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잘 될 거야
(최현아)
영어 교육대학원에서 영미문학을 배웠었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ast)를 좋아했다. 그의 시의 소재는 시골길 울타리 과일처럼 우리가 자연과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자연주의자’를 늘 꿈꾸고 살았기에 그의 시를 보았을 때 그냥 좋았다. 그의 시 중에서 특히 ‘가지 않은 길’을 좋아했다.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 나 있어. 나는 둘 다 가지 못하고 하나의 길만 걷는 것 아쉬워 수풀 속으로 굽이 사라지는 길 하나 멀리멀리 한참 서서 바라보았지.”삶의 갈림길에 있어서 방황하는 모습이 나와 닮은 까닭이었다.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가 많다. 과거의 삶을 뒤돌아보니 나 또한 선택으로 방황할 때가 있었다. 나의 첫 번째 선택에 있어서 방황은 대학교를 졸업한 후 취업할지 대학원에 진학할지에 관한 것이었다.
대학교에서 처음 역사를 전공했던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어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 솔직히 말하면 서양의 문명과 영국사에 관하여 가르치셨던 영국 신사를 닮은 키 크고 잘생긴 교수님처럼 되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대학교 학부 과정을 졸업했을 해에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였다. 영화 제목처럼 ‘국가 부도의 해’였다. 당시 IMF로 인하여 직장을 잃은 사람도 생기고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이 떨어져 사는 경우도 많았다.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했던 사람도 있었다.
IMF 영향으로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기 위해 학과 선배님들과 친구들은 공무원 전문 학원에 다니거나 취업을 위해 컴퓨터 자격증을 취득하려고 학원에 다녔다.
이런 분위기에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건 큰 결심이 필요했다. 당시에 철이 없었던 나는 집안 형편보다는 내 안위(安慰)만 생각했다. 남들은 취업 준비로 바쁠 때 대학원 입학시험을 위해 전공과목과 영어를 공부했다. 당시 내 통장엔 돈이 별로 없었고 친정 아빠의 박봉 월급에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았다. 대학원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친정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렸다. 통보라는 표현이 맞겠다.
친정엄마는 “평생 공부를 못 한 게 한이 되더라. 엄마는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해서 학교를 오랫동안 다닐 수 없었어. 동생도 돌봐야 했고. 엄마가 이번에 00회사 그만두고 퇴직금 받았으니까 이 돈 가지고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엄마 용돈 많이 줘라.”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친정엄마였다면 그렇게 못했을 거다. 내가 친정엄마였다면 ‘너만 생각하지 말고 취업해서 돈 벌어 시집이나 가’라고 이야기했을 텐데….
엄마의 퇴직금을 받아 대학원에 진학한 후 학원 강사를 하면서 공부했다. 가족들과 떨어져 서울에 혼자 살았다. 공부가 너무 힘들거나 외로울 땐 친정엄마께 전화해 하소연했다. 그러면 엄마는 항상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디에 가서 점을 봐도 크게 될 거라고 하더라.”
친정엄마는 종교가 없었지만, 친구분들과 자주 전주에서 삼십 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위봉사(威鳳寺)에 가셨다. 세 남매 모두 출가를 했지만 평생 가족을 위해 아침밥을 지을 때 기도하신다. 부모님의 기도와 자식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우리 세 남매가 오늘날 이렇게 잘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에 있어서 두 번째로 큰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석사과정을 두 번 졸업하고 전공을 바꿔 세 번째 석사과정의 진학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당시 내 나이는 서른아홉 살이었다.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고비를 넘겼다. 중학생 때부터 단짝 친구였던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아홉 수를 넘기지 못하고 유치원생 두 딸을 두고 마흔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친구의 죽음은 나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뒤집고 나는 영어교육학과 교육대학원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당시 나의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일곱 살 네 살이었다. 대학원에 다니면서도 일을 계속했다. 전공이 영어교육이라 대학원 교육과정을 따라가기 위해 집에 돌아와서도 새벽까지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 장학금도 탈 수 있었고 다른 사람보다 석사과정을 빨리 졸업할 수 있었다. 꿈에 그리던 중 · 고등학교 영어 교사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가족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이 모든 일들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음악가 중에 베토벤을 가장 좋아한다. 베토벤은 청각장애도 겪고 약혼자에게 배신당하고 생활고에 시달렸음에도 이를 ‘불굴의 의지’로 모두 극복하고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환희」 「영웅」 「합창」 같은 교향곡을 작곡했다. 베토벤의 이런 강인한 정신은 나에게 본보기가 된다.
세 번째 전공을 바꾸고 나는 작년에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단지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남편은 집 가까운 동네 주민 자치센터에서 글쓰기를 배우면 되지 꼭 비싼 등록금을 내며 학교에서 배워야 하냐며 돈이 없거나 힘들면 자퇴하라고 말한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고뇌는 정신적으로 아프기도 하고 괴로운 감정이긴 하지만 인생에 있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그 고통의 원인은 대인관계 건강 문제 가족의 불화 입시 문제 경제적 문제 등 다양하다.
내가 선택한 이 길에 후회는 없다. 비록 나의 새로운 이 길엔 고통이 따르겠지만 구양수의 3가지 글쓰기 다독 다작 다사를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나의 꿈이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도 잘 될 거야라는 주문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