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기행 2-보길도 > 2003. 8. 4
아침 식사도 하지않고 보길도행 배를 타기위해 어제 횟집 주인장이 가르쳐 준 화홍포 여객선터미날을 향해 완도대교입구까지 와서 그 근처일거라 짐작을 하고 선착장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섬의 안쪽으로 더 가다가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젊은이이게 물어보니, 다시 거슬러서 나가야 한다더군요.
다시 핸들을 돌려 가보니, 조그만 선착장인데 거기서는 보길도행 배가 없었습니다. 또 다시 되돌아 한참을 가니 화홍포 선착장이란 입간판 표시가 있기에 화살표대로 따라 들어가니, 돌을 캐는 석산과 그 돌을 실어나르는 덤프트럭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고 나는데, 저 멀리 선착장인듯 한 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방파제에 붙은 길이 어렴풋이 보이긴 했지만, 지금 이 길은 선착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맞기는 한데 길 입구에 승용차 한 대만 가까스로 지나갈 수 있게 콩크리트로 양쪽에 기둥을 세워 놓았습니다.
이 길은 자동차 통행로가 아니다 싶어 덤프트럭 운전사에게 물어보니, 그 길이 맞다는 것이어서, 가까스로 입구를 거쳐 약 1키로를 가보니 출구 쪽에도 역시 장애물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그것을 통과해 나가니 큰 도로에서 진입하는 도로가 따로 있는 듯 다른 승용차들이 그 길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러니, 지방이나 서울이나 그놈의 이정표를 믿고 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여간한 곡예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어쨌던, 날씨가 비가 오락가락 잔뜩 찌프린 탓인지, 아직은 본격 피서 나들이 날씨가 아니어서 인지 선착장이 그리 붐비지는 않더군요. 한 10여분 기다려, 저는 승용차를 가지고 카 페리에 승선을 했고 낚시친구는 걸어서 따로 배에 승선을 했습니다.
배는 농협에서 운행하는 배와 개인업자가 운행하는 배가 있었는데, 저희가 탄 배는 농협에서 운영하는 배였습니다.
승용차와 트럭 등, 10여대의 자동차를 실었는데 승객이 한 50명정도 박에는 되지 않더군요. 날씨 덕분에 붐비지 않고, 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과연 김과 미역 등을 양식하는 완도이기에 바다는 온통 목장처럼 양식장으로 덮여져 있었습니다.
모처럼 배를 타 보니, 옛날 생각이 나더군요.
한 30여년전 쯤인가? 한참 젊은 20대 후반의 나이 때에 인천항에서 덕적도 서포리 해수욕장으로 친구들 4명이 여행을 간 적이 있었지요.
3박4일의 일정으로 여행을 갔는데, 마지막 3박의 날 저녁에 남은 쌀과 부식은 이웃 텐트를 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잠을 자는데, 그때부터 태풍이 불어, 비바람이 텐트를 휩쓸 기세로 몰아쳐 할 수 없이 근처의 민박집으로 대피를 했습니다.
3박4일의 섬 여행이 끝난 후 다시 내륙으로의 본격적인 여행을 계획하였으므로 친구들 모두 달랑 3박4일에 소요되는 경비만을 가지고 갔기에, 태풍이 잠잠해 지기까지 여분의 경비로 민박을 하고, 꼬박 이틀을 쫄쫄 굶으며, 배가 뜰 때를 기다렸던 기억이 새로웠습니다.
그때는 저희뿐이 아니고, 대다수의 젊은 친구들이 그런 고통을 당했습니다. 인천항까지 쫄쫄 굶고 나와, 기차를 타고 서울 집으로 와서야, 며칠 만에 밥이란 것을 구경을 했었지요.
그 후 저는 섬 여행은 가급적 하지 않기로 하고, 또 한다 하더라도 시간의 여유가 충분하지 않으면 아예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제주도 등 섬 여행을 갈 때에도 그때의 섬 여행에서 고생한 기억으로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은 여행이 되고, 섬을 떠나 육지로 귀환(?)한 후에야 마음이 놓이는 그런 섬 알러지증후군이 생겼습니다.
1시간 20분쯤 후에 2개의 섬을 거쳐 보길도에 닿았습니다.
보길도까지 간 승객은 10여명 정도밖에 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이곳도 그렇게 관광객이 붐비는 곳은 아닌가 보다 했는데, 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아 시장끼를 느껴, 가까운 음식점 아무 곳에나 들어 갔습니다. 아침이니까 친구가 전북죽이 어떻겠냐? 해서 10,000원 짜리 전복죽으로 시장끼를 때웠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매 한가지겠지만 전복죽 한 그릇에 만원이라면 싼값인데, 전복이 진짜 전복이냐 하는 것이지요.
음식을 시킨지 5분도 안되어 전복죽이라고 나오는데, 눈앞 수조에서 아기 주먹만한 전복을 세마리 건져서 주방으로 들고가더니, 죽을 쑤지는 않고 준비된 육수에 전복도 아니고 더구나 오분자기도 아닌 그렇고 그런 것을 얇게 썰어 넣은것 같았습니다. 떫은 미소가 절로 나오더군요.
친구는 그것도 모르고 전복회를 한 접시 먹고 가자고 했지만 제가 싫다고 했습니다. 모르고 먹으면 몰라도 알고도 속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차를 몰고 윤선도의 세연정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남도를 돌면서 투박하고 향토색 짙은 그런 모습들을 담기위해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 갔습니다만 얼마나 담을만한 것이 많을지 은근한 기대도 있었습니다.
차를 세울 수 있는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지않아, 근처를 헤매다가 초등학교 앞에 세워 두었던 차가 한 대 빠져나가기에 그 자리에 세워놓고 세연정으로 향했습니다.
정자의 목재엔 단청의 흔적은 없고, 세월의 흔적이 배어있는 자연 퇴색된 검은 회색의 나무색깔로 그 정자는 멋을 은은히 지니고 있더군요. 커다란 바위가 연못 한가운데 있고, 오래된 커다란 나무들이 듬성듬성 마주보며 서있어 그늘도 만들어 주더군요.
거기서 친구와 서로를 한 장씩 사진을 찍어주며 쉰내나는 폼을 잡아 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서서히 많아지기에 그 윗쪽에 있다는 동천석실로 향했습니다.
앞에 광주에서 렌터카를 타고 온 아가씨가 너무도 여유있게 가기에 조금 넓은 길에서 앞지르고 갔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 여유가 많아서 일까요? 아니면 저밖에 모르고 커서 일까요? 아니면 마음이 너그러워서 일까요? 너무 운전에 대한 예절이 없는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저 혼자 늦게 갈 요량이면 좀 넓은 길이 나오면 우측 깜박이를 켜고 신호를 하여 뒷차가 앞질러 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막무가내 내 배좀 째 주이소! 하고 가는 사람들이 열이면 아홉이니....
우리 아이는 그렇지는 않은데, 아마 그러한 운전예절은 제 부모에게 은연중 배우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여담입니다만, 십 수년 전에 시내에서 젊은이가 끼어들기 위해 깜박이를 켜고 한참을 애쓰고 있는데, 앞에서는 아무도 비켜주지 않기에 제가 양보를 해 주었더니, 들어오면서 저를 향해 웃으며 거수경례를 하는데 얼마나 귀엽고 기특하던지, 저도 거수경례로 활짝 웃으며 답례를 해 준적이 있습니다.
요즈음도 그런 사내녀석이 있으면, 당장 제 사위 삼고싶은 마음입니다.
동천석실 입구에도 이미 차들이 주차를 해 놓아서, 차를 대 놓을데가 없더군요. 그래서 섬을 일주할 요량으로 그 윗쪽으로 가니 저수지가 있는데, 아마도 상수원이었던지, 철망으로 된 문으로 막아놓아 길이 막혀서 도로 내려와, 낚시친구 부인의 “오는길에 미역을 사오라”는 엄명을 받들기 위해 그 상가를 찾아 나섰습니다.
휴대폰으로 친구가 그 집에 연락을 하였더니 어떻게 어떻게 찾아오라고 하는데, 운전을 하는 사람이 직접 전화를 받아야 덜 헤매일텐데 한 치 건너 길안내를 받으니, 오던 길을 다시 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다 그 입구를 간신히 찾아 해안을 따라 정자리 인가(?) 아무튼 그 동네 길로 한 10여분 들어가니, "뾰족산(지도상 지명은 보족산으로 되어 있더군요), 민박, 농어민후계자, 어쩌구 저쩌구 00000..."하며 요란하게 써붙인 가게가 나타나는데 그곳이 길의 끝이고 찾고자 하는 바로 그 가게였습니다.
찾기는 바로 찾았습니다.
얼마전에 제 낚시친구의 부인이 철도여행을 이용해 이곳에 와서 미역과 김을 사가지고 갔는데, 맛이 좋아서 이번 여행에 좀 사오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이웃에서도 사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친구가 10개를 사더군요. 아마 그 사이에도 더러더러 택배로 미역과 젓깔을 주문했던 모양입니다.
자기들 고객의 남편이 왔으니, 반갑게 맞이해 주더군요.
인사를 나누고 조금 있으려니 전복죽을 많이 쑤었으니 좀 먹어보라고 하여, 음식점이 아닌 어민들이 끓여먹는 죽은 맛이 어떨까? 하는 호기심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 그릇을 다 먹었습니다. 맛이 괜찮더군요.
음식점에서 파는 전복죽 보다는 제대로 쑨 죽이어서 맛이 아주 좋았습니다.
이 집은 가만히 보니까 한 200여평되는 야적장에 젖깔 통으로 대형 FRP물통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200여개는 족히 되는것 같았고, 매장의 매대에는 저는 처음보는 전어젖갈도 있었습니다. 빨간새우가 아주 정갈하고 마르게 잘 건조되어 있는데 맛있게 보여서 맥주안주용으로 몇 봉을 샀습니다.
맛을 보니 썩 괜찮더군요. 오늘 밤에 숙소에서 시원한 맥주에 새우로 안주할 생각을 하니 군침이 절로 났습니다.
일정이 괜찮다면 하루를 묵고 바다낚시나 하고 가라고 하는데, 갈 곳이 많아서 사양하고 해안을 따라 예송리해수욕장까지 가 보았습니다.
이미 해수욕객들이 많이 와있더군요. 4륜구동 짚차로 택시영업을 하더군요. 이쪽 강원도 산간지방에서는 산길이 험하고 겨울엔 눈이 많이 오니 짚차로 택시를 삼은 것을 많이 봐왔는데, 남쪽의 섬에서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다시 배를 타기위해 선착장으로 나오니, 승선을 기다리는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서있었습니다.
완도 쪽엔 차량행렬이 길었지만 다행히 진도 쪽으로 가려는 - 송호리(?)였나 잘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 그 쪽엔 바로 차로 승선할 수가 있어서, 보길도를 더 관광을 하려다가 얼떨결에 그냥 막 바로 나왔습니다.
좀더, 옛날의 유적지를 찾아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이번 여행은 치밀하게 일정을 세운게 아니고 그냥 발가는 데로 가보자 하는 그런 쫓기지 않는 편안한 여행 이었으므로, 다음 기회에는 남도에 대해 많은 자료를 미리 조사하여 짭짤한 문화여행과 맛의 여행이 되도록 기회를 더 만들기로 훗날을 기약하였습니다.
진도로 향하는 길에 크고 작은 저수지가 참으로 많아 낚싯대를 담그고 싶은 욕망을 누르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오후 5시경인가? 진도대교를 건너 진도 읍에 도착하여, 운림산방으로 향했습니다.
진도에 온 목적은 우선 운림산방을 둘러보고, 밤낚시를 하고자 함이었으니까요.
이 기행문을 동락재의 서재에 앉아 몇 시간에 걸쳐 쓰고 있습니다.
아침에 뒷밭에 나가- 밭이라고 해야 몇 십 평 되지도 않지만- 고추도 따고, 상추도 따고, 도마도도 몇 개 따고, 또 남도여행에서 돌아와 지저분한 차 내부 청소도 하고, 또 목공예디자인을 배우는 학교의 젊은 친구들이 이 동락재에 놀러 오겠다는 전화를 받느라, 또 청소도 하랴 하다보니 진도가 나가지를 않는군요.
오늘 저녁에 와서 같이 대포나 나누었으면 했는데, 오늘은 시간이 여의치 않아 내일 아침에 온다하여 무얼 먹게 하고 무얼 보여주어야 할 지 이 것 저 것 궁리를 하고 준비를 하려하니, 딱이 무어 준비할 것도 없고 마음만 바빠집니다.
이 우거 산촌의 동락재를 찾아준다는 것만 해도 작지만 커다란 기쁨이기에 마음만 설레입니다.
다시 남도기행으로 돌아가서.......
진도라 하면 옛부터 귀양지로 남도일대가 활용(?)되어왔고, 특히 진도가 유배지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중기부터였다고 합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진도 땅이 더 자주 유배지로 쓰였다고 하는군요.
이처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통틀어 왕실을 둘러싸고 반란이나 당파싸움이 피바람을 몰고 올 적마다 힘이 부친 왕족이나 양반은 진도 땅으로 귀양보내졌다고 하지요.
진도 땅에 귀양을 왔다가 귀양살이가 풀려 다시 벼슬길에 올랐던 이도 있으나, 임금이 내린 사약을 받고 죽은 이도 많았습니다. 조선시대 영조 때에 한 전라도 감사가 조정에 "진도에는 유배자가 너무 많아 이들을 먹여살리느라 죄없는 섬 사람들까지 굶어 죽을 판이니 유배자를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건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진도에 유배를 왔던 사람은 많았던 듯합니다.
그런데, 진도 땅에 귀양을 왔던 이는 거개가 풍류깨나 앎직한 왕족이나 양반들로서 그들은 지난날의 영화를 잊으려고 제 처지를 노래에 닮거나 글로 쓰거나 그림을 그렸겠지요. 이곳에 살던 본토박이들도 비록 귀양을 왔을 망정 귀하신(?) 귀하셨던 그들의 시름을 이곳의 고유한 노랫가락과 춤사위로 달래 주었을 것이기도 하지요.
그런 역사의 배경을 지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늘날의 진도문화는 한반도의 서남쪽에 치우쳐 있는 섬답지 않게 그 수준이 매우 높은 것 같습니다.
진도 땅에 들어오는 길에 시골의 읍 단위로는 제법 커다란 문화회관 건물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진도 땅에서 동양화가와 서예가가 많이 나왔음도 오히려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도 합니다.
국전 초대, 추천작가만 해도 남농 허건을 비롯하여 다섯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도군의 자랑거리로 앞세울 수 있는 것은 "압록강 동쪽에 그를 따를 이가 없다"는 평을 들었던 소치 허유 로부터 그의 아들인 미산 허영, 손자인 남농 허건으로 이어지는 허씨 집안의 동양화와 더불어 지난 1980년경부터 허건이 집안의 유품 전시관을 곁들여서 복원시키고 있는 운림산방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운림산방은 허유가 살았던 집으로서 의신면 사천리의 쌍계사 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나라 동양화단의 우뚝한 봉우리로 일컬어지는 허백련은 늘그막에 광주 무등산 기슭에서 제자를 길러내었기 때문에 마치 광주사람인양 알고 있는 이가 많지만 허씨 가문과 핏줄이 닿아 있는 진도 사람이지요.
사족입니다만, 진도에서 태어난 현대의 큰 예술가로는 1981년 세상을 뜬 서예가 소전 손재형도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뒤로 이 나라 서예의 맥락을 이어 현대 한국서예의 절정을 이룬 손재형을 두고 화가 서세옥은 "근세에 한국의 아름다움이 뭣인가를 가장 잘 알던 사람이 신안 출신인 서양화가 김환기와 함께 진도 출신인 서예가 손재형인데, 특히 한글을 서예예술로 발전시킨 소전의 공로를 영원히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칭송을 했었지요.
저는 사실, 젊은 시절 동양화는 너무 정적인 미술의 한 분야이기에 "동양화를 보면 졸립다"라고 폄하해 기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한 두 살 먹어가면서, 그 時空을 넘나드는 여백의 미를 느끼게 되면서 아! 동양화란 것은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미워할 수 없고, 그 깊은 맛을 찾아 그 의미를 되새김질 할 심도있는 예술의 한 분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운림산방이란 역사적의미가 그러하듯이 조선조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유(1808-1892)가 말년에 거처하던 화실의 당호로서 소치-미산-남농-임전 등 4대에 걸쳐 전통 남화의 맥을 이어온 남화의 산실로 단아하고 호젓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제가 갔던 날은 아마도 다시 운림산방을 대대적으로 정비를 하기위해 리모델링을 하고 있어서, 입장료는 받지 않았지만 전시된 공간도 그림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얼핏 한 2-3만평 되는 부지위에 그들이 거쳐했던 화실들이 아주 단아하며 정숙하게 재축조 되어 있었고 전시장인듯 현대식건물과 한옥으로 된 건물을 전시장으로 활용할 듯, 대대적 수리, 정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의재 허백련이 미산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익힌 곳이기도 한 곳도 이곳이라 합니다.
진도태생으로서 시, 서, 화에 두루 능했던 소치는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등에게 서화수업을 했고 벼슬살이를 하다가 1856년 고향으로 돌아와 첨찰산 아래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소치의 손자 남농이 허물어져 가는 운림산방을 다시 복원, 현재 초가와 사랑채, 기념관, 연못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연못 중심에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둥근 섬이 있는데, 여기에는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 그루가 옛날을 생각하며 초연히 서있는 듯 했습니다.
정말로 아쉬운 것은 그 허씨가문의 4대에 걸친 그림을 한 점도 보지 못하고 온 것이, 다음에는 남도예술의 진수를 맛보기 위해 목적을 뚜렷이 하고 동양화를 아직도 배우는 입장에 있는 집사람과 사랑하는 아들, 딸들과 함께 다시 찾아와야겠다는 기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운림산방을 뒤로하고 첨찰산을 오르다 보니 일년에 한 번 갈라진다는 바다로 가는 길의 이정표가 있었습니다.
운림산방을 오면서 초입의 사천저수지가 우리를 부르고 있기에 산의 정상에서 다시 핸들을 돌려 되돌아 가 저수지 제방 좌안에 세웠습니다.
마침 낚시를 하는 남도의 현지인이 한 사람 있었고, 새우를 잡는다고 새우망을 여럿 펴놓은 사람들을 만나 저수지의 조황에 대해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 삼고초려 끝에 그냥 이곳에서 오늘은 밤낚시를 하기로 하고, 대를 편후 저는 시내로 나가 밤에 먹을 약간의 양식을 사가지고 왔습니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양식이랄 게 술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부속품(안주 감)인 남도 섬의 도야지 삼겹살을 한 칼 곁들였음은 물론이지요.
석양은 점점 어둠으로 빨려 들면서, 시장끼를 참아온 저희들은 남도의 돼지고기를 안주삼아 저수지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의 내음을 맡으며 서로의 잔을 기울였습니다.
바닷가에서 민물낚시란 조금은 어울리지는 않겠지만, 몇 십 년을 별려온 진도에서의 붕어낚시를 하는 작지만 꽉 찬 기쁨에 모기의 지독한 공격도 참을만 하였습니다.
진도의 밤을 그렇게 보내면서 커피 한 잔에 피곤한 여정을 달래며 내일은 진안의 마이산 탑사- 이갑용 처사의 돌탑-을 보러 가기로 의기투합하고 캄캄한 저수지에 낚시를 던지고 있었습니다.
진안 마이산 탑사 이야기로 다음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시간은 마냥 한 자리에 있는 것이옵니다
유구히 마냥 한 자리에 있는 것이옵니다
변하오며 지나가옵는 것은 사람일 뿐
시간은 유구히 마냥 한 자리에 있는 것이옵니다
이렇게 사천저수지의 밤물결은 소곤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조병화님의 시집 "낮은 목소리로" 중에서 <낮은 목소리로 45> 였습니다.
첫댓글 한번 가 보고 싶은곳입니다. 소개 고맙습니다. 자연과 함께 행복한 5월 보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