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부터 그에 관한 소식이 들려왔다. 마흔 줄의 배가 불룩하게 나온 댄서라고 했다. 청계천 전태일 거리에서 열린 ‘열사 추모문화제’에서, ‘기륭전자 일일주점’에서, 수요일마다 열리는 ‘홈에버 거리문화제’, 매일 열리는 ‘기륭전자 촛불문화제’에서 그를 만났다. 관객들은 노래 위주의 문화제에 댄스가 등장하는 것만으로 흥미로워했다. 사실 노동문화제에서 종종 율동이 등장하긴 했지만 브레이크 댄스를 보긴 어려웠다. 그는 1980년대 인기곡인 박남정의 〈아, 바람이여〉나 박상철의 <자옥아>를 배경음악으로 몸을 흔들었다. 볼 때마다 코믹한 표정으로 보는 이를 웃음 띠게 만드는 마흔한 살의 비보이는 어떻게 노동문화 속으로 들어왔을까?
‘시설관리공단’에서 5년째 근무하는 그는 지난해 이사장 친인척의 불합리한 인사를 폭로한 글을 작성했다. 일곱 명 정도가 모여 대응했다. 그가 작성한 글을 의회에도 올리고 지방신문에도 알렸다. 회사는 그를 해직했다. 복직 문제로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를 방문했다. 센터에서 진행한 노동의 역사에 관한 강의도 듣고 한반도 평화에 관한 강의(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도 들었다.
“그동안 거짓된 방송 정보에 눈과 귀가 어두워졌는데 깨지게 되더라. 많은 열사들의 투쟁과 희생으로 우리가 이렇게 민주화되었다는 것을 알게 됐어.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가 공짜로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어. 회사에 돌아가 노동법을 읊어줬더니, ‘얘가 생각보다 똑똑해졌구나, 더 건드리면 안 되겠구나’ 하는 반응이더라고. 하하.”
하지만 회사에선 근무 시간을 야간으로 자주 돌려 직원들과 소통을 막고 문화제 참여를 어렵게 하고 있다. 복직 문제를 도와준 문재훈 소장은 그의 댄스 실력을 알아보고 기륭전자 문화제에 소개했다. 기륭전자의 투쟁이 900 여 일쯤 지났을 때였다.
“기륭과는 뗄 수 없는 인연인 것 같아. 가장 많은 공연을 기륭에서 했어. 시간만 나면 기륭을 찾았지. 기륭 노동자들을 보면 가족 같아.”
이날은 기륭전자 조합원 권명희를 잃은 다음날이었다. 예정된 공연이 취소되면서부터 낌새를 챘다고 한다. 기륭에서 인기(?)를 얻은 그는 지금은 2~3 일에 한 번 꼴로 공연장을 찾는다. 몇 해 전부터 경로잔치나 사회복지기관에서 자선공연을 해왔다. 할머니, 할아버지들 반응이 특히 열광적이란다. 그래도 가장 반응이 뜨거운 곳은 노동문화제 관객들이다.
“노동문화제 관객들이 버라이어티한 것을 더 좋아하더라구. 나의 작은 재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좋아. 난 즉흥적으로 몸짓을 만들어내는 프리 스타일을 좋아해. 옛날부터 그랬어. 그 순간의 느낌을 좋아해. 현장 공연에 강한 편이지. 관객들과 호흡을 통해 흥이 나거든. 즉각적으로 응용해서 추는 편이야. 성경에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 속에 천국이 숨어 있다는 말이 있어.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 춤을 통해 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좋아.”
가리봉 키드, 마이클 잭슨을 만나다
가리봉과의 인연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가리봉에서 자랐고, 가리봉에서 놀았고, 가리봉에서 영화를 봤고, 가리봉에서 춤을 췄다. 어머니는 구멍가게를 했고 아버지는 원풍모방에서 경비로 일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아버지는 고향인 남해에서 ‘푸른학원’이라는 야학교를 운영했다. 아버지를 일러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돈을 많이 벌던데 니네 아버지는 왜 저런다냐? 많이 배우면 뭐하냐!”며 어머니께선 타박하곤 했다. 기억 속의 아버지는 오로지 집과 회사만 왕래하는 가족적인 분이었다. 그럼에도 가난했다. 아버지는 함께하진 못했지만 원풍모방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봤다. 그는 평소 사회주의가 더 좋은 사회제도라고 얘기하곤 했다. 방송에서 편협된 사회주의자의 모습을 그려낼 때면, 사회주의자는 대부분 인텔리들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 말 속에 어떤 항변이 잡히곤 했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 살림이었지만 초등학생인 그의 먹을거리만은 풍족했다.
“그땐 피아노가 있는 집이 얼마 안 됐는데 피아노가 있어도 빵과 우유를 간식으로 먹진 못했어. 나는 간식으로 먹었거든. 그땐 구멍가게에 반품이 없던 때라 내가 다 먹어 치웠지.”
칼 세이건을 좋아하고 과학자를 꿈꾸던 그는 반에서 오락부장을 맡을 만큼 개구쟁이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다양한 학문을 즐기고 호기심이 많아 문자로 된 건 다 읽었다.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다 어느 날 브레이크 댄스가 미지의 것으로 그의 생애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브레이크 댄스를 처음 선보인 영화 <플래시 댄스>를 봤다. 처음엔 로봇처럼 움직이는 인간의 모습이 카메라 조작인 줄 알았다. 관악고등학교 1학년 땐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을 보았다. 필이 꽂혔다. 그동안 헛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밤낮으로 브레이크 댄스가 어른거렸다. 브레이크 댄스를 가르쳐주는 곳을 찾았다. YMCA에서 8만 원에 수강할 수 있었지만 당시로선 치를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래서 대학로에 있는 브레이크 댄스 무용단을 찾아갔다. ‘유씨디씨’, ‘짝꿍’의 멤버들에게 춤을 배우면서 공부와 담을 쌓기 시작했다. 그 담 아래서 그는, 그의 몸은 신들린 듯 움직였다.
“본격적으로 배우니까 의외로 내가 소질이 있더라고. 입문 6개월 만에 가리봉을 평정했으니까.”
가리봉 키드의 전성시대(全盛時代)
‘퀸다방 디스코 경연대회’에서 어린 나이로 1등을 차지하고 퀸다방 평생 무료 입장권을 받았다. 영화 <브레이크 댄스>의 주제가인 <레클렉스>에 맞춰 춤을 췄다. 당시 다방은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자주 찾는 휴식 장소였다. 그중에서 퀸다방은 그의 말에 따르면 초절정 스타들이 등장하는 다방이었다. 퀸다방의 퀸들은 나이 어린 여공들이었다. 그 시절엔 노동자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코믹한 분위기의 DJ가 있는 다방이 인기 있었다. 가리봉은 춤꾼들이 많은 전국적인 무대였다. 춤꾼들은 가리봉으로 모여 들었다. 종로, 가리봉, 이태원의 삼파전 시대라고 이르지만, 으뜸은 가리봉이었다. 그때부터 다른 다방과 나이트클럽 경연대회에 초청 받아 다니기 시작했다. 영등포, 종로, 명동, 이태원, 심지어 만리포까지 50여 회의 댄스 대회에 참가했다. 승률은 100퍼센트였다. 가리봉 키드의 전성기였다.
“내가 별로 주목받지 못한 학생이었는데 춤을 잘 추니까 학교에서 인기 짱이 되더라고. 열심히 춤추고 있으면 사람들이 막 모이더라고. 그래서 힙합을 좋아하게 됐어.”
2~3주에 한 번씩 AFKN 방송을 통해 춤을 배웠다. 지금 비보이들은 인터넷 검색창에 팝핀이며 프리지를 입력하면 많은 동영상 강좌를 보고 배울 수 있지만 비디오도 없던 그때는 한 번 본 것을 외워야 했다. 후배 비보이들은 비디오도 없던 시대에 어떻게 배웠는지 신기해한다. 눈으로 보고 익히는 방법이라 실수도 많았고 배우는 데 시간도 많이 걸렸다. 친구들과 함께 본 후 서로 지적하면서 동작을 익혀나갔다. AFKN을 보거나 어쩌다 한 번씩 미군 부대 근처를 얼쩡대면서 흑인들의 댄스 동작에서 배우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악으로 깡으로’ 배우던 비보이 1세대였다.
“브레이크 댄스를 다른 말로 ‘스트리트 재즈’라고 해. 길에서 추는 재즈. 브레이크 댄스의 원류가 마이너한 삶과 관련된 걸 알았고 그것 때문에 좋았어. 뉴욕 뒷골목 흑인 브레이커들이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며 춤추는 거. 그런 모습이 잘 나온 영화가 존 트라볼타 주연의 <토요일 밤의 열기>나 <비트 스트리트>라는 영화야. 힙합의 리듬이 그거거든. 그게 곧 내 얘기야. 브로드웨이, 맨하탄, 스퀘어 가든으로 유명한 뉴욕의 화려한 거리에 가려진 뒷골목이, 나에겐 가리봉 골목이었어.”
춤에 미쳐서 정식으로 대학교에서 무용을 배울까 생각했다. 방문한 무용학원은 다른 곳에 비해 저렴했지만 레슨비를 낼 수 없었다. 입학하고 싶은 학교의 교수 레슨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가리봉 키드로 돌아왔다.
때마침 그때는 빌보드 차트에서 댄스곡이 강세였을 때였다. 그 바닥에서 뜨기 시작한 가리봉 키드는 다방의 코믹한 DJ가 되어 잔업, 철야에 지친 퀸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오늘 밤 짜고치는 고스톱. 자, 손 한 번 들어봐! 너는 안 되겠다”, “아직도 정글 속을 헤매는 미스터 람보” 등이 그의 단골 멘트였다. 지침 없는 노동은 그네들의 꿈을 짓밟았지만 열여덟, 열아홉 생글벙글한 청춘의 생기마저 짓밟지는 못했다. 공돌이, 공순이라고 많이 놀리기도 했다지만, 그때도 그는 노동자들에게 웃음을 주는 벗이었다.
“가리봉시장에서 만든 영화 <구로 아리랑>에도 나오지만 그 당시 가리봉은 두 가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데모하러 오는 대학생들도 많았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월급날이면 다방이나 나이트에 춤추러 오는 노동자들도 많았어. 노동자들에게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잖아.”
나이트클럽은 ‘마부 나이트’, ‘거북 나이트’, ‘팽대팽대 나이트’가 인기를 끌었다. 어렸지만 나이에 고무줄 퉁기며 언니들에게 ‘오빠’ 소릴 들었다. 가리봉 연예인은 영역을 넓혀갔다. 그 시절 얼마나 틀어댔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팝송 제목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영록이 오빠 나오면 정말 여성 노동자들 쓰러졌지. 다방에선 김승진이나 김범룡 노래가 자주 나왔어. 아, 그리고 <품행제로>라는 영화 있잖아. 류승범 나오는 거. 영화는 좋은데 거기 나오는 노래가 안 맞아. <밤비나> 아니야. 박혜성 노래가 나오는 때면 신디 로퍼의 〈쉬 밥〉, 컬처클럽의 <까마 카멜레온>, 제이 가이스 밴드의 <센타 폴드>, 에프 알 데이비드의 <월드>, 그리고 부르스 곡으로 이에로나 루이스 터커의 <미드나이트 블루>, 마이클 플래투의 <문 나이트 플라워> 나오던 때야. 일본 노래가 들어오지 않는 때여서 백판으로 들었던 <긴기라기니> 인기도 엄청났어. 대중들은 매찌라고 부르던 가수인데 판돌이나 음악하던 사람들은 곤도 미사유키라고 불렀지. 그 노랜 롤라장 인기곡이기도 했어.”
예수를 사랑한 비보이
그가 스무 살을 넘기며 대중가요와 팝송 너머에서 민중가요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가 접하는 노동자들을 통해 동정적 시선 정도로 그네들을 바라보던 때였다. 스물한 살 무렵, 방송국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코리아 기획’이라는 프로덕션 소속 댄서로 각지의 나이트클럽을 무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대부분 기획사들이 강남으로 이동했지만 그때는 이태원에 프로덕션들이 즐비했다. 전형적인 업소 건달들이 연예기획사를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다. 회계가 투명하지 않았고 출연료는 떼어먹히기 일쑤였다. 그가 소속된 기획사에는 듀스의 김성민, 현진영 등이 소속돼 있었다. 이주노, 양현석, 클론의 강원래 등이 아직 유명세를 타기 전 이태원의 나이트클럽에서 그와 함께 1세대 비보이로 활동했다. 1세대 비보이들은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것은 물론 관객의 흥을 돋우기 위해 악어쇼, 불쇼, 각설이 춤도 췄다고 한다.
이때는 한 달에 스물여섯 군데의 나이트클럽을 뛰어야 했다. 직업 무용수들은 의치가 많다고 한다. 교통사고가 많기 때문이다. 업소 한 군데를 빠트리면 3일치 금액을 물어줘야 했기 때문에 청량리에서 천호동까지 15분 만에 달리곤 했다. 그래도 공기업에 다니는 지금보다 돈을 더 벌었다. 하도 사고가 많다 보니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방공연이 잦아 집을 떠나 살다 몇 년 만에 집에 들어와 보니 누나가 결혼하고 난 후였다. 1991년, 독실한 크리스천인 어머니의 요청으로 보수적 교단에서 세운 국제신학대학원 대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에 입학했을 때 패션이 딴따라 분위기라 교수님들이 이상하게 보더라구. 내가 어딜 가도 좀 튀어. 딴따라 끼가 있는 거고, 좋은 말로 예능적 끼가 있는 거고.”
민중신학, 해방신학이 기독 청년들의 가슴에 아로새겨지던 시대였다. 모든 교수들이 보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한신대학교 등 진보적 신학대에서 초청된 외부 강사 중 한 분이 문서설에 관해 대안적 관점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보수 교단에서 이단시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반발로 쫓겨났다. 하지만 그는 많은 면에서 그 강사의 내용에 공감했다. 그는 아프리카 등 오지에서 어린 아이들을 위해 일하는 선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어느 날 제3세계 어린이들의 삶을 다룬 르포를 봤는데 필이 왔단다. 더 소외된 곳, 예수가 사랑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영화 <미션>에서, 노예상인이었으나 성직자의 길로 들어서 인디오들을 위해 목숨을 던진 주인공, <엉클 톰스 캐빈>에서 노예의 속박에서 탈출하는 톰 아저씨를 구출해 주는 퀘이커 교도 선교사 부부가 그가 꿈꾸는 선교사의 모습이었다(그는 퀘이커 교도들이 한국에선 이단으로 인식되지만 외국에선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춤을 멈출 수는 없었다. 당시 인기 있는 댄스 프로그램인 ‘꾸러기 콘테스트’에 나가 3주 연속 우승했고, 연말 결선에서 그가 계발한 엉덩이춤으로 대상을 차지했다. ‘캔디 춤’으로 불리는 이 춤은 많은 연예인들이 따라하기 시작했고, H.O.T.의 문희준이 모방하면서 급격히 유행을 탔다.
할렐루야 브레이크 댄스 팀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교회에서 그런 걸 해서 되겠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현재는 CCD(Christian Church Dance)로 활동하는 브레이크 댄스 팀들이 많다고 한다. 그는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백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변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가 베드로에게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묻잖아. 그런데 베드로가 배신 안 때린다고 해놓고 나중에 배신 때리지. 성경은 인간의 약한 모습을 그리고 있어. 사람 냄새가 나. 그게 거룩한 거지. 개인적으로 예수가 베드로를 정말 좋아했던 것 같아. 그땐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서 신학대를 더 다니지 못했어. 예수도 못한 일을 내가 하려고 했지. 사람들이 안 변하더라고.”
요즘 그의 행보를 알게 된 교회 목사님이 ‘제일 좋은 것은 완벽한 사회주의이고 제일 나쁜 것은 타락한 사회주의이다’라면서 우려했다. 완벽한 자본주의와 타락한 자본주의의 모습에 대해 목사님은 어떤 대답을 들려줄까?
그는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중퇴했다. 롯데제과에 입사해 10여 년 영업을 하다 5년 전 시설관리공단으로 회사를 옮겼다. 회사를 옮긴 후 사이버대학교에서 노인사회복지학과, 평생교육사, 보육교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발레리나보다 마이너리티를 사랑하는 비보이
“나는 메이저리그보다 마이너리그가 더 재밌어. <간디>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리처드 아텐보로 감독의 <코러스 라인>이라는 영화가 마이너 무용수들의 삶을 다룬 거잖아. 인생 자체가 나는 마이너한 것이 있어. 힙합이 지금은 고급화된 면이 있지만 원래 마이너한 삶들의 문화야.”
‘뉴스타임’이라는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다. 1세대 비보이인 그가 ‘겜블러’ 등 후배 비보이들을 만나는 내용이었다. 한국 비보이가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과정을 보면서 그도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유명한 비보이 그룹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비보이들은 지금도 열악한 환경에서 춤추고 있다.
“그때 비보이들은 댄서의 메카인 가리봉 나이트클럽이나 대학로에서 모였는데 지금 애들은 연습실에서 모이더라. 그때 후배 댄서들에게 늙을 때까지, 체력의 한계가 올 때까지 출 거라고 말했어. 내 나이 또래에 댄서하기 힘들잖아.”
1세대 비보이들은 이주노, 양현석처럼 인기를 얻은 사람을 빼곤 기획사에서 안무를 담당하거나 다른 직업으로 전향해서 일하고 있다.
“인생이 잘못 풀린 사람들이 많아. 비보이들은 춤추는 것밖에 모르거든. 실패하면 할 게 없어. 비보이 문화가 유행에 그치지 않고, 자유롭게 춤출 수 있는 사회 환경을 만들어 가고 싶어.”
그는 촛불 물결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무관심해졌지만 다시 거대한 촛불로 이어질 거라고 믿고 있다. 커다란 촛불이 다시 타오를 때까지 그는 현장에서 밑불들을 발견한다.
“지금도 사람에게 실망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내 자신을 먼저 보려고 해. 문화제에서 노래판 선배들, 기륭이나 홈에버에서 봉사하는 분들을 보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 같아. 그런 시선을 계속 갖고 살고 싶어. 그리고 뜻 있는 비보이 후배들과 함께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하는 공연 문화를 만들어갈 생각이야. 대중 예술가이면서 인권과 노동문화에 기여한 밥 말리 형님처럼 살고 싶어.”
그는 가리봉 키드의 기억을 안고 가리봉 거리로 돌아와 ‘스트리트 재즈’를 연주하며 오늘의 가리봉 현실을 알리며 싸우고 있다. 노동자의 춤추는 벗, 그는 모든 노동자들이 해방된 세상에서 벌거벗고 춤추는 그날까지 1세대 비보이이자, 마지막 비보이로 기억될 것이다.
첫댓글 원로비보이 김기용님 맞지요
허걱, 이 분이 까페에 종종 오시는 그 분인가 보네요.
평범한 원로 비보이가 아니었군요 ㅎㅎㅎ 원로 비보이를 뛰어넘은 원로 스트릿댄서
대단하시네요...진정한 비보이입니다...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요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