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정편제의 변화
구례군은 1895년 전국을 23개부로 나누면서 남원부 관할하의 군이 되었으며, 1896년에는 다시 전국을 13개도로 나누면서 전라북도 소속되었다가, 1906년 전라남도 소속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때 남원의 산동 중방 소의 고달 등 4개면이 구례군으로 이속되었는데, 산동으 내산면과 외산면으로 나뉘어졌고 중방은 용강과 합쳐져 용방면으로, 소의는 방광과 합쳐져 광의면으로 되었으며, 계사는 현내와 합쳐져 구례면으로 되었다. 한편 1899년 토지(吐旨)가 토지(土旨)로 개칭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고달은 1914년에 곡성군으로 이속되었으며, 간전면과 문척면이 간문척으로 병합되었다. 이리하여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구례군에는 구례면 간전면 토지면 마산면 광의면 용방면 외산면 내산면 등 8개면이 있었다. 1932년에 내 외산면이 다시 산동면으로 병합되었다. 1945년에는 간문면이 다시 간전면과 문척면으로 나뉘어졌다. 그리하여 현재 구례는 구례읍, 간전면, 문척면, 토지면, 마산면, 광의면, 용방면, 산동면 등 1읍, 7개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면적은 44,005㏊로서 전남에서 가장 작은 소군(小郡)이다.
2) 동학농민봉기 1894년 구례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경상도 단성사람으로 광의면 사적동에 우거하고 있던 무인(巫人) 출신 임정연이 구례접주가 되어 사적동에 근거를 두고 봉기를 주도하였으며, 사적동 이기옥과 유산 양군섭 등과 함께 거느린 농민군의 수가 전군에 수백에 달하였다 한다.
당시 남원에 웅거하고 있던 김개남은 10월 14일 남원을 출발하여 북상한 뒤 남원의 농민군은 남원 운봉의 민보군에게 남원성을 빼앗겼으나, 그 뒤 유복만 남응삼의 지휘로 성을 되찾았다. 11월 13일 남원의 농민군은 운봉을 넘어 경상도로 나가려고 남원 산동방 부동마을에 다다랐다. 이 무렵 구례의 농민군은 남원의 농민군과 합류하기 위해 광의면 연파리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산동면 위안리로 행군하여 다름재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민군은 운봉의 박문달이 지휘하는 관군에 의해 대패하였다. 패전이후 동학접주 임정연과 접사 양주신은 사적동 뒷산 쑥내골에 숨어 있다가 장위영군을 이끌고 내려온 이두황에게 체포되어 1895년 1월 11일 처형되었다.
3) 한말 의병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구례지역 출신 인사들도 이에 항의하여 의병봉기를 시작했다. 간전면 출신 유병기는 송병선의 제자로서 1907년 가을 김준, 김율, 백낙구, 조기영과 더불어 의병부대를 편성, 자신이 총지휘자가 되었다. 기병 당시의 의병수는 약 7백명, 총기는 약 5백정을 소유하여 그 세력과 성망이 대단하였다. 유병기 의병부대는 함평군 나산을 거점으로 담양 영광 장성 창평 광주 동복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여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유병기부대는1908년 5월 30일 담양 창평 용흥사에서 일본군과의 접전시 큰 타격을 받고 자신도 부상을 입었다. 그는 피신하여 부상에서 회복된 뒤 다시 양상기의 의병부대에 들어가 참모가 되었으나 양상기의 행동이 의거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고 탈퇴하였다. 그후 재기를 노리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11월 27일 광주로 송치된 후 순국하였다.
그리고 장성에서 기삼연과 함께 봉기한 김용구는 1907년 9월 6일 구례 연곡촌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일본군 10여명을 포살하였으며, 태인군 출신 의병장 김황국은 지리산을 근거지로 하여 구례 곡성 남원 함양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한말의 유명한 문장가이자 애국지사였던 황현도 구례사람이었다. 광양 서석촌에서 태어난 매천 황현은 1883년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시관 한장석이 농간을 부려 1위에서 2위로 순이가 바뀐 것을 알고 그길로 낙향하여 광양에서 구례 만수동으로 집을 옮기고 과거의 뜻을 버렸다가 노친의 뜻을 어기지 못하여 1888년 다시 과거에 응시,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그러나 곧 다시 낙향하여 구안실(苟安室)을 짓고 후진 교육에만 뜻을 두었다. 1894년 이후 시국의 변화에 따라 그도 양계초의 글 등을 구하고 읽고 또 실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1902년에는 광의면 월곡촌으로 이거하여 이후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1908년에는 광의면 지산리에 호양학교(壺陽學校)를 세웠다. 1910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강제 병합되자 이를 분히 여겨 참지 못하고 음력 8월 7일 자결하였다.
4) 3 1운동
1919년 3 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가운데 구례에서도 봉기가 있었다. 구례에는 3월 2일 전라북도 남원군 천도교구장 유태홍이 보낸 김종웅에 의하여 독립선언서가 천도교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날은 마침 일요일이어서 용방면 용정리 박흥래의 집에서 시일(侍日) 모임을 갖고 있었다. 이들 김공현 허탁 박흥래 강정택 박성래 서유종 강철수 등은 각기 선언서 배포구역을 분담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당일날 밤 선언서를 내산면과 외산면, 용방면, 토지면 사무소와 원촌 헌병대 주재소 게시판 등에 붙여 독립선언의 취지를 널리 알렸다.
그리고 만세시위의 기회를 엿보던 중 3월 24일 구례읍 장날에 광의면 지천리에 사는 노학자 박경현의 주도에 의해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박경현은 3월 23일 지천리 박해운의 집에서 황위현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논의하고 태극기 등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24일 장날에 읍내에 나가 장꾼들이 많이 모인 곳에 나아가 "지금 각처에서 조선독립을 절규하고 있는데 이곳 구례에서만은 한 사람도 독립을 외치는 이가 없으니 매우 유감된 일이다"라고 연설하고, 종이에 그린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주위에 있던 많은 이들이 따라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세를 올렸다. 박경현은 출동한 일 헌병에 끌려가면서도 만세소리를 목놓아 외쳐 군중들을 격려 고무하였다.
이후 31일에도 읍내에서 다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있었으며, 4월초부터는 '조선독립대 전라도 지부'의 명의로 구례군수의 친일행동을 경고하는 경고문이 자주 전해지고 벽보도 붙었다.
5) 1920, 30년대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3 1운동 이후 전국에서 청년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등 사회운동이 일어나는 가운데 구례에서도 많은 사회단체, 민족운동단체들이 만들어졌다.
1923년 12월에는 토지면(유승환 조찬영 등 주도), 간문면(김택근 등), 마산면(이상희 임진수 등), 광의면(정해덕 박해운 한정석 등), 구례면(김대현 등), 용방면(이병호 등)에 농민상조회가 각각 만들어졌으며, 1924년 5월에는 내산, 외산면에도 농민상조회가 만들어졌고, 이들의 연합회도 만들어졌다(회장 유승탄, 부회장 김인중). 또 1925년 9월에는 사상단체로서 구례청년당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26년 3월에는 구례노동회가 만들어졌다.
1927년에는 신간회 구례지회가 설립되어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주된 활동회원은 선태섭 박해용 고용주 이종수 양인숙 박해연 황위현 김정상 김영준 박준동 강대인 윤영규 박해두 조찬영 등이었다. 이 시기 청년운동은 구례청년동맹이 주도하였는데 주된 활동 회원은 선태섭 박준동 등이었다. 구례지역의 사회운동, 민족운동에서 두각을 드러낸 선태섭 등은 당시 화요회계 사회주의자들이었다.
한편 1936년에는 겉으로는 화합과 단결, 애향 등을 표방한 금란회(金蘭會)라는 결사가 조직되어 후일을 도모하였다. 이에 참여한 이들은 문창회 김종필 박준동 강대인 오재륜 선태섭 김성동 한경석 이동춘 박만조 김무규 등이었다. 금란회는 1943년 봄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자신 해산했다. 그리고 이들은 1945년 8월 구례 경찰서 모 고등계형사의 비밀연락으로 전 간부들이 이른 새벽에 사동(寺洞) 산중으로 대피하여 있다가 8월 15일 해방의 소식을 듣고 하산하였다.
6) 해방직후 구례지방의 정치사회적 동향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이 오자 구례에서도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구례 건준은 산중으로 대피했던 금란회 간부들이 산에서 내려와 16일 독립을 축하하기 위한 군민대회를 열고 17일 박준동의 집에서 건준결성을 위한 모임을 가짐으로써 결성되었다.
건준 구례지부는 위원장에 황이현, 부위원장에 강대인과 신진우, 총무에 박준동, 농민부에 조찬영, 선전부에 선태섭, 조직부에 선동기, 문화부에 김무규, 재정부에 김종필, 평위원에 한경석 오재륜 정택근 김채진 등이 선임되었다. 황위현은 당시 60여세의 한학자로서 매천 황현의 차남이었다. 그는 3 1운동에 직접 관계하였고, 신간회 구례지회위원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구례 건준은 9월 10일 다시 인민위원회로 개편된다. 여기서는 실질적으로 건준을 주도해왔던 김종필이 위원장이 되고 다른 부서는 건준 때와 다름없이 유지되었다. 선태섭은 전라남도인민 위원회 재정부장을 맡았다. 구례인민위원회는 미군이 들어온 이후에도 미군정에 매우 협조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정은 1945년 11월 7일 서정욱을 경찰서장에 임명하고, 12월에는 강태주를 구례군수로 임명함으로써 완전히 군의 행정을 장악하였지만 면 단위와 그 이하의 수준에서는 농민조합 등이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구례에서의 사회주의자들의 세력은 타군에 비해 약한 편이었다. 따라서 1946년 10월 봉기 때에도 구례에서는 이렇다할 소요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9년의 여순군인폭동사건부터 6 25전쟁이 끝날 때까지 구례는 지리산에서 가장 가까운 고을이라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한국현대사의 소용돌이의 중심부에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