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안본부장
경찰청장
한국 현대사에서 여수 순천 14연대 반란 사건(정식명칭은 여수 순천 사건)때
진압군으로 와서 여수에서 즉결처분 그것도 일본도로 참수형을 집행한
자가 김종원입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니는 그것을 모르시더군요..ㅠㅠ
김종원 이야기를 하시길래... 제가 그놈은 양민학살주범인데...어떻게 죽였는지 아는지? 일본도로 초등학교에서
즉결 참수했다.....이런 이야기를 ...하니 "네는 왜 그런 잔인한 이야기를 하노?" 하십니다.
또 잔인한것을 싫어하셔서...참수..어쩌구..하면 으허허...잔인한거
이야기 하지마라...하십니다.
아마 여수에 사시는 분들은 김종원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실겁니다.
나이드신 분들에게 물어보면 잘 아실겁니다.
그리고 당시 외할아버지 댁에는 진압군으로 온게 아니고 투계를 즐기는 동호인에다가 추가로 자기 집안 식구를
가르치는 교사의 집(외숙이 부산에서 6.25 당시 교사였습니다. 부산여고.)이니 김종원이 놀러왔을겁니다.
그러니까 김종원이 부산에서 저희 외할아버지 댁에 놀러올 때는 경남계엄 민사부장일때 였을것입니다.
김종원의 악명은 여수 순천 사건 진압과정에서 악명이 높았습니다.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이 생긴거도 이때였습니다.
하도 잔인하여 미국에서도 용맹하다와 잔인하다 두가지 뜻인 백두산 호랑이( TIGER KIM )를 붙였지요.
해방 후 6.25 휴전때까지 이 자가 안낀 학살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기는 경남 함안의 한센인 학살 사건을 무마하기도 했다는 이야기에 나와 있는 김종원에 대한 인물 자료입니다.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의 악명
경남 함안의 ‘한센인 학살 사건’을 무마한 장본인이라는 증언이 나온 김종원(1922~63)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해방 이후 분단이 고착되는 혼란스런 해방 8년(1945~1953) 동안 무장공비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민간인 학살에 개입해 악명을 떨쳤다.
전갑생 경남근현대사연구회 연구원은 “우는 아이에게 ‘저기 김종원이 온다’는 말을 전하면 당장 울음을
그칠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며 “여순반란과 보도연맹 사건 등 그가 개입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수를 헤아리기 힘들다”고 말했다.
경북 경산군 중방면 380 일대에서 1922년 7월8일 태어난 그는 해방 이전
일본군 하사관으로 뉴기니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1946년 1월3일 육군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참관해 소위로 임관됐고,
1948년 여순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본도로 사람의 목을 내리치는 잔인한 모습을 선보여 첫 악명을 떨쳤다.
이후 지리산 일대에 흩어진 빨치산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백두산 호랑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부산일보>는 1960년 5월21일치에 “1950년 8월25일 양산군 물금면 등 7개 면 주민
730여명이 공비토벌을 하기 위하여 주둔했던 김종원 부대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총살됐다”는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다.
그는 무식하고 단순한 성격이었던지, 웃지 못할 일화를 많이 남겼다.
1949년, 마산 16연대 부연대장 시절 마산중학교(현 마산고등학교) 운동장에 마산 시내 전 중학생을 집결시키고서는
기관총을 단 지프차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나 “반민특위에서 나를 잡으러 오면
3초 안에 권총으로 모두 쏴 죽이겠다”고 말했다.
1950년대 초반 경찰국장(치안국장)으로 재직할 때는, 인플레 때문에 시민들이 큰 고생을
한다는 말을 듣고 “수사과장, 당장 가서 인플레 잡아와”라고 지시해 간부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는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거창 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국회 조사를 막기 위해 국군을 공비로 가장시켜 현장으로 가던 국회의원들과
군경검 합동조사반을 습격했다.
이 사실이 들통나 1951년 9월 군법회의에 회부됐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김종원을 이순신 장군에 비유해
“오직 애국충정뿐인 그가 간신배의 모함에 빠져 고초를 지르고 있다”는 성명서 초안을
작성해 8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후 전북경찰국장·경남경찰국장·경북경찰국장·치안국장·경찰전문학교장 등을 맡으며
승승장구했고, 을지무공훈장·금성충무무공훈장·미국 자유훈장 등 수많은 무공 훈장을 탔다.
1960년 5월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서울지검에 구속됐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 중 당뇨병에 걸려 석방됐으나 1963년 12월17일 사망했다.
또 하나는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80~181쪽 에 나온 백두산 호랑이 이야기입니다.
'손가락총'과 김종원의 참수형
반란군에 가담했던 사람의 선별 작업은 마구잡이식이었다. 예컨대, 당시 가담자들이
신발공장에서 '찌까다비'(일할 때 신는 신발)를 가져다 신었다는 소문 하
나만 듣고 진압군은 그 신발을 신은 청년은 무조건 사살했다.
그밖에도 수많은 청년들이 학생복을 입은 죄로, 머리를 군대식으로 짧게 깎은 죄로,
국방색 런닝셔츠를 입은 죄로 살해되었다.
'손가락총'도 동원되었다. 당시 여수군청 직원이었던 김계유는 "세 곳에 모인 시민들에 대하여도
살아남은 경찰관이나 우익진영 요인들이 돌아다니면서 소위 '심사' 라는 것을 했는데,
시민들 중에 가담자가 눈에 띄면 뒤따른 군경에게 '저 사람' 하고 손가락질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즉결처분장으로 끌려가는 판이니 누구나 산목숨이라고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진압군들에 의하여 여수서초등학교 교정으로 붇찹혀 온 여수시민 청장년들이 자기 집들이 불타는 것을 보고도 속수무책으로 잡혀있는 광경. 반란 동조 혐의자로 판명되면, 이곳 학교 뒤 교정에서 즉결처형(참수&총살) 되었다. 오른쪽 대열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부역 혐의자들로서, 이들 중 89명이 11월 1일 처형되었다.
그 손가락질은 곧 총살 대상을 지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손가락총'이었다.
홍영기는 "지역공동체 성원 간에 자행된 '손가락총'은 인간성 말살과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심사' 과정에서 '손가락총' 이라는 말이 유행하였으며 중상모략이 난무했었다.
이로 말미암아 무고한 희생자가 더욱 많아졌고, 그 희생의 주체가 누구인지 애매한 경우가
많았음은 물론이다"라고 말했다.
토벌군이 작전의 실패를 감추기 위한 조작과 반란군을 놓친 것에 대한 분풀이의 잔인성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5연대 지휘관인 대위 김종원의 행태였다.
5연대가 상륙작전을 하면서 마구 쏘아댄 박격포탄에 반란군이 아닌 12연대 수색대가 맞아 중대장과 하사관 1명이 전사했다.
그 어이없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김종원은 반란군을 찾아 돌산섬을 비롯하여 여기저기 수색했지만 허탕을 쳤다.
독이 오른 김종원은 아무 증거도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군내리에서 3명, 남면 안도에서 20여 명을 죽이고,
중앙국민학교에 자리잡은 부대로 돌아와 붙잡혀 온 청년들을 보고 "이놈들에게 칼 시험이나 해 보겠다"며 들고
다니던 일본도를 빼들고 한 청년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 청년이 중상을 입고도 피를 흘리며 다른 청년들 뒤로 몸을 피하자
김종원은 계속 칼을 휘둘러 7명의 젊은이를 모두 죽였다.
희대의 즉결 참수(斬首)였던 것이다.
김종원은 6.25 때 '백두산 호랑이' 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데,
바로 그런 인물이 유능한 군인이나 경찰로 대접받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 배후로 1차로 체포되었을 때 그는 재판정에서도 큰 소리를 쳤습니다.
이글루스 산하님이 올린 김종원의 장면 저격때 일화입니다.
산하의 오역
1957년 3월 6일 "당신은 일개 판사지만 나는 헌병 사령관이야."
대한민국은 자칭 법치국가다.
비록 그 말이 진담보다는 농담처럼 들린 세월이 길지만
그 시절에도 힘 쥔 자는 법을 통해, 법의 이름으로 철권을 휘두르고 목을 조르고 즈려밟았다.
그러니 법정이란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끼고 자신이
관련된 재판인 경우 판사가 하느님처럼 높아 보이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1957년 ...3월 6일 이 판사를 앞에 두고 재판 똑똑히 하라고,
당신은 일개 판사지만 나는 왕년의 사령관이었노라고 판사를 윽박지르는 대장부(?)가 있었다.
그 이름이 김종원이다.
당시 그의 직함은 치안국장이었다.
즉 요즘으로 하면 경찰청장보다 더 높은 급의 고위 관리였다.
그런데 그는 부통령 장면 저격 사건과 관련하여 법정에 나와 있었다.
고령의 이승만 대통령이 어찌될지 모르는 판에 권력 승계 1순위였던 민주당 출신의 장면이 이기붕 이하
자유당 인사들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현장에서 잡힌 범인은 민주당 계파 싸움의 소산으로 둘러댔으나 곧 꼬리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급기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배후의 인물들이 끌려나왔다. 김종원도 그 의심을 받은 인물 중의 하나였다.
"재판 공정히 하시오! 나를 근거도 없이 배후로 몰고 있어! 법정도 못믿겠어!
맘대로 해! 당신은 일개 판사지만 나는 헌병사령관이었어. "
판사가 법정모욕임을 상기시키며 퇴정을 명령했지만 그마저 무시한채
김종원은 재판정을 도때기 시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법치국가 재판정의 위신을 이토록 말씀 아니게 만든 김종원은 누구일까.
그는 일본군 하사관 출신이었다.
일본군 태평양 전선 가운데 최전방 뉴기니 전선에서 호주군과 싸웠던 그는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참담한 전황 속에서도 용케 살아서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 국방경비대 장교로 변신했다.
신분은 바뀌었으되 그는 흡사 얼치기 사극에 등장하는 못되고 사악한 일본군 오장의 전형이었다.
부하들을 야차처럼 괴롭혀서 해임과 복직을 반복했던 그는 여순 사건 당시 진압군으로 투입되었을 때 앞뒤
가리지 않고 박격포를 쏘아 대는 바람에 아군에게까지 피해를 입혀 미군 군사고문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갓댐! 저거 뭐하는 자식이야.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본격적인 진압과정에서 그는 뉴기니에서부터 가져왔다는 일본도를 휘두르며 '빨갱이'들의 목을 쳐 나갔다.
남경대학살 때 중국인들을 상대로 또는 연합군 포로들을 상대로 목 베기 시합을 했던
일본군의 정기는 왕년의 식민지 출신 전직 하사관에게 유감없이 전승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일본군과는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일본군 장교들은 졸병들에게 잔혹하고 민간인들에게 악마같이 굴었지만 그들과 맞닥뜨린 적군에게도
역시 불가사의하고 무모할 정도의 용감성을 보였는데 김종원은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전쟁 당시 3사단 23연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23연대를 맡은 미 군사고문들은 가끔 귀신처럼
현장에서 사라지는 연대장을 찾아 헤메거나, 무턱대고 후퇴하려는 김종원을 제지하느라
죽을동 살동 발버둥쳐야 했다고 한다.
미군 장교들은 이 무능한 장교가 부하들을 닦달하고 심지어 서슴없이 죽여 버리는 데에도 경악했다.
또 한 번 미군이 김종원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은 23연대 미군 군사 고문 푸트만 대위가 얼굴이 새파래져서
“한국군이 부산 교도소에 수감된 좌익수 3천 5백명을 몽땅 학살하려 한다.”는 보고를 올렸을 때였다.
수일 내에 인민군이 부산에 이를 것이고 그전에 빨갱이들을 몰살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미 군사고문단은 김종원과 ‘협상’을 벌였고 인민군이 부산에 이르면 기관총을 사용해도 좋다는 승인을 해 주고서야
김종원을 제지할 수 있었다. (그 뒤 미군의 기록은 없지만 학살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김종원은 경상도 경산 출신으로 백두산 근처에도 안가 본 주제에 ‘백두산 호랑이’라는 근사한 별명을 지녔고
미군들에게도 ‘타이거 킴’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 호랑이는 적에게는 고양이고 부하들이나 민간인들에게는 식인호랑이였다.
거창 학살 사건 때 국회의원 진상 조사단에게 공비를 위장하여 총질을 했던
그는 이 사건으로 군을 떠난 뒤로는 경찰로 변신했고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경남경찰국장 시절 참모회의 중에 인플레가 서민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대뜸 “어이 수사과장 당장 인플레란 놈을 잡아와!”라고 일갈했던 이 무식한 인간은 결국 치안국장,
요즘의 경찰청장이라는 어마어마한 보직을 차지하게 된다.
경찰 정복에 말 타고 도심을 누비기를 즐겼던 이 희한한 고양이과 짐승은 경찰서장을 공개리에 두들겨패는 등
망나니 짓을 계속한다.
그의 출세 비결은 ‘무조건 충성’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공비로 가장해 국회의원들에게 총질한 것을 필두로, 이승만이 미국 대사와 말다툼을 벌이자
누가 우리 대통령 각하에게 대드냐면서 권총을 들고 뛰어들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니 더 말할 것이 없다.
친구를 알면 그 사람을 안다고 이런 인간이 충신이라고 애지중지했던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사람도 참 알만한 양반이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장면 부통령이 총에 맞을 당시에도 김종원은 치안국장이었다.
사건 현장에서 몰매를 맞은 범인을 데리고 경찰병원으로 데리고 간 다음 경찰간부에게 범인이 배후 관계에 대해
할 얘기를 연습시킨 다음 천연덕스럽게 민주당 계파 싸움이 원인인 것 같다고
기자들에게 말한 것도 김종원이었다.
그리고 1957년 3월 6일 “판사! 당신 재판 똑바로 하란 말이야.”를 부르짖는 초유의 법정모욕을 벌인 것도
백두산 식인 호랑이 김종원이었다.
4.19 이후에야 그는 장면 암살 기도 사건의 배후로 기소되지만 병보석으로 나와 편안하게 세상을 뜬다.
무모한 돌격 명령을 내린 후 재고를 요청하는 부하를 쏘아 죽이고,
인민군과 맞서 싸울 생각 이전에 죄수들 먼저 죽일 생각에 여념이 없던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은 군대에서는 물론 경찰에서도 최고위직에 올랐고,
오늘도 경찰청장 방에 걸려 있는 역대 경찰의 왕별들의 초상화의 한 임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어느 일본군 하사관의 인생 역정 참으로 화려하고도 드라마틱하지 않은가.
앞뒤 안가리는 무모함, 외부의 적 앞에서는 고양이, 제가 지켜야 할 국민 앞에서는 식인호랑이가 되는 유연함,
밥 주는 주인에게 물불을 안가리는 충성심,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무식함과 촌스러움 등등 김종원이 지녔던 품성은
마치 유전처럼 대한민국 군과 경찰을 가로지르고 있다면 과장이 될까.
제 생각이지만 이 자는 일본군 출신 중에서도 잔인하고 엽기적이었던것이..
아마도 뉴기니아 전선에 참전해서일것으로 보입니다.
뉴기니아 전선은 2차대전당시
일본군이 호주로 진격하기 전에 교두보였는데..연합군(미군,호주군)이 보급로를 끊어버리자
일본군은 고립됩니다.
즉 당시 뉴기니 점령 지대로 보급을 수송하는 일본군 수송선을 족족 격침시킨거지요..
거기다 현지에서 음식 조달을 하면
되는걸로 알던 일본군 최고진영의 멍청함(중국이나 인도차이나, 말레이 전선처럼 다른데처럼 점령후 약탈)이
뉴기니의
지도상에서만 보고 보급하였기에 열악한 상황을 몰랐던것입니다.
결국 보급로가 끊긴 일본군들은 연합군과의 전쟁...배고픔과의 전쟁에 이중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급기야 적을 죽이면
그들을 먹고야 말겠다는 식인 개념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쏘고..그 시신을 끌어와서 요리해서 먹고 다음 정글지대로 후퇴하는 전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군들은 어디서나 잔인했지만 특히 잔인했던곳이 뉴기니아 전선에 간 일본군들이라 생각합니다.
뉴기니아 전선에서 생존률이 10%에 불과했다고 합니다.나머지 90%는 전투중,또는 기아로 죽었던것이지요
김종원의 잔인한 성격도 여기서 생긴것으로 봅니다.
만약에 역사에 또 가정은 없지만... 김종원이 박정희를 남로당일때 만났다면 그의 목을 참수했을까요?
그럴 경우 역사는 어찌 바뀌었을지 궁금합니다.
하나 더 올리고 다음 글로 넘어가지요...전사 블로그에 있는 엽기적인 김종원 이야기입니다.
6.25 동란은 수많은 역사의 인물들을 배출했다.
영웅도 있었고 악당도 있었고 기인도 있었고
매력남도 있었고 엽기남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서 현재의
경찰청장급인 전 내무부 치안국장 김 종원이 있었다.
그는 원래 육군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하였다.
일본군 지원병 출신인 그는 해방이 되자 육사 1기에
입교하여 단기 교육을 받고 임관했었다.
부지런함과 책임감으로 순조로운 승진을 거듭해서
6.25 사변 중에는 연대를지휘했고 헌병 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했다.
성격이 호방했지만 부하들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던
그의 엄격함은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게 만들었다.
김 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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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진을 보면 부리부리한 눈매며 전체적인 생김새가
호상이라고 할만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그의 과격한 성격은 전쟁이라는 난세의
극한 상황에서 가끔 잔인성으로 돌변했다.
부하들의 즉결처분과 과도한 토벌로 양민들을
많이 희생시켰고 그 뒤에도 여러 사건을 일으켜
구설수에 시달렸다.
그가 경남지구 계엄 민사부장이었을 때 거창 양민 사건이 터지고
여론이 들고 일어나자 국회에서 현지로 조사단이 파견한 일이 생겼다.
김종원은 이를 방해하고자 공비로 가장한 부하들을 거창의 피해지역인
신원면 가는 길에 매복시켰다가 조사단 차의 행렬에 총격을 가하게 하였다.
결국 이 치졸한 음모는 세상에 알려졌고 김 종원은 군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김 종원을 무척 충직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던
이 승만 대통령은 그를 경찰로 보냈다.
지전사[지리산 지구 전투 사령부]사령관을 시작으로 전북
도경국장등의 여러 요직을 거친 그는 전국 치안의 총수인 치안국장이 되었다.
경찰로 변신했지만 그는 그 괄괄한 성격을 마구 휘두르는
기행을 버리지 않았었다.
지리산 일대 군경 합동 공비 토벌 작전시 그는
군 연대장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지휘봉으로
두들겨 패는 비상식적인 짓을 했다.
국군 연대장이 육사 후배가 되니 우습게보고 그렇게 했겠지만
도가 넘는 월권행위였다.
고창군 공음지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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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폭행을 맛 본 사람중에 연대장 같은 고위 간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군 사병들도 있었다
김 국장은 말타기를 좋아해서 치안국장이 되어서도
말을 타고 출근하는 일이 많았었다.
김 종원은 승마 출근중에 그에게 경례를 하지 않은
군인을 보면 여지없이 채찍으로 후려쳤다.
군인이 경찰에게 경례하라는 규정이 없었는데도
재수가 없었던 군인은 날벼락같은 엉뚱한 채찍질로
휴가 기분을 망쳐야 했다.
원체 호랑이 같이 난폭하게 구니 부하들은
그를 진짜 호랑이 보다 더 무서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치안 국장 시절의 이야기다.
그 부하 중에 통신과장인 모씨가 있었다.
그는 성격은 좋았지만 무척 겁이 많았었다.
특히 그는 백두산 호랑이를 두려워해서
결재를 받으러 갈때는 전쟁에 나서는
병사처럼 비장한 모습으로 임했었다.
그는 어느 날 그 힘든 결재를 받으러
간 일이 있었다.
치안 국장의 방은 이층에 있었는데
그가 결재를 받으러 부속실로 올라간 순간에
난데없이 김 종원의 방에서 폭언이 터져 나왔다.
전화로 부하에게 해대는 김 종원 특유의
거친 욕지거리였다.
자기 보고 한 폭언이 아니었는데도 공포에 질린
통신과장은 결재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바람처럼
날아 1층으로 도피했다.
그 모습은 맹수에게 쫓기는 토끼의 모습보다도 더 날렵해서
치안국의 오랜 화제가 되었다.
코미디 같은 일화도 있었다.
한번은 전북 도경의 간부 모씨가 김 종원에게
자기 아들이 경찰에 입문하여 서울에 배치를 받았으니
잘 지도해달라는 부탁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김 종원을 모시던 사람이었다.
간부는 그 편지에서 옛 선비들 예절 식으로
자기 아들은 낮추어 돈아[豚兒]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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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아[豚兒]- 돼지 새끼라는 뜻으로 자기 자식을
한층 낮추어 표현한 것이다 .
가아(家兒)라는 말도 쓰지만 돈아가 더 겸손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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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했다는 평을 받던 김 종원은 이 돈아를 문자 그대로
직선적으로 해석했다.
진짜 돼지 새끼로 안 것이다.
김 종원은 즉시 비서를 불렀다.
“ 야! 전주에서 새끼 돼지 한 마리 올라온 일 있냐?”
비서가 알아 보니 돼지 같은 것은 보내 온 일이 없었다.
그는 보고했다
“ 아무 것도 안 올라왔는데요.”
김 종원은 버럭 화를 냈다.
“ 어떤 놈이 가로챘군 ! 이 편지를 봐!”
잘 배운 비서가 전주에서 보내온 편지를 보니
위의 돈아라는 어려운 한자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령좋은비서는 그 의미에 대해서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하면 호랑이의 무식함을 면전에서
폭로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중에 적당한 말을 꾸며대서 김 종원 무식을
무마 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김종원은 회의중에 국민들이 인플레 때문에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즉시 특명을 내렸다.
" 그 인플레라는 놈을 체포해와라!"
그러나 항상 토픽을 몰고 다니는 김 종원 일화의 압권은
저 먼 전북 남원의 운봉 지서에서 터졌다.
당시 운봉은 공비의 창궐지역이라서 부족한 인원을
시골 청년들로 구성된 의용 경찰이라는, 거의 자원 봉사자
개념의 지원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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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지리산 주변 지서들은 지금과 달리 전투 경찰들과
의용 경찰들을 포함해서 수백명이 넘는 군사요새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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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군 산서 지서 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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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용 경찰들은 그저 밥이나 먹여주고 잠만 재워주는
조건으로 마다하지 않고 모든 궂은 일을 해야 했다.
어느 날 김 종원 국장이 순시차 나타나자 지서는 아연 긴장했다.
그 날 두 의용 경찰 들이 지서내 어느 외따른 건물 뒤에서
햇빛을 쪼이며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긴장한 서내 분위기를 눈치 챈 한 녀석이 다른 녀석에게 물었다.
“ 누가 온디야 ?”
다른 녀석이 아는체하며 대답했다.
“ 백두산 호랑이가 온디야!”
그 순간 모퉁이를 돌며 김 종원이가 나타났다.
그는 자기 별명을 말하는 그 소리를 들었다.
김 종원의 호랑이 얼굴에서 이글거리는
눈빛이 두 놈을 쏘아봤다.
두 명은 까무러치게 놀랐다.
호랑이 앞에서는 넋을 잃어버리는 인간의 본성대로
넋을 놓았지만 훈련 받은 본능대로차렷 자세를 했다.
김 종원은 두 녀석에게 먹이를 놓고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처럼 슬슬 시비를 걸었다.
“ 내가 누구냐 ?”
두 녀석중 한 명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려야한다는
옛 말씀은 되뇌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대답했다.
“ 넷 ! 백두산 호랭이십니다!”
재미있게 생각한 호랑이는 다시 물었다.
“ 그러면 넌 무엇이냐 ?”
그 의용경찰 녀석은 충무공이 말씀하신대로
사측생[死側生]의 각오로 대답했다.
“ 넷 ! 백두산 호랭이 새끼입니다!”
순박한 시골 청년의 머리에서 나왔을까 의심스러운
기발한 대답이었다.
무시무시하게 빛나던 호랑이의 눈매가 함박눈처럼 녹아내리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 우하하하 ! 좋아!”
호랑이라는 자기 품에 마다않고 기어 드는 녀석이 귀엽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즉시 수행원과 지서장에게 명령했다.
“ 이 녀석! 쓸만하군 ! 특채해서 순경으로 발령내!”
현대의 인기 개그맨이라 해도 60년전 그 시골 청년의
순발력에는 미치지 못할 경우가 많을 것이다.
김 종원은 경찰이 남부군 사령관 이 현상의 사체를 확보하자
이를 가지고 경무대[ 현 청와대 ]를 찾아가서 이 승만 대통령에게
한번 보시라고 한 엽기적인 일화를 남겼었다.
[이 박사는 이를 거절했다.]
자유당이 몰락하자 그도 몰락했다.
그는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복역중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 되어 40대의 젊은 나이로
이승을 하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