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팔-10
면회를 온 그녀는 반갑기보다 곤혹스러웠다.
‘그랬었지!’하는 추억으로 굳어졌지만 군복을 입었던 당시는 군기란 야만스러운 질서와
인간에의 기본적인 예의를 외면한 언어 폭력을 묵묵히 인내하며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목숨 걸고 수행하여야 하는 무력한 처지를 수긍하면서도 군복을 입지 않은 누군가에게는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은 군인이란 나의 모습이었다.
면회 오겠다며 부대 위치를 알려 달라는 그녀의 편지에 군사비밀이라는 핑계를 댔지만
군인이면서도 군인으로 살아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군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나의 잣대가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면회실이 없어 외출증을 받았다. 하루에 두 번 들어오는 버스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세 번 들어왔다.
1시 30분에 도착하여 2시에 회암리를 출발하는 버스가 토요일과 일요일에 있었다. 외출이나 외박 때 타는 버스가 2시 버스였다.
2시 버스는 놓쳤지만 마음만 먹으면 2Y도로를 지나는 군용 트럭이나 지프에 편승하거나
1시간 30분쯤 걸리는 덕정까지 걸어 나가 의정부행 버스를 못 탈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의정부에서 부대로 들어오는 버스 출발 시각이 5시여서 놓치기라도 하면 버스로 30분쯤 걸리는 덕정에서부터의 비포장도로를 터벅터벅 고스란히 걸어서 귀대해야 했다.
의정부에 나간다고 해도 차 한 잔 마시기 바쁘게 5시 버스를 타야 하는 처지여서 굳이 나가고 싶지 않았다.
군속 가족들과 농민들이 사는 40여 호의 마을이 부대 뒤쪽에 있었으나 영업하는 곳이라고는 부대 입구 삼거리에 있는 술집 세 곳과 부대 울타리와 붙어 주문한 삶은 닭이나 라면, 국수를 울타리 사이로 들이미는 무허가 음식점, 그리고 아이들 과자나 막걸리를 파는 동네 구멍가게 하나와 군속들의 가족을 위한 영외 PX가 하나 있을 뿐,
여유롭게 마주 앉아 노닥거릴 만한 다방 같은 건 없는 외진 시골 마을에 부대가 있었다.
그녀와 걸었다. 반가운 감정이 아닌, 막막한 심정이었다. 혼자만 아는 곳에 깊이 감추었던 변변찮은 성적표를 고스란히 그녀에게 들킨 느낌이었다. 하릴없이 걸으며 부대까지 찾아온 방법을 물었다.
잠시 망서리던 그녀가 일요일 오후마다 종로 5가에 있는 한진버스 터미널에서 기다리다 3주만에 나처럼 턱받침 같은 노란 머플러를 두르고 화살표가 그려진 견장을 왼쪽 어깨에, 명찰 위에 빨강 노랑 파랑색이 Y자로 만나는 중앙에 검은 탱크가 그려진 삼각형 부대 마크를 부착한 병사를 만나 제2기갑 여단 사령부의 위치를 물어 덕정 회암리라는 답을 얻었다고 했다.
토요일은 사장님 스케쥴이 한가하여 일찍 회사를 나와 병사가 알려준 대로 덕정에서 내려 헌병 검문소에서 물어 부대의 정확한 위치를 알았고, 헌병이 편승시켜주겠다고 했으나 사양하고 걷다가 군용 지프가 태워 줘 부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돌아오지 않는 강’의 ‘첫사랑’에 상세히 적혀 있다)
마을 주민과 아이들의 눈총을 흘리며 한가롭게 걷다 보니 회암사지에 우리가 서 있었다.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판자를 이어 붙인 안내판에서 회암사의 설명을 읽었다.
고려때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이 창건하였고, 그 제자 나옹선사가 증축하였으며 나옹의 제자 무학대사가 머물다 입적한 절이라고 했다.
왕자의 난으로 퇴위한 이성계가 한동안 수도하다 함흥으로 떠났으며 명종 때 불교 중흥을 꿈꾸던 보우대사가 머물렀으나 지원하던 문정왕후가 갑자기 죽어 보우대사는 유배되고 그때부터 회암사는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되어 그 웅대했던 터만 남았다고 적혀 있었다.
잡초가 우거진 절터에는 지공과 무학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 두 개와 두 선사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 두 개와 두 마리 사자가 뒷발로 서서 앞발로 돌기둥을 맞잡아 세운 아름다운 석등, 그리고 건물들이 올라 앉았던 주춧돌과 깎은 돌을 쌓은 축대 등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절의 깃발을 꽂았던 당간지주 크기가 내 키를 훨씬 넘고 웅장하여 장엄하고 웅대했던 회암사의 면모를 짐작할 만했다.
오를수록 좁아지는 절터 끝에 샘물이 있어 손바닥으로 떠 한 모금씩 마시고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마을과 부대 중간 솔밭 사이에 있는 영외 PX 앞에 식당에서 빼 온 것 같은 식탁 두 개가 놓여 있었다.
1백원씩 하던 캔 맥주 버드와이저 두 개와 두꺼비가 그려진 진로 한 병, 닭튀김 통조림을 사 탁자에 마주 앉았다.
그녀는 버드와이저를, 나는 버드와이저에 소주를 타 마시며 저녁 버스 시간 6시를 기다렸다.
“군기!”
상병이었던 PX병이 문득 부동자세로 경례를 붙이고 서 있었다. 돌아보니 여단장 신홍량 준장이 전속부관도 없이 혼자 오고 있었다.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경례를 붙였다. 여자도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은빛 지휘봉으로 경례 비스름하게 답례한 여단장이 다가오며 물으셨다.
“김 병장 애인이신가?”
여자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그맣게 “예!”라고 말했다.
“애인이 면회 오셨으면 빨리 나가지 여기서 뭘 꾸물거리나?”
“8시까지 귀대할 교통편이 만만치 않아 시간을 보내는 중입니다!”
잠시 우리를 바라보던 여단장이 달려와 옆에 선 PX병에게 말씀하셨다.
“인사처로 전화 돌려!”
PX병이 PX로 달려 들어갔고 여단장이 주위를 둘러보며 따라 들어가셨다.
잠시 후, PX병이 캔 맥주 두 개와 백도 복숭아 깡통 하나와 삼각형으로 투명지로 포장된
땅콩 한 봉지를 탁자 위에 놓아주며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이 거까지 여단장님께서 계산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맥주와 소주까지 계산하셨다는 말이었다.
전우신문에 투고한 글들로 여단장실로 불려 간 적이 있었고 몇 번인가 여단장의 연설문을 수정해 드려 여단장은 나를 기억하고 계신 듯했다.
PX에서 나오시는 여단장은 일어서는 나를 손짓과 미소로 앉히시고 휘적휘적 부대 후문쪽으로 걸어가셨디.
30분도 지나지 않아 인사병이 달려왔다. 그리고 나의 외출증은 외박증으로 바뀌었다.
6시 버스를 타고 우리는 의정부에 도착하여 헌병들 검문에 걸릴 각오로 그녀와 한진버스에 올랐다.
다행히 버스는 창동 검문소에서 정차하지 않고 종로 5가에 도착했다. 정신여고로 가는 한일극장 옆 골목에서 불고기를 안주로 밥과 술을 마셨다. 식당을 나올 때는 밤이 이슥해 있었다.
밤의 어두운 그늘을 따라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곧장 가면 이내 혜화동 로타리였으나 서울대학 병원 후문으로 들어갔다.
그녀와 더 오래 걷고 싶었던 것 같다. 창경원 쪽의 정문으로 넘어가다가 한가로운 어두운 숲의 왠지 스산한 붉은 벽돌 건물 벽 그늘의 어둠 속에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안았고 키스를 했다.
누가 발동을 걸었는지는 지금도 확실하지 않지만 누구 ‘입술이 큰지’ 대어보는 수준의 입술끼리 만난 그런 키스였으나 내 인생의 첫키스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벽돌 건물은 시체 보관실이었다)
서울대 병원 담장을 따라 명륜동을 지나고 혜화동 로타리를 지나 다시 혜화동 성당 담을 따라 삼선교까지 걸어가 복개되지 않은 개천의 오른쪽은 차도여서 외쪽 인도를 따라 성북동쪽으로 올라갈 때는 이미 통금이 임박해 있었다.
그녀와 헤어져 돌아서면서부터 막막해질 나의 서글픈 망설임을 눈치챈 그녀가 가르킨 손가락 끝에 여관 간판이 보였다.
한옥을 개조한 그 여관 이름이 특별해서 지금도 기억한다. ‘청춘여관’
3백 원이었던 여관비를 여자가 문간에서 계산하고 배정 받은 방까지 따라 들어와 방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런 그녀를 뒤에서 불쑥 힘껏 안았고, 우리는 그렇게 다시 한 번 입술 크기를 비교했다.
그녀가 나의 팔을 풀었으나 나는 놓지 않았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컴컴한 수컷의 욕망 때문은 아니었다. 잠시라도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혹시 이 부분에서 뻥까지 말라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2,3회 뒤를 읽으시면 수긍하시리라)
집이 5분도 걸리지 않는다는 속삭임에 하는 수 없이 팔을 풀었고 내일 아침에 오겠다는 약속을 속삭임으로 남긴 그녀는 또각또각 하이힐 굽소리를 남기며 총총히 사라졌다. 그때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이튿날 아침, 6시에 습관처럼 눈을 뜬 나는 낯선 방안 풍경에 어리둥절했다가 어제의 상황들이 떠올랐다.
그녀의 약속을 무시하고 여관을 나가 집에 들를까 생각도 해 보았으나 집이 5분도 걸리지 않는다면 여관은 이미 그녀의 동네였다. 그렇다면 여관 주인도 그녀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군복을 입은 나를 여관으로 안내했고 방까지 따라와 짧은 시간이긴 했으나 머물렀었다.
그런 그녀의 따스한 배려가 나의 발을 묶었다. 난처하기도 했을 그녀의 처지를 생각하며 꾸물거리다 다시 깜박 잠이 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가 방문을 열고 나를 부르고 있었다.
급히 공동으로 쓰는 마당 끝 욕조에서 샤워를 하고 방문을 반쯤 열어놓고 방에서 기다리는 그녀와 나란히 청춘여관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종각까지 나와 청진동 해장국 집에서 그녀와 마주 앉아 아침을 먹고 9시 30분쯤에 중앙극장에 도착해 10시에 시작하는 조조할인 영화를 나란히 앉아 보았다.
영화를 보는 중, 훼이 더나웨이가 오밤중에 집안의 수영장에서 완전 나체로 수영하는 장면쯤에서 그녀가 나의 손을 잡아 뿌리치지 않고 맞잡았다.
그러면서 지적인가 하면 퇴폐적이면서도 신비롭기까지 했던, 처음 보는 여배우 훼이 더나웨이의 매력에 포옥 빠져 영화 제목도 내용도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서스펜스 심리극이었는데 상대가 커크 더글러스였다는 것이다.
놓지 않은 손을 팔짱으로 바꾸며 극장을 함께 나오는 그녀에게 훼이 더나웨이와 비슷한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종로 5가까지 따라온 그녀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자기 표까지 끊었고 우리는 한진버스에 나란히 앉아 의정부에 도착했다.
의정부 시장 안에서 곱창전골을 안주로 술과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그녀가 탄 한진버스를 배웅하고 5시 버스를 타고 부대로 돌아오며 입술이 아닌 내 영혼 어딘가에 남은 첫키스의 흔적을 나는 오래오래 더듬고 생각했다.
< 계 속 >
첫댓글 푸른 제복의 첫 키스 ㅎ
꿀떡, 꿀떡, ....
이런 필력이면 안 넘어올 여인이 없을 텐데 9부 능선에서 고지 점령을 담으로 미루었네.
에유, 아쉬워 ㅋ
높은 포복 낮은 포복하면 고지가 바로 앞인디 ㅋㅋㅋ
ㅎㅎ
껄덕지근(?)하게 즐독 합니다
선배님들 아직 청춘들 이시네요 ㅋ
단결! !
즐독하셨나요. ㅎㅎ 잠시나마 즐거움을 느끼셨으면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