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소(無名簫)] 길 위에서 길 찾기(23)
약(藥)이 독(毒)이고, 독이 약이라더니,
독을 이용한 당문의 의술은 실로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고,
그중에서도 당지황의 용독술(用毒術)은 발군(拔群)이었다.
당지황의 약속처럼 진우명은 이틀 만에 의식을 완전히 회복했고,
사흘째는 손상된 공력도 모두 되찾았다.
그의 빠른 회복에 가장 기뻐한 사람은 당지연이었고,
그의 빠른 회복을 짐짓 아쉬워한 사람도 당지연이었다.
의식을 잃은 이틀 동안 당지연은 내내 진우명의 곁에 붙어 살다시피
했다.
그래서 진우명의 안전을 이유로 당문에 머문 수라마인은
그 이틀 동안 이리저리 쫓겨 다녀야 했다. 당지연과 진우명에게서만
쫓겨난 게 아니고, 그는 당문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이곳저곳에서
쫓겨났다.
쫓겨날 때마다 그는 자주 불평을 터뜨렸는데,
그 이틀 동안 당문 사람들이 까마귀 울부짖음 같은 소리를 들은 것은 총
아홉 번이었고, 그 아홉 번 중 네 번은 당가이십독의 연무관에서 들려왔다.
“신세를 졌습니다.”
진우명의 말에,
“공자님께 제가 입은 은혜를 갚자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당지연의 대답이었다.
“신세를 지기로 말하자면 어찌 당지연 낭자뿐이겠소?
여기 당지황선생도 계시고, 당문의 많은 약초와 독초도 계시고,
무엇보다 당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나도 있지 않소?”
수라마인이었다. 진우명이 수라마인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언제가 되든 이 빚은 꼭 갚겠소이다.”
“어허… 빚이라니…요. 그러면 이 몸이 꼭 빚쟁이가 된 것 같지 않소?”
“그런데 어떻게 이곳엘 올 생각을 한 거요?”
“그야 독에 당했으니 독의 명가를 찾아야 할 거 아니겠소?
나도 그 정도 생각은 할 줄 아는 사람이오.”
“아니, 그게 아니라 어찌 당지연 낭자를 알고 있었냐는 얘기요.”
수라마인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내가 총각이오. 그래서 무림세가의 미인들 정보는 내 꿰차고 있는 사람이오.
그러니 어찌 당지연 낭자를 모르겠소? 이리 미인이신데?”
당지연이 나섰다.
“총각이셨군요?”
수라마인이 얼른 가로챘다.
“아니, 그 의아스럽다는 표정은 무슨 뜻인 거요? 내가 중늙은이 같소이까?”
“아니 그게 아니고요. 진공자께서 물으시는 뜻은
어떻게 저와 진공자의 관계를 아시고 이곳 당문을 찾아 오셔서 제 이름
을 부르셨냐는 거죠. 제가 그간의 일을 진공자님께 다 말씀드렸거든요.”
수라마인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하. 그게 궁금했던 것이구료. 별게 다 궁금하기도 하지.”
수라마인이 진우명을 쳐다보며 말했다.
“기억나지 않으시오? 지난 가을 무림대회 때 동정루에
당지연 낭자와 함께 있지 않았소?
그때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싶어 봐뒀거든.”
진우명이 최대한 냉랭함을 배제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다고 해도 얼핏 듣기엔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그날 동정루 삼층 객잔에 당신은 없었소.”
“내가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소?
당신의 기억력을 당신을 구해 준 사람의 얘기보다 더 신뢰한다는 거요?”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내가 보는
이 얼굴의 사람은 그날 그 곳에 없었다는 거요.”
수라마인이 까마귀 날아가는 듯한 목소리로 웃어 제쳤다.
“당연히 이 목소리도 그날 그 자리엔 없었겠구만.
당신의 기억에는 말이오.”
그가 잠시 말을 그치고 진우명을 바라봤다. 그리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난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단 말이오.”
[무명소(無名簫)] 193-길 위에서 길 찾기(24)
옥룡장, 금붕각.
사마전은 신지기인과 차 한 잔을 나누고 있었다.
“내일이면 무림맹에서 차를 드시게 되겠군요.”
신지기인의 말에,
“오늘과 같은 차 맛은 아니겠지요.”
사마전의 대답이었다.
“그런데 신지기인,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 거요?
이 길이 맞는가 말이오?”
신지기인이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가만히 사마전을 바라봤다.
평상시 같았으면 부드러운 웃음 하나라도 그렸을텐데,
신지기인의 표정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신지기인의 그 담담한 표정을 역시 담담하게 사마전이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 앞에 놓인 찻잔에서 뜨거운 김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아마도 이 길의 끝에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표정 하나 흐트러짐 없이 신지기인을 바라보던 사마전이 담담하게
물었다.
“이 길을 가지 않는다면?”
“그 역시 파멸이지요.”
“흠… 그럼 난 지난 이십 오년 간 그저 파멸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란 말이오?”
“아니지요. 훨씬 빨리 왔을 수 있을 파멸을 늦추고 약화시키고
제거하셨지요.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그런 파멸이 저 끝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뿐이지요.”
“신지기인, 혹시 나는 잘못 해왔던 것이오?”
신지기인이 사마전의 진지한 표정을 바라보며 이윽고 웃었다.
“신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아마도 맹주께서 걸으셨던 그 길이 정도였겠지요. 다만….”
“다만…?”
“인간이란 동물은 터무니없이 단순하면서도 또한 끝도 없이
복잡해지고, 그 인간들이 모여서 만든 인간세상이란 건 더 더욱이
순리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서 말이지요.”
사마전이 곰곰 무엇을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옥룡장의 장주로 살아가면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더랬소.
맹주의 권력으로 이 일을 하면 훨씬 더 낫지 않을까…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응당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신지기인은 가만히 사마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왕적 무림맹주의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았을 것이오.
그 강력한 힘으로 통치한다면 무림의 사사로운 분쟁도 훨
씬 줄어들 것이고, 감히 혈겁을 꿈꾸는 자들도 나타나지 않았겠지요.”
사마전이 잠시 말을 끊고, 신지기인을 마주 바라봤다.
신지기인의 입가에 미소 하나가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진정한 평화는 아닐 것이오.
통치로부터가 아닌 각성으로부터 진정한 평화는 시작되는 것 아니겠소?
나는 그것을 원했던 것이오.”
신지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의 그 뜻을 알고 있었기에, 이 신지 역시도 그 길을
걸어왔던 게지요.
워낙이 이런 것은 신지의 방식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신지기인이 웃으며 말하자 역시 웃으며 사마전이 물었다.
“신지기인의 방식은 어떤 것이오?
사실은 난 늘 신지기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면서 일을 처리해 왔는데 말이오.”
신지기인이 사마전을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저는 인간을 그렇게 신뢰하지를 않습니다, 장주어르신
. 그저 믿을 사람은 믿고 믿지 못할 자는 믿지 않지요.
인간에 대해서 저는 두 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 인간이란 동물은 참으로 약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유혹에 약하고 공포에 약하지요.
그래서 이 두 가지를 가지고 흔들어대면
대개의 인간이란 다 흔들리게 되는 것이고요.”
유혹과 공포이듯 신지기인은 손가락 두 개를 흔들어 보였다.
“또 하나의 생각은 무엇이오?”
그 두 개의 손가락을 지켜보며 사마전이 물었다.
[[무명소(無名簫)] 194-길 위에서 길 찾기(25)
“인간에 대한 또 하나의 제 생각은… 인간은 참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누군가가 먼저, 생각의 단초를 심어두면
그것이 자기의 생각인양 상대의 뜻에 휘둘리게도 되는 것이지요
. 물론 그러기 위해선 그 유혹과 공포를 잘 사용해야겠지만 말입니다.”
“신지기인의 생각을 나는 언제나 존중하오만, 휴우~.
신지기인의 그 생각이 맞는 거라면 그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겠구료.”
신지기인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기에 각성(覺醒)하는 무림인을 생각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무림인이 각성할 때 무림에 진정한 평화가 온다…
저는 장주 어르신께서 그 믿음으로 주어진 권력도 내버리시고
무림인들 속으로 들어오신 걸로 알았는데요….”
웃으며 신지기인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하기에 이 신지 역시도 그 이십오년의
세월을 어르신과 함께 해 온 것이고요.
그러니까 어르신의 그 길은 당연히 옳은 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성정이 그러하기에 그 길의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자칫 파멸일 경우가 더욱 가능성이 높은 것이고요.”
사마전이 끄덕였다.
“알겠소. 아마도 난 지나치게 인간에 대해서 낙관(樂觀)을 한 듯 싶소.
그 낙관 때문에 파멸이 올 수도 있는 거라면 당연히 주의를 해야겠지요.”
사마전이 이제는 다 식은 찻잔을 입술에 대었다.
한 모금 녹향차를 음미하던 사마전이 다시 찻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각성이란 왜 그렇게 힘든 걸까요?
유혹과 공포에 휘둘린다는 이유만으로 각성이
그렇게 힘든다는 건 너무나 슬픈 일 아닌가 싶어서 말이오.”
신지기인도 찻잔을 내려놓았다.
“익숙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어르신. 아예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찾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일
수가 있습니다.
정히 길이 없다면 만들면 되니까요.
그 저 걸음으로써 그게 길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길 위에서 길을 찾기가 어려운 겁니다.
내가 찾기도 전에 이미 길은 열려 있으니까요.
그저 그 길 위에서 좀 더 빠르거나 편한 길만 찾으면 되는 거니까요.
익숙함이란 건 그렇게 또 하나의 길이 되어서,
정작 우리가 찾아야 할 길을 없애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익숙함이라….”
나직히 사마전이 중얼거렸다.
“각성한다는 것은,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지요.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길을 찾은 것이고요.”
사마전이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이었구료. 이십오 년의 세월 동안
나 역시 그저 내 바램에만 익숙해져 왔던 것 같소. 그래서 그
길을 잃어버린 것 같고.....”
신지기인이 고개를 저었다.
“훗날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사마 전이란 사람과 함께
한 시대를 살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를....”
사마 전이 신지기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이
쓸쓸했다.
“고맙지만 듣기가 참 부끄러운 말씀이구료.”
사마 전이 다 식은 녹향차를 들어 마셨다
그리고 그는 일어서서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을 열자 바람이 한 점 불어왔다. 아직은 차가운,
그러나 살을 에일듯한 날카로움은 사라진 그런 늦겨울
바람이었다.
“봄이 머지않았나 봅니다. 바람에 봄기운이 실려 있구료.”
신지기인도 일어서서 창가로 걸어오며 말했다.
“봄이 멀지 않다는 건 겨울이 깊었다는 걸 뜻하기도 하지요.”
창을 통해 바람하나가 빠져나와 신지기인을 향해 불어왔다.
[무명소(無名簫)] 195-길 위에서 길 찾기(26)
당문의 수호목(守護木) 앞에도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허나 그 바람보다 당지연의 마음에 부는 바람이 더욱 혹독했다.
차라리 보지 않을 때는 그저 그리움뿐이었는데,
이제 사흘 간의 만남이 있고 보니,
그리움은 한올 한 올이 다 잘 벼뤄진 칼날이었다.
이 사흘 간 내내 그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밤이 오지 않기를 빌었고,
밤부터는 어서 아침이 오기를 조바심 냈다.
그리고 그러면서 사흘, 시간으로 서른여섯 시진을 잠들지조차 못했다.
긴 긴 겨울밤을 잠들지 못하고 지새는 것이
그러나 그녀에게 힘들진 않았다.
그 하루 진우명과 함께 한 모든 정경들을 되새겨 보는 것만으로도 밤은
짧았다.
진우명의 회복을 지켜보는 것,
그가 자신이 쑤어준 미음을 먹는 것을 쳐다보는 것
, 운기조식 할 때의 눈감은 수려한 그의 모습을 마음 놓고 바라보는
것.
이 사흘 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그녀는 알았고,
보았던 그 광경들을 하나하나 되새긴다는 것의 즐거움을 그녀는 배웠다.
그리고 오늘 그녀가 배우게 된 것은,
사람은 행복했던 기억들로 인해 더욱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 숲을 나가기 전에 이 환단을 삼키게. 물론 자네들은
초고수이니만치,
이 정도 독이야 상관없겠지만,
그래도 자네들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해버리면,
우리 당문이 좀 쪽팔리지 않겠나?
그래도 명색이 독중지가(毒中之家) 당문인데 말일세.”
당지황이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어서 드시지요. 안내하겠소이다.”
당지연의 마음엔 전혀 아랑곳없이 당철이 이별을 재촉하고 있었다.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당지연의 마음을
자신은 알고 있다는 듯 문득 수라마인이 말했다.
“근데 당소저께서도 이참에 강호주유나 해 보심이 어떻겠소?
여기 진공자도 완치라고는 하나 아직은 부실한 것 같으니,
일정 부분 동행하면 서로가 좋지 않겠소?”
수라마인의 제안에 당지연은 저도 모르게 진우명을 쳐다봤다.
“내가 가는 길은 도처에 위험이 깔려있는 길이오. 그래서 아니 되오.”
진우명의 차가운 대답이었다. 수라마인이 진우명을 힐끗 째려보며
말했다.
“어허! 사람마다 다 취미가 다른 법이란 말이오.
위험한 길 가는 거 취미인 사람 있다니까? 어떻소? 당소저?
소저도 혹 그런 취미 안 가지고 있소?”
당지연이 다시 한 번 진우명을 쳐다보곤 가만히 말했다.
“저는 그런 취미가 없어요. 그럼… 여기서….”
당지연이 고개를 숙이자 진우명도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당철이 얼른 숲길로 들어섰다.
무슨 놈의 작별이 이렇게나 긴지 그는 조금 지쳐있는 중이었다.
진우명이 당지황에게 포권을 취하고선 돌아서서 숲길로 들어섰고,
잠시 당지연을 바라보던 수라마인도 따라 들어섰다.
당지연의 눈에서 그제서야 눈물이 흘렀다.
숲을 빠져나오자, 당철은 인사도 없이 도로 숲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라마인이 말했다.
“그놈 참, 인사성하고는… 사람일 적에도 저랬을까?”
진우명이 돌아봤다. 무슨 소리냐는 듯한 눈길로.
수라마인이 진우명을 한 번 쳐다보고선 퉁명스레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굳이 당소저를 데려가라고 했을 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소?
그런데도 당신은 굳이 거절을 하더만. 당신과 함께 가는 길이
위험하다고.”
설레설레 고개 저으며 그가 덧붙였다.
“내 장담컨데, 그녀는 지금이라도 당문을 빠져나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사람으로서 남을 수 있는 길 일거요.
당문은 지금 위험 그 자체란 말이오.”
진우명이 고개를 돌려 당문 쪽을 바라봤다.
당문은 숲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