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군대에서 특히 특전사에 애정이 많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포병 병과 출신 영관급 장교로 예편하셨고, 저는 18개월 단기 사병(방위병)출신인데..왜 그런가 할지 모르지만..제 고종 사촌 동생이 현재 복무중인 현역 특전 여단 중사이기도 하고,문재인 문클루니님이 특전사 출신이기도 했고 정병주 특전 사령관 같은 분이 있었기에 박희도,최세창같은 반란군놈이 있었어도 특전사 자체에는 애정을 가지는것입니다.
군대를 정치에 이용한 놈들하고 이명박 면제 주르르 놈들에 아부하고 바른말 못하는 군 간부들에 불만이 있는거지 대한민국
국군은 매우 사랑합니다. 장준하 선생님이 박정희와 군사독재 정권은 싫어했지만..병사들에 대한 애정으로 국회 국방위 의원
일때 일반 병들 복지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계셨던것은 잘 아실겁니다.
요즘은 등산을 잘 안하거나 못하는 편이지만 예전에는 평소에 청계산을 자주 주말에 갔습니다.
청계산 매봉을 올라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특전사 희생 추모비가 서있는거 보셨을 겁니다.
등산할때마다 매번은 아니지만 자주 특전용사들에 대한 묵념을 했었습니다.
이 사고는 사실 기상으로 인해서 C123 수송기가 산중턱에 부딪히는 바람에 특전사 요원들이 희생된 안타까운 사건입니다.
1982년 6월1일 성남 비행장을 이륙한 수송기가 청계산 중턱에 부딪히는 바람에 53명의 특전사 요원들이 순직한 가슴 아픈 사건입니다.
이는 제2롯데월드에 환장한 가카 일파에게 일부 보수들중에서도 이 사례를 들면서 질타하였던 좋은 예입니다.
아무리 군사독재에 군병력을 자기 소모품같이 대우하던 시절이지만...최소한의 양심이 있었다면 그러지는 않았을거다.
제주일보에 나온 기사입니다.
26년 전 순직 장병 위령탑 현충시설로 지정
기사입력2008-09-16 08:00
대통령 경호임무 중 수송기 추락 장병들 희생정신 기리게 돼
26년 전 대통령 경호임무를 수행하던 중 순직한 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탑이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국가보훈처와 제주도보훈청은 지난 12일 관음사광장 충혼공원 특전사위령탑을 현충시설로 지정하면서 이날 특전사 제주훈련장에서 윤장희 대대장에게 지정서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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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탑이 현충시설로 지정됨에 따라 질곡의 역사 속에 묻혀 졌던 장병들의 공훈과 희생정신을 공식적으로 추모하게 됐으며, 사건의 실체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이와 관련 정부와 제주도는 추모행사 개최 등 활용방안을 강구하고, 조형물에 대한 건립과 관리를 지원해야 한다.
현충시설로 지정돼 ‘제주도 충혼비’로 명명된 위령탑은 1982년 2월 5일 대통령 경호작전 중인 C123 공군 수송기가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 추락하면서 3공수 707특수임무대대 장병 47명과 공군 조종요원 6명 등 53명의 순직 장병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특전사가 건립했다.
특전사령부는 지난 2006년 기체의 잔해와 유류품을 모은 유품함과 함께 추락기인 C123 수송기 모형도 함께 설치하면서 산 역사의 장으로 조성했다.
그러나 사고 직후 꽃다운 나이에 순직한 장병들에 대해선 ‘대침투 작전훈련 이동 중, 심한 악천후로 수송기가 한라산 중턱에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며 사건의 실체가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들의 임무는 대통령 경호임무인 ‘봉황새 작전’으로 밝혀졌다.
추락 사고기는 제주 연두순시와 제주국제공항 준공식에 앞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특전대원들을 미리 태워 출발시킨 공군기였는데 추락 후 대원들이 소지했던 탄약과 수류탄도 동시에 폭발하면서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한편 유족들과 특전사는 장병들이 순직한 매년 2월 5일과 현충일에 추모행사를 거행해 오고 있다.
아래 사진은 제주도에 있는 순직비입니다. 제주도 순직비는 가보지 못했지만.. 역시 자료 올립니다.
다음에 갈 기회가 있으면 꼭 방문하려 합니다.
제주도 경호작전 순직(2월 5일)
대통령 경호기 한라산 추락 1982년 2월5일 군 수송기 1대가 한라산에 추락해 타고 있던 국군 장병 53명 전원이 순직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당시 이 수송기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외곽 경호 임무를 맡았던 특전사 장병들이 탑승했던 것으로 알려져 경호를 위해 군 병력까지 동원했던 5공(共)시절 권력의 전횡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전해지고 있다. 군 수송기가 추락한 이후 5공의 절대 권력이 계속되는 동안 이 사건은 접근 통제로 세인들의 관심에서 사라져 있었으나 유족들은 악천후를 무시한 이동명령이 고귀한 젊음을 희생시켰다며 거세게 반발하는 등 한동안 진통이 계속됐다. (군 수송기 추락)
1982년 2월5일 제주국제공항에서는 하루 앞으로 다가온 신활주로 준공식을 앞두고 군사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제주공항에는 지난 3년여간 264억원이 투입돼 길이 3000m의 새 활주로 공사가 완료됨에 따라 보잉747기 등 대형 항공기 취항이 가능하게 됐으며 이를 기념해 전두환 대통령이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날 훈련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게 공중 납치돼 우간다의 엔테베공항에 억류돼 있던 에어프랑스 여객기에서 이스라엘 인질 104명을 무사히 구출해 유유히 사라졌던 ‘엔테베 작전’과 비슷했다. 아침부터 전개된 군사작전으로 제주공항은 쉴새없이 이.착륙하는 제트기의 굉음으로 뒤덮였으며 바다에는 군함이 여러 척 출동해 전시를 방불케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제주도경에 설치돼 하루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순시 최종 준비에 몰두하고 있던 대통령 경호지휘본부는 오후 들어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대통령의 제주 순시때 외곽 경비를 맡을 특전사 장병들을 태우고 제주에 오던 군 수송기 한 대가 도착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두절된 채 행방불명됐기 때문이었다.
사라진 군 수송기는 나중에 출발한 군용기가 도착한 후에도 행방이 묘연했다. 이에 따라 추락 사고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측되기 시작했으며 공군기가 출동해 제주해역에 대한 수색작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바다를 샅샅이 뒤져도 비행기 잔해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제주 근해에 대한 수색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한라산에 추락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당시 한라산 지역은 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친데다 눈까지 내려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성판악에 설치된 항공시설을 공항 시설로 잘못 파악해 착륙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점쳐졌던 것이다. 다시 방향을 선회해 한라산 일대에 대한 수색작업이 계획됐다. 이미 해는 저물어 어둠이 짙게 깔린 뒤였다.
한라산 일원에 대한 수색은 군사작전의 특성상 그날 다른 지방에서 들어온 특전사 병력 중심으로 조를 편성해 진행됐는데 각 팀의 인원은 30~70여명이었다. 이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정예병력이었지만 한라산 지리에는 문외한이었으며 눈 덮인 한라산에서 나침반에 의존해 길을 찾기는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긴급히 수색작전에 투입되다보니 장시간 겨울 한라산에 오를 준비조차 제대로 돼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한라산 지리에 능한 민간인들을 길잡이로 동원해 이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수색작업은 대원들의 생사마저 위협하는 고난의 길이었다.
먹을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허기와 싸우면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속을 헤치고 전진해야 했고 무전조차 제대로 터지지 않아 나무에 기어올라가 무전을 시도해야 했다. 한라산은 밤새 군용기에서 퍼부어대는 조명탄의 불빛으로 대낮처럼 밝았다. 수색대원들은 폐허가 돼버린 표고버섯 재배 움막 등에서 몸을 맞대고 추위를 피하며 잠시 숨을 돌리면서 수색을 강행했다.
수색대원들 가운데는 찰나에 운명이 뒤바뀐 대원도 여럿이었다. 당초 특전사 대원들은 여러 대의 수송기에 나눠 타고 제주로 향했는데 출발 직전 탑승할 비행기가 뒤바뀐 것이 생사의 갈림길이 된 것이었다. 이들은 ‘내가 죽을 건데 전우가 대신 죽게 됐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체 찾기에 혈안이 됐다. 그러나 눈덮인 광활한 한라산에서 기체를 찾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색대가 난항을 겪고 있을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한 대학 산악팀의 제보였다. 사고 당시 항공기 추락지점 인근에서 산악훈련을 실시했던 이들은 ‘요란한 소리를 들었다’고 제보했다.
이에 따라 이들이 제보한 지역을 중심으로 수색에 박차를 가한 결과 마침내 6일 오후 4~5시께 동탐라계곡과 서탐라계곡 사이의 작은 골짜기인 개미등 부근 적송지대(해발 1060m지점)에서 추락한 군수송기의 기체를 찾아낼 수 있었다.
기체가 발견된 곳은 등산로에서 한참 떨어진, 폭이 15m에 불과한 작은 골짜기여서 이들의 제보가 없었다면 수색은 한참 지체될 수밖에 없었을 상황이었다.
현장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밑둥부터 잘려 나가 있었고 작은 계곡에 처박힌 수송기는 꼬리, 몸통, 앞부분 등 3부분으로 쪼개지고 바퀴를 하늘을 향해 쳐든 채 뒤집혀 있었다. 주변에는 비행기 잔해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시신들이 흩어져 있었다. 추락때 불이 나면서 타다 보니 잘려 떨어진 손은 수분이 빠져 장난감처럼 조그맣게 오므라들어 있었고 군화와 다리만 따로 놀고 있는 등 현장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사고 현장은 즉시 민간인들의 접근이 엄격히 통제된 채 군인과 방위병들에 의해 시신 수습과 정리가 이뤄졌다.
20여일에 걸쳐 현장이 정비되자 기체는 폭파됐다. 한편 사고 다음날인 6일 국방부는 “지난 5일 오후 3시께 제주도지역에서 대침투작전 훈련중이던 C123군용수송기 1대가 악천후로 한라산 정상 부근에 추락,이 수송기에 타고 있던 육군과 공군 장병 53명 전원이 순직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짤막하게 공식 발표했다.
박종식 국방부 대변인은 “이 수송기는 이날 육군 7787부대 장병 47명과 공군 5672부대 소속 승무원 6명등 모두 53명을 태우고 훈련지역인 제주해안에 도착,착륙을 시도하던 중 갑자기 강한 북서풍에 의한 이상기류에 휘말려 한라산 정상 북쪽 3.7㎞지점에 추락했다”고 덧붙였다. 이날 대변인을 통한 국방부 발표에서는 대통령 경호에 관한 언급은 전연 없었으며 훈련중 사고였다는 점만 강조됐다.
한편 전 대통령은 사고 소식에도 예정대로 6일 오전 전용기편으로 제주공항에 도착해 낮 12시에 열린 활주로 준공식에 참석한 후 제주 순시에 나섰다. 전 대통령은 이틀간의 제주 체류기간에 군용기 추락에 대해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다가 이도하기 전에야 제주해역사에 마련된 순직 장병들의 빈소에 들려 고인들의 넋을 위로했다. (군용기 사고 이후) 군 수송기가 추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 지점에는 추락 지점을 알리는 원점비가 세워졌다. 또 그해 5월15일에는 박희도 당시 특전사령관과 군 관계자,유족들이 참가한 가운데 관음사 등반로 입구에 충혼비가 세워져 불의의 사고로 산화한 젊은 넋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가 유족들의 아픔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사고 발생후 내도한 유족들은 수송기가 추락한 현장을 찾아 가족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울부짖었다.
유족들은 해마다 현장을 찾아 불에 탔던 흙과 잿더미를 뒤지며 아픔을 달랬다. 이같은 과정에서 장병들이 소지했던 시계나 반지 등 쇠붙이가 발견되기도 해 유족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다시 겪어야 했다.
유족들은 유품이 발견될 때마다 ‘이것은 누구 것이다’며 서로 확인하고 마치 숨진 가족을 보듯 애지중지 품에 품고 자리를 떴다. 이처럼 유족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유족들은 명확한 진상 규명을 요구했지만 언론과 일반인들의 접근은 철저히 통제됐다.
그러다가 6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인 1988년 10월12일 제주도에 대한 국회 건설위원회의 국정감사 도중 김운환 의원(민주)이 공식 제기하면서 이 문제가 새롭게 부각됐다. 김 의원은 “기내에 타고 있던 정예 군인들은 군사 목적이 아니라 특정인에게 지나친 경호를 하기 위해 오다가 죽은 것이 아니냐”며 “누구를 위해 죽었는지 분명한 규명이 있어야만 원혼을 달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1989년 4월27일 제주일보(제주신문)는 사고 현장을 생생히 담은 사진을 처음으로 공개하면서 사고의 전말을 보도했다.
그해 9월17일 관음사 등반로 입구 충혼비 앞에서는 순직한 대통령 경호장병 53위에 대한 한가위 위령제 및 추모제가 순직 장병의 부모,미망인 등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장대비가 내리는 가운데 특전사 2.5유족친목회가 주최한 이날 추모제에서 유족들은 “대통령 경호는 경찰이 담당한다는 법을 초월,권력 남용으로 군인을 강제 동원하고 도저히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는 날씨에 강제로 비행기를 이륙시켜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또 대통령 경호임무로 행해진 ‘봉황새작전’이 사고 다음날 동계특별훈련(대간첩 침투작전)으로 명칭이 변경돼 서류가 조작됐다고 주장하며 관련자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기도 했다.
▲ 고 김준식 소령의 아내 최광선씨가 2차 장례가 치러진 뒤 남편의 묘역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이번 사건은 조종사의 착각으로 빚어진 사고다. 인명은 재천인데 어떻게 하겠느냐."
자신을 경호하기 위한 이른바 '봉황새 작전'을 수행하다 53명의 군인들이 몰사한 '82년 C123 공군 수송기 추락'
사고 보고를 받은 직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보인 첫 반응이다.
전 전 대통령은 당시 사건을 '조종사의 착각으로 빚어진 사고'라고 규정했다.
<오마이뉴스>가 단독 입수한 군 내부 자료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은
1982년 2월 7일 오후 2시 40분 제주 6해역사령부를 방문해 약 20여분간 구조작업관계 등을 보고받고 이같이 말했다.
사건발생 21시간 만의 일이다. 이 자료는 이번 <오마이뉴스>의 보도로 25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당시 군 수색대는 82년 2월 6일 오후 5시경에야 처음으로 사고현장을 발견했다.
이들이 상부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탐라계곡은 1100m 고지로 기상불량(진눈깨비)과
20㎝의 눈이 쌓여 조사활동이 불가능"했으며 "다음날(7일) 현지로 다시 출동해 조사를 벌일 예정"이었다.
시간을 역산하면 군 수색대가 사고현장에서 본격적인 수습을 시작한 지 7시간 만에
전 전 대통령이 '조종사 착각'으로 사고 원인을 못 박은 꼴이다.
사망자는 53명인데 찾아낸 주검은 총 90구?... 군 당국의 엉터리 조사
C123은 어떤 비행기?
한국공군이 운용한 기종은 C-123K(Provider)로 1973년 도입됐다.
총 22대가 공군의 주력 수송기로 부대이동 및 전개, 장비·물자 수송, 공중화물 투하 등에 활용됐으나 1994년 CN-235 중형수송기 도입 이후 완전 퇴역했다.
C123은 1949년 10월 14일 최초 비행했으며, 엔진은 P&W사 R-2800-99W 성형 피스톤 엔진×2기, 출력은 2300hp×2, 길이는 23.3m 폭은 33.5m 속도는 454km/h 항속거리는 4828㎞이다.
무게는 1만5800㎏이며 수송능력은 총 60명, 화물은 6800㎏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군 수색대는 82년 2월 7일 오전 8시부터 사고 현장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사고는 이틀 전인 5일 오후 3시 15분경 발생했다.
이 수습 작업은 오후 5시까지 총 9시간동안 계속 됐다. 수색대원 104명이 작업에 동원됐고,
이들은 한라산 개미등 계곡 일대를 조사했다.
9시간의 수색 끝에 사고현장에서 총 37구의 사체를 찾았으며 이 가운데 20구는
신원이 확인됐으나 17구는 식별이 불가능했다.
이어 군 수색대는 이튿날인 8일 사망자 53명 가운데 찾지 못한 시신 16구를 모두 찾아냈다고 보고했다.
연이어 같은 날 오전 11시 55분에는 사고기체를 현장에서 2차례 폭파했으며,
오후 1시 5분에 사체 14구, 오후 3시 30분에 23구의 사체를 더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 자료에 의하면 82년 2월 7일과 8일 양일 사이 군 당국은 53구의 주검을 전원 찾아낸 것이 된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일단 계산이 안 맞는다.
사망자는 53명인데, 찾아낸 주검은 총 90구다. 숫자가 조작됐거나 사체의 일부분을 한 구로 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유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82년 5월 15일 '100일 위령제' 이후 한라산에서 찾아낸
'수습 안 된 주검'이 정부미 포대자루로 세 포대나 된다.
포대자루 속의 시신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것으로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지 분간할 수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당시 군 당국은 유가족들이 찾아낸 이 시신더미를 제주 화장터에서 화장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뿌리는 등 2차 장례식을 올린 바 있다.
따라서 군이 작성한 이 문서에 거론된 '사망자 53명 전원 구조'는 거짓말일 공산이 크다.
군 당국이 정말 '전원 구조'했다면 82년 5월 시신더미는 그 자리에 없었어야 옳다.
실제 군 당국은 당시 시신 구조에 상당히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군 당국은 "사고 장소 일대에 눈이 20㎝ 정도 쌓여있고 진눈깨비로 시계가 매우 불량하고
경사가 가파르고 험준해 작업병력이 로프에 의지한 채 사체를 이동하고 있다"며
"완파된 기체 밑에 사체가 깔려 있어 구조작업이 늦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유족 이재수(58·고 이재훈 준위의 누이)씨의 증언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이다.
이씨는 지난 13일 보도된 <오마이뉴스>의 "발굴탐사① 전두환 경호 가다 몰사 당한 53명…"
기사 인터뷰를 통해 "날씨가 춥고 기상도 안 좋은 상태에서 군인들도 힘드니까
사체를 제대로 수습하지 않고 대충 정부미 포대자루에 담아 땅에 묻고 끝냈다"고 밝힌 바 있다.
▲ 제주 C123 공군 수송기 추락사고 이후 두번째로 진행된 장례식. 고 허창훈 상사의 아버지 허윤경씨가 유골함을 들고 장례식장에 입장하고 있다. 그 뒤를 따르는 빨간 티셔츠의 여인은 고 천성목 상사의 아내 염영희씨. 염씨는 2004년 남편을 따라 세상을 등졌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전두환 "병사 사기진작 대책 강구, 모든 것 잊고 복귀하라"
당시 군 당국이 작성한 자료에 의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은 사건에 대해 보고
받은 후 이번 사건은 조종사의 착각으로 빚어진 사고"라며 "인명은 재천인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안타까워하시면서 희생자의 명복을 빈다"고 말한 것으로 돼있다.
또한 전 전 대통령은 당시 박희도 특전사령관과 김두청 707대대장에게
"병사들의 사기진작 대책을 강구하고 대대장 책임 하에 15일간 6해역사의
협조로 제주도 취약지역 수색활동 등의 훈련을 실시한 후 모든 것을 잊고 복귀하라"
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박희도 특전사령관은 전 전 대통령에게 "희생자 전원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1계급 추서해 달라"고
건의한 것으로 돼 있다.
실제 봉황새 작전으로 희생된 53명의 장병 모두에게 정부는 훈장과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은 사고로 숨진 장병들이 속해있던 육군 쪽 인사들은 이 사고 이후에도 승승장구
했다는 사실이다. 박희도 특전사령관은 육군 참모총장까지 진급했고,
정만길 특전사령부 참모장도 국방대학원장(중장)을 지냈다.
또 사고를 당한 부대원들의 직속 지휘관이었던 김두청 707대대장도 대령으로 진급했다.
유가족들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박희도·정만길·김두청 3인의 승진을 납득하기 어렵다.
무려 53명이나 되는 장병이 사망한 이 사고의 책임을 지고 군복을 벗었어야 옳았는데도
오히려 더 승승장구했다"며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 특전사 2·5유족친목회가 88년 12월 17일 이재형 국회의장 앞으로 보낸 국회 청원서.
ⓒ 오마이뉴스 남소연
유족들 "진상규명 해달라" 청원... 눈감은 국회
82년 신군부의 위세 때문에 진실규명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었던 유가족들은
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국회와 청와대를 찾아다니며 청원서를 제출했다.
88년 10월 14일 김운환 민주당 의원은 국회 건설위원회 제주도 국정감사에서
"사고 당시 당국은 군 작전 중 사고라고 발표했으나
사실은 대통령의 경호목적이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김 의원은 "공군 수송기가 추락해 정예공수부대원들이 희생된 이 사건을 철저히 규명하겠다"고 나섰으나,
그 뒤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지는 못했다.
김 의원의 폭로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파장이 크지 않자
'특전사 2·5유족친목회(회장 고 이재훈)는 같은 해 12월 17일
당시 이재형 국회의장(민정당·7선 의원) 앞으로 청원서를 보냈다.
탄원 내용은 사체 유기와 진상규명 두 축으로 구성돼 있다. 청원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82년 2월 5일 전두환 대통령께서 제주도 년두 순시와 제주 국제공항
준공식 행사로 인해 특전사 요원 450명을 제주도에 투입하라는 명령과
이를 수송키 위해 군수송기를 이륙시키라는 명령이 청와대로부터 하명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눈도 많이 왔고 기후가 극히 악조건이었으므로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 통제국에서는 모든 비행기 이륙을 통제했고
제5전술공수비행단에서도 C123 군 수송기로는 도저히 이륙할 수 없다는 의견을 두 번씩이나 보고했다.
그럼에도 청와대로부터 강력한 지시에 의해,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것이 군인이기에 2월 5일 오후 3시에 이륙시켰으며
(박희도) 특전사령관은 이러한 악조건을 알면서도 특전사 요원에게
낙하산도 휴대시키지 않고 탑승시켜 전두환씨에게 바쳐지는 제물로 죽게 만들었다."
유족들은 이 탄원서를 통해 ▲하늘의 뜻을 무시하고 군인은 죽어도 좋다는
'살인마 일당'을 철저히 규명해 처벌해 달라
▲특수 목적으로 국가의 많은 재정을 투자해 양병한 군인을 대통령이라고 해서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시켜 이 같은 비리사건이 단절되도록 조처해달라
▲악조건의 기후임에도 자기의 출세를 위해 권력 앞에 충성을 아부해 위험 사실을
알고도 죽음의 길로 보낸 특전사령관 이하 책임자를 엄중 처벌해 달라고 주장했다.
사체 유기와 관련해서도 "82년 5월 15일 충혼비 제막식에 참석한 유가족들은
원점비가 있는 사고현장에서 군복과 시계 등 많은 유물과 사체에 10여 마리의 까마귀와 쉬파리가
앉아 뜯고 있는 상황을 목격했다"며 "구두를 신은 다리와 팔, 뼈와 살을 모아 장례를
한번 더 치렀어야 했다"고 고발했다.
이어 "2차 장례 뒤 비행기 잔해와 시체를 즉각 치워달라고 부탁했지만
높은 지대에 있다는 이유로 재폭파시켜 그 밑에 깔려 있던 유해는 산산조각이 났다"며
"머리가 터지고 골이 튀어 나온 것을 유족들이 손으로 파내 항공편으로 가져온 뒤
서울 공항동의 허윤경 유가족 집에서 염을 한 적도 있다"고 밝혔다.
또 "이 시신들을 국립묘지에 안장하려 했으나 국방부의 반대로 다시 제주도로 인도해
충혼비 뒤에 안치하고 3차 장례식을 올렸다"고 설명했다.
실제 제주도 한라산 관음사 매표소 부근에 마련된 특전사 C123기 추락사고
관련 충혼비 뒤편에는 시멘트로 마감된 흔적이 있다.
고 이재훈 준위의 누이 재수씨는 "겉에는 유물이 들어있다고 써있지만 실제로는 유골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검찰에 살인혐의로 전두환 고소하기도
▲ 특전사 2·5유족친목회(회장 고 이재훈)가 89년 12월 서울지검에 제출한 고소장(왼쪽)과 비행기 사고 이후 유가족들이 시달린 피해현황 자료.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김운환 의원의 폭로와 유족들의 청원에도 정부당국이 진상규명을 위한
절차에 돌입하지 않자, 유족회는 89년 12월 6일 서울지검에 전두환 대통령,
이희근 공군 참모총장, 주영복 국방장관, 박희도 특전사령관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혐의와 직권남용, 허위공문서 작성, 허위작성공문서 행사 등을 죄목으로 고소했다.
고소장에서 이들은 "82년 2월 5일 새벽까지 눈이 내리고 2차 대전 때
사용하던 낡은 C123(최초 비행 1949년 10월 14일) 수송기가 이륙하기에는
너무나 악조건의 기후였다"며 "김포·김해·제주공항에서도
항공기가 이륙하지 못하는 상태여서
수원항공 통제국(제10전투비행단 운항관제대)에서도 통제가 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특히 "박희도 특전사령관이 당시 부하들의 봉급에서 하사 7000원, 중사 이상 1만5000원,
장교 3만원씩 공제해 유가족과 상의하지 않고 충혼비와 원점비를 제작해
비문에 자신의 이름을 도용, 기재했다"며 "이것은 유가족과 영령들을 우롱한 행위이자
군인을 정치적 도구로 악용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유족회는 이 고소장의 마지막 부분에 "88년 11월부터 89년 5월까지
5차례에 걸쳐 정부에 탄원했으나 아무도 일언반구 사과가 없었다"며
"법 앞에 호소하는 것은 온 국민 앞에 사실을 사실대로 파헤쳐서
민주주의 아래 인권과 생존권이 얼마나 귀중한지 알리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독재정권 시절 빚어진 끔찍한 군 사고... 진상규명에 손놓은 정부
수사에 들어갔던 서울지검(담당검사 신광옥)은 수사에 3년이란 시간을
끈 끝에 92년 12월 26일자로 살인 혐의에 대해서는 '혐의 없음'을,
직권남용·허위공문서 작성·허위작성 공문서 행사 등의 혐의에 대해서는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오마이뉴스>는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신광옥 검사(현 법무법인 다울 대표변호사)에게서
당시 검찰의 수사종결 결정에 대해 설명을 듣고자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유족들이 바랐던 이 끔찍한 비행기 사고의
진실규명은 결국 이뤄지지 않은 채 유족들은 고통에 시달렸다.
89년 소송 당시 이들이 제출한 유가족 피해현황에 따르면,
박봉우(고 박진수 준위의 아버지)씨는 사고 당시 졸도해 척추장애로 7년간 병상에서 누워 있었다.
이밖에 다른 유족들도 고혈압이나 신경마비, 백혈병, 악성갑상선, 신경성위장병,
정신장애로 인한 빈혈증세, 좌골신경통, 정신이상, 신경통으로 인한 호흡장애와 속병,
신경쇠약, 뇌진탕 등을 호소했다.
사고가 발생한지 25년이 흐른 지금, 이미 많은 유가족들이 세상을 떠났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오는 발길도 뜸해졌다.
10년 전 만해도 어머니, 아버지들이 제주 사고현장을 찾아다녔지만
지금은 원점비가 휑해질 만큼 인적이 드물다. 조릿대 등 잡풀을 정리하지 않아 원점비를 찾아가기조차 힘들다.
고 김영용 소령의 아내 김귀선(57)씨는
"잊혀진 사건이 다시 살아나 끔찍하지만 이제라도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며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이제라도 보고 싶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전두환 이 개새끼를 계속 살려두고 싶지 않습니다..이런데도 호국의 영웅이니 떠드는 전빠 새끼들 내앞에 나타나봐라.
정말 마귀같은 놈이죠.. 전두환. 괜히 전두환을 미워하는게 아닙니다.그는 모든 인명을 경시하였습니다.하기야 그렇게 경시했으니 광주학살을 했지요. 사실 저는 전두환은 군사반란으로 다시 잡아 처넣을수 있는것이 아르헨티나의 사례를 들어 영삼옹의 사면을 뒤집으면 된다 봅니다. 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을때는 위에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혐의와 직권남용, 허위공문서 작성, 허위작성공문서 행사등으로도 충분히 잡아넣을수 있습니다.저것만 허위공문서 작성이 있었던건 아니니까요..문제는 잡아넣을 의지가 전혀없는 지금 정부의 문제입니다.
문제는 당시 공소권없음을 하였던것이 걸리는데..이런점때문에라도 특별법이 있어야죠.. 5.18 관련 이야기해볼까요?? 1995년7월18일에 검찰이 5.18관련자들에게 공소권 없음..즉 재판을 수사기관인 검찰이 청구를 하지 않는결정을 내려 반발이 심했죠.당시 장윤석 검사는"피의자들이 정권 창출 과정에서 취한 '5·18' 진압 등 일련의 행위는 헌법질서를 바꾸는 고도의 정치 행위로서 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이른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희한한 논리를 내놓았지만 1995년 12월21일 5.18 특별법 만드신거 아시지요? 문제는 의지입니다. 의지. 그리고 검찰을 수술해야 할 또 하나 이유이구요.
댓글이 자꾸 늘어나는거 같은데 그래서 선거가 중요하고 정권교체가 중요하다는것이지요.. 현 정부들어서 전두환이 저리 설치는거도 이명박같은 자가 대통령이니 제대로 안돌아가는겁니다. 명박이 형 상득이가 민정당 출신 국회의원부터 한건 아시죠? 그리고 새누리 보십시요...당시 민정계가 많이 줄었다 해도..현 국회의장 강창희는 하나회출신입니다. 자기는 그당시 어린 장교라 모른다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었지만.. 하나회 출신인것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거기다 그네옹주 십상시들이 3공~5공에서 요직을 겸한 인사들이니 말 다했지요. 반성이라도 하면 반정도는 용서할까 말까인데 문제는 그때를 반성 못하고 그리워한다는겁니다.
첫댓글 살인마 마귀같은 넘입니다,지 목숨 하나 위해....그 넘이 탄 비행기는 왜 안 떨어지나??
정말 마귀같은 놈이죠.. 전두환. 괜히 전두환을 미워하는게 아닙니다.그는 모든 인명을 경시하였습니다.하기야 그렇게 경시했으니 광주학살을 했지요. 사실 저는 전두환은 군사반란으로 다시 잡아 처넣을수 있는것이 아르헨티나의 사례를 들어 영삼옹의 사면을 뒤집으면 된다 봅니다. 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을때는 위에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혐의와 직권남용, 허위공문서 작성, 허위작성공문서 행사등으로도 충분히 잡아넣을수 있습니다.저것만 허위공문서 작성이 있었던건 아니니까요..문제는 잡아넣을 의지가 전혀없는 지금 정부의 문제입니다.
문제는 당시 공소권없음을 하였던것이 걸리는데..이런점때문에라도 특별법이 있어야죠.. 5.18 관련 이야기해볼까요??
1995년7월18일에 검찰이 5.18관련자들에게 공소권 없음..즉 재판을 수사기관인 검찰이 청구를 하지 않는결정을 내려 반발이 심했죠.당시 장윤석 검사는"피의자들이 정권 창출 과정에서 취한 '5·18' 진압 등 일련의 행위는 헌법질서를 바꾸는 고도의 정치 행위로서 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이른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희한한 논리를 내놓았지만 1995년 12월21일 5.18 특별법 만드신거 아시지요? 문제는 의지입니다. 의지. 그리고 검찰을 수술해야 할 또 하나 이유이구요.
그리고 전두환당시 전두환의 직권남용, 각종 범죄..고의에 의한 살해..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해등등..다 찾아내면 아마 전두환과 그졸개들은 지옥에 가서도 형을 살아야 할정도로 엄청 많을겁니다.
댓글이 자꾸 늘어나는거 같은데 그래서 선거가 중요하고 정권교체가 중요하다는것이지요.. 현 정부들어서 전두환이 저리 설치는거도 이명박같은 자가 대통령이니 제대로 안돌아가는겁니다. 명박이 형 상득이가 민정당 출신 국회의원부터 한건 아시죠? 그리고 새누리 보십시요...당시 민정계가 많이 줄었다 해도..현 국회의장 강창희는 하나회출신입니다. 자기는 그당시 어린 장교라 모른다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었지만.. 하나회 출신인것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거기다 그네옹주 십상시들이 3공~5공에서 요직을 겸한 인사들이니 말 다했지요. 반성이라도 하면 반정도는 용서할까 말까인데 문제는 그때를 반성 못하고 그리워한다는겁니다.
네 정권교체만이 살길입니다 우리 존심 지키는 길이기도 합니다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