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오전 강설
애통해하지 않는 시대, 애통해하지 않는 성도
마태복음 5:4; 시 51:1-19; 사 40:1-2
천국 시민의 대헌장(Magna Charta)이라고도 불리는 팔복(八福), 즉 여덟 가지의 복은 각각 독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여덟 개의 복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인격과 삶에는 이 여덟 가지 복이 조화 있게 나타나야 합니다. 물론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와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어느 부분이 미미하게 나타날 수는 있지만, 성숙한 신자에게서는 이 여덟 가지 복이 조화있게 그의 인격과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생각하려고 하는 팔복 가운데 두 번째 복인 애통하는 자의 복은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애통은 심령의 가난함 가운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가난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애통할 수가 없습니다.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의 관계
팔복 가운데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말씀을 간단히 설명하면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파산(破産)한 사람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파산하였다는 것은 자신의 절대적인 무지(無知)와 무능(無能)을 인정한 것을 말합니다. 이 상태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절대적인 무지와 무능을 인정한 사람은 당연히 부유하시고 우리 안에 내주에 계심으로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시고 친밀하신 제3위 되신 성령 하나님께 애통해하며 나아가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바로 애통해하는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위로”(parakalevw)라는 헬라어는 ‘자기 곁으로 부르다’라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애통해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위로하고 그 마음에 상처를 싸매시고 어루만져주심으로 내적으로 치유하여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위로하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애통하게 만든 원인인 사탄의 작용이나 죄를 멸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우리의 연약함을 채우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주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진리를 깨닫게 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 수 있는 능력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살아감으로 천국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천국이 그런 사람들 안에 있다는 것은 의로운 삶을 살게 하시고,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강, 즉 하나님께서 샬롬을 주셔서 평강 가운데 살아가게 하시고,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하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는 성도를 애통하게 만드는 것들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애통함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은 끊이지 않고 계속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성도는 그 가운데서도 우리 주님께서 재림해 오심으로 애통하게 되는 근본 원인을 멸하시고 슬픔과 눈물과 죽음이 없고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펼쳐질 것이기에 이 사실로 위로를 받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약속이 있기에 위로를 받고, 다시 용기를 내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땅의 성도들은 모든 일이 잘되기 때문에 평안을 누리고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천국이 그 안에 있기에 그것이 그에게 위로가 되고 더 나아가 평안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빌립보의 옥에 갇힌 사도 바울과 실라처럼 고난 가운데서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행 16:23-25). 그리고 로마 옥에 갇혀 있을 때도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라고 편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 천국의 시민권을 소유한 성도라면 그 어떤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장차 미래에 이루어질 완전한 위로가 있음을 확신하고 인내하며 소망을 따라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조금 전에 애통은 심령의 가난함 가운데서 나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심령의 가난함을 느끼지 못하면 도무지 애통해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심령이 가난함을 느끼지 못하고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져 있으면 애통해하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적인 가난을 의미한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것들로 부유하지 않은 것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풍성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사는 기쁨이 없는 그런 상태가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다음 단계인 애통으로 나아갈 수 있어서 천국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심령이 이 세상의 것들로 채워지고 채워져 가기를 소원하며 사는 사람들의 상태와 천국의 것들로 채워지고 채워지기를 소원하며 사는 사람들의 상태는 현실적인 매일매일의 삶에서 전혀 다른 삶의 양태(樣態)를 만들어냅니다. 이 세상의 것들로 채워지고 채워지기를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은 별로 애통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천국의 것들로 채워지고 채워가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과 결핍을 보기에 날마다 애통해합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 모두가 날마다 애통해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애통해하는 사람만이, 즉 자신의 부족과 결핍을 아는 사람만이 자기 안에 죄가 있음을 알고 죄에 대해 슬퍼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시편 119:136에서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슬픔을 고린도후서 7:10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즉 “경건한 슬픔”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경건한 슬픔이 날마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것들로 채워져 가고 있지 못함에 대해서 그리고 이 세상의 것들로 채워져 가고 이 세상의 것들로 채워져 가기를 소원하는 그런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면서 애통해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경건한 슬픔이 있어야 거룩하고 의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애통해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찾을 수가 있고, 하나님 나라의 것들로 채워지기를 소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설교 본문에는 애통해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의 순서를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천국의 두 번째 복을 받기 위하여 애통해야 한다든지 아니면 위로를 받기 위해 애통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애통함은 천국을 소유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천국 백성의 생활 모습이며 삶의 성격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부족과 결핍을 알기에 그 부족과 결핍으로는 죄와 이 세상과 사탄을 이기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義)를 구현하며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애통해해야만 하나님의 나라가 채워지기 때문에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복인 애통함은 영의 절대적 가난을 느끼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애통함은 심령이 가난한 데에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면 그다음에 반드시 애통함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애통의 의미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애통하다”라는 말을 좀 더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말 “애통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본형은 ‘펜데오’(penqevw)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슬퍼하다’, ‘한탄하다’, ‘애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에 심하게 짓눌려서 심히 근심하며 고통스럽게 슬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주체할 수 없어서 겉으로 드러나는 슬픈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설교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애통은 단순히 ‘슬프다’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어떤 것에 심하게 짓눌려서 나오는 절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안에 없다는 것,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義)와 평강과 희락이 자기 안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휘몰아쳐 올 때 느끼는 근심과 고통과 슬픔으로 인한 절규와 탄식이 나오는 것이 애통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 없이 살았음을 발견하였을 때 구원의 주이신 하나님께 이 비참한 삶의 현실에서 살려달라고 힘을 다해 애타게 하나님의 사랑에 호소하며 부르짖고, 한숨을 쉬며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애통함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애통해하는 자”, 즉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라고 하는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은 상반되고 서로 충돌되는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그리고 이 땅에서의 우리 성도들의 실존과 관련해서 생각할 때 이 두 말은 상반되고 서로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이 말씀에 설득당한 사람들이며 설득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째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슬픔과 복이 상반되고 서로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됩니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오늘 본문의 말씀이 지금 여러분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슬픈 자가 복이 있다”라는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도 여러분들은 이미 설득당했어야 하고 또 설득당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고, 그런 삶이 복 있는 삶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천국의 주인이신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위로를 받고 있고 또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애통해하는 것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애통해하는 상태가 바로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애통해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지금 주님께서는 세상의 관점과 하나님 나라의 관점이 다르다고 하시면서 이 세상이 주는 행복은 참된 행복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이 세상의 행복에 대해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이 세상의 것들을 바라볼 때 내 관점과 세상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 즉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통해서 이 세상을 바라보신다면 분명히 애통해하는 사람들이 복이라는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 사람들은 왜 슬퍼합니까?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이 없을 때 슬퍼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을 때 슬퍼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을 때 슬퍼할 것입니다. 자신이 계획한 대로 되지 않을 때 슬퍼할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슬퍼할 것입니다. 몸에 병이 들었을 때 회복할 가능성이 없고, 지병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힐 때 슬퍼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내 관점과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오는 슬픔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슬픔은 이런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슬픔입니다. 마음을 찢는 슬픔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애통한다”라는 말에 사용된 헬라어 기본형이 ‘펜데오’(penqevw)라고 하였습니다. 이 헬라어 펜데오는 ‘슬퍼하다(be sad)’, ‘울부짖다(mourn)’, ‘애도하다(to grieve)’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에는 슬픔을 표현하는 헬라어 단어가 아홉 개가 있는데 그중에 오늘 본문에 사용한 ‘펜데오’라는 단어가 가장 강하고 통렬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펜데오’라는 이 단어가 마가복음 16:10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예수님과 함께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penqevw) 울고 있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된 강렬한 단어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사용된 “펜데오”라는 단어는 단지 외적인 울음이 아니라 깊은 내적 고뇌가 슬픔으로 나타난 것으로서 ‘마음을 찢는 슬픔’을 말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복되다고 말씀하신 “애통”은 ‘영적으로 가난한 상태가 그 자신의 마음에 심한 곤고함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을 순응시키고 하나님의 의(義)를 세워나가고자 하는 마음에 이르게 하는 겸손한 상태’를 말합니다. 또는 ‘심령의 가난한 상태가 점점 더 깊어져서 마침내 정서적인 모습으로 변화되어 외부로 나타나는 모습’을 말합니다.
여러분, 팔복 가운데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된 자리에 비해 자기가 처한 위치가 얼마나 나약하고 열악한 위치에 있는가를 아는 것에서 발생한 지적(知的)인 결단의 결과’인 반면에 “애통함을 느낀다”라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죄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슬프고, 괴로워하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세워나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고자 하는 정서적(情緖的)인 변화의 상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복된 자리에 서 있어야 할 내가 그 위치에 서 있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야 할 내가 오히려 죄의 유혹에 빠져서 세상을 사랑하고, 사탄이 좋아하는 생각과 행위를 하면서 살아가고, 돈과 명예가 자신의 행복을 지켜줄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없으면 이 세상에서 패배자요 실패자(loser)의 인생을 사는 것으로 생각하고, 세상에서의 성공을 최고의 가치고 알고 살았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악에 대해서 눈물로서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자기 자신의 결핍과 고통을 마음으로 철저히 느끼고, 이제 그것이 어느 시점에서는 분수대의 물이 위로 솟구치듯이 겉으로 뿜어져 나오게 되는데 바로 그때 애통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신의 죄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에 올라오셨을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있고, 성령님이 비둘기같이 임하는 천국의 왕으로서 대관식(戴冠式)을 치르고, 이제 천국의 왕으로서 공식적으로 활동하시면서 첫 번째 선포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사람이 자신의 대통령 취임식에서 자신이 맡은 5년이라는 임기와 관련하여 국정 철학에 대해 연설합니다. 이 국정 철학이 그가 대통령이 된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의 왕으로서 대관식(戴冠式)으로 치르심으로 천국의 왕으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실 때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복음서의 내용은 바로 이 말씀에 다 매여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이해해야 나머지 복음서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당신이 이 세상에 천국의 왕으로 오신 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는 말씀을 실행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이고, 당신의 공생애 기간에 하실 사명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이 자기의 회개하여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려는 일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그 일이 가능하도록 노력해 보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제2위 되신 성자 하나님이심으로 그 일을 완전하게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완벽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요한복음 18:9에서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라고 말씀하셨듯이,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자들이 모두 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애통함”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죄의 진상을 알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죄를 슬퍼할 수가 없습니다. 죄를 슬퍼할 수 없다면, 즉 애통해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빛으로써 소금으로써 살 수가 없습니다.
애통해하지 않는 시대에 사는 성도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 시대는 죄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계속해서 죄를 짓고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사조(思潮)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고 말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탈이성적 사고와 다양성과 감성을 강조하는 사상을 말합니다. 사실주의(realism)와 모더니즘(modernism)의 반발로 일어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은 전통적인 사고체제와 일율적인 규범과 제도를 거부하는 사상입니다. 대신에 다양성을 강조하고 이성보다 감성을 더 강조하고 중시하는 사상입니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가치(pragmatic values)를 추구하는 사상입니다. 모든 것이 아주 모호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름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와 기준이 없습니다. 나만 좋으면 됩니다. 자기의 감정만 만족하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 시대는 초감각적인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날에는 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를 하나의 사회의 경향 혹은 흐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 사회가 지나가 버리면 더는 죄가 아닙니다. 죄를 그런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죄를 절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하여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난 수요일 예배 때 소교리문답 제14문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소교리문답 제14문은 “죄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죄는 하나님의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지키거나 그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소교리문답 제14문은 죄에 대한 가르침은 두 가지이지만, 이 둘은 하나인 것 같으면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죄는 첫째로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것에 부족한 것(omission)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죄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commission)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적극적인 죄입니다.
우리는 간혹 하나님의 법 혹은 하나님의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의지로서 적극적으로 어기는 것만을 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미치지 못한 것, 즉 부족한 것도 죄입니다. 따라서 소교리문답 제14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의지로서 적극적으로 어기는 것, 즉 불순종하는 것이 죄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미치지 못한 것도 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 온전히 순종할 수 없으므로 날마다 죄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실존입니다. 우리의 현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죄에 대해서 애통해야 합니다. 즉 이 죄에 대해서 철저히 회개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철저히 미워하고 죄에 대해서 진저리를 치고, 이 죄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죄와 관련하여 주님의 고통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그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주님께서도 당신이 지실 십자가의 고통이 어떤 고통인지를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다고 세 번이나 기도하신 그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품에서 독생하신 주님께서는 사랑의 본질을 따라서 서로 사랑하던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고 버림을 받는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 마음에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은은히 밀려 올라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집니다. 즉 의와 평강과 희락이 주어집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는 애통함이 없는 시대입니다. 이 세상의 사회악을 보면서도 애통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언론 매체를 통해서 인간의 죄악에 대해서 보고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애통함이 없습니다. 애통함이 없으니까 이 세상은 점점 더 악하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죄악을 보면서 애통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낫습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죄에 대해 애통함이 있습니까? 애통함이 있다면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애통함이 없기 때문에 세상에 나가서 전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애통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해 민감하고, 다른 지체들이 진리에서 벗어나 사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내 죄로 알고 슬퍼하고 애통해하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함께 교회를 이룬 지체들과 지체 교회들이 잘못하고 죄를 짓는 것을 보면서 애통해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리이시고 구주이신 주님께서 그것에 대해서 슬퍼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슬퍼하신다면 지체인 우리도 슬퍼해야 하는 것이 지체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죄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은 곧 자신의 살이 곯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언젠가는 곯은 살을 파내어야 하는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교회를 이룬 지체들과 지체 교회들이 잘못하고 죄를 짓는 것을 보면서 애통해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죄와 악을 볼 때 그리고 그런 악이 온 세상에 퍼져 있는 것을 볼 때도 애통해해야 합니다. 어떤 죄이든지 간에 죄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합니다. 그래서 불의가 있거나, 사람들이 학대를 당하거나, 아기들이 살해당할 때 우리는 애통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의와 진리가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위하여 애통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야보고서 4:9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우리는 애통해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처신하는 일에 대해 슬퍼해야 합니다. 우리가 슬퍼하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위로를 주십니다.
사실 저는 오늘 이 본문으로 설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마음을 조금은 보듬고 싶은 마음에서 위로의 본문을 택하고 설교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에 있었던 금요기도회 때 오늘 본문을 생각하였고, 이번 주 설교를 이 말씀으로 바꾸어 준비했습니다. 우리에게 애통함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교우들이 금요기도회에 나오지 않을까? 그것은 애통함이 없기 때문이고, 자기의 죄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고, 이 사회의 죄악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모이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심령의 가난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죄에 대해 회개하는 일이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회개하려고 하면 기도회를 비롯하여 모든 공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세계 교회의 부흥 운동은 죄를 애통해하는 회개 운동이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하고 성장하여서 부흥하기를 원하십니까? 박사 공부할 때 세계 부흥운동사라는 주제를 가지고 깊이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신학교에서 학부생들과 대학원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계 제1차, 제2차 부흥 운동의 흐름으로 우리 한국에도 1903년 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1907년 평양에서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강력하게 일어난 운동이 바로 회개 운동이었습니다. 자기의 죄에 대해서 애통해하면서 죄를 고백하는 회개 운동이었습니다. 세계 부흥운동사에서도 한국의 부흥운동사에서 동일하게 일어난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애통해하는 회개 운동이었습니다. 그 결과 믿지 않는 많은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강림을 경험한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마음이 찔린 유대인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즉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라고 할 때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7-38)라고 선언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 애통해하고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보내셨음에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믿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에 대해서 애통해하며 회개하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죄에 대해 애통해하며 회개하여야 하고, 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의지로서 거역한 죄에 대해서 애통해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무덤덤한 자들이 되지 않고 예민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애통해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지만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죄에 대해 회개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때로 우리 의지로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에 대해 회개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 3년을 ‘코비드19’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는 예배하고 모이는 일을 한 번도 쉬지는 않았지만, 마음을 졸여가면서 모였습니다. 우리는 지난 ‘코비드19’ 기간에 역사(歷史)를 주관하시고 날아다니는 참새와 돌멩이 하나까지도 당신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크고 위대하시며 세미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고 구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몸에 조금만 이상 있으면 예배에 나오지 않았고, 법적으로도 나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고난의 3년을 지난 이후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고난의 터널을 벗어나게 해 주신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코비드19’ 기간에 몸에 조금만 이상 있으면 예배에 나오지 않았고 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것이 습관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모든 것이 회복되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표어를 정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런 습관이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어서 조그마한 어려움이 생기거나 조금만 몸이 불편하고 피곤하면 ‘오늘은 예배하는 일과 모임을 쉬어야겠다’ 하고 주저앉아버린다고 생각합니다. 전에는 주일 오전과 오후 그리고 수요일에도 모여서 예배하는 일을 삶의 우선순위에서 가장 첫 번째였고, 새벽 기도회 시간에 나와서 기도하는 일을 귀하게 여겼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배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었고, 응당히 예배 시간에 나와서 예배하고 기도 시간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이 이제는 삶의 우선순위에 밀려서 뒷전에 놓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것이 하나의 습관화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예배와 모임을 삶의 후 순위로 밀어놓고 무슨 일만 생기면, 무슨 이유가 하나 만들어지면 참석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일대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예배의 실패는 우리 삶의 실패입니다. 예배의 실패는 우리 삶의 위기(危機)입니다. 삶의 우선순위에서 예배가 뒷전으로 밀리고 무슨 일을 생기면 예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지금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하지 않으면 이후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므로 여러분에게 찾아온 위기는 여러분을 힘들게 할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와 교회의 모임이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에서 뒷전으로 밀리는 것은 죄악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며 죄악입니다. 교회의 모임을 소홀히 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왜, 이 땅에 존재합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살다가 주님께서 부르시면 주님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모임을 소홀히 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여러분, 이 모든 죄를 애통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향하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전에 진정으로 애통해하며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위기에서 건져주시고, 천국을 주실 것입니다. 천국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의와 평강과 희락이 풍성해짐으로 위로를 받게 하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 오후 예배에도 수요일 예배에도 새벽 기도회에도 금요기도회에도 모이기에 힘쓰시고,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가 교회이고, 여러분의 우선순위가 예배이고, 여러분의 우선순위가 교회의 모임이 되도록 여러분의 시간 분배를 다시 조정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각 기관에서 주관하는 기도회에 참여하여 함께 공동의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오후 예배에 나오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분들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오후 예배 시간에 어디에 있을 예정이고 무엇을 할 예정입니까? 집에서 생각 없이 바보상자로 일컬어지는 TV 앞에서 빈둥거리고 혹은 외출해서 자신의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힘이 들고, 몸이 피곤하고, 아프더라도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서 언약의 하나님을 예배하면, 전능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냥 계시겠습니까? 우리에게 더 많은 능력을 주실 것이고, 건강을 책임져 주실 것이고, 생명을 보존하여 주실 것이고, 우리의 일에 형통함을 주실 것이고,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으로 함께하여 주실 것입니다.
저도 “나 때”에 대해 두 마디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촌부이셨지만 교육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굉장히 아팠을 때도 학교로 쫓아 보냈습니다. 죽어도 학교에서 죽는 것이 학생의 도리라고 하시면서 저를 학교에 보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조퇴도 하지 않고 초등학교 6년 개근하였고 개근상을 탔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우등상을 받는 것보다 1년 개근상을 받은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개근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성실성을 나타내 주는 기준이고 학생의 도리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개근상도 중요하게 여기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개근하면 하늘에 계신 자비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그냥 계시겠습니까? 정말로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건강이 부족하면 건강을 회복하여 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천국을 우리에게 주셔서 소망 가운데 살게 하실 것입니다. 두 번째 “나 때”는 제가 중학교 3학년 말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아이 엄마들이 어린아이를 업고 보듬고 교회당에 나와서 오후 예배와 수요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새벽 기도회에 나올 때 아이를 재우고 어린아이가 밖으로 나올 수 있고 높은 마루에서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밖에서 방문을 잠그고 나오고, 때로는 새벽에서 아이를 업고 나와서 기도했습니다. 저희 부부도 그랬습니다. 그렇게 신앙 생활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런 분들에게 복을 주셨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자식이 우상이 되어버린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나 때”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런 시대가 아니고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분들이 계실 것이고 항변하고 싶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예, 다를 수 있고 아니 다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신앙 생활할 때와 지금의 환경은 매우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변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어떤 상황에서나 애통해하고 열심을 내어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사람은 변해도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명기 30:15-16을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아멘.
이제 잠깐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애통해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소교리문답 제14문에서 가르치고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일에 부족한 것이 죄이고, 내 의지로 적극적으로 지은 것이 죄인데, 이런 죄에 대해 회개의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예배에 참여하고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한 죄에 대해서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2023. 9. 10 주일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