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창작의 상상능력 그 위상 문제(下)
거창하게 인문학적이니 뭐니 하며 현학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시의 본질이라는, 아주 초보적 존재 문제에 대한 놀이를 어설프게라도 가끔씩은 해 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 식 2원론의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 즉 이데아와 현상의 이런 구분은 현실 세계를 이주 간편하게 설명하는 모델이지만 입버릇처럼 쉽게 쓰는 본질과 말단이란 단순한 논리로도 쉽게 무엇이 흔들리고 있는가를 깨달을 수 있다.
우선 시라는 이데아(존재)는 어떤 형태로 현상하는 특수한 한 편의 시들(존재자)로 변하지 않는다고 본다. 영원히 존재는 존재자를 낳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설령 시대에 따라서 시의 형식과 내용이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시라는 언어 예술의 이데아가 인간의 기본 성정인 정감적 기반 위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데아가 변한다면 이미 시가 미적 정감의 바탕을 버렸을 때이므로 시 장르는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존재론이 1원론이든 2원론이든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늘 기준 잣대를 본질론 문제로 피드백해 가야 한다.
시는 시라야 하고 독자에게 소통되고 소유돼야 한다. 단순한 것이 유치하다거나 낡은 시론이 아니고 오만도 아니다. 한 시적 문맥에서 무슨 의미 전달을 위해 시어들이 개연적 상상력을 뛰어넘어 결합되는지 모른다면 이거야 말로 오만이다.
혼자 꾸는 꿈같은 몽상을 상상력이라 이름하며 새로운 이미지 구사라고 한다면 차라리 무식한 변명밖에는 안 된다. 시적 훈련이 안 된 일반 독자들이 한두 행도 읽고 넘길 수 없으면 시인들은 작자이고 독자인 자폐 놀이를 하는 격이 될 것이다. 더구나 시를 전공했다는 시인들끼리도 안 통하는 시에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 아부하는 시는 쓰지 않겠다는 논리를 들이댈것인지 대답이 궁색해진다.
결국 201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에서 보듯, 소통이 되지 않는 시를 심사에서 제외했다는 파격적인 입장에 이르게 되었다. 그간 시를 쓴 자신조차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시가 마치 낡은 시를 타파하고 개척지를 연 것처럼 칭송되고 회자되었다. 좀 비약일지 몰라도 은밀히 숨은 상업성이 부추긴 그야말로 깨춤이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 었다. 물론 제대로 이해도 되지 않는 외래 비평이론을 퍼트린 대학의 강단 비평도 책임을 온전히 못 면한다고 본다. 새로 유행하는 그 책을 안 읽었다고 하면 격이 떨어지는 듯, 저자 이름이라도 거명해야 하고 더 가관인 것은 전공자라도 한 대여섯 번은 읽어야 겨우 저자와 소통될 수 있는 것을 한번 휙 일별한 것을 마치 통달한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는 허세도 일조했다고 본다.
허세를 권위로 착각하는 저간의 우리 풍토는 일찍이 선대 조선의 숭문 정책에서 왔다는 말도 듣는다. 문자깨나 해야 사람 취급받는 숭문 풍조는 특히 시인들에게 그 혈맥이 흐르는 것 아닌가 싶다. 특히 시는 겉을 꾸미고 아는 체하고 허세 부리기에 어떤 장르보다 좋은 허세의 성지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이 성지는 시의 모호성이 기법으로 합리화되면서 이를 방패막이로 마음대로 날뛸 수가 있어서 더욱 안성맞춤이다.
이를 악용한 신인상 음모 전문꾼들과 백일장 전문꾼들이 서로 작품을 공동작하면서 전국의 문예상을 몰이하고 있다는 풍문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시는 언어를 수단으로 독립적으로 제작된 미적 영역이라는 신비평이론, 소위 형식주의가 전대의 시 전통을 비판하면서 시를 위한 시, ‘시 만들기’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본질적으로 문학의 주제 의식은 인간인 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할 수가 없다. 변할 수 있다면 주제에의 접근성이 어떤 언어 수단, 즉 언어조사措辭로 효과를 보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창작 기법이란 것이 크게 제기되고 그래서 소위 ‘낯설게 하기’ 기법이 방편이 되어 원관념을 보조관념으로 대치시키라는 비유의 상상력이 창작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주제의식의 진정성이라는 참된 삶의 의식보다는 기술 중심으로 본말이 전도되는 어리석음을 자초한 꼴이 되고 말았다. 즉 이 균형을 깨뜨린, ‘시를 위한 시’들은 ‘인생을 위한 시’들을 변방으로 몰아쳤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갈수록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행복해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시의 행복지수는 불행지수보다 더 높아 간다고 볼 수 없다.
유일하게 속내를 시원히 토하는 시라도 한 수 읊어 각박한 현실을 위무하려 했는데, 시마저 난해한 기술자로 변신하여 산업사회의 상업적 앞잡이들과 한 무리가 돼 접근을 밀어내니, 시의 가치가 더 이상 인정될지 의문이라는 탄식이 일고 있다.
사태가 이렇다면 이에 대한 대안이 있느냐, 구체적으로 시 작품을 예로 들어 설득해보라는 요구가 필연적으로 오게 될 터이지만 이 대답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맨 몸으로 쓴 시 같아서!
━문시아의 시
비록 무명의 시인이지만 마침 요즈음 필자가 문시아 시인의 시집 작품평을 요청 받고 쓴 평문 전반부 일부를 다음과 같이 보이고자 한다. 미약하나마 아주 작은 미로의 길트기라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 것이다.
문학 작품은 시든 수필이든 문인, 그 사람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누구나 그의 삶은 그가 보는 방식, 듣는 방식, 말하는 방식에 결정적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세계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세계에 내주는 이 거듭되는 호흡은 어쩌면 신비하리만치 운명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인생은 누구에 의해서이라기보다 역시 자신이 이루는 신비한 운명 같기도 하다. 더구나 한 편의 시 작품은 이런 들이마시고 내쉬는 신비스러운 세계의 호흡이 전적으로 자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문시아 시인은 평소 일상에서도 남과는 다른 짧은 호흡으로 세계를 다룬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남의 말을 열 마디 백 마디 들어도 그의 반응은 거의 한마디면 끝인 단답이다. 그래선지 그의 시 전편을 보면 4연을 넘는 것이 거의 없고 3, 4연으로 압축해서 세계도 삶도 소통시키며 살고 있는 것 아닌가 한다. 이런 견강부회도 진실이 될지 모르겠다. 문시아 시는 5, 6연을 잇는 시들은 이상하게도 긴장의 맥이 풀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필자의 억측이 오히려 그의 시적 특성이고 시의 맛과 멋이고 그만의 창조적인 세계 인식 양식이 아닌가 싶다.
이는 맨몸으로 시를 쓰기 때문이다. 시적 진실의 마음이 먼저 시를 압도하면 시어라든가 입말은 기교 부리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시아의 시는 기구起句에 이은 승구承句의 입체적 발전의 부연이 거의 없거나 있다 해도 재빨리 전구轉句나 결구結句로 직행해 시적 진행 속도가 과감하고 비약적이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시가 세계에 대해 내뱉는 조사措辭법이 냉소적이며 저항, 질타, 비꼬기, 비틀기 등등 자아와 세계는 대결과 비화해적이다. 삶의 진실의 속내, 그 진정한 격정이 육탄으로 여과 없이 대응하는 것이다.
필자는 문학 모임에서 문시아의 평소 생활을 자주 보아 온 터라 역시 시는 그 사람답게 창작되는 것이라는 신뢰를 얻게 되었다. 모처럼 그의 시 100여 편을 일별하면서 앞으로 그의 시 세계가 더욱 발전될 예감을 떨치지 못하면서, 그에게는 이상한 시 귀신 같은 것이 있다는 신비를 체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온몸이 던지는 시적 신기神氣 내지 시가 뿜는 천기天氣라 본 것이다. 진정한 시는 이런 시의 결기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가. 소외를 넘어 추방당하는 시대
초고속으로 급변전하는 후기 산업 사회의 다양한 물질문화 양태들은 시어들의 비유도 외연과 내포의 거리가 비약적이고 낯설어진다. 일찍이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 시론이 없었던 건 아니기에 후기 즉물주의라고 이름 붙일 정도로 한층 시어들은 메마르고 냉혹해졌다. 종래까지의 시적 직유들은 시정을 촉촉이 적셔 주는 서정적 유사성으로 보조관념을 대치키는 이미지의 정겨움을 수반했었다.
바야흐로 마치 마천루처럼 아파트가 30층 50층으로 저 홀로 마구 치솟으니 아예 성냥갑을 포갠 비유로는 감당이 불가능해졌다. 시인의 시심을 형상화할 수 없는 목하의 복합심리를 대치할 보조관념을 찾기가 참으로 곤혹스러운 시대가 되었다. 이런 고층의 아파트는 잘 익은 낱알을 마천루처럼 쌓아 이룬 통 옥수수자루 정도라야 비유의 보조 관념이 될까?
문시아의 시적 화자는 대형마트의 진열대에서 순간의 즉물적 이미지로 해서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복합심리가 섬광처럼 드러나고 말았다. 진열대의 통 옥수수는 심심풀이의 구수한 군침 도는 통 옥수수가 아니라 시멘트와 유리창의 냉정한 현대식 건물 한 동을 손에 잡는 것이다.
마천루의 고급 주상 복합이 그림의 떡처럼 먼 서민들에게는 현대적 새 창조의 산물들이 아니라 차라리 꿈같은 가상적 세계 같거나 웹툰 속 가짜 같은 것이다.
점점 나와는 세계가 너무나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소외를 넘어 절로 떠밀려 의도적 추방을 당하는 기분이다. 추방당하며 내뱉는 외마디, 팬픽문답 같은 외마디, 냉혹한 즉물적 관념 한마디, 바로 온몸이 부르짖는 격정의 유탄으로 대항해버린 것이다.
다음의 시 〈옥수수〉를 보면 곧 문 신아의 시작법을 읽을 수 있다.
대형마트 농산물 코너에
외모 출중한 통 옥수수가
진열되어 있다
튼실한 통 옥수수 한 개를 골라
껍질과 수염을 벗겨내니
얼룩빼기 고층아파트 한 동이
마천루로 잡힌다
고3 수험생이 살고 있는
2008호 층쯤 스탠드 불빛이
가물가물 새어나와 알록달록하다
은퇴 후
가족이 귀촌을 결심했는지
30층쯤 몇 호는 까맣다
위의 시는 시형식이야 4연이지만 2연은 전구이고 3, 4연은 종말 강조의 연결 연구이기에 사실상 3연의 시로 본다. 이 시는 한편의 시에 주제의 복합 시심이 동시에 연합되었다. 얼핏 보면 시가 덜 세련된 것 같은 어설픈 풋내기 시처럼 보이는데, 문제는 이게 참 묘하게도 시인의 진실한 정서가 순간 왈칵 터져 심한 구토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있는 자들의 호화로운 주상복합 고층아파트는 초라한 구식 일반 주택에 사는 없는 자들에게는 늘 가슴 저변에 숨어 꿈꾸는 선망이었을 것이다. 대입시를 앞둔 가정일 경우 높은 고층의 그 학생 거주의 방은 가물가물 진실 그대로 가물가물할 것이다. 은퇴가 기다리던 꽃놀이 귀촌이 되는 집은 상상해도 은퇴의 노후가 너무 부럽다.
찐 통 옥수수는 아직도 서민들의 고급 과자처럼 정겹고 입맛 친근한 구수함 자체인데 이게 차가운 벽돌과 유리 하늘을 뚫는 존재로 손에 쥐어지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엄습한다면 이건 소외를 넘어 추방당하는 현대사회의 불행한 질병이 아닌가 싶다. 어설퍼 보이는 솜뭉치가 머리 깬다는 속담처럼 너무나 어설퍼 보이는 이 시가 진정으로 필자의 가슴을 쳤다.
다음 시 〈종이비행기〉 역시 같은 솜뭉치 같은 쇠망치다.
자꾸만 고민이 되는지
종이비행기가 3층 상가 옥상에서
고층아파트를 보며 되뇐다
최근 아파트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더니
결국 하늘을 뚫다니
앞으로 어디로 날아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 시는 얼핏 보면 마치 쓰다 중단한 시 같다. 그러나 시인은 고민했을 것 같다. 더 미주알고주알 속살 확 드러내는 전구를 만들어야 시가 되는 것 아니라고.
그러나 시인은 꾹 참고 연필을 놓아버렸다, 시에 무슨 완결법이 있느냐며, 내가 시를 쓰지 시가 나를 쓰느냐고 버럭 화를 치올리면서 더 부연됨 직한 것은 독자에게 넘긴 것이다. 이미 이 사회는 내일을 믿을 수가 없다는 시인의 외침을 3연에 담아버린 것이 전구고 결구인 것이라 시인은 생각한 것이다. 참기 힘든 것을 참은 시법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중언부언하는 함정에서 빠져 나온 셈이다.
이 시는 시적 화자가 ‘종이비행기’라는 점에 각별히 유의해야만 한다. 왜 하필 종이비행기일까 하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종이비행기는 날리는 자가 날리고 싶은 데로 나는 장난감 비행기이다. 그러나 장난감이지만 날아서 도착하고 싶은 꿈을 실은 비행기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종이비행기는 나는 힘이 전적으로 기류에 의존되어 있다. 아무리 자신이 날고 싶어도 기류를 못 타면 헛손질로 끝나니 이 얼마나 힘없고 서글픈 비행기냐는 것이다.
더구나 상가 옥상이라면 그 아래층에서 아옹다옹 고된 하루살이를 종일 보내며 잠시 짬을 내어 하늘을 보며 한숨 쉬는 곳이다. 그때 누구나 마음속으로 날려 볼 수 있는 것은 종이비행기일 수밖에 없다. 제 힘은 전혀 없지만 재수 좋게 운 좋은 기류를 타고 싶은 기대 그것이 종이 비행기인 것이다.
그러나 “종이비행기는 도무지 어디로 날아야 할지 모르겠다.”가 끝이 되고 만다. 종이비행기를 들고라도 살아야 하는 소외된 서민들의 절망이 노래된 시이다. 시론적으로는 현존재의 위치를 현상학적으로 ‘있는 대로’만 조심스럽게 잘 쓰면 가슴 통쾌한 풍자〔諷刺, satire〕 시를 쓸 수 있는 비법을 보여주는 시이기도 하다.
문시아의 다음 시는 어쩌면 더 직접적으로 처절하다.
해안가에서
파도는 부르지 않아도 나타난다
부른 이름처럼 날아서 온다
뒷걸음질로 비틀거리는 나를 똑바로
세우더니 많이 보고 싶었단다
내게 천 송이 백장미를
뿌리며 와락 안아준다
금세 시들어버린 열정
차갑게 돌아선 너를 말리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 시 역시 문시아 시인만의 기승전결 결구가 없는 무 결구 종말 묵시默示법으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위의 〈해안가에서〉는 3, 4연이 전구로서 주제의식의 소임을 다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비록 이 시가 남녀 간의 상열지사 형식으로 파도는 남자, 시적 화자는 여자로 되어 있으나 이를 전형적인 세파의 무정함과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바르다고 본다. 세상물정을 모르고 자기 마음처럼 순진하게 보는 무지의 서민들은 떠도는 풍문과 속임수에 웬 횡재가 닥치나 싶어서 덥석 반기지만 곧 손재수를 입고 치유하느라 곤혹을 친다. 그래서 이 시는 안타깝게도 손발 부르트며 모은 재산을 일시에 잃는 서민들의 허망한 꿈을 형상화한 것 같아서 냉혹한 역설화법같이 읽는다.
“차갑게 돌아선 너를 말리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물론 남녀상열지사의 연정으로 읽을 수도 있으나 역시 ‘해안가에서’란 거리감이나 갑작스러운 ‘백장미’라는 차가운 꽃은 죽음을 암시하는 소극적 이미지들이라 본다.
시 〈부서이동〉 역시 나의 주권을 무시한 억압이라는 부정적 사회 현상에 대한 절규이다. 그야말로 육탄적인 절규이다.
바구니에 담겨 있는 12색 타월
청색 타월 하나를 찜한다
너는 걸레로 사용할 거야
지금부터 사람의 얼굴을 닦는 것이 아니라
방바닥을 닦아야 해
청색 타월은 새로 배워야 하는 삶이
두렵다
타월로 살고 싶어
공장에서 출고될 때부터
타월이지 걸레가 아니야
나. 상실해가는 화해
이 시대는 흑백 대립으로 중용이 없는, 화해의 상실이란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런 거대 담론을 어찌 시인들은 감당할 것인지, 시적 상상력은 참 힘없고 나약해 보인다. 시어가 모질어지고 흉악해지고 붉은 피를 목에서 토한다 해서, 괴상한 환유와 제유로 언어를 몽상적으로 조작해서 대든다고 해서, 절박한 말세의 질병들을 시가 감당할 수 있다고 보는 눈들이 안타깝다.
그런데 이 답을 필자는 문시아의 어설픈 것 같은 시에서 찾고 있다. 말 그대로 별반 좀 낯선 기법도 아닌 것이 낯선 기법으로 다가와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역시 기존의 시는 신기한 시어들을 통해 얼굴을 오만상으로 붉히며 포효해도 감당 못하는 허점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거두절미하고 우선 시 〈벚꽃에게〉부터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속까지
검게 탄 벚나무가 벚꽃에게 말했어요
-나와 함께 있을 때
세상의 것들에 대해 묻지 마 부탁이야
벚꽃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왜?
벚나무가 머뭇거리며 답한다
-내 머릿속은 네 생각들로 채워져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
이 시는 일언하여 온몸으로 쓴 시라고 보고 싶다. 지난날의 관능적이고 가치 미학적 반시계열의 억압기제로 쓴 몸 시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의 육탄을 던져서 시를 썼다는 시각이다. 두뇌나 언어로 시를 조사措辭한 시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라 보고 싶다.
우선 이 시는 흑백 대립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속까지 검게 탄 벚나무가 벚꽃에게” 네가 너무 하얗게 피어 내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온통 하얀 세계에 압도되어 다른 생각을 전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검게 탄 흑색과 하얗게 밝은 꽃의 흰색이 중간지점 없이 일언지하로 대립되는 대화체 형식의 시다. 이건 시의 주제의식이나 시어를 잘 골라 조사하기 이전의 내심의 펄펄 살아 있는 육언肉言이 먼저 던져진 시이기 때문이다.
시를 잘 만들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은 시인 것이다. 몸의 진실한 시적 진통이면 언어를 꾸미는 것은 버려도 좋다는 대담한 시작 태도로 보인다.
이런 예증은 시의 첫 연에서 바로 드러난다. 벚나무가 고생해서 피운 흰 꽃이 제일 두려운 것은 ‘세상의 것들’에 대해 묻는 것이다. 순백한 꽃에게 도저히 검게 속 타는 세상살이를 얘기해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벚꽃의 순백한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작위적인 기법이라고 보기에는 3연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라는 표현이 이해되지 않는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첫 연의 화자 벚나무 자신이기 때문이다. 감정 이입을 시킨 것이라 본다. 시인은 벚꽃을 처음 대하는 순간 아픈 세상살이에 대해 생각하지 말자는 처절한 한탄이 터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이 시를 삶의 육탄으로 쓴 시지 언어로 쓴 시가 아니라 생각한 것이다. 문시아의 거반의 시가 다 이런 아픈 산고의 산물이라서 성공하고 있다고 본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기존의 세련된 시에 익숙한 눈으로는 어설픈, 시 같지 않은 시가 오히려 시의 진수를 무기교로 보여주는 온전한 자기 장르의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시는 교언영색하는 기교보다는 내가 나만의 시를 쓰는 시법을 찾는 것이다. 시가 나를 쓰는 법을 찾아 허덕이는 이 시대의 시는 이런 점에서 다시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은문학 2017 상반기(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