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희, 「페이퍼 맨」
겨울방학을 며칠 앞두었을 때 몸무게는 4kg 가량 줄어있었다. 그 즈음 나는 거의 습관적으로 종이를 먹고 있었다.
주말 아침이면 기숙사 휴게실에 무료 비치되어 있는 신문을 읽었다.
주말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나의 행동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다 낡아빠진 소파 한 구석에 앉아 기사를 읽으며 신문지를 씹어 삼켰다.
그곳에 비치된 신문을 읽는 학생들은 거의 없는 터라 날짜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도리어 나는 날짜가 좀 지난 신문을 선호했다.
그 편이 잉크냄새도 덜 나고 먹을 만했기 때문이다.
지난 주 수요일에 발행된 신문에는 우리가 알고 있던 중국 최고의 문자가 바뀌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중국 저장성 핑후시 좡차오 고분 유적지에서 갑골문자보다 1400년 앞선 문자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루아침에 갑골문자는 더 이상 현존하는 최고의 문자가 아니게 되었다.
새로운 것들이 발견되면 지식은 하루아침에도 뒤바뀌었다.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들까지 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예는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한때 지구가 네모꼴이라고 믿었던 것이나,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돌아간다고 믿었던 사실 또한 분명히 존재했었고,
몇 세기 동안이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진리로 믿었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뱀장어가 무성생식 동물이며 강바닥 진흙 속에서 뱀과 짝 짓기 하여 나왔다고 믿었다고 한다.
어쩌면 앨빈 토플러가 경고한 쓸모없는 지식을 구분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 될지도 몰랐다.
무엇이 압솔리지인지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어머니는 지식은 별로 신용할 게 못 된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내가 책상머리에 앉아 있기라도 하면 먼저 말을 걸고 방해하는 쪽은 어머니였다.
심지어 시험 직전에도 잠든 나를 깨우지 않았다.
왜 깨우지 않았느냐고 다그치자 어머니는 “똑똑한 멍청이보다는 어리석은 바보가 낫다.”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한때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가 약간의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심각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병원에 데려갔어. 방학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단 두 달 만에 그 친구는 완전히 망가져버렸어. 그들이 배운 지식으로 그녀를 그렇게 죽여 놨단다.
” 그러면서 똑똑한 멍청이라면 집안에도 한 명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웃었다. (중략)
시험주간이 다가오자 늦은 시간인데도 불이 켜져 있는 방이 많았다.
곧 기말시험이었고, 다들 부모가 원하는 수준의 점수를 내야 했다. 그것도 우리들만의 계약이었다.
부모는 자식이 원하는 수준의 점수를 내놓으면 사생활 간섭을 하지 않았고,
우리는 우리들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잠시잠깐 타협을 보았다.
이 시험이 끝나면 겨울방학이 찾아오고 그러면 곧 수험생이 될 터였다.
나는 마음이 조금 심란해져 유신의 곁으로 다가가 헤드셋을 뺐다.
특별히 공부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는데 항상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신기했다.
나는 유신에게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
“ 그런 멍청한 질문이 어디 있어? 뭐가 될 수 있냐고 물어야지. ”
“ 알았어. 뭐가 될 수 있는데? ”
“ 검사 혹은 변호사. ”
“ 그게 꿈이야? ”
“ 설마, 날 뭘로 보는 거야? 당연히 AV 감독이 되고 싶지. 내 취향에 맞는 여자들의 비명을 듣고 싶다고. ”
▶ 작가_ 김은희 – 소설가. 1986년 서울 출생.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201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당선.
현재 학원 강사를 하며, 밤에는 종교와 물리학에 관한 책이면 뭐든지 씹어 먹듯 음미하며 ‘마술적 리얼리즘’을 영육으로 체험하고 있다.
「폭죽」 「터널과 로켓」 등의 작품이 있다.
▶ 낭독_ 이현균 – 배우. 연극 <뽕짝>,<졸업작품>,<맘모스해동> 등에 출연.
강애심 – 배우. 연극 <베르나르다알바의집>,<빨간시>,<넙죽이> 등에 출연.
▶ 출전_ 2014년 세계일보 1월 1일 문화면
▶ 음악_ tune ranch-miscellaneous 중에서
▶ 애니메이션_ 박지영
▶ 프로듀서_ 양연식
김은희, 「페이퍼 맨」를 배달하며
“먹어라! 그러면 기억이 날 게다! ” 이것이 고등학생인 주인공에게, 잘 나가는 회계사인 아버지가 호통을 친 말이다.
그래서 ‘나’는 교과서와 신문과 사전들, 심지어 성경까지 씹어 먹는다.
그랬더니, 종이에 쓰인 모든 지식이 너무나 잘 기억될 뿐 아니라, 그 지식들이 뱃속에서 섞이고 녹아서, ‘나’는 판사 검사 의사가 되어야 하는 목표를 훨씬 넘어서 정말로 현명해지게 된다.
지식이, 지식 이상의 문을 열기 위한 불쏘시개로 변함으로써 ‘나’의 몸은 무한자유의 희디흰 원소가 된다.
드디어, 저 푸른 하늘을 거침없이 날아가는 종이 새의 비상!
문학집배원 서영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