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넘은 시간에 건장한 남자들이 젊은 여자 둘을 데리고
별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그 별장은 보통 별장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자 서두르자.”
유선우는 지금 막 여자를 데리고 사내들이 들어간 그 건물이
백악관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걸음을 서둘렀다.
지운도 그런 확신이 섰는지 비탈길을 뛸듯이 올라갔다.
가까운 곳에 있는듯 하면서도 백악관 건물은 꽤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형, 봐요. 여기 가까이 와서 보니까 과연 흰 건물인데요.
허투로 백악관이란 이름을 붙인 거 아니군요.”
지운이 걸음을 세우면서 유선우에게 말했다.
“올라가기 힘드니?”
“아뇨. 저쪽에 도로를 가로 질러 올라가는 지름길이 있는 것 같은데요.”
지운이 손전등을 꺼내 나무숲 사이를 비추었다.
숲 사이에 좁은 지름길이 나 있었다.
“너, 망원경만 준비한 줄 알았더니 손전등도 가져 왔구나.”
“밤이니까 이것도 필요할 것 같더라구요.”
“잘 했다.”
“또 칭찬인가요?”
“들을만한 일 했으까.”
지운이 소리없이 웃고는 손전등을 비추며 지름길로 들어섰다.
“조심하세요. 길이 험해요.”
“불빛 보이지 않게 전등을 숙여.”
“알고 있어요.”
손전등을 든 지운이 앞을 서고 유선우가 뒤를 따랐다.
지름길로 오르자 금방 백악관 정문 앞에 있는 전주 옆으로 나설 수 있었다.
그곳에는 외등이 켜져 있어 사람이 나타나면 건물 안에서 볼 수 있도록 돼 있었다.
“아직 문앞으로 접근하지 마라. 지리를 좀 살펴야겠다.”
“너무 조용하지요?”
“글쎄….”
“그런데 아까 별장 입구에 세운 승용차가 안 보이는군요.”
“차고가 따로 있는 모양이다. 아마 밖에서 눈에 띄지 않게 차고에 넣어 버렸을지도 몰라.”
“그랬을 것 같군요.
아무래도 정문 쪽에서 접근하는 것은 안에서 너무 잘 보여 어려울 것 같구….
형 생각은 어때요, 뒤로 돌아가 보는 것이.”
“나도 지금 그 생각 하는 중이다. 예상했던 것 보다 별장 대지가 넓어 보인다.
별장 뒷쪽으로 돌아가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찾아 보자.”
별장 앞으로 난 도로의 아래턱 비탈을 타고 두 사람은 별장 뒤로 돌아갔다.
별장 뒷쪽은 바로 산비탈로 이어져 있어
나무숲에서 내려다 보니 뒷마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군데 군데 보안등이 있었으나 두어 군데만 불이 켜져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라 일부러 꺼둔 것 같았다.
“형, 봐요. 차고가 저쪽 건물 옆에 있어요.”
유선우는 지운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속으로 그럼 그렇지를 연발했다.
꽤 넓은 차고였다.
승용차가 차고 밖에까지 주차해 있었으나
정문에서는 보이지 않게 차고 옆이 관상수로 덮여 있었다.
“고급 승용차가 여러 대 서 있잖니?”
“스무 대도 넘겠는데요.”
지운도 적이 놀란 어조였다.
“이 별장에 여러 사람이 와 있다는 증거야.
그것도 밤이 깊었는데 말이다.
이것만 가지고도 이 건물안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니?”
“영화 촬영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영화 촬영중이라면 이렇게 조용할 리 없지.
차고에 고급 승용차가 늘어서 있을 리도 없구.”
“그럼 무슨 일일까요?”
“몰라. 다만 우리가 보게 되면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허풍도에게서 얻은 정보인가요?”
“약간은. 자, 차고쪽으로 돌자.”
유선우와 지운은 별장 측면에 자리잡고 있는 차고쪽으로 돌아갔다.
그쪽은 승용차들이 눈에 띄지 않도록 외등을 밝히지 않은데다 차고의 낮은 지붕이
산비탈에서 타고 내려가기 쉬운 구조로 돼 있었던 것이다.
유선우가 먼저 차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운이 뒤따라 올라와 지붕위에 엎드리며 물었다.
“개 같은 게 없을까요?”
“글쎄…, 풀어놓은 개가 있었다면 지금쯤 우릴 발견했을 거야.
아직까진 개가 있는 징후는 없어.”
“만일 맞닥뜨리면 어떻거죠? 난 개가 무서운데.”
“도망치지 마.”
“물텐데요.”
“개가 사람에게 으르렁거릴 때는 함께 으르렁거려 주면 돼.
그렇게 하면 개도 함부로 물지 못해.
대부분 개에게 물리는 사람들은 등을 보이고 도망치다 물리는 거야.
사람들이 으르렁거리는 개가 무섭듯이
개도 사람이 마주보고 공격 자세를 취하면 두려워지는 거지.”
“형은 어떻게 개에 대해 그렇게 잘 알아요?”
“개 키우는 사람들에게 들었어.”
그때 지운이 앞마당 쪽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저기 봐요. 누가 나왔어요.”
앞마당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나 어정거리는 것이 보였다.
사내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는 마당을 거닐면서 급하게 담배 연기를 몇 모금 빨고 나더니
정문 쪽을 한번 돌아보고 다시 별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내는 무슨 일을 하다가 잠깐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밖으로 나온 사람 같았다.
밖을 살피기 위해 나온 사람이라면 그렇게 급하게
담배만 한 대 피우고 실내로 들어가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경비 보는 녀석은 아닌 모양이다. 일단 지붕에서 내려 가자. 내 뒤만 따라와.”
차고 건물 옆에 서있는 자작나무 가지가 지붕으로 뻗어 있었다.
“이 나무를 타고 내려간다.”
유선우가 먼저 자작나무를 타고 땅으로 내려간 후 지운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지운도 나무를 타는데는 그다지 서툴러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작나무 뒤에 숨어서 별장 건물 뒷쪽에 있는 층계에 시선을 모았다.
차고쪽에서 별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면 그 층계를 이용해
뒷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손쉬울 것 같았다.
“저 뒷문 보이지?”
“글루 갈 건가요?”
“그래.”
“몸을 낮추고 따라와. 빠른 걸음으로 가야 한다.”
두 사람은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빠르게 뒷문 층계 쪽으로 접근해 갔다.
뒷문 유리를 통해 실내의 불빛이 새어 나왔으나
실내의 조명이 먼 거리에 있는지 밝은 편은 아니었다.
유선우는 층계 밑에 서서 일단 안의 동정을 살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안에 있는 모양인데 너무 조용하다. 너, 무슨 소리 들리니?”
유선우가 지운에게 낮은 소리로 물었다.
“아무 소리도.”
“그게 이상하단 말야. 이제부터 실내로 들어갈 거니까 내 뒤에 바싹 붙어.”
“들키면 어떻거죠?”
“해치워야지.”
지운은 그 말이 믿기지 않는지 유선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수가 많으면 어떻거죠?”
“피하는 게 좋겠지만, 그럴 수 없을 땐 맞선다. 넌 내가 시키는대로만 해.”
“어떻게요?”
“사태가 불리하면 내가 너부터 피신 시킬 거니까 정문으로 나가란 말야.”
“그런 다음 어떻게 하죠?”
“숨겨둔 자동차로 달려가.”
“나만 도망가란 말예요? 그럼 형은 어떻게 하구요?”
“내 일은 내게 맡겨 두면 돼. 넌 시내로 들어가 라면집에 가 기다리란 말야.”
유선우는 나무 층계로 올라갔다.
지운이 뒤따라 나무 층계를 올라왔다.
유선우는 뒷문 유리에 얼굴을 갖다 붙이고 안을 살폈다.
뒷문은 바로 복도로 통해 있는데 그 복도에 불이 꺼져 있었다.
실내의 불빛이 침침해 보이는 것은 이 복도의 불이 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침침한 복도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 복도 끝은 한 방문으로 통해 있는 것 같았는데
그 방에선 무엇을 하는지 조금 밝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유선우는 그 방에서 뭔가가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복도로 들어갈 수 있는 이 뒷문이 열려 있느냐이다.
조금전 한 사내가 앞쪽의 출입문을 통해 마당으로 나온 걸 보면
뒷문도 열려 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 유선우가 뒷문을 당겼을 때 그 문은 뜻밖에 너무 쉽게 열렸다.
오히려 누군가가 유선우의 잠입을 미리 알고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일부러 열어 둔 것처럼 쉽게 열렸던 것이다.
유선우는 일단 함정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담았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함정에 빠져 붙들리는 경우가 생긴다 해도
만만하게 손을 들 생각은 아니다.
문을 소리없이 열고 복도로 들어서면서 뒤에 붙어 따라오는
지운에게 소리를 내지 않도록 손으로 신호를 했다.
복도는 길지 않았다.
그것은 이 별장 건물안에 있는 여러 개의 방으로 통하는 통로로 돼 있는 것 같았다.
복도를 끼고 방이 몇개 있는 것 같았으나 대부분의 방에는 불빛이 없었기 때문에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유선우의 걸음을 더욱 신중하게 만들었다.
유선우는 몸을 낮추고 고양이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면서
지운에게 손전등을 내주도록 속삭였다.
지운이 주머니에 넣어둔 손전등을 넘겨 줬다.
복도의 첫번 째 방문 앞에서 유선우는 허리를 구부린 자세로 방문을 슬며시 밀었다.
문은 소리없이 열렸다.
잠시 어둠에 눈이 익기를 기다렸다가 방안을 보았으나 그 방은 빈 방이었다.
손전등을 켜 방안 이 구석 저 구석을 비춰 보았다.
사람이 기거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오랫동안 비어 둔 방으로 보였다.
그러나 방 한쪽에 놓여 있는 탁자와 시트에 손전등을 비춰 봤을 때
그것이 속단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방에 조금전 사람이 들어왔었다는 증거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잿털이에 담배 꽁초 두개가 버려져 있었는데
손전등을 비춰 보니 필터에 묻은 침이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더구나 꽁초 가운데 하나는 거의 3분의 1밖에 태우지 않은 긴 꽁초였고
게다가 흰 필터에는 입술 연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이 방은 사람이 기거하는 방은 아니나 방금전에
한쌍의 남녀가 들어와 이야기를 하다 나간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렇다면 밝은 불빛이 흘러나오는 복도의 끝방에서 뭔가를 하던 중에
두 남녀가 이 방으로 빠져 나와 잠깐 쉬었다 갔거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간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유선우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 빈 방에서 나왔다.
지운이 유선우 앞에 검지와 중지를 세워 보였다.
두 사람이 방에 있었던 게 아니냐고 묻고 있는 제스처였다.
유선우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복도끝을 향해 손짓을 해보였다.
그쪽으로 간다는 표시였다.
복도에 면한 방이 둘 더 있었으나 유선우는 곧장 복도끝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섰던 것이다.
불빛이 밝게 새어 나오는 복도 끝방으로 접근해 갔다.
혹 인적기가 느껴질지 몰라 귀청에 온 신경을 모았으나
이상스럽게 무거운 침묵만이 그곳을 덮고 있었다.
유선우는 그것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곳이라면 그 방안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
차라리 마음 놓고 접근해 가기 좋다.
그런데 너무 조용한 것이다.
그 정적이 아무래도 불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에 바싹 몸을 붙이고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앞으로 다가가면서
유선우는 여차하면 찌르기로 상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지운이 유선우가 하는대로 벽에 몸을 붙이고 뒤를 따라왔다.
그런데 그때였다.
등뒤에서 인적기가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건장해 보이는 장정 둘이 유선우와 지운의 뒤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유선우는 순간적으로 두 녀석을 때려 눕힐까 생각했으나
다음 순간 그것이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이 별장 건물에 와 있는 것은 저런 녀석들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어님의 행방을 빨리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이쪽의 정체만 드러날 뿐
어님의 행방을 알아내는데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선우는 얼른 자세를 고쳐 허리를 펴고 마치 이 별장 건물에 출입하는 사람처럼
지운에게 말했다.
“차는 차고에다 넣었지?”
“녜?”
지운이 당황한듯 되묻다간 유선우의 의도를 알아 차리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차고에 넣었는데요.”
“그래? 그럼 됐어. 끝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까.”
뒤따라 오던 두 사내가 유선우와 지운의 대화를 듣고 이들이 누군가 하고
가까이 와서는 유선우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그러더니 그중의 한 녀석이 말했다.
“세일 기획에서 오셨나본데 늦으셨군요.”
세일 기획? 유선우는 이걸 이용하자고 마음 먹었다.
“녜, 조금 늦었습니다.”
“그럼 같이 들어가시죠. 오늘밤 쇼는 여러분들이 직접 봐야만 된다는 겁니다.
우리 사장님 말씀이지요.”
“아, 그래요? 사장님이 이번 일에는 상당히 기대를 하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그럼요. 모처럼 섹스 쇼를 공개 촬영하는 마당이니 기대를 걸만하지요.
아무튼 여러분들이 많이 협조를 하셔야 합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요. 저희도 이번엔 잘 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자, 가시지요. 쇼는 지하 공연장에서 합니다.”
“아, 그렇군요. 먼저 들어가시죠. 저희는 화장실 다녀서 입장하겠습니다.”
“쇼의 흥분지수 99니까 미리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화장실은 이 복도 끝에 있습니다.”
두 사내는 소리를 죽여 웃고는 곧 지하 공연장으로 내려와 달라며
먼저 불빛이 밝게 새어 나오는 그 방으로 들어갔다.
사내들이 사라진 후 유선우는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로 갔다.
지운이 화장실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면서 말했다.
“형, 연기 하나는 그만이군요.”
“쉿!”
유선우는 지운에게 말소리를 낮추도록 일러 놓고 화장실에 누가 있는지 다시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얼결에 나도 모르게 세일기획 어쩌구 하니까 거기서 온 사람처럼 행세한 것 뿐이다.
아직은 무사하지만 정작 세일기획 사람들이 나타나면 우리 신분은 들통이 난다.
그러니까 빨리 지하 공연장을 살피고 돌아가야 돼.
지금 정황으로 보아서는 어님이 여기 있을 확률은 제로야.”
지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선우와 지운은 화장실에서 나와 지하 공연장으로 내려갔다.
지하 공연장 입구는 불빛이 밝게 새어나오고 있는 방을 지나 층계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철문이 달려 있는 입구는 그래서 외부에서는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방금 들어간 두 사내가 그랬는지 그 철문이 약간 열려 있었다.
공연장은 소극장 보다 약간 좁아 보였다.
정면에 무대가 있고 그 앞은 객석으로 돼 있는데
실내 조명이 무대에만 집중되어 있어 객석은 어두웠다.
유선우와 지운은 객석으로 들어가는 통로에서 일단 홀안을 둘러보았다.
좁은 객석에 적지 않은 사람이 앉아 있었지만 무대위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어
아무도 두 사람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복도에서 만난 두 사내마 저 쇼에 넋이 빠져 버렸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유선우는 지운의 손을 잡고 머리를 낮춘 자세로 객석 맨뒷쪽의 비어 있는 의자로 갔다.
우선 빈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홀안의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타원형의 작은 무대를 비추는 조명은 주광색의 불빛을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알몸의 남녀 위에 강렬하게 쏟아 붓고 있었다.
객석의 시선들은 그 남녀가 연출해 내는 음탕한 몸짓에 빨려 들어가 있었다.
이들의 원초적인 몸짓 위로 이국풍의 전자음악이 숨가쁘게 흐르고 있었다.
유선우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무대위에서 열락의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 시선을 모았다.
보통의 체격에 가슴은 조금 크고 얼굴은 둥근 편이었다.
지운 역시 혹시나 하고 여자의 얼굴에 시선을 모았는지 그 여자의 얼굴이
낯설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안심한듯한 얼굴로 유선우를 돌아보았다.
유선우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무대 한쪽에서는 남녀 한 쌍이 벌이고 있는 이 섹스 쇼를
필름에 담는 촬영팀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른 봐도 카메라 세 대가 거리와 각도를 바꿔 가면서
부지런히 뜨거운 장면을 담고 있었다.
여느 무대와 달리 조명을 밝게 하고 있는 것은 이 촬영팀을 위해서인 것 같았다.
한동안 무대위에 시선을 뺏기고 있던 유선우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홀안을 살폈다. 복도에서 만났던 사내들은 어디에 자리를 잡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쇼가 끝나기 전에 그곳을 떠나는 것이 뒷탈이 없을 것 같았다.
유선우가 옆에 앉은 지운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만 공연장에서 나가자는 신호였다.
그러나 이때 지운은 무대에서 무엇을 봤는지 몹시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의 눈에 띌 것 같아서 유선우가 얼른
지운을 끌어 다시 의자에 앉힌 후 지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만 나가자.”
그러나 지운의 시선은 여전히 무대위에 못박혀 있었다.
유선우는 지운의 시선을 쫓다가 비로소 그의 시선이 방금 전에
무대에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카메라맨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보통 키의 그 사내는 스틸 사진을 찍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거야? 아는 사람이야?”
지운이 천천히 머리만 끄덕여 보였다.
“누군데?”
“선배….”
“사진 찍고 있는 저 친구 말이지?”
“그래요. 나가죠.”
지운이 먼저 일어나 몸을 낮추고 출구쪽으로 쫓기듯이 걸어 나갔다.
유선우가 뒤를 따랐다.
쇼가 한창 무르익은 때라 누구 한 사람 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두 사람은 복도를 통해 뒷문으로 나갔다.
어쩐지 예감이 누군가 뒤를 밟고 있을 것 같아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유선우와 지운이 차고 앞까지 달려 나왔을 때 별안간 차고 앞이 환해졌다.
누군가 차고를 밝히는 불을 켠 것이다.
눈부신 조명이 졸지에 두 사람을 빛의 그물에 가두어 버렸다.
“누가 우리 정체를 알아본 모양이에요. 어디로 나가지요?”
지운이 당황한듯 빠른 말로 물었다.
“정문으로!”
유선우는 별장 입구쪽을 살핀 후 그곳에는 아직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나무 그늘을 따라 정문 쪽을 향해 뛰었다.
지운의 동작이 꽤 날랜 것이 다행이었다.
정문에 도착하자 이번엔 정문을 밝히는 조명이 두 사람의 머리위에서 쏟아졌다.
두 사람의 움직임을 어디선가 누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에 주눅이 들 수는 없었다.
유선우가 철문을 열고 정문앞 도로로 뛰어나가자
지운이 아까 별장으로 올라올 때 질러 올라온 지름길을 가리켰다.
지운이 손전등을 켜 앞을 밝히고 가파른 지름길을 달려 내려갔다.
얼마쯤 달려 내려가다 유선우는 걸음을 세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별장안에서 자동차가 정문을 빠져 나와 급하게 도로를 달려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저것들이 자동차로 앞질러 지름길을 봉쇄할 모양이군요.”
지운이 걸음을 세우고 달려 내려오는 자동차의 불빛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봤자 우린 못 잡아. 이제 천천히 내려가면서 어떻게 하나 지켜보자.”
두 사람은 손전등도 꺼버리고 비탈길을 내려갔다.
예상대로 뒤를 쫓아오던 자동차는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지름길이 도로와 만나는 곳에 가서 멈췄다.
“저기서 우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나 봐요. 모두 네 명 같은데요.”
지운이 조금은 걱정이 되는 듯 말했다.
“조금 기다려 보자.”
자동차의 불을 끈채 지름길을 지키고 있던 사내들이 기다리다 못해 자동차의
불은 물론 각자 손전등까지 켜고 이번에는 지름길 근처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손전등의 불빛이 지름길을 따라 숲속을 이리저리 더듬어 가며 올라왔다.
“어떻게 하지요?”
지운이 물었다.
“움직이지 마. 이 덩쿨나무 밑에 앉아 있어. 소리만 내지 않으면 우릴 찾지 못한다.”
유선우는 지운이 덩쿨나무 밑에 숨도록 일러 놓고
자신은 줄기가 굵은 소나무 뒤에 서서 그들의 동태를 살폈다.
꽤 넓은 범위를 그들은 손전등 불빛을 어지럽게 비추면서
유선우와 지운이 숨어 있는 바로 아래까지 수색을 계속했다.
그중의 불빛 하나가 바로 유선우가 서있는 큰 나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 녀석이 다가오는 품새로 보아 아무래도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유선우의 동태를 감지한 것 같았다.
요리조리 흔들리던 불빛이 유선우 쪽을 향하더니 그 불빛이
유선우의 얼굴을 향해 쏟아져 왔다.
눈이 부셨다.
일이 이렇게 되면 이미 들통이 난거나 다를 것이 없다.
어차피 맞닥뜨릴 바엔 더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역습을 하는 수 밖에 없다.
유선우는 그럴 각오로 녀석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녀석이 10여미터 전방까지 와서 걸음을 세우고는 불빛을 유선우의 얼굴을 향해 비추었다. 지금 뛰쳐 나가면 녀석이 놀라 달아날 염려가 있으므로
더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기습을 해야 한다.
걸음을 세우고 열심히 유선우를 향해 손전등 불을 비추고 있던 녀석은
나무 뒤에 있는 것이 사람인지 아닌지 아직 확신을 갖지 못한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오면서 미동도 않고 있는 유선우를 쏘아 봤다.
“거기 누구냐? 나와라. 좋은 말로 할때 나오는 것이 좋다.”
손전등 불빛에 단검이 빛을 번쩍 뿜어 냈다.
녀석이 나무 그늘에 숨은 유선우의 모습을 확인하자 단검을 빼든 것이었다.
유선우는 대꾸는 물론 꼼짝도 안 했다.
“나오지 않으면 목숨을 보장 못 한다!”
말은 거창하게 나왔으나 녀석은 제편에서 오히려 겁을 먹었는지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녀석이 동료들을 부르지 않는 것도 졸지에 적과 맞닥뜨린 까닭에
몸이 얼어붙어서일 것이다.
유선우는 그렇게 판단하고 녀석이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기습을 가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녀석이 단검을 앞으로 내민채 두어 걸음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왔다.
그의 입에서는 ‘나왓!’ 소리가 흘러 나왔으나
거의 목구멍에서 맴도는 소리였다.
저렇게 겁을 먹고 있다면 이쪽에서 불의의 일격을 가했을 때
거의 대응할 방도가 없게 된다.
무술 도장에서 서로 겨룰 때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두려워 하면 자신감을 가지고 있을 때보다 훨씬 신체 반응이 둔해진다.
그래서 충분히 방어가 가능한 경우에도 그렇게 못하고 당하는 일이 있다.
유선우의 머릿속엔 이미 상대를 기습할 순서가 치밀하게 짜여져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기회를 잡는 일 뿐이었다.
그는 기습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이 더 가까이 와 있었다.
상대가 손전등을 비추고 있으므로 눈이 부셔 자칫 그 불빛에 상대를 놓칠 수도 있다.
그걸 염두에 두고 신중을 기하고 있는데 덩쿨나무 아래 숨어 있던
지운이 때맞춰 녀석을 향해 손전등을 비췄다.
불빛이 교차하면서 앞이 보이지 않자 녀석이 손전등을 든 손으로 불빛을 가렸다.
기회는 이때였다.
나무 뒤에서 비호처럼 뛰쳐나간 유선우는 단숨에 상대의 옆구리를 걷어찬 후
쓰러진 그의 손에서 단검을 빼앗아 숲속에 던져 버렸다.
지운이 손전등을 녀석의 얼굴에 정면으로 비추면서 덩쿨나무 밑에서 나왔다.
녀석은 옆구리를 손으로 움켜쥔채 신음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자, 일어나라. 네 동료들은 이미 저 아래로 내려갔다. 도움을 청할 생각은 하지 마라.”
유선우가 녀석이 떨어뜨린 손전등을 집어 들면서 말했다.
“그렇게는 안 될 걸. 우린 수가 많아.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모두 찾아 나설 거야. 수십명도 넘어.”
“수십명도 좋고 수 백명도 좋은데, 도대체 너희들은 뭣 하는 놈들이냐?”
“흥, 누가 할 소리. 너희들은 뭣 하는 놈들인데 별장에 숨어 들었어? 도둑들이냐?”
겁을 먹고 있으면서도 녀석은 쉽게 굽히려 하지 않았다.
“도둑이래도 상관은 않겠다. 우린 우리 대로 할일을 하니까. 너 이름이 뭐냐?”
“내 이름은 기두다. 왜?”
“하는 일이 뭐냐?”
“보면 몰라? 너희들 같은 도둑 잡지.”
지운이 그 말에 화가 나는지 구둣발로 기두의 무릎을 차면서 윽박질렀다.
“말조심해. 여자 납치해다 팔아 먹는 너희가 강도지 누구더러 도둑이래!”
“아야, 이런 제길!”
“그러냐, 안 그러냐?”
“뭐라고?”
“여자 납치해다 팔아 먹는 게 너희들 일이지?”
“이런, 기가 막혀!”
기두는 지운에게 대들듯이 말하면서 연해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숲속 수색을 포기한 녀석들이 도로위에 세워둔 차를 몰고 산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이다.
자동차의 불빛이 가물거리며 산밑으로 멀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