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3.17 18:00
24년생 걱정은 건강을 해친다. 36년생 시대 변화에 대처하는 센스가 필요. 48년생 고지식하게 옛 관습에 젖지 말라. 60년생 새로 집안 단장하면 좋을 것. 72년생 몸 겉치레에 신경 써야 한다. 84년생 새로운 마음으로 업무시작.
25년생 정성이 감응하여 무난한 날. 37년생 서로 협력하여 성취한다. 49년생 비밀누출에 신경 쓸 것. 61년생 순간의 이익에 경거망동 말라. 73년생 약속한 거래는 시간 잘 지켜라. 85년생 다른 이성에게 눈 돌리지 말 것.
26년생 객관적 판단이 필요하다. 38년생 물질보다 인격을 중시하라. 50년생 남 도와줄 일 생기게 된다. 62년생 다른 사람 불평 없게 공평히 처리. 74년생 요식업 경영인은 수입 더 오를 듯. 86년생 노력한 결실 보게 되는 날.
27년생 온화한 마음 가질 것. 39년생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중도를 유지. 51년생 하고 있는 일 좌절하지 말라. 63년생 마음만 앞서지 말고 깊은 생각 필요. 75년생 때와 장소를 분별하여 처신. 87년생 실력 능력 발휘할 때.
28년생 천지가 감응하여 건강 유지. 40년생 서둘면 이루기 어렵게 된다. 52년생 본업에 충실하고 다른 일에 신경 쓰지 말라. 64년생 푼돈 모아 큰 것에 투자하라. 76년생 하는 일 즐길 것. 88년생 작은 것이 모여 큰 것 된다.
29년생 겨울 가고 봄이 오는 상. 41년생 어두운 밤에 등불을 얻은 격. 53년생 지성이면 감천 노력한 결실 있다. 65년생 비리에 연루되지 말고 정도 지켜라. 77년생 선악 중에 선이 결국 승리한다. 89년생 남 일에 참견 말라.
30년생 인생은 나그넷길의 연속. 42년생 감정에 치우치면 손해 본다. 54년생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66년생 술이 사람을 마시면 안 된다. 78년생 성공은 많은 인내가 필요. 90년생 신문 많이 보면 지식이 쌓이게 된다.
31년생 불안 사라지고 마음이 안정. 43년생 주식 매매하기 좋은 하루. 55년생 힘든 중에 보람 있다. 67년생 만사가 뜻대로 풀려 편안. 79년생 바다와 같은 넓은 아량 키우라. 91년생 신의를 지키며 절도 있는 생활 필요.
32년생 정신적인 스트레스 해소하도록. 44년생 사업도 중요하지만 건강도 소중. 56년생 무리한 투자는 하지 마라. 68년생 주거문제로 고민 생긴다. 80년생 마음이 불쾌하고 불안. 92년생 오락이나 흥행에 치우지 말라.
33년생 현재에 만족하면 심신이 편안. 45년생 자만심 버리고 자신감 가질 것. 57년생 화살 아끼면 꿩 못 잡는다. 69년생 시기질투로 의심당함을 조심. 81년생 정당하게 하면 목적 달성. 93년생 나중에 후회할 일 만들지 말 것.
34년생 먼 나들이는 피하라. 46년생 마음에 중심 잡고 차분히 판단. 58년생 지위나 명예 운기가 좋다. 70년생 예능인은 인기 관리에 신경 써야. 82년생 서남쪽으로 영업 나가면 소득 없다. 94년생 미래의 꿈을 위해 공부하라.
23년생 돌고 도는 것이 자연의 순리. 35년생 장기적 투자는 이익. 47년생 해가 떠오르듯 희망이 보일 것. 59년생 바쁘더라도 집안 정리 잘할 것. 71년생 노력 여하에 따라 운기도 변할 수 있다. 83년생 신망을 더욱 쌓으라.
운관철학관 김재근 (051) 553-6958
3월 18일 오늘의 역사
1659 (조선 효종 10) 용비어천가 다시 찍어냄
1747 사육신 묘비, 노량진에 세움 (1747-조선 영조 23)
1908 백철 (한국 문학평론가) [白鐵] 출생
1912 재판소 조직을 지방. 복심. 고등법원의 3급3심제로 제정
1912 일제, 조선민사회 형사회 제정 선포. 조선인의 민족적 사회적 항쟁을 탄압하고 재산 수탈을 꾀함
1927 이화여전, 제1회 졸업식 치름
1935 함북 나진 우편국에 최초의 자동전화 교환기 설치 (지멘스 할스케 식)
1937 일제. 집무중에 일어를 사용토록 관공서에 지시
1944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정운영 출생
1949 북한-중국, 상호방위협정 체결
1956 로스 국제신문협회장. 한국에는 언론자유 없다고 판명
1956 한국, 세계 기상기구(WMO)에 가입
1961 한-독 기술원조협정 체결
1963 국민투표법 개정 공포
1963 상급자 살해 최영호 일병 사형 집행
1964 한국-라이베리아 국교 수립
1965 단일변동환율제 공포
1965 한.-미 외무장관 회담
1969 제 3사관학교 개교
1969 서울 숭인동 판자촌 화재로 150채 소실
1973 강원 인제군 인북천에서 천연기념물인 열목어 살고 있음을 확인
1979 박찬희 WBC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0 남북총리회담 4차 예비접촉(판문각) 총리회담 장소의 판문점은 합의했으나 회담의제 계속 미결
1981 선인학원 백인엽 이사장 비리관련구속
1982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일어남
1987 한국-바레인 문화협정 체결
1992 경국대전 최고본 발견
1993 방일영 조선일보사 이사고문 이사직 은퇴
1993 IAEA 특별이사회, 대북사찰 결의안 채택
1993 사상 처음으로 국무위원 재산 공개
1994 상록수 부대 소말리아에서 귀국
1995 북한-미국간 첫 곡물 거래. 미국 바틀래트 사, 옥수수 5만4천t 북한에 수출
1996 무궁화 위성 방송서비스 개시
1997 삼미특수강 부도, 한보철강 부도 이후 연쇄부도의 시작
1998 안기부, 북풍공작 수사. 97년 대선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이. 특수공작원 흑금성의 비밀공작을 직접 지휘한 사실을 밝혀냄
2003 이창호. 국제대회 전관 제패 대기록
2004 대한전선 설원량 회장 타계
2007 38살 봉달이 ‘6년만의 봄’
2008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 입적
2008 경남 의령 하천변서 1억년전 공룡발자국 발견
2008 독립기념관 '最古태극기' 원본 아니었다
2009 예멘 참사 대응팀에 자폭 테러
2010 김수용 감독 '나의 사랑 시네마' 18일
2010 박지성, 챔피언스리그 16강 베스트11
해 외
37 제3대 로마황제 칼리 굴라 즉위
1454 이탈리아 항해사 베스푸치(Vespucci, Amerigo, 1454~1512) 출생
1785 영국 런던 타임즈 지 창간
1842 프랑스의 상징 시인 말라르메(1842-1898) 태어남
1844 러시아 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출생,
1858 디젤 엔진 발명한 디젤(1853-1913) 태어남
1871 파리 꼬뮨 개시
1877 미국의 의사이자 예언가인 에드가 케이스(1877-1945) 태어남
1890 비스마르크 독일 수상 실각
1891 파리-런던 간 전화 개통
1910 타이완 총통 장징궈(장경국蔣經國.출생,
1947 미국 제너럴모터스사 설립자 윌리엄 듀랜트8]사망,
1949북대서양조약기구[北大西洋條約機構, 발족,
1957 한-독 기술원조협정 체결
1962 중국의 극작가 치루산 사망
1962 프랑스 알제리 휴전협정 조인
1963 케네디 대통령 코스타리카 방문 - 미국-중미 6개국 정상, 진보를 위한 동맹회담 개최
1963 미국-중미 6개국 정상, 진보를 위한 동맹회담 개최
1965 소련의 우주 비행사 알렉세이 레오노프, 세계 최초로 우주 유영에 성공
1970 캄보디아 무혈쿠데타로 시아누크 실각-론 놀 실권 장악
1975 선박왕 오나시스 장례식
1978 덩샤오핑, 과학기술개발촉진을 위한 과학백화제방 선언
1980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 사망
1980 미국, 아프간 침공사태 책임 물어 소련에 대한 수출금지 조치 내림
2000 대만 총통선거에서 천수이벤 당선
2008 영 법원, 매카트니 이혼위자료 503억원
2010 - 박지성, 챔피언스리그 16강 베스트11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이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와 팀 동료 웨인 루니 등 세계적 선수들과 함께 유럽 언론이 선정한 2009-2010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 베스트11에 뽑혔다.
박지성은 스포츠전문채널 유로스포츠가 18일(한국시각) 발표한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 베스트11 격인 `팀오브더라운드'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박지성은 지난 11일 AC밀란(이탈리아)과 대회 16강 2차전 홈 경기에서 풀타임을 뛰면서 후반 14분 팀의 세 번째 골을 넣으며 맨유의 4-0 승리와 함께 8강 진출에 큰 힘을 보탰다.
4-3-3 포메이션의 미드필더 부문에 박지성을 넣은 유로스포츠는 "지칠 줄 모르는 이 미드필더는 활기를 불어넣는 플레이로, 맨유가 올드 트래퍼드서 AC밀란을 상대로 시원한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했다. 골도 넣으며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극찬을 이끌어냈다"라고 평가했다.
AC밀란과 대결에서 선제 결승골 포함해 두 골을 넣은 루니도 베스트11에 뽑혔다.
유로스포츠는 루니 외에 슈투트가르트(독일)와 경기(4-0 승)에서 두 골을 넣은 바르셀로나의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공격수 메시, 포르투(포르투갈)와 대결(5-0 승)에서 해트트릭을 작성한 아스널의 니클라스 벤트너를 최고 공격수로 꼽았다.
박지성은 미드필더 부문에서 요안 구르퀴프(보르도), 베슬러이 스네이더르(인테르 밀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배진남 기자 hosu1@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10-03-19 오전 11:41:16
2010 - 김수용 감독 '나의 사랑 시네마' 18일
1960년대 한국영화를 이끈 김수용(81) 감독의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은 18일부터 4월4일까지 서울 상암동 시네마테크 KOFA에서 ‘김수용 회고전: 나의 사랑 시네마’를 연다.
일본과 합작해 만든 ‘사랑의 묵시록’(1995)과 모파상의 소설을 번안한 ‘돌아온 사나이’(1960), ‘갯마을’(1965), 그의 마지막 영화인 ‘침향’(1999) 등 27편을 상영한다.
한국 문예영화의 대부로 통했던 김 감독의 문예영화와 함께 ‘구봉서의 벼락부자’(1961) 같은 코미디영화, 버스 안내양들에 대한 비인간적 처사를 다룬 ‘도시로 간 처녀’(1981) 등 다양한 영화가 포함됐다.
20일과 27일, 4월3일 오후 4시에는 영화상영 후 김 감독이 관객들과 대화할 예정이다. 김홍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김영진 명지대 교수가 참여한다.
무료. 02-3153-2075 /뉴시스
[서울=뉴시스] /시사제주 2010년 03월 11일 (목) 21:14:50
김수용 감독 “내 영화 회고전, 큰 감동” 한국영상자료원 27편 상영
“잠자고 있던 제 영화들이 스크린에서 부활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황홀한 일이죠.”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김수용(81·사진) 감독은 내달 4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고 있는 ‘김수용 회고전: 나의 사랑 시네마’전에 대해서 묻자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김 감독은 최근 서울 장충동 카페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오래 살고 보니 이렇게행복한 일도 찾아온다”며 “지금까지 내 영화 중 10편 정도가 상영된 적이 있지만, 이렇게 큰 화면에 내 전작의 4분의 1이 상영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나로서는 큰 감동”이라고 했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갯마을’(1965)을 비롯해 ‘안개’(1967), ‘산불’(1967) 등 27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전작 109편 가운데 김수용 감독 자신이 직접 고른 추천작들이다.
1958년 ‘공처가’로 데뷔한 김 감독은 이후 10년간 60편의 영화를 만들 정도로 196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60년대 만든 대다수의 작품은 김유정의 ‘봄봄’(1969)처럼 한국 소설을 원작 삼아 만든 영화들이다.
여든이 넘은 그에게 또다시 영화를 만들고 싶냐고 묻자 “시나리오도 다 써놓은 영화가 있다. ‘근친 상간’에 관한 이야기”라고 귀띔하면서 “아직 투자를 못 받아서 촬영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연합뉴스 /한겨레 2010-03-21 오후 06:29:03
2009 - 예멘, 테러사건 대응팀에 자폭테러
'예멘 유가족' 차량에도 자폭테러… "한국인 겨냥했다" 대응팀 포함 모두 무사
지난 15일 예멘에서 발생한 한국인 상대 폭탄 테러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현지에 파견된 정부 대응팀과 유가족이 탄 차량이 18일 예멘 수도 사나에서 폭탄 테러로 추정되는 공격을 받았다. 사상자는 없었지만 15일 한국인 관광객 4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가 '외국인에 대한 무차별 테러'가 아닌 한국인을 표적으로 한 것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예멘 내무부는 "한국 정부 대응팀과 유가족이 탄 차량이 자살 폭탄 테러 공격의 목표물이었다"고 18일 공식성명을 통해 확인했다.
정부 당국자는 18일 "현지시각으로 오전 8시40분(한국시각 오후 2시40분)쯤 대응팀 4명 중 2명과 유가족 3명을 포함한 8명이 현지 경찰차를 앞세우고 차량 2대에 나눠 타고 사나 샤흐란 호텔을 출발, 공항으로 가던 중 경찰차와 대응팀이 탄 차량 사이에서 폭탄이 터졌다"며 "차량 유리창이 부서지고 범퍼가 심하게 찌그러졌지만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했다. 예멘 대사관 관계자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차량 사이로 사람이 하나 뛰어들었다. 옷 속에 폭탄을 숨기고 있어서 그런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도구가 없었고 행인인지 테러범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고 했다.
정부 당국자는 "차량에 우리측에서 나온 것이 아닌 혈흔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자살 폭탄 테러로 추정된다"고 했다.
15일 발생한 테러 희생자 유가족들은 사고 이후 사나공항으로 이동, 한국으로 돌아오는 항공편에 탑승했으며, 정부 대응팀은 예멘 당국의 15일 사건 수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당분간 현지에 머무를 예정이다.
외교통상부 문태영 대변인은 "정부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책을 마련 중이며 우선 중동지역 주재 우리 공관과 지·상사, 교민, 여행객들에 대해 각별한 안전조치를 취하도록 조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민혁 기자 lmhcool@chosun.com /조선닷컴 2009.03.19 03:07
- 예멘서 정부 신속대응팀 차량 피습…외신은 "자폭 테러" 모두 무사…알카에다, 잇단 한국인 공격으로 경고?
예멘에서 폭탄 테러로 한국인 관광객 4명이 사망한 15일자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현지에 파견된 외교부 신속대응팀과 유가족들이 탄 차량들이 18일 폭탄 테러로 추정되는 공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따른 인명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지난 15일 관광객들이 예멘에서 테러로 숨진데 이어 이러한 공격이 잇달아 일어나자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가 한국인을 표적으로 테러를 저지르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특히 △ 한국 외교부가 17일 테러 관련 성명을 발표했고 △ 정부 대책팀의 동선이 언론에 공개됐다는 점에서 최소한 18일 공격만은 의도적으로 한국인을 겨냥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는 미군과 나토 국제안보지원군(ISAF)을 지원하려 하는데 대한 알카에다의 경고라고 보기도 한다.
예멘 보안 관리 "한 명이 테러 저지른 후 사망"
정부 당국자는 "대응팀과 유가족 3명 등 7명이 예멘 측 경찰차를 앞세워 차량 2대에 나눠 타고 호텔에서 사나 공항으로 가던 중이던 오전 8시 40분 경(이하 현지시간) 경찰차와 대응팀이 탄 차량 사이에서 폭탄이 터져 차량의 유리창이 파손됐지만 인명 피해는 없다고 보고받았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차량에 우리 측에서 나온 것이 아닌 혈흔이 묻어있는 것으로 볼 때 자살폭탄 테러로 추정되지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며 "정부 대응팀을 겨냥한 것인지, 예멘 측 경호 오토바이를 앞세웠으니 예멘 정부의 고위 인사가 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테러를 했는지는 불분명하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예멘의 한 보안 관리는 차량들이 공항으로 향하던 중 한 명의 테러범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지만 전원 무사했다고 밝혔다고 <AP> <dpa> 등 외신들이 전했다. 테러범은 폭탄이 터지면서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이 관리는 덧붙였다.
다른 경찰 관계자들은 한국 대응팀을 태운 차량이 사나의 알-다일라미 군사기지 밖으로 빠져나가자마자 테러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이들은 테러범이 기지의 문 밖에서 대기하다가 범행을 저질렀지만 차량 행렬이 통과하고 몇 초 정도 지난 뒤에 폭발물 벨트의 스위치를 누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예멘포스트>에 따르면, 목격자들은 범인이 대응팀의 차량 행렬을 기다리다가 차량들이 나타나자 그 앞에서 자폭했다고 말했다. 사고 뒤처리를 위해 경찰이 차단선을 설정함에 따라 공항으로 가는 모든 통행이 한동안 차단됐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사고 후 유가족들은 별 탈 없이 사나공항으로 이동해 두바이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항공편에 오후 10시 예정대로 탑승할 계획이다. 총 4명으로 구성된 외교부 대응팀은 관광객 테러 사건 수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당분간 현지에 머무를 예정이다.
지난 15일 예멘 세이윤 지역에서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보이는 폭탄 테러로 고대 도시 시밤을 관광하던 한국인 관광객 4명이 사망했다. 정부는 사고 수습을 위해 16일 대응팀을 현지에 파견했다.
황준호 기자 /프레시안 2009-03-18 오후 3:44:58
2008 - 독립기념관 '最古태극기' 원본 아니었다
복제품 '표기' 없이 16년간 좌우 바뀐채 전시 진품은 27년동안 중앙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독립기념관이 공개적으로 소장 중이라고 밝혀 온 현존 최고(最古) 태극기인 ‘데니 태극기’는 원본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본보 취재결과, 데니 태극기는 1981년 기증 이후 지금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구한말 고종이 1890년 당시 조선 정부의 외교 고문이던 미국인 오웬 니커슨 데니에게 하사한 이 태극기는 본보 보도(81년 1월 5일자)로 존재 사실이 알려졌으며, 같은 해 데니의 후손이자 소유자인 미국인 윌리엄 롤스턴씨가 “한국 국민들이 볼 수 있게 해달라”며 우리 정부에 기증했다.
독립기념관 관계자는 18일 “지난해말까지 사회문화운동관 태극기변천사 전시실에 전시돼 있던 ‘데니 태극기’는 롤스턴씨가 한국 정부에 기증한 것이 아니다”며 “국내 태극기 변천사를 설명하기 위해 독립기념관이 91년 자체 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이 태극기를 전시하면서 복제품이라고 밝히지는 않았다”며 “왜 데니 태극기 원본이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지 못하고 복제품을 걸어놓았는 지는 알 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독립기념관은 그동안 각종 기록과 전시물 표기 등에 마치 독립기념관이 기증받은 것처럼 적었다. 특히 독립기념관 측은 지난해 말 전시실 개편 공사를 위해 복제 데니 태극기를 수장고로 옮길 때까지 16년 동안 국기의 앞뒷면을 바꿔 전시했다. 이 바람에 관람객들은 태극무늬와 건(乾)ㆍ곤(坤)ㆍ감(坎)ㆍ리(離) 4괘(四卦) 위치가 좌우로 뒤바뀐 데니 태극기를 봐야 했다. 현 태극기는 4괘의 순서가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건ㆍ감ㆍ곤ㆍ리’이지만 데니 태극기는 ‘감ㆍ건ㆍ리ㆍ곤’순으로 이뤄져 있다.
이에 대해 태극기연구가인 진무상 한국국기선양연구원 원장은 “일본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건립된 독립기념관이 복제품을 진품인 것처럼 속여 전시하고, 그마저도 태극무늬와 4괘 위치를 뒤바꿔놓아 국민들이 태극기 모습을 오인하게 했다”고 비난했다.
그렇다면 진짜 데니 태극기는 어디 있을까. 10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건국 60주년을 맞아 역사적 가치가 높은 태극기를 근대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문화재위원들이 실사 작업차 박물관을 방문했다. 문화재위원들이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보관 중인 태극기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과정에서 데니 태극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로 268cm, 세로 185cm 크기의 데니 태극기는 광목천에 태극 문양과 4괘를 천으로 오려 붙이고 정교하게 박음질해 제작된 것으로, 태극은 현재의 태극기처럼 청색과 홍색으로 돼 있지만 4괘는 검정색이 아닌 청색이다. 상하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는 태극 도형도 현 태극기와 달리 머리 부분이 좌측에서 우측으로 회전하는 홍색과 우측에서 좌측으로 회전하는 청색의 회오리가 가늘고 날렵하게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국기를 걸 수 있도록 태극기 좌측에 노끈을 매달아 박음질 했고, 박음질 한 부분 속에는 사람 머리카락을 채웠다.
박물관 관계자는 “정부로부터 받은 후 2000년 3월 잠깐 일반에 공개한 적이 있을 뿐, 줄곧 지하 수장고에 넣어 놓았다”며 “데니 태극기는 우리 박물관과 전시 성격이 맞지 않아 상시 전시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송명호 태극기선양운동중앙회 상임고문은 “데니 태극기는 초창기 태극기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급 역사물”이라며 “관계 당국은 국민이 최고의 태극기를 볼 수 있도록 상시 전시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관규 기자 qoo77@hk.co.kr /한국일보 2008/03/19 07:23:56
2008 - 경남 의령 하천변서 1억년전 공룡발자국 발견
경남 의령군은 의령읍 상리 산다마을 하천변에서 1억년전 중생대 백악기에 활동하던 조각류(鳥脚類) 초식공룡으로 추정되는 공룡발자국을 발견했다고 18일 밝혔다.
현장 확인결과 길이 36㎝, 폭 34㎝, 깊이 1~5㎝의 공룡발자국 2개로 세 발가락이 찍히고 발 뒤꿈치는 야구 글러브처럼 뭉툭한 형태로 전형적인 조각류 공룡으로 파악됐다.
이 조각류는 새 형태의 익룡과는 구분되며 4개의 다리를 가졌으며 앞다리는 뒷다리의 2분의 1 정도로 2다리 또는 4다리로 보행한 육상 초식공룡이다.
의령박물관 김상철 학예연구사는 "2개 발자국 외에도 추가로 발견될 가능성이 높으며 인근의 의령읍 서동리에 같은 시기의 화석인 빗방울 화석과 더불어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 자연사 자료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최병길 기자 choi21@yna.co.kr (의령=연합뉴스) /한겨레 2008-03-18 오후 04:44:39
2008 -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 입적
한국 불교계의 천진불로 알려진 조계종의 최고 원로인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원담(사진) 스님이 18일 밤 9시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염화실에서 입적했다. 세납 83살. 법납 76살.
원담 스님은 1933년 7살에 수덕사 초대 방장인 벽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벽초의 은사였던 만공 선사를 시봉하며 선지를 닦았다. 그는 조선 500년의 억불숭유정책으로 인해 완전히 피폐해진 우리나라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선사의 법을 이은 만공 선사로부터 직접 탁마한 이시대 마지막 선승이다. 만공 선사는 보월, 금봉, 고봉, 금봉, 우화, 효봉, 춘성, 금오, 전강, 성철, 청담, 법희, 입엽 선사를 비롯한 비롯한 근·현대 한국불교의 고승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고인은 한국 선불교를 반석에 올린 만공 선사를 직접 시봉하면서 만공 선사의 서원에 따라 3년 동안 서산 간월암에서 8·15 광복 3년 전부터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1천일간 스승 벽초와 함께 기도 정진을 했다. 특히 그는 어린 시절 절에 들어간 동진 출가자로서 천진무애한 모습을 보여 불교계에서 대표적인 ‘천진불’로 꼽혔다.
한국 선불교의 기둥인 경허-만공-벽초의 법맥을 이은 그의 서예는 국내 최고의 선필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의 제자로는 지난 2005년 조계종 총무원장 재직 때 열반한 법장 스님과 현 덕숭총림 정혜사 수좌 설정 스님 등이 있다. 영결식은 오는 22일 오전 10시30분 수덕사에서 봉행한다.(041)337-6565.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한겨레 2008-03-19 오후 07:05:43
2008 - 영 법원, 매카트니 이혼위자료 503억원
비틀스 전 멤버 폴 매카트니(65)가 모델 출신 두 번째 부인 헤더 밀스(40)에게 이혼 위자료로 2천430만파운드(약 503억원)를 지급하게 됐다.
런던의 법원은 매카트니에게 이혼 위자료로 1천650만파운드의 일시불과 780만파운드어치 자산을 주고, 딸 비어트리스의 보모 비용과 학비, 연간 3만5천파운드의 보육비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매카트니와 밀스는 2002년 결혼했으나 결혼 4년 만에 미디어의 심한 사생활 침해를 이유로 헤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네 살짜리 딸 비어트리스가 있다.
법정 밖에서 밀스는 "이제 끝나서 기쁘다"며 "나와 딸의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엄청난 결과를 얻었다"고 말했다.
법원의 요약 판결문에 따르면, 밀스는 당초 1억2천500만파운드의 위자료를 요구했고, 매카트니는 1천580만파운드의 위자료를 제시했다. 매카트니는 약 4억파운드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
판결 후 밀스는 딸의 안전을 위해 법원에 자세한 판결 내용의 공개 금지를 요청하겠지만, 항소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매카트니와 밀스는 지난달 위자료 합의 협상에 실패한 뒤 법정에 결정권을 넘겼다.
영국 법률 사상 최고액의 이혼 위자료는 지난해 악사 보험그룹의 대표 존 차먼이 27년 간의 오랜 결혼생활 끝에 이혼한 아내에게 지급한 4천800만파운드다.
김진형 특파원 kjh@yna.co.kr (런던=연합뉴스) /한겨레 2008-03-18 오전 12:20:21
2007 - 38살 봉달이 ‘6년만의 봄’
이봉주 서울국제마라톤 2시간8분4초 2001년 보스턴 대회 이후 첫 우승
‘봉달이’가 또 국민들에게 신선한 우승 감격을 선물했다. 한국 나이로 2년 뒤면 불혹에 접어드는 이봉주 선수(37·삼성전자)가 6년 만에 국제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개인통산 35번째 풀코스 완주. 한국 선수가 국내 무대에서 세운 최고 한국기록이며, 이른 감은 있지만 올 시즌 세계마라톤계 가장 빠른 기록 등등 …. 그의 우승 뒤엔 얘깃거리가 수없이 숨겨져 있다.
애칭 봉달이와 달리 그를 마라톤 영웅으로 일컫는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선수는 18일 서울 광화문~잠실주경기장에 이르는 42.195㎞ 구간에서 펼쳐진 2007 서울국제마라톤에서 2시간8분04초로 우승했다. 이번 대회 참가선수 중 최고기록(2시간6분44초) 보유자로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폴 키프로프 키루이(케냐·2시간8분29초)에 역전드라마를 펼친 경주였기에 더욱 값졌다.
이 선수의 이날 기록은 2000년 도쿄마라톤에서 세운 자신의 한국기록(2시간7분20초)엔 못미쳤지만, 역대 한국 4위에 해당한다. 국내에서 열린 대회로는 한국 선수가 낸 최고기록이다. 특히 이 선수는 자신의 세번째 빠른 기록을 냄으로써 주위를 놀라게 했다. 2001년 보스턴 마라톤 이후 6년 만의 국제대회 우승이다. 서울국제마라톤에서도 2000년 이후 7년 만에 한국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는 이정표를 만들었다. 그의 이런 내용들은 우승상금 8만달러를 능가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경주내용 역시 나무랄 데 없이 완벽했다. “35㎞까지 선두를 지키고, 그 이후 고통을 어떻게 참아내느냐가 중요하다”던 대회 전 인터뷰 내용을 몸소 보여준 경기였다. 36㎞지점에서 케냐의 키루이가 치고 나가는 것을 50m 가량 내버려뒀던 이 선수는 페이스 싸움에 말려들지 않았던 것이 주효했다. 힘을 미리 쓴 키루이가 지칠 무렵을 40㎞ 지점에서 예측한 이 선수는 잠실운동장 네거리에서 스퍼트를 시작했고, 40.65㎞에서 키루이를 제치고는 결승선을 가장 먼저 끊었다.
오인환 감독은 “훈련 스케줄을 잘 따라줬고, 컨디션은 최상이었다”며 “30㎞까지는 페이스 메이커를 쫓아가며 (2시간)7분대 기록 페이스를 지켰지만, 페이스 메이커가 없어진 이후 키루이가 치고 나간 34~38㎞ 구간에서 말려들지 않았던 게 결국 승부처가 됐다”고 설명했다.
“나이가 많다고 처진다는 생각 안 한다. 아프리카 선수라고 위축될 필요도 없다. 우린 우리 갈길만 가면 된다.” 인생의 깊이와 노력의 흔적이 담긴 이 선수의 말이 그의 우승을 더 빛내고 있다. 그는 후배들에게도 “저보다 실력이 더 나을 수도 있는데, 제 견해에선 더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정신력도 그렇고 훈련량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충고했다.
남자부 3위는 킵 켐보이(2시간8분38초). 이명승 선수(국군체육부대·2시간14분48초)는 9위를 차지했다. 여자부에선 웨이야난(중국·2시간23분12초)이 로즈 체류이요트(케냐·2시간27분25초)를 제치고 우승했고, 채은희 선수(한국수자원공사)는 6위(2시간32분01초)를 기록했다.
권오상 기자 kos@hani.co.kr /한겨레 2007-03-18 오후 06:53:38
2004 - 대한전선 설원량 회장 타계
[어제의 오늘]2004년 대한전선 설원량 회장 타계ㆍ노블레스 오블리주
한때 대한전선엔 3가지가 없었다. 회사 간판과 홍보실, 적자가 그것이다. 지금은 홍보팀이 생겼지만 간판과 적자가 없는 전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본사에서는 여전히 간판을 찾아볼 수 없고, 흑자행진도 1955년 창업한 이후 지난해까지 54년 연속 이어졌다.
대한전선을 이끌던 설원량 회장은 2004년 3월18일 타계했다. 창업주인 고 설경동 전 회장의 3남인 고 설 회장은 생전에 남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보다는 내실을 기하는 데 주력해 진정한 실용주의자라는 평판을 들었다. 양복을 옷깃이 닳을 때까지 입고, 한번 사용한 티슈를 다시 사용하고, 미국 유학 중인 차남에게 언제나 항공기 이코노미클래스만 이용하게 한 것 등은 몸에 밴 근검절약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건 그의 사후였다. 유족이 1355억원이라는, 당시로선 사상 최대 규모의 상속세를 신고해 주목을 받은 것이다. 유족에게 남긴 재산은 대한전선 주식 1297만여주와 부동산 등 3340억원가량이었다. 법대로 냈을 뿐인데도 화제가 된 것은 다른 재벌들과 비교가 됐기 때문이다. 시차가 있다곤 하지만 국내 최대 재벌인 삼성가 이병철 회장 유족이 낸 상속세는 176억원, 현대가 정주영 회장 유족이 낸 상속세는 300억원에 불과했다.
당시 국내 재계 서열 38위에 불과했던 대한전선 일가가 양대 재벌가들보다 더 많은 상속세를 낸 것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고인은 평소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책임과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다. 자신은 물론 큰아들도 현역으로 국방의 의무를 다했고 차남은 병역특례로 복무 중이다. 세금에 대해서도 “번 만큼 세금을 내는 게 당연하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재벌가에서 일반화돼 있던 변칙 증여나 편법 상속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김영환 대한전선 상무는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원칙과 정도를 가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당시 국세청 홈페이지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다한 고인과 유족들에 대한 네티즌의 칭찬글이 쏟아졌다. 정직한 부자는 존경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가 보여준 것이다.
류형열기자 rhy@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3-17 17:53:07
2003 - 이창호, 국제대회 ‘전관(全冠)제패’ 대기록
이창호(28) 九단이 마침내 대망의 국제 기전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다. 18일 한국기원에서 막을 내린 제4회 춘란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결승 3번기 2국에서 이 九단은 하네 나오키(羽根直樹·27) 九단을 221수만에 흑 불계로 제압, 16일 1국서의 백 불계승에 이어 2연승으로 타이틀의 주인이 됐다.
이날 바둑은 흑의 실리와 백의 두터움으로 중반까지 팽팽하게 맞섰으나, 종반 초입 흑이 중앙 백진 돌파에 성공하면서 7집 반의 큰 덤 부담을 딛고 낙승했다. 우승 상금은 15만달러(약 1억8000만원). 이 九단과 일본 기전 서열 5위 천원 타이틀 보유자인 하네 九단과의 통산 스코어는 3대0으로 벌어졌다.
이번 우승으로 이 九단은 메이저 국제 기전서 15회 째 정상에 오르면서 모든 기전을 1회 이상 제패하는 전관(全冠) 석권의 대 기록도 함께 수립했다(별표 참조). 마이너 기전까지 포함하면 국제 우승 기록은 총 19회에 이른다. 이 九단은 99년 제1회 춘란배 결승서만 조훈현 九단에게 패배, 준우승에 머물러 ‘전관 제패’ 축배를 미뤄 왔었다. 국제 기전 전관 제패는 조훈현 유창혁에 이은 세번째이며, 현 시점 기준으론 이창호가 처음하다.
이창호 九단은 이번 대회에 앞서 1월 제1회 도요다·덴소배(우승 상금 약 3억원)서 우승했고, 다음 주에 끝날 제7회 LG배(2억5000만원)서도 결승에 올라있어 같은 해 전 국제 기전 석권이란 또 하나의 신화에 도전 중이다. 이 九단의 지금까지 연간 최다 우승 기록은 98년 수립한 3개 대회(동양증권·삼성·후지쓰)였다.
이 九단의 춘란배 제패로 한국의 국제 무대 우승 행진은 22회로 늘어났다. 한국은 2000년 8월 조훈현 九단이 제13회 후지쓰배에서 우승한 것을 신호탄으로 남·녀, 개인·단체, 메이저·마이너를 망라해 3년 째 완전 석권을 이뤄가고 있다. 뒤를 이을 7회 LG배는 한국 기사들끼리 결승전을 치르는 관계로 23연속 우승도 자동 결정됐다. 한편 중국 주최의 유일한 국제 대회인 춘란배는 4년간 조훈현, 왕리청(王立誠·일본), 유창혁 이창호가 차례로 우승, 주최국 기사가 한번도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징크스를 계속했다.
이홍렬기자 hrlee@chosun.com /조선닷컴 2003-03-19 09:34:34
2000년] 대만 총통선거에서 천수이볜 당선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 1951~ ] 후보가 2000년 3월 18일 중국의 위협 속에 실시된 총통 선거에서 39.30%의 지지로 승리,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해 1949년 대만으로 건너간 국민당의 통치를 종결시켰다.
1951년 남부 타이난현에서 출생한 천수이볜은 가난하고 배고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전교1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는 중학교 수석 졸업, 대만대 법과 수석 입학, 대학재학중 사법시험 수석합격 등을 통해 `가난한 수재`에서 변호사가 됐다.
1994년 타이베이시 첫 직선시장이 됐으나 1998년 연임에 실패했다. 대만독립주의자인 천수이볜이 시장 재임시 추진한 강력한 개혁을 기억했던 많은 사람들은 이번 선거에서도 그를 지지했고 공직사회를 정화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부인 우수전은 정치테러로 15년째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다.
1997 - 삼미그룹 계열사 법정관리 신청
김현배 삼미그룹 회장이 계열사 법정관리신청과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조선
삼미그룹이 `법정관리에서 제3자 인수`의 수순을 밟게 됐다. 삼미그룹은 주요 채권은행인 상업은행 및 제일은행과의 협의를 거쳐 1997년 3월 18일 밤 서울지방법원에 주력 기업인 삼미특수강을 비롯, (주)삼미, 삼미금속, 삼미기술산업, 삼미화인세라믹 등 그룹의 5개 계열사에 대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삼미그룹은 지난 1959년 해운과 목재업을 모태로 출범한 이래 줄곧 많은 시련을 겪으며 성장해온 기업이다. 지난 1980년 김두식 창업주가 작고하자 30세의 나이로 그룹 회장직을 물려받은 김현철 전 회장이 정부지원을 받아 소재산업에 집중 투자했지만 철강시장이 침체에 빠지면서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고, 지난 1992년의 대주주 주식매각과 관련한 국세청 세무조사, 김 전 회장의 동생 현기씨가 거액의 외화를 빼돌리려다 구속된 사건 등이 겹쳐 자금난이 계속 악화됐다.
결국 삼미그룹은 부채 7천억원을 떠넘기는 조건으로 삼미특수강의 봉강 및 강관 생산설비를 포철에 매각했지만 자금난과 과중한 금융비용 부담을 견디지 못해 일괄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조선
3월 18일, 재계의 26위인 삼미그룹이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다.
철강 경기가 좋았던 때는 12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17위까지 올랐던 그룹이었다.
삼미그룹의 부도로 100여개나 되는 삼미특수강 하청업체도 연쇄 도산할 위기에 놓였다.
1996년] 무궁화위성 방송서비스 개시
무궁화위성(KOREASAT) 1호는 미국 남부 플로리다주 케이프커내버럴곶(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맥도넬더글러스의 델타 Ⅱ 로켓에 의해 1995년 8월 5일 주위성을 발사하였으나 정지궤도에는 8월 30일에 진입하였다. 예비위성은 12월에 발사하였다. 적도 상공 약 3만 6000km, 동경 116°의 지구정지궤도상에 발사되어 국내 위성통신 및 운행차량, 선박의 위치 등 각종 위성 데이터통신 서비스를 제공한다.
위성이 발사하는 전파빔은 그 중심점을 전라북도 무주 지역에 두고 한국 전역과 일본, 연변 일대를 대상으로 한다. 위성관제소는 경기도 용인시와 대전광역시 대덕구에 있다.
무궁화 2호은 1996년 1월에 발사, 궤도진입에 성공하였다. 또한 1999년 9월 5일에 무궁화 3호를 발사함으로써 초고속 위성 멀티미디어 인터넷, 다채널 디지털 위성방송, 기업 통신 네트워크 등에 다목적으로 할수 있게 되었다.
1994 상록수 부대 소말리아에서 귀국
소말리아에 유엔의 평화유지활동을 위해 파견됐던 상록수부대원 2백50명이 철수해 1994년 3월 18일 오전 8시 대한항공 전세기편
으로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상록수부대는 1993년 7월30일 파견돼 발라드∼조하르간 60㎞구간의 도로보수 발라드∼아프고이간 20
㎞ 도로건설 제너럴 다우드 관개수로개통 발라드경찰서 보수 기술학교 운영 등 소말리아재건을 위한 활동을 주로 해왔다.
1992년] 경국대전 최고본 발견
조선왕조 5백년의 기본헌법이었던 경국대전 초간본이 1992년 3월 18일 발견됐다. 이는 국내에 현존하는 최고의 성문법전이다. 1470년 10월 간행된 이 경국대전은 조선왕조실록 등에 신묘대전 이란 명칭으로 기록돼 있으며, 지금까지 존재가 알려져 온 경국대전(1484년 간행 을미대전)보다 간행연도가 14년 앞서는 국보급이다.
이날 발견된 신묘대전은 가로 17.4㎝,세로 25.3㎝ 크기에 초주갑인자로 제작됐으며 1책 2권의 1백76쪽 분량에 서문과 목차, 편찬자 명단, 이전, 호전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경국대전의 발행은 법치주의에 입각한 왕조통치의 기초인 규범체계가 확립 된 점, 조선왕조의 고유법을 성문화함으로써 중국법의 무제한적 침투에 방파제가 됐다는 점 등의 의의를 가진 것으로, 조선 법제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됐다.
1983 부산 컨테이너 전용부두 중공
부산에 컨테이너 전용 부두가 1983년 3월 18일 준공됐다. 이날 준공된 컨테이너 부두는 1979년 7월부터 총 66만㎡(20만평)의 수면
을 매립해 건설한 것이다. 이 부두의 완공으로 부산항은 5만 톤급 선박을 비롯해 1천톤급 이상 대형 선박 56척이 동시에 접안하여
연간 1천860만 톤의 화물을 처리할 수 있는 규모를 갖추게 됐다.
부산항은 1876년 개항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항구다. 이후 지속된 항만시설의 정비로 현재 우리나라 최대의 항만
이자 내외무역의 관문으로 성장했다.
1982년]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발생
← 부산 미문화원 1층에서 발생한 화재로 문화원 3층건물이 불길에 휩싸이고 있다.
1982년 3월 18일 오후 2시 부산 고신대생들이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및 독재정권 비호에 대한 미국측의 책임을 물어 부산 미문화원 1층에 방화한 사건이 발생했다. 때를 같이해서 주변에는 유인물 700여 장이 뿌려졌다. '반미'의 금기를 깬 이 사건은 대담하고 격렬한 투쟁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고, 미문화원이 1980년대 반미투쟁의 표적이 되는 신호탄 역할을 했다.
방화를 실행한 고신대생 이미옥 등이 3월 30일 잡히면서 사건의 윤곽이 드러났으며, 주범으로 공개수배된 고신대생 문부식과 김은숙은 4월 1일에 자수했다. 이튿날인 2일에는 문부식의 배후로 지목된 광주민주화운동의 수배자 김현장이 검거됐다. 3일 뒤에는 김현장을 은닉한 혐의로 원주교육원장 최기식 신부가 연행되면서 천주교까지 연루되는 사건으로 번졌다.
전두환 정권은 평소 탐탁치 않던 천주교에 대대적인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고 천주교 측은 범죄 혐의자라도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도와줘야 한다는 교회법을 내세우며 맞섰다.
8월 11일, 사건 관련자 16명 전원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김현장과 문부식은 사형, 김은숙과 이미옥은 무기징역 등 사건 관련 피의자 전원에게 3년 이상의 징역이 선고됐으나 1983년 감형됐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일단락 됐지만 전국의 미문화원도 반미투쟁의 표적이 되어 1982년 11월 광주 미문화원에는 화염병이 투척됐고, 1983년 9월 대구 미문화원에서는 폭발물이 터져 수 명이 사상당했다. 1985년 5월 서울의 미문화원은 73명의 대학생들에게 점거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테러리스트적 투쟁방식으로 인해 운동권일각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편 사건의 주모자로 사형선고을 받은 문부식은 6년 9개월만에 풀려나 운동권으로부터 반미운동의 선구자로 추앙받았지만 2002년 경찰관 7명이 순직한 부산동의대 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지정한 것을 잘못됐다는 입장표명으로 진보세력으로부터 곤욕을 치러야 했다. /조선
1980년]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 사망
←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리히 프롬.
신프로이트학파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에리히 프롬이 1980년 3월 18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1900년 유대인 태생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프롬은 어린 시절 유대교 신앙이 돈독한 가정에서 자랐다.
이후 사춘기 때 경험한 ‘전쟁’이라는 사건은 그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또한 충분히 이성적인 사람들조차 맹목적인 증오와 광적인 폭력에 열중하는 모습에 인간과 그 인간이 모인 집단인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하이텔베르크 등지에서 사회심리학을 연구한 뒤, 베를린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을 탐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934년부터 콜롬비아와 예일대에서 강의하는 한편, 계속해서 저술활동을 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의 기술’ ‘그리스도의 도그마’ ‘소유냐 삶이냐’ 등이 있다.
한때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과 사회학자, 특히 마르크스 이론을 연구하며 이 이론을 지적하기도 했으나, 프롬의 대부분의 이론적 근거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두고 있다.
프롬은 인간과 사회 문화 및 종교의 넓은 영역을 종횡무진 섭렵했지만, 그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 ‘인간’에 있었다. 프롬은 비단 사회조직뿐 아니라 정치권력과 종교도 다 인간중심의 것으로 개편되어야 한다고 감히 주장했다. 프롬은 한때 동양의 불교에도 심취한 바 있으며 끝까지 이상적인 인간상 즉, ‘자유인’을 부르짖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리고 인간은 사랑없인 살 수가 없다.”(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中). /조선
1979년] 박찬희 WBC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 박찬희 선수
박찬희 선수가 1979년 3월 18일 프로데뷔 10년 만에 세계타이틀에 도전, `링의 교수`로 불리던 멕시코의 미구엘 칸토를 꺽고 WBC 플라이급 챔피언에 올랐다. 박선수의 별명은 링에서 도망가는 일 없이 사납게 밀어붙이는 복싱을 한다고 해서 ‘작은 표범’이었다.
그는 1980년 5월 18일 일본의 오쿠마 쇼지에게 타이틀을 잃을 때까지 5차 방어에 성공했다. 당시로서는 국내 최초였다. 1980년 10월 18일 일본에서 그로부터 타이틀을 빼앗아 간 오쿠마 쇼지와 재대결을 벌였지만 분루를 삼켜야 했다. 그 판정이 문제가 돼 이듬해 2월 다시 재대결을 벌였지만 그는 또 패하고 링을 떠났다./조선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 과학기술개발촉진을 위한 과학백화제방 선언
'온갖 꽃이 같이 피고 많은 사람들이 각기 주장을 편다'는 뜻의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은 누구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는 뜻으로 쓰인 중국의 정치구호이다. 1956년 당시 중국공산당 선전부장인 루딩이[陸定一]가 한 연설에서 쓴 말이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다른 사상과 경쟁하는 속에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여야 하는 것이 마땅하며, 처음부터 유일하고 절대적인 사상으로 강요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등 획기적인 사회주의 문화정책을 표방하였다.
문학대혁명 때는 이 정책이 부르주아지 자유주의라고 규탄당하면서 루딩이도 비판당하였다. 1976년 4인방이 체포·실각된 후 문예·학술 분야에서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이 한 때 장려되었고, 1978년 3월 채택된 중국 헌법에서는 "국가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방침을 실천함으로써 예술발전과 과학발전을 촉진하고, 사회주의 문화번영을 촉진한다"(제14조)고 명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방침은 그때 그때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변화되는 정치적 책략에 불과하였다. 1978년 이 정책을 명문화시킨 것은 당시 덩샤오핑[鄧小平]이 문혁파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상황에서 문혁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정치투쟁의 방편으로 이용하였으나, 실권을 장악한 후인 1982년 12월 채택한 헌법에서는 이 조항을 삭제하였다.
1965 소련, 보스호드 2호 발사. 레오노프 인류최초의 우주유영 성공,
*소련이 1965년 3월 18일 보스호드2호를 발사했다. 우주비행사 알렉세이 레오노프는 우주복을 입고 궤도비행중이던 우주선을 떠나 우주공간에서 10분간 유영함으로써 세계최초의 우주유영 인물이 되었다. 레오노프는 2인승 보스호드 2호가 지구를 1바퀴 돌고 2번째로 소련 상공을 통과할 때 우주선의 해치를 열고 나가 우주공간에서 10분간 머물렀다. 4.6m 길이의 밧줄로 자신을 우주선에 연결했으며 강력한 태양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특별장비를 갖춘 우주복을 입고 있었다. 소련과 유럽의 TV시청자들은 레오노프가 우주선 밖으로 나와 우주공간에서 유영하는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1963] 케네디 대통령 코스타리카 방문 - 미국-중미 6개국 정상, 진보를 위한 동맹회담 개최
1975년] 선박왕 오나시스 장례식
1975년 오늘, 사흘 전(3월 15일) 숨진 세기의 대부호, 선박왕 오나시스(Onassis, Aristotle Socrates, 1906~1975)의 장례식이 열렸다. 미망인 재클린 여사와 딸 크리스티나가 운구 행렬과 함께 그리스 서쪽 스콜피오 섬에 마련된 장지로 향한다.
유언에 따라 오나시스의 유산 130억 달러 가운데 반은 전처(前妻)와 자녀에게, 나머지는 비행기사고로 죽은 자식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오나시스 재단에 기증됐다. 7년 전 결혼 선물로 스콜피오섬을 받았던 미망인 재클린 여사는 2천만 달러를 상속받았다.
존.F.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여사는 남편이 암살된 지 5년 만인 1968년 오나시스와 결혼했다.
1969 제 3사관학교 개교
1969년 3월 18일 제 3사관학교가 경북 영천에서 문을 열어 925명의 사관생도 입교식을 가졌다. 1968년 1․21 무장공비 남파사건과
미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등 북한의 무력도발이 심화된 시기에 내 놓은 정부의 대응책에 따른 조치로 초급장교를 단기간 내에 배출
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제 3사관학교는 1983년 입학자격을 초급대졸 이상으로 격상시키고 교육기간을 2년에서 9개월로 단축했다가 1995년부터 교육기간
을 다시 2년으로 늘려 현재는 졸업생들에게 학위도 함께 수여하고 있다.
1965년] 한.미 외무장관 회담
1965년 오늘 한일 국교수립 문제로 국내의 반대여론에 직면하고 있던 이동원 외무장관이 미국을 방문해 존슨 대통령과 러스크 국무장관을 잇따라 만났다.
존슨 대통령은 한일 국교 수립을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어 러스크 장관과의 외무장관 회담에서 이동원 장관은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우리나라는 이 외무장관 회담이 있기 한 달 전 베트남 파병을 시작했다.
러스크 장관은 한일 국교가 수립돼도 미국의 군사, 경제적 원조에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협상 중이던 한미행정협정의 빠른 체결도 다짐했다.
이동원 장관은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를 방문해 우탄트 사무총장과 면담도 가졌다.
1964년] 한국-라이베리아 국교 수립
한국은 1964년 3월 라이베리아와의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 1973년 7월 상주공관을 개설하였다. 라이베리아도 1983년 11월 아프리카에서는 가봉 다음으로 주한상주공관을 개설하였다. 1982년 5월 도 국가원수의 방한으로 친한정책이 견고해짐에 따라 각종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처음으로 지난 1984년 한국 건설업체가 도로건설공사를 수주한 바 있다. 1982년 경제기술협력협정 체결 뒤 주로 농업분야 종사자에 대하여 기술공여를 해 왔다. 또한 의복·차량·의약품 등 한국산 기자재의 무상공여와 의료단 파견 등으로 실질경제협력관계를 증진시켜 왔다. 2003년 현재 교민수 26명, 무역량은 2002년 대한수입액 14만 2664달러, 대한수출액 117만 달러이다. 북한과는 1975년 수교하였으나 1988년 KAL기 테러사건 뒤 단교하였다.
1962년] 프랑스, 알제리 휴전협정 조인
← 알제리인들이 ‘민족해방전선(FLN)만세’ 포스터를 가리키며 기뻐하고 있다.
1962년 3월 7일 시작된 프랑스-알제리간의 에비앙 평화회담에서 3월 18일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이로써 7년 동안에 걸친 프랑스-알제리 전쟁은 종식됐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자마자 알제리의 독립을 반대하는 비밀군사조직(OSA)을 이끌고 있는 라울 살랑 장군은 그의 지지자들에게 알제리 독립에 대항해 계속 싸울 것을 촉구했다. 살랑의 호소가 있은 지 수일 만에 알제리의 수도 알제시와 오란에서 발생한 시가전에서 수십명이 사망했다.
휴전협정 규정에 따라 알제리인들은 수개월 내에 투표를 통해, 프랑스의 일부로 남을 것인지 더많은 자치권을 얻을 것이지 혹은 완전한 독립을 획득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된다. 알제리 유권자들은 투표를 통해 99.72%의 찬성으로 독립을 결의, 7월 3일 드골 대통령이 특별메세지를 통해 독립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환희에 들뜬 수천명의 알제리인들이 수도 알제 거리를 메우고 공항에 도착하는 드골의 새 내각을 환영했다. 드골의 독립선포로 132년 간에 걸친 프랑스 식민통치의 막이 내려졌다./조선
1956 한국, 세계 기상기구(WMO)에 가입
약칭은 WMO이다.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의 전문기구로, 1879년에 창립한 IMO(International Meteorological Organization:국제기상기구)가 그 전신이다. 1947년 IMO 이사회에서 새로운 기구를 창설하기 위하여 세계기상협약을 채택하였고, 그 결과 1951년부터 44개 회원국으로 WMO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관측망 확립을 위한 세계 협력, 기상사업 설비를 갖춘 기상중추의 확립·유지, 기상정보의 신속한 교환조직 확립, 기상관측 표준화와 관측 및 통계의 통일성 있는 간행 확보, 항공·항해·농업 및 인류활동에 대한 기상학 응용, 기상학 연구 및 교육의 장려와 국제적인 조정 등을 목적으로 한다.
기구에는 정책입안을 담당하며 4년마다 개최하는 총회를 비롯하여 29명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 지역기상협회, 전문위원회 및 행정조직의 중심 기능을 담당하는 사무국 등이 있다.
활동 중인 사업으로 세계기상 감시, 세계기후 프로그램, 대기조사 및 환경 프로그램, 기상학 장비 프로그램, 수문학 및 수원(水原) 프로그램, 기술협력 프로그램, 교육 및 훈련 프로그램 등이 있다. 2000년 현재 179개국에서 185개 회원 단체가 참가하고 있으며, 한국은 1956년 3월에 회원으로 등록하였다.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다.
1949북대서양조약기구[北大西洋條約機構, 발족,
1949북대서양조약기구[北大西洋條約機構,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 발족,
*북대서양조약에 의한 지역적 군사기구. 약칭 NATO. 제 2 차세계대전 뒤 미·소의 냉전이 격화되는 가운데 1948년 서유럽 5개국(영국·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은 미국의 의향에 따라 경제적·사회적·문화적 협력과 집단적 자위를 위한 조약(브뤼셀조약)을 맺었다. 미국은 베를린봉쇄에서 알 수 있듯이 냉전이 최고조에 달한 48년 상원(上院)의 밴던버그결의에서 군사동맹조약에 참가할 조건을 분명히 밝혔고, 브뤼셀조약의 5개국에 미국·캐나다·노르웨이·덴마크·아이슬란드·포르투갈·이탈리아의 7개국을 더한 북대서양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은 49년 4월 4일 조인, 같은해 8월 24일 발효되었다. 52년 그리스·터키, 55년 독일(서독), 81년 에스파냐가 가입하였으며, 냉전 후 동방확대의 제 1 진으로 99년 3월 폴란드·체코·헝가리 3나라가 가입하여 2000년 현재 19개국이 되었다. 다만 프랑스는 핵정책에 관하여 미국·영국과 견해 차이로 66년 북대서양조약의 군사기구에서 탈퇴하였다. 북대서양조약에는 그 임무 수행을 위하여 각 가맹국 대표로 구성되는 최고기관으로서 이사회가 설치되어 있다. 이사회의 보조기관으로 방위계획위원회와 군사위원회가 있고, 그 아래에 1950년 북대서양군이 조직되어 사령부를 파리에 두었으나 프랑스가 군사기구에서 탈퇴한 뒤에는 브뤼셀로 옮겼다. 북대서양조약기구는 동남아시아조약기구, 앤저스조약, 미·일 안전보장조약, 미국-필리핀 상호방위조약, 한·미 상호방위조약, 미국-자유중국 상호방위조약 등과 함께 제 2 차세계대전 뒤 미국을 맹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 옹호를 위한 군사동맹망의 커다란 축을 형성하여 바르샤바조약기구 등의 사회주의 진영과 대치해 왔다. 북대서양조약을 비롯한 이들 군사동맹조약은 그 법적 근거를 국제연합헌장 집단안전보장체제의 예외인 집단적 자위권에 두어, 결과적으로는 집단안전보장체제의 기초를 무너뜨린 셈이다. 냉전 종식 결과 90년 7월 런던선언에 기초하여,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려는 NATO의 개혁작업이 시작되었다. 기본방침은 91년 7월 발표된 동맹의 신전략개념, 94년 1월 브뤼셀선언을 거쳐, 99년 4월 창설 50주년을 계기로 발표된 동맹의 전략개념을 구체화한 것이다. 즉 동맹의 목적 및 임무를, 비동맹국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집단방위(제 5 조)뿐 아니라 유럽·대서양지역의 위기관리로 확대한 것으로, 전략면에서는 위기관리형보다 기동력에 풍부하고 유연한 전력을 유지하고, 핵에 관해서는 그 사용 가능성을 극히 낮다라고 하면서도 최소한의 정도는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구역 외에서의 위기관리형 군사행동의 정도는 아직 불충분하고, 그 외에도 NATO내 유럽안전보장·방위의 정체성, 가입국확대, 러시아와의 관계 등 검토할 과제가 많다. 냉전이 종료되자 구소련과 구동유럽 각국이 조직한 바르샤바조약기구는 해체되고, 그 결과 구동유럽 여러 나라는 NATO와 여전히 강대한 러시아 사이에서 이른바 힘의 진공상태에 남겨졌다. 이때 중유럽 각국을 시작으로 이들 국가들은 NATO의 조기가입을 원하게 되었고, NATO 내에서도 NATO의 존속과 중·동유럽의 안정을 위해 수락하려 했다. 이때 아직 기반을 못 잡은 러시아는 발트삼국 등 구소련에까지 이르는 동방확대에 위기감을 느꼈다. 이때 당초 신중했던 미국이 1994년 가을 확대추진책으로 전환했다. 그 배경에는 국내의 각종 이익단체의 압력과 클린턴대통령의 재선 예측이 있었다고 한다. 95년 9월까지 NATO 부서내의 연구를 통해 확대원칙이 확인되었고, 96년 봄부터는 확대를 희망하는 12개 국가와 개별대화를 나누었다. 강경한 반대세력인 러시아와의 대화도 진행되어, 결국 97년 7월 NATO의 마드리드정상회담에서 가입희망 12개국 중 폴란드·헝가리·체코 3개국의 가입이 정식결정되었다. NATO는 이후에도 동맹조약 10조에 의거한 문호개방정책을 취하다가, 코소보분쟁을 계기로 NATO 자체의 변혁에 관심이 쏠렸고, 또 러시아와의 관계가 미묘하게 되어, 남은 9개 국가에 대한 확대제 2 단계에 대해서는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97년 4월 워싱턴수뇌회담에서는 신규가맹은 2000년까지 개최 예정의 차기수뇌회담에서 검토할 것이라며 대신 가맹조건정비를 지원하는 가맹행동계획을 채택하고 있다. (엠파스 백과 100.empas.com)
1947 미국 제너럴모터스사 설립자 윌리엄 듀랜트8]사망,
1947 미국 제너럴모터스사 설립자 윌리엄 듀랜트[Durant, William Crapo, 1861.12.8∼ 1947.3.18]사망,
*보스턴 출생. 1886년 미시간에서 운송회사를 설립한 후 1903년 소규모 자동차회사를 매수, 뷔크(Buick)모터스사를 설립하여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 여러 자동차회사를 모아 제너럴모터스사(社)를 설립하였으나, 경영부진으로 1910년 경영권을 잃고 물러났다. 그 후 L.셰브롤레와 합작으로 셰브롤레(Chevrolet) 자동차회사를 설립하였다. 1915년 제너럴모터스사 경영권을 다시 찾고 제너럴모터스 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또다시 제1차 세계대전 후 경제불황으로 지배권을 잃었다. (출처: 두산백과)
1944 -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정운영 출생
정운영(鄭雲暎, 1944년 3월 18일 ~ 2005년 9월 24일)은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언론인이다. 정통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소개한 진보경제학자로 알려져 있다.
생애
충청남도 온양시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온양으로 돌아와 고등학교를 나왔다. 1964년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1969년에 졸업, 이후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2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기자로 일했고 후에 중앙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로마 가톨릭 사제들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은 그는 벨기에로 유학, 1981년에 루뱅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이듬해 한신대학교 경상학부 교수로 임용하여 《마르크스 경제학》을 연구하여 김수행, 이영훈, 윤소영, 강남훈 등과 함께 한신 경제과학 연구소 활동을 주도했다. 1986년 한신대에서 해직당한 뒤,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등에서 정치경제학을 강의했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한 그는 비상임 논설 위원을 지냈으며,《전망대》 등의 칼럼을 통해 커다란 명성을 얻었다. 1991년 12월 31일에 한겨레신문사를 퇴사했다. 오랜 강사 생활 끝에 1999년 경기대학교 경제학과 부교수로 임용되었으며, 문화방송의 토론 프로그램인 《정운영의 100분 토론》진행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0년에는 중앙일보 논설 위원으로 활동하여 《정운영 칼럼》이라는 제목의 집필을 해왔는데 당시 쓴 몇 편의 글은 친(親)재벌적인 논조로 자신의 평소의 학자로서의 신조와는 모순되었기 때문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83년 위암 수술을 받았으며, 1987년에는 허파에 병이 생겨 입원하는 등 병마로 고생하기도 했다. 2005년 지병인 신장 질환으로 별세하였다.
수상 경력 /위키백과
1927년] 이화여전, 제1회 졸업식 치름
이화여자대학교 : 1886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M.F.스크랜턴 부인에 의하여 창설, 이듬해 명성황후가 교명을 이화학당이라고 이름하였다. 교훈은 '진, 선, 미'이다.
1910년 4년제 대학과정을 신설하고,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칭하였으나,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1년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양성과로 격하되었다가 1945년 경성여자전문학교로 다시 개칭하였다. 1945년 10월 이화라는 교명을 되찾고, 한림원·예림원·행림원 등 3원에 문과·의학예과·교육과·약학과·체육과·미술과의 8개 학과를 둔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여, 초대총장에 김활란(金活蘭)이 취임하였다.
1910 타이완 총통 장징궈(장경국蔣經國.1910-1988)출생,
*타이완 정치가. 저장성[浙江省] 펑화현[奉化縣] 출신. 국민당정부의 지도자 장제스[蔣介石]의 장남이다. 1924∼37년 모스크바에 유학하여 모스크바중산대학(中山大學)에서 수학했고, 러시아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38년 장시성[江西省] 구(舊)중국 공산당 소비에트구(區)에서 국민당 정부 행정관서의 전문요원이 되었고 반공구국(反共救國)을 주창했다. 제 2 차세계대전 후인 45년 외무성의 둥베이[東北] 특파원, 48년 상하이경제독찰관[上海經濟督察官]이 되었다. 49년 장제스가 타이완[臺灣]으로 쫓겨감에 따라 국민당의 타이완성[臺灣省] 주임(主任)이 되었다. 50년 국방성총정치부 주임이 되어 특무조직(特務組織)을 장악했다. 52년 국민당중앙위원, 54년 국방최고회의 부비서장, 58년 행정원위원·내각정무원(內閣政務員), 60년 육군상장(陸軍上將), 62년 국민당상무위원, 64년 국방차관, 65년 국방장관, 69년 부총리, 72년 총리, 75년 국민당 주석 그리고 78년 장제스 사후에는 타이완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78년 부친의 뒤를 이어 제 6 대 총통이 되었다. 81년 당주석에 재선되었고, 제 3 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을 거부하고 삼민주의에 의한 중국통일을 주장했다. 87년 7월, 그때까지 국민당 1당 지배를 펴온 그는 국민들의 점증하는 민주화 요구에 밀려 49년 이래 계속돼 온 계엄령을 해제한 후 제반 민주화 조치를 취하였다. 88년 1월 사망하였다. (엠파스 백과 100.empas.com)
1908년] 문학평론가 백철(白鐵) 출생
1908. 3. 18 평북 의주~1985. 10. 13 서울.
개요
프롤레타리아 문학기를 거쳐 8·15해방 이후 신비평 이론을 소개하는 등 한국 문학비평에 있어서 대들보 역할을 했다. 본명은 세철(世哲).
생애와 활동
소지주인 무근(茂根)의 아들로 태어나 13세까지 한학을 공부하다가, 1921년 신의주공립보통학교 6학년에 편입했다. 1922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1927년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31년 도쿄고등사범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이무렵 〈지상낙원〉·〈전위시인〉의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30년 일본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NAPF)에 가입했다. 1931년 귀국해 개벽사에 입사하면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중앙위원이 되었고, 이때 해외문학파와 논쟁을 벌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34년 카프 제2차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전주형무소에서 1년 6개월 수감되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동아일보〉에 〈비애의 성사(城舍)〉라는 제목의 출옥소감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문학이 과거와 같은 의미에서 정치주의를 버리고 마르크스주의의 태도를 버리는 것은 비난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크게 찬하해야 할 현상"이라면서 전향을 선언했다. 즉 인간탐구의 문학을 내세우면서 유형화된 이념적 인간보다는 소극적일지라도 양심적인 인간을 그릴 것을 주장한 것이다. 1939년 〈매일신보〉 문화부장을 지냈고, 1942년 중국 북부지방 특파원으로 있다가 8·15해방 직전에 귀국했다. 8·15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조선신문학사조사〉의 집필에만 전념했다. 1955년 중앙대학교 문리대학 학장, 1957년 미국 예일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교 교환교수로 다녀왔고, 1963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위원장, 1970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 회장을 지냈고, 1972년 일본문화연구 국제회의 초청을 받아 한국문학의 국제적 이해를 도모했다. 1966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평론세계
1931년 평론 〈농민문학문제〉(조선일보, 1931. 10. 1~20)를 통해 안함광이 농민문학의 목표는 빈농계급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적극적 주입이라고 한 것은 기계주의적인 좌익편향에 잠재해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뒤 〈창작방법문제〉(조선일보, 1932. 3. 9~10)와 프루스트의 신심리주의 문학을 비판한 리얼리즘 문학론인 〈현대문학의 신심리주의적 경향〉(중앙, 1933. 11)·〈비평의 신임무〉(동아일보, 1933. 11. 15~17) 등을 발표했다. 1933년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도식성을 비판한 〈문단시평-인간묘사시대〉(조선일보, 1933. 8. 29~9. 1)를 발표해 카프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계속해서 인간탐구가 문학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작가가 개성을 버리고 서구의 문예사조에 휩쓸리는 것을 비판한 〈문예시평-금일창작의 음미-낭만인가? 진실인가?〉(조선일보, 1936. 3. 18~28),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현실에 굴복한 지식인을 옹호한 〈고민과 문학〉(조선일보, 1936. 4. 23~24), 새로운 리얼리즘 문학론인 〈인간탐구의 문학〉(사해공론, 1936. 6), 인간성을 존중한 〈휴머니즘의 본격적 경향〉(청색지, 1938. 8), 보편적 개성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한 〈개성과 보편성〉(조광, 1938. 10) 등을 발표했다. 나아가 웰렉 등의 신비평 이론을 소개하는 〈뉴크리티시즘에 대하여〉(문학예술, 1956. 11)를 발표해 기존의 작품해석이 사회적 배경이나 역사적 상황에 근거한 점을 비판했다. 그뒤 〈다시 행동적 휴머니즘의 시대〉(새벽, 1960. 12)·〈세계문학과 한국문학〉(사상계, 1962. 11) 등을 발표했다. 저서로 1948년 〈조선신문학사조사〉를 펴낸 뒤, 〈문학개론〉(1954)·〈문학의 개조〉(1958)·〈비평의 이해〉(1968)·〈백철문학전집〉(1972)·〈국문학전사〉(이병기 공저, 1985) 등을 펴냈다. 1963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70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72년 국민훈장모란장 등을 받았다.
1890년]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 실각
1890년 3월 18일 독일제국을 건설한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2세의 압력으로 실각했다. 1862년 9월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자들과 대립관계에 있었던 빌헬름 1세의 후원으로 총리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신생 독일 건설에 힘쓴 결과 1871년에 독일의 통일을 이루면서 독일 국민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1888년 3월 빌헬름 1세의 죽음으로 빌헬름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그의 영향력은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1890년 의회가 사회주의자 진압 법안을 부결하자 그는 의회를 해산했다. 그러나 의회 해산에 이은 총선거에서 그가 주도한 여러 정당들이 패배했다. 그는 황제를 고립시키기 위해 내각 총사퇴를 호소했지만 모두 외면했고, 결국 빌헬름 2세의 요구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1877 미국의 의사이자 예언가인 에드가 케이스(1877-1945) 태어남
에드가 케이스는 환자들을 직접 만나보지 않고도 편지만으로 10만 4천 명 정도를 치료하였다고 한다. 반수면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을 때 편지를 읽어주면 영적으로 환자의 주소를 찾아가 처방을 내리는데, 주소가 틀렸을 때에는 못 찾기도 하였다고 한다.
훨씬 훗날에 가서야 그가 처방에서 지목한 생약의 과학적 성분이 밝혀져 사람들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그는1,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종결,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정확하게 예언했고, 자신의 죽음도 죽기 4일 전에 정확하게 맞추었다.
1858년] 디젤 기관을 발명한 독일의 열공학자 디젤(Rudolf Christian Karl Diesel) 출생
1858년 3월 18일 태어남 / 1913년 9월 29일 죽음
디젤은 디젤 기관을 발명한 독일의 열(熱)공학자이다.
185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나자 부모와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다. 1870년 독일로 건너가, 숙부가 교사로 있는 아우크스부르크공업학교를 마치고 1875년 뮌헨공과대학교에 들어갔다. 재학 중에 기존의 내연기관에서는 전환된 에너지의 극히 적은 부분만이 쓰인다는 것을 깨닫고 열효율이 높은 내연기관 개발에 힘썼다. 1892년 자신의 이름이 붙은 내연기관으로 특허를 받았으며, 크루프사의 지원을 받아 1894년 더 안정되고 값싼 디젤 기관의 운전에 성공했다.
1913년 배를 타고 영국으로 향하던 중, 갑판에서 떨어져 익사했다.
1844 러시아 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출생,
1844 러시아 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Nikolai Andreevich Rimski-Korsakov, 1844.3.18 - 1908 ] (1844-1908)출생,
*러시아 작곡가. M.A. 발라키레프·C.A. 큐이·M.P. 무소르크스키·A.P. 보로딘 등과 함께 러시아 국민악파 <5인조>의 한 사람. 귀족 관리 집안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가까이 하였으나, 12세 때 페테르부르크해군사관학교에 입학, M.I. 글린카의 오페라와 접촉하였고, 발라키레프로부터 작곡을 배웠다. 그 무렵 쓰기 시작했던 《교향곡 제 1 번》은 1865년에 스승 발라키레프의 지휘로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그는 교향곡 제 2 번 《안타르(1868)》 오페라 《프스코프의 소녀(1868∼72)》 등으로 부동의 지위를 확보함과 동시에 71년에는 군적(해군대위)에 있으면서 페테르부르크음악원에서 작곡과 관현악법의 교수가 되었다. 그 뒤 뛰어난 교육자로서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하여 수많은 음악가를 키워냈다. 1873년부터 10년간 해군군악대 지휘자를 지내는 동안 근대관현악법의 대가가 될 소지를 만들었다. 그의 3대관현악곡 《에스파냐 기상곡(奇想曲, 1887)》, 동양취미로 꾸며진 대표작 교향조곡(交響組曲) 《셰헤라자드(1888)》, 러시아의 부활제 서곡 《빛나는 일요일(1888)》은 이러한 토양에서 단숨에 작곡되었다. 그 뒤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에 큰 영향을 받아 오페라 《사트코(1893∼96)》 《술탄황제 이야기(1899∼1900)》와 《금계(金鷄, 1906∼1907)》 등에서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러시아 국민악파 총수로서 그 뒤의 러시아음악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엠파스 백과 100.empas.com)
1842년]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말라르메(Mallarmé, Stéphane, 1842-1898) 출생
파리 출생. 아버지는 재무성 등기관리국(登記管理局)의 관리였다. 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14세 때 재혼한 아버지의 임지(任地)인 욘현(縣) 상스의 중학교 기숙생이 되었으며 이 무렵부터 많은 습작을 했다. 18세 때 바칼로레아(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하였다. 한때 상스의 등기소에서 수습직원(修習職員)으로 근무했으나, 20세 때인 1862년에 연상의 연인 마리제랄(나중의 말라르메 부인)과 런던에 건너가, 어려운 생활 속에서 영어교사의 자격을 취득하였다. 다음해에 귀국하여 론강(江) 근처의 지방도시 투르농의 중학교에 부임하였다.
그 후 부장송 ·아비뇽 등의 중학을 돌아다니다가, 1871년 29세 때 파리로 돌아와 퐁탄중학(지금의 리세 콩도르세)에 취임하였으며, 모드 잡지의 편집과 E.A.포 작품의 번역을 하는 한편 C.보들레르의 영향을 깊이 받아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그 상징적 시풍(詩風)은 차차 인정을 받게 되어, 젊은 예술가들이 매주 화요일 밤이면 그의 집에 찾아들었다. 후일 이 ‘화요회(火曜會)’에서 20세기 초엽의 문단에서 활약한 H.레니에, P.루이스, A.지드, P.클로델, P.발레리 등이 배출되었다.
《제2차 현대고답시집》(1871)에 발표한 미완성 장시(長詩) 《에로디아드 Hérodiade》, 투르농 시대부터 착수한 걸작 장시 《목신(牧神)의 오후》(1876), 60여 편의 장 ·단시를 수록한 《스테판 말라르메 시집》(1887), 산문시 및 평론집 《디바가시옹》(1897), 장시 《던져진 주사위》(1897) 등이 있다. 포와 보들레르의 전통을 이은 그의 시는 지적(知的)인 유추(類推)에 의존하는 상징적 수법으로 쓰였으며, 언어의 순수성을 존중하는 지극히 난해(難解)한 내용이지만 프랑스 근대시의 최고봉으로 인정받는다.
4분의 3을 앗는 것이 된다. 시의 즐거움은 조금씩 상상하는 데 있다.
암시하는 것, 그것이 시의 이상이다." - 말라르메
1747 사육신 묘비, 노량진에 세움 (1747-조선 영조 23)
사육신은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악형(惡刑)에도 굴하지 않고 순사(殉死)한 조선 전기의 여섯명의 충신
을 말합니다. 즉, 성삼문(成三問:承旨) ·박팽년(朴彭年:刑曹參判) ·하위지(河緯地:禮曹參判) ·이개(李塏:直提學) ·유응부(兪應孚:中
樞院同知事) ·유성원(柳誠源:司藝) 등입니다. 이들은 전에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신임을 받고, 문종으로부터는 나이 어린 세자
(단종)를 잘 보필하여 달라는 고명(顧命)을 받은 사람들로서,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1453년(단종 1)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
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과 황보 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 3공(公)을 숙청하여 권력을 독차지한 끝에 1455년에 단종을 몰
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동조자를 규합하여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1456
년 6월 본국으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使臣)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
서는 운검(雲劍)이란 것을 하게 됨을 기화로 세조(수양대군) 일파를 처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계획
은 좌절됩니다. 이들의 계획이 일단 좌절되자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金) 등은 뒷일이 두려워 세조에게 단종복위음모
의 전모를 밀고하여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스스로 이들을 문초하였는데,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
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리’라 불러 왕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
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당했습니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작형(灼刑:단근질)으로 처형당하
였고, 하위지는 참살당하였으며,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합니다. 또한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
우는 모두 살해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갔으며, 사육신 외에도 김문기(金文起) ·권자신(權自愼) 등 70여 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습니다. 사육신은 1691년(숙종 17) 숙종에 의해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愍節)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짐에
따라 노량진 동산의 묘소 아래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워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1659 (조선 효종 10) 용비어천가 다시 찍어냄
내용은 조선 건국의 유래가 유구함과 조상들의 성덕을 찬송하고, 태조(太祖)의 창업이 천명에 따른 것임을 밝힌 다음 후세의 왕들에게 경계하여 자손의 보수(保守)와 영창(永昌)을 비는 뜻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장(每章) 2행에 매행(每行) 4구로 되어 있으나, 1장이 3구이고 125장이 9구로 된 것만은 예외이다. 3장에서 109장까지는 대개 첫 절에 중국·역대 제왕의 위적(偉蹟)을 칭송하였고, 다음 절에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태조(太祖)·태종(太宗) 등 6대 임금의 사적(事蹟)을 읊고 있다. 110장에서 124장까지는 물망장(勿忘章)이라 하여 “닛디 마ㆄ쇼셔”로 끝마친다.
이 《용비어천가》의 형식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원문 다음에 한역시(漢譯詩)와 언해(諺解)를 달았다. 또 이 노래의 1·2·3·4·125장 등 5장에는 곡을 지어서 《치화평(致和平)》 《취풍형(醉豊亨)》 《봉래의(鳳來儀)》 《여민락(與民樂)》 등의 악보를 만들고 조정의 연례악(宴體樂)으로 사용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 권14 〈악보(樂譜)〉에 한글 가사 전문과 그 악보가 실려 전한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시의 형식을 무시하고 충분한 표현과 운율을 얻지 못하여 시가(詩歌)로서의 완벽에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으나, 한글로 기록된 최고(最古)의 문헌으로서 15세기의 언어와 문학 연구에 중요한 사료(史料)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석(註釋) 중의 여진(女眞)·왜(倭) 등에 관한 기록은 역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1612년(광해군 4), 1659년(효종 10), 1765년(영조 41)에 각각 나온 중간본(重刊本)이 있으나, 초간본은 그 전질(全帙)이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의 영인본(影印本)은 광해군 연간의 재간본(再刊本)을 대본으로 하여 1938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찍어낸 것이며, 1948년에 김성칠(金聖七)이 이를 다시 발췌·영인하였고, 1956년 허웅(許雄)의 주해본 및 1968년 김형규(金亨奎)의 《고가요주해(古歌謠註解)》 등도 있다.
현재 전10권 중 계명대학교 소장본 권8~10의 3권,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 권3~4의 2권이 보물 제1463호로 지정되어 있다.
1454년] 이탈리아 항해사 베스푸치(Vespucci, Amerigo, 1454~1512) 출생
피렌체 출생. 신대륙 초기 탐험자이며, 아메리카라는 지명은 그의 이름 아메리고에서 유래한다. 1479년 메디치가(家)와 관계를 맺고 일하다가, 1491년부터 세비야의 메디치계(系) 상관(商館)에 파견되었다. 뒤에 베스푸치는 콜럼버스의 2 ·3차 항해에 쓰일 배의 건조일을 도왔고, 1497∼1503년에 걸쳐 신대륙에 여러 번 항해하였다. 1505년에는 에스파냐의 시민이 되었으며 신대륙의 무역을 관장하는 통상원의 일에 종사, 1508년 이 통상원의 수석 항해사로 임명되었다.
1503년 알베리쿠스 베스푸시우스(베스푸치의 라틴명)의 이름으로 발행된 작은 책자 《신세계》, 1505년경 발간된 《4회의 항해에서 새로 발견된 육지에 관한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서한》 등에 근거하여 1507년 독일의 지리학자 M.발트제뮐러가 그의 저서 《세계지 입문(世界誌入門)》(1507)에서 ‘신세계’임을 발견한 아메리고의 이름을 기념하여 그것을 아메리카라고 부르기를 제창하였고, 이것이 뒤에 널리 승인되었다. 베스푸치가 메디치가에 보낸 항해보고가 3점 남아 있는데, A.von 훔볼트 이후 그의 항해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다.
- 화상이 매일 연재하고 있는 오늘의 역사 는 [오늘의 인물과 역사]의 기초자료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오늘의 탄생화와 꽃말 3/18일
[3월 18일 탄생화] 아스파라거스(asparagus)
꽃말: 무변화
백합과
원산지: 남유럽
세계에 3백 종 이상의 아스파라거스가 있다고 합니다. 다년초 식물로써 가을에 줄기와 잎이 시듭니다. 이듬해 봄. 뿌리께에서 굵은 새 줄기가 나옵니다.
이 부분이 바로 저 맛있는 아스파라거스. 통조림용으로 하얀 것을 원한다면 흙을 듬뿍 북돋아 줍니다. 화이트 아스파라거스. 흙을 북돋아 주지 않는 것이 그린 아스파라거스로서 날 것으로 먹어도 좋고 삶거나 볶아도 좋습니다. 영양은 이것이 훨씬 풍부합니다.
[꽃점 이야기]
실패하거나 실연할 때, "난 원래부터 재수가 없는 사람"이라며 운명을 탓하는 당신은 쉽게 상처받는 사람. 하지만 슬퍼하면 슬퍼할수록 당신은 성장해 갑니다.
그러나 선천적인 근성이 있는 만큼 신이 시련을 안겨 주는 것이라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연인과 멀리 떨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당신만 참아 내면 됩니다. 괴로운 일도 있었기에 참된 사랑를 쟁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스파라거스 Asparagus [ Asparagus officinalis] -백합목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백합목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봄부터 여름에 걸쳐 붓끝모양의 굵은 싹이 나온다. 식용하는 것은 이 새싹이다. 줄기는 다육질로 높이 1.5∼2.5m이며 직립한 원줄기에서 많은 곁줄기가 나오고, 각 곁줄기 끝은 1∼2㎝의 솔잎모양의 작은 가지가 된다. 이 아스파라거스의 잎은 식물학적으로는 가지이며 헛잎이라고 한다. 잎은 줄기의 각 마디부분에 삼각형모양의 비늘조각으로 퇴화하여 줄기가 생장하면 자연적으로 떨어진다. 자웅이주이고 여름에는 비늘잎의 겨드랑이에 1∼2개의 황백색 꽃이 핀다. 꽃잎은 6장이고 통 모양이며 완전히 벌어지지 않는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암그루에 지름 7∼8㎜의 진홍색인 구형의 열매가 달린다. 가을에 지상부는 말라버린다. 유럽·서아시아·러시아 및 독립국가 연합의 남부가 원산지로, 세계의 온대 각지에서 재배된다. [재배] -이른봄에 파종하고 1년간 육묘하여 이듬해 봄 싹이 나오기 전에 정식(定植)한다. 수확은 파종 후 3년째에 식용할 수 있는 굵은 어린 싹이 나온 뒤에 가능하다. 한번 심으면 10년동안은 같은 그루에서 수확할 수 있다. 수그루는 암그루에 비해 어린 줄기의 발생수가 20∼50% 많은데, 반대로 어린 줄기의 굵기는 암그루가 수그루보다 굵다. 재배할 때에 암그루와 수그루를 육안으로 구분하기는 어럽다. [아종(亞種)] 아스파라거스의 가까운 종에는 관상용으로 재배되는 것이 많다. 그 중 가장 널리 재배되는 것은 플루모수스아스파라거스 A. plumosus var. nanus로, 장식용 화분 및 꽃꽂이할 때의 소재로 널리 쓰인다. 스프렝게리아스파라거스 A. sprengeri는 거친 잎이 사방으로 나와 아래로 늘어지므로 걸이분용으로 많이 쓰인다. 미리오클라두스아스파라거스 A. myriocladus는 솔잎모양의 작은잎이 달리며 높이 1∼2m의 관목모양이다. 온실용 관엽식물로 쓰인다. 화단 주변에 심는 난장이천문동 A. pygmaeus는 높이 약 20㎝이며 내한성이 뛰어나다. 번식은 봄에 포기나누기로 한다. [이용 ] -식용으로 재배되는 것으로는 화이트아스파라거스와 그린아스파라거스가 있다. 화이트아스파라거스는 어린 싹이 땅 위에 나오지 않도록 지표에서 20㎝ 정도로 북주기를 하고 희고 연한 땅속의 어린 싹을 수확하는 것이다. 그린아스파라거스는 북주기를 하지 않고 땅 위에 자란 녹색의 어린 싹을 수확한다. [요리] -아스파라거스는 단백질 함량이 높은 채소이며, 특히 아미노산의 일종인 아스파라긴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영양면에서 그린아스파라거스가 화이트아스파라거스보다 뛰어나며 비타민C와 카로틴 함량이 훨씬 높다. 그린아스파라거스는 샐러드와 버터볶음 외에 그라탱 등에 쓰인다. 뜨거울 때에 레몬즙과 버터를 곁들이면 좋다. (엠파스 백과 100.empas.com)
[꽃 말] : 무변화無變化, 불변不變
[탄생화] : 귀하는 운명運命을 탓하며 쉽게 상처傷處받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슬퍼하면 슬퍼할수록 당신은 성장成長해 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