가 어디에 갔는지, 묵상을 하고 있는지, 잠깐 길을 떠났는지…불러라, 바알을 불러라. 참으로 능력있는 자인지, 참으로 현존하는 자인지, 참으로 너희를 인도하는 자인지, 참으로 그가 너희와 함께하는 참 신인지 보여라. 묵묵부답이었다.

하나님의 전을 회복하라

그때 엘리야가 한 일이 있다. 민족의 기름부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무너진 백성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 온 백성의 심령을 주께 돌리기 위해서 한 일이 있다. 기름 부음을 위해서, 기름 부음의 회복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엘리야가 한 일을 살펴보면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 알 수가 있다. 30절을 읽어보겠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필자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여호와의 단을 수축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잠자는 예배를 깨우라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기대감이 사라졌다.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지 못하고 있다. 형식적으로 다니고 있다. 기독교가 율법의 위험 속에 빠져들 위험성 속에 있고 형식주의로무너져버릴 수 있는 위험성 속에 빠져 있다. 수많은 거대한 성전은 세워지고 있다. 그런데 그 자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차고 넘치냐는 것이다. 여호와의 단에 하나님의 기름이 사라지면 어떻게 백성들이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겠냐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여호와의 단을 회복해야 한다. 경배를 회복해야 한다. 기도의 단을 회복해야 한다. 말씀이 사도적 기름부음으로 넘쳐나도록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 성령님께서 임재할 수 있는 환경을 우리가 준비해야만 한다. “하나님 하시옵소서. 하나님 하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넘어서서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할까요?” 질문할 수 있는 태도가 되어야 한다. 여호와의 단이 회복되어지면 모든 것이 회복된다. 예배의 회복이 매우 중요하다. 주일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셀을 회복해야 한다. 경배를 회복해야 한다. 참된 기도의 능력의 삶을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이것은 여러분이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첫 발걸음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경배의 삶을 시작해야만 한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호와의 무너졌던 단을 수축해야 한다. 자녀들을 주 앞에 돌리며 그들과 함께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그들과 함께 진정으로 여호와를 사모하는, 여호와께서 주신 뜻을 사모하는 대화들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세상적으로되어졌다. 자녀에 대한 미래도 너무나 세상적으로 되어졌다. 자녀의 미래를 근심한다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하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세속주의를 따라서 어떻게 세상에서 출세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하는 것을 추구하는 마음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단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단이 회복되어지면 사람의 생각이 달라집니다. 사람의 인생의 의미가 달라지고 목표가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신성한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엘리야는 먼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구축하길 원했다. 여러분의 삶에서도 여호와의 단을 구축하길 바란다.

<담임 목사들은 생명을 다하여 경배운동을 일으키십시오. 예배를 회복시키십시오. 아무런 프로그램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다 지워버리십시오. 예배가 회복되게 하십시오. 성도들의 심령이 살아나게 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다음 단계로 나아가십시오.>

예배가 회복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단이 회복되지 아니하면 그 이후의 모든 것들은 프로그램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들은 억지로 모여들 것이다. 불평이 일어날 것이다. 점점 모임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명있는 예배. 여호와의 단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는 예배. 이러한 예배가 우리 삶 가운데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하라

두 번째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회복하려면 31절에 보니까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필자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이는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질서가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영적 비전이 통치 질서를 따라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간헐적으로 여기에 하나님의 사람이 일어나고, 간헐적으로 저기에 하나님의 사람이 일어나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초대교회의, 아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모범으로, 하나님의 통치 질서를 회복하는 상태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에 빠져 있을 때, 위기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한 사람, 모세를 들어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들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통치 질서를 다시 회복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의 교회의 회복은, 영적 이스라엘인교회의 회복은 하나님의 통치 질서의 회복에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바란다. 여러분들에게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여러분들의 주위에 생기지 않는 이상, 여러분 한 세대의 부흥에 끝나버리고 말 것이라는 하나님의 지적이다. 엘리야는 위대한 영적 통찰의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히 여호와의 전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어떻게 수축했느냐?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했다고 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열 두 지파의 회복에서 온다는 것을 너무나 분명히 알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를 통하여 통치되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열 두 지파가 회복되어지면 이스라엘 전체의 회복이 함께 온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교회의 회복이 이를 통해서 이루어질 줄 필자는 확신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전략.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화 전략. 각 심령이 모두 열 두 제자를 거느리시길바란다. 열 두 제자의 통치 질서를 회복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어지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이 마지막 때 하늘에서 내려올 때 열 두 문이 있고, 열 두 기둥이 있고, 열 두 기초석이 새 예루살렘을 바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 질서가 하나님 나라 전체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왜 많은 교회가 다음 세대의 지도자 찾아내는 일을 힘들어하고 자기 아들에게 넘겨주는 일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까? 필자는 목회세습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왜? 만약 담임목사께서 자기 아들에게 자기에게 있는 영성과 기름부음을 100% 전달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전달하면 문제가 있다. 그러나 담임목사께서 그의 생애 열두 명의 제자를 두고 그들에게 그의 생애를 다 던졌다면 왜 세습 문제가 일어나겠습니까? 왜 후계자 문제가 일어나겠냐는 것이다. 왜 교회 바깥에서 후계자를 찾겠냐는 것이다. 통치 질서가 서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비전의 계승자가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계승자는 있어도 비전의 계승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전이 중단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서운 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 질서는 회복되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민족이 살 수가 있고, 하나님의 교회가 살 수 있고, 회복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를 회복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엘리야와 같은 심령을 지닌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회복하라

세 번째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회복하기 위해선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고

「필자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32절-33절)

가뭄의 때였다.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물 네 통을 구해왔다. 대단한 노력이다. 여호와의 불, 부흥의 불이 떨어지기 위해선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할 수 없다. 안 된다.” 라는 입술의 말을 그치고 찾아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을 찾으라는 것이다. 찾아라. 찾을 것이라고 했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에게 불가능은 없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네 통의 물을 찾아냈다.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33절-34절)

네 통의 물은 완전 숫자이다. 세 번 그리하라 계속 반복적이다. 나무 위에 물을 부었으니 어떻게 그 나무가 불에 탈 수 있겠는가?. 이방 신들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보여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그의 최선을 다했다.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35절)

36절에 위대한 기도가 나온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께서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께서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께서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께서시로다 하니」(36절-39절)

위대한 승리가 임하였다. 어떤 기도를 엘리야가 드렸습니까? 왜 엘리야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까? 어떤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마음의 중심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합니까?

36절의 말씀을 다시한번 살펴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백성들이 철저히 인식하게 만들라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 지도자 여러분.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이스라엘 중에, 한국 중에, 여러분의 비전 중에, 여러분의 가정 중에, 여러분의 개개인의 생활 중에, 여러분의 질병 중에 그분이 하나님 되심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과연 일상의 삶 속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 곤란이 닥칠 때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과연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이다.엘리야는 그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여호와여 당신이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임을 알게 하옵소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한국 땅에 당신은 주가 되심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주의 교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가우리의 주 되심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인생의 주관자임을 고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선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기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회복하라는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주께서 내 삶의 진정한 주가 되시고, 내 삶을 인도하시는분이라는 확고한 확신속에 거할 수 있어야만 한다. 백성들을 그 믿음 가운데로 이끌어 들여야 한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한국 땅 가운데, 한국 교회 가운데, 한국의 역사 가운데, 현실 가운데 그리스도가 주가 되심을 믿는 믿음이 있냐는 것이다. 그 믿음 가운데 하나님은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믿음을 심어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여러분의 입술을 따라, 여러분의 마음을 가지고 모든 백성 앞에 그리스도가나의 구주 되심을 마음껏 선포하시고 담대하게 선포하시고 공중에 여호와의 이름이 가득차도록 만드시기 바란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강하게 역사하실 것이다. 능력의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다. 단 한번의 기도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대한 응답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라- 영적 질서를 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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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기도도 아주 위대하다. 「내가 주의 종 됨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나의 Calling을 확실히 하라는 것이다. 엘리야가 엘리야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엘리야가 갈멜산 상에서 450명의 이방신들을 대적하고 영적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담대함의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확신에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13년 동안 주님 앞에 사역을 하고 있는데 많은 곤란과 어려움과 혹은 유혹과 시험가운데서도 필자를 선교사로 지금까지 남아있게 한 가장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선교사로 Calling했기 때문이다. 그 이상 아무것도 없다. 독일에 있을 때 필자가 신학 공부를 했다. 다른 사람보다 빨리 어학코스도 마치고 고전어,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짧은 시간에 독일 사람들도 통과하기 힘든 것들을 금방 통과하였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끝나자마자 교수님을 만나서 박사과정을 바로 시작하게 되었다. 물질적인 어려움과 많은 곤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축복을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필자를 선교사로 부르셨다. 박사 학위가 중요한지 아닌지는 잘 몰랐다. 지금도 아직 잘 모른다. 선교사로 부르셨다. Calling하는 순간에 부르셨다.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Calling이 왔다. 먼저는 미래를 위한 Calling의 Calling이고 지금은 진짜 Calling이 왔다. 「알마타로 가라」필자는 너무 좋아서 막 뛰었다. 그래서 “알마타로 가면 내가 소련의 첫 번째 선교사가 되기를 원한다.”라고 말하고 집으로 차를 몰고 갔다. 프랑트푸르트에서 뮌스터라는 도시로 차를 몰고 가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사모하고 이야기를 안 했다. 큰 일 났다. 가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해야 할 말이기에 이야기를 했다. “선교사로 가기로 했어” 당연히 놀랐을 텐데 아무 말 않더라구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더니 본(Bonn)에 가자는 것이다. 본에 한국대사관이 있다. 본에 왜 가냐고 했더니 아주 차분하게 “이혼 해야죠” 그러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아이를 둘이나 가진 사람이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또 지금 소련 전체에 위기가 닥쳐 상점에는 물건이 하나도 없고 빵 하나, 계란 하나 살 수 없는 그런 땅에 세 살 된 아이와 한 살 된 아이를 데리고 간다니 말이 됩니까?” 자기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그런 결정을 할 때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결정한 것은 내가 안 가면 당신은 혼자 가겠다는 말이니까 일찍 이혼해 줄께요” 필자가 얼마나 쇼크를 받았는지… 아무리 쇼크가 받았어도 하나님의 Calling이 있으니까 흔들리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금식했다. 필자는 문제만 생기면 금식한다. 금식만큼 능력 있는 게 없다.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지혜가 없을 때는 금식이라도 있어야 한다. 금식을 하니까 이틀도 못가서 사모가 필자에게 찾아왔다. 한마디로 섭섭하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한마디로 묻지 않은 것이. 필자는 알거든요. 물어보면 No인데…. 그리고 Calling이 너무나 분명하게 왔는데… 어떡하겠냐는 것입니까. 필자가 이야기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당신이 알잖아. 내가 그렇게 결정할 때는 내가 굶든지 고생을 하든지 나는 당신을 데리고 가겠다는 의미야. 함께 고생하자는 거야. 우리는 이미 한 몸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필자의 사모는 필자가 Calling을 선교사로 받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필자의 Calling을 바꾸려고 얼마나 애를 쓴 사람인지 모른다. 사모가 피아노 전공을 했다. 사모는 경희대 기악과를 졸업했고, 필자는 경희대 법대를 졸업했는데만나는 순간부터 필자는 Calling을 분명히 이야기했다. “나는 목사다. 그런데 선교사다.” 분명히 이야기를 했다. 자기는 선교사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왜냐고 물으니까 자기는 빨간 구두 신기를 좋아하고 귀걸이 하기 원하고 다이아반지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게 왜 문제가 되는데? 하나님께서 다이아반지 하지 말라고 했어? 빨간 구두 신지 마라 그랬나? 괜찮아” 속인 것이 아니고 진짜로 그렇게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전 떳떳한 것이다. 그런데 독일에서 그런Calling이 오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아내가 반대를 하니까 참 마음이 답답하였다. 금식을 하는데 필자의 사모가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한번도 해 주지 않은 것이 너무 섭섭했다고 말을 했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당신은 나를 알잖아.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야. 그것을 위해서 내가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내가 박사학위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Calling을 기다린 사람이야.” 만약 인간적으로 지혜롭게 생각했더라면 아마도 그 순간에 필자는 당장 박사학위를 택했을 것이다. 필자의 사모가 얼마나 보조를 해 주었는데. 자기 공부하던 것 중단하고 필자 먼저 공부하라고, 내가 먼저 박사학위 받은 다음 자기도 박사학위 받아서 함께 좋은 교수생활 하자고. 그것이 사모의 꿈이었다. 그 꿈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서 평생 꿈이 피아노 교수되는 것이었다. 또 진짜로 잘 했다. 지도 교수께서 지정을 해서 유학마치고 돌아오면 교수자리 주겠다고 한 사람이었다. 그 꿈을 안고 평생을 살아왔는데 남편을 만나고 인생을 망쳐버린 것이다. 아무리 아내를 사랑한다 할지라도 필자는 성경말씀 한 구절을 기억하고 있다. 「네 부모와 처자와 이 모든 것을 부인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농담이 아니고 필자가 결혼하기 전에 주님을 영접했을 때 누가복음에 있는 그 구절을 몇 십 번을 봤다. 진짜 처자까지 부인하라는 건가? 부모까지 이해가 되고 재산까지 다 이해가 되는데 처자까지 부인하라는 건가? 그러면 결혼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신중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음을 통하게 하니까 그건 어쩔 수 없더라구요. 둘 다 첫눈에 반해 버렸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반해도 하나님의 Calling은 절대로 변할수 없더라구요. 처음에는 얼마나 필자에게 불평을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5년이 지나고 6년이 지나고 7년이 지나면서 필자에게 고백하더라구요. “당신이 결정을 잘 했어” 필자가 속으로 “할렐루야! 6년 동안의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네” 어려움 만 닥치면 필자에게 “당신 때문에 난 이렇게 됐어. 당신 때문에 난 요모양 요꼴이 됐어. 당신 때문에 난 어려운 삶을 살고 있어” 그랬던 사람인데 그 이야기가 나오더라구요. Calling은 위대한 회복을 가져온다. 고난의 시기를 건너가야만 한다. 아무리 사방에서 무기로 싸임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Calling을 가진 자는 승리할 수가 있다. Calling을 받으셨습니까? 어떤 Calling을 받으셨습니까? 주님 앞에 점검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Calling을 붙들고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은 실수가 없이 당신을 부르셨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실수가 없이 부르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엘리야는 그렇게 기도했던 것이다. 「내가 주의 종 됨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첫 번째는 Calling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주의 종의 권위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의 권위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한국 땅에 그리스도의 권위가, 믿는 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종 됨을 불신자들이 알게 해 주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목사들을 욕합니까? 얼마나 비웃습니까? 얼마나 신자들을 얕봅니까? 벗어나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여호와여 내가 하나님의 종 됨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백성들로, 한국 사람이라 일컫는 모든 사람들은 크리스챤을 두려워하고 경외하고 존경하게 해 주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종 됨을 내 가족의 모든 식구들이 알게 하여 주옵소서. 내 부모가 인정하게 해 주옵소서. 내 자녀들이 인정하게 해 주옵소서. 내 자녀들이 부모인 내가 크리스챤인데 나 때문에 예수 믿지 않는 일이 없게 하여 주옵소서. 주의 종 됨을 알게 해 주옵소서.” 엘리야는 그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필자는 위대한 기도라고 생각한다. 한 마디 한 마디가 핵심을 찌르는 기도요, 한 마디 한 마디가 정곡을 찌르는 기도요, 한 마디 한 마디가 백성을 회복시키는 기도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기름 부음을 회복해야 한다. 영적 분위기를 변화시켜야 한다. 한국 교회 전체의 분위기를 완전히 변화시켜야 한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시고 이 일 때문에 엘리야를 찾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이 바로 엘리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확신하라

네 번째 동일한 36절의 말씀에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확신하라는것이다. 엘리야는 아직 불이 내리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었다. 450명의 바알의 선지자는 망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영적 전쟁에 승리할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이기 때문에. 실크로드는 회복된다는것을 필자는 확신하고 있다. 왜? 필자에게 명하신 일이기 때문에. 나에게 이 일을 위하여 헌신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필자는 확신하는 것이다. 중국 땅을 통하여 실크로드 전체를 통과하여 예루살렘까지 대로가 열려지게 될 것이다. 동방에서 대로가 열려진다고 성경은 말했는데 그 대로가 여기저기 열려지게 되는데 아랍권의 문이 열려지고 모슬렘권이열려지고 예루살렘까지 대로가 열려져서 수많은 민족과 족속들이 여호와의 전 앞에서 찬양하고 경배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필자는 그 날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고 여러분을 그곳으로 인도하길 원하는 것이다. 약속의 성취를 믿으시기 바란다. 확신하시기 바란다. 불신자, 신자 할 것 없이 사람은 확신 있는 비전을 가진 사람을 따른다고 했다. 그 확신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너무나 단순한 논리이다. 기도하며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서 그분의 확신 속에 내 마음을 던지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위대한 역사를 일으킨다고 필자는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을 성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러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꼭 여러분을 통하여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교회와 여러분의 도시와 우리 한국 전체가 완전히 변화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와 같은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렸을 때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셨다. 하늘에서 여호와의 불이 내려왔다.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완전히 핥아버렸다고 했다. 그때 모든 백성이 비로소 말하기를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이렇게 말했다. 백성의 고백이 들릴 때까지 우리는 영적 전쟁을 수행해야만 한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연합되어져서 살이 붙고 생기가 들어가서 군대를 이룰 때까지 우리는 기도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조그만 부흥의 출발점을 보게 될 때, 성령의 불길이 일어난 것을 보게 될 때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마귀의 견고한 진을 파괴하라

사단의 견고한 진을, 마귀의 견고한 진을 완전히 무너뜨려야만 한다. 교회를 묶고 있고, 기독교인의 심령을 묶고 있고, 우리의 손발을 묶고 있는 우상을 다 파괴해 버려야 한다. 39절~40절에 보니까 철저히, 하나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무너뜨려 버리라는 것이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우상의 잔재를 다 무너뜨려 버리라는 것이다. 하나님 이외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다 파괴해 버리라는 것이다. 주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교회 안에 우상의 잔재들, 세상과 타협하는 요소들, 헌신되지 못하게 하는 것들, 세상적인 모든 물질주의들, 세속주의들을 잘라버리라. 하나님은 헌신의 사람과 헌신의 교회를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사탄의 견고한 진을 완전히 무너뜨려야한다. 그때 주님의 위대한 부흥의 역사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해야 된다. 우리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의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무너뜨려야 한다.내 속에 있는 모든 우상을 철저하게 제거하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온전하게 역사하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기적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증거를 보이라

기름부음의 회복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종은 하나님의 증거를 보여야만 한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41절)

비가 올 조짐도 없었다. 엘리야는 믿음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이요 예언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이었다.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내가 듣나이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 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 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번까지 다시 가라 일곱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42절~45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들은 세상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한다. 말로 만 또는 단순한 선한 행위 만으론 그들이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 세상에 증거를 보여주어야 한다.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할 때, 아무도 보지 못할 때 여호와의 능력을 선포하시오. 기도 중에 하나님의 증거를 받으시오.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시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예언하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일을 성취하실 것이다. 이 일을 통하여 전 민족이,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믿기 바란다.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의 사람을 오늘도 찾고 계신다. 오늘 이 말씀을 던진 이유가 있다. 부흥이 오기 위해서 하나님께는 사람이 필요하다. 위기의 시대에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하다. 당신의 Calling은 무엇입니까? 애초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실 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성취하기 위해서 당신의 응답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Calling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나의 생을 헌신하십시오.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날이 속히 올 것이다. 지체하지 않을 것이다. 믿음으로 응답하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필자에게 실크로드의 비전을 주셨다. 필자는 단순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알마타에 갔는데 2000년에 하나님께서 중앙아시아의 많은 성도들과 카자흐스탄의 모든 성도들을 모아서 알마타에서 가장 큰 국립축구경기장에서 이만명이 모인 가운데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민족의 죄를 회개하는 대형 중보기도 모임을 열수 있는 기회를 베풀어 주셨다. 알마타에 있는 많은 현지 교회와 선교사님들 또 영어권 선교사님들이 연합해서 이 일을 이룩하였다. 인터콥에서 하나님의 비전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 함께 연합해서 이 일을 이룩하였다. 너무나 기뻤다. 그 당시 알마타에 이만 명 되지 않은 교인들이 있었는데 전 교인이 다 모였다. 교단을 초월해서 다 모였다. 민족의 죄를 회개했다. 러시아인들의 죄를 회개했다. 카자흐스탄인들의 죄를 회개했다. 우리들이 직접 하나님 앞에 범죄 한 사실을 고백하고 회개했다. 둘째 날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통령을 축복하며 청년들을 축복하며 찢어진 가정을 축복하며 도시를 축복하는 축복의 행사를 가졌다. 영적인 변화가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그 대회가 끝났다. 모든 성도들의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모슬렘 국가였다. 허가를 받는 것도 너무나 힘들었다. 그 대회를 치르기 3일 전에 대통령이 친서로 저희에게 허락을 내려 주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일을 해 나갔다. 한국에서 비행기 3대를 전세 내어서 중보자로 찾아왔다. 알마타로. 그런데 허가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일을 믿음으로 밀고 나갔다. 3일 전에 허가서가 떨어졌다. 우리는 기뻐서 뛰었다. 대회는 성공적이었다. 모든 대회가 끝나고 난 뒤에 필자와 몇 명의 목사께서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다. “하나님, 한번의 사건 만으로 끝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 무엇을 원하십니까? 카자흐스탄,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회복을 원하실진대이제 다음에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알기를 원했다. 진정으로 회복되는 것을 보기를 원했다. 엎드려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청년들을 준비하라」그리고 마음속에 명확한 목표를 보여주셨다. 「2010년도까지 실크로드 상에 1000개의 교회를 개척하라. 나에게 영광을 돌려라」그래서 2001년, 2002년, 올해... 계속 2010년까지 매년 7월 둘째 주에 청년 festival을 열기로 결정했다. 첫 해 약 1800명이 왔다. 작년 7월 달에 약 2200명이 왔다. 올해도 수많은 신청자가 있는데 몇 천 명이 몰려오기를 원하는데 장소가 허락되지 않아서 아직 6000명이 들어갈 성전이 다 완성되지 않아서 2500명만 우리가 수용하기로 했다. 터어키,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중국 신장성, 심지어 몽고, 티벳, 이란에서까지... 실크로드에 연관된 모든 나라에서 7월 둘째 주에 몰려들 것이다.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다. 제자화에 대한 비전을 봤다. 실크로드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비전으로 완전히 정복하고자 하는 군사들이 준비될 것이다. 필자가 재작년 여름에 중국에 다녀오고 나서 큰 쇼크를 받았다. 하나님께서 필자의 마음속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준비하는 단계로서 실크로드를 회복하라는 마음의 감동을 주셨다. 그런데 중국에 들어가서 신장성 지하교회의 총책임자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입술에서 나온 말을 듣고 필자는 깜짝 놀랐다. 중국 땅 안에 Back to Jerusalem의 운동이 일어나고 중국의 지도자들이 10만명의 선교사들을 실크로드를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보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는 서로 만나서 이야기한 적도 없고 토의한 적도 없는데 하나님은 이미 중국 땅으로부터 시작해서 실크로드를 거쳐 예루살렘까지 복음의 대로를, 동방에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는 복음의 대로를 이미 계획하셨다는 것이 아닙니까? 필자는 감격해서 뛰었다. 엎드려 기도했다. “하나님, 무엇이 비전입니까?” 명확한 비전은 <Back to Jerusalem>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회복하라 동방의 대로를 준비하라 예루살렘을 회복하라 실크로드지역을 회복하라」이것이 하나의 비전이었다. “주님, 그러면 전략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이 땅을 회복할 것입니까?” 각 나라와 각 교회들을 방문해 볼 때 그들은 이제 갓 교회를 개척했다. 20명, 30명 모이는 교회들이 대부분이었다. 교회를 어떻게 인도해야 될지, 교회를 어떻게 제자화해야 될지 제자화에 대한 비전조차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필자에게 G-12의 비전을 주셨다. G-12의 전략을 주셨다. 그 일을 위해 생명을 다해서 연구하고, 또 실천하고, 저희 교회에 접목시키기 시작했을 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방을 복음화 시키고 제자화 시키기 위한 위대한 전략이라는 것을, 마지막 때를 위한 전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전은Back to Jerusalem이다. 전략은 G-12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제자를 완성하라는 것이다. 알파를 통하여서 수많은 심령을 구원하고 G-12를 통하여 제자화를 이룩하여서 2010년도까지 1000개의 교회를 개척하라. 필자에게는 향후 2010년까지의 너무나 명확한 목표 때문에 쉴 틈 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여기에 온 이유가 두 가지이다. 한 가지는 예수의 G-12전략을 한국 땅에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었고, 두 번째로는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지역으로 수많은 선교지망생들을 그곳으로 이끌어가기를 원한다. “세계 여러 곳에 선교지가 많은데 왜 하필이면 실크로드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이유를 보여주셨다. 첫 번째로 우리 한국 민족은 기도와 교회개척의 민족이다. 중앙아시아는 모슬렘권의 땅이다. 그 땅은 기도 없이는 사역할 수 없는 땅이다. 많은 지식이 필요 없다. 많은 능력도 필요 없다. 엄청난 기도를 통하여 영적전쟁에 승리하는 자만이 선교사로 살아남을 것이고, 교회를 일으킬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우리 민족을 택한다고 필자는 믿고 있는 것이다. 교회개척의 탁월한 능력, 아주 선천적인, 가는 곳마다 교회 세우는 것은 문제 없이 세운다. 중국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식당을 세웁니다. 한국 사람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웁니다. 모슬렘 지역에선 더 이상 백인들은 받아들이지 않다. 백인들이 들어가기를 무서워한다. 그러나 우리 동양인들은 동일한 얼굴색을 가지고 함께 그곳에 나가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룩할 수가 있다. 뿐만 아닙니다. 실크로드의 터키계 민족들은 우리와 말이 비슷한다. 어순이 똑같아서 낱말만 빨리 배우면 5개월 후엔 설교할 수 있다. 필자가 터키를 가보고 깜짝 놀랐다. 터키에 있는 선교사님들이 얼마나 터키 말을 유창하게 하는지… “몇 년 되었습니까?” 3년밖에 안 되었답니다. 세상에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그래서 한국 선교사님들이 터키 민족계인 실크로드 지역에 얼마나 잘 사역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사용하기 원하신다. 필자는 특별히 한국민족을 마지막 때 실크로드를 위해서 준비해 놓으셨다고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루어진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준비하시기 바란다. 혹 선교사로 나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선교사를 후원하시고, 기도하시고, 그 땅을 향하여 사모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의 비전의 성취를 위해서 주 앞에 무릎 꿇으시기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그러나 먼저 한국 땅을 회복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엘리야와 같은 심령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 한 심령 심령이 먼필자 주님 앞에,주님과 교제의 사람, 기도의 사람, 능력의 결단의 사람, 민족들의 마음을 주께 돌리고자 하는 마음의 중심을 지닐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그때 주님의 뜻은 이 땅에 급속도로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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