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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의지 담긴 성곽길과 1천년 토끼길 걷기
고모산성과 토끼비리는 성황당에서 출발한다.
우리 선조들은 이 땅을 두루 지칭하는 뜻으로 산천이란 말을 즐겨 사용했다.
산줄기와 물줄기를 땅위의 뼈대와 핏줄로 생각한 까닭이다.
뼈대와 핏줄을 나눌 수 없듯 산줄기와 물줄기 또한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는 뜻이리라.
그래서일까.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 목판에다
“천하의 형세는 산천에서 볼 수 있다(天下之形勢視乎山川)”고 새겼다.
이 땅을 살아 숨 쉬는 생명체로 여긴 것이다.
경북 문경의 고모산성과 영남대로 옛길을 그대로 간직한 ‘토기비리’를 찾았다.
산줄기와 물줄기가 한데 어우러지고 산천의 빼어난 절경을 탐닉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새재IC를 나와 점촌 방향 3번국도를 타고 5분여 쯤 가면
왼쪽에 진남휴게소가 있다.
여기서 유턴해서 약 3백여m쯤 되올라가서 고모산성 이정표를 보고 들어가면
오늘 여정의 시작점인 돌고개[石峴] 마을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꿀떡고개' 혹은 '꼴딱고개'라고 말한다.
한양으로 과거 보러가는 선비들이 여기에 오면 반드시 꿀떡을 먹었기 때문에 붙인 지명인데
오늘날 입시를 앞두고 '철~썩 붙기' 위해 엿을 먹는 것과 똑같은 풍습이다.
마을의 수호신이자 길손들에게는 이정표 역할을 해주는 성황당이 있다.
수백 살은 먹음직한 커다란 당산나무를 앞뒤로 거느린 채 짙은 그늘 속에 꿋꿋이 서있는 당집,
보기만 해도 서~늘하다.
얼른 옆에 있는 돌탑에다 작은 돌 하나 살짝 얹어놓고 하루의 안녕을 성심껏 빌며
성황당에 얽힌 전설 하나 귀동냥 한다.
어느 선비가 이곳 초가에서 하루를 묵었다.
주인은 선비의 인품이 범상치 않음을 한 눈에 알고 자기 딸을 맡아 달라 간청했다.
선비는 며칠을 머물다 급제하면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과것길을 떠났다.
처녀는 매일 치성을 올리며 기다렸으나 선비는 과거에 급제한 뒤 까맣게 잊고 말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아비가 죽자 처녀는 선비를 원망하며 자결하고 구렁이로 변했다.
그 후부터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이 구렁이에게 물려죽는다는 소문을 들은 선비는
구렁이가 처녀임을 알고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올렸다.
천둥번개와 함께 구렁이가 나타나 눈물을 흘리고 사라진 뒤부터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은 처녀의 혼을 위로하려 성황당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낸다.
마치 새가 날개를 편 모습으로 고모산성까지 이어진 성현성을 따라 탐방객들이 오르고 있다.
대동여지도에 기록된 영남대로는 한양에서 광주-이천-충주-문경새재-대구-밀양-동래를 잇고 있다.
거리는 총 960리(약 380㎞)로서 동래에서 서울까지 보통 14일 걸렸다고 한다.
경상도 58개 군현, 충청도와 경기도 5개 군현이 걸쳐 있고,
지선 29개가 이어져 조선의 9대 간선도로 중 가장 크다.
통행량도 많았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이곳에는 주막거리가 형성됐다.
술과 밥을 먹으면 숙박료를 따로 받지 않았다는 주막,
좁은 봉놋방에 10여명이 혼숙했지만 침구 제공은 드물었고 먼저 들어온 사람이 아랫목을 차지했다.
문경과 예천의 마지막 주막집이던 영순주막과 삼강주막을 그대로 복원한 주막거리를 뒤로 하고
발길을 고모산성으로 돌린다.
보수가 완료된 성벽 위에서 한 탐방객이 진남문을 내려다보고 있다.
할미성이라고 말하는 고모산성(姑母山城)은 2세기경 신라가 계립령로(하늘재;문경-충주)를 열면서
고구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산성이다.
이후 후삼국시대를 거쳐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증개축을 거듭해왔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조일전쟁 당시 왜군은 이곳을 지키는 군사가 없음을 확인한 뒤 춤추고 노래하며 지나갔다’는
안타까운 대목이 전한다.
성은 지세에 따라 높낮이(1∼11m)를 맞추어 축조했다.
하나밖에 없는 길목에 위치해선지 조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 한말 운강 이강년 선생의 의병항쟁,
그리고 한국전쟁 때까지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했다.
고모산성 안의 숲길은 인적이 드문 탓인지 생각보다 건강했다.
남문터를 지나 산성 정상에 오르니 진남교반(鎭南橋畔)의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진다.
진남교반은 진남교를 중심으로 마성면 신현리 영강 일대를 말한다.
강변 따라 이어진 기암절벽, 아름드리 노송이 우거진 진남숲,
조령천이 영강에 섞여 굽이돌며 만든 강변 모래벌 등 뛰어난 절경을 인정받아
1933년 대구일보사는 경북팔경 중 당당히 1경으로 꼽았다.
맞은편 병풍바위를 필두로 탄광철교와 신작로, 2차선 구 도로, 신설된 4차선 국도가 차례로 이어져서
마치 길 전시관을 방불케 한다.
성곽 서쪽으로 내려와 고모산성 둘레를 오른다.
완만한 경사지에는 소나무와 참나무를 비롯해서 찔레꽃과 산초나무, 산딸기 등
다양한 식물이 분포되어 숲길은 생각보다 울창하여 건강함을 과시한다.
숱한 전란의 역사를 홀로 짊어진 듯 허물어진 서문터를 나와 영강변을 걷는다.
철로자전거로 인기를 끄는 진남역을 지나고 된섬교를 건너서 오른쪽 오솔길로 접어드니 감자꽃이 만발한 들판이다.
예서 20여 분 걸으니 문경호스랜드(경마장)를 만나고 3번국도에 이르기 직전 왼쪽 등산로로 방향을 고쳐 잡는다.
진남역에서 출발하는 레일바이크는 관광객들에게 단연코 인기 만점이다
길은 수없이 산과 물을 만나고 또 다른 곳을 이어간다.
산을 만난 다음에는 물을 만나고, 또 물을 만나면 다시 산을 마주친다.
연거푸 산을 두 번 만날 수 없고, 연이어 물을 두 번 건널 수 없다.
길이 물을 만나면 나루가 되고 산을 만나면 고개가 된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길은 고개 한 번, 나루 한 번이란 공식을 어김없이 반복하며 지금껏 존재해 왔다.
작은 등산로는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인지 수풀로 무성하다.
순간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고 주장한 여암 신경준(1712∼1781년)을 생각한다.
여암은 우리나라 산줄기를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1정간 13정맥으로 규정하고,
가지처럼 뻗은 기맥까지 족보 엮듯 상세히 적은 산경표(山經表)를 썼다.
산경(山經)이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산줄기의 흐름을 뜻한다.
“산은 본디 하나의 뿌리로부터 수없이 갈라져 나가는 것이다(山主分而脈本同其間)”고 설파한 것도 이를 증명함이다.
잠시 가파르던 등산로는 이내 수평을 유지하며 능선을 타고 가볍게 3번국도를 넘는다.
다시 감입곡류하는 영강이 발아래 놓이고 벼랑을 타고 이어지는 병풍바위 정상 길목에 쉼터가 있다.
진남교반의 절경뿐 아니라 고모산성과 신현리 고분군,
그리고 석현성의 진남문까지 한편의 장엄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진남교반, 고모산성, 신현리 고분군, 그리고 석현성 진남문까지 한편의 장엄한 파노라마가 전개된다
비로소 오정산과 석현성으로 이어지는 산 경사면에 개설한 ‘토끼비리’ 구간에 들어선다.
‘비리’는 ‘벼루’의 문경 사투리.
강이나 바다를 끼고 있는 낭떠러지(벼랑)란 뜻은 알겠는데, 토끼는 무엇을 뜻하는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 해답이 있다.
고려태조 10년(927)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지금의 산양)을 빼앗고 경주로 육박하니
신라 경애왕은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고려 태조가 보병으로는 따라 잡을 수 없어 정기(精騎) 5천으로 진군을 시작,
고모산성에 이르니 더 나아갈 길이 없다.
가을비가 내리고 길은 없어 고모산성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새벽에 일어나 밖을 보니 냇물은 홍수 져서 도도히 흐르고 앞에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진퇴양난이다.
그때 토끼 한 마리가 나타나 바위 절벽을 가로질러 가자
즉시 군졸에게 명하여 “토끼가 가는데 말이 못 가겠는가. 길을 내라” 했다.
이에 토끼가 지나간 길을 따라 길을 내서 험로를 통과했다하여 지금도 토끼비리(兎遷)라 부른다.
옛날에 서울을 오가는 길손들은 이 길을 관갑잔도(串岬棧道)라 하여 가장 위험한 길로 꼽았다.
관갑은 경사가 심하고 험한 산허리, 이 산허리에 길을 만든 것이 관갑천이다
토끼가 지나간 길이라 해서 토천(兎遷)이라 하고
관갑천잔도(串岬遷棧道), 곶갑천잔도(串岬遷棧道), 토잔(兎棧)으로도 부른다.
총 960여 리(약 380km)에 달하는 영남대로 가운데 가장 험한 길이
절벽 같은 산허리를 따라 굽이굽이 6∼7리나 이어간다.
사람 손으로 일일이 깎아내 만든 잔도마루는 겨우 두 사람이 다닐 만하다.
관갑은 경사가 심하고 험한 산허리, 관갑천은 이런 산허리에 만든 길이다.
잔도는 험한 벼랑에 나무로 선반처럼 올린 나무사다리 길이고
천도는 하천변 절벽을 파내 만든 벼랑길이다.
이 모든 공법이 토끼비리에 망라되었기에 고려대 최영준 명예교수는
“이 길에 우리의 모든 옛길 역사가 녹아 있다”고 찬탄했다.
2007년 명승 31호로 지정됐다.
길바닥은 얼굴이 보일만큼 반질반질 윤기가 난다.
사람 손으로 일일이 깎아냈을 바위 사잇길 잔도마루는 두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하다.
곧이어 이름 없는 작은 묘를 에둘러 나가니
왼쪽으로 30m는 족히 넘을 낭떠러지 옆으로 벼룻길이 아슬아슬하게 전개된다.
토석 유실을 막기 위해 축대를 쌓아 넓힌 길을 지나고
석회암과 역암을 절단해서 암석 안부(鞍部)를 파낸 길을 걷는다.
바닥은 반질반질해서 얼굴이 보일만큼 윤기가 난다.
천년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짚신을 신고 지나다녔는가를 가름할 수 있는 흔적이다.
아주 심하게 위험한 길은 나무데크로 대신했다.
구불기는 양의 창자 같은 길이
구불구불 새 나는 것같이 기이하도다
봉우리 하나하나 모두 빼어났으니
그런데로 말 가기가 더디구나
- 서거정 ‘관갑잔도(串岬棧道)’ -
석현성 중앙의 진남문은 '남쪽을 진압한다'는 의미이다.
조일전쟁 중인 1596년(선조 29),
문경새재가 쉽게 뚫린 비극을 반면교사로 삼아 쌓은 석현성에 닿았다.
길게 뻗은 성벽이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친 것처럼 고모산성과 연결된다.
문화재 지표조사를 거쳐 ‘남쪽을 진압한다’는 뜻을 지닌 진남문(鎭南門)을 새로 세우고
유교문화권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성벽을 복원하고 있다.
고모산성 아래 산기슭을 발굴 조사한 결과
은․금동제 귀걸이, 화살촉, 낫 같은 신라시대 유물이 대거 출토된 신현리 고분군을 둘러보고
처음 길을 떠난 성황당으로 발길을 되돌려
물 흐르듯 수평으로 난 자연의 산길과 오솔길, 들길 걷기를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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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네 산천 켜켜이 내재되어있는 역사의 숨결을 동행 호흡하며 느끼는 곳곳마다 애절한 전설도 곁들이는 살아있는
역사와의 맛있는 산행입니다....저도 같이 동행하니 감사합니다...
늦은 시각!!! 역사 탐방에 시간 가는줄 모르겠구만~~~ 잘 보고 가네~~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