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 김영준 목사(컬럼비아 법대 출신-기쁜소식교회 담임)의 설교를 아래에 복사 올리고 또 파일로 문창극 컬럼(중낭일보)을 올립니다. 아프간 인질 사태에 관한 긍정적 시각에 공감합니다. 여러분은?
설교자 김영준 목사(기쁜소식교회) www.gnc.or.kr
설교일자 2007/08/05
설교제목 핍박을 피할 수 없는 사람
설교본문 마태복음 5:7-12
현대인, 또 도시인의 특징은 익명성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프라이버시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우리의 프라이버시가 존중받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이웃은 어떤 사람이냐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고자 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또 남도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어떻게 보면 우리의 모습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 레위인과 닮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천 년 전에 말씀하신 비유입니다만 그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현대인들을 닮았습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 강도만난 사람, 강도, 강도를 당한 그 사람을 보고도 지나가는 레위인과 제사장이 나오고,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우리 가운데에도 강도만난 사람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강도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소수이긴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은 누구와 같으냐면 그 피해자를 보고도 지나간 레위인, 제사장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개입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조용한 이웃입니다. 그러나 조용한 이웃은 결코 좋은 이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그 레위인, 제사장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일이 아니고 남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의 일에 관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괜히 남의 일에 관여했다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욕만 먹기 쉬울 수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에 대해서 들끓는 국내 여론도 들어보면 대충 그런 것입니다. 왜 위험한 줄 알면서 굳이 고집을 피우고 거기를 찾아갔느냐, 왜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그렇게 유별나냐, 왜 극렬주의적이냐, 왜 남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지 않고 독선적으로 선교를 하느냐, 이런 말들을 많이 듣습니다.
이번 일에 사실 나쁜 일을 행한 사람은 탈레반인데 탈레반보다 더 악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한국에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탈레반은 납치를 하기는 했지만 이 피해자들을 욕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한국에 있는 익명의 사람들은 납치를 하진 않았지만 숨어서 그들을 욕하고 별의 별 짓을 다합니다. 누가 과연 우리의 적인지, 누가 우리를 미워하는지 그것조차도 혼돈스럽습니다. 탈레반은 정치적은 목적으로 한국의 젊은이들을 납치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개인적으로 모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숨어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들을 모독합니다. 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랍자들의 가족은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자식들이 잡혀갔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론을 의식해서 고개를 숙이고 소리조차 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살해당한 이들의 가족들, 제대로 소리 내서 슬퍼하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여론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면서 제대로 슬퍼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같은 민족이 더 무섭습니다. 같은 한국 사람이 더 무섭습니다. 그들이 욕을 할 때는 이를 드러내고 물려고 달려듭니다. 도대체 누가 우리의 동족이고 누가 남의 민족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같은 민족끼리 피를 흘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차라리 다른 나라와 전쟁을 했다면 이해하겠는데 적어도 최근 역사에는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해본 것 보다는 같은 민족끼리 싸우고, 같은 민족끼리 으르렁거리고, 지금도 서로 대립하고 서로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습관이 되어서 우리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발전한다든가 진보한다든가 이런 꿈을 갖고 있기보다는 같은 한국 사람끼리 경쟁하기 좋아하고, 같은 한국 사람끼리 물고 뜯기를 좋아하고. 이것이 우리의 경험, 이것이 우리의 한계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아프가니스탄에 피랍되었을 때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고, 교회가 파송을 했고, 궁극적으로는 선교적인 목적으로 간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개인적인 사정이고, 중요한 것은 같은 동족이 남의 나라 테러리스트들에게 잡혔다는 것이고 그 문제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중에도 도를 넘었다느니, 고집을 피웠다느니, 무모한 짓을 했다느니, 그들이 개인적으로 간 것을 왜 국가가 도와주어야 되며, 왜 국가가 세금을 지불해야 되느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국가의 목적, 또 민족의 의리를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정부는 그런 일을 하라고 우리가 세워준 것입니다. 정부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누가 그 일을 한다는 얘기입니까?
그리고 내버려 두어도 됩니다. 내버려 두면 그들은 순교할 것입니다. 순교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최고의 영광입니다. 내버려 둬도 됩니다. 순교할 것입니다. 차라리 민족이 마음을 열고 돕지 않으려면 내버려 두면 됩니다. 내버려 두라고 하세요. 그러나 도울 것이라면 입을 닫고 마음을 열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지요. 우리 민족은 언제 서로 정말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것을 배우겠습니까? 언제까지 나와 신앙이 다르고, 사상이 다르고, 출신 지역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고 싸우고 물고 다투겠습니까. 이래가지고서는 우리 민족의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젊은이들은 선교의 목적으로 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쉬쉬할 필요 없습니다. 이미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압니다. 이슬람도 알고 탈레반도 압니다. 그들이 바보가 아닙니다. 미쳤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권에 그냥 가겠습니까? 선교하려고 가는 것이지요. 쉬쉬할 필요 없습니다. 탈레반은 종교적인 이유로 그들을 납치한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겁을 먹고 쉬쉬하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복음에 대해서 가장 폐쇄적인 곳이 두 곳이 있는데 북한과 이슬람권입니다. 이슬람교는 말할 때는 ‘이슬람은 원래 평화와 관용의 종교다.’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행실을 보면 그것은 멀고 먼 얘기입니다. 이슬람은 근본주의 이슬람일수록 비민주적이고 반여성적이고 전근대적입니다. 그들은 남성위주의 사회이고, 종교의 율법이 다스리는 사회이고, 도둑질을 하다가 잡히면 손을 자르고, 간음하다 잡히면 돌로 맞아 죽습니다. 이것이 이슬람입니다. 그들의 관용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슬람교도들은 전 세계에 퍼져있습니다. 그들은 한국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고, 유럽에도 있고, 전 세계적으로 있습니다. 그들은 어느 곳에서든지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포교의 자유가 있지요. 한국에서도 이슬람을 가르치고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나라에서는 다른 종교가 들어가는 것을 하용하지 않고, 가르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선교사가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그 국민이 다른 종교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법적으로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관용을 말하겠습니까. 그리고 무슨 평화를 말합니까? 적어도 우리는 모든 사상, 모든 종교는 자유롭게 전할 수 있고, 의논할 수 있고, 사람이 취사선택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전제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짜 진리가 승리하게 하자, 사람들이 마음 놓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대한민국도 그렇습니다. 어떤 종교를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됩니다. 원하는 것을 배울 수도 있고, 전할 수도 있고, 의논하고, 그것을 보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데 이슬람권은 그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합니다. 다른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봉쇄합니다. 이슬람권에서 선교하다가 들키면 큰일 납니다. 감옥에 갑니다. 그것을 모르고 가는 게 아닙니다. 알면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결단과 용기가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벌써 누차 말씀드렸지만 이번에 피랍된 형제자매들을 보면 젊은 여성들이 대부분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미혼 여성들이 대부분이에요. 남자는 어디 가고 다 젊은 미혼 여성들이 단기 선교하겠다고 간 것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한국여성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국 여성들, 대단합니다. 이건 대단한 용기입니다. 외국은 대한민국을 생각할 때 핸드폰을 잘 만드는 나라, 전자제품을 잘 만드는 나라라고 지금까지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 일을 통해서 대한민국 사람들은 용감한 사람들이다, 특별히 대한민국 여성들 용감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탈레반도 결국은 정치적인 이해타산을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이고, 또 아프가니스탄 정부도 정치적인 이해타산을 놓고 협상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 이외의 국가들이 중동에 개입하는 모든 동기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이해타산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유일하게 순수한 신앙적인 목적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한국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이라크든, 사우디아라비아든, 쿠웨이트든, 아프가니스탄이든 거기에 개입하는 서방국가 대부분은 정치적인 이해타산, 경제적인 이해타산을 놓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들어갔던 형제자매들은 그런 것을 따지지도 않았고 뭔가를 얻기 위해서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누가 알아주기 때문에 간 것이 아니라, 자기 돈을 내고, 자기 시간을 내고, 위험을 감수하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사람은 그냥 집에 앉아 있으면 제일 안전합니다. 집에 앉아 있으면 제일 안전하고 욕먹을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인가 하려고 할 때 특별히 자기가 믿는 것,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하여 무엇을 실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입을 열고 의견을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믿는 것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실천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실천하는 것이든 간에. 그런데 특별히 신앙적인 신념, 믿음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이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주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고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축복이 되고, 평안이 되는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처럼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평강이 되는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도 하셨습니다. 11절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양과 같아요. 착한 양과 같습니다. 온유하고, 또 착하게 살려고 애쓰고, 남들 도우려고 하고, 남들과 충돌한다든가 마찰이 있다든가 그런 것을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 때문에 너희가 미움을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온갖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말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지 않는 구절이고 별로 안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말씀처럼 이 말씀도 우리에게 별로 인기가 없는 말씀인데, ‘나로 인하여’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욕을 먹고 핍박을 받을 때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이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아프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아무도 순교라는 말을 쉽게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이 일은 해결되지 않은 것이고 평화롭고 순탄하게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교는 예수님을 섬기다가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돌아가신 두 분은 순교하신 것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21세기 최초인 것뿐만 아니라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진짜 순교자들을 본 적이 별로 없지요.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것은 그동안 우리가 너무 편안하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것도 축복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기독교가 시작할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열 한 제자 다 순교했지요, 사도바울도 순교했지요, 그 외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성경에 순교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지만 증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순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martyr라는 말이 바로 증인이라는 뜻과 순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가 내 제자가 되려고 하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야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지셨지요, 고초당하셨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 순간에도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욕하고 저주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수고하시고, 애쓰시고, 선한 일을 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욕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선한 마음으로, 믿음으로 선한 일을 하는데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실망하면 안되고 시험에 들면 안됩니다. 원래 신앙의 수고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내가 수고하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지만 어떤 경우에는 오해하고 끝까지 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고 용서해야지요.
그러므로 이것은 누가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희생이나 십자가는 누가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나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신 다음에 베드로에게 장차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주님께 영광 돌릴지 개인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또 스데반도 순교하기 전에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지요. 이것은 주님과 당사자 간의 문제입니다. 누가 그것을 권고하거나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세상 짐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내려놓고 면류관을 받는 것이고, 그리고 주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