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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산막 가을도 근사하다. 촉촉하게 내리는 아침이슬이 영롱하게 보이도록 돕는 아침 가을햇살도 넉넉하다. 전기보일러 온수 순환펌프가 말썽을 부리더니 내부누수되어 브레카를 자꾸 떨군다. 엄동이 닥치기 전에 손을 봐야 하고 실내 회벽칠과 외부 테크 스테인칠도 해줘야 한다. 그리고 마루방과 침실 벽지도 새로 하려고 한다. 내친김에 오픈 된 마루방도 분합문을 달아 독립성을 줄 계획도 갖고 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사용을 못하면서 붙들고 있는 물건들도 전부 버려 내부를 단출한 여백을 중심에 두려는 계획으로 산막에 머물고 있었다. 황토몰탈을 구입하여 통나무 사이사이를 매김해 주어 시각적인 안정감도 찾으려는 구상도 하고 있는 중이다.
오랜 개인적인 숙제였던 해외여행과 관련된 업무도 어려운 장고 끝에 실행에 실마리도 찾아 함께 떠나는 도반들과 여러 차례 걸음 보조를 맞췄고 이젠 마지막 사전 걸음 여행도 남한산성을 축으로 완성된다. 그런 후 4일 떠났다가 8일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최소한도 12명 정도면 좋았을 것을 아쉽게도 6명이 떠나게 되어... 좀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를 넘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참 마음고생이 많았던 여행 기획이었고 실천 과정이었다. 두고두고 잊지 못할 시간이 되었다. 아무튼 남한산성 둘레길을 걷기로 한 30일, 산막에서 4시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실내청소를 완벽하게 끝낸 후 어제저녁 정리해 둔 짐을 차에 실어 놓았다. 그리고 모든 시설물을 재차 확인한 후 잠 가두고 실내로 돌아와 전기 스위치, 깨스 점검을 끝내며 옷을 챙겨 입자 동창에 여명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동안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비롯하여 여러 잡동사니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는데 가방에 넣어 차에 옮겨 놓으니 참 정갈하게 느껴졌다. 찻물을 내려 먹으려다 혈압약과 섞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중단하고 오히려 약 한 알을 털어놓고 생수 한 잔을 마신 후 산막을 나섰다. 기분 좋은 아침 운전, 차 창밖 풍경은 가을이 주도하고 있었다. 가을은 참 좋은 계절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쓸쓸하게 몰아붙이는 구석도 강한면이 있다. 그렇게 도착한 아파트 각진 모서리를 닮은 도시 안에 정주 공간 이 역시 각진 부분이 많다.
산막은 자유로운 공간이라 한다면 도시의 정주 공간은 제한적인 통제와 억압의 기운이 많은 곳이다. 도시는 도시에 기대어 살아야 한다면 산막은 자연과 동화하며 살면 되는 곳이다. 그 대신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할 부분이 많다. 도시는 협업적인 생존이라 한다면 산막은 자립갱생이나 마찬가지다. 참 많이 찾아갔던 남한산성, 그래도 가을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가을 그림자를 따라가는 그림을 그려 보았다. 모든 일은 다 그렇다. 시작이 있으면 과정이 시작을 붙들고 과정이 진행되어가다 보면 결말을 당연히 요구한다.
이를 바탕으로 가을 속을 걷는 길을 완성해 놓은 후 10시경 남한산성 성지 성당 문에 섰다. 오늘은 휴무일이라 굳건 닫힌 문을 본 후 등을 돌려
가을빛이 가득한 순교자 현양비 앞에 섰다. 그리고 박해를 받고 형장에서 망나니 칼 아래 쓰러져 시구문 밖에 버려진 순교자들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 덕운 토마스는 1790년 10월에 윤지충 바오로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바로 그 이듬해 윤지충 바오로는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한 토마스는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어느 날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성사의 은총을 받으려는 생각에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나려고 하였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00년 10월 한 토마스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현 경기도 광주 의왕리]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기도와 독서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에만 열중하였다. 그는 신자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 토마스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교회와 교우들의 소식이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양에 가는 중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한 토마스는 거적으로 덮여 있는 홍낙민 루카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비통한 마음으로 그 시신에 애도를 표한 다음 그의 아들 홍재영 프로다시오를 보고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였다. 홍 프로다시오는 그 뒤 다시 신앙을 되찾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1839년에 순교하였다. 한 토마스는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 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주었다. 결국 한 토마스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고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지만 결코 다른 사람을 밀고하지 않고 신앙을 굽히지도 않다가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1802년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그의 나이 50세였다.
“조선시대 군사적 요충지였던 남한산성은 천주교 박해 때마다 이곳으로 끌려온 300여 명의 신자가 순교한 치명 터다. 특히 신유박해 때 남한산성 동문 밖에서 참수당한 한 덕운 토마스 복자는 옹기장수로 생계를 이어가며 연령 회 봉사자로 활동하는 등 교회의 여러 가지 일을 도운 신자중에 신자셨다." 이 조각상을 친견하다 보면 미켈란젤로의 세기의 역작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껴안고 있는 피에타 상이 떠오른다. 서밖소문에서 처형당한 순교자를 안고 있는 모습을 통해 뭉클한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미켈란 젤로는 생전에 피에타상을 세번 만들었다 한다.
Pietà 는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의 시체를 무릎에 안고 슬퍼하는 광경을 표현한 작품이다.
대표적인 피에타상은 바티칸성당에 있는 피에타상 이다. 20대에 순수한 열정으로 신 과 인간의 관점을 고려하여 완벽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두번째 작품은 피렌체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반디니 피에타이다. 이 작품은 그의 나이 대략 70대에 만든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10여년 작업을 하다 중단을 해서 작품이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다.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 완성되지 못한 채 거친 정과 끌 자국이 남아 있다.
예수의 몸이 20대 작품과는 달리 세로구도로 서있고 고통스럽게 비틀려 있다. 성모상도 현실적인 크기로 과장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예수의 고통을 강조하려고 한 것 같다. 10여년 작업하다가 중단하고 맘에 안 들었는지 예수의 왼팔을 부셔버린다. 후대 제자들이 이어 붙였다는데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보인다. 세번째는 죽기 직전까지 작업했던 론 다니니 피에타이다. 밀라노에 있는 이 피에타 상은 좌상이 아닌 입상으로 88세 일기로 죽을 때까지 작업하다 중단된 역시 미완성의 작품입이다. 반디니의 피에타를 완성 못한 아쉬움으로 다시 만들기 시작한 것인데 거친 끌자국의 강렬함만 남긴 채 다시중단되고말었다..
기도를 마친 후 중앙 주차장 방향으로 몇 걸음 나가자 얼핏 벨린다 자매님이 보였다. 다가 가 양지바른 장의자에 앉아 산성역에서 내려 올라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은 릿다, 모니카 두 자매님을 기다렸다.
오늘 약속된 인원이 성원을 이루자 걸음 여행길을 나섰다. 한옥마을을 지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시기 군사들이 사용할 무기인 창검을 만들던 대장간이 모여 있던 대장간 마을과 노적가리를 닮은 노적봉을 옆으로 지나 송림 사이로 가을을 밟아 나갔다. 길이 편하고 계절도 편하게 다가왔다. 당분간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가야 하겠지만 이 또한 십여 일이면 다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다. 벌써 엄동의 그림자가 뒤 따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낙엽과 도토리가 두서없이 떨어지는 식탁의자에 앉아 잠시 쉬어 가기로 하였다. 홍차와, 커피 더불어 쑥 떡과 벨린다표 삶은 계란, 그리고 동작성당 과자 선물 보따리, 그리고 귤을 나눔 하며 가을 정서에 빠져들었다. 막간을 이용하여 준비해 온 여행 일정과 준비물에 대한 자료를 놓고 서로 공유의 시간을 갖았다. 충분한 휴식 후 다시 오름 길을 올라 성곽에 섰다. 위례 신도시가 가깝고 더 멀리 남산과 서울 도심이 시야에 들어섰다. 서문이 안고 있는 슬픈 역사, 인조는 버티다 아들과 함께 삼전도 청 태조에게 나가 항복의 의식을 치르기 위하여 서문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상상으로 잡혀 나의 마음을 모질게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역사를 익히 파악한 정조는 남한산성의 4대 성문의 이름을 전수 바꾼다. 트기 북문을 승전문으로 바꾼 이유는 병자호란 당시 이곳으로 나가 전투를 하다 몰살당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문은 오랜 시간 보수 끝에 완성되어 새롭게 단장 후 개방하였다. 줄곧 서문에서 걸어 북문 문루 위를 밟고 동장 대 방향으로 이어 나갔다. 계속 이어 나가다 행 동식 잔여물이 남아 있어 다시 나눔 하기 위하여 숲 속 빈터에 자리 잡고 있는 장의자에 몰 려 앉았다.
길을 가기 위하여 다시 일어섰다. 숲 길이 고즈넉하다 성곽 밖 너머로 미사리신도시가 손에 잡히고 그 너머로 예봉산이 천마산에서 길을 이어받은 것을 증명하듯 맥이 흐르고 있었었다. 광주산맥 줄기이기 때문이다.
화가들이 모여 앉아 가을을 그리고 있었다. 이곳에는 화가들과 음악 연주인들이 가을에 자주 찾아 드는 곳이다. 화가는 여류화가들이지만 음악인은 젊은 연주자 4명이 모여 바이올린, 첼로, 플롯, 클라리넷을 이용하여 가을정서가 가득한 선율을 가을 숲에 남기고 남겨두곤 한 곳이다. 오늘은 화가들을 만난 것이다. 대작을 만들라는 덕담을 남기고 조심스럽게 화가들 사이를 지나갔다.
그냥 스칠 수 없어 단풍 그늘에 서서 가을 환영하는 마음으로~~
절정이란 단어는 늘 벅차 오른다.
은행나무 노란 단풍과 붉은 단풍 나무의 북은 단풍잎과 조우는 가을 전성기로 이끄는 힘이 숨어 있다. 만족한 걸음 여행이었다.
덤으로 화백들의 가을 스케치도 함께 남겨 두었다. 꼭 가을 대작을 염원하며~~~~
억새풀 하나만으로도 한옥의 가을을 멋지게 표현된다. 어느 조경 설계자의 단순 소박한 경지가 사부님의 얼굴이 떠오르게 한다.
우리 가옥은 늘 배려를 근본으로 하는 가옥구조다. 주방도 외부와 바로 소통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어 누구에게 밥 한 끼 줄 수 있는 구조였으며 툇마루와 대청도 누구에게나 잠시 쉬어 갈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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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로서 찾은 숙소 같은 정취가 느껴져 오랜 시간 머물며 가을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본 시간이다.
낮 익은 연출이다.
인원 수 달라 달라지는 인정의 그림도 살펴보고
나름 자신의 내면을 외면으로 끌어내어 표현하기도 하면서 걸음 여행의 끝을 정리하고 있었다.
머무르다 라는 단어가 인상 깊다.
쉼은 일에 대한 반발이다.
시신이 버려진 시구문
수원교구에서는 남한산성 시구문 성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 흐르는 물처럼 낮은 자리를 애써 찾았던 사람들, 빛을 맞이하는 동쪽을 향해 평생걸었던 사람들이 끝내 이곳 남한산성의 동쪽 시구문을 지나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박해시기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천주교인 300여명이 시구문을 통해 이 계곡에 버려졌습니다. 버려진 시신은 오랫동안 방치되고 짐승에 위해 훼손되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1839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를 통해 순교하셨습니다.
- 남을 섬기는 낮은 자리를 찾고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 - 어두움 속을 걷지 말고 빛을 향해 나아갑시다.
우리 신앙인의 후손들에게 순교자들께서 주시는 기도 제목입니다.
이곳을 방문한 순례자들은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의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돌아보도록 합시다. 미움이 가득하고 슬픔이 많은 세상을 지나는 여정이지만 우리도 순교자들을 본받아 끝까지 사랑하겠 노라 다짐하며 천상 교회의 승리자를 필요한 도움을 청합시다.
암문 밖 공터 아래로 옛 길이 남아 있다.
모든 일정을 끝 낸 후 다시 걸어서 중앙 주차장으로 와 부근 손 두부 집을 방문하였으나 오늘은 휴무, 결국 그 아래 한식 집으로 찾아 가 정식을 시켜 나눔의 시간을 갖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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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베리노대장님 따듯함에 깊이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