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교촌마을 경주 교촌마을은 경상북도 경주시의 관광지이다.
중요민속자료인 경주최씨고택과 중요무형문화재인 경주교동법주가 자리잡고 있는 교촌마을은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한 경주 최부자의 얼이 서린 곳이다. 특히 최부자집에서 가훈처럼 내려온 원칙인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 곳에는 원효대사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은 신라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며, 부근에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서려 있는 계림과 내물왕릉, 경주향교, 김유신 장군이 살았던 재매정이 있다.
■ 경주 향교( 慶州 鄕校)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에 있는 향교.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경북향교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1492년(성종 23) 경주 부윤(府尹) 최응현(崔應賢)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대성전이 불에 타 위패를 도덕산(道德山) 두덕암(斗德庵)으로 옮겼다가 1600년(선조 33) 부윤 이시발(李時發)이 대성전, 전사청(典祀廳)을 중건하고 위패를 환안하였다. 1604년 부윤 윤성이 동·서무를, 1614년(광해군 6) 부윤 이안눌(李安訥)이 명륜당과 동·서재를 중건하였고, 1668(현종 9)년과 1979년에 보수하였다.
경상북도에서 가장 큰 향교로, 신라시대인 682년(신문왕 2) 국학(國學)이 설치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향학(鄕學),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져온 유서 깊은 곳이다. 나주향교(羅州鄕校)와 함께 향교 건물 배치의 표본이 된다.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전사청, 내신문 등이 남아 있는데,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중국의 5성(聖), 송조(宋朝) 6현(賢), 한국 18현을 제향하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양식 건물이다.
■ 월정교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수도 서라벌에 설치된 다리.
남천(南川) 위에 지어졌으며 일정교와 함께 국왕이 사는 궁궐인 경주 월성과 건너편의 남산 지역, 도당산성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신라 시대에는 명칭이 깨끗할 정(淨) 자를 쓴 월정교(月淨橋)였으나 고려 시대에 정할 정(精) 자를 쓴 월정교(月精橋)로 바뀌어 현대까지 이른다.
월정교는 춘양교와 함께 신라 제35대 경덕왕 19년(760년)에 축조된 것으로 삼국사기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으며, 서라벌의 교통로로 기능했다.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와 연을 트기 위해 일부러 유교(楡橋)에서 강으로 뛰어내렸던 일화를 월정교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월정교를 만든 이유로 월성 남쪽 강 건너에 관아를 배치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마침 월정교 설치 1년 전에 대대적인 관부 정비를 했던 기록이 있고, 정청을 '남당'이라 일컬은 점, 화백회으가 열리는 등 정치와 일정하게 연관된 도당산성의 위치가 월정교에서 바로 이어지는 남산 북쪽 끝자락이라는 점 등이 근거로 꼽힌다. 이 설대로라면 월정교는 훗날 조선 왕조의 육조거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교통로인 셈이다.
고려 제25대 충렬왕 6년(1280년)에 경주부 유수 노경론이 중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여몽전쟁의 참화까지 피해가며 최소 520여 년 간 건재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후 어느 시기에 민란이나 전쟁 등으로 불타 무너진 것으로 추정된다. 근대적인 문화재 조사가 시작되었을 때는 이미 나무로 된 누(樓)가 사라지고, 다리 바닥을 지탱하고 있던 석조물만 남아 있었다. 1975년 당국에 의하여 실측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1986년 발굴 조사에서는 월정교 아래 강바닥에서 불탄 기와와 목재 부재가 다수 출토되었다. 2004년 일정교와 함께 사적 제457호로 지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본격적인 복원 논의가 진행되었다.
■ 경주 계림 (慶州 鷄林)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첨성대(瞻星臺)와 반월성(半月城) 사이에 있는 숲.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7,300㎡이다. 물푸레나무·홰나무·휘추리나무·단풍나무 등의 고목이 울창하며, 신라 왕성(王姓)인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탄강(誕降) 전설이 있는 숲이다.
《삼국유사》에 '60년(탈해왕 4) 8월 4일 밤에 호공(瓠公)이 반월성 서쪽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옆 숲이 황금 궤에서 나오는 광명으로 가득 차고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어 탈해왕에게 고하였다. 왕이 즉시 이 숲으로 가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있어 알지라 이름하였고,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金)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계림이라는 명칭은 숲에서 닭이 울었다는 데서 연유되었으며, 후에 국명으로도 쓰였다. 신라의 신성한 숲이라 하여 현재까지 보존되어 오며, 100여 주의 고목과 l803년에 세운 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