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131.
횟(灰)골이 있는 못샘의 마을
무안읍 교촌4리 중사지 마을
교촌리는 무안 향교가 있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1910년 목포부 외읍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경신동 송림리 송암리 유산리 상사지리 상곡리 병동을 합하여 교촌리라 해서 다시 무안읍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경신동 서운내(송림) 향교 상사지 중사지 상봉 등 6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교촌4리에 포함된 중사지 마을은 병산(柄山)의 맥을 이어받은 비봉산 자락에 자리 잡았으며 바로 옆에 무안고등학교가, 잔등 너머에 무안 향교가 있다. 또한 마을 앞으로는 창포만과 현경면 양학리로 넘어가는 길이 나있다.
중사지란 마을 이름은 상사지란 이름과 함께 못샘[沙池]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을 앞에 수량이 많고 물맛이 좋기로 이름난 샘이 있는데 이 마을 주변의 토양이 사질토(沙質土)로 모래가 많고 물이 잘 흘러나와 모래사(沙) 자와 못지(池)자를 써서 沙池 또는 못샘이라 불렀다. 이 못샘의 중간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中沙池라 하고 못샘의 위쪽에 있다 해서 上沙池라 한다.
정확한 마을 형성 시기나 입향조는 알 수가 없다. 마을유래지에는 ‘여양 진씨가 처음 터를 닦았으나 후손이 없자 그 후 광산김씨와 김해김씨가 입향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라고 한다. 사실은 이천서씨가 먼저 들어오고 그 뒤에 광산김씨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현재 광산김씨 문중에서 14대조까지 제사를 모시고 있다하니 400여년보다 훨씬 전에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입향조로 추정되는 서씨는 당시 얼마나 세도가였든지 집을 둘러싸고 있는 방위를 인위적으로 만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에는 안진사라는 사람이 살기도 했는데 안진사는 인근 사람들에게 워낙 세도를 부려 마을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못살게 굴기도 하였다고 한다.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못샘은 병산과 비봉산 그리고 해남윤씨, 나주임씨 문중산등의 脈이 모여서 이루어진 샘으로 무안의 대표적인 샘 중에 하나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못샘의 물줄기가 너무 세어 한번 분출이 되면 안산을 넘어서기도 하고, 초당대 뒤의 동학골로 연결되면서 무지개를 형성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해서 물줄기를 그대로 놔두면 무안이 물바다가 되어 마을이 형성될 수 없다는 말이 전해져 주민들은 이 물의 피해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했다. 그 중에서 지나가는 高僧이 지팡이로 또는 나무 못을 만들어 물구멍을 막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주민들이 구리를 녹여서 물구멍에 부어 물줄기를 줄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렸을 때 못샘과 함께 시절을 보냈던 주민들은 ‘못샘의 물은 여름에는 발이 시릴 정도로 차가워 땀띠를 제거하기도 하고 겨울엔 뭉게뭉게 김이 어릴 정도로 따뜻한 물이 나왔다’고 한다. 또한 물이 나오는 입구에는 모래가 둥그렇게 포말을 그리면서 끊임없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여름이 되면 위에는 여자, 아래는 남자들이 목욕하는 주민들의 야외 목욕탕이 되기도 하였다. 물이 얼마나 잘 나왔든지 가물 때에는 주민들이 물을 길어다가 읍내에서 팔기도 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 물은 인근 목욕탕의 용수로 쓰이고 있다.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열나흗날에 당산나무에 제를 모신다. 도제 또는 당제라고도 부르는 당산제는 마을의 안녕과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제를 모실 사람은 반드시 못샘 물로 목욕재계를 해야 하며 祭日이 정해졌는데 마을에서 아이를 낳거나 상을 당한 경우에는 祭日을 변경하여 치른다. 제를 지내고 나서 소지(燒紙- 不淨을 없애고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하여 흰 종이를 태워 공중으로 올리는 일)를 하는데 그때 마을 주민들의 이름을 쓴 종이를 태우며 각자 1년의 행운을 기원하는데, 태운 종이 상태를 보고 그 집안의 길흉을 점치는 풍습이 남아 있다. 즉 종이가 잘 타서 하늘로 올라가면 그 집은 평안하고 종이가 꺼멓게 타고 올라가지 못하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 등이다.
못샘 옆에 수형이 잘 잡힌 할멈 당산나무가 있다. 몇 년 전까지는 영감 당산나무까지 있었으나 말라 죽은 후로는 한그루만 자라고 있다. 이 나무에는 새가 잘 깃들지 않는데 주민들은 나무가 영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마다 잎이 무성하게 자라는데 어쩌다가 북쪽에서만 먼저 잎이 자라는 때가 있다. 그러면 그때는 마을에 풍년이 깃든다고 한다. 그러나 남쪽에서 먼저 잎이 나면 그 해에는 흉년이 든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마을을 가로 지르고 있는 골짜기를 횟(灰)골이라 한다. 석회의 맥이 상사지 마을 앞 국실까지 연결되었는데 한때는 도자기 업자가 이 회를 이용하기 위하여 채취하기도 했으나 성분이 달라 포기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망운 현경 해제에서 무안읍으로 들어오는 길목이기 때문에 예전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동학 봉기 때는 주민 중 김진미란 사람이 활동할 정도로 동학군의 이동로가 되었고, 한국전쟁 때는 망운 사람들이 100여명이 넘게 피난 와서 마을에서 숨어있기도 한 피난처이자 피난길이기도 하였다.
마을 앞 잔등을 국실이라고 한다. 국실 너머에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그 주위에 공동묘지가 형성되어 있다. 상여가 공동묘지를 가려면 마을 앞을 지나 국실 잔등을 넘어가지 못하고 반드시 돌아서 가야한다고 한다.
상사지 마을과 경계가 되는 나주 임씨 문산이 끝나는 곳을 평산등이라 한다. 그곳은 蛇頭穴이어서 명당으로 불렸는데 마을 앞 들판에 있던 두꺼비 바위가 경지정리 하면서 묻혀지는 바람에 명당의 기운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때부터 나주 임씨들이 제를 지내려 찾아오는 횟수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갯등치가 있다. 이곳은 항상 물이 나오는 곳으로 앞에 잇는 해남 윤씨 산이 남성이고 이곳은 여성을 가리키는 곳이라고 한다. 치가리는 마을 앞들을 말하는데 칡넝쿨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뒷매, 대청동, 대청골, 단보랭이(안산의 모퉁이)이가 있다. 그 외에 마을을 둘러싸고 횟골, 관골, 쇠골, 창골, 봉골, 오얏골, 밤나무골 등이 있고 상봉, 중봉, 시루봉, 주치봉 등 12 봉이 있다.
39세대 8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첫댓글 중사지마을에서도 동학의 흔적을 찾을 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관련된 분의 성함이 김진민이 아닌지 확인부탁드립니다.