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행 . 4
(점봉이)
신 동 규
무릎 꿇어 도열한 고만고만한 산봉우리들의 열병을 받으며, 속초행 고속버스는 대관령 정상을 향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가을의 문턱을 넘어선 자연은 거대한 한 폭의 산수화였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절경들을 외면한 채 아내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처럼 잠들 수 없어 몸을 뒤척거리고만 있었다. 내 젊음의 족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영동 땅을 사십 여 년 만에 밟는 설렘 때문이었다. 지금의 내 감회는 한 마디로 요약해 감개무량, 그것이었다. 생각이 생각을 낳는다고 했던가. 나는 화산에서 분출되는 용암처럼 한꺼번에 밀어 닥치는 잡다한 상념들을 정리하느라 꿀 같은 오수를 즐길 겨를이 없었다. 게 중에는 목연필 흔적처럼 쉽게 지워지는 것도 있고, 문신이나 불도장처럼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점봉의 존재가 바로 불도장이었다. 반평생을 함께해 온 아내를 곁에 두고 감히 외간여인(?)에 몰입한 채 전전반측한다는 자체가 아내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 나도 인간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점봉은 내설악 깊은 산골 마을에서 산딸기처럼 곱게 자란 처녀였다. 그녀의 외모는 산난초처럼 청초하고 성품은 순진무구했다. 갸름한 얼굴에 웃을 때면 생겨나는 볼우물은 뭇 남정네들을 뇌쇄 시켰다. 입술은 붉고 하얀 치아는 가지런했으며 피부 역시 백옥 같았다. 치렁치렁 길게 기른 머리털은 말갈기를 연상시켰다. 점봉에 관한 얘기를 하자면, 타이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가 전우였던 매쇠 얘기를 먼저 하는 게 올바른 순서가 될 것 같다. 그는 나와 점봉을 엮어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연락 한 번 않다가 금강산 관광 길에 오르면서야 그를 떠올리는 처사가 떳떳한 처신은 아니지만, 언제 이런 기회가 오겠는가 싶어 나는 조급증 환자처럼 들뜬 기분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고속버스는 오후 새참 때 쯤 되어서야 종점지 속초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는 예약된 ‘미가도호텔’로 가 여장을 풀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장을 풀기 바쁘게 사우나탕으로 달려가 풍덩 온 몸을 담궈 여독을 풀고 싶었지만 행여, 만날지도 모르는 매쇠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속초 앞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15층 객실에 아내를 혼자 둔 채 나는 로비 프런트로 내려가 속초 시내 전화번호부를 구해 펼쳤다. 나는 한참만에야 물치리 ***번지 김매쇠를 찾아냈다. 특이한 이름인지라 찾기 쉬웠다. 나는 급히 다이얼을 돌렸다. 전역할 무렵, ‘서울에서 사업에 크게 성공한 집안 형님이 제대하기 바쁘게 데려갈 지도 모른다‘ 며 들떠 있었는데 여의치 못했는가 보았다. 전화는 곧 접속되었다.
‘죄송합니다만 거기가 혹시 김매쇠씨 댁인가요?’
‘그렇소만.’
‘그럼 전화 받으신 분이 혹시 매쇠씨?’
‘절, 잘 아시는 분 같은데, 누구실까?’
그는 내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는 그의 비음 섞인 음성으로도 단박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나는 정곡을 쏘아 맞춘 궁사처럼 쾌재를 부르며 신분을 밝혔다.
“그럼, 자네가 바로 나랑 군 생활을 함께한 영필이라 그말인가?"
"그렇다니까. 금강산 관광차 속초에 들린 김에 자네가 생각나 혹시나 했는데 연결이 됐구먼. 그간 잘 지냈는가?“
“이젠 영감이 다 됐지 뭐. 사십 여 년 만에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를 마나다니!... 귀한 손님이 왔는데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내 곧 자네 숙소로 찾아 감세.”
그로부터 한 시 간 후 매쇠는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 왔다. 프런트로부터 연락을 받은 나는 부랴부랴 로비로 달려갔다. 로비 한 켠에 초로의 노인이 엉거주춤 서 있었다. 한 눈에 봐서도 매쇠임을 알 수 있었다.
“매쇠! 맞지?”
“자네가 영필이?”
나는 공산 국가의 수뇌들이 국빈을 맞아 상견례하듯 매쇠를 와락 껴안으며 해후의 기쁨을 나누었다.
“용캐도 나를 찾아내는 걸 보면 자넨 역시 비상한 사람이야.”
“서울 사는 김서방도 찾는 세상인데 뭘. 속초 시내 전화부를 뒤졌드니 자네 이름이 등재돼 있지 뭔가.”
“맞아. 그게 전화번호부의 위력이 아니겠는가.... 초장에 일이 잘 풀려 서울 사람이 됐더라면 자네를 영영 만나지 못했을 것인데 이런 경우를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전역해 보니 서울 형님이 쫄딱 망했지 뭔가. 그래 고향에 눌러 있을 수 밖에 없더라고. 농사짓고 고기 잡으며 요 모양 요 꼴로 늙어 가고 있구만.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는 모양이지?”
그는 허물없는 전우 앞이지만 자신의 초라한 행색에 신경이 쓰이는지 자꾸만 옷섶으로 손이 가곤 했다. 아까 서로를 껴안았을 때 그의 몸에서 땀 냄새와 갯내음이 물씬 풍기는 걸로 보아 그는 여생을 편히 지낼 나이인데도 아직까지 생업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한 듯싶었다. 극적인 해후의 감격이 가라앉고 평상심을 되찾은 나는 매쇠를 데리고 객실로 올라갔다. 짐 정리를 끝낸 아내는 샤워중인 모양이었다. 벨이 울리고도 한참 후에야 문이 열렸다. 아내는 내 뒤를 따라온 남루한 차림의 불청객을 일별한 다음 누구냐며 눈으로 묻고 있었다.
“아, 이분 말이요? 나와 군복무를 함께한 매쇠라는 전우요. 속초에 살고 있다기에 연락을 취했더니 이렇게 한 달음에 달려왔지 뭐요.”
나는 조금 뜸을 들였다가 머쓱해져 있는 매쇠에게 아내를 소개했다.
“내 아낼세, 인사드리게...”
감격스런 상봉의 기분에 들뜬 두 사람은 회포를 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느새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있었다.
“저녁은 내가 대접함세. 생선회 좋아하지? 사모님께서도..”
매쇠는 우리 부부를 택시에 태워 부둣가 단골 생선횟집으로 안내했다.
“사십 년 만에 만난 전우이니 한 상 잘 차려 주소.”
매쇠가 식당 주인에게 당부해서인지 밥상은 귀한 해산물로 그득하였다. 한치회를 비롯한 귀한 해산물로 포식을 하고나자 복부가 답답하고 거북스러웠다.
“바람도 쏘일 겸 바닷가나 거닐세.”
낌새를 눈치 챈 매쇠가 카운터로 가 계산을 끝내고 오면서 말했다.
부두는 개량된 시설로 말끔하게 대체되어 너저분하고 비릿내 풍기던 옛날에 비해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속초 앞 바다의 야경을 즐기며 한 바탕 바닷바람을 쏘이고 나자 반주로 마신 술기운이 금방 가셔버리고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저녁을 대접 받았으니 2차로 술대접은 내가 해야 할 것 같았다.
“기분도 그렇지 않고... 어디 가서 한 잔 더 하세.”
나는 보리밭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는 아내를 택시에 태워 먼저 보내고 매쇠와 단둘이 부두 근처 건사한 술집으로 갔다.
“금강산 여행 차 왔다고? 철옹성 같던 휴전선이 뚫려 이북 땅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니 세상 참으로 좋아졌구만.”
“그러게 말야. 속초에 한 번 가 봐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자식들이 금강산 관광 신청을 했지 뭔가. 집결지가 속초라기에 옳다, 이 기회에 자네를 만나봐야겠다. 생각한 거지.”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마우이...장가도 잘 든 것 같고 자식 농사도 성공했나 보구만.”
“일 남 이 녀를 두었는데 모두 잘 자라 줬고 나름대로 자리 잡아 잘 살고 있다네.”
“점봉을 여읜 슬픔으로 식음까지 전폐하고 종내는 우울증세로 고생하더니 쉽게 결혼할 생각을 했나 보구만...”
말끝을 흐린 매쇠의 말 속에는 은연 중 가시가 돋아 있는 것 같았다.
“우여곡절이 많았었네. 죽을 각오로 음독까지 해봤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구. 묘한 인연으로 만난 한 여인을 알고부터 헛된 마음을 고쳐먹었지 뭔가. 그 여인이 바로 지금의 아내일세. 아내가 나락에 빠져 있는 나를 구제했다고나 할까.”
“그런 일도 있었나? 아무튼 자넨 염복이 많은 사람이 분명하이. 부인이 미인이던 걸. 뜯어 볼수록 점봉을 닮았더라구.”
나와 매쇠는 점봉에 관한 회고담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보물선 찾기>는 동해안에 빈번하게 침투하는 북한 잠수정 소탕을 위한 육해공 3군 합동작전 명령이었다. 동해안방위사령부에 배속된 나와 매쇠는 해안 초소 근무를 명받았다. 전방 훈련소에서부터 단짝이었던 나와 매쇠는 공교롭게도 같은 부대에 배속되었다. 우리 부대의 관할 구역은 동해안 일대의 해안 초소였다. 나와 매쇠는 간첩선의 출몰이 잦은 ‘안인지’ 부근 해안 초소에 투입되었다. 운명의 그날, 나와 매쇠는 새벽 근무 조에 편성되어 있었다. 곤한 잠에서 깨어난 두 사람은 몽롱한 정신을 추스르며 임무 교대 되었다. 진지에 투입된 지 두어 시간 후, 초소의 망원경에 괴물체가 포착되었다. 해면을 들락거리는 괴물체에서 간헐적으로 새어나오는 발광체는 전자파가 분명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미명을 틈 타 활동을 개시하는 북한 잠수정인 듯싶었다. 괴물체는 빠른 속도로 해안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연안 접근 괴물체 발견!> 나는 경비 전화로 본부 상황실에 급보를 띄우고 전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보고를 접한 부대에서는 즉각 대응 조치가 취해졌다. 해안 초소 곳곳의 탐조등은 일제히 불을 밝혀 해면을 훑기 시작하고, 해안포는 목표물을 조준하여 발사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기지에 정박 중인 경비정과 해군 함정들도 닻을 올렸다. 이윽고 새벽 공기를 가르며 대잠 초계기까지 등장, 새벽 바다에 조명탄을 투하하자 동해 상공은 갑자기 대낮처럼 밝아졌다. 두어 시간의 수륙공 합동작전으로 괴물체는 마침내 침몰되었다. 북한 해군이 소유한 소련제 상어급 잠수정이었다. 해군 udt 요원이 출동하여 침몰된 잠수정을 꽁꽁 밧줄로 묶고 장비를 동원 인양해 육지로 옮기고 나서 잠수정 안을 수색하자 남루한 옷을 걸친 십여 구의 북한군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 시체 중 상당수는 해안으로 상륙하여 백두대간을 타고 후방으로 잠입 정탐 활동을 벌일 간첩 요원들일 터였다. 나와 매쇠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표창 대상이 되었다. 군사령부 연병장에서 열린 훈장수여식에는 수많은 별들이 자리했으며 국방부 장관까지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나와 매쇠는 무공 훈장 수상, 일 계급 특진, 보름간 포상휴가의 은전을 입었다. 화려했던 행사가 끝나고 휴가증을 수령하였지만 나는 막상 갈 곳이 없었다. 희희낙락 기쁨을 주체치 못하는 매쇠와는 경우가 달랐다. 한 반도 남쪽에 엄연한 고향이 있고 그곳에 부모 형제가 살고 있었지만 왠지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는 항상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었고 계모는 팥쥐 어멈을 닮았는지 인정머리가 없어 도통 정이 붙지 않았다. 비단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첫사랑 순애의 변신도 내 발목을 잡는 변수가 되었다. 순애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고 울화가 치밀어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군 복무하는 동안 마음 변한 그녀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만 것이었다. 제대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겠다며 굳게 맹세했던 그녀는 이웃 마을 최부자네 외동아들에게 시집가 버린 것이었다.
“차라리 휴가를 반납할까 보다. 갈 곳도 없는데 휴가를 받아 어디다 쓰겠냐.”
내 심정을 헤아리는 매쇠인지라 맥 빠진 넋두리를 귓등으로 듣고만 있지 않았다.
“그까짓 기집애 제발 잊어라. 내가 게보다 더 예쁜 처녀 소개해줄 테다. 정, 고향 집에 가기 싫으면 나와 함께 우리 집으로 가자.”
“말은 고맙다만 네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폐는 무슨 폐라고 그러냐. 우리 부모님, 내 친구들 정말 좋아 하신다. 어렵게 생각 마라. 아까 내가 예쁜 처녀 소개해준다고 한 말 절대로 거짓부렁이 아니다. 내 이종 사촌 누이인데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 또한 그만이다. 내가 다리를 놔 줄 테니 한번 사겨봐라.”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집요하게 매달리는 매쇠의 권유를 못이기는 척, 나는 난생 처음 속초 땅을 밟게 되었다. 매쇠의 집은 속초시 외곽에 위치했다. 행정 구역상으로만 시 권역일 뿐 전형적인 반농반어의 시골 마을이었다. 그의 부모는 농사철에는 땅을 갈아 씨앗을 뿌리고 농한기에는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 가계를 꾸린다 하였다. 마당을 비롯한 집 주변에 각종 농기계가 널려 있고 그물, 부표, 깃발 같은 각종 어구들 또한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농사는 가용에 불과하지만 고기잡이 수입이 짭짤하여 매쇠를 춘천에 있는 지방대학에 유학 시킬 수 있었다고 했다. 매쇠네는 조그만 동력선 한 척을 소유하고 있었다. 매쇠의 아버지는 아들과 나를 태우고 바다로 나갔다. 오징어잡이 대형 어선들에 뒤섞여 매쇠의 통통배는 파도를 갈랐다. 통통배는 휘황찬란한 전구를 매단 대형 오징어잡이 배에 비해 왜소하기 짝이 없었지만 어로 작업에는 지장 없는 요긴한 생업의 도구였다. 근해에 그물을 내리고 미역 다시마 같은 해초류를 채취하는 아버지의 등은 멍에처럼 굽어 있었다. 매쇠와 나는 아버지의 어로 작업을 힘껏 도왔다.
“구경이나 하려무나. 무리하면 안 된다.”
매쇠 아버지의 고기잡이배는 광활한 근해 전체가 어장이나 다름없었다. 거진항. 대진항. 명파리 근해를 거침없이 누볐다. 어로 작업 중 간간히 휴전선 부근에 위풍당당한 위용을 드러낸 채 초계임무에 여념이 없는 해군 함정도 볼 수 있었다. 만선의 기쁨을 안고 귀환하면 매쇠의 어머니는 항상 성찬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바다에서 돌아와 보니 집에 아릿따운 처녀가 와 있었다. 그녀는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어머니를 돕고 있었다. 바로 점봉이었다. 빨래를 너는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 본 순간부터 나는 가슴이 콩쾅거리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빼어난 미모였다. 흘깃 본 그녀의 외모는 배신한 순애보다 훨씬 더 예뻤다. 내가 휴가 반납의 심경을 토로할 때 매쇠가 들먹이던 그 이종 사촌 누이가 분명할 터였다.
“이거 점봉이 아니냐? 언제 왔드노. 이모님도 편안하시냐? 참, 알고 지내라. 나와 함께 군 복무를 하는 전우다. 이번 포상 휴가를 함께 왔지 뭐니."
매쇠는 내게 시선을 돌려,
“뭐하노, 인사 안 하고.”
재촉하듯 말했다. 나는 머뭇거리다 말고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성영필입니다. 오빠와 함께 근무하고 있습니다.”
“싱겁긴, 인사가 그게 뭐냐. 두 손을 마주 잡아야지.”
매쇠는 내손을 끌어 점봉의 손 위에 포개주었다. 그녀의 살갗이 맞닿는 순간 나는 마치 강한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짜릿한 감촉에 몸을 떨었다.
“누이는 내설악 산골 귀둔이라는 마을에 사는데 내 휴가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찾아왔지 뭐냐. 아니다. 영필이 너를 만나러 왔는지도 모른다.”
매쇠의 농담에 점봉의 귀밑은 앵도알처럼 빨개지고 있었다. 나는 매사에 빈틈없고 용의주도한 매쇠가 나를 위해 점봉을 불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비록 사촌 간이지만 두 사람 사이는 연인처럼 절친한 듯싶었다.
“제 이름이 촌스럽지예?”
스스럼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점봉은 보조개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천만에요. 이름에서 황토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걸요 뭐. 그리고 부르기도 좋아 금상첨홥니다.”
점봉은 자신의 이름에 얽힌 사연을 얘기해 주었다. 서른이 넘도록 자식 없음을 한탄하던 그녀의 부모는 점봉산 자락 한적한 암자에 올라 백일치성을 드렸다. 불공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태기가 있었고 그렇게 해서 얻은 자식이 점봉이라는 것이다. 명산, 점봉산의 정기를 받은 탓인지 점봉은 자색을 겸비하여 무탈하게 자랐고 이제 시집갈 나이가 된 것이었다.
어로 작업을 끝마치고 귀환하던 중 매쇠네 동력선이 멈춰선 사고가 발생하였다. 긴급 출동한 어로지도선은 연안 선박수리소로 고장난 배를 견인해 주었다. 교체시기를 넘긴 노후 선박인지라 엔진 내부의 링과 피스턴이 마모되어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야만 하는데 여러 날이 소요될 거라 하였다. 배를 수리하는 동안 바다에 나가지 못하면 몹시 무료할거라며 매쇠가 극적인 제안을 했다.
“우리 이번 기회에 귀둔 점봉이 집으로 놀러 갔으면 한다. 점봉이 니 생각은 어떠냐?”
“오빠, 그렇게 해요. 대 환영이라예.”
어머니의 승낙도 받지 않았을 터인 대도 점봉이가 더 좋아하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영필이 너도 함께 가는 거다?”
나는 당장 매쇠의 그늘을 벗어나면 갈 곳도 없는 터라 싫다 좋다 의견을 개진할 처지가 목되었다. 그저 매쇠가 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영필씨도 함께 가요. 네?”
마음이 끌리는 점봉의 권유 역시 내 결심을 재촉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했던가? 나의 내심은 바로 그랬다. 그러나 나는 행여, 경박하게 보일까 봐 즉각적인 의사 표시를 미루고 있었다.
“묵시는 긍정이나 다름없는 거라. 그럼 내일 일찍 출발한다. 영필과 점봉은 그리 알도록...”
매쇠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제스처로 내일 출발을 공표하고 있었다.
다음 날 일찍 속초 정류장으로 간 세 사람은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속초발 홍천 경유 서울행 시외버스 편으로 거진을 경유, 백두대간의 허리 진부령을 넘고 원통을 거쳐 인제정류장에 하차했다. 나와 매쇠는 점봉의 안내로 인제발 현리행 시골 버스에 올랐다. <리비스톤교>를 건너 현리 방면을 향해 한참을 가자 마을 어귀인 듯한 길가에 버스승강장 표시판이 보였다. 일행은 귀둔 승강장에서 차를 내렸다. 귀둔 마을까지는 정기 교통편이 없으므로 걸어야 한다며 점봉은 신발 끈을 조여 맸다. 점봉은 승강장에서 왼쪽으로 빠꿈이 뚫린 산길을 향해 앞장 서 갔다. 산길 초입은 간짓대를 걸치면 맞닿을 정도로 좁디좁은 협곡이었다. 그런 천애의 협곡 안에 마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골짜기에도 마을이 있습니까?”
내가 주변 산세에 위압을 느끼며 의아한 표정을 짓자,
“이 골짜기 막창 우리 마을에 6.25 전쟁 당시 미군 기갑여단이 주둔했드래요.”
앞장 서 걷던 점봉이 뒤돌아 나를 보며 염려 놓으라는 듯 대답했다.
“정말루요? 이런 골짜기에 탱크부대가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나는 점봉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적군이 협곡 입구만 봉쇄해 버린다면 옴짝달싹 할 수 없어 무기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릴 막창 지역에 궤도차 부대가 주둔했다는 사실이 병법에는 문외한인 나로서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궤도차 부대란 사막이나 평야지대와 같은 개활지에 주둔해야만 사방팔방으로 출동과 퇴각이 가능할 것인데 이런 골짜기를 주둔지로 택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갈수록 희한한 현상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짙은 안개가 걷히듯 첩첩한 산들이 저만치 물러앉아 있고 시야 역시 넓어지는 것이었다. 개울의 폭도 넓어지고 버들개지 나무와 갈대 사이로 고마니풀을 비롯한 한해살이 잡초들이 빼곡한 개울에서 들려오는 개울물 소리 역시 톤을 높이고 있었다. 개울 좌우로 조성된 들녘도 광활하여 소규모 평야지대를 보는 것 같았다. 능히 천석군이 나올만한 들녘을 지나 막창 지점에 이르자 이 백 여 호가 넘는 꽤 규모가 큰 촌락이 암팡지게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은 너와 지붕이 대부분이었지만 기와를 인 집들도 더러 있었다. 아하! 나는 뒤늦게야 미군 궤도차 부대가 이 곳에 주둔한 까닭이 이해되었다. 마을 뒤 산기슭에 위치한 점봉의 집은 전형적인 너와집이었다.
“아이고 내 새끼야 어서오니라. 군대 생활 하니라고 얼마나 고생 했노. 휴가 나왔나보구나.”
환갑을 넘겼을 점봉의 어머니는 조카의 노고를 위로하며 환대하다 말고 이삿짐의 강아지처럼 두 사람 뒤를 따라온 불청객을 흘끔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 파악에 명수인 매쇠가 그대로 있을 턱이 없다.
“이모님! 이 친구는 제 전우인데 함께 휴가 나왔습니다. 강원도 산골 구경을 꼭 한번 하고 싶대서 제가 이렇게 염체 불구하고 데려 왔습니다. 이봐 친구! 어서 인사 올리게. 내 이모님이시네.”
“안녕하십니까. 매쇠의 전우인 영필이라고 합니다. 불청객 처지에 폐를 끼치게 돼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나는 구 십도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청상의 몸으로 애지중지 외동딸을 키워 시골 여고까지 졸업시킨 점봉의 어머니는 여장부였다. 비록 농사일에 찌들어 피부는 거칠었지만 갸름한 미인형의 얼굴하며 안광에서 내뿜는 총기가 범상치 않은 여인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님 대접은 깍듯하기만 했다. 강원도 특산물인 감자, 감자를 원료로 만든 감자떡, 찰진 옥수수는 물론 때때로 마을 가까운 가리봉산과 점봉산 골짜기에서 캐온 더덕이며 도라지 뿌리를 갈아 집 뒤란에서 직접 채취한 한봉꿀에 타서 내오곤 했다. 사방팔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 주변의 수려한 산들을 보자 유독 산을 좋아하는 나는 산에 오르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마을 근처 산에라도 올라보자고 매쇠를 조르자, 마을 뒤로 가면 전국의 산악인들이 즐겨 찾는 가리봉산을 갈 수 있다며 점봉이 안내를 자청했다. 점봉은 간단한 요깃거리를 만들어 산행차림으로 앞장을 섰다. 설악산의 비경 못잖은 가리봉산의 정취는 나를 단번에 매료시켜 산 속에서 살고픈 충동을 느끼게 만들었다. 정상에 올라 하계를 보자 보이는 것은 첩첩한 산등성이들과 빽빽한 수림뿐이었다. 곧바로 가면 곰배령이고 왼쪽 한계령 방면으로 내려가면 장수대. 옥녀봉. 그 반대 방향은 방동약수터와 필레약수터로 가는 길이라 하였다. 그날은 정상에서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음 날 좀 더 멀리 점봉산 정상까지 가보기로 했다. 산나물과 약초 채취로 단련된 점봉은 전문 산악인 못잖은 등산 실력으로 내설악 전체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고 있었다. 점봉산은 인제군 기린면과 양양군 서면의 경계지점에 위치하는 명산이라 했다. 점봉산은 가리봉산보다 훨씬 더 먼 곳에 위치하므로 왕복 꼬빡 하루가 걸리는 여정이라며 점봉은 그 준비에 부산했다. 며칠 후 우리 세 사람은 점봉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음식과 도구들이 가득 든 배낭은 남정네들이 멨다. 한 시간 정도 걸려 옛집 터를 지나고 첫 번째 갈림길에서 곰배령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작은 점봉산을 지나고 한참을 더 올라 해가 중천을 넘어설 무렵에야 점봉산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점봉의 출생 비화와 연관이 있는 암자를 한번 들렀으면 싶었으나 저지난해 발생한 대형 산불에 소실되어 그 형체가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점봉산 정상에 오르자 북쪽 멀리 한계령 능선이 바라다 보였고 그 위쪽 대청봉쪽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한가롭게 걸려 있었다. 정상에서 곧바로 내려가면 단풍이 절경인 주전골이 있다했지만 시간 관계 상 후일을 기약할 수 밖에 없어 매우 아쉬웠다. 우리는 어둠이 깃들 무렵에야 귀둔 마을로 귀가할 수 있었다. 멀고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나는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단짝인 친구와 호감이 가는 여인과 행동을 함께 하다보니 피곤도 범법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나는 귀둔 마을에 머무르는 동안 짬을 내 방동약수터와 필레약수터도 들러 보았다. 양양의 오색 약수터와 쌍벽을 이룬다는 방동약수는 탄산과 망간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위장병과 소화불량증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내설악에서의 며칠은 꿀 같은 휴식과 아련한 사랑의 기쁨을 내게 안겨 주었다. 점봉은 이별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별을 앞 둔 그날 밤 점봉은 밤새워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떠나는 날, 전송 나온 점봉과 그의 어머니는 가면서 먹으라며 손수 만든 감자떡을 싸 안겼고 매쇠 부모님에게 드릴 특산물도 꾸려 내놨다. 점봉은 조그만 선물 상자를 내 손에 꼬옥 쥐어주는 것이었다. 마을 어귀 버스 승강장까지 배웅 나온 점봉은 이별이 서러운 듯 눈물만 글썽이고 있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잘 지내요. 또 올게요.”
나는 눈시울을 붉히며 석별의 인사로 손을 내밀었다. 마주 잡은 점봉의 손도 흠뻑 젖어 있었다. 돌아오는 차내에서 꺼내본 그녀의 선물은 하트를 수놓은 손수건 한 장이었다. 나는 그 손수건을 가지런히 접어 군복 안 호주머니 깊숙이 챙겨 넣었다. 나는 휴가를 얻거나 외박 등 짬만 나면 귀둔 마을을 찾았고 그때마다 점봉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며 사랑을 불태웠다. 나는 종내 점봉을 소유하고 말았다. 서로의 살을 섞은 두 사람은 이미 평생을 함께 하기로 작심한 예비부부나 다름없었다. 근엄하기로 소문난 점봉의 어머니도 내가 싫지 않아 사윗감으로 점찍고 있는 듯싶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였다. 군 복무를 마친 즉시 부모님에게 내 뜻을 알리고 점봉을 아내로 맞을 부푼 꿈에 들떠 있는 내게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날아든 것이었다. 전역을 눈 앞에 두고 환호작약하는 내게 날아든 비보는 비수보다 더 날카로운 충격이었다. 전역해 돌아올 나의 건강을 챙기려는 일념으로 약초를 캐러 깊은 산속에 들어간 점봉은 독 오른 살모사에 물렸다는 것이다. 뒤늦게 구조되어 인제읍 소재 큰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온 몸으로 독이 퍼져 있어 끝내 회생하지 못했다 한다. 매쇠로부터 그녀의 부음을 전해들은 나는 억장에 무너지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우황 든 황소처럼 끄응 소리를 내지르며 머리를 싸매 드러누워 버렸다. 하늘이 노오랗고 세상이 암흑 그대로였다. 식음을 전폐한 채 실의에 빠져 있는 나를 매쇠는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다. 매쇠가 곁에 있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동해바다에 몸을 던져 점봉의 뒤를 따랐을 지도 몰랐다. 매쇠의 위로가 상처 난 내 가슴을 조금은 아물게 해준 것이었다. 전역증을 손에 들고 고향 예비사단으로 출발하던 날 나는 매쇠와 함께 점봉의 무덤을 찾았으나 그녀의 무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고루한 유교 관념에 얽매인 집안 어른들이 제삿밥도 못 얻어먹는 처녀 귀신 처지라며 선산 매장을 거부하고 시신을 화장해 내린천 상류에 뿌렸다는 것이었다. 딸의 무덤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서럽지 않겠다며 어머니는 닭똥 같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다.
나는 여복이 없는 팔자를 타고 난 모양 같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으니 사주팔자가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점봉의 유골이 뿌려졌다는 내린천으로 가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손아귀에는 머리털이 한 옹큼 쥐어져 있었다. 그 머리털을 라이터 불로 태우자 머리털은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순식간에 재로 변했다. 나는 그 재를 거두어 강물에 띄워 보냈다. 점봉의 넋을 옭아매고 있는 처녀귀신의 딱지가 소멸되어 저승에서나마 대접 받는 처지가 되었으면, 정성껏 빌고 또 빌었다.
조혼이 판치던 당시에 나는 서른이 훨씬 넘어서야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점봉을 잃고 난 칠 팔 년 후의 일이었다. 내 사주와 관상을 본 역술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중(僧)상이므로 평생을 혼자 살 팔자라고 정의했지만 나는 그들의 예상을 여지없이 무너뜨려 버린 것이었다. 점봉을 여읠 당시의 심경으로는 어느 누구와도 평생 동안 결혼하지 않을 것 이라 다짐했지만 나는 그 초심을 지켜내지 못했다.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인간 마음 조석 변’이라는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어휘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며 나는 혼자서 실소를 자아내곤 했었다.
얄팍한 손익 계산을 따지는 것 같아 쑥스럽지만, 냉철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점봉과의 사랑이 결실을 맺었을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를 운명론에 입각하여 가상해 보는 게 반드시 부질없는 일 만은 아닐 것 같다. 전자의 경우를 가상하면, 나는 필시 강원도 산골의 일개 필부로 생을 살고 있지나 않았을까? 점봉은 그네 집안의 유일한 한 점 혈육인지라 어머니 곁을 떠나지 못했을 터이고 나는 종내 처가살이 신세가 되어 귀둔 마을에 눌러 앉을 수 밖에 없었을 터이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심마니가 됐던지, 지역의 특성상 고랭지 채소를 비롯한 각종 웰빙 식품을 생산하는 농삿꾼 아니면, 마을 어귀 목 좋은 곳에 터를 잡아 음식 숙박업을 운영하는 자영업자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점봉을 여의고 실의에 차 있는 내 앞에 구세주가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전역해 귀향한 나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심각한 우울증 환자가 되어버렸다. 우울증 증세는 자폐 증상과 더불어 생의 의욕을 잃게 하는 염세 증세까지 동반했다. 그늘진 얼굴에서 내풍기는 음산함은 소름이 끼친다며 주변 사람들은 한사코 나를 멀리 했다. 웃음진 표정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식욕마저 떨어져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골방에 종일 틀어 박혀 말 한 마디도 내뱉지 않고 허구한 날을 폐인처럼 무의미하게 허송할 따름이었다. 할 일 많은 농촌에서 날마다 빈둥거리고만 있는 나를 곱게 볼 리 없었다. 알콜 중독된 남편은 산송장이나 다름없고 장대 같은 아들 역시 요 모양 요 꼴이라며, 계모는 앙앙불락 연약한 딸을 앞세워 집안일을 꾸려가느라 고생이 많았다. 세월이 약이었는지 날이 가고 달이 가자 내 병세는 조금 씩 호전되었다. 이때다 싶었던지 계모는 나를 논으로 내몰았다. 그해따라 비가 잦고 고온다습하여 병충해가 극성을 부렸다. 병충해 예방을 위해 농촌 사람들은 농약통을 등에 지고 살다시피 했다. 어머니는 내게 농약 살포를 지시하며 농약이 가득 든 분무기를 등에 지워 내보냈다. 분무기를 진 나는 다리에 힘이 빠져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나는 휘청거리다 말고 논 가장자리 공터에 쓰러져 버렸다. 한 참 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땅거미가 밀려오고 있었다. 동편 산마루에 보름달이 떠올랐다. 쟁반 같은 보름달은 점봉의 얼굴이었다. 잠시 모습을 나타냈던 점봉은 이내 시커먼 먹장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점봉이 사라진 허공에는 어둠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나는 또다시 세상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호전돼가던 염세증세가 갑작스런 점봉의 출현으로 악화되어 도진 듯싶었다. 고통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점봉을 따라 저 세상으로 가자. 나는 등에 매고 있던 분무기에서 뜨물 같은 농약을 한 바가지 따라 훌쩍 마셔 버렸다.
그러나 왠지 내 인생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내 명줄은 고래심줄처럼 질긴 듯싶었다. 사방 벽이 하얗고 조잡한 의료기구들이 즐비한 병실에 나는 누워 있었다. 위장 세척을 끝낸 젊은 의사가 고무장갑을 벗다 말고 정신이 깨어난 내게 말했다.
“정신이 드십니까? 조금만 늦었더라면 큰 일 날뻔 했지 뭐요. 귀한 생명을 함부로 버리면 안 됩니다. 그렇게 죽을 각오라면 살아 못할 일이 없을 거요. 몸조리 잘하세요.”
의대를 나와 시골 보건소에서 군복무를 대신하는 앳된 의사는 총총히 병실을 빠져 나갔다. 의사가 나가고 나자 흰 까운을 걸친 간호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마무리 작업에 열심이었다. 그녀의 손놀림은 빠르고 뒤처리는 깔끔했다. 간호사는 점봉이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그녀를 본 순간 나는 저 세상으로 간 점봉이 환생했는가 싶었다.
간호사는 김선숙이라는 명패를 패용하고 있었다. 그녀는 의무 이상의 친절로 나를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녀는 내 누이동생의 학교 동기 동창이라 하였다. 누이동생은 이복(異腹)이었지만 심성이 착해 평소에도 내 병 수발을 도맡아 했고 계모의 포악으로부터 늘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팥쥐 어멈 같은 심성 사나운 여인에게서 저런 천사 같은 딸이 나왔다는 사실이 도통 믿어지지 않았다. 생물학에서 흔히 쓰는 돌연변이는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생겨난 말인 줄도 몰랐다. 나는 3일 만에 퇴원했다. 퇴원 후의 내 건강이 염려되는지 김선숙 간호사는 퇴근 때마다 우리 집에 들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녀는 그때마다 링거액 같은 영양제를 사들고 와 주사해주고 체온이며 혈압도 체크했다. 김선숙 간호사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나의 몸 상태는 호전되기 시작했다. 내 머리통을 짓누르고만 있던 우울증세가 봄눈 녹듯 스러지고 지극히 자폐적이고 염세로 일관되었던 내 사고는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개선되는 듯싶었다. 이 모든 것이 김선숙 간호사의 지극한 간호로 인한 결과일 거라고 나는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면 김선숙은 나를 환골탈태케 하여 새 사람으로 만든 일등 공신일 터였다.
"오빠! 선숙을 어떻게 생각 해?“
어느 날, 심신의 건강을 되찾은 내게 누이동생이 정색하며 물었다. 뜻밖의 질문에 나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한 번 사귀여 볼 테여?”
“애두, 참......”
“용기를 내봐요. 내가 다리를 한 번 놔 볼 테니...”
누이는 오빠를 위해 발 벗어 부치며 두 사람 사이를 맺어 주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결혼 이후의 내 앞길은 순풍에 돛 단 것처럼 순탄하기만 했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착실히 하여 마침내 합격, 고향에서 공직에 발을 들여 놓았고, 자식 또한 알맞게 1남 2녀를 두었다. 재직 중 큰 과오 없이 승진을 계속하여 지방 관서의 장으로 정년을 마쳤고 아내가 재테크를 잘하여 경제적으로도 안정돼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뭐 있겠는가. 사람들은 우리 부부를 가리켜 다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 점에 대해서 토를 달거나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번 금강산 여행을 주선한 큰 사위는 서울에 있는 대 기업에 근무 중이고, 작은 사위는 내과 전문의이며 하나 뿐인 아들은 사시에 합격, 연수원에 적을 둔 예비 법조인이다.
“현명한 아내를 얻고 자식 농사 잘 지은 걸 진심으로 축하하네.”
너댓 잔의 술잔 비운 매쇠가 부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이게 다 저 세상으로 먼저 간 점봉이 내게 베푼 음덕 때문이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다네.”
매쇠는 내 말이 선뜻 이해되는 않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멀뚱거리고만 있었다.
“내 장래를 염려하던 점봉이가 자신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게 해주려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간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일세.”
“....“
매쇠는 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아니면 참뜻도 모르면서 경박하게 맞장구치기 싫어서인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우울증에 걸린 내가 점봉을 뒤따라가려다가 왜 마음을 돌려 먹은 줄 아나?”
“........”
“날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는 김선숙이라는 여인을 처음 본 순간 나는 깜짝 놀랐었네. 마치 죽은 점봉이가 환생이라도 한 것 같아서 말이네.... 점봉을 다시 만났으니 이제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더란 말시.”
“묘한 인연이었구마... 자네 부인을 처음 본 순간 나도 그런 생각을 했지 뭔가.”
매쇠는 그제서야 내 말뜻을 이해하는지 고개를 주억거리고만 있었다.
“자! 그럼 점봉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저 푸른 파도에 술 한 잔 씩 따르세. 이곳이 내린천은 아니지만 그녀의 혼백이 머물고 있는 강원도 땅 아닌가.”
나와 매쇠는 막거리 한 통을 사들고 파도가 넘실거리는 부두가로 나갔다. 잔 가득 술을 부어 동해 푸른 물에 쏟아 붓자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날름거리는 긴 혀를 가진 거친 파도가 잽싸게 달려와 합수된 제주(祭酒)를 단숨에 마셔 버리는 것이었다. 철썩! 점봉의 화신인 듯, 거친 파도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나와 매쇠의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다가왔다가 물러가기를 되풀이하고만 있었다. (끝)
<작가의 말>
동일한 특정 지역을 테마로 한 연작소설을 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소재의 고갈과 내용의 중복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중복을 피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구성상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번이 4번 째 얘기인데 10번 째 얘기까지를 끝내 <속초행> 제목으로 단행본 한 권을 낼 계획이다. 항용 하는 말이지만 글을 쓸수록 신중해 진다. 연륜이 조금 쌓였다는 증거일 터이다. 물 불 모르고 덤벼들었던 패기만만하던 초심이 그립다.
신 동 규
전남 장흥 출생
1998년 월간 ‘신동아’ 1천만 원 고료 논픽션 당선
1999년 계간 ‘문예연구’ 신인상 중편소설 당선
2000년 제2회 ‘해양문학상‘ 소설부문 수상
2006년 제 12회 계간‘농민문학’ 작가상 수상
저서: 소설집 ‘운명에 관하여’ ‘흰 까마귀 산’
장편 다큐 ‘그리고 다시는 고향에 갈 수 없으리’
연작소설 ‘속초행’ 집필 중.
소속 문학단체: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농민문학회, 한국문예연구문학회.
광주광역시문인협회 등
연락 전화; 062-261-6768. 010-6808-6768.
주소;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 972-1 금호아파트 108동 105호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삼교
신동규 선생님. 인사 올립니다. 건강하십시오.
이삼교 선생님, 방장님, 반갑습니다. 졸작 읽으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선생님 고향도 장흥이군요. 저도 장흥입니다.^^ 제가 시력이 안좋아 프린트로 읽어요. 프린트해서 꼭 읽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