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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東九陵)
사적 제193호, 東九陵
신들의 정원에서 왕도 사랑했네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길 233
가는 법 : 지하철 중앙선 구리역 3번 출구. 마을버스 2, 6번 환승. 동구릉 하차
이용 시간 : 오전 6시~오후 5시 30분 입장(3~10월)
오전 6시 30분~오후 4시 30분 입장(11~2월)
목차접기
500년을 이어온 그린벨트
왕도 사랑을 했구나
왕릉의 자연주의
신의 정원. 유럽의 조경 전문가들은 조선왕릉을 그리 불렀다. 두 발로 딛지 않고서는 알아챌 수 없는 막연한 실체. 아홉 기의 왕릉을 가진 동구릉은 신의 정원 가운데 최고의 신전이다. 하늘 위를 걷듯 그 푸른 숲을 헤맨다.
500년을 이어온 그린벨트
조선왕릉은 세계문화유산이다. 지난 2009년 6월 27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회의에서 ‘조선왕릉 40기 전체’의 등재가 확정됐다. 별다른 반론도 없었다. 회의는 일사천리였다. 한 왕조가 500년이 넘도록 유지되고 그 왕들의 무덤이 이토록 온전하게 보전되기는 세계에도 유래가 없다. 하물며 그 능에 담긴 고유의 철학과 왕가의 예술과 조화를 잃지 않은 자연주의라니. 개중의 누군가는 ‘원더풀(wonderful)’을 연발했겠지. 이집트의 피라미드, 인도의 타지마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아마도 그들에게는 자연을 벗 삼은 조선의 왕릉도 이들처럼 신비로웠겠지.
조선왕릉은 당대 최고의 풍수지리학자는 물론, 조경가와 예술가가 만나 꾸민 왕가의 무덤이다. 최고의 묘지 정원이자 천혜의 녹지다. 그리고 그것이 후세에게는 의연한 축복으로 남았다. 500년을 이어온 그린벨트다. 대부분의 왕릉이 도성에서 10리 밖, 100리 안에 자리한다. 서울과 수도권이다. 공교롭지 않다. 국조오례의에는 왕릉의 장소를 그리 규정했다.
방대한 듯하지만 500년 왕조의 역사에 비하면야. 그 가운데 동구릉은 가장 장대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40기의 능 가운데 아홉 기가 동구릉에 있다. 22.5퍼센트다. 1408년 태조가 잠들었고 마지막으로 1890년 익종(문조익황제)의 수릉이 이전해 구릉을 이루었다. 191만 5,891제곱미터, 약 58만 평에 17위가 영면을 취한다. 선정릉의 열 배이자 여의도공원의 2.5배가 넘는다. 조선왕조 500년의 시작이자 완벽한 집약이다. 어찌 발걸음을 떼지 않을 수 있을까.
느릿하게 걸음을 낸다. 선정릉이나 태릉이나 헌인릉을 걸을 때와는 또 다른 설렘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왕릉군. 동쪽의 왕릉에는 애초에 태조의 건원릉만 있었겠지. 그러다 왕릉이 늘어나면서 동오릉이 되고 동칠릉이 되고 기어이 오늘의 동구릉이 되었겠지. 그 스케일이 주는 장엄함을 무어라 정의할 수 있으랴. 하지만 관리소를 지나자 이내 누그러진다. 언제 닿아도 눅진한 풀냄새, 나무의 향기다. 늘 그렇다. 조선의 왕릉은 무덤 이전에 자연으로 말을 건다. 왕릉을 보이기 전에 숲길을 연다. 성스러운 여정. 그 길에서 마음을 씻으라는 이야기렷다. 몇 차례 숨길을 열고 닫는다. 산림이 주는 피톤치드의 청량감이 폐부 깊숙이 스민다.
왕도 사랑을 했구나
왕릉의 길은 경종의 비 단의왕후 심 씨의 혜릉과, 익종과 신정왕후 조 씨의 능인 수릉 앞에서 갈린다. 두 능은 동구릉을 빙 둘러 다시 만나리라. 수릉으로 향한다. 익종은 헌종의 아버지였다. 살아서 왕이 되지 못한 채 세자로 죽음을 맞았다. 아들이 왕이 되므로 그 또한 왕의 이름을 얻었다. 수릉은 단릉인 듯하나 합장릉이다. 익종의 능이 석관동의 의릉에서 용마산을 거쳐 동구릉에 이를 때 신정왕후와 합장했다. 살아 짧은 인연은 죽어 천 년 해로한다. 이전의 왕릉과 달리 중계의 문석인과 하계의 무석인을 같은 공간에 배치했다. 신분상의 변화다.
수릉을 지나 만나게 되는 헌릉은 문종과 현덕왕후 권 씨의 무덤이다. 수릉이 합장릉이라면 헌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서로 다른 언덕에 만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현덕왕후 권 씨는 문종보다 11년 빨리 죽었다. 단종의 복위 사건으로 폐위됐다 복원된 이듬해에 헌릉에 묻혔다. 문종과는 72년 만의 해후였다. 두 능 사이에는 소나무가 빼곡했으나 현덕왕후의 무덤을 조성하면서 저절로 말라죽었다 전한다. 선조의 무덤인 목릉도 동원이강릉이다. 다만 두 사람이 아닌 선조와 의인왕후 박 씨, 계비 인목왕후 김 씨 세 사람이 다른 언덕에 잠들었다. 하지만 하나의 정자각에서 출발한 신로는 세 능을 잇대므로 사랑과 영혼의 길을 연다. 임진왜란 후라 초라할 수밖에 없었던 석물의 아쉬움을 달랜다.
목릉을 지나 비로소 건원릉에 이른다. 동구릉의 가장 먼발치에 자리한 조선왕릉의 시작이다. 곡장의 등장과 석물의 배치 등은 고려와 다른 조선만의 양식을 알린다. 하지만 수릉과 헌릉과 목릉을 지나온 터라 아련한 마음이 따른다. 태조는 계비인 신덕왕후를 극진히 아꼈다. 정릉을 조성하고 그 명복을 빌기 위해 흥천사를 세웠던가. 자신 또한 신덕왕후 곁에 묻힐 자리를 미리 마련해두었던가. 하지만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의 아들이었던 태종은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그 석물들을 광통교 복원에 사용했다. 뿐이랴, 결국 태조의 무덤은 신덕왕후와 떨어진 먼발치 동구릉에 조성했다.
건원릉은 다른 능과 달리 봉분에 잔디 대신 억새풀을 심었다. 늘 고향을 그리던 태조를 위해 태종이 함흥의 흙과 억새를 옮겨왔다. 바람이 불면 푸른 잔디 대신 여린 억새가 하늘거린다. 외려 그 흔들림이 태조의 사랑인 양 애잔하다. 왕의 사랑도 제 맘과 같지 않은 것을. 한자리에 묻히고픈 그 소박한 바람이 천하를 얻는 것보다 어려웠으니, 6천 명의 군정이 두 달에 걸쳐 능을 조성했다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
왕릉의 자연주의
건원릉에서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 씨의 휘릉을 지나서는 영조의 능인 원릉이다.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김 씨의 무덤이 쌍릉을 이룬다. 그의 치세를 말해주듯 화려하다. 하지만 태조의 건원릉과 동병상련한다. 그는 원비였던 정성왕후의 홍릉(서오릉)을 자신의 묘자리로 정하고 쌍릉을 이루기를 바랐으나 동구릉의 정순왕후 곁에 묻혔다.
원릉 곁의 경릉은 보란 듯 세 개의 봉분으로 이루어졌다.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이 나란하다. 조선 왕릉 가운데 유일한 삼연릉이다. 병풍석 없이 난간석이 세 능침을 둘렀다. 헌종 승하 후 택지를 위해 열세 곳을 돌아다녀 택한 명당이다. 그러나 헌종의 마음 역시 태조나 영조와 매한가지일 듯하다. 그가 마지막까지 곁에 두고 사랑했던 여인은 경빈 김 씨였다. 그녀를 위해 창덕궁 안에 낙선재까지 지었지만 죽어서는 나란히 눕지 못했다. 가까이의 혜릉은 경종의 비 단의왕후 심 씨의 능이다. 그녀는 세자빈의 신분으로 죽었다. 낮은 구릉에 조성한 능은 단출하다. 경종은 계비 선의왕후와 성북구의 의릉에 묻혔다. 또 한 번 말할 수 없는 애틋함이라니. 혜릉 너머에는 현종과 명성왕후 김 씨의 숭릉이 쌍봉을 이룬다.
유교 예법을 따른 왕릉의 구성은 대체로 비슷하다. 능의 영역이 시작되는 홍살문까지는 속세다.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 용마루까지는 속세와 성역이 공존한다. 용마루를 지나 능침은 성역이다. 그 여정을 차례로 밟아 왕의 봉분에 이른다. 홍살문에 서면 정자각에 가려 능침은 보이지 않는다. 그 너머에 소나무만 짙푸르다. 일부러 숨긴 것이 맞으리라. 그러므로 왕의 무덤은 신비롭고 성스러워진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는 느린 걸음을 부르는 박석을 깔았다. 불편한 걸음은 절로 조심스러우므로 서두를 수 없다. 역시나 단을 달리해 신의 길과 왕의 길을 구분지었다. 능침의 높낮이도 천차만별이다. 왕의 위용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다. 가능한 본래의 자연 지형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때로는 남향이 아닌 서향이나 북향의 능도 만나게 되고 동원이강릉도 생겨난다.
혜릉과 숭릉을 향하기 전에는 동구릉의 걸음을 갈음하듯 경릉 곁의 숲길을 걸어도 좋겠다. 3.5킬로미터의 산책로를 따라 조성한 자연학습장이다. 길을 따라서는 소나무와 전나무·상수리나무가 우거진다. 야생화단지까지 가닿는다. 때문에 동구릉 숲길이라고도 불린다. 능에서 마주치는 숲의 길은 낯설다. 그러므로 지나온 길 위의 능들이 머리에 스친다.
왕들의 삶과 죽음, 영욕의 세월과 애틋한 사랑. 그 사이로 흐르는 적막과도 같은 온기는 어미의 품처럼 도심을 벗어난 사람을 에워싼다. 걷다 쉬다 또 잠깐은 잔디 위에 누워 마음을 놓는다. 파란 하늘 위로 흰구름이 몽실몽실 흐른다. 포근하다. 공원과는 다르다. 사람들의 낮은 목소리와 정겨운 속삭임, 하지만 그 또한 묘지일 터. 온통 스산한 무덤의 기운은 어디로 갔을까. 결국 시간이란 죽은 자와 산 자를 잇는 또 하나의 통로다. 수백 년을 훌쩍 뛰어넘으니 죽음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그저 삶의 무수한 모습 가운데 하나로 다가선다. 옛 왕의 무덤을 따라 걸으며 비로소 신의 정원을 이해한다.
박상준
대학에서는 조경학을 전공하고, 여행주간지 〈프라이데이〉와 영화주간지 〈씨네버스〉 취재기자로 일했다. 지금은 프리랜서 여행작가로 활동 중이며, 서울 부암동에서 아이디어 반짝이는 작은 카페 ‘유쾌한 황당’을 아지트로 삼고 있다. 저서로는 『서울 이런 곳 와보셨나요?』, 『엄마, 우리 여행가자』, 『구석구석 제주올레길』, 『다른 제주에 가다』 등이 있다.
초가을 세계유산 '동구릉'으로 떠나는 역사기행
스포츠조선 기사 입력일 : 2011-08-30
동구릉(구리)=글·사진 김형우 기자 hwkim@sportschosun.com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한 낮의 햇살은 따갑지만 하늘은 높고 푸르다. 전형적인 초가을 날씨. 지난여름 자칫 여기 된 심사를 가라앉힐 만한 여정으로 어떤 곳이 좋을까.
서울 근교 조선 왕릉을 추천한다. 그중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된 경기도 구리시 소재 '동구릉(東九陵)'은 '서울 도심 인근에 이처럼 광활한 자연-문화공간이 존재하고 있을까'하는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올 천혜의 휴식 공간이다. 런던의 하이드파크나, 뉴욕의 센트럴파크와는 비교 할 수 없는 또 다른 매력을 지녔다.
나무 그늘에 들어서면 선선한 초가을 바람이 몸과 마음의 찌든 때를 절로 씻어 주는가 하면, 맑은 향기 가득한 숲길을 거닐며 역사를 반추하는 시간은 여느 여행길에서는 맛볼 수 없는 품위를 느끼게 한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온 가족이 자랑스러운 역사문화의 터전, 조선 왕릉으로 떠나는 나들이는 근사한 '문화재 활용 기행'의 전형이 된다.
처서도 지나고 추석이 코앞이다. 9월의 초입, 여행하기 좋은 때가 왔다. 하지만 막상 어디로 떠난다는 게 맘처럼 쉽지가 않다. 가뜩이나 수도권에서의 주말 나들이란 행락차량의 대열에서 '기차놀이'를 하기 십상이다. 좀더 가깝고 호젓한 분위기 속에서 오는 가을을 만끽할 수 있다면 흡족한 여정을 꾸릴 수 있겠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소재 '동구릉(사적 제193호)'은 도심 속 나들이 코스로 빼어난 접근성에 역사문화기행까지 겸할 수 있어 좋다.
이곳은 조선을 세운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의 현릉, 21대 영조의 원릉 등 9개의 능이 모여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 동쪽 9개의 능'이란 뜻이다. 능이 새로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 등으로 부르던 것을 철종 6년(1855) 수릉(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효명세자<문조>와 신정왕후 조씨의 능)을 모신 후 제 이름을 얻었다.
조선 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특히 600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와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동구릉은 조선 초부터 후기까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어 지난 1970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쾌적한 나들이 공간에서 조선의 역사를 만난다
왕릉의 매력은 역사-문화 공간인 동시에 계절의 낭만을 즐길 수 있는 산책 공간이라는 점이다. 국내 최대 규모의 조선 왕릉 군락인 동구릉이 그중 백미다. 면적이 면적 191만 5891㎡(55만 3616평)으로 광활한 숲이며, 능(陵)에서 능으로 이어진 숲길의 곡선미가 특히 아름답다.
우선 동구릉 주차장-매표소를 지나면 커다란 홍살문이 나온다. 왕릉의 입구임을 알려주는 시설로 경건한 예를 갖추라는 의미다. 아홉 능마다 별도의 홍살문이 설치돼 있다.
동구릉 탐방은 오른쪽 방면 동선을 택하는 게 수월하다. 시계 바늘 진행의 반대 방향으로 돌며 수릉~현릉~건원릉~목릉~휘릉~원릉~경릉~혜릉~숭릉을 차례로 들르는 여정이다. 이들 왕릉 가운데 숭릉은 야생조수보호 등의 이유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왕릉은 크게 진입 공간(금천교~홍살문 앞), 제향 공간(홍살문~정자각, 비각), 능침 공간(석물, 능침<봉분>, 곡장)으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내방객은 '진입~제향 공간'을 관람하게 된다.
첫 번째 탐방코스인 수릉으로 향한다. 아름드리나무 그늘 아래에는 나들이객들이 삼삼오오 돗자리를 펴놓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작은 개울에서는 아이들 서넛이 물장구를 치며 늦더위 쫓기에 한창이다. 계류 주변은 다양한 수서생물도 살고 있어 생태적 경관요소 또한 갖췄다. 특히 능 주변에 아름드리 소나무와 전나무, 서어나무, 상수리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원시림을 이루고 있어 걸음을 뗄 때 마다 '서울 인근에 이런 곳이 다 있었나' 싶은 생각을 절로 들게 한다.
조선 왕릉의 공간철학에는 신비감이 배어 있다. 능 지척에 이르기까지 좀처럼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은밀함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풍수의 기본으로 흔히 옛 마을의 배치와도 흡사하다. 큰 길 밖에서는 보이지 않다가 모퉁이를 돌아서면 그제서야 왕릉임을 알 수 있게 하는 홍살문이 나타나는 식이다. 반면 능침이 들어선 사초지 위에 올라서면 좌청룡 우백호에 전방이 탁 트인 숲과 강이 눈앞에 펼쳐진다.
왕릉을 구성하는 대표적 건축물은 정자각(丁字閣)이다. 왕릉 제례의 공간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丁'자 모양이라 해서 정자각으로 부른다.
왕릉 나들이의 묘미는 잠들어 있는 주인공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뒷얘기도 한 몫을 한다. 특히 조선 왕릉은 불과 600년 미만의 가까운 과거사를 담고 있어 역사드라마 속의 실존 인물을 대하는 듯 더 실감이 난다.
수릉은 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효명세자(훗날 문조로 추존)와 신정왕후 조씨를 합장한 능이다. 문조는 세자시절 대리청정을 시작해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기 위해 노력했으나 22세에 요절했다.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며 익종으로 추대되고, 고종때 문조로 추존됐다. 일찍이 홀로된 신정왕후는 철종에 이어 고종을 왕위에 올린 후 수렴청정으로 조선 후기 정국을 주도하는 등 83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수릉을 돌아 나서면 현릉이 기다린다. 조선 5대 문종의 능으로 현덕왕후도 지척에 함께 모셔 두었다. 현릉은 문무인석이 잘 보존돼 있는데 석물의 과장된 표정이 익살스럽다.
조선 14대 임금인 선조가 잠든 목릉은 동구릉에서도 가장 넓다. 선조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 자리하고 있는데, 정자각을 중심으로 계비의 능은 오른쪽에 멀찌감치 떨어져 자리하고 있어 봉분 3기를 나란히 모셔 놓은 경릉과는 대조적이다. 목릉으로 진입하는 길옆으로는 소나무와 서어나무 군락지가 자리하고 있어 정취를 더한다.
아홉 임금의 능 중 단연 눈길을 끄는 곳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잠들어 있는 건원릉(健元陵). 동구릉의 안쪽에 자리한 왕릉은 높은 사초지와 억새 봉분이 대번에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긴다. 건원릉의 봉분에는 잔디 대신 억새를 심었다. 실록에 따르면 태종이 아버지 고향인 함경도 영흥에서 자라는 억새를 가져다 심었다. 초가을 산바람에 일렁이는 억새가 갖은 풍파를 뚫고 나라를 세운 무장의 기개를 엿보는 듯하다.
동구릉의 능침 주변 석물들은 비슷한 듯 다르다. 문무인상, 석양, 석호의 모양이 당대 조각가의 손끝에 조금씩 달리 표현되기 마련이다. 수릉과 현릉의 석양은 통통한데 반해 건원릉의 석양은 늘씬한 편이다. 석호의 모습과 표정도 제각각에 봉분을 빙 둘러싼 병풍석의 모양새도 각기 다른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대하 역사 드라마 속에 자주 등장한 영조와 정순왕후. 그들이 잠들어 있는 '원릉'도 빼놓을 수 없는 탐방 코스다. 원릉에는 세 개의 비가 있으며, 비각도 다른 능에 비해 크다. 곡장(능을 둘러싼 담장) 뒤에 서서 전방을 응시하자면 과연 동구릉이 조선 최고의 명당임을 실감케 된다. 좌청룡 우백호에, 왕이 머물렀다는 왕숙천이 흐르고, 검단산이 시야에 펼쳐진다. 풍수의 기본이 잘 갖춰진 지세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 왕릉 40기 중, 9기가 동구릉에 자리한 가장 큰 이유 또한 이곳이 풍수지리상 명당이기 때문이다.
동구릉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 중 하나가 경릉이다. 조선 왕릉 유일의 3연릉으로, 봉분 3기를 한꺼번에 모셔 놓았다. 경릉은 조선 24대 헌종의 능으로 원비 효헌왕후, 계비 효정왕후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 쉬운 표현으로 남편과 첫째-둘째 부인을 다정하게 함께 모셔 놓은 셈이다. 조선왕실의 전통 의례를 떠나 요즘 사람들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모양새이기도 하다.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를 모신 숭릉은 출입제한지역. 정자각이 조선왕릉 중 유일한 팔작지붕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곳으로, 마침 능 주변 조경물에 대한 보수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숭릉 아래쪽 철새도래지 연못 또한 제한구역이다. 허가를 받고 들어 가봤더니 우거진 갈대 습지가 자연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한다.
이렇게 왕릉만 연결해 동구릉을 한 바퀴 도는 데는 3시간 정도가 걸린다. 혹자들은 1~2시간 운운 하는데, 음미하며 다니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산책길 중간의 양묘장과 자생식물 감상, 자연학습장까지 둘러보며 다리쉼을 하자면 하루 나들이코스로 적당하다.
마침 월차를 내 동구릉을 찾게 됐다는 바리스타 이영진씨(여·31)는 "올여름 여행을 떠나려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평소 들르고 싶던 동구릉을 찾았다"면서 "역사 속 주인공을 만나는 기분도 든 데다 서울 근교에 이처럼 좋은 명소가 있어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여행메모
가는 길=◇자동차(서울~내부순환도로~북부간선도로~구리시 방향 우회전 300m직진 유턴~500m 직진 좌회전~동구릉 주차장
◇전철(중앙선 구리역에서 마을버스 2번, 6번이용) ◇버스(청량리서 88번, 202번, 강변역 1번, 1-1번, 92번)
관람 팁=◇이용 시간: 매주 월요일은 정기휴일. 화~일요일(하절기 오전 6시~오후 6시 30분, 동절기 오전 6시 30분~오후 5시 30분), 입장료 어린이 500 원, 어른 1000 원. (문의: 031-563-2909)
동구릉 관람 동선=매표소~재실~수릉~현릉~건원릉~목릉~휘릉~원릉~경릉~혜릉~숭릉(관람 제한 구역)
동구릉(東九陵)
요약 : 사적 제193호이다. 1408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하였으며, 1855년 수릉이 9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건원릉은 태조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인 태종의 명을 받아 서울 가까운 곳에서 능지를 물색하다가 검교참찬의정부사 김인귀의 추천으로 하륜이 택정했다고 전한다. 광대한 숲에는 건원릉을 비롯해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 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 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 제23대 순조의 세자인 익종과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이 자리하고 있다.
9릉 17위(位)의 왕과 왕비를 안장했다. 사적 제193호. 1408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이름한 뒤, 1855년(철종 6) 익종(翼宗)의 능인 수릉이 9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동오릉·동칠릉 등으로 부른 사실이 실록에 전해진다. 건원릉은 태조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인 태종의 명을 받아 서울 가까운 곳에서 능지를 물색하다가 검교참찬의정부사 김인귀(金仁貴)의 추천으로 하륜이 나가 살펴보고 택정했다고 전한다. 다른 능도 역시 길지를 물색하다가 이곳을 택한 것인데, 당시 풍수지리설에 따라 유수한 지세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59만여 평을 헤아리는 광대한 숲에는 건원릉을 비롯해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 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 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 제23대 순조의 세자인 익종과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 등 9개의 능이 자리하고 있다.
동구릉(東九陵)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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