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들은 그림자를 길게 펼쳐놓았다. 갈색이 감도는 노르스름한 땅과 밤색 그림자가 어울려 춤을 추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결이 고운 비단 자락이었다. 화가의 붓이 자유로이 스쳐간 영혼의 자국이었다. 2
서쪽해가 비춰들고 있었다. 강물에 반사된 햇살은 요정들이 뿌려놓은 보석 알갱이였다. 단풍잎들은 나비였던가. 투명한 붉은빛 주홍빛 노란빛 날개들이 강가 가득 너울거렸다. 카메라에 담을 수 있을까 조바심치게 만들 만큼 감미로운 움직임과 색의 조화였다. 3
우연히도 그 속으로 일곱 살 정도의 소년이 뛰어 들어갔다. 약속이나 한 듯이 반대쪽에서 원피스를 입은 비슷한 또래의 소녀가 나풀나풀 달려 들어갔다. 엎드려 단풍잎을 고르는가 싶더니 단풍잎을 주어드는가 싶더니. 손에 든 단풍잎을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뛰어들어온 각자의 방향으로 돌아섰다. 빛과 그림자와 강물이 있었고 단풍잎과 소년과 소녀가 있었다. 그 풍경에 내가 감탄의 소리를 연거푸 지르고 있는 동안 소녀가 팔짝팔짝 뛰어나갔다. 소년이 혼자 남아 허리를 구부리고 땅에 깔린 단풍잎을 다시 고르고 있었다. 짜임새 있게 기획된 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이보다 완벽할 수는 없다.4
그 풍경에 정신이 팔린 나는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건지려던 욕심과는 달리셔터를 누를 시간을 놓쳐 버렸다. 카메라를 만지는 손길이 미숙해서이기도 했지만, 아름다움 앞에 서면 누구나 바보가 된다고 했다. 소년이 허리를 구부려 단풍잎을 줍는 사진만 남았다. 소년과 소녀가 뒤돌아선 사진만 남았다. 아이들이 없는 공간은 숨결이 없다. 밋밋하다. 풍경만 있을 뿐 이야기가 삭제된 동화책이다. 다행히 내 가슴에 소년과 소녀가 마주서서 나풀거리는 영상이 낙인처럼 깊게 찍혔다. 5
이곳은 남이섬이다. 이곳으로 달려오는 동안 도로 옆 산들은 퇴색한 가을 빛깔이어서 우리는 적잖이 실망을 했다. 아예 가을빛깔에 대한 기대를 버렸는데 웬일인가. 남이섬은 만국기가 펄럭이던 운동장처럼 아직 오색빛깔 가을 잔치 중이였다. 한쪽에서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응원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그날처럼 감탄이나 환호성을 지르지 않으면 병이 날 것만큼 아름다운 가을이었다. 보자마자 마음을 관통한 가을 빛깔들은 사실 긴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 오! 면 충분했다. 6
사십년 만에 만난 초등학교 여동창생 셋이서 처음으로 떠나온 여행이었다. 사진을 찍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터였고, 더구나 석우리라는 같은 동네에서 자라난 코흘리개 친구였으니 당연히 그 여행은 남달랐다. 인생의 초봄에 손을 잡고 뛰어 놀았던 때를 제외하고는 각자의 길을 열심히 달리다가, 인생의 가을이라는 중년이 되서야 다시 만난 것이다. 40여년의 시간들은 어디로 숨은걸까. 재빨리 열한 살 계집아이로 돌아온 우리는 배를 움켜쥐고 손뼉을 치면서 깔깔거렸다. 자잘한 눈웃음이 간지러웠던 친구 웃음은 그대로였고 아픈 어머니 대신 동생들을 등에 업고 씩씩했던 친구 역시 여전히 씩씩했다.7
남이섬의 가을빛은 유난히 곱고 아름다웠다. 봄을 청춘에 비유하고 가을을 중년에 비유한다지만, 중년인 우리가 저리도 고운 색상이라면 무엇을 아쉬워하랴. 초록빛 청춘이 지났음을 어찌 서러워하랴. 남이섬 둘레를 따라 걸었다. 은행잎이 깔린 길을 만났고 구불구불한 갈대밭 길도 만났다. 섬 구석구석에 지천인 단풍나무들은 제 각각의 빼어난 빛깔로 우리를 유혹했다.8
단풍나무는 햇살이 비쳐드는 방향에 따라서 또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서 그 빛깔이 달라진다. 노란빛이거나 붉거나 진홍색이거나 연푸른빛이기도 하다. 단풍나무 한 그루를 들여다보면 마치 꽃바구니에 꽃을 가득 담아 춤을 추는 처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말할 수 없이 매혹적이다.9
감나무는 어떤가. 다른 나뭇잎들에 비해서 유별나게 물이 곱게 든다. 군더더기가 없는 마알간 진홍빛이다. 내가 손에 주워들게 되는 나뭇잎 대부분이 감나무 잎이었다. 어릴 적 높다란 감나무에서 떨어진 연시감을 줍기 위해 새벽 뒤뜰로 들어설라치면 홍시보다도 먼저 내 눈길을 사로잡던 그 선명하게 붉은 감나무 잎. 어릴적 고향 빛깔이다. 고향 냄새다10
벚나무 색깔은 환상적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채도나 명암이 다른 다양한 빛깔의 물감들을 여기저기 골고루 묻혀놓은 듯 다채로우면서도 화려한 색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졌던 청춘의 어느 날처럼 사랑을 놓칠까 잃을까 안달하는 안타까움의 심정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었다. 예뻐서, 반짝여서, 처음 보는 빛깔이여서, 때로는 허전해 보여서 눈길을 거둘 수가 없었다. 뼛속까지 단풍물이 흠뻑 들었으리라. 눈물샘에도 단풍물이 고였으리라. 11
이십여년간 살았던 일원동은 오래된 아파트단지가 많아 나무들 둥치가 제법 굵고 운치가 있었다. 단풍이라도 들라치면 고풍스럽고 화려했다. 단풍이 유난히 곱게 들었던 어느 해인가는, 주변에 서너 군데나 되는 동네 공원을 돌며 오후 시간 내내 가슴을 두근거리며 가을빛깔을 구경하였다. 그 날 저녁 나는 잠을 쉬이 들 수가 없었다. 눈앞을 어른거리던 그 빛깔들 때문이었는데 가을빛은 부드러운 듯 강하며, 살며시 다가오는 듯해도 안개처럼 스며드는 듯해도, 눈과 귀와 머리와 가슴을 일시에 점령해버리고 마는 사랑이었다. 12
남이섬의 가을빛깔 역시도 어릴적 친구들의 우정과 함께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끌어안게 될 사랑이었다. ‘사랑이었다’ 라는 제목의 자작시가 떠오른다.13
사랑이었네 화정 14
가을날 / 물든 나무가 / 내 팔 잡아 끄네 / 벚나무 / 단풍나무/ 감나무/ 하루 종일 쫓아다니다가 / 쓰러져 잠든 밤 / 부스럭거리는 소리/ 뒤따라온 벚나무가/ 벽면 가득/ 붓질을 하네/천장 가득 붓질을 하네 사랑이 시작되던 밤 / 아른대던 그 남자의 얼굴처럼 / 감긴 내 눈 속까지 따라와 / 붓질을 하네
첫댓글 50대 중반에 써서 수필집에 실었던 글을 다시 써보았는데요
수필방에 없어서 이제서야 올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