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뒤 흔든 사람들 182 권두언 강 병국 목사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기대했던 ‘유쾌하게 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베드로는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것을 ‘유쾌하게 되는’ 경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경험이 무엇일까요? 왜, 어떻게 유쾌하게 되는 것일까요? 모든 죄를 용서받고, 죄를 다시 지을 욕망이 마음속에 없으며, 죄를 승리하는 생애 속에서 죄의 도말을 받는 경험이 나타나므로 마음이 기쁘고 가볍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것을 유쾌한 경험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오순절 당시 초대 교회에 임했던 성령의 역사는 놀라운 것이었지만, 바벨론을 향하여 큰소리로 복음을 외칠 마지막 성도들에게 내릴 늦은 비 성령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울 것입니다. 그 경험은 유쾌하고 매우 기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유쾌하게 되는 날을 위해 준비하고 계십니까? 오순절 성령을 받기 위해 제자들이 준비했던 것처럼, 마지막 늦은 비 성령을 받기 위한 철저한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머지않아 크신 늦은 비 성령의 역사가 준비된 영혼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은 다시 한 번 진리의 환한 빛으로 정복당할 것입니다. 정결하게 준비된 여러분 영혼의 그릇 속에 크신 성령이 임하시고 유쾌하게 하는 경험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Love Letter_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 강 영은 때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애를 쓸 때가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눈을 이해하려고 애를 써봅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너무 불가능해서 그만 눈을 감습니다. 몇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억겁의 세월이 지나도 치우치지 않는 하나님의 눈을 몇십 년을 살면서 이해하려다 그만 포기해 버립니다.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늘 치우치지 않는 눈으로 우리를 보시고 받아들이시는 하나님… 어떤 목사님이 이탈리아의 한 공동체를 방문했답니다. 그곳은 4백 명이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서로를 대하는 모습이 매일, 그리고 아침이나 저녁이나 너무 따뜻하고 변함이 없었습니다. 공동생활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던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답니다. “어떻게 그런 신선한 사랑을 매일 나눌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한결같이…”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희는 매일 아침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오늘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게 하소서!” 우리는 아내와 남편, 가족 그리고 이웃의 형제들을 대할 때 이미 그들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대합니다. 아니 그들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 대한 계산은 이미 끝났습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 이름 밑에 평가표를 달아 놓습니다. ‘까다로운 사람’, ‘말이 많은 사람’, ‘교만한 사람’… 기억의 토대 위에 붙여진 그 딱지 표는 두고두고 시간이 흘러도 그 사람 이름 밑에 여전히 붙어있습니다. 머릿속에 계산도 변하지 않은 채… 과거의 기억도 선입견의 덧칠도 없이 그냥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늘 대해주시는 분이 생각납니다. 수없는 잘못에도 딱지표 한번 붙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잘못을 회개할 때마다 하나님의 기억 속에 우리는 전혀 죄짓지 않은 사람이 되고, 죄를 용서받을 때마다 하나님의 눈에 우리는 전혀 과거 없는 사람으로 비칩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을 보듯 기대만 가득 찬 하나님의 눈, 수많은 허물에도 그분의 눈에 우리는 늘 처음 만나는 사람. 마치 기억 상실증에라도 걸리신 듯 너무도 말끔히 우리의 과거를 잊어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어 하늘을 쳐다봅니다.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싶어 말씀을 폅니다. 그 신비가 혹시 이해되려나 기도를 합니다. 오래 알았어도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대할 수 있는 사람, 선입견의 딱지 표를 붙이지 않는 순수한 눈을 가진 사람, 신선한 사랑이 가슴에서 늘 새롭게 흘러넘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야, 그제서야 겨우 하나님을 닮기 시작하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이겠지요? 제1부_ 제자들을 변화시킨 예수님의 믿음 세상에 일어나는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은 마음의 변화입니다. 변화는 창조입니다. 변화할 수 없어 보이는 지점에서 변화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창조의 능력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화가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서 변화를 창조해내십니다. 그리고 그 일은 성령의 역사로 일어납니다. 성경은 그런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던 사실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은 장래에 그 일이 반복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성령의 임하시는 능력으로 완전한 변화를 경험한 후에, 이 세상에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고 세상이 한번 크게 흔들렸습니다. 앞으로 다시 한 번 그런 변화가 새로운 역사의 장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외치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또 한 번 크게 흔들릴 것입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오순절 성령을 받은 제자들의 변화와 성령을 받기 위해 기울였던 그들의 준비에 대해 조명해 보았습니다. 곧 일어날 늦은 비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기대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경험은 많은 교훈을 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임했던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임하여, 세상을 뒤흔들고 바꾸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 편집실 – 제 1부: 제자들을 변화시킨 예수님의 믿음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같은”, “Christ like”이라는 어원에서 생긴 말이다. 즉,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크리스천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과 같은 성품을 가져야 함은 물론 예수님과 같은 생애를 살아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갖춰야 할 덕목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믿음을 가지는 일이 아니겠는가? 모든 것을 믿으시고 이루셨던 예수님의 믿음 말이다.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믿음이 무엇이었는가?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고 그분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하시고 이루셨다. 그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꿰뚫어보시는 믿음이었을 뿐 아니라, 불가능을 넘어 가능함을 창조해내는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믿음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믿음이며 그분께서만이 믿음의 모본이 되신다. 1) 제자들을 선택하심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그분께서 띠고 오신 여러 사명 중에 매우 절실한 한 가지가 예수님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이 지상에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펼칠 대표자들을 준비시키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참 교회와 참 백성을 통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하여져야 했으며, 그 복음은 마지막 때에 반드시 태어나야 할 여자의 남은 무리를 양산하기 위한 초석을 놓을 것이었다. 그 일을 위해 첫 번째로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보고 들은 것을 세상에 선포하는 증인으로 제자들을 부르셨다. 제자들의 임무는 매우 중요했는데, 그들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 되어야 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천하고 학식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복음과 진리를 위탁하시려고 주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은 랍비의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 당시 랍비들과 유대 교사들을 통해 가르쳐지는 교훈은 형식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가르침과 유전이 성경의 가르침을 대신하고, 의식과 외양으로 나타나는 규례들에만 치중해 있는 유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순수하고 참된 진리의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가르침으로 부패되지 않은 가장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을 택하셨다. 2) 제자들의 변화를 믿으신 예수님의 믿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분이 택하신 사람들의 품성을 잘 아셨다. 그들의 모든 약점과 연약성과 허물을 훤히 아셨고, 그들이 태어난 배경과 자라난 과정을 통해 어떤 기질들이 배양되었는지를 다 아셨다. 또한, 그들이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복음을 이해하는 일과 진리로 온전히 변화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도 아셨다. 더구나 그들이 예수님께서 당하실 십자가의 고난과 메시아의 사명을 이해하려면 많은 장애가 따를 것과 그들이 심한 시련을 당할 때에 낙심하여 다 도망하여 물러갈 것도 아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한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계셨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바라시는 놀라운 믿음이었는데, 그들이 변화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사업을 성취할 것을 믿으시는 믿음이었다. 그들이 비록 더디 변화하였을지라도, 그들은 적어도 그 당시에 예언을 연구하며 메시아를 기다리던 소수의 신실한 무리 중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적어도 그들의 전토와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그 당시의 잘못된 복음과 인간의 유전과 투쟁해가며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변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아직 당신의 가르침과 복음대로 온전히 변화되는 과정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머지않은 장래에 보혜사가 선물로 보내질 때에 그들이 온전히 변화될 것을 믿으셨고 그렇게 될 것을 바라셨다. 그들이 시련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약점을 극복하고 온전히 거듭나고 변화되어,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로 연합한 가운데 그들에게 위탁된 사명, 곧 어떤 핍박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증인들이 될 것을 믿으셨다. 얼마나 놀라운 예수님의 믿음과 신뢰인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 이후에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40일간 유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진리를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렇게 아직 변화되지 못하고 부족한 그들에게 복음을 위탁하시고, 온 세상에 증인이 될 것을 명령하시며 하늘로 승천하셨다. 그들은 과연 예수님의 믿음과 바램을 져버릴 것이었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믿음대로 그들은 변화함을 받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할 것이었는가? 예수님의 믿음과 신념은 그들의 생애가 변화될 것을 바라고 주장하는 믿음, 곧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믿음이었다. 제2부_ 변화 전과 변화 후의 제자들 예수님께서 지상 생애를 끝내시려는 시점, 곧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셔야 하는 긴박한 시점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복음의 대표자들로 택하신 제자들은 여전히 변화되지 않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더 집중적으로 제자들이 배워야 할 교훈들을 가르치시기 원하셨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사업에 적합하게 되기 위해 속히 준비되어야 하였다. 하나님의 교회의 미래가 그들의 어깨 위에 메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1) 제자들의 상태와 예수님의 믿음과 신뢰 마지막으로 갈릴리 지방을 여행하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배반을 당해 원수의 손에 넘겨질 것이며, 죽임을 당하나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이상하고 엄숙한 예고를 하셨다. 그러나 영광의 메시아를 고대하며 메시아되신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이 땅 위에 위대한 왕국을 세우리라고 기대하고 있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고난의 메시아의 사명을 이해할 수 없었고, 또 그런 메시아를 바라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말을 들을 때에 도저히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없었으며 대신 그들 사이에는 경쟁하는 정신이 팽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경쟁과 질시 가운데 노상에서 “누가 크냐”라는 싸움을 벌였다. 장차 주님이 세울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크게 될 것인지 논쟁하던 그들은 이 분쟁을 예수님께 숨겨야 하겠기에 멀찍이 뒤처져 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다 읽고 계셨으며 그들을 권면하고 훈계하기 원하셨다. 제자들은 하늘 왕국의 원칙에 대해서 교훈을 받는 것으로 넉넉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나라의 원칙에 일치되는 마음의 변화였다. 그들은 악에 기울어지는 선천적, 후천적인 결점들을 그대로 가진 채 모였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생애하고 믿음과 교훈과 정신에 있어 하나가 되기를 배워야 했다. 그들은 시험과 불만과 의견의 차이가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마음에 거하실 때에는 알력이 있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서로 사랑하도록 이끌며 주님의 교훈은 제자들을 한 마음과 한 정신으로 단합하게 할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중심점이셨기 때문에 그들이 그 중심에 접근하는 데 정비례하여 서로 밀접하게 연합될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 각자의 개성과 성격을 아셨지만, 그들이 변화될 때 각 사람이 하나님의 큰 용사와 일꾼이 될 것을 아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겪어야 할 위험과 지워진 책임을 아셨기 때문에 이들을 위하여 홀로 산 위에서 온 밤을 새우시면서 기도하시는 때가 많았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그들을 신뢰하고 믿으셨다. 예수님의 믿음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믿음으로서,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믿음대로 변화함을 받고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하고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빛의 대리자들이 되었다. 2) 제자들에게 임한 변화 1. 베드로 A. 변화 전의 베드로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을 통하여 베드로의 성격을 보면, 그의 성격은 정열적이고 충동적이며 경솔한 면으로 인해 일어난 실수와 실패가 전해지고 있다. 그의 성격은 단순 솔직하면서 바로 행동하는 행동파여서 자연히 많은 실수가 따랐다. 그에 더하여 그는 다른 제자들이 절대 저지르지 않은 실수, 사랑하는 스승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오점을 남겼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라는 장담을 하며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용감하게 나서서 검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었지만, 세 번 주를 부인하는 전무후무한 실수로 그의 생애의 기록은 얼룩졌다. 그의 억제하지 못하는 기질, 주의성 없는 정신, 성화되지 못한 성질, 시험에 뛰어드는 부주의성 등 많은 결점은 그를 실수투성이의 사람으로 기록되게 만들었다. B. 변화 후의 베드로 베드로의 성격이 강했던 만큼 그의 실수와 범죄와 회개는 전격적이었다. 그는 주님을 부인하는 큰 실수와 죄를 범했지만, 그런 후에야 진정한 자신을 볼 수 있었으며, 그다음에야 자신을 불신하고 주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는 겸손하고 인내 있는 사랑의 사도로 변했다. 베드로는 오순절 사건 이후 성령을 충만히 받아 목숨을 굴하지 않고 전도에 임했으며, 이 때문에 감옥에도 갇히고 매도 맞았지만 굴하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명령을 수행하였다. 베드로가 부목자로서 활동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은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 후의 일이었다. 변화된 베드로는 그에게 위임된 양무리를 충성스럽게 돌봄으로 자신이 구주께서 주신 명령과 책임에 합당한 사람임을 입증하였다. 그리스도를 부인한 후 그의 지위를 회복한 이래 베드로는 확고부동하게 위험을 무릅쓰고 진리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아갔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구주를 전파하는 일에 불굴의 정신과 용기를 나타내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 그가 전도를 시작하자 하루 3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며 기사와 이적을 많이 나타내었다.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 된 자를 고쳤고, 솔로몬 행랑에서 전도할 때 하루에 남자만 5천 신도가 더 하였으며(행 3:11-25, 4:4), 허다한 병자들을 고쳤다. 또한, 가이사랴에 있는 백부장 고넬료에게 전도함으로 이방 선교의 첫 문을 열었고, 또 그는 소아시아에 가서 전도하기도 하며 그의 생애를 복음전파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불살랐다. 그의 적극적인 성격이 성령 안에서 변화함을 받자 복음을 위한 하나님의 맹렬한 전사가 되었다. * 순교: 베드로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부인하였던 자신이 주님과 같은 방법으로 죽는 것이 너무 불합당하다고 느껴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아 줄 것을 사형 집행자들에게 간청하였다. 그의 요구는 수락되었으며, 베드로는 한때 그가 부인했던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 2. 요한 A. 변화 전의 요한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받는 자였지만 처음부터 그가 사랑의 사도였던 것은 아니다. 요한과 그의 형 야고보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막 3:17)이라고 불렸다. 이 칭호는 직접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었는데, 이 칭호를 보면 요한의 성격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요한은 남을 잘 품지 못하는 뾰족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격이 급하고 불같아서 화를 잘 내었다. 한 예로, 사마리안인들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주님에게 엘리야의 기적을 재연하듯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불사르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요한은 그들이 자신의 스승 예수님께 나타낸 냉대와 불경을 견딜 수가 없어 분노로 충만하여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라는 격한 말을 하였던 제자였다. 변화되기 전에 요한은 악한 성질, 복수심, 분노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비평을 잘하며, 자존심이 세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B. 변화 후의 요한 그런데 예수님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과 교훈을 잘 받아들이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나이가 어렸으며 어린이가 의지하는 신뢰 이상으로 예수님께 그의 마음 문을 열었다. 그는 날마다 자신의 난폭한 정신과 대조되는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관용을 보았고 겸비와 인내의 교훈을 들었다. 요한은 조심스럽게 조금씩 신령한 감화에 마음 문을 열고 구주의 말씀을 들었다. 자아는 그리스도 안에 숨겨졌다. 날마다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께 이끌렸고 마침내 그는 주님에 대한 사랑 가운데서 자신을 잊어버렸다. 그는 예수님의 삶과 일상 생애에서 나타나는 권능과 친절, 위엄과 온유, 능력과 인내를 보고 경탄해 마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의 분개하기 잘하고 야심많은 성질을 주님의 성품과 비교해보고는 주님의 고쳐 주시는 능력에 자신을 굴복시켰으며 거룩한 사랑을 품으므로 그의 마음속에서 품성의 변화를 이룩해 냈다. 그는 매 순간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품성의 변화를 얻게 된 것이다. 매일 바라보던 예수님의 사랑은 그를 변화시켜 사랑의 사도가 되게 하기에 넉넉하였다. 자존심이 세던 그는 겸손해졌다. 복음서의 저자들 가운데 마태, 마가, 누가는 자기의 이름을 밝혔지만, 요한은 한 번도 자기의 이름을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을 단지 다섯 번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라고 했으며, 세 번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의 복음서를 보면 "사랑"이란 단어가 50번 이상이나 기록되어 있고, 제자들 중 가장 오래 살아있으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그는 예수님께 배운 아름다운 교훈과 언어로 그리스도의 말씀과 하신 일에 대하여 전하였으며, 예수님의 교훈을 생생한 증언으로 가르쳤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목격한 후,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후,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드디어 깨달았으며, 특히 형제간에 지녀야 할 사랑의 성질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후에 요한은 그의 동료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제 친절하고 사려 깊고 인내하는 사랑의 사도가 된 요한은, 진리를 위해서 어떠한 희생도 마다치 않는 열렬한 사도가 되었다. 그는 이기심 없는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이 사랑을 불붙이기 위해 전 생애를 바쳤다. * 순교: 초대 교회 시대에 계속된 무서운 박해 중에서도 사도 요한은 꿋꿋하게 서서 신도들의 신앙을 굳게 하고 강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성령 강림 이후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서 포교 활동을 벌였던 요한은, 전승에 의하면 44년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박해를 피해 소아시아로 피신했으며, 그곳에서 일곱 교회를 지도했다고 한다. 구주와 친밀히 교제한 제자들 중 마지막 생존자인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요, 세계의 구주시라는 사실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대인의 관원들은 예수님의 이적들과 가르침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이 담대한 증인 요한의 음성을 침묵시키기 원했다. 요한은 그의 신앙에 대하여 심문을 받기 위하여 로마에 소환되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분노로 끓는 기름 가마 속에 던져졌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기적적으로 충실한 종의 생명을 보존하셨다. 그러자 요한은 95년에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계 1:9) 정죄당해 황제의 칙령에 의하여 밧모 섬으로 추방당했다. 에게 해 가운데 있는 바위로 덮인 불모의 섬인 밧모는 로마 정부가 죄수들의 정배지로 택한 쓸쓸한 곳이었으나, 요한은 거기서 마지막 시대에 확실한 안내지도가 되는 요한 계시록 예언서를 계시를 통해 기록하였다. 계시 속에서 영광스러운 주님을 뵙고 마지막 시대의 핍박과 시련을 뚫고 마침내 승리할 하나님의 교회를 보았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너무 노쇠하여 제대로 설교를 할 수 없어 항상 신도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설교를 할 때까지 주님의 사업에 충성하였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극렬한 핍박 하에 동요하려고 할 때에 요한의 노련하고 힘 있는 웅변과 산 증언은 많은 그리스도인을 굳게 서도록 이끌었다. 3) 제자들의 변화와 순교 상황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매사에 꼼꼼하고 정확한 세리 마태가 있었고, 맹렬한 열심 당원이며 로마의 권위에 대한 단호한 증오자인 시몬도 있었다. 진실하지만 소심하고 겁과 의심이 많은 도마와 야심이 있고 솔직한 세베대의 아들들과 형제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서로 다른 성격과 배경을 가진 그들을 교육하시고, 후에 보혜사 성령이 오실 때에 그들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큰 일꾼이 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예수님의 믿음대로 제자들은 모두 변화되었으며, 각 개인의 특성과 재능에 맞게 각기 다른 분야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두려움 없이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기쁘게 순교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갔다. * 제자들의 순교 상황 야고보: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전도하다 헤롯의 칼에 순교함. 안드레: 스구디아 헬라 소아시아에서 전도하다 십자가에서 순교함. 도마: 메대, 바사, 인도에서 전도하다가 창에 찔려 순교함. 빌립: 터키에서 전도하다 기둥에 매달려 순교함. 바돌로매: 전승에 의하면 아르메니아에서 전도하다가 순교함. 마태: 에디오피아에서 목베임 당하여 순교함 야고보(소 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블레셋과 애굽에서 전도하다가 순교함. 다대오(소 야고보의 동생): 바사에서 활에 맞아 순교함. 시몬: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 맛디아(가룟 유다 대신 뽑힌 사도): 에디오피아에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함. 어떻게 이런 변화가 제자들에게 일어났는가? 주님이 잡히시던 밤 주님을 부인하고 다 달아나 버렸던 비겁한 제자들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성령의 임하심이었다. 성령의 역사는 그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예수님의 믿음이 실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제3부_ 성령의 필요를 느낀 제자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의 고별 담화에서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견디실 자신의 고통과 죽음에 대하여 슬픈 빛을 보이시거나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대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가지셨던 믿음과 그 믿음이 실상으로 이루어질 것에 대한 기쁨을 나타내셨다.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후 다른 보혜사인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을 도우시므로 그들이 변화되어 아름다운 성품과 성령의 권능으로 나아가 진리로 세상을 정복하게 될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다. 성령께서 큰 능력으로 임하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 제자들이 깨달은 사명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거의 낙담에 빠져 있었다. 예수님께서 여러 번 제자들에게 미래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들에게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삼 일 만에 부활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분이 운명하셨을 때 완전히 절망에 빠졌다. 실망과 슬픔과 낙담에 빠진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문을 굳게 닫고 자신들의 운명을 생각하며 두려워하였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그곳에 나타나셨다. 주님께서는 놀라움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그들의 영적 안목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메시아를 가리키던 예언들의 성취에 대하여 설명해 주셨다. 예수님의 초림, 유대인들이 주님을 거절한 일, 그리고 그분의 죽음에 관한 예언들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 모든 세목이 성취된 것을 보여 주셨다.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5-48)고 부언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신 날들 동안 그들은 새로운 경험을 얻었다. 그들은 그들의 사업의 성질과 범위와 그들에게 위임된 진리를 세상에 선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의 사건들, 그의 죽음과 부활, 이러한 사건을 지적하는 예언들, 구속의 경륜의 오묘,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능력 등 저희가 목격한 이 모든 것을 세상에 알리는 증인이 되어야 하였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사명과 그들 앞에 놓인 사업을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시려고 사십 일 동안 지상에 머물러 계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사명을 맡기신 후 승천하셨다. 그들은 이제 좌절된 소망으로 슬퍼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활하신 구주를 보았고, 그의 고별 약속의 말씀은 끊임없이 그들의 귀에 메아리쳤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사명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세상에 복음을 선포해야 하였고 세상은 땅끝까지 복음으로 한번 정복되어야 했다. 또한, 그들이 놓는 진리의 초석으로 인해 미래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참 백성과 교회가 생겨날 것이었고, 마지막 시대에 벌어질 선과 악의 대쟁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여자의 남은 무리가 탄생할 것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맡겨진 이 큰 사명은 그들의 힘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었다. 하늘의 권능으로 임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자들은 그들이 목격한 일의 증인으로서 주님께서 가르치셨던 교훈을 그대로 가르쳐야 했다. 아무리 잘 전개된 논리라 해도 논쟁으로는 듣는 사람의 굳은 마음을 녹이거나 이기심의 딱딱한 껍질을 깨뜨리지 못한다. 제자들은 하늘이 주시는 성령의 선물을 받아야 했고,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아는 산지식으로 뜨거워진 마음과 감동적인 입술로 복음을 선포할 때에만 그것이 효과를 나타낼 것이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완수할 수 없었다. 2) 제자들이 간절히 구한 성령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5, 8)고 하신 약속을 믿고 예루살렘에서 아버지의 약속, 즉 성령의 부어 주심을 기다렸다. 그들이 마음을 살피며 성령을 기다릴 때에 기억에서 사라졌던 진리들이 그들의 마음에 다시 떠올랐으며, 그리스도의 경이로운 생애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분의 순결하고 거룩한 생애를 명상하며 제자들은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의 품성의 아름다움과 그분이 가르치신 복음을 증거할 수만 있다면 너무 힘들어서 하지 못할 수고나 너무 커서 못할 희생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구주를 오해한 자신들이 너무 안타까웠다. 만일 그들이 과거의 삼 년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다르게 행동하였을 것인가! 만일 그들이 다시 주님을 볼 수만 있다면 그들이 주를 사랑하는지를 보여 드리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을 것인가! 그들은 과거에 늘 불신의 말과 행동으로 주님을 슬프시게 한 일을 생각하고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이제 그들은 세상에 그리스도를 대표하기에 손색이 없는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그들은 세상 앞에 담대히 주님을 시인함으로 그들의 불신에 대해 속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들은 간절히 성령을 간구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만나기에 적합하게 되도록, 매일의 교제에서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도록 매우 열렬히 기도하였다. 이 준비의 날들은 깊이 마음을 살피는 날들이었다. 제자들은 영적인 필요를 느끼고 자신들을 영혼 구원 사업에 적합한 사람들로 만들어주시기를 주님께 부르짖었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을 위한 축복을 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혼 구원에 대한 부담에 눌려 있었다. 그들은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능력을 간구하였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임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3) 오순절 성령의 임하심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에서 아버지의 약속, 즉 성령의 부어 주심을 기다렸다. 그들은 한가롭게 기다리지 않았다. 성경의 기록은 그들이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눅 24:53)였다고 말하고 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더라.” 성령은 기다리며 기도하는 제자들에게 충만히 임했으며 모든 사람은 그것을 체험하였다. 무한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무한하신 성령이 임하신 것이었다. 마치 여러 시대 동안 억제되어 오다가 내려온 듯, 오순절 성령은 소나기와 같이 제자들에게 부어졌다. 성령의 감화로 참회와 자복의 기도가 용서에 대한 찬양의 노래와 뒤섞였다. 감사와 예언의 말씀이 들렸다. 온 하늘은 비할 데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놀라운 일을 내려다보고 찬탄해 마지 않았다.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며 사도들은 “사랑은 여기 있다!”고 부르짖었다. 제자들은 나누어 주신 성령의 선물을 붙잡았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능력으로 새롭게 날이 서고 하늘 번갯불에 달궈진 성령의 검은 모든 불신을 제거하였다. 그들이 능력을 받고 나가서 복음을 전하자 하루에 수천 명이 회개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일찍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 16:7, 13)고 말씀하셨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의 제자들이 약속된 축복을 받게 되리라는 신호였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들은 이것을 기다려야 하였다. 하늘 문으로 들어가신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시며 보좌에 오르셨다. 이 예식이 마쳐지자마자 성령은 풍성하게 제자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구주의 취임식이 끝났다는 하늘의 통고였다. 그리스도의 약속 성취는 이루어졌고 성령을 풍성히 받은 제자들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사명을 완수하였다. 제4부_ 오순절 성령을 받은 조건과 준비 오순절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었다. 또한, 성령의 임재의 필요성을 깨닫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 있었다. 오순절 성령을 받기 위해 제자들이 겪었던 경험과 준비과정은, 두 번째 오순절 성령의 역사인 늦은 비 성령을 기다리고 있는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성령을 받기 위한 조건은 무엇이었는가? 1) 시련을 통해 성령의 필요를 느낌 제자들이 성령의 필요를 진정으로 알기 위해 겪었던 과정은 시련과 고난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사건은 제자들의 일생일대의 시련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전토와 가족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전도사업에 투신한 사람들이었다. 앞날에 대한 예언 성취를 알려주신 주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제자들은 그들의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사건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제 곧 영광의 왕국이 이 지상에 설 것이며 그 왕국에서 그들이 차지할 자리와 명예에 관심이 집중되어 다투던 그들에게 있어서 주님의 죽음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조롱하는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말을 들으면서, 또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 그들의 일생을 걸고 쫓던 희망의 태양이 저버리면서 제자들의 마음은 어두운 밤의 그늘로 덮여버렸다. 제자들은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는 말을 입술로 되뇌며 외롭고 상처받은 마음으로 슬픔에 잠겨 울었다. 십자가는 그들에게 큰 시련과 시험이었다. 세상에 걸었던 그들의 인간적인 희망과 최대의 소망이 사라진 가운데 그들은 빈손으로 허허벌판에 남겨진 듯 허전하였다. 이제 누가 높은가 다투던 그들의 혈기는 사그라지고, 세상의 명예를 추구하던 헛된 욕심도 잦아들고, 눈앞에 닥친 시련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자신들의 진정한 모습, 나약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자신들의 연약성과 부족함, 그리고 많은 허물과 부정함을 깨닫고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버리게 되었다. 낮은 곳으로 내려앉게 된 그들의 심령은 가난하게 되었고 빈 마음으로 주님의 임재와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십자가는 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시련이었다. 그러나 그 시련은 그들 자신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였고 성령을 받기에 적합한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 우리가 받는 교훈 때때로 시련은 우리 마음속에 큰 역사를 이루어낸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속적인 것과 이기심과 조급함과 비 그리스도적 품성에서 깨끗함을 받고 정결하게 되도록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신다. 그 깊은 환난의 물결이 우리를 덮치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시련에 처하게 될 때에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며, 스스로 얼마나 연약하고 부정한 존재인가를 알게 되므로 더러운 죄악에서 깨끗해지고자 하는 깊은 갈망을 갖게 된다. 시련과 시험을 통하여 더 순결하고 더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시련의 연단의 풀무불에 들어갈 때에 이기심으로 어두워진 심령을 가지고 들어가는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에 그 어려운 시험을 참고 견딘다면 그 시험에서 나올 때에는 어두워진 심령과 눈이 밝게 되고 신의 성품을 더 반사하게 될 것이다. 시련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한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고통 속에 처할 때에 우리는 가난한 심령을 갖게 되고 자신의 진정한 상태와 처지를 깨닫게 되며, 그때에 치료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령을 바라게 된다. 고난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으며 그것을 견딜 힘과 성령의 능력을 간절히 구하게 되며, 그때에 마음의 그릇 속에 주님의 성령을 담을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시련과 시험은 우리를 연단하여 주님의 가치 있는 일꾼으로 만들며,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구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2) 회개와 고백 시련을 겪은 후 제자들은 겸손하게 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귀한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변화되지 않은 모습과 고난당하시는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자신들의 비겁함을 보며 그들은 자신의 속절없는 상태를 발견하고 진정으로 슬퍼하게 되었다. 게다가 주님께서 모든 교훈을 다시 상기시켜 주시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렇게 부족한 자신들에게 진리를 위탁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시니 그들은 그 사업을 위해 전혀 준비되지 못했음을 느끼고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준비된 일꾼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가 되기 위해 통회하며 엎드려 회개하였다. 그들은 참된 회개로 마음을 겸비하게 하고 불신을 자복하였다. 불화와 최상권을 잡으려는 모든 욕망을 버리고 그들은 서로에게 죄를 고백하고 자신들의 허물에 대한 용서를 빌었다. 끝없이 흐르는 눈물과 서로를 용서하고 받아주는 포옹과 따뜻한 용서의 말이 그들에게서 흘러나왔다. 진실된 회개로 비워진 제자들의 마음은 이제 성령을 받을 준비를 완전히 갖출 만큼 겸손하게 되었다. * 우리가 받는 교훈 그리스도인 생애에서 회개의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죄를 위한 경건한 슬픔이라고 불리는 회개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참된 회개, 곧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고후 7:10)의 경험을 지속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우리의 부족과 죄 됨이 드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매일 점점 더 깊은 회개의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의 사본인 계명을 바라볼 때에 우리의 죄들이 밝히 드러나 양심을 깨우치게 되는데, 그럴 때에 우리의 유일한 안위와 소망은 갈보리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십자가 밑에 나아가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악함과 구주를 모욕하고 슬프시게 한 죄들을 통회하며,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시 못 박히시고 찔림을 받으시는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어떤 사람도 자신이 알고 있는 죄를 여전히 행하며 알고 있는 의무들을 등한히 하면서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로 자신의 영혼을 가릴 수는 없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대로 개혁하고 배운 진리를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한, 그 진리로 변화되는 산 믿음이 계속하여 증가하지 않는 한, 우리의 회개는 감정적이고 한갓 아침 이슬과 같이 쉬 사라지는 것이 될 것이다. 의의 평온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강렬한 감정뿐인 회개는 믿지 않을 때보다 더 사람을 악화시킬 수 있다. 참된 회개에는 반드시 변화가 수반되는데, 죄에서 떠나는 변화, 생애를 개혁하는 변화, 원수가 친구로 변하고 오해를 이해와 화합으로 만드는 변화, 무정한 사람이 친절하고 애정 많은 사람이 되는 변화의 기적이 따른다. 우리는 참된 회개의 대표적인 예를 다윗의 회개에서 찾을 수 있다. 다윗의 회개는 성실하고 깊은 회개였다. 그는 자기의 죄악을 변명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의 기도에는 형벌을 피하려는 욕망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범죄의 흉악함을 보고 그의 영혼의 더러움을 보고 자신의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가 기도한 것은 용서만을 얻으려고 한 것이 아니고 마음의 정결을 위함이었다. 그는 사울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거나 그의 죄를 가볍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대신 자책과 진실된 슬픔으로 하나님의 선지자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자신의 죄악을 시인했다. 그는 하나님께 용서를 탄원하면서 고관들과 심지어는 그의 부하와 종들에게도 그의 회개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죄와 회개에 대한 참회의 시를 지어 사람들로 교훈을 얻게 하였다. 그의 보좌의 지위가 높았고 무제한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탄핵받은 모든 죄를 겸손하게 인정한 것은 다윗이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의 회개는 하늘의 사하심을 받은 완전한 회개였다. 이렇게 회개에는 고백이 따라야 한다. 회개할 때에는 공중 앞에서 회개해야 할 죄와 개인적으로 회개해야 할 잘못이 있는데, 이것을 잘 구분하여 고백과 함께 겸손히 용서를 구해야 한다. 회개는 성령의 부으심을 받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경험이다. 회개하고 정결하게 된 사람,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사람, 혹시 실수하고 쓰러지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다시 회개의 경험으로 재빨리 들어가는 겸손한 사람들만이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다. 참된 회개의 기적이 우리 삶에서도 일어나고 있는가? 3) 연합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조건 중에 매우 중요한 한 가지는 그들이 하나로 연합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음을 같이 하”고, “한 마음과 한 뜻이 되”(행 2:46, 4:32)었다. 제자들은 그들 사이에 있는 차이를 없앴다. 회개했다고 하여 그들의 개성과 성격이 똑같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달라진 점은 상대방의 개성과 성격을 존중해주고 이해해 주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르던 그들이 하나로 연합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한 목적과 한 소망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그리스도로 가득 찼고, 그분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 되었다. 그들의 마음과 품성은 주님과 같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들이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행 4:13) 을 알았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형제들은 서로 불목할 수 없다. 그들의 친구요 맏형이신 예수님을 함께 모시고 동행하면서 어떻게 서로 불화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통을 하면서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심령은 매우 충만하고, 깊고, 넓은 자비와 사랑으로 넘쳐 흘러서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함께 힘을 합하여 세상 끝까지 나아가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사업을 추진시키려는 강렬한 열망으로 충만하여 하나가 되었다. 하늘에 대해 그들이 진 큰 빚과 그 사업에 대한 그들의 책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사소한 일은 그들에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성령의 부음을 받아 힘을 얻은 그들은 십자가의 승리를 널리 증거하려는 뜨거운 열성으로 나아갔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생기를 주셨고 또 그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그들의 얼굴에서 빛났으며, 자신들의 삶을 봉사 사업을 위해 연합하고 바친 제자들의 그러한 모습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굴복한 사람들이란 증거가 나타났다. * 우리가 받는 교훈 제자들에게 오순절 성령을 받기 위한 준비로 연합이 중요했다면, 마지막 시대에 늦은 비 성령을 받아 복음 사업을 마쳐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연합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마지막 때에는 한 성령께서 한 백성을 인도하실 것인데, 그들의 특징은 진리 안에서의 연합과 화합이다. 제자들이 서로 판이한 성격과 기질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전의 편견을 버리고 진리 안에서 서로 연합되고 조화되었던 것처럼, 한 진리 안에 모인 마지막 성도들도 서로의 이견과 대립과 주장들을 버리고 뜨거운 사랑으로 연합하여야 할 것이다. 사탄은 이 연합이 성도들 속에 계속 존재하는 한, 복음의 진리가 널리 보급되는 것을 막을 수 없음을 알고 형제들 사이에 불화의 요소들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1, 17)라고 간구하신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 가운데 성취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참된 연합은 각 개인이 예수님 안에 감추어질 때에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와 먼저 연합된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조화와 화합의 하모니가 울려 퍼질 것인데, 이런 아름다운 성도의 연합은 하늘의 정신으로 고무된 사람들 사이에 항상 존재할 것이다.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겸손과 예수님께서 위하여 생명을 바치신 다른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정신을 가진 곳에 주님께서 거하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권능과 성령의 능력과 거룩한 천사들의 도움을 힘입어 세상 앞에 연합 전선을 펴서 끊임없이 흑암의 권세들과 싸우며 마지막 복음을 전해야 할 일꾼들은 먼저 서로 연합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진리가 승리하게 될 것이며, 이 연합된 수고와 역사가 계속될 때에 하늘의 사자들은 앞서 가서 길을 열 것이며 영혼들이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어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께 인도될 것이다. 이 아름다운 연합을 이룬 교회를 가리켜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아 6:10)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성경은 가리키고 있다. 이 연합된 교회는 승리에 승리를 더하며 전진하여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그 거룩한 사명을 영광스럽게 성취할 것이다. **마치면서 하늘은 마지막 시대에 늦은 비 성령을 받고 복음을 들고 나아가 세상을 뒤흔들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 이 세상은 회복된 진리의 빛으로 다시 한 번 환해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바벨론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진실된 자녀들이 그 진리의 외침을 듣고 죄악 가운데서 나오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짐승의 표의 환난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고 세상에 복음을 큰소리로 외치는 사업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일은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없으면 또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늦은 비 성령 운동이 일어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오순절의 풍성한 성령을 받고 세상을 복음으로 뒤흔들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나아가 세상을 뒤흔들고 역사를 새롭게 썼듯이,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듯이, 마지막 늦은 비 성령이 임할 때에 우리도 성령을 풍성히 받고 나아가 복음의 빛을 비추면서 세상을 뒤흔들어야 합니다. 이 영광스러운 일에 모두 참여하시는 독자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세계 동향 Top News 1. 말레이시아 항공기 피격 – 탑승자 298명 전원 사망 네덜란드에서 말레이시아로 가던 말레이시아 항공기 MH17편이 지난 17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경 지역에서 미사일에 격추되어 298명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말레이시아 항공기가 격추된 곳은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시아 반군이 내전 중인 지역으로 사실상 운항금지구역이다. 우크라이나 정부군은 반군 도청 자료를 공개하며 말레이시아 항공기를 격추한 것은 친러시아 반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친러시아 반군 측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3월 8일 승객과 승무원을 포함해 239명을 태운 말레이시아 항공기 MH370편이 실종되어 아직도 행방불명인 상황에서 이런 참사가 다시 발생하여 전세계에 충격과 슬픔을 주고 있다. 사고가 난 7월 17일의 비행외에 최근 10번의 비행경로는 모두 비행금지구역을 지나지 않고 안전한 경로로 운행되었다.(사진출처 : zerohedge.com) 우크라이나 관료들은 말레이시아 MH17편이 벅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었다고 한다. 친러시아 반군 지도자들은 말하기를 자신들은 여객기 고도에 도달할 수 없는, 어깨 위에 매고 발사하는 개인 휴대용 대공 미사일만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진출처 : zerohedge.com) 2. 이스라엘-하마스 충돌 10일째 가자에 이스라엘 지상군 투입 이스라엘이 지난 6월 12일 발생한 유대인 청소년 3명의 납치·살해사건의 주범으로 무장정파 하마스를 지목하자 7월 초 극우 유대주의자들은 보복으로 팔레스타인 청소년을 산 채로 불태워 살해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군이 7월 8일 하마스가 통치하는 가자지구에서 '프로텍티브 에지'라는 이름의 군사작전을 시작하면서 양 측은 본격적인 분쟁상황에 접어들었다. AFP 등에 따르면 10일간의 공습으로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최소 237명, 부상자는 1700여명에 달한다. 같은 기간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로 1200여 대의 로켓을 발사했으며 이스라엘 사망자는 1명이다. 이스라엘은 충돌 10일만인 17일 가자지구에 전격적으로 지상군을 투입했다. "스데롯(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는 곳의 지명) 극장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의자를 산 위로 가져왔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기 위해서죠. 폭음이 들리면 이 사람들은 박수를 칩니다." 중동 지역에서 취재 중인 덴마크 언론인 알란 쇠렌슨(Allan Sørensen)이 지난 9일 트위터에 폭격을 구경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사진을 올리며 남긴 설명이다. (사진출처 : 알란 쇠렌슨 트위터 @allansorensen72) 3. 전쟁 가능한 일본 – 집단자위권 행사에 대한 새로운 헌법해석 일본 정부는 7월 1일 아베신조 총리가 주재하는 각의에서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내용의 헌법해석을 의결했다. 집단자위권은 자국이 직접 무력 공격을 받지 않아도 밀접한 관계에 있는 국가가 무력 공격을 받으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참전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일본은 그동안 집단자위권을 행사하는 것은 전쟁과 무력행사를 금지한 헌법 제9조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해석해왔다. 지난 수십년간 유지되어온 헌법 해석을 뒤집은 아베 내각은 여론의 반대에 부딪쳐 집단자위권 관련 법안 처리를 내년까지 미룬 상태다. 이런 아베의 집단자위권 행사에 대한 시도가 일본 및 관련 국가들에서 이슈가 되고 있다. 새로운 헌법해석으로 집단자위권 행사를 하려는 아베 내각에 반대해 시위하는 수천명의 일본 국민들 (사진출처 : Reuters) 4. 포르투갈 은행사태, 끝나지 않은 유로위기 지난 7월 10일 포르투갈 최대 은행인 방코 에스피리토 산토(BES)은행의 주가가 폭락했다. 지난 5월 13억 유로에 달하는 대규모 회계부정에 이어 BES의 지주회사가 단기 부채 지불을 연기한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사태로 유럽권 증시와 미국 뉴욕 증시까지 한 때 하락했다. 이 문제에 대해 제레미 스트레치/CIBC, FX 전략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포르투갈 BES 사태는 유로존의 시스템적인 문제만 연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로존 본연의 문제와 관계 있을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은) 은행 부문의 자금 문제에도 여전히 시달리고 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14일 "유로존에 추가적인 충격이 발생할 경우 경기 회복세가 멈출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 전문가들은 유럽중앙은행이 최소 7000억유로(950조원) 규모의 파격적인 경기부양책을 시행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보도했다. 지난 7월 10일 포르투갈의 최대 은행인 방코 에스피리토 산토(BES)은행의 채권가격과 주가가 폭락했다. 5. 브릭스, 서구 지배를 견제할 '신개발은행' 설립 브릭스(BRICS) 국가 정상들이 독자적으로 새로운 개발은행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BRICS 개발은행은 1천 억 달러를 목표로 초기 자본 5백억 달러를 설립하여 2016년부터 중국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공식 출범하게 된다. BRICS 개발은행의 출범은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는 IMF와 세계 은행과 같은 달러로 뒷받침된 기관들뿐만 아니라 세계 교역에서 달러의 지배를 무너뜨릴 첫 단계로 보인다.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는 세계 인구의 41.6%를, 전 세계 GDP의 19.8%를 차지한다. (사진출처 : RT) 신앙 간증_ 아브라함의 경험 나의 경험 제가 이 죄된 세상을 뒤로하고 SOSTV 선교센터에서 복음사역을 시작했을 때의 나이가 37살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보다 약 38년 젊은 나이에 저는 하란을 떠난 셈이군요. 저의 하란의 삶, 죄악과 오류로 점철된 삶,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결과가 얼마나 파멸적인가를 몸소 체험하고 있었기에 진리의 말씀이 제시되었을 때 죄된 삶을 등지고 하란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과 진리의 능력에 힙입어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과 눈물로 만류하는 가족의 호소도 뒤로 한 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가나안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아브라함과 똑같은 생애가 제 앞에 펼쳐질 줄은 상상도하지 못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 앞에 펼쳐진 기근의 삶이 저의 삶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SOSTV 사역에 뛰어들면서 가나안으로 향하는 여정 중 첫 번째 직면한 현실은 오색찬란한 꽃밭 길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여러 영적인 기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첫사랑의 감동도, 진리의 능력의 체험도 그리고 형제자매의 진실한 사랑도. 제가 직접 진리의 현장에 뛰어들어 현실로 부딪히니 진실로 거듭나지 못한 저의 영적인 상태 모든 것이 기근으로 고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영적 고갈에서 벗어나고자 저 역시 아브라함과 똑같은 불신의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호칭하는 아브라함의 비겁함도, 믿음을 잃고 사라의 몸종 하갈을 취한 아브라함의 불신도 모두 영적인 기근을 당하고 있던 저의 영적 상태를 그대로 대변해 주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길이 너무나 외롭고 힘겨운 나머지 저는 그만 믿음을 잃어버리고 저의 인간적인 방법으로 현실을 달래보려고 안간힘을 쏟았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하나님께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으면서 말입니다. “하나님, 저 너무 외롭고 힘이 듭니다. 저도 남들처럼 돕는 베필이 한 명 있으면 이 사업 외롭지 않게 잘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힘과 위로가 될 수 있는 동역자를 한명 붙여주십시오” "하나님 저 너무 외롭고 힘드니까 제 유일한 취미(낚시)좀 그대로 즐기게 해주십시요. 진리를 따르느라 가족도 없고, 친구도 다 떠나가고 없는데 이거라도 있어야 제가 숨 좀 쉬고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허전한 마음 달랠 수 있도록 이것만이라도 허락해 주십시오" 그리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저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아브라함이 사용했던 똑같은 방식들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제 주위의 자매들에게 이성으로서의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저의 인간적인 기준과 선호도를 기반으로 해서 자매 한 명 한 명에게 연락을 취했고 만남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 자매 저 자매에게 그렇게 시도했지만 믿음을 잃고 아브라함의 방식을 취했던 저에게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허락해 주실 리 없었습니다. 정말 고심한 끝에 제가 정말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한 자매에게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구애를 시도해 보았지만, 그것도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불평과 불만으로 눈이 어두워진 저에게 드디어 하나님께서 제 영혼을 구원하시고자 최종 믿음의 시련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삭(마음의 우상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들이 저에게 들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홀로 지내 외로운 저에게 유일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라기보다는 나의 분신, 나의 또 다른 자아라고 하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바로 낚시입니다. 갈릴리의 제자들이 어부였다는 사실과 예수님께서도 그 제자들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시면서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셨다는 성경의 기록, 그리고 배신한 그의 제자 베드로를 낚시터에서 만나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는 일화들은 저를 더욱 한 층 낚시의 매력에 빠지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저에게 뜻하지 않은 하나님의 명령이 손계문 목사님의 입을 통해서 내려졌습니다. “저희 SOSTV는 이 마지막 시대에 복음 사업의 최전선에서 타협되지 않은 순수한 복음을 전하는 곳입니다. 김인섭 형제님이 더는 낚시를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겐 마치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습니다. 낚시를 그만두라니... 그나마 이것 하나로 외로움을 버티고 있었는데 이것마저 버리라니 저는 도무지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 들려오는 강력한 성령의 호소에 저는 마음이 평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분명한 하나님의 확답을 얻기 위해 기드온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낚시를 포기하길 원하신다면 오늘 당장 싸인을 주십시오.” 여러분 제가 이렇게 기도할 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바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날 아니면 그 다음 날 지인의 입을 통해서, 아니면 설교를 통해서, 심지어 진리를 믿지 않는 가족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누가 봐도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음성이었기에 저는 그만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낚시를 너무나 사랑했던 것입니다. 낚시는 저에게 완전한 우상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도 죽을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며 하나님의 호소에 저항하는 저의 상태는 바로 우상의 제단 앞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제사 지내는 영적 우상숭배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총체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이성 문제도 순조롭지 않았고 그나마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었던 낚시까지 포기하라는 명령이 주어졌을 때, 저는 그만 낙담과 절망으로 출애굽 백성의 원망 섞인 불평을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이런 영적인 기근 상태에서 그간 제가 필사적으로 매달린 끝에 위태위태하게 교제를 이어오던 자매에게로부터 마지막 이별의 통고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저의 영적 상태를 제대로 간파한 자매님 가족들의 상의 결과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그만 그 자리에서 낙담과 절망으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나의 벌거벗겨진 완전한 영적 기근의 상태 앞에서 꼬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저의 처참한 영적 기근 상태를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저도 결혼하고 삶이 안정된다면 힘든 복음사역 저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저도 체면 구기지 않으면서 당당하게 품위 있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나님께 항변했었는데 저의 심각한 영적 형편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다 하더라도,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 모든 것이 바람에 불려 날아간다면 저는 감춰뒀던 거듭나지 못한 본 모습을 드러내고 절망과 실망에 떨면서 불신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환란 시에 나타날 저의 믿음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죄를 후회하는 삶을 살았었지 진실로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옛 삶과 자아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마음까지 주님께 바쳤던 삶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입으로는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오직 순종하면서 정작 내 영적 상태는 세상의 이기와 욕구, 만족이 채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출애굽 후 광야에서 불평하는 이스라엘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으로 저의 처절한 상태를 인정하게 되자 동시에 하나님께서 새롭게 일어설 힘과 용기를 주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은 나의 불행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나에게 최선을 주시려고 서서 기다리고 계신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그것을 받아 누릴 준비가 아직 안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1순위에 있지 않는다면 결혼도, 취미도 모두 우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 지금 이 모든 우상을 믿음을 가지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보자.” 그 즉시로 저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차 트렁크에 정성스럽게 보관하고 있었던 낚싯대들을 모두 팔아 치워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신 그 요구에 전적으로 순종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그렇게 결심하고 행동한 순간 제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제 마음을 꽉 잡고 있었던 그 우상 “이것(낚시) 없으면 하나님 전 죽어요.” 했던 그 영적 상태, 이 모든 것이 봄날에 언 눈 녹듯이 완전히 녹아 없어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낚싯대를 팔고 집 근처 강변을 한 번 가보았습니다. 그 수많은 낚시꾼의 모습이 그리고 물결 위에 이는 바람과 함께 춤추는 낚싯줄들이 더는 저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 저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너무나 큰 해방감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아! 죄와 우상에서 해방되는 경험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나의 마음을 완전히 바칠 때 이렇게 새 마음이 창조되는구나. 정말 믿기지 않았습니다. 나를 사로잡았던 낚시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의 명령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그 우상이 마음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없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고 조용히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갈 때, 손 목사님과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완전히 저의 이삭을 바치고 난 뒤, 이삭을 바치라고 했던 같은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 즉시로 저에게 들려준 또 다른 음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사역하시느라 외롭고 힘드시죠? 가끔 홀로 주말에 천연계로 나가 하나님과 교제하십시오. 낚시도 하면서 쉼을 가지시고 여유를 되찾으세요.” (손 목사님은 이 당시 저의 회심의 경험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저는 제 귀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 손 목사님을 통해 낚시를 바치라 명령하셨던 하나님께서 우상을 바친 순간 똑같은 입술을 통하여 낚시를 허락하시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아~ 저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속해 가시는지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 이상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실 수 없으시구나! 우리가 전적으로 마음의 모든 우상까지 바칠 때, 우리 마음속에 우선순위를 바로 정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축복으로 허락하시며 구원해 가시는구나!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구나." 그 후 손 목사님과의 상담 중 이번엔 더 확실한 하나님의 호소가 들려왔습니다. 이번엔 제 마음에 품고 있던 더 큰 우상인 이성문제까지도 바치라는 음성이 들려왔던 것입니다. 목사님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나 여호와 하나만으로 만족할 수 없느냐? 너의 기쁨이 근원이 너의 취미냐, 너의 결혼이냐? 너는 도대체 너의 집을 어느 반석 위에다 짓고 있느냐? 오직 여호와로만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신앙을 소유할 수 없느냐?~ 너의 반석을 오직 나 여호와의 말씀의 기초 위에 두어 그 위에다 너의 집을 지어라~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환란 날에 모든 것이 바람에 흩날려 사라질 것이다~” 낚시라는 우상을 바치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는 줄을 깨달았기에 이런 음성이 주어진 즉시 저는 다시 하나님께 굴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자매 아니면 저는 안 됩니다.”했던 그 욕심과 이기심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그렇다면 이번에는 제 이성문제까지도.. 제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그 자매까지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치겠습니다. 그녀의 성품, 태도, 가치관 그리고 그 아름다운 마음 때문에 제가 사랑하게 된 그 자매까지도 제 고집과 의도대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뜻에 맡겨 두겠습니다. 제 힘과 의지로 그녀를 소유하려 했던 그 욕심마저도 모두 내려놓겠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인도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한 후 자매를 만나서 진실로 고백했습니다. “자매님 사실 제가 꿈꿔온 가나안은 자매님과의 안정적인 결혼 그리고 그 안정된 가정을 통해서 저의 삶을 즐기는 것, 그런 안락하고 평안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이러한 모든 소망이 저의 우상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하늘 가나안보다 이 땅에서 행복하고 달콤한 삶의 상상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자매님~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품고 있는 우상을 하나씩 내려놓으라고 하시네요. 이제는 자매님마저 마음에서 내려놓겠습니다. 정말 주변 환경을 통해 우리의 교제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저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가슴 아프지만 위와 같이 자매에게 진실로 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마음에 품고 있었던 우상을 하나씩 잘라내는 것이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런 일이 선재되어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축복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자매에게 용기를 내어 저의 결심과 상태를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앞으로 결혼을 하게 될지 안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리고 저의 취미를 계속 즐길지 않을지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만 지금 저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들이 더 이상 나의 우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하나님과 1대 1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의 믿음, 예수님의 믿음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이 모든 것이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다만 아브라함의 경험을 통해 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에 다시 한 번 온 몸으로 반응하고 그분이 인도하시고자 하는 데로 따라가고자 할 뿐입니다. 어디로 인도하시든 제가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만 하면 그분께서 저의 입술에 주실 고백은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일 것임을 제가 믿기 때문입니다. 진리 탐구_ 다시 생각해보는 출애굽 역사 1 <잃어버린 이름을 찾으세요 1> 다시 생각해 보는 출애굽 역사 1 여러분들은 종교영화의 최고걸작으로 꼽히는 1956년 작 찰턴 헤스턴 주연의 “십계”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의 핍박과 압제에서 벗어나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을 그린 성경 출애굽기의 내용입니다. 그 당시 홍해가 갈라져서 이스라엘 민족이 그 바닷길을 건너가는 장면이나 이집트군사들이 물에 빠져 멸망당하는 장면은 지금 보아도 장관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화의 특정장면들 때문인지 성경을 배우면서도 고착화된 생각에 벗어나지 못해, 이런 편견의 실수는 옳은 것을 보지 못하는 고정관념의 생각 속에서 자신의 영혼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자! 그럼 무슨 편견이 생겼을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만이 애굽에서 탈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 출애굽의 역사는 유대인의 이집트 탈출에 대한 역사입니다만 또 다른 한편에는 이방 민족의 출애굽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인적 구성인원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지만 성경은 다른 이방 민족도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회중에 섞여 있었음을 말합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100%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은 출애굽기 12장과 13장 말씀에 있습니다. 7년 환란 교리는 이스라엘 민족만 강조하다 보니 이러한 이방 민족의 출애굽 구원역사를 의미 없이 만들게 되는데, 이 의미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으나, 사실은 매우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놓치고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 중에 하나는 “이스라엘”이라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지칭하는 이스라엘은 구약성경에만 2,500번 이상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스라엘 회중”이 누구였는지를 성경적으로 확인해보면 놓친 그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말은 야곱의 12아들인 12지파의 자손들이며, 모두 혈연적으로 맺어진 “혈연공동체”인 가족구성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를 자세히 관심 있게 읽어보고 살펴보시면 이스라엘 12지파는 야곱의 열 아들과 요셉의 두 아들 지파로 구성되어 있는데, 실상 요셉의 두 아들은 야곱의 아들과 달리 이집트 어머니의 피를 가진 혼혈민족입니다. 또한, 성경에는 출애굽당시에 이방 민족이 함께 노예의 땅 애굽을 벗어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민족과 나라 구분 없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모든 사람이었습니다. “장래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찜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쌔” (출 13:14).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출 12:37,38). 이 말씀에서 “잡족”으로 번역된 “에레브(erev)라는 히브리어를 성경사전에서 찾아보면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을 뜻하는 말이며, 다시 말씀드려서 ”이방 민족“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느헤미야 13장 3절은 이 민족들을 “섞인 무리”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우리말 성경에서는 정확하게 “이방 피가 섞인 사람들”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님 구원의 역사는 특별한 민족 이스라엘을 통하여 성취되었지만 그 구원의 대상은 유대민족이나 이방 민족 모든 사람 누구나 시대와 민족의 차별이 없이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중요하지 않을 것 같지만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있어서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음 호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회사 Episode_ 알프스 왈덴스인들의 전사들 이교의 관습에 반대한 사람들 2 알프스 왈덴스인들의 전사들 - 헬비디우스, 요비니아누스, 비질란티우스 이탈리아 북부의 화려한 도시 밀라노는 서방의 셀틱 기독교와 동방의 시리아 기독교를 이어주는 가교였다. 밀라노는 동방에서 온 성직자들이 함께 모여서 수많은 회의를 하던 회합 장소였다. 이 때문에 안디옥과 밀라노와 골(Gaule, 프랑스)에 있던 교회들의 초기 예식들이 거의 동일하였다. 수 세기 동안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는 로마교회의 성직 계급 제도를 반대하였다. 흥미롭게도 교황권이 라틴 기독교에 새롭게 도입한 것에 대해 두드러지게 반대했던 세 사람은 모두 이탈리아 북부 출신이며, 이들은 헬비디우스, 요비니아누스, 비질란티우스였다. 교회 안에서 이교 관습에 항거한 사람 중에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헬비디우스 1세(A.D. 250~320경)였다. 헬비디우스보다 한 세기 반 전의 저스틴 마터나 적어도 한 세기 전의 터툴리안, 키프리안, 오리겐, 클레멘트 등의 저술들은 보존됐지만 헬비디우스의 저술들과 그에게 호의를 나타낸 글들은 모두 파기되었다. 헬비디우스는 성경의 가르침들을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형태로 전수하고자 애쓴 교회에 속해 있었다. 그는 제롬이 교황권의 라틴어 성경인 벌게이트역을 만들 때 잘못 전해진 헬라어 사본들을 썼음을 폭로한 것으로 유명하다. 만일 제롬이 헬비디우스를 탄핵하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더욱 적었을 것이다. 북부 이탈리아의 널리 알려진 개혁자 중 두 번째 인물은 비질란티우스의 선구자였던 요비니아누스(A.D. 330~390)였다. 그는 학문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박식한 교황권 지지자들이었던 제롬과 어거스틴과 암브로스가 연합 공격을 펼치고도 그의 성서적이고 역사적인 논증들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요비니아누스를 따르던 사람들은 알프스 산맥의 골짜기들에 피난처를 정하고 거기에서 12세기에 힘차게 다시 나타날 복음적 가르침의 생명을 지켰다. 요비니아누스는 성직자의 독신주의와 금욕주의, 성직 계급제도, 성모숭배 등에 반대하였다. 비질란티우스(A.D. 364~408)는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부에 거하던 고결한 왈덴스인들의 탁월한 초기 지도자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왈덴스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여긴다. 그의 시대에는 초기 교회에 스며들어온 이교 관습에 대한 저항이 점점 커져서 마침내 혁명적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 결과로 한때 성도에게 전해진 믿음을 유지하고자 갈망하는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서부에 살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조직체를 이루었다. 오직 성경에 기초한 진리만을 갈구하며 교회에 스며든 이상한 미신적 행위들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성경에 근거한 비질란티우스의 명쾌한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다. 비질란티우스는 “종교개혁의 선구자” 또는 “우리 개신교의 초기 선조들 중 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다. 국가와 연합하지 않은 교회들의 이 새 지도자는 자신의 인생을 사본들을 수집하는 일과 성경을 유포시키는 일, 전도지들과 책들을 쓰기 위해 필기자들을 고용하는 일을 위해 사용하였다. 골 출신의 이 개혁자가 공공연히 책망한 교리들과 행위들은 독신주의, 유물숭배, 촛불 점화, 철야기도, 죽은 자들에게 하는 기도 등이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알프스 교회들은 로마 교황권의 미신적인 새 히스테리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았다. 교황권이 때때로 왈덴스인들에게 박해를 자행할 때마다 그들은 이 지역의 “이단”이 비질란티우스의 무리와 같은 존재임을 선포하였다. 두 세기 후에 중세의 저술가들은 밀라노의 주교인 클라우드가 비질란티우스의 “독”에 감염되었다고 하며 그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당시에 아일랜드 교회를 확장하고 있던 아일랜드의 패트릭이 분명 중서부 유럽에서 일어난 이 개혁 때문에 큰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남부 유럽의 비질란티우스는 그와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패트릭처럼 광야 교회 초기의 빛나는 별 중의 하나로 여김을 받을 수 있다. 이교의 관습에 반대한 사람들 다음 호에서 계속 살펴보자. Healing Story_ 자외선 5월부터 시작된 폭염과 7월의 마른장마로 그 어느 해보다 뜨겁고 메마른 여름을 보내고 있는 듯합니다. 가뭄으로 가늘게 말려있는 옥수수잎을 보면서 죄로 인해 신음하는 피조물을 봅니다. 오늘은 햇빛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햇빛은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모든 생물의 생명존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요. 그런 햇빛을 선크림을 바르며 차단하기도 하고 일부로 건강을 위해 쬐기도 합니다.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가시광선의 파란색이나 보라색 광선보다 더 짧은 파장을 가진 자외선 (UV : ultra violet) 때문입니다. 자외선은 UV-C, UV-B, UV-A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합니다. (1) UV-C : 염색체 변이를 일으키고 단세포 유기물을 죽이며, 눈의 각막을 해치는 등 생명체에 해로운 영향을 줍니다. 다행히 오존층에 완전히 흡수됩니다. (2) UV-B : 피부 표면에 침투해 화상을 일으키고 피부를 까맣게 태우기도 하며 피부암 발생의 주된 원인이 됩니다. 하지만, 피부에서 프로비타민 D를 활성화해 인체에 필수적인 비타민 D로 전환하기도 합니다. 대부분 오존층에 흡수되고, 일부가 지표면에 도달합니다. 태양 빛이 강한 여름철 정오에서 4시 사이에 가장 많고, 집안과 같은 실내에는 들어오지 못합니다. (3) UV-A : 오존층에 흡수되지 않으며, 커튼이나 유리창을 통해 실내로 쉽게 들어오기 때문에 어느 곳이든 안심할 수 없습니다. 피부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멜라닌 색소를 자극하면 멜라닌 색소가 많이 만들어져 피부에 검버섯이나 기미가 생기게 됩니다. 또한 잔주름이 생기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자외선 B는 햇빛에 노출된 지 몇 시간 만에 피부의 그을리거나 붉어지는 반점으로 쉽게 알 수 있지만, 자외선 A는 오랜 시간에 걸쳐 더디고 지속해서 기미, 검버섯, 주름 등의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자외선에 대한 오존층의 역 이미 많이 알려진 대로 오존층은 태양광선 중 자외선을 차단함으로써 사람을 비롯한 지구 상의 생명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 오존(O3)은 산소 원자 3개로 구성된 비교적 불안정한 분자로,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산소의 일종입니다. 오존은 독성이 강해서 공기 중에 극소량만 섞여 있어도 인간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히는 반면, 대기 중에 있는 오존은 태양에서 오는 자외선을 차단해 주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체입니다. 그러므로 지구에 오존층이라는 차폐막이 없어지면 자외선이 지표까지 도달하여, 지상에는 생물이 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기오염이 심해지면서 오존층이 파괴되어 자외선을 차단하는 능력이 떨어지면서 지표면에 도달하는 자외선의 양은 증가하여 사람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자외선은 우리 건강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과연 한여름 뜨거운 햇볕은 화상을 입히기도 하고, 목마름과 피부를 검게 그을게도 하는 등 우리에게 반갑지 않은 친구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햇빛을 무작정 가리는 것도 올바른 방법은 아닙니다. 적절한 시간에 적당히 햇빛을 쬠으로 그 어느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큰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빙산의 일각과 같은 유해함으로 인해 빙산 밑의 어마어마한 유익을 잃게 되는 일이 없어야겠지요? (1) 혈압이 높은 사람에게는 혈압을 낮춰주고 저혈압이 사람에게는 혈압을 높여줍니다. 영국 한 대학에서 성인 24명을 대상으로 햇빛을 쬐게 하고 혈압을 재 보았습니다. 자외선을 차단했을 땐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자외선을 함께 쬐고 나자 혈압이 떨어졌습니다. 자외선을 쬐고 15분만 지나도 혈관 면적이 68%나 넓어지기 때문에 혈압이 떨어지는 겁니다. 자외선이 피부에 있던 '산화질소'를 혈관 속으로 끌고 들어가 혈관을 넓히도록 활성화 시켰기 때문입니다. 혈관 확장 작용으로 혈압이 감소하게 되면 심장이 받는 부담이 감소하고, 협심증을 포함한 모든 심혈관계 질환에 이로운 작용을 하게 됩니다. (2) 심장의 수축력을 강화하여 심장이 한 번 수축할 때에 방출되는 혈액량을 증가시켜 줍니다. 심장은 수축하고 이완되는 사이에 잠깐 쉬는데 그 사람의 심박 수가 낮아지면 심장이 크게 과로하지 않고도 혈액에 실려서 공급되는 영양소와 산소를 세포와 장기에 듬뿍 전해줄 수 있게 됩니다. (3) 수두 바이러스를 약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수두 바이러스가 강해질 때 대상포진이 반복해서 재발하기 때문에, 의료계는 대상포진 예방 연구에 자외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4) 우리 몸의 면역과 호르몬을 조절하는 비타민D 합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아침 햇살을 놓치지 마십시오 (1) 아침 햇살이 넓게 퍼지기 전에 우리 눈동자에 비추어 들어오는 햇살은 여러 가지 유익을 줍니다. 특히 해외출장이 많아 시차 적응이 힘드신 분들과 노인들에게 더욱 권하고 싶습니다. 아침에 안경과 렌즈 없이 동쪽 하늘을 향하여 서십시오. 그리고 그 은은한 햇살이 여러분 눈동자를 통해 들어와 송과체를 통과하도록 하십시오. 면역력 증가와 시차 적응을 쉽게 해주고, 멜라토닌 분비로 인해 불면증과 우울증 치료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2) 우리 몸의 군인인 백혈구와 림프구 등을 활성화해서 면역을 증진해 줍니다. (3) 따뜻하면 혈관이 이완되고 온몸의 혈액순환이 좋아지므로 산소를 세포에 공급해주는 능력이 증가합니다. (4) 정서적으로 안정시켜 주는 일을 하며 적외선이 피부 안에 축적되므로 밤에 잘 때에 어깨나 등이 훈훈합니다. 그것은 우리 몸을 이완시켜 주며 숙면을 도와줍니다. (5) 자외선도 우리 몸에 축적되어 있어서 자는 동안에 우리 몸에 파괴할 것은 파괴하고 배설할 것은 배설시켜서 세포를 활성화하고 신진대사에 필요한 효소가 극대화로 일하게 합니다. * 자외선 차단제 요즘 같은 날씨라면, 피부에 미치는 악영향과 이런 좋은 효과들을 함께 고려해서 하루 20분 정도 햇볕을 쬐는 게 가장 좋습니다. 그렇다면 자외선 차단을 위한 선크림을 바르는 것은 어떨까요? 자외선 차단제가 피부암에 효과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해결책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몸에 피부암 발병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규칙적인 생활습관 말입니다. 자외선 차단제는 피부에서 자외선을 반사하는 방법으로 자외선을 막아내는데, 피부에 일종의 보호막을 씌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지 않는다면 헐렁한 옷이나 진한 색 옷을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면 자외선 차단 효과가 크다고 합니다. 신앙 칼럼_ 의인과 악인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성경은 우리에게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지만 악인은 재앙이 닥치면 그대로 넘어져 버린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마치 의인은 시련 앞에 굴하지 않는 성공한 삶을 살지만 악인은 그렇지 못한 실패자란 뜻으로 들립니다. 인생의 낙오자가 되어 엎어진 것도 불쌍한데 악인(the wicked)이라는 오명까지 집어쓴다면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이 가르침은 보다 심오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 실패자가 악인이 되는 이유는 고난과 시련이 왔을 때 일어서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의인은 고난과 시련이 닥치면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엡 6:11) 일어나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은 사탄의 시험에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아니 넘어졌다 해도 회개하고 다시 일어납니다. 사탄의 시험과 도전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일 뿐’이라는 자괴감에 빠져 있다면 그는 분명히 악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분의 뜻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습관에 젖어 빠져나올 줄을 모릅니다. 그러다 인생의 패배자가 되어 세상이 휘두르는 대로, 사탄이 흔드는 대로 삽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어떤 시련과 절망에 도 굳건한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는 삶을 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부정과 끝없는 무지와 고정관념에 맞서야 합니다. 자기 혁신이 없는 독선적 신앙태도에서 벗어나 성경이 말하는 진리에 얼마나 충실해 있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품은 자는 결코 절망할 수 없는 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나는 의인인지? 악인인지?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