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는 흔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지만, 많은 예술 작품에서는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도 ‘바보이기에 모든 일을 영악한 똑똑이들보다 잘 처리하는’ 인물이다. 사진은 ‘포레스트 검프’ 속 한 장면.
다양한 차원에서 천재를 규명하려 한 사상가들이 있었다. 위부터 이마누엘 칸트, 게오르크 헤겔, 볼테르.
■ 천재와 바보
천재는 이전에 없던 독창적인 규칙의 새로운 작품 창시하지만 바보는 기존의 가치를 무심히 건너뛰며 초라하게 만들어
둘은 서로 다른 길 가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일 해… 둘다 세상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길 열어줘
천재란 말은 흔하게 쓰는 말이 돼 버렸다. ‘먹방 천재’도 있고, 탄막 게임을 ‘원코인 클리어’하는 천재도 있다. 좀 더 과학적인 천재의 기준도 있을 것이다. ‘아이큐가 얼마 이상이면 천재라고 한다’와 같은 것. 그런데 인간이 발휘하는 거의 무한하다고 할 만한 다채로운 능력에 비춰볼 때 아이큐 같은 기준은 임의적일 뿐이라서 별다른 유의미한 척도가 되진 못하는 것 같다.
어떻게 원리적인 차원에서 천재를 규명할 수 있을까. 볼테르의 ‘철학 사전’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천재(genie)라는 단어는 대단한 재능을 통틀어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창의성이 개입된 재능을 지칭하는 듯하다…아무리 자기 분야에서 완벽한 예술가라도 창의성이, 독창적인 면이 전혀 없다면 결코 천재라는 명성을 얻지 못한다…체스의 최초 발명자보다 체스를 더 잘 두는 사람이 여럿 있을 수 있다…하지만 체스의 발명자는 천재였고, 그와 체스를 둬 이길 사람들은 천재가 아닐 수 있다.”(사이에 역) 여기서 볼테르는 천재의 핵심적인 요소로 ‘창조성’을 내세우고 있다. 체스를 잘 두는 사람은 이미 만들어진 체스의 규칙을 잘 운용하는 사람이다. 반면 천재는 체스라는 게임의 ‘규칙’ 자체를 고안한 사람이다. 즉 천재는 ‘이전에 없던 규칙을 창조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천재의 창조성, 규칙을 발명해 내는 능력을 미학의 영역에서 해명한 이가 바로 18세기 이마누엘 칸트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천재의 4가지 근본 면모를 이야기하는데, 규칙을 창조하는 능력이 첫 번째로 온다. “천재란 어떤 특정한 규칙도 주어지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는 ‘재능’이다. 즉 그것은 어떤 규칙에 따라서 배울 수 있는 것에 대한 숙련의 소질이 아니다.”(‘판단력 비판’, 백종현 역) 예술은 인간의 생산품이지만, 여느 기성품과 달리 획일적인 규칙에 따라 생산되지 않는다. 각각의 작품은 저마다의 고유한 규칙(질서)을 가지고 있다. 이 규칙은 천재로서 예술가가 작품마다 새롭게 탄생시키는 규칙이다.
두 번째, 아무리 독자적인 생산물이라도 무의미한 것을 천재의 소산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생산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범형(範型)’이 되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천재의 작품은, 다른 작품들이 좋은 작품인지, 좋지 않은 작품인지 판정할 수 있는 표준 역할을 할 수 있는 ‘범형’이다.
세 번째, 천재는 독창적인 규칙의 새로운 작품을 창시하지만, 어떻게 그런 작품이 나왔는지 설명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작품을 창작할 수 있도록 가르칠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천재는 학자가 아니며, 천재의 산물은 학문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학자는 자신의 학문적 생산물이 어떻게 나왔는지 설명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동류의 성과물을 얻도록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재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일일이 인식하고 있기보다는, 꼭 자연의 일부처럼 창조한다. 마치 과실나무가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경이로운 열매를 생산하듯 말이다.
그러므로 천재의 네 번째 면모를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자연은 자연 속의 모든 것을 자신의 규칙(가령 자연과학의 법칙)에 따라 생산한다. 그러나 자연은 독특한 산물인 예술 작품에 대해 ‘천재를 사용해서’ 규칙을 부여한다.
이렇게 천재에 대한 이론은 예술의 영역에 국한해서 형성됐다. 그러나 이후 낭만주의를 거치며 19세기에, 천재는 인간사의 모든 영역에서 발휘되는 무의식적인 창조성을 가리키는 개념이 됐다. 게오르크 헤겔이 ‘미학강의’에서 말하듯, 천재라는 말은 예술가뿐 아니라 위대한 군인들과 제왕들, 그리고 학문의 영웅들에게까지 널리 사용되는 말이 돼서, 좀 더 세심히 그 말을 규정해야 할 필요가 생길 지경이었다.
잠깐 덧붙이면, 천재의 개념은 의미 있는 생산물을 모두 주체 능력의 소산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문제를 가진다고 지적되기도 했다. 예컨대 마르틴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의 기원’에서 말한다. “창조적 행위를 자주적 주체의 천재적 수행능력이라는 의미로 오해하고 있다.”(신상희 역) 창조적 작품은 한 개인이 가진 천재적 능력에서 나온다기보다, 가령 그런 작품의 출현을 준비해온 공동체를 바탕으로 가능한 게 아닐까.
이제 바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바보란 말은 흔하게 쓰면 안 되는 말이 돼버렸다. 바보는 그저 욕이다. 그런데 바보는 그렇게 나쁜 것일까. 바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까.
바보는 늘 매력적이었고, 그 때문에 오래전부터 문학의 주인공으로 흔적을 남겼다. 한 예로,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바로크 시대의 문학적 취향을 이렇게 기록한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있어 온 바보들의 무리, 그들의 축제, 그들의 집회, 그들의 이야기에서 새롭고 아주 강렬한 즐거움을 느낀다.”(이규현 역) 여기서 말하는 유럽에서 오래전부터 있어 온 바보들의 이야기, 즉 우인문학(愚人文學)은 15세기 독일 작가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의 배(Das Narrenschiff)’(1494)가 대표한다.
현대에 와서도 바보는 그 매력을 유지한다. ‘포레스트 검프’ 같은 영화를 통해서 말이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바보이기에 모든 일을 영악한 똑똑이들보다 잘 처리한다’는 메시지는 사실 기시감이 든다. 그것은 바로 레프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이 보여줬던 것이다.
바보 이반의 의의를 알기 위해선, 악마와의 대결을 그린 세 작품을 함께 봐야 한다. 먼저 뛰어난 지성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는 두 작품이 있다. 르네 데카르트의 ‘성찰’에서는 철학자가 악마와 대결하고,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는 교수가 악마와 대결한다. 이와 달리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에서는 바보가 악마와 대결한다. 마지막 바보 이반의 경우가 악마에 대한 가장 완전한 승리를 보여준다. 데카르트는 악마의 위협이 있는데도 속지 않고 참된 앎을 가질 가능성을 전능한 신의 선성(善性)으로부터 보장받는다. 결국 선한 신에 의존해서 악마를 물리치는 것이다. 파우스트의 경우 ‘천상으로부터의 사랑의 은총’이 없고서는 악마를 물리칠 수 없었다. 요컨대 교수와 철학자 모두 도우미가 필요했다. 그러나 바보 이반은 오로지 그 자신이 바보이기 때문에 혼자서 악마를 이길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보에게 대단한 능력이 있음을 알아챈다.
이 작품에서 이반의 두 형은 돈과 권력(군대)을 가지려는 두뇌 게임에서 악마에 패배한다. 당연히 악마의 두뇌를 이길 수는 없다. 반면 이반은 돈과 권력의 가치 자체를 무의미하게, 즉 추구할 만한 대상이 못 되게 만듦으로써 악마를 이긴다. 더 정확히는 이기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악마가 스스로 이반에게 진다.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바보의 ‘순수성’에서 나온다. 바보의 순수성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좇는 가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가치를 무심히 건너뛴다. 사람들이 매달리는 기존의 가치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바보의 등장 자체가 세상을 지배해온 그 가치들을 의문에 부치고 초라하게 만든다. 이런 바보의 방식으로 기존의 세상을 허무하게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이들이 있다. 석가가 그렇고, 그리스도가 그렇다.
결국 바보가 물정 모르는(즉 순수한) 바보인 까닭은 세상을 지배하는 기존의 가치와 단절돼 있기 때문이다. 순수성이라는 면에서 그리스도와 비견되곤 하는 바보 주인공을 내세운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보자. 주인공 미시킨 공작은 러시아 말로 ‘유로지비(yurodivy)’, 즉 ‘성스러운 바보’라 불린다. 동방정교에서 바보 행세를 하며 수행하는 수도자를 일컫는다. 공작은 이런 말을 듣는다. “나는 조금 전까지도 당신을 백치로 여겼어요! 하지만 당신은 남들이 전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어요.”(김근식 역) 세속의 통상적인 가치와 단절된 바보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봄으로써, 그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세상이 실은 어리석은 탐욕과 악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머리 좋고 꾀바른 자들이 아니라, 순수성의 담지자인 바보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상을 담은 작품이 리하르트 바그너의 마지막 악극(樂劇) ‘파르시팔’이다. 파르시팔은 자기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바보다. 이 작품의 2막에서 그 이름의 의미가 해명되는데, 파르시팔(Parsifal)이란, ‘순수한(parsi)’ ‘바보(Fal)’라는 뜻이다. 이야기의 핵심은 이렇다. 그리스도의 성배(聖杯)와 성창(聖槍)을 지키는 임무를 띤 왕이 있다. 그는 지금 병들어 죽어가는 처지다. 마법사의 계략에 말려들어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 성창을 빼앗기고 치명상까지 입은 까닭이다. 오로지 순수한 바보, 파르시팔만이 그를 구할 수 있는데, 그 역시 왕이 겪었던 것과 같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파르시팔은 순수함으로 인해 왕과 달리 정욕의 길로 들어서지 않고, 오히려 왕이 겪은 고통에 깊이 공감한다. 그리고 그는 이 공감을 바탕으로 성창을 되찾고 병든 왕을 구원할 수 있게 된다. 이 정도면, 바보는 일종의 ‘덕’이라 할 만하다.
천재가 새로운 규칙을 창조해 기존에 없던 것을 세상에 만들어낸다면, 바보는 그 순수성을 가지고 세상에 통용되는 규칙과 가치를 무력화시켜 세상을 텅 비워낸다. 둘 다 세상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길을 연다. 결국 바보와 천재는 서로 전혀 다른 인물이고 전혀 다른 길을 가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천재와 바보를 다룬 작품들
‘판단력 비판’은 이마누엘 칸트의 미학 사상을 담고 있는 책이며, 철학에서의 천재 미학에 대한 체계적 이론화 역시 이 책에서 이뤄진다.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의 배’를 비롯한 우인문학을 15∼17세기 광기를 분석하기 위해 다룬다. 당연히 이 시대에는 광인과 바보가 구별되지 않는다. 러시아 문학의 대가 도스토옙스키와 레프 톨스토이는 모두 바보에 관한 걸작을 남기고 있다. ‘백치’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백치와 같은 순수한 주인공을 통해 아름다운 인간이 어떤 것인지를 구현해보고자 했다. ‘바보 이반’은 러시아의 오래된 우화를 기반으로 쓴 톨스토이의 동화다. 그는 바보 이반이 대표하는 정직하고 순수한 삶을 영위하는 러시아 농민의 덕을 찬양한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파르시팔’은 성배 전설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궁극적 지혜는 바보, 즉 ‘마음이 순수한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