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열린시조학회, 민족시사관학교의
무크지 창간호 <해거름 바다행전>이
2009년 2월, [책만드는집]에서 나왔습니다.
'책머리에'는 이규보, 맹자의 창작 과정에 대한 의견들을 적은 후
"...... 문학은 시대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다채로운 '풍경'을
형상화해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의 공동 관심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바라는 화두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시조 문맥 속에 '그 무엇'을 녹여내야 하는 것이다."
" ...... 시조에 대한 우리의 열정을 집약하여 1년에 한두 차례
무크(mook)지를 지속적으로 펴낼 계획이다. 그리하여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따뜻한 이데아(idea)를 추구하는
공동체가 될 것을 꿈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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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거름 바다 행전(行傳)
- 윤 금 초
훌쩍 키를 넘겨버린 늙은 억새 숲 사이로
생살을 드러낸 갯벌, 파도의 문신 새기고
오늘의 마지막 빛이 한 뼘 한 뼘 이울고 있다.
야트막한 물길 짚고 자맥질하는 검은머리물떼새
헹가래 치는 물이랑이, 먼 해조음 실어 나르고
해종일 통성기도 하듯 개어귀 조약돌 닦고 있네.
팍팍한 속 다 풀지 못한 푸른 귀의 바닷물
꿈결처럼 생시처럼 바스러지는 물보라에
보란 듯 젖은 무릎을 슬몃 감추는 저녁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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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지노귀*
- 임 채 성
한강대교 아치 아래 벗어둔 구두 한 켤레
표지 없는 임시 정류장 날 저무는 길녘에서
해지고 닳아진 굽이 장맛비에 젖고 있다
내려야 할 종착지는 반 너머 남았을 텐데
또 누가 시린 맨발로 그예 버스를 내렸을까
숨 가삐 내달려 온 길 저리 쉽게 끊고서
기대 쉴 어깨 한쪽 끝내 못 준 둔치의 버들
용굿 깃발 춤사위로 너울대는 가지 끝에
바람은 성주풀이하듯 시나위를 울리고
진양조로 흐르는 차들 열두 마당 길가름에
훗승의 시름까지 품어 안고 흐르는 강
지노귀 지노귀새남, 먹빛 하늘 번해온다
* 죽은 사람의 넋이 극락으로 가도록 베푸는 씻김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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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단의 쑥부쟁이
- 조 성 문
미싱 소리 들려오는
가리봉 오거리 골목
다락방 희미한 불빛
촘촘히 깁고 기우는
가는 목
연변의 여인
보푸라기 날린다
쑥부쟁이 야윈 대궁
실바람 하늘거리고
붕대 감은 집게손가락
허리춤 뒤로 감추는
이역 땅
강마른 낮달
전깃줄에 몸을 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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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잔고
- 최 오 균
문득 잠이 깬 새벽 장지 밖엔 낙숫물 소리
희붐히 갠 강여울에 젖은 발자취 얼비치고
내가 쓸 시간의 잔고, 물안개에 스며 있다
팔 걷고 신 들멘 채 별을 헤며 부린 억척
대물린 '보릿고개'쯤 옛말 사전 갈피에 묻고
응달진 이승의 오지(奧地) 불 밝힌다 했거늘
갈 길 아직 멀다 했는데 서천(西天)에 붉게 타는 놀
한낱 보람, 아쉬움도 뜸이 들면 저리 되는가
오뉴월 겻불 물리듯 후울훌 털고 갈 일이다
이제야 뒤돌아보면 바람이고 물인 것을
지긋이 말문 닫고 남모르게 곳간 문 열어
내가 쓸 시간의 잔고, 달무리에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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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장 터 찔레꽃
- 홍 준 경
가시덤불 면류관 쓴 돌무덤이 환합니다
십자가 첨탑 위로 멧새 떼 날려 보내고
힘겹게 칭얼거리는 조막손이 꽃잎입니다
오월 푸른 옹알이가 찔레꽃 물결입니다
예배당 가는 길목에, 너덜겅 애장 터에
생크림 케이크 같은 찔레꽃 물결입니다
활처럼 휜 낮달이 누군가 포대기에 안고
다독다독 어르면서 산마루를 넘습니다
그때 그 보채던 아이, 눈에 밟힌 가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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