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은 예로부터 험준한 준령이 동쪽으로 뻗어 남북을 가로막고 중동부 변방인 영동에서 영서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하여 숱한 전란을 겪게 되자 서기 1007년 (고려 목종 10년) 현 양양읍 성내리를 중심으로 양주성(일명:양양부성 또는 현산성)을 축성하여 외적의 침입을 수호하는 기지로삼고 현성황당 자리에 성황사를 짓고 호국 영령을 위로하고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성황제를 매년 봄, 가을로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선조25년) 이후부터는 매년5월5일 단오절을 기하여 장군성황신을 수호신으로 성황제를 지내고 굿을 성대하게 하였는데 제주는 고치물(서문리 양지마을샘물)을 마시고 제물을 만들때도 사용하였고 고치물 샘터에서 항상 경비병 2명이 지키고 있었다고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후 성황제는 일제의 전통문화 말살정책으로 철폐되었으나, 성황제를 은밀히 지내오다가 1920년대부터 단양회라는 단체가 구성되어 단오절을 기하여 대제전으로 발전, 성황제를 지내고 남대천변에서 5.6일씩 별신굿을 하고 관동축구대회를 비롯 각종 민속행사를 개최하여 영동은 물론 관동지방의 명실상부한 대행사로 베풀어졌다.
1945년 8/15 해방 후 3·8 이북이 북치하에 들게 되면서 미신타파라하여 강제로 중단시켰으나 성황제는 계속 소규모로 은밀하게 지내오다 6·25전쟁후 1953년 행정회복이 되면서 다시 부락제로 소규모 성황굿이 전승되었다.
1968년 군민들의 성미로 성황제를 매년 5월5일 단오제로 지내오다 향토고유의 전통문화제로 제정하기 위 하여 1979년 2월5일 현산문화제 위원회를 구성하여 전통성을 찾아 전래의 민속일인 음력정월 대보름을 제전일로 하여 제1회 현산문화제로 명칭을 정하고 전야제와 본제를 행하였다.
1983년 제 5회부터 이 고장 기미만세 운동의 역사성에 바탕을 두어 함홍기열사가 일경의 대장실에 뛰어들어가 적수공권으로 항거하다가 장엄하게 순국하면서 우리 고장 만세운동에 불이붙기 시작한 실질적 시발일을 찾아 4월4일로 변경하여 제7회부터 제11회까지 거행하여 오다가 제 12회부터는 기후와 농사철을 감안 뿌리깊은 전통 축제였던 단오절을 전후하여 일자를 정하므로 명실공히 전군민이 동참하는 향토제로 확대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