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숙명(宿命)
정운종(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얼마 전 99세 생신을 축하하는 한 원로 언론인의 ‘백수연’이 프레스 센터에서 있었다. 아직도 그 연세에 컴퓨터로 신문을 보고 골프를 치며 지하철을 이용해 나들이를 자유롭게 한다는 사회자의 말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100세를 넘기고도 젊은이 못지않게 글을 쓰고 강단에서 열변을 토하는 老교수와 90세가 훨씬 넘은 연세에 유투뷰를 통 헤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는 분이 있는가하면 갈수록 100세 노인이 늘어가는 추세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요즘 80세 정도론 노인 행세하기 어려운 시대다. 환갑잔치는 간 데 없고 미수(88세)나 돼야 노인 축에 드는 세상이다.
장수시대를 구가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등장한다. 힘든 노동과 질병 등으로 인해 매우 짧은 삶을 살아야했던 시대와는 달리 과학 기술의 발달과 그로 인한 의료기술의 첨단화가 사람들의 수명을 연장 시킨 탓도 있겠고 웰 빙 시대를 구가 할 수 있도록 먹 거리가 질적으로 다양해 진 것이 중요한 요인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1930년대 태생인 우리 나이 어린 시절엔, 밥 대신 고구마나 감자, 멀건 산나물국, 밀기울 개떡으로 보리 고개 끼니를 연명하던 사람들에겐 기름진 먹 거리가 장수요인 중 으뜸으로 손꼽힐지도 모른다.
문제는 노년이 돼서 겪는 네 가지 고통이다. 다시 말 해 빈고(貧苦), 고독고(孤獨苦), 무위고(無爲苦), 병고(病苦)다. 비록 평균수명은 크게 늘어났지만 노인인구의 상당수는 각종 질병을 앓고 있고, 배우자와 친구들의 죽음으로 인한 고독감과 사회와 가정에서의 역할 상실에다 노후대책을 세우지 못한 탓으로 경제적 빈곤까지 가중되어 ‘삶의 질’에서 이른바 ‘웰 빙’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노인들이 부지기수다..
젊어서는 자녀교육과 혼사 등에 전 재산을 바 치 다 시피 한 오늘의 노인 세대들이 늙어서 겪는 이 사고(四苦)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여기에 노인문제 해법의 열쇄가 있어 보인다. 얼마 전 통계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는 약 812만 5000여명으로 전체 인구의 15,7%나 된다. 5년 후인 2025년에는 노인인구 비중이 20.3%(1051만 1000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노인인구가 전체 인구 중 20%를 넘으면 초고령사회라니 우리나라도 몇해 안가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가운데 혼자 사는 독거노인은 20.1%, 노부부끼리 사는 노인도 21%나 된다. 다시 말해 자녀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인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노인들이 겪는 무위고(無爲苦)를 가중시키는 요인 중에는 무료함이랄까 심한 고독감에 시달려야하는 고통이다. 삼식(三食)이 신세로 집안에서 겪는 온갖 수모는 고사하고 나이 들어 천덕꾸러기 신세로 살아가는 노인들이 겪는 고통. 어쩌다 유행처럼 번진 ‘젖은 낙엽’(일본서 유행 하는 말 : 젖은 낙엽처럼 쓸어 내려 해도 땅에 찰 삭 달라붙어 안 떨어진다는 뜻) ‘분리수거 대상’(가장 내다 먼저 버려야할 폐기물이란 뜻)으로 전락한 노인들의 신세가 처량하게만 느껴진다. 이런 노인들에게 시급한 것은 생산적인 일거리와 여가 선용의 기회를 주는 일이다. 빈곤층 노인들에 대한 의료 혜택도 중요하지만 아직도 건강한 노인들에게는 연령에 적합한 일자리를 찾아줌으로써 노인들의 하루가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
노인들의 하루가 즐거우려면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에 속한다. 갈 곳 많고 즐길 곳은 많으나 함께할 친구도 없고 몰라서 못가고 못 노는 경우가 많은 것이 대다수 노인들의 실정이다.
생각해보면 집을 나서면 노인들이 갈 곳은 많아 보인다. 집안에 죽치고 있어봐야 무력감만 증폭되게 마련, 말 그대로 방콕(바에만 쳐 박혀 있다는 속어)은 금물이다.
노인들의 하루 일과는 각양각색이다. 복지관이나 노인정을 드나드는 노인들은 그곳 일정에 맞춰 소일하면 되고 그렇지 않고 무작정 집을 나와야 하는 노인들의 일과는 천차만별이다. 복지관을 찾는 노인들의 경우 노래교실 바둑 스포츠 댄스 탁구 당구 독서 서예 반에서 각자 수준 높은 취미생활을 할 수 있으나 마음에 맞는 친구와의 만남이라면 모르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끼리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상당한 인내심이 요구된다. 대체로 노인정이나 복지관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사회복지시설 이용은 그렇다 치고 무작정 집을 나선 노인들의 향방은 어떤지 궁금하다. 여러 부류가 있겠지만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휴식공간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경험으로 터득한지 오래다.서울이나 경기일원에 사는 노인들은 집만 나서면 종로 3가 파고다 공원이나 남산이 지척, 때로는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기원(棋院)이나 당구장을 찾아 스트레스를 푸는 기쁨도 쏠쏠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는 어느 정도 주머니 사정이 좋아야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최소한 1만원 한 장은 필수다. 여름철 지하철을 이용해 여가를 선용하려는 노인들의 경우 역 종점까지 갔다 돌아오는 왕복 코스를 즐기고 있어 서울 근교 지하철 종점엔 항상 노인들로 붐빈다고 한다. 지하철 1호선의 경우는 멀리 소요산에서, 아니면 온양 온천 또는 아우내 장터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할 수 있다. 4 호선은 멀리 오이도 종점에서 돈은 좀 들지만 바다 바람 정도 즐기다 조개구이 바지락 칼국수로 입맛을 돋우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지하철로 춘천까지 갈 수 있으니 춘천 막국수에 닭갈비에 ‘소양강 처녀’를 대하는 기쁨도 남다를 것이다.
경의 중앙선이 개통된 뒤로는 이 노선을 이용하는 나들이가 인기다. 문산 종점에서 1인당 1만 원 이상 점심을 들고 그 영수증만으로 도라산 역, 땅굴, 두부마을 등을 둘러 볼 수 있는 관광 상품까지 생겨나 문산 시장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문산 종점은 그렇다 치고 경의 중앙선 종점 용문산 역에 내리면 장날(5일장)은 장날대로 눈요기를 할 수 있고 역전에 즐비하게 늘어선 식당차를 이용해 용문산까지 공짜로 갈수 있다. 용문산 식당 들이 경쟁적으로 손님을 유치하고 있어 요령껏 이용하면 하루 소일은 식은 죽 먹기다.
다리품을 좀 팔아야 하지만 전통시장 돌아보기도 노인들 건강을 위해 권장할만하다. 지하철 공짜겠다 풍부한 눈요기에 식욕 댕기는 먹 거리로 배를 채울 수 있어 10년은 젊어 진 기분일 것이다.
경강선을 이용해 수원 여주에 들러 관광을 즐기거나 곤지암 역에서 화담 숲(입장료 경로우대 8000원)까지 셔틀 버스를 잘 만 이용하면 크게 교통비 안들이고도 하루를 즐겁게 소일할 수 있다. 화담 숲은 고 구본모 엘지 그룹 회장의 야심작으로 매일 관광객이 넘쳐 난다. 곤지암 소머리 국밥도 입맛을 돋우지만 여주역에선 여주시가 운영하는 셔틀버스가 세종대왕릉, 명성황후 생가, 신륵사를 순회하고 있어 이를 이용하면 하루가 잠깐이다.
공항철도를 이용한 소일거리도 짭짤하다. 여름철 겨울철 할 것 없이 인천 국제공항은 쾌적한 휴식공간으로 안성맞춤이다. 여기서 좀 더 발전하면 을왕리 해수욕장 모래사장 트레킹 코스나 용유도 해변 가 식당들의 조개구이가 일품이다. 동인천역에 내리면 차이나타운이 반기고 유원지에서 운이 좋은 날이면 남녀 간 마음에 맞는 새로운 친구(?)도 사귈 수 있으니 일석 3조다. 산책을 즐기고 싶으면 과천 서울 대공원이나 아차산, 안산 둘레길과 일산 정발산이 말 그대로 딱 좋은 트레킹코스다. 안산 둘레 길은 유모차까지 다닐 수 있어 노인들에겐 환상의 둘레 길로 통한다. 북한산 둘레 길도 코스에 따라 노인들 수준에 맞는 산책이 가능하다.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근처 도서관을 찾는 것도 좋은 여가 선용이다. 국회도서관이나 마을 독서실, 서울의 경우 교보문고에서 하루가 언제 갔는지 모를 정도로 독서삼매경에 빠진 노인들을 보면 존경심이 절로 난다.. 이런 여가 선용은 문자 그대로 신선놀음이 아닌가. 1주일에 하루쯤 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문화인다운 여가 선용. 관람료 5,000원(경로우대) 점심 7,000원이면 해결된다.
노인들의 건강은 이렇듯 여가를 어떻게 즐기느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움직이지 않고 방콕만 찾다보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우울증이 심해지면 치매로 발전하거나 고독사(孤獨死)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열심히 걷다보면 건강도 좋아지고 치매도 예방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이 들어 갈수록 노인들에게는 어떻게 비우고 내려놓을 것인가 하는 주변정리가 또한 초미의 관심사일 듯하다. 필자의 경우도 이런 저런 모임에서 봉사도 많이 했다고 자부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임을 절감한다. 건강이 허락지 않는데 무리하게 집착 할 여유가 없다.
‘노년의 숙명(宿命)이란 조금씩 비워가며 세상을 뜨는 것’ 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노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이르기를 ‘죄악(罪惡) 중에 탐욕보다 더 큰 죄악이 없고, 재앙(災殃) 중에는 만족할 줄 모르는 것 보다 더 큰 재앙이 없고, 허물 중에는 쓸모없는 욕망을 채우려는 것 보다 더 큰 허물은 없느니라.’ 고 했다. 노욕과 탐욕을 떨쳐버리면 매사에 존경 받게 된다는 선현들의 일깨움, 사랑하는 사람도, 아끼는 재물도, 그리고 삶의 의욕도, 언젠가는 자신도 모른 사이에 떠나간다는 사실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오늘도 공연한 집착에서 멀어지고자 이것저것 주변을 정리하고 있으니 인생무상이라 해야 할지, 오늘도 방콕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노인들에게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생산적인 일거리가 아쉬운 때이긴 해도 마음을 비우고 유유자적 하는 마음가짐이 노인의 건강을 지키는 값진 삶의 덕목임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경향신문 사우회보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