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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추적! 퇴계선생 스캔들 날조사건
이장희 추천 0 조회 86 16.01.04 22:1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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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기자의 新천장지구

추적! 퇴계선생 스캔들 날조사건

 

<‘유석재의 新천장지구’는 오래된 고전(古典)의 책갈피 속에서 디지털이 지배하는 21세기의 삶에도 여전히 유효한 ‘물통속의 물 한방울’을 찾는 시리즈입니다.>

 

士忘去就, 禮廢致仕, 虛名之累, 愈久愈甚, 求退之路, 轉行轉險.

사망거취, 예폐치사, 허명지루, 유구유심, 구퇴지로, 전행전험

 

선비가 거취를 망각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예도 모르게 돼, 허명이 쌓이는 것이 갈수록 심해지고 퇴로를 구하는 길이 갈수록 험난해졌다.

―‘퇴계전서(退溪全書)’ 상(上)

 

 

이유태 화백의 퇴계 영정(왼쪽)과 신윤복 '미인도'를 변형한 그림. 

 

 

기생놀음이 뭐가 자랑스럽냐고?

 

“양반들이라는 게 다 그렇게 기생놀음이나 한 거지, 뭐.”

 

10여년 전, 충북 단양 출신의 한 친구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이죽거리는 표정에선 ‘아무리 유명한 양반이라도 별 수 있었겠느냐’는 조소가 묻어났습니다.

 

그 ‘별 수 없는 양반’이란 다름아닌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었습니다. 한국철학사를 대표하는 학자로 성인(聖人)의 반열에까지 올랐던 퇴계를 그저 ‘그렇고 그런 인물’로 치부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처음 그의 고향이 단양이라는 것을 알고 제가 물어봤던 겁니다. “퇴계가 단양군수를 지낼 때 유명한 기생과 로맨스를 펼쳤다는 얘기를 아느냐”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칠십 평생을 고매한 철인(哲人)으로 살았다고 여겨지는 퇴계의 딱딱한 삶에서, 조금이나마 인간적인 체취와 풍류를 드러내는 에피소드였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더구나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되고 나서도 한참이나 흐른 지금에는 이 이야기를 오히려 퇴계의 치부를 드러내는 약점처럼 보는 사람도 없지 않게 된 것입니다.

 

왜? 그깟 ‘풍류’라는 건 결국 성매매의 다른 표현 아니냐. 조선시대 관기(官妓)란 사실상 공창(公娼) 아니었느냐. 이렇게 보는 시각이 만만치 않게 된 것입니다.

 

소설가 복거일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생의 생애를 생각해 보세요. 전형적인 성노예지요. 애비가 누군지도 모를 아기를 낳아서 또 기생으로 키우는 겁니다. 이는 남북전쟁 이전 미국의 흑인 노예보다 더 불행한 삶입니다.”

 

 

소설가 복거일씨. /조선일보 DB

소설가 복거일씨. /조선일보 DB

 

 

퇴계의 마음을 훔쳤다는 여인, 두향

 

자, 일단, 도대체 퇴계의 ‘그 에피소드’라는 게 과연 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것 같습니다만, 예전 단양군청 홈페이지의 ‘고을 설화’난에는 이 에피소드의 줄거리를 대략 이렇게 적어 놓았었습니다.

 

그 고매한 성현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여인의 이름은 바로.

 

두향(杜香).

 

외모도 몸매도 아름다웠을 뿐 아니라, 거문고와 시문에도 뛰어났으며, 그윽한 매화 향기와도 같은 기품을 지녔다는 조선 명종조의 그 단양군 소속 관기.

 

 

전(傳) 김홍도 '미인 화장', 서울대박물관 소장. 

전(傳) 김홍도 '미인 화장', 서울대박물관 소장.

 

 

새로 단양군수로 부임한 사또가 누군지 봤더니, 바로 퇴계 선생! 그 높은 학식과 인품을 보고 홀로 퇴계를 사모하게 된 두향. 그러나 퇴계는 거문고와 난초 그림에 뛰어난 두향을 그저 묵객(墨客)처럼 대했을 뿐…

 

퇴계가 단양을 떠난 뒤 기적(妓籍)에서 빠진 두향은 옛날 퇴계를 모시고 함께 노닐던 남한강 강선대(降仙臺) 아래 초막을 짓고 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을 남깁니다. “내가 죽거든 그분이 즐겨 찾던 이곳에 묻어 주세요.”

 

‘설중매’와도 같던 두향을 마침내…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면 더 살이 붙은 스토리도 나옵니다.

 

열여덟 살 꽃다운 나이의 두향이 서른 살이 많은 퇴계에게 반했지만, 풀 먹인 안동포 같은 님 앞에서 그저 애간장만 태울 뿐이었습니다. 이미 두 번이나 상처(喪妻)한 아픔을 겪었던 퇴계는 쉽게 새 여인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떨기 설중매(雪中梅)와도 같았던 두향을 마침내 받아들이게 되고…

 

더 나아가, 퇴계-두향 커플은 ‘단양팔경’의 지정에도 관여했다는 겁니다.

 

퇴계가 단양의 절경들을 ‘단양팔경’으로 지정했을 때 기지를 발휘한 인물이 바로 두향이었다는 얘깁니다. 도담삼봉, 석문, 사인암,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구담봉, 옥순봉을 차례로 적어 ‘팔경’으로 삼으려 했는데, 아뿔싸! 옥순봉은 단양이 아니라 청풍에 속한 곳이 아닌가? 이때 두향이 나섭니다.

 

“사또! 청풍군수 이지번(李之蕃)과는 무척 가까운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를 찾아가서 옥순봉의 관할을 단양으로 바꾸도록 하시지요.”

 

이렇게 해서 자칫하면 ‘단양칠경’이 될 뻔한 것이 ‘단양팔경’으로 확정됐단 이야기. 무척 그럴싸합니다.

 

 

단양 옥순봉. /조선일보 DB 

단양 옥순봉. /조선일보 DB

 

 

이별할 때 두향은 눈물을 뿌리며 퇴계에게 매화꽃을 선물합니다. 퇴계는 평생 이 꽃을 보기를 두향을 보듯 합니다. 그 후 20년 넘게 퇴계를 그리워하던 두향은 퇴계의 별세 소식을 듣고 통곡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얘깁니다.

 

무덤, 축제에 뮤지컬까지

 

스토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적’도 남아있습니다. 단양 장회나루 건너편에 있는 두향묘가 그것입니다.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강선대는 물 속에 잠겨 버리고, 가끔 수위가 낮아질 때만 모습을 드러내게 됐습니다. 그러나 두향묘는 1984년 물에 잠길 염려가 없는 위쪽으로 이장됩니다.

 

 

뮤지컬 '450년의 사랑'. /안동시 사진 

뮤지컬 '450년의 사랑'. /안동시 사진

 

 

단양군에서는 1979년부터 매년 두향제(杜香祭)를 열었고, 지금은 ‘단양팔경축제’로 확대됐습니다. 2009년에는 이 이야기를 소재로 한 퓨전 국악 스토리텔링 뮤지컬 ‘450년의 사랑’이 등장했습니다.

얼마전 작고한 소설가 최인호씨도 소설 ‘유림’에서 이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지금도 단양팔경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인 것처럼 다가옵니다. 남한강 푸른 물은 수백 년 전 지고지순한 사랑과 수절의 눈물겨운 스토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말없이 유유히 흐르기만 하고…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이 이야기는 사실일까요?

 

2006년의 일입니다. 저는 퇴계학 분야에서 대단히 의미있는 업적을 이룬 학자 한 명을 만나게 됩니다. 퇴계학연구원 수석연구원인 정석태 박사였습니다. 그는 2600여 쪽 4권 분량의 거질(巨帙)인 ‘퇴계선생 연표 월일조록(月日條錄)’이란 책을 냈습니다. 20년 동안 원고지 1만5000장 분량으로 정리한 자료였습니다.

 

실로 엄청난 작업이었습니다. 퇴계의 저작과 일기는 물론, 언행록과 관련 인물들의 문집,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모든 문헌에서 자료를 뽑아낸 뒤 퇴계 70년 생애의 연·월·일을 면밀히 고증했습니다. 그리고 해당 원문을 정확히 그 타이밍에 맞춰 실었습니다. 이것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는 편년체(編年體)로 엮은 것입니다.

 

 

정석태 박사의 '퇴계선생 연표 월일조록' 출간을 다룬 2006년 6월 6일 A18면 조선일보 기사. 

정석태 박사의 '퇴계선생 연표 월일조록' 출간을 다룬 2006년 6월 6일 A18면 조선일보 기사.

 

 

한마디로 퇴계에 관한 모든 사실은 이제 이 책으로 인해 ‘빠져나갈 구멍’이 없게 된 것입니다. 퇴계가 과거시험에서 다른 과목은 모두 A학점을 받았지만 오직 ‘주역’만은 C학점을 받았다는, 그러니까 젊은 시절의 퇴계는 아직 ‘주역’을 통달하지 못했다는 자료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퇴계가 기대승(奇大升)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8년 동안 사칠논변(四七論辨)이라는 학술 논쟁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자료를 분석해 보니 딱 2년 만에 끝났다는 발견도 있었습니다. 형이상학적 문제를 오래 끌지 않고 곧바로 인성 수양과 사회개혁이라는 실질적인 문제로 들어갔다는 겁니다.

 

‘단양군지’와 ‘퇴계일화선’의 엇박자 미스터리

 

이렇게 상당히 고차원적인 내용을 말하는 인터뷰 도중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 두향이 얘기는…”

 

정 박사는 ‘그거 물어볼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씩 웃더니 단칼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런 기록이 없어요.”

 

뭐시라?

 

이후 저는 이 얘기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 추적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두향’이란 인물이 과연 실존인물인지부터 조사했습니다. 단양에 두향이란 기생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조선 후기 임방·이광려 등이 옛 관도(官道) 근처에 남아있던 두향묘의 정경을 읊은 시(詩)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 어디에도 ‘퇴계와의 관계’를 언급한 곳은 없었습니다. 그저 ‘외로운 무덤이 길가에 있는데 거친 모래밭에 꽃이 피었다’는 식입니다.

 

지금까지 출간된 모든 연구서 중에서, ‘퇴계-두향 관계’를 언급한 최초의 책은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1980년 퇴계학연구원이 출간한 ‘퇴계일화선(退溪逸話選)’.

 

 

1980년 퇴계학연구원이 출간한 '퇴계일화선'. 

1980년 퇴계학연구원이 출간한 '퇴계일화선'.

 

 

이 책 제30화 ‘단양기(丹陽妓) 두향의 아향(雅香)’에 바로 그 얘기가 등장합니다.

 

‘퇴계도 두향의 비상한 재주와 비범한 총명을 무척 어여삐 여겨 그녀를 수청기생으로 용납하였다.’

‘두향은 퇴계의 거룩한 정신세계에 크게 감화되어, 마침내 퇴계를 진심으로 사모하게 되었다.’

‘내가 죽거든 내 무덤은 강가에 있는 거북바위 옆에 묻어다오. 거북바위는 내가 퇴계 선생을 자주 모시고 가서 시를 말하고 인생을 논하던 곳이다.’

 

 

'퇴계일화선' 중 퇴계와 두향의 관계를 언급한 내용. 

'퇴계일화선' 중 퇴계와 두향의 관계를 언급한 내용.

 

 

안타깝게도 이 책에는 각주도 후주도 없습니다. 그래도 퇴계학연구원에서 나온 책인데, 뭔가 근거가 있지 않을까? 정석태 박사 말대로 기록이 없다 해도, 단양 현지에서 오래도록 전해지는 설화라면 어디엔가 그 설화를 기록한 내용이 있지 않을까? 생각 끝에 군지(郡誌)를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찾은 결과 단양군이 ‘단양군지’를 가장 처음 출간한 것은 1977년이었습니다. 그 책에 ‘강선대’ 항목에 두향의 이름이 등장했습니다. 그곳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명기(名妓) 두향의 묘가 있다.’

 

이럴수가? 두향과 퇴계를 연결시키는 그 어느 단서도 이 책에는 없었습니다. 퇴계가 단양군수를 지냈다는 기록에서도 ‘두향’은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1977년까지만 해도 그 어떤 기록에서도 ‘퇴계-두향’의 관계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렇다면.

 

‘단양군지’가 출간된 것은 1977년.

 

‘퇴계일화선’이 출간된 것은 1980년.

 

그 3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모든 것은 ‘소설’에서 비롯됐다!

 

바로 그 3년 사이에, 한 소설가의 연작 장편소설이 나왔습니다. 소설의 제목은 ‘명기열전(名妓列傳)’, 저자는 정비석(鄭飛石·1911~1991)이었습니다.

 

 

소설가 정비석씨. /조선일보 DB 

소설가 정비석씨. /조선일보 DB

 

 

‘성황당’ ‘자유부인’ 등의 소설로 한국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정비석씨는 노년에는 주로 역사소설을 썼습니다. 1984년에 출간한 ‘소설 손자병법’은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면서 신생 출판사인 고려원을 약진하게 할 정도의 노익장을 과시합니다. 1970년대 후반에 쓴 ‘명기열전’은 1977년 이우출판사에서 초판 7권이 출간됐고, 이후 고려원에서 ‘미인별곡’이란 제목으로 재출간돼 1990년대까지도 서점가 한 코너를 장식했습니다. 그만큼 널리 읽혔다는 얘깁니다.

 

 

정비석씨가 1976~1979년 쓴 '명기열전'을 1980년대 고려원에서 재출간한 '미인별곡'. 사진의 책은 1996년에 나온 2판이다. 

정비석씨가 1976~1979년 쓴 '명기열전'을 1980년대 고려원에서 재출간한 '미인별곡'. 사진의 책은 1996년에 나온 2판이다.

 

 

지역별로 유명한 옛 기생들의 삶을 소설로 엮은 이 책 ‘충청도’ 편에 두향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 스토리에 퇴계가 등장합니다.

 

실로 이 책은 지금 알려진 모든 두향 설화의 원전(原典)이라 할 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두향이 10대 후반의 나이로 퇴계의 인품을 흠모했고, 거문고를 잘 탔으며, 퇴계 사후 자결했다는 이야깁니다. 심지어 단양팔경의 획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얘기까지, 이 소설에 다 들어있습니다.

 

 

'미인별곡' 제3권에 실린 두향 스토리. 

'미인별곡' 제3권에 실린 두향 스토리.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도저히 우리 세대 작가는 쓸 수 없는 문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서정적이고 유려하면서도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질감이 생생히 살아있는 문체는 퇴계와 두향의 ‘첫날밤’을 이렇게 극적으로 표현합니다.

 

 

'명기열전(미인별곡)' 두향편 중 절정을 이루는 대목. 

'명기열전(미인별곡)' 두향편 중 절정을 이루는 대목.

 

 

‘두향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향로(香爐)에 향불부터 피웠다. 거룩한 어른을 몸으로 모시려는 이 밤, 방안에서는 향기가 진동해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방안에 향기가 가득히 풍겨 오자, 두향은 정신이 황홀해지며 몸이 꿈속을 헤매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고대했던 이 밤이었던가. 화촉을 밝히고 원앙금침을 내려까는 두향은 자기 몸에서도 향기가 풍기는 듯한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하략)’

 

마침내 밝혀지는 ‘퇴계일화선’의 정체

 

정비석씨는 무엇을 근거로 이 소설을 썼던가? 사실, 소설을 쓰는 데 무슨 근거가 필요하겠습니까. 소설에서 두향이 퇴계와 관계를 가졌든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졌든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소설인데요.

 

그런데 이 이야기는 소설로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명기열전’의 두향편은 액자소설 형식이고, 소설 본문의 앞뒤에는 정비석씨의 단양 기행문이 실렸습니다. 정비석씨는 퇴계 문중의 인사, 구체적으로는 당시 연세대 이가원(李家源) 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두향편을 썼다고 밝혔고, 자신이 직접 두향묘를 답사한 뒤 최만식(崔萬植) 단양군수를 찾아가 두향묘의 수몰 대책을 세울 것을 당부했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비석씨의 ‘발굴’에 의해 두향묘는 안전하게 이장됐던 셈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소설’ 이전에 나온 기록 중 ‘퇴계-두향의 관계’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한 기록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니, 이 모든 게 ‘소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아까 언급한, 1980년에 퇴계학연구원에서 낸 ‘퇴계일화선’은 어떻게 된 걸까요? 그 책은 도대체 누가 쓴 책이었을까요? 혹시...?

 

그렇습니다.

 

‘퇴계일화선’의 저자는, 바로 ‘명기열전’을 쓴 정비석씨였습니다.

 

현재 두향묘 옆에 서 있는 비석에는 ‘퇴계-두향의 관계’에 대한 근거 문헌을 이렇게 적어 놨습니다.

 

 

두향묘 옆에 세워진 묘비. 두향 이야기의 출전이 과연 어느 책인지 드러남. 

두향묘 옆에 세워진 묘비. 두향 이야기의 출전이 과연 어느 책인지 드러남.

 

 

‘명기열전’(列傳을 烈傳으로 잘못 씀)이라고요?

 

네, 그건 바로 정비석씨의 소설이었습니다.

 

“퇴계는 단양에서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명기열전’에 거의 완성본의 형태로 등장했던 ‘퇴계-두향 스토리’는 이후 몇십년 동안 점점 살이 붙습니다. 마침내는 ‘퇴계의 별세 소식을 들은 두향이 강선대에 올라 남한강 푸른 물에 꽃다운 몸을 던지고...’ 라는 등 소설에도 없는 얘기까지 생겨나게 됩니다.

 

정석태 박사에게 다시 물어봤습니다. “아니, 그래도 퇴계가 단양군수를 지내면서 두향을 가까이 했을 가능성이나 개연성은 있는 것 아닙니까?”

 

정 박사의 설명. 퇴계가 단양군수로 부임했던 1548년(명종 3년)은 퇴계 생애 중 가장 정치적으로 위험했던 시기였습니다. 퇴계는 그보다 3년 전 일어났던 을사사회에서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낙향합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만 정적(政敵)들은 늘 그를 옭아맬 구실을 잡아내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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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관 응교였던 퇴계는 병을 이유로 휴가를 얻기도 하고, 청송부사 등 외직으로 나갈 것을 임금에게 청했습니다. “그때 퇴계는 오직 중앙으로부터 달아날 생각 밖에는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얻게 된 자리가 단양부사였다는 겁니다.

 

퇴계의 단양군수 재직 기간은 단 9개월. 당시 단양은 매우 피폐한 지역이었고, 퇴계의 일정은 촉박했습니다. 1548년 1월에 부임하자마자 기민(飢民) 구제 업무 때문에 눈코뜰 새 없었고, 2월에는 장남 채(菜)가 죽었습니다. 이런 처절한 상황에서, 조금만 약점을 잡혀도 서울에선 곧바로 탄핵 사유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생놀음을 했다고?

 

이 기간 중 퇴계의 넷째 형이 충청도 관찰사가 됐습니다. 친족이 같은 지역에서 벼슬하는 것을 피하는 상피(相避)에 해당됐기 때문에 10월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됐던 것이죠. 9월부터는 이미 짐을 싸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유가 없는 일정이었던 것입니다.

 

단양팔경 지정 얘기도 허구

 

“퇴계가 단양팔경을 정했다는 얘기도 근거가 없습니다.” 정 박사는 말을 이었습니다. “퇴계의 시에 단양의 선암(仙岩)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지금의 하선암입니다. 지금 단양팔경으로 돼 있는 중선암과 상선암에 대해서 퇴계는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단양팔경 중 하나인 하선암. 퇴계의 시에 나오는 '선암'이 바로 이곳이었다. /조선일보 DB 

단양팔경 중 하나인 하선암. 퇴계의 시에 나오는 '선암'이 바로 이곳이었다. /조선일보 DB

 

 

청풍군수 이지번이 퇴계와 함께 옥순봉 주변 경계를 논의했다는 것 역시 연대상으로 맞지 않았습니다. 이지번이 청풍군수를 지낸 것은 그로부터 21년 뒤인 1569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럼 이지번이 아니라 다른 청풍군수와 논의를 했다는 건 어떨까요? 조선왕조는 철저한 중앙집권제의 국가였고, 모든 지방관은 중앙에서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지방관들이 중앙의 승인을 받지 않고 자의적으로 군계(郡界)를 바꾼다고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옥순봉은 지금도 말이 ‘단양팔경’이지, 행정구역상으로는 제천시로 돼 있습니다.

 

퇴계가 근본적으로 여색(女色)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1541년 관서 지방에 출장을 갔다 오는 길에 평양에 머물렀는데, 평안도 관찰사가 유명한 기생을 치장시켜 퇴계를 접대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퇴계는 끝내 이것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남들은 평양에서 접대를 받고 싶어서 일부러 머물기라도 했을텐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의문이 남습니다.

 

두향은 과연 누구의 여인이었나?

 

퇴계가 아니라면, 두향은 무엇 때문에 ‘명기’가 된 것인가? 두향은 과연 누구의 여인이었던가?

 

조선 말까지 두향의 무덤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산해(李山海) 가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정비석씨의 ‘명기열전’은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산해가 스승의 애인인 두향의 무덤에 대대로 내려오며 제사를 지내 주게 했다니, 사제지도(師弟之道)가 땅에 떨어진 요새 세상에서는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미담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시대에도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선 이산해는 퇴계의 제자도 아니었습니다. 설사 제자였다고 해도, 스승의 여자를 대대로 챙겨서 제사를 지내준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그것도 300년이 넘게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산해가 두향의 제사를 지내 준 이유가, 본인의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이라면? 그러니까, 두향이 이산해의 서모(庶母)였다면 어떨까요?

 

이산해의 아버지는, 바로 정비석 ‘명기열전’에 등장하는 인물이었습니다. 1569년에 청풍군수를 지낸 성암(省菴) 이지번입니다. 그는 이보다 앞선 1556년 퇴계의 권유로 단양 구담봉 밑에 은거합니다.

여기서 좀 특이한 기록이 나옵니다. 이지번이 강 양쪽에 칡넝쿨 줄을 묶어놓고 비학(飛鶴)을 매달아 타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비학? 날아가는 학? 아마도 학처럼 생긴 배 같습니다만, 사람들은 이것을 타고 다니는 이지번을 보고 ‘신선’이라고 불렀다는 겁니다.

 

 

이지번이 그 아래 은거했다는 구담봉. /단양군청 사진

이지번이 그 아래 은거했다는 구담봉. /단양군청 사진

 

 

상당히 기이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이지번의 동생이자 이산해의 숙부 되는 인물은 바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정 박사는 흥미로운 추론을 합니다. 이지번은 왜 ‘비학’을 만들어서 강을 건너갔을까요? 이지번이 은거했다는 구담봉 건너편은 바로 강선대였습니다. 두향이 살았다는 곳입니다. 이것은 결코 실증된 사실이 아니라 추론이지만, 개연성이 있는 얘기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명종 때 두향이라는 단양 기생이 군수와 관계가 있었다더라’(A)는 이야기가 있었고, 수백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퇴계가 명종 때 단양군수를 지냈다’(B)는 사실과 겹쳐 ‘두향은 퇴계의 여자라더라’(A+B)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스토리를 원했던 것

 

마지막 질문을 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그런 스토리를 마음 속으로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런데, 왜 그런 걸 이야깃거리로 만들고 싶어했을까요?” 정 박사가 말했습니다.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역사적 위인에 대해 인간미와 일상적인 체취를 가미하기 위한 방편이었겠지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에 굳이 픽션이냐 논픽션이냐를 따질 필요가 있을까?”

 

저는 ‘굳이’ 말하겠습니다. “예,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후대에 창작됐을 뿐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던 픽션을 역사 인물에 주입하는 것은, 더구나 퇴계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일 경우에는, 그 인물은 물론이고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인식하는 데 커다란 오류를 가져오게 됩니다. 1970년대만 해도 기생과의 로맨스가 ‘풍류’ 정도로 인식됐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결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퇴계는 평생을 거취(去就)의 문제로 고민했던 인물입니다.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모든 일이 그에게는 철학적인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퇴계전서(退溪全書)’에 실린 글 중 기대승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어렸을 그때 마땅히 삼림에서 늙어죽을 계획을 세워 고요한 곳에 띳집을 얽고서 독서와 양지(養志)로써 그 미진한 점을 더 구해 갔어야 했다.’

 

만들어진 이야기엔 퇴로가 없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합니다.

 

士忘去就, 禮廢致仕, 虛名之累, 愈久愈甚, 求退之路, 轉行轉險.

(사망거취, 예폐치사, 허명지루, 유구유심, 구퇴지로, 전행전험)

 

‘선비가 거취를 망각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예도 모르게 돼, 허명이 쌓이는 것이 갈수록 심해지고 퇴로를 구하는 길이 갈수록 험난해졌다.’

 

나설 때와 물러날 때를 제대로 구분할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세상이 됐다는 얘깁니다. 곳곳에 헛된 이름들만 판을 치고 있다는 얘깁니다. 말을 할 때와 말을 하지 않아야 할 때를 가리지 않고, 말을 하고 싶어도 참고 견딜 줄 아는 미덕이 사라지고 있다는 얘깁니다. 어쩐지 16세기의 상황 같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잘못 정착된 ‘설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근거가 희박하고 인물과 시대에 대한 이해를 오도한다고 해도, 한 번 퍼진 이야기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그럴듯한 살이 붙어만 갑니다. ‘퇴로’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려야 할 것은, 마치 첨단 기법인 것처럼 여겨지는 ‘스토리텔링’이나 ‘팩션’ 같은 것들이 결코 사실을 왜곡하는 수단이나 명분이 돼서는 무척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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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01.05 15:10

    첫댓글 사실 여부는 좀 더 따져봐야 되겠지만, 주목할 필요가 있는 글입니다.
    검증되지 않은 전설이나 일화는 역사와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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