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문기자로, 시인으로 각별히 주목받던 백석 시인이 영생고보에 부임하여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의 모습에 대해서, 당시 제자 중의 한 사람인 김희모氏의 회고
나는 1934년부터 이후 5년간 영생고보를 다녔다.
그러니까 그때 내가 3학년이었으니 1936년 봄, 어느 오후 시간이었다고 기억된다. 수업시간 사이에 5분씩 휴식시간이 있어서, 나는 마침 우리 교실이 있던 2층 창가에서 운동장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한 양복 차림의 '모던보이'(당시엔 멋쟁이 신식청년을 모두들 이렇게 불렀다)가 교문으로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의 현관으로 서슴없이 걸어들어오는 그의 옷차림은 일본식 용어로 '료마에'라고 하는 두 줄의 단추가 가지런히 반짝이는 곤색 양복이었다. 모발은 모두 뒤로 넘어가도록 빗어올린 '올백'형에다 유난히 광택이 나는 가죽구두는 유행의 첨단을 망라한 세련된 멋쟁이의 모습이었다. 이런 옷차림과 멋스러운 스타일은 당시 인구가 고작 5만밖에 안 되는 함흥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어으므로, 함께 내려다보던 4학년 을조(乙組)의 동급생들은 창틀에 매달려 일제히 우우 하는 함성을 그 '모던보이'에게 보내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운동장에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회가 열렸고, 보통 때와는 다른 것이 새로 부임한 선생님 한 분을 김관식 교장선생님이 학우들에게 소개를 하는 것이었다. 새로 부임한 교사는 다름아닌, 우리가 어제 오후에 운동장을 가로질러오는 모습을 보았던 바로 그 '모던보이'였던 것이다.
선생님의 성함은 백석, 2학년 담임을 맡게 된 그 선생님은 영어 과목을 담당하셨다. 나이는 스물다섯, 일본 동경의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 출신이라고 소개되었다. 나중에 들으니 서울에서 『사슴』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이미 발행한 명망 높은 시인으로서, 조선일보사의 기자로도 근무했던 분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날부터 백석 선생이 가르치는 영어 수업을 받게 되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였을 것이다. 백선생님은 출석부를 옆에 낀채, 맨 앞줄의 학생부터 차례차례로 50여 명의 학생을 모조리 얼굴만 보며 이름을 불러가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선생님이 부르시는 이름들이 단 하나도 착오가 없이 정확한 호명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꼭 무엇에 홀린 듯 어리둥절하였다. 선생님의 그 모습은 당시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신기(神技)라 할 만한 것이었다. 나이 많은 선생님들은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시거나, 부른다 해도 틀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새로 부임해온 젊은 선생님이 불과 사흘 만에 우리반 학생들의 이름을 모조리 다 외우시다니. 우리는 그날부터 백선생님의 비상한 기억력에 완전히 포로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선생님은 학생들과 더 친해지기 위해서 명렬표를 갖다놓고서 열심히 외우셨을 것이다. 이것은 교사로서의 그분의 성실한 자세를 말해준다.
교사로서의 백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매우 철저한 분이셨다. 매일 숙제를 내어주시는데, 그날 배운 페이지에서 절반을 반드시 암기하게 하며, 또 그 다음날 백지에다 외워서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생활영어를 중시한 것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아무튼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숙제가 싫어서 모두들 끙끙 앓고 있었다.
선생님은 영어교사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우리 학교 축구부를 지도하셨다. 내가 선생님과 친해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축구부에서의 활동 때문이었다. 나는 문학보다도, 축구가 좋았고, 또 축구부에서는 골키퍼를 맡아서 했다. 선생님은 우리들이 훈련할 때에 반드시 그라운드에 들어와서 선수들과 함께 달리며 이것저것을 지도해주셨다. 선생님의 공 차는 실력은 그다지 수준급은 아니었으나, 공을 따라서 열심히 뛰어다니며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은 한창 젊은 우리들을 감동하게 하였다. 한참 뛰어다니다 숨이 찰 때면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심호흡을 하는데, 그럴 때면 꼭 배우가 무대 위에서 부리는 몸짓처럼 어깨를 으쓱하시는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눈을 지그시 감고, 코로 바람을 깊이 마시면서 두 팔을 뒤로 잔뜩 젖히는 모습이 우리 선수들 눈에는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기도 했다.
때마침 오월 훈풍에 뒷산 언덕의 아카시아꽃이 바람에 그 향내를 가득 실어 보내왔다. 하지만 우리는 운동에만 골몰했지, 꽃향기 따위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은 어딘지 모르게 시인다운 데가 있었다. 특히 눈을 지그시 감으며 꽃향기에 취할 때면, '아! 시인이란 바로 저런 모습을 지닌 사람인가 보군'하고 생각이 될 정도였다.
당시 함흥 시내에서는 백계(白系) 러시아 사람이 와서 경영하는 문방구 겸 서점이 한 군데 있었는데, 나는 시내에 놀러 나갔다가 백석 선생님이 그 상점을 드나드시는 것을 가끔 본 적이 있었다. 소문에는 선생님이 그 러시아 사람에게 러시아말을 배운다고 하였다.
그해 가을 우리 영생고보 학생들은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수학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이때 우리를 인솔해갈 분이 백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기차 안의 어느 러시아 사람들에게 유창하게 말을 걸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그때 깜짝 놀랐다. 선생님의 외국어 실력이 정말 보통이 아니시었구나! 아마도 백선생님의 어학 실력은 거의 천부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